정비석(1911~1991) |
소설가. 1932년 일본의 니혼 대학 문화 중퇴. 1936년 단편 “졸곡제(卒哭祭)”, 이듬해 단편 “성황당(城隍堂)”이 각각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입선, 당선되면서 본격적 문단 활동 시작. 광복 전까지 1백 편 가량의 단편을 발표하며 남녀간의 애정을 주축으로 건강한 토속적 삶을 형상화함. 1941년 장편 “청춘의 윤리”에서 애정문 제를 세태와 결부시켜 관심을 끌었음. 1954년 <서울신문>에 “자유 부인”을 연재하면서 유교적 관습에 얽매여 있던 유부녀의 자유 분방한 성모랄 묘사로 장안에 화제를 뿌리며 대중 작가로서 확고히 뿌리를 내림. 작가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예는 끝까지 글을 쓰는 것이라 밝힌 정비석은 고희를 넘긴 80년대 이후에도 <여수(旅愁)>, <소설 손자병법>, <김삿갓 풍류기> 등 단행본으로 따지면 14권 분량이나 되는 작품을 일간지에 연재하며 전업(專業)작가의 한 전범을 보여 준다.
▶ 성황당(城隍堂)
1. 줄거리
가난 때문에 스물 여덟이 되도록 장가를 못 간 현보는 코흘리개 열네 살 먹은 순이를 4년 전에 아내로 맞이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다. 단오가 얼마 안 남은 장날에 현보는 숯을 내다 팔아 그 돈으로 순이에게 횐 고무신을 사다 준다. 순이는 좋아하며 그것이 다 성황님 은덕이라고 굳게 믿는다. 순이가 숯가마에 불을 때다가 더위를 참지 못하여 개울에서 목욕을 할 때,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던 산림 간수 김 주사가 엿본다. 그는 분홍 갑사 저고리를 사 주겠다며 순이를 유혹한다. 순이가 듣지 않자 폭력을 쓰지만 순이는 끝까지 반항한다. 그러자 김 주사는 현보의 도벌을 고발하여 그를 경찰서에 갇히게 한 후 다시 순이를 유혹한다. 이때 평소부터 순이를 좋아하던, 광산에서 일하는 칠성이가 찾아와 순이를 가운데 놓고 싸움을 벌이게 되고 칠성이는 김 주사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는 종적을 감춘다. 며칠 뒤, 순이가 산 속에서 쉬고 있을 때 칠성이가 나타나서, 현보는 앞으로 3년은 감옥살이를 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분홍 항라 적삼과 수박색 치마를 내놓자 순이는 마음이 흔들린다. 그날 저녁 순이는 칠성을 따라 나선다. 그러나 순이는 이내 마음이 변한다. 현보가 그립고, 산을 떠나서는 살수가 없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성황님이 벌을 내릴 것 같아서 무섭다. 순이는 뒤를 보겠노라고 속이고는 숲 속으로 들어가 칠성이가 준 치마, 저고리를 나뭇가지에 걸어 놓는다. 그리고는 현보가 사 준 횐 고무신만 손에 쥐고 집을 향해 달린다. 집에는 불이 켜져 있다. 순이는 부르짖는다. “성황님! 성황님!”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공간(천마령 부근의 산골)
◎ 경향 : 낭만적
◎ 성격 : 토속적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표현 : 예스럽고 투박한 평안도 사투리
◎ 구성
발단 : 현보와 순이가 천마령 부근에서 행복하게 산다.
전개 : 순이가 발가벗고 냇가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김 주사가 목격하고 추근댄다.
위기 : 김 주사의 고발로 현보가 끌려가고, 순이를 놓고 칠성과 김 주사가 결투한다.
절정 : 순이는 적삼과 치마로 유혹하는 칠성을 따라 산골을 떠난다.
결말 : 순이는 발길을 돌리고, 현보가 풀려난 것도 성황님의 덕이라 믿는다.
◎ 주제 : 자연과 합일(合一)된 인간의 삶
◎ 출전 : <조선일보>(1937)
3. 등장 인물
◎ 순이 : 현보의 아내로서 마을에 그녀를 탐내는 두 남자의 유혹에도 현보만을 바라보고 산다. 성황당을 정성을 다해 모시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믿는 인물
◎ 현보 : 순이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순진한 남편 현보. 김 주사의 고발로 경찰서에 갇히게 된다.
◎ 김 주사 : 순이를 탐내는 자로 마을의 산림 간수로 돈 많고 심술 많은 인물. 현보를 도벌죄로 고발하고 순이를 차지하려고 한다.
◎ 칠성 : 광산에서 일하는 젊은이. 순이를 탐내는 자로 체포당한 현보가 없는 사이에 순이에게 새 옷으로 유혹해서 순이와 함께 도망치려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4. 이해와 감상
1937년 <조선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품으로서,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순이를 중심으로 남녀간의 사랑과 자연애를 다루고 있는 단편 소설이다. 순박한 마음으로 성황당에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는 순이의 행동과 심리 변화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소설은 토속적 색채 속에 성적인 분위기를 녹여낸 수작(秀作)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다. 성황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순이의 순박함과 산골생활의 청량함이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고리가 되어 준다. “성황당”은 타인에 대한 믿음이 점차 사라지는 요즘 한 번쯤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성황당”은 두메 산골에서의 생활과 토속 신앙, 성적 분위기를 조화시켜 인간의 원시적인 애정 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에로스의 문제를 대담하게 끌어들임으로써 인간 애욕의 면모를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자연주의, 원시주의에 대한 작가의 애착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자연주의, 혹은 원시주의는 건강한 자연이 도시의 문명 세계보다 훨씬 선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 짧은 단편 소설에서 순이가 성황님께 비는 장면이 9번이나 나올 정도로 자신의 모든 운명을 토속적인 자연신에 의지하면서 살고, 부분 부분 묘사되는 내용에서 주인공들의 삶이 자연의 일부로 그려져 있으며, 소설의 결말에서도 주인공 순이는 첩첩산중의 그 터전으로 다시 되돌아오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정비석의 데뷔작으로 당시에 큰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1930년대에 유행처럼 번졌던, 암울한 현실과 지식인의 갈등과 고뇌를 그린 내용에서 벗어나 순박하고 토속적인 원초적 생명력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천마령 부근에서 숯 굽는 일을 하며 몸도 마음도 자연과 합일되어 있는 현보와 순이, 그리고 순이를 둘러싼 김 주사와 칠성이의 원색적 애정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냇가에서 목욕하는 순이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 승화되고 나무와 짐승, 꽃들은 인간과 함께 숨쉰다. 문명에 전혀 때묻지 않은 인물들이 벌이는 본능적 애정은 자연적 배경과 조화되어 자연스럽게 발산된다. 순이에게는 법도, 경찰서도 아무 의미가 없다. 그녀가 비록 흰 고무신과 항라 적삼에 마음이 끌리긴 하지만, 삶의 터전은 여전히 숯가마와 성황당이다. 시집 대대로 이어져 오는 성황당에 대한 신앙은 순이에게도 절대적 힘을 발휘한다. 고무신을 사 준 것도, 현보를 경찰서에서 내보내 준 것도, 성황님이 도운 것이라고 믿는다. 작가의 초기 작품에서 보이는 토속적인 세계와 그 속에서 사는 순박한 인간상이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 문명의 유혹을 거부하는 순이의 행동의 이면에는 인간과 일체가 되어 버린 자연이 작용한다. 순이는 이미 숲 속의 한 그루 나무, 하나의 바위가 되어 버린 것이다.
▶ 제신제(諸神祭)
1. 줄거리
‘나’는 신학교 3학년 졸업반 학생이었다. 졸업 시험을 치르기 위해 ‘나’는 애라를 남겨 놓고 서울에 먼저 왔다. 그 후, 졸업생만으로 편성된 ‘뉴 세대’의 멤버로 제주도 등지를 순회하게 되는데 그 동안 애라는 죽고 만다. 지금 ‘나’가 들고 있는 트렁크에는 신학교 졸업장이 들어 있다. 그걸 들고 ‘나’는 추억의 산장을 찾는다. ‘나’가 산장의 문을 두드리자 김 서방의 아내 순실이가 나왔다. 그녀는 애라가 아파서 괴로워할 때 밤을 새워 가면서 간호를 해 준 여인이다. ‘나’는 그녀에게 치하의 말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애라의 무덤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먹 자취도 선명한 묘비가 서 있었다. 李愛羅之墓. ‘나’는 그 앞에서 분향한 후 소리내어 울었다. ‘나’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는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신학도 였지만 절절한 안타까움과 애타는 마음은 무덤에 절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애라의 무덤에서 어둠이 짙게 깔릴 때까지 있다가 순실의 권유를 받고서야 다시 산장에 돌아와 애라의 동생 애경에게 편지를 썼다. ‘나’가 편지를 쓴 날 밤, 산장 주인인 김 서방은 출타한 채 돌아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 아침, ‘나’는 산장 뜰에 나와서 이미 시들어 버린 코스모스를 보았다. 그것은 아주 스산한 풍경이었다. 그걸 눈치채었는지 순실이는 낫으로 코스모스를 모두 베어 버린다. 그걸 지켜보는 ‘나’와 순실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서로가 아주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때 옆에서 기침 소리가 나며 김 서방이 나타났다. 그의 시선은 폐부를 뚫는 것처럼 날카롭다. 그런 대로 시간이 흘러 애라의 제사를 앞둔 저녁에, 과수원을 거닐다 순실에게서 아홉 시 기차로 애경이가 온다는 전보를 전해 받는다. 김 서방의 일 때문에 서로가 꺼리는 감정도 있지만 순실이와 같이 Y역에 나갔다. 애경은 애라의 죽음을 모두 잊은 듯 명랑하게 지껄인다. 그녀는 애라를 추모하며 올 겨울을 산장에서 지내겠다는 ‘나’의 생각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잠이 오질 않아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있는데, 김 서방 초막 앞에서 욕지거리와 함께 무엇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 때 애경이 ‘나’를 부른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하고 중얼거리며 '나'는 밖으로 뛰쳐나왔다. 애경은 애라의 제사도 무사히 마치고 아침해가 솟아오르면 함께 떠날 것을 재촉한다. 그 날 밤 김 서방은 순실이를 닥달질하며 야단을 친다.
2. 핵심 정리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배경 : 어느 산장(山莊)
◎ 주제 : 인간의 원초적 사랑과 방황
3. 등장 인물
◎ 나 : 신학교 졸업생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인물
4. 이해와 감상
<제신제>는 정비석의 대표적 작품으로서,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한 신학도의 방황을 그린 작품으로 1941년 <문장>지에 실린 단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자연과 토속미의 세계를 밀도 있게 형상화하고 있으며, 주제 의식 속에는 종교적 차원과 인간의 미덕이 함유되어 있다.
정을병(1934~) |
경남 남해 출생. 한국 신학 대학 중퇴. 1959년 {철조망}, {의지}를 <자유공론>에 발표하고 1962년 {반(反)모랄}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등단함. 그는 체험을 대단히 중시하여 대부분의 작품에서 문학의 허구적 측면보다는 실존이나 현실적 측면을 소설화하는, 고발 문학의 기수로 평가받는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개새끼들}, {유의촌}, {아테나이의 비명}, {말세론}, {받아들인다는 문제}, {환상을 만드는 여인} 등이 있다.
▶ 도피 여행(逃避 旅行)
1. 줄거리
대학의 희랍 철학 교수인 김시열은 수업을 하기 위해 강의실에 들어갔으나 강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남아 있던 한 학생으로부터 학생들의 집단 수업 거부로 인해 그렇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결국 그는 이에 대해 회의하다가 학교를 그만둔다. 한편, 가톨릭 신부인 변용완은 신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던 중, 그에게 고해하러 온 탕녀와의 육체 관계로 파계하여 거리의 악사로 전락한다. 그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 종교의 기능에 대한 회의로 파계한 뒤 맹목적인 신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무신론자로 행동한다. 이러한 자신의 변신을 통해 그는 자기 스스로 새로운 존재 가치를 모색해 낸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또, 종합병원 외과 과장인 윤길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상업주의에 철저하게 젖어 있는 새 원장과의 대립으로 고통을 받는다. 정치 권력을 등에 업고 새로 부임한 원장은 70%에 달하는 극빈 무료 환자를 받지 말게 하는 대신 값비싼 의료 기계를 들여다 놓고는 환자의 주머니를 털라고 강요한다. 윤길호는 그런 원장에게 불만을 느낀다. 어느 날, 윤길호는 공사장에서 다리를 다쳤으나 보증금이 없어서 일주일이나 방치한 다리를 잘라내야 하는 젊은 환자를 받게 되었다. 불행히도 그 환자는 시인인 친구 최세윤의 동생이었다. 시를 쓴답시고 집안을 돌보지 않는 세윤 때문에 공사장에 나가다가 다리를 다친 것이다. 최세윤은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인 국회의원 문(文)에게서 점심 초대를 받는다. 문(文)의 권력과 부(富)에 기가 죽은 세윤에게 문(文)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선전용 수필집이나 자서전을 대필해 줄 것을 부탁한다. 고등학교 때 수재(秀才)였고 대학 시절에도 문단의 촉망을 받았던 유망한 시인 최세윤은 문단의 구역질 나는 생리에 의욕을 상실하고, 직장마저 생리에 맞지 않아 가난을 면할 길이 없던 참에 동생마저 불구가 되어 마음이 약해져 있던 세윤에게 문 의원이 준 돈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래서 최세윤은 시(詩)를 버리기로 마음먹는다. 한편, 김시열은 제자인 박기덕과 희랍 시대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그러다가 그들은 박기덕의 아저씨 박 사장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 둘이서 대학을 세울 것이라는 거짓말을 한다. 두 사람은 '케네디 대학 설립 위원회'라는 유령 단체를 만들고 평화 봉사단원들과 회의를 주재한다. 김시열의 유창한 영어 실력과 학력에 평화 봉사단원들은 그들을 믿게 되고, 미국 신문에도 나게 된다. 그러자 주간지 기자들이 몰려들고 이에 놀란 박 사장은 스스로 대학을 만들기로 한다. 윤길호는 병원에서 같이 근무하던 여의사와 결혼하여 미국으로 떠난다. 공항에서 길호 부부를 전송하고 나오던 세윤은 신문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김시열이 변용완 신부를 차로 치고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2. 핵심 정리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배경 : 1970년대의 서울
◎ 주제 : 윤리 의식이 붕괴된 현대 사회의 병리적 현실에 대한 비판
3. 등장 인물
◎ 김시열 : 희랍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 현실에 대한 회의로 사직함.
◎ 변용완 : 천주교 신부. 종교에 회의를 느끼고 탕녀와 관계하여 파계한 후 거리의 악사가 됨.
◎ 최세윤 : 촉망받는 젊은 시인이었지만 시적 열의를 상실하고 현실과 결탁함.
◎ 윤길호 : 종합병원 외과 의사. 정치 권력을 등에 업은 원장과 갈등을 일으킴.
4. 이해와 감상
1971년에 발표된 “도피 여행”은 정을병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정을병 소설의 주제는 초기 작품에서는 관념적 사변적 성향이 짙었으나, 점차 현실적인 사회면 기사를 소재로 한 고발 문학의 성향을 보이게 된다. 그의 문체는 직설적이다. 이는 모랄의 붕괴와 타락된 사회 풍조를 표출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를 담기 위함이다. 또한 그의 작품이 드러내는 주제 의식은 붕괴되는 모랄의 수호를 위한 작가의 치열한 항변과 굳센 대결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회악에 대한 고발 문학 정신은 정을병의 후기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중요한 주제가 된다. 사회악을 보는 그의 시선은, ⑴ 정치인들의 반국가적인 이기주의에 대한 회의를 나타낸 “선민의 거리”를 비롯한 일련의 소설, ⑵ 현대 지식인, 학생 등 사회적 지도 계층이 범하고 있는 반(反)역사성을 비판한 “받아들인다는 문제”와 같은 소설, ⑶ 사회 일반의 부정 부패를 르포 식으로 다룬 “유인촌”과 같은 작품, ⑷ 산업 사회에서 새 세대들이 저지르고 있는 윤리 의식의 붕괴 현상을 그린 “피임 사회”와 같은 류의 작품 등에서 잘 나타난다.
정인택(1909~) |
서울 출생. 1930년 <매일신보>에 <나그네 두 사람>을 발표하여 등단. <매일신보>, <문장>지 기자 역임. 월북 작가. 초기 작품들은 이상(李箱)과 가까웠던 관계로 심리주의적 경향을 지녔으나, 그 후 그는 무기력한 지식인과 소시민의 삶의 세계를 그렸으며 친일적인 경향을 띤 작품을 쓰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우울증>, <시계>, <향수>, <촉루>, <청포도>, <착한 사람들>, <연련기(戀戀記)>, <여수(旅愁)>, <단장(短章)> 등이 있다.
▶ 미로(迷路)
1.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정인택의 <준동>, <감정의 정리>, <업고> 등과 함께 심리주의적 경향을 지닌, 그의 대표적인 단편 중의 하나이다. “― [어느 연대(年代)의 기록] 꿈은 나를 체포하려 한다. 현실은 나를 추방하려 한다.”라는 <미로>의 서두는 이상(李箱)의 작품 한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이는 작품 <미로>가 이상(李箱)과 같은 류의 심리학적 작품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작가의 표현대로 이 작품은 ‘나’와 일본 여인 유미에와의 관계를 심리적으로 파헤치고 있는 소설이다. 그리고 주인공 ‘나’는 이상(李箱)의 <날개>의 ‘나’와 같은 심리적 공간에 머무르면서 아내의 등에 얹혀 사는 무력한 지식인의 과잉된 내면 세계를 내보이고 있다. 이 소설의 문체적 특징으로는 심리주의적 소설이 흔히 그렇듯이 과잉된 의식이 문장에 넘쳐흐르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이러한 특징은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 ……기둥에 의지해서나마 겨우 기동하게 된 나를 바라보고 유미에는 마치 죽었던 사람이 소생한 듯이 희안하다고 손뼉을 치고 두 손을 잡아 이끌어 일으킨 후, 걸음마 ― 그리고 혼자서 손을 꼽아 보고 “두 달, 석 달, 넉 달, 어쩌면 꼭 넉 달 동안이야. 어지럽지 않우? 저것 봐, 넘어져요. 글쎄 넘어진다니깐….” 하며 유미에는 신기하다고 눈물까지 흘리며 혼자서 활개를 편 것 같건만 나는 어쩐지 조금도 마음이 가볍지 않고, 전과 같이 혼자서 눕고만 싶은 것을 그러나 유미에는 알아주지 못하고, 자기가 앞서서 옷을 갈아입은 후, 앞 뒤 창문을 활짝활짝 열어젖히며 억지로 내 등뒤로 돌아와서, 땀 배인 자리옷을 잡아 벗기고, “내 부축해 줄 테니 어서 일어나요. 어서, 응….” 그러다가 문득 유미에는 뼈만 남은 앙상한 내 가슴과 팔과 등을 바라보고, 새삼스러운 충동을 느낀 듯이, 원래도 말랐지만 어떻게 요렇게 살이 빠졌수? 아이, 참 무시무시해…. 가늘게 상을 찡그리며 유미에는 걷어 놓은 자리 위에 걸터앉은 내 무릎 사이에 엎드리어, 한 손으로 벌거벗은 내 등을 어루만지며, 잠시 동안 카구라자카로 놀러 나가자던 것도 잊은 듯이, 앓는 사람의 아내의 특이한 촉감으로 나를 애무하고, 자기를 달래고 하는 유미에의 얼굴을 받들어 쳐들며, “자, 그럼 나가 보지….” 그러면서 가만히 얼굴을 마주 대고 우리들은 소리 없이 웃어 보았다.……>>
이러한 줄거리의 일부를 담고 있는 문장에도 드러나듯이, 정인택의 <미로>는 지식인의 무기력과 피로한 일상 세계, 허무 의식 등에 사로잡힌 자의식을 담고 있다. 이는 생활력이 결여된 당대 지식인의 과잉된 자의식의 세계를 통해, 현실 속에서 좌절을 거듭하는 삶의 굴절된 내면의 세계를 깊이 있게 파헤치고 있는 셈이다.
▶ 우울증
1. 줄거리
주인공인 ‘나’는 10여 일 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나간 안해(아내) 생각을 하며, 지난 1년 동안 안해와의 썩어 문드러진 생활을 기억해 낸다. 다방을 경영한 지 한 달이 못 되어 안해가 ‘나’를 따라 올라오자 ‘나’는 전부터 의가 맞지 않던 늙은 어머니 그리고 누이와 아주 의를 끊다시피 하고 어두컴컴한 다방 속에서 안해와 둘이 쳐 박혀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안해가 돌연 자취를 감춰 버렸다. 나는 안해를 부정하게 생각하며 다방을 처분하지만 내심 자신의 처사가 부정한 안해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쓰디쓴 쾌감을 느낀다. ‘나’는 앞일을 생각하니 까마득해진다. 무엇을 해야 할 지 예산도 서지 않고 생각할 엄두도 나지 않는데, 생각마저 갈피를 잡기 힘들어 하루하루 잠으로 허송 세월을 한다. 잠을 자는 동안은 일그러진 사고에 사로잡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절친하게 지내는 박 군이 찾아와서는 ‘나’의 두문불출을 비아냥거린다. ‘나’는 박 군에게 다방 처분한 것에 대해 시원히 말 해 버린다. 박 군은 동경에 가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하면서 이제 마음의 방황일랑 그만큼 해 두고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충고하고는 이내 ‘나’의 동생 순희에 대한 얘길 꺼낸다. 평소 박 군은 순희를 좋아했는데, 순희가 다른 남자를 따라 떠났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두 사람은 말 없이 술잔을 기울이다가 원인 모를 불안을 느끼며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거닌다. 그러다가 박 군이 별안간 고함을 치며 순희를 사랑했었다는 고백과 함께 뛰어 달아나 버린다. ‘나’는 박 군의 심정을 헤아리며 평소 박 군이 자주 가는 바(bar)를 찾아간다. ‘나’는 테이블에 엎드린 채 잠이 든 박 군을 귀엽고 불쌍하게 생각하며 생활의 우울을 느끼다가 잠을 깨어 보니 ‘나’와 박 군은 어제 팔아치운 가겟방 한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박 군을 데리고 온 것이 ‘나’이고 불도 때지 않은 맨바닥에서 넋두리를 하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꾼 것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언뜻 방바닥의 온기를 느끼고는 누군가가 불을 때어 주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든다. ‘나’가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언제나 경직된 표정의 어머니가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매정한 태도로 누이동생 순희가 만주로 달아났음을 알려 주었다. 나는 묘한 갈등을 느끼며 문득 육친에 대한 애정을 느끼고 콧날이 시큰해진다. 그러나 어머니의 무정한 거절에 그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아뜩함을 느낀다. 어머니가 가고 난 후, ‘나’는 갑자기 무서움을 느끼면서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박 군을 무작정 흔들어 깨웠다.
2. 핵심 정리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배경 : 어둡고 암울한 시대
◎ 주제 : 한 인간(소시민)의 무기력한 생활을 통해 본, 지식인의 방황과 정신적 무력함.
3. 등장 인물
◎ 나 : 아내를 만난 후 다방을 경영하면서 노모, 누이와 의(義)를 끊다시피 지냄. 아내가 집을 나가자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세상과 격리된 채 부정한 아내를 떠올리며 모든 의욕을 잃은 채로 지내는 무기력한 인물
4. 이해와 감상
정인택은 <촉루>를 발표한 이래, 40여 편의 소설을 쓸 정도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으나 그가 월북 작가이고 친일 작가라는 이유로 세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다. 정인택의 작품 세계는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그의 초기 작품들에는 대부분 지식인의 무기력과 피로함, 그리고 소시민 생활을 소재로 하여 삶의 무력함과 의식 과잉이 그려져 있다. <우울증>이 바로 이런 특징을 고스란히 지닌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초기에 이어 후기 작품들은 대개 일종의 신변 이야기들과 일상화된 애정 세계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 뒤, 정인택은 일제 식민지 정책을 문학에 반영한 친일 문학의 성격을 띤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정인택의 문학 작품들은 당대의 우리 지식인들이 가졌던 역사 의식 혹은 민족 의식의 수준과 성격의 한계를 잘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들이 자기의 신념을 보존하지 못하고 크게는 민족 전체와 보이지 않는 독립이라는 묵시적 약속을 배반할 가능성을 내포한 것을 보여 준 예라 할 수 있다.
정인택의 소설은 한국 문학이 지녀야 할 주체적 조건을 상실한 것과 일본의 모든 문화 역사 등에 대해 호의적으로 해석하고 표현한 작품이 대부분을 이룬다. 또, 그의 작품 속에는 무산자의 계급 투쟁 논리나 이데올로기의 경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정한숙(1922~1997) |
평북 영변 출생. 1950년 고려대학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57~1988년 고려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82년 고려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 이후 고려대 명예교수로 활동하였으며, 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예술원 회장, 문예진흥원장 등을 지내면서 학계와 예술행정에 두루 업적을 남겼다.
1948년 《예술조선》지에 단편 《흉가》가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한 이래 《배신(背信)》 《광녀(狂女)》 《내일에의 번민》 《준령(峻嶺)》 《닭》 《그늘진 계곡》 《바위》 《눈 내린 날》 등 다양한 소재를 도입한 단편소설을 발표하였으며, 특히 《전황당인보기(田黃堂印譜記)》 《고가》 《금당벽화》 등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주옥 같은 작품은 현대문학사에 한 줄기를 차지하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체적인 작품경향은 작품의 주제나 구성보다 다양한 언어구사에 치중한 편이다. 내성문학상, 3․1문화상, 예술원상, 대한민국예술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 고가(古家)
1. 줄거리
주인공 필재는 세칭 김씨 마을이라고 전해지는 마을의 종가집 종손이다. 5대조 때부터 자리를 잡았다는 장동 김씨 집안이지만 세도가 약해져 낙향한 상태였다. 필재는 일찍 아버지를 여읜 탓에 할아버지로부터 가문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그 영향 하에서 자란다. 필재의 집안은 고집과 양반의 권위에 싸여 있는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와 대립적 위치에 있는 작은 아버지, 그리고 이 둘을 둘러싸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소실 작은 할머니(노비 출신), 필재의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 작은 할머니가 낳은 어린 태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필재의 집을 둘러싸고 있는 집안들 틈에서 어느 날 숙부에 의해 필재의 상투머리가 잘리면서부터 서서히 집안에 붕괴의 조짐이 일어난다. 일제 침략기의 상황 속에서도 필재의 집안 사람들은 상투머리와 종가집의 위신을 고집해 왔다. 어른들 사이의 미묘한 일들이 무엇인지 모르는 가운데 할아버지와 어머니, 숙모, 할머니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필재는 집안의 종손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점차 깨닫기 시작한다. 작은 아버지의 사망 소식과 잇따른 작은 어머니의 죽음, 화병으로 인한 할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다음, 필재는 자신이 종손이라는 위치에 대해서 더욱 부담을 느끼며 대학까지 공부를 마친다. 일본이 패망하고 독립이 되자, 근로 동원에 나갔던 태식이 돌아오고 필재는 태식과 잘 지내려고 노력하지만 첩의 자식이라는 천대 속에 자라면서 한을 품고 살아온 태식은 이미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상태였다.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이 자기 대에 이르러 영락해 버리는 듯한 슬픔을 느끼면서 필재는 고향에 내려온 이틀 후 6․25를 맞는다. 필재와 종의 딸인 길녀는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고 신분상의 차이는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길녀가 태식과 함께 공산당 노릇을 하다가 필재에게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목을 매어 자살하자, 필재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의욕마저 상실됨을 느끼다가 어머니가 죽은 후 고향을 떠난다. 그 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필재는 이제는 모든 것을 정리하려 한다. 그러자 집안 어른들은 필재에게 종손임을 인지시키며 오히려 출마를 권유한다. 필재는 종파를 나누고 문중을 따지는 것이 이 모든 비극의 원천이라 생각하게 된다. 이 나라의 비극 또한 종가를 중심으로 벌어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을 가장 뼈저리게 체험하고 느낀 것이 바로 자신이고, 그 희생자가 태식이와 길녀인 것만 같았다. 문중 어른들을 향해 모든 것을 처분할 의사를 비치고 나오는 필재의 눈에 조부의 얼굴 같은 고가(古家)의 그림자가 별빛 아래 어렴풋이 보였다.
2. 핵심 정리
◎ 배경 : 6․25 전쟁을 전후한 사회 현실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주제 : (김씨 일가의 삶을 통한) 민족사의 비극과 수난
3. 등장 인물
◎ 필재 : 종가집 종손. 봉건적 환경 속에서 절제로 살아온 인물.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길녀의 죽음까지 지켜보는 동안 종가와 종손이라는 틀을 벗어버리고자 몸부림치는, 근대사의 전환기적 인물
4. 이해와 감상
정한숙은 어느 한 주제에 집착하지 않고 여러 방면에 관심을 기울여 작품을 쓰는 작가다. 그래서 흔히 다양한 수법의 작가로 일컬어진다. 그는 <고가>를 발표하면서 신진 작가 시절을 거치지 않고 중견 작가로 곧장 올라서는 작가적 기반을 얻게 된다. 그의 작품 세계는 역사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을 현대적인 시각으로써 그 전통적 의미를 되살리거나 민족사의 비극과 수난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소설 <고가>는 그의 <끊어진 다리>와 함께 민족사의 비극과 수난을 다룬 작품이다.
▶ 금당벽화(金堂壁畵)
1. 줄거리
담징은 북쪽 오랑캐의 끊임없는 침범으로 시달림을 받는 조국 고구려 땅에서는 자신의 예술적 포부를 실현할 수 없어 나라를 떠났다. 그는 종교적 보시라는 명목으로 백제와 신라를 거쳐 일본으로 왔지만, 위기에 처한 조국을 버리고 떠나온 것에 대한 자책감에 시달린다. 호류사에 기거하며 주지 스님에게 벽화를 그리기로 약속한 지도 7, 8개월이 지났지만 조국의 환영(幻影)이 그를 괴롭힌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왜승(倭僧)들은 그를 크게 비방한다. 오늘도 화필을 잡지 못한 채 하루 종일 바위에 앉아 조국의 현실을 걱정한다. 밤하늘의 유성이 운명이 다한 조국의 모습인 듯하여 불안해한다. 화공을 가장한 불량배라고 왜승들에게 맞아 피를 흘리는 꿈을 꾼다. 번민(煩悶)에 찬 담징은 염주를 들고 대웅전(금당)을 찾는다. 불을 밝히고 마음을 가다듬어 합장을 했지만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가 없다. 몰아치는 바람에 법당 불이 꺼진다. 마치 풍전등화와도 같은 조국의 현실에 대한 암시인 듯하여 그의 고뇌는 극에 달한다. 조국에 도움이 못되면서 또 자신의 포부(그림의 완성)도 펼치지 못한 자책감. 그는 법당을 나서다가 주지 스님과 마주친다. 주지는 고구려의 승전보를 알려준다. 담징은 복받쳐 오르는 희열과 함께, 비로소 자비로운 불심을 느낄 수 있었다. 목욕 재계하고 화필을 잡았다. 그의 손은 무학(舞鶴)같이 벽 앞에 나는가 하면 용의 초리같이 벽면을 스쳤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미간에 일점(一點)을 찍었다. 벽면에는 저녁놀이 물들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은 구현된 지상 열반의 세계에 도취하여 합장한 채 꿇어 엎드린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서기 612년) / 공간(일본 나라현의 법륭사)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표현 : 서사적 묘사, 연상 수법을 주로 사용
◎ 구성
발단 - 조국을 떠나 일본에 온 담징의 번뇌(煩惱)
전개 - 벽화 작업에 대한 약속을 못 지키는 고민과 조국을 걱정하는 조국애에 대한 갈등
위기 - 왜승(倭僧)들의 비방과 계속되는 악몽(惡夢)
절정 - 을지문덕의 승전(勝戰) 소식. 비로소 온몸으로 넘쳐 나는 불심(佛心)
결말 - 금당 벽화의 완성과 갈등의 해소. 모든 승려들의 합장 배례(合掌拜禮)
◎ 제재 : 금당 벽화
◎ 주제 : 조국애와 불심(佛心)의 예술적 승화(昇華)
◎ 출전 : <사상계>(1955)
3. 등장 인물
◎ 담징 : 고구려의 화가이며 승려. 예술적 포부로 조국을 떠나 일본에 거주하지만 조국에 대한 번민으로 화필을 잡지 못함. 을지문덕의 승전보를 전해 듣고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됨.
◎ 주지 : 담징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줌. 고구려의 승전보를 담징에게 알려줌.
4. 이해와 감상
1955년 7월 <사상계>에 발표된 정한숙(鄭漢淑)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고구려의 담징이 금당벽화를 그리면서 느끼는 번민과 갈등을 묘사하고 있다. 고구려와 왜가 전쟁을 하던 시기이다. 담징은 승속(僧俗)의 세계를 오고가는 종교예술가요, 고구려의 아들이다. 담징은 승려로서 벽화를 그려야 하는 사명감과 위기에 처한 조국을 훌쩍 떠나온 데서 느끼는 죄책감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벽화를 그리지 못하고 늘 주지 스님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마지막에 담징은 욕망의 갈등을 물리치고 종교적 예술혼인 금당벽화를 완성한다. 이 작품은 담징의 번민과 갈등이라는 내적 세계를 해설자적인 입장에서 서술하여 사바 세계에 대한 담징의 욕망과 종교적 예술혼의 표현이라는 미묘한 관계를 훌륭하게 표현한 정한숙의 대표 작품이다. 진정한 예술혼은 모든 번뇌를 끊은 무심한 마음에서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작가의 정신 세계를 담징을 통해 적절히 표현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아울러 담징은 승려이지만 세상과 절연한 존재가 아니며, 예술가이지만 세속적 가치에 냉소와 멸시를 던지는 인간이 아니다. 그의 가슴이 뜨거운 만큼 조국애가 강하고 그의 예술적 포부가 집요한 만큼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강한 인물로 형상화된다. 이는 바로 현실이 필요로 하는 한국적 인간상이라 할 수 있다.
▶ 금어(金魚)
1. 줄거리
해방 다음해, 삼팔선 이북 땅엔 소련군이 진주한다. 식구들은 정희를 약혼자와 먼저 월남하게 한다. 약혼자 김동성은 국방 경비대에 입대하여 송악산 전투에서 전사한다. 약혼자의 유해조차 찾지 못한 그녀는 수덕사의 김일엽 스님을 찾는다. 1년 간 수행 후 스님으로부터 아심이란 법명을 받고 정식 비구니가 되어 20년의 세월이 흐른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한 여대생과 만나게 된다. 불화와 불상을 연구하는 대학원생인 그녀와 함께 기거하면서 공주 박물관에 안치된 삼존 천불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1300년 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패한다. 석공 일을 하던 16세의 청년 임실도 군문으로 뛰어들어 항쟁의 대열에서 3년의 세월을 보낸다. 마지막 남은 항쟁의 거점인 임존성이 포위되자, 여기를 탈출하다가 임실은 크게 부상을 입고 정신을 잃는다. 스님에 의해 구조된 임실은 절에서 생활하게 되나 불사에는 관심이 없다. 어느 여름날, 냇물에서 몸을 씻다가 검회색빛 돌을 하나 발견한다. 그 돌에서 문뜩 자신의 과거를 보게 된다. 3년 동안 자신이 모시고 다녔던 흑치상지 장군등 여러 사람의 얼굴이 비쳐 나오는 것이다. 임실은 자신도 모르게 그 돌을 향해 합장 배례한다. 그리고는 그 돌에 삼존불을 새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1년 동안 손 끝에 굳은 못이 박히도록 작업에 정진한 결과 삼존 천불상을 완성한다. 그 사이에 마음속에 쌓였던 망국의 울분과 고민도 풀려 간다. 임실은 불상 앞에 합장하고 머리를 깎는다. 삼존 천불상은 이렇게 제작되어 오늘날 공주 박물관에 보존되었다. 이 불상 앞에서 아심 스님은 전율 이상의 것을 느낀다. 황홀한 감격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박물관에서 돌아온 아심은 붓을 들고 부처님을 그리기 시작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문체 : 우유체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구성 : 액자식 구성
도입부 - 여대생으로부터 불상의 내력을 들은 아심 스님은 공주 박물관에 소장된 삼존 천불상을 보고 무한한 법열을 느낀다.
내부 이야기 -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 석공 임실은 구국 항쟁의 대열에 참가해 싸운다. 부상당한 임실을 스님이 구해 준다. 그는 삼존 천불상을 제작한다.
결말부 - 삼존 천불상을 본 지 삼 년이 지났다. 아심 스님은 필생의 대작을 그린다.
◎ 제재 : 삼존 천불상의 제작과 불화의 완성
◎ 주제 : 현실적 삶이 주는 고통과 번민의 종교적 승화
◎ 출전 : <지성>(1972)
3. 등장 인물
◎ 임실 : 미천한 신분의 백제 석공. 신라 관창에 영향을 받아 쓰러진 백제를 구하고자 군문에 뛰어든다. 마지막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은 것을 스님이 구해 준다. 삼존 천불상을 완성하고 불법에 귀의한다.
◎ 아심 : 본명은 정희. 해방 다음해 약혼자와 함께 월남했으나 약혼자는 전사. 수덕사에 입문하여 일엽 스님으로부터 아심(芽心)이라는 법명을 받음. 탱화의 대가가 됨.
◎ 여대생 : 불화와 불상을 연구하는 여대학원생
4. 이해와 감상
‘금어(金魚)’는 불화(佛畵)나 만다라를 그리는 스님을 뜻한다. 백제 시대의 아픈 삶의 자취가 해방 다음해 한국 백성 중의 한 남녀의 삶 속에 와서 평형을 이루면서 예술적 전통의 맥락을 잇는다는 내용의 액자 소설이다. 외부 이야기는 아심 스님의 현재 이야기이고, 내부 이야기는 1300년 전 백제 멸망을 전후한 임실이라는 청년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정한숙의 소설에서 파란 만장한 이야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깊고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정적미(靜寂美)를 기대할 수는 있다. 정한숙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격동의 현실이 아니라, 조용히 침잠하여 평정에 이른 고풍스런 멋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이러한 작품 세계를 평론가 정현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한숙을 비롯한, 대학 교단에도 서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몇몇 작가들의 작품이 지닌 일반적인 특성 중 중요한 몫에 대해서 나는 ‘치우침으로부터의 몸사림’이라는 말로 요약하려 한다. 어떤 사건에 개입된 인물들이 행동이나 생각에다 부여하는 작가의 안목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잘못되면 치기(稚氣)로 흐르기 십상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작품 전체에 불어넣는 활력일 수도 있는 뜨거운 열정의 등밀이로 흐르는 것을 억제하면서 그 뒤의 결과까지 긴 안목으로 보려 하는 노숙(老熟)한 관찰법이 이런 지식 체계를 지닌 작가들의 작품 주제를 지배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게 나의 생각이다. 이런 특성은 까딱하면 작품으로서 치명적인 흠일 수 있다. 재미나 관심에의 유도라는 점에서 볼 때 달관한 듯한 어른들의 이야기는 지루해서 읽어 내기 힘들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러한 어른의 소설의 달관한 듯한 이야기 스타일 속에서 한국 소설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 작품은 철저한 이중 고리로 짜여져 있다. 과거의 ‘임실’과 현재의 ‘아심’의 득도(得道) 과정이 시간대와 장소만 다를 뿐 동일한 구성 방식으로 되어 있다. 불법(佛法)에서 말하는 윤회(輪廻)의 원용(援用)인지도 모를 일이다. 두 사람에게는 3년의 수행 과정(‘임실’에게는 남자로서 조국을 위한 투쟁이, ‘아심’에게는 여자로서 고뇌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일)이 필요했으며, 1년의 말미를 거쳐 이들은 모두 승려가 된다.
▶ 이여도
1. 줄거리
나의 추억은 불과 삼사십 호 정도의 마을 뒤에 있는 보리밭과 그 보리밭을 지나 올라가는 오솔길, 그리고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에 잔잔하게 어려 있었다. 바다가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듯이 내 가슴 속에 잔잔하게 넘쳐흐르는 것도 바다뿐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추억은 바다 속에 그대로 살아 남아 있다. 유년 시절, 순복이와 상운, 그리고 나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전해 듣던 ‘이여도’를 찾아가기로 했다. 노를 저어 가다가 바람에 휘말려 그만 표류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이여도’를 찾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와 같은 반이었고 동갑내기였지만 나보다 조숙해 보였던 순복이는 “이여도가 바다에 있다고 전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열기를 띤 목소리로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면?”하고 내가 그녀의 빛나는 시선을 피하며 묻자, 그녀는 “바로 여기가 이여도가 아닐까요?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디딤 바위가 서 있는 언덕 말이예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난 후 나는 ‘이여도’에 얽힌 전설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그것은 ‘이여도’란 이상적인 섬은 마을 사람들의 꿈속이나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여도’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디딤 바위의 언덕이라는 사실을, 우리 마을과 우리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이여도’를 찾던 시절의 내 나이와 같은 나이의 길남이가 나에게 물었다.
“아저씨, 이여도가 어디 있지요?” “이여도는 저 수평선 끝에 있단다.” “아저씨, 오늘 이여도란 섬에 가 봐요.”
“못 간다, 오늘은. 길남이가 어서 자라지 않으면 못 가.” 나는 팔뚝에 힘을 주며 다시 노를 당겼다.
2. 이해와 감상
<이여도>는 1960년에 발표된 정한숙의 작품으로서, 제목 ‘이여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이상향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있다는 주제 의식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이여도’란,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섬이지만 제주도 어부들의 마음 속으로 그리는 이상적인 섬이다. 즉, 어부들의 마음 속에 심층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유토피아를 의미한다. 이러한 ‘이여도’에 관한 전설적인 소재는 이청준의 <이여도>에서도 다루어진 바 있다. <이여도>는 제주도 근처를 배경으로 하면서 주인공인 ‘나’의 회상과 추억을 그려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작품이다. 이여도를 지키는 외로운 등대지기인 내가 노를 저으면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또,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바다’는 주인공 ‘나’의 삶과 어부들의 운명적 삶의 터전을 상징한다. 제주도 어부들이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섬에 얽힌 이야기를 전아한 숨결이 느껴지게 다듬은 <이여도>를 통해서 정한숙은 인간의 숙명적인 삶의 세계, 혹은 과거와 추억 속에 잠겨 있는 인물을 통해서 전통적인 삶의 정한을 깊이 있게 탐구하고 있다. 이 같이 정한숙의 작품 세계는 전통적인 삶의 세계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 한 특징이다. 그는 어느 한 편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소재와 그에 합당한 필치를 사용하여 우리의 현실 속에서 사라져 가는 전통미에 대한 그의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 속에는 고유의 삶의 숨결을 지닌 소박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자신들의 삶의 숨결을 통하여 고전적인 삶의 세계에 대한 현대적 의미를 깨닫게 해 준다. 그리고 정한숙의 문체는 이러한 주제 의식을 뒷받침하는 고아한 흐름을 지니고 있다. 그의 문장 속에는 서정적인 호흡을 느낄 수 있다. <금당 벽화>, <황진이>, <처용랑> 등의 역사적 소재를 다룬 소설에서부터 <묘안 묘심(猫眼猫心)>, <닭>, <닭장 관리> 등의 현대적 삶과 현실을 다룬 소설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러한 문학적 특징은 도처에 드러나고 있다. 특히, <전황당 인보기>, <백자 도공 최술> 등에서는 잊혀져 가는 전통적 삶의 감각을 심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 전황당 인보기(田黃堂 印譜記)
1. 줄거리
전각가(篆刻家) 수하인은 오랜 친구였던 석운이 높은 관직에 오르자 옛 정표로서 귀한 전황석을 얻어 전각자의 솜씨를 발휘하여 고졸(古拙)하고 품위 있는 인장을 새겨 선사한다. 그러나 돌도 전각도 이해하지 못하는 석운과 석운의 처는 이 귀한 도장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무시한다. 석운은 그에게 자주 출입하는 오준이라는 사람에게 수하인의 도장을 준다. 그것을 수하인의 제자에게로 가져가 속된 도장을 새겨 달라고 한다. 그 제자는 수하인의 고귀한 작품임을 알아보고 그것을 수하인에게 다시 전해 준다. 수하인은 그의 정성이 무시당한 것을 알았지만, 시속의 흐름이 이미 그의 고전적인 멋과 품을 알아주지 못함을 알고 체념에 잠긴다. 마지막에 이르러 수하인은 그를 이해하며 같이 사는 산홍과 밤늦게까지 평생을 새겨온 도장을 꺼내어 인보(印譜)를 만든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한국 전쟁 직후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문체 : 전아(典雅)한 문체
◎ 성격 : 세태 비판적
◎ 주제 : 세태의 변화 속에서도 변함이 없는 가치와 옛것에 대한 그리움.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
◎ 출전 : <한국일보>(1955)
3. 등장 인물
주인공 수하인․강명진은 옛것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정신적인 것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세속의 어떤 때도 묻어 있지 않은 인물이다. 석운은 한때 수하인의 세계에 공감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수하인의 정신 세계를 그다지 높게 여기지 않고 단지 한 때 친한 친구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오준은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경박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현실적 이익에만 눈이 어두운 인물이다. 여기서 이러한 인물들은 옛것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는 인간사의 여러 유형을 대표한다. 작가는 그 중에서 수하인을 가장 높게 평가하고 있다.
4. 이해와 감상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정한숙의 문학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 전각가의 생애와 전각의 격조를 전하는 이야기이다. 잊혀져 가는 전통 예술의 고아함을 일깨워 주며, 한편 세속인들이 그러한 고전적 미를 상업적 감각으로써 몰각하는 현상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사라져 가는 우정과 전통에 대한 애틋한 향수를 그리고 있는데, 작가의 문체상의 특징인 전아함과 잘 어우러져 있다는 작품이기도 하다. 물질적인 가치와 정신적인 가치를 놓고 볼 때, 사람들은 흔히 정신적 가치가 훨씬 고고하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대부분 사람들이 물질적 가치 쪽으로 쉽게 기울어진다. 그것은 심지어 예술 작품을 평가할 때에나 사람을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다. 소설가 정한숙은 이 작품을 통해 현실의 이익을 좇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과 정신적 가치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정신적 가치를 대변하는 주인공 수하인은 사라져 가는 옛것, 도장 만드는 일에 온힘을 기울이는 사람이다. 다음 우미영(한양대 강사)님의 글을 읽어 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로 한다.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지은 김시습(金時習, 1453~1493)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하여 방랑의 길을 떠났다. 평생을 떠돌다 말년에 경주 금오산에 은거했던 그는 <금오신화>를 지어 석함(石函)에 감추면서 ‘후세에 반드시 내 마음을 알아 줄 이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금오신화>에 전하는 다섯 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세상에서 소외된 고독한 지식인들인데, 이들은 사실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다. 그리고 김시습 자신의 말대로, 그가 죽은 지 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금오신화>를 읽으며 그의 마음을 헤아린다. <금오신화>는 우리들과 만나게 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하겠다. 참다운 친구 사이를 말하는 고사 성어로 ‘백아 절현(伯雅絶絃)’이 있다. 이 고사의 주인공 백아(白雅)는 거문고의 명수였고, 종자기(鐘子期)는 백아의 연주를 제대로 이해하는 감식가(鑑識家)로 둘은 절친한 사이였다. 백아가 산을 생각하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좋구나, 우뚝한 것이 태산과도 같구나!’라 했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좋도다, 일렁이는 것이 강물과도 같도다!’라고 받았다. 그러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를 부수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 이상 이 세상에는 자기의 연주를 알아 줄 이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종자기가 없다면, 백아의 연주는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술은 진정한 알아줌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예술에만 국한되지 않고, 나아가 모든 존재에 적용되는 명제이다. 관객 없는 무대는 얼마나 공허하고, 관중 없는 축구장은 또 얼마나 쓸쓸한가? 지기(知己) 없는 존재는 얼마나 외로운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김춘수(金春洙, 1922~ )의 시구도 결국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정한숙의 “전황당 인보기”는 이와 관련하여 도장 하나를 통해 예술, 나아가 인간의 존재와 완성에 대한 보편적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석운과 수하인은 함께 야인(野人) 시절을 보내면서 마음을 나눈 다정한 친구 사이다. 석운의 벼슬살이를 축하하기 위해 수하인은 인장 한 방울 정성 들여 파서 친구에게 보낸다. 인장 한 방에 온갖 마음을 다 담으려는 듯한 수하인, 그렇게 만들어진 인장을 별 것 아닌 듯 친구 오준에게 선뜻 내 주어 버리는 석운, 둘의 태도는 작품의 주된 축을 이루는 대립적인 두 세계를 뜻한다. 그 하나는 수하인의 세계이다. 도장 파는 일로 표상된 그것은 ‘시속(時俗)에 어울리지 않는, 더욱 돈과는 인연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도장 파는 일을 넘어서 탈속(脫俗), 비속(非俗)의 세계에 있고자 하는 선비 정신을 담고 있으며, 나아가 수하인의 마음과 행위는 예술가의 그것을 닮아 있다. 이를 이해하면서 그 세계에 함께 몸담고 있는 이가 바로 산홍과 도장방 주인이다. 또 다른 세계는 속계(俗界) 즉 석운의 세계이다. 이 세계를 잘 대변해 주는 이가 석운의 처와 오준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돈과 명예이다. 만약 수하인이 건네준 전황석의 가치가 금(金)의 열 배도 넘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들의 태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도장을 새기러 온 오준에게 도장방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영업하는 사람이야 석재와 치수에 따라 값을 정하지만, 수하인 같은 분이야 원래 장사가 아니시니까 헐값에 그냥도 줄 수 있는 반면, 부르는 것이 값이 되는 경우도 있지요.’ ‘부르는 것이 값’이라는 것은 값, 즉 가치를 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의 가치는 곧 물건을 볼 줄 아는 안목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예술의 가치 또한 이렇게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도 그 위대성을 발견할 안목이 없다면 예술은 존재해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김시습이 ‘후세에 알아 줄 이’를 기다리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에서일 것이다. 되돌아온 전황석을 바라보는 수하인의 마음은 종자기를 잃은 백아의 마음과 같았던가 보다. 획은 어찌되었든 간에 글자와 글자 사이에 생겨나는 공백을 메울 수가 없었다. 위로 획을 올리면 밑으로 구멍이 생기고, 밑으로 내리면 위로 여백이 남았다. 벌써 몇 차례 고쳐 썼지만, 처음이나 나중이나 같은 판이다. 전황석을 새기던 때의 솜씨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 손이 하룻밤 사이에 떨어졌음을 의식할 수 있었다. 지기(知己)를 잃은 수하인의 심리적 동요가 이와 같이 표출되고 있다. 백아가 거문고를 깨뜨리고 다시는 연주를 하지 않았듯, 수하인도 결국 ‘칼을 버릴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예술이 알아줌을 통해 완성된다고 했지만, 예술가가 추구하는 것은 결코 알아 줌 그 자체는 아니다. 예술가는 예술 행위 그 자체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알아줌의 문제와 더불어 이 작품에는 예술 그 자체에 만족하며, 그 자체의 완성을 추구하려는 예술가 정신도 함께 드러난다. 도장 파는 일 하나에 만족하며 그 속에서 일생을 살아온 수하인의 삶이 그것을 말해 준다. 특히 석운에게 줄 선물에 대해 고심하고, 노점상에서 귀한 석재를 발견해 기뻐하고 취한 듯한 도장을 파는 일련의 과정은 마음을 담은 작업 과정이다. 그 결과물인 전황석 한 방은 ‘아(雅)하고 담(淡)한 것이 산홍의 숨길이라면 뭉친 획은 수하인의 절정에 이른 품(品)이요 지(志)였다.’ 비록 석운이 수하인의 마음을 알아주진 않았지만 수하인에겐 자신이 새긴 인장 그 자체가 보람인 것이다. 석운과 수하인의 거리는 속(俗)과 비속(非俗)의 거리로서 후자의 세계에 사는 수하인의 삶은 순수 예술인의 삶에 닿아 있다.
조명희(1894~1942) |
소설가. 충북 진천 출생. 호는 포석(抱石). 중앙고보 중퇴. 북경 사관학교에 입학하려다 일경(日警)에게 붙잡힘. 3․1 운동에 관계되어 투옥. 도요[東洋]대학 철학과 입학. 1928년 러시아로 망명. 소련 작가 동맹 원동 지부 지도부에서 근무. 지식인적 개인 의식에서 현실에 대한 불만을 그리다가 “낙동강”(1927)에 이르러 계급 의식과 민족 해방 사상이라는 거시적 안목을 지니게 된다. 대표작으로 “땅 속으로”(1925), “농촌 사람들”, “한여름밤”(1927), “춘선이”, “아들의 마음”(1928) 등이 있으며 희곡으로 “김영일의 사”(1921)가 있다.
▶ 낙동강
1. 줄거리
박성운은 낙동강 어부의 손자요, 농부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한을 자식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려고 성운을 도립간이농업학교에 보낸다. 학교를 졸업한 성운은 군청 농업 조수로 일하게 된다. 그는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직장을 그만두고 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투옥된다. 감옥에서 나와 보니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집도 없이 누이동생에게 얹혀 살고 있다. 중국 땅 서간도로 간 성운의 가족은 그곳에서도 힘든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는 사회주의 이념에 깊이 공감하게 되고, 귀향하여 소작 조합 운동을 전개한다. 농민들의 삶에 뛰어들어 고락을 함께 하며 지주의 횡포에 대항해 소작 쟁의를 일으키는 성운의 활동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점차 운동의 역량을 키워 간다. 성운이 살던 마을은 낙동강변인데, 그곳에는 주인 없이 방치된 하천 부지가 있어, 동네 사람들의 일터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일제가 들어와 일본인의 손에 불하하는 일이 일어나자, 성운을 앞세운 마을 사람들의 격렬한 항의가 시작된다. 일제는 이 봉기를 힘으로 제압하고, 성운은 주모자로 붙들려 들어가 모진 고문을 받다 병이 생겨 보석으로 풀려나게 된다. 한편, 성운의 농민 운동에 감화된 백정의 딸로서 고등 교육을 받은 로사(박성운의 말 - 폴란드 출신 사회주의 혁명가 로사 룩셈부르크)는 안락한 삶의 길을 버리고 성운과 의기 투합하여 농민 운동에 뛰어 든다. 두 사람은 혁명 동지이자 연인으로서 같은 길을 걷자고 굳게 다짐한다. 성운은 로사에게, 그녀 자신부터 봉건적 여성관을 떨쳐 버리고 혁명 여성으로서의 길을 갈 것을 고취한다. 성운의 병이 악화되어 끝내 사망하자, 로사는 성운이 말한 대로 ‘혁명의 폭발탄’이 되기를 다짐하면서 고향 구포역을 떠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1920년대) / 공간(조선의 낙동강변)
◎ 성격 : 민족주의적 경향 모색
◎ 문체 : 만연체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표현 : 이념을 여과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출함.
◎ 구성
발단 - 겨울밤, 박성운의 동지들이 병으로 보석(保釋) 출옥하는 박성운을 영접함.
전개 - 박성운의 성장 과정과 사회주의자가 된 내력. 농민 운동에 투신하게 된 사정
위기 - 박성운이 전개한 농민 운동과 소작 쟁의 투쟁의 경과
절정 - 박성운과 의기 투합한 ‘로사’
결말 - 박성운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렬. ‘로사’는 대륙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음.
◎ 주제 : 민중을 위한 투쟁의 삶과 장렬한 죽음. 피폐한 농촌 현실과 이를 개혁하고자 했던 혁명가의 비극적 삶
◎ 출전 : <조선지광>(1927)
3. 등장 인물
◎ 박성운 : 낙동강 어부의 자손. 사회주의 운동가. 일경(日警)에 검거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사망함.
◎ 로사 : 백정의 딸.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 안일한 삶을 거부하고 박성운을 도와 농촌 사업에 헌신한다. 이 이름은 풀란드 출신 사회주의 혁명가인 로사 룩셈부르크에서 연유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조선지광>에 1927년 7월에 발표된 작품이다. 원래 이 작품은 일제의 검열로 상당량이 복자 표시(***)로 되어 있다. 하지만 최근에 국내에 소개된 <조명희 선집>(1959년 소련에서 발간된 작품집)에는 원래대로 복원되어 있다. 이 소설은 1920년대의 신경향파 문학에서 본격적인 목적성을 추구하는 프로 문학으로 방향 전환을 모색하던 시기에 민족 해방 투쟁의 전망을 보여준 이정표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박성운의 일생을 서사시적으로 그리면서 민족 해방 운동의 성장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박성운은 농업 학교를 졸업한 후 군청 농업 조수 노릇을 하다가 독립 운동에 투신하여 일 년 육 개월 여의 형기를 살게된다. 출옥한 후 박성운은 중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는데, 이때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사상적으로 변신하게 된다. 박성운은 귀국한 후 소작 조합 운동을 전개하던 중, 국유지인 낙동강 기슭 갈밭을 일본인에게 넘겨준 조처에 항의하다 연행되어 두어 달 동안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몸을 망쳐 석방 도중에 죽고 만다. 박성운의 애인이며 백정의 딸인 로사는 장례를 치른 후 성운의 길을 좇아 대륙으로 떠난다. 이 작품은 3․1 운동 이후 민족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일제와의 투쟁이 민족주의 이념으로부터 사회주의 이념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 박성운이 보여 주는 실제 운동은 계급 해방이라는 사회주의적 이념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적 면모를 상당 부분 내포하고 있다. 즉 계급 해방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추구하면서도 일제의 수탈과 잔인성을 폭로한다. 더욱이 박성운의 죽음은 그 자체로서 일제의 잔악성을 드러내고 있다기보다는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지 조선 사이의 민족적 대립을 전면에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구절에는 이러한 성운의 사상적 면모가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우리 계급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중국에 가서 해도 좋고 인도에 가서 해도 좋고 세계의 어느 나라에 가서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마는 우리의 경우에는 여기 있어 일하는 편이 가장 편리하다. 그리고 우리는 죽어도 이 땅 사람들 과 같이 죽어야 할 책임감과 애착을 가지고 있다.’ 하는 구절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계급에 우선하는 민족적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시 신간회 결성으로 나타나는 민족 해방 운동의 좌우 합작 노선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주인공 박성운이 보여 주는 실제 운동은 계급 해방이라는 사회주의적 이념보다는 민족주의적 면모를 대단히 강하게 띠고 있다는 것이고 나아가 계급 해방이라는 원대한 목표 달성 이전에 일제의 수탈과 잔인성을 폭로하는 데 그는 헌신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급과 계급간의 대립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이념보다는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지 조선(인) 사이의 민족적 대립이 더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 저기압(低氣壓)
1. 줄거리
소설 ‘저기압’은 신문사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무기력한 지식인이 겪는 생활고와 권태에 빠진 자의식을 그리고 있다. 조명희의 소설에 등장하는 ‘1인칭’ 화자가 대부분 현실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외부의 사물에 대하여, 가족에 대하여 극도의 혐오감을 보여 준다. 어느 곳보다도 분주해야 할 신문사는 고슴도치, 장방울 같은 경리부원, 살이 부등부등 찌고 미련한 눈치를 지닌 도야지 같은 정치부장 등 화자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자신과 동류인 모든 지식인들에 대하여 ‘산 진열품’, ‘썩은 콩나물 대가리’ 등의 말로 혐오감을 표현한다. 이러한 혐오감의 밑바닥에는 식민지 현실의 모순 속에서도 아무런 현실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아에 대한 무기력과 비하감이 숨어 있고, 혐오의 발산은 자의식이 미치는 범위 안으로 한정된다. 즉 오히려 자신과 밀접한 관계에 있거나 동류 의식을 느낄 만한 부류의 사람들 속에서 그는 자아를 발견할 수밖에 없고 기대에 못 미치는 자아에 대하여 즉각적인 반발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기압’의 화자는 현실의 모순에 대하여는 구체성을 발견하고 있지 못하다. 단지 현진건에게 있어서 ‘술 권하는 사회’의 사회적 현실이 그에게는 혐오감으로 다가오고 있을 뿐이다. 가정에 대한 혐오에서도 가족 공동체와 사회와의 갈등 관계를 내밀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자의식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의 갈등에 머물고 있다. 현실적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협하는 힘의 근원이 포착되어 있지 못하며 화자의 행동은 충동적인 반응으로 일관되어 있다.
조세희(1942~) |
소설가. 경기도 가평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돛대 없는 장선(葬船)”이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나, 이후 작품 활동을 하지 않다가 1975년 <문학사상>에 “칼날”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이후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연작을 쓰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스스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고 했듯이 인간의 죄의 근원이 어디 있으며,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사회의 부조리는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한 검토를 한다. 그런 만큼 그의 작품은 기층 민중들의 애환이 매우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한편, 그 부정성을 드러내는 형식에 있어서의 세련됨과 서정적 문체는 그의 소설을 한결 힘있는 것으로 만든다. 비교적 과작(寡作)의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1970년대 산업 사회의 병리(病理)를 가장 예민하고 감동적으로 포착한 작가로 정평이 나 있다. 주요 작품으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외에 “나무 한 그루 서 있거라”, “모두 네 잎 토끼풀”, “모독”, “어린 왕자”, “하얀 저고리” 등이 있다.
▶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1. 줄거리
난쟁이를 아버지로 둔 우리 가족은 지옥과 같이 살아간다. 드디어 철거 계고장이 오고 말았다. 동사무소 앞에는 항의를 하는 주민과 거간꾼들로 가득했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호, 영희와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머니는 대문에 붙은 표찰을 뗀다. 별수 없는 것이다. 영호와 영희는 분노한다. 나는 어쩔 수 없다고 낙담한다. 아버지가 계고장을 마루 끝에 놓고 책을 읽는다. 아버지는 고생을 많이 했다. 아니 조상 대대로 고생을 많이 했다. 내가 인쇄 공장에서 일할 때 노비 매매 문서가 적힌 원고를 조판한 적이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선조들도 천민으로서 세습하여 신역을 바쳤다. 아버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옆집 명희 어머니로부터 돈을 빌린다. 우리 집에 세든 사람에게 내어 줄 돈이다. 그 돈은 예삿돈이 아니다. 명희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어머니는 말한다. 나도 그렇다. 명희는 나를 좋아했었다. 어느 날 명희는 나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하면 제 몸을 만져도 좋다고 했다. 그것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된다는 거였다. 만날 때마다 명희는 몸이 약해졌고 배가 고프다고 했다. 그러면서 먹고 싶은 것을 손가락으로 꼽았다. 명희는 이후 다방 종업원, 고속 버스 안내양, 캐디가 되었다. 배가 불러 있었고, 결국 자살했다. 남긴 통장에 십구만 원이 있었다. 그러나 명희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중학교 3학년 초에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기력이 쇠잔해지고, 어머니와 나, 영호는 공장에 나가 일을 했다. 일은 고되었고 환경은 엉망이었다. 무슨 일이든 공부를 해야 이 구역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방송 통신고를 입학했다. 아버지는 일이 힘들어 서커스단에서 하는 일로 바꾸고 싶어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반대했다. 아버지는 서커스를 하지도 않았는데 전에 그 일을 했다고 나에게 말했다.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다. 명희 어머니가 와서 입주권 값이 오르고 있으니 팔지 말라고 일러 준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를 찾아보라고 한다. 나는 아버지가 읽던 책을 보고 있던 중이다. 삼층집의 가정 교사인 지섭이 준 책이다. 아버지와 지섭은 서로 통했다. 지섭은 이 땅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하며 달나라로 떠나야 한다고 아버지께 말씀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공장 굴뚝에 올라가 종이 비행기를 날리고 있었다. 나(영호)는 우리 집에서의 마지막 밤을 집에서 보내지 못했다. 영희가 집을 나간 바람에 밤새 찾아다녔던 것이다. 마을의 주정뱅이는 외계인을 따라 비행접시를 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형이 힘없이 이리로 온다.
형은 힘이 없어 나를 찾아왔었다. 우리는 함께 공장에서 일했다. 우리와 노동자들은 착취당했지만 해고가 무서워 아무 말도 못했다. 형은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형은 책을 많이 읽었다. 고민하는 표정을 늘 지었고, 공책에는 무엇을 옮겨 적었다. 지도자의 위선과 폭력에 대한 내용이었다. 나는 형을 이상주의자라 생각했다. 며칠 전 동사무소 앞에서 입주권 시세를 알아보러 갔다가 영희를 만났다. 잠실까지 가서 입주권의 시세를 알아보고 온 것이다. 어떤 아주머니와 흥정이 결렬되었을 때 승용차 안에서 한 사내가 높은 금으로 흥정해 온다. 저녁에 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진실을 위하다 희생된 것이라 말했다. 형과 나는 사장과의 싸움에 졌던 것이다. 사장을 만나겠다는 얘기가 새어 나갔고, 공모했던 자들은 우리에게 냉담하였고, 일상으로 돌아가 버렸다. 저녁에 사내가 와 계약서를 작성하고 돈을 건네 받았다. 다음날 명희네가 마을을 떠났다. 아버지는 손을 들어 전송했다. 아버지의 왼손에는 여전히 책이 들려 있었다. 아버지와 지섭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달을 왕복했다. 달에 가서 망원 렌즈를 지키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지섭이 미친 사람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지섭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나무라면서 지섭이 쇠공을 쏘아 올리는 것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 행복동 생활의 마지막 며칠은 악몽과 같았다. 영희를 찾을 길이 없었다. 지섭이 쇠고기를 사 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와 말없이 책을 읽고 있다. 아버지에 의하면 지섭은 잘못 없이 감옥에 갔다 왔다고 했다. 이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다. 철거반원들이 우리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짐을 챙겨 집 밖으로 나온다. 그들이 삽시간에 집을 허물어 버린다. 갑자기 지섭이 철거반원들에게 항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주먹으로 그 한 사람의 면상을 때린다. 몰려온 반원들에 의해 지섭은 죽도록 맞는다. 그리고 그를 끌고 간다. 저만큼 멀어져 갈 때 아버지는 그들을 따라간다. 초라한 모습이다. 나는 잠이 쏟아져 부서진 대문짝을 깔고 잠든다. 꿈속에서 영희가 팬지꽃을 공장 폐수에 던져 넣고 있었다.나(영희)는 밤을 새우고 있다. 거실의 시계가 네 시를 알린다. 나는 그에게 수면제를 쐰다. 그는 철거 계고장이 오던 날, 동사무소 앞에서 나를 유심히 보았다. 매매 계약서를 쓰고 떠나면서 내 가슴 쪽을 살짝 건드렸다. 나는 그를 쫓아 나갔다. 나를 향해 그가 돌아섰을 때, 나는 그건 우리 집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찾아야 했다. 오빠는 우리 집을 짓는 데 천 년 세월이 걸렸다고 했다. 그는 나를 고용했다. 나는 그에게 고용되어 그의 아파트에서 동거하기 시작했다. 풍족하게 먹었지만 그 열량은 밤이 되면 고스란히 그가 되찾아 갔다. 그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다. 금고에서 우리 것을 꺼내어 밖으로 빠져 나온다. 새벽과 아침 시간을 보낸 후 동사무소, 구청, 주택 공사에 들러 필요한 수속을 밟는다. 그러고는 쓰러지려는 몸을 겨우 추슬러 신애 아주머니 집에 간신히 당도한다. 아주머니와 딸이 나를 부축해 방에 누인다. 나는 아버지의 소식을 듣는다. 공장 굴뚝 속으로 떨어져 죽은 시체를 굴뚝을 헐다가 발견했다는 것이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울면서 큰오빠에게 말했었다.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하는 놈은 죽여야 된다고. 오빠는 꼭 죽이겠다고 말했었다. 꼭.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1970년대) / 공간(서울의 변두리)
◎ 경향 : 사회 고발적, 사실적, 현실 반영적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1, 2, 3부가 각각 영수, 영호, 영희의 시점에서 서술됨)
◎ 구성 : 1부(서술자 - 영수), 2부(서술자 - 영호), 3부(서술자 - 영희)
1부 - 철거 통지를 받는다. 가족들의 생활이 시간적으로 교차되면서 중첩되어 묘사된다.
2부 - 영희의 가출. 입주권을 투기업자에게 팔고 철거반원에 의해 집이 철거된다.
3부 - 투기업자에게 순결을 빼앗긴 영희는 금고 안에서 입주권과 돈을 들고 나와 입주 절차를 마치나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사회에 대해 절규한다.
◎ 주제 : 도시 빈민의 삶의 고통과 좌절. 도시 빈민의 가난한 삶과 처참한 패배의 한(恨)
◎ 출전 : <문학과 지성>(1976)
3. 등장 인물
◎ 영수 :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능력이 있고 주관이 뚜렷하다. 집안의 장남으로서 현실적인 모습도 보인다.
◎ 영호 : 성격이 급하고 쉽게 흥분한다. 현실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
◎ 영희 :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다. 집의 막내로서 여린 모습을 보인다.
◎ 아버지 : 현실을 초월한 이상의 세계를 갈망한다.
◎ 어머니 : 어려운 현실 속에서 지쳐있다. 아버지를 감싸며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도시 빈민의 궁핍한 생활과 자본주의 모순 속에서 노동자의 현실적 패배가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소설이다. 같은 제목의 연작 열두 편 중에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특히 1970년대 한국 소설의 기념비적 예광탄이라고 평가되는 작품이다. 이 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도시 노동자의 여러 문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엄연한 현실이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철거되는 삶의 터전,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 수준, 열악한 작업 환경, 가진 자의 억압과 술책 등 당시 사회의 모순을 짊어진 한 전형이다. 작가는 ‘난장이’로 대변된 가난한 소외 계층과 공장 노동자의 삶의 모습, 1970년대의 핵심 문제인 노동 조건을 폭로한다. 여기에 시점의 잦은 이동 등의 기법적 새로움과 함께 서정적인 아름다움까지 보여 준다. 예를 들면, 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 넣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꽃을 던지는 영희의 행동이 영호의 꿈속에서인지 실제의 그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팬지꽃과 폐수’, ‘귀여운 소녀와 꽃을 버리는 행위’의 대조적인 이미지를 통해 강렬한 시적 호소력을 보여 주고 있다. 작가는 난쟁이 일가로 대변되는 가난한 소외 계층과 공장 근로자들의 삶의 조건과 모습을 파헤침으로써 70년대 이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던 우리의 노동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여기에 과거와 현재의 중첩(重疊), 환상적인 분위기의 조성, 시점의 잦은 이동 등의 기법적 새로움과 함께 서정적인 아름다움까지 보여 준다. 그리고, 이 글의 결말은 난쟁이 일가의 패배로 끝난다. 아마도 그들은 그렇게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영희의 절규는 더 이상은 ‘난장이’로 남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영희는 ‘거인’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참고> 연작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대하여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난쟁이 일가로 대변되는 가난한 소외 계층과 공장 노동자들이다. 작가는 비상하게 날카로운 촉수로 이들의 삶의 조건과 양상을 파헤침으로써 1970년대 한국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제기된 노동 현실의 심층을 해부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합쳐 열두 개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중심 인물들은 ‘난장이’의 일가다.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의 무허가 주택에 살고 있던 사십대 후반의 난쟁이와 그 부인, 영수, 영호, 영희 세 남매로 구성된 일가에게 철거라는 위기가 닥친다. 그렇게 해서 경제적 근거가 전무한 그들이 ‘딱지’라 불리는, 재개발 지역의 아파트 입주권을 헐값에 팔아 넘기고 거리에 나앉는 과정이 연작의 표제작에 담겨 있다. ‘뫼비우스의 띠’의 꼽추와 앉은뱅이 역시 난쟁이 일가와 같은 처지를 당한다. 딱지 장사로 돈을 챙기는 사내에게 접근한 영희가 우여곡절 끝에 딱지를 되찾아오고 꼽추와 앉은뱅이가 그 사내를 살해하는 일련의 과정이 선명한 대립 구도 속에서 그려져 있다. 도시 빈민의 자식들은 노동자로 편입된다. 까만 쇠공을 타고 달나라로 날아간(벽돌공장 굴뚝 속으로 떨어져 죽은) 난쟁이의 자식들은 각각 은강자동차, 은강전기 제일공장, 은강방직 공장에 취직한다. 작가의 시선도 그 공장들이 있는 서해안 항구 도시 은강으로 옮겨 간다. ‘기계 도시’,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클라인 씨의 병’ 같은 작품들이 은강을 무대로 전개된다. “우리 삼남매는 죽어라 공장 일을 했다. 우리는 우리의 생산 공헌도에 못 미치는 돈을 받았다. 네 명의 가족을 둔 그 해 도시 근로자의 최저생계비는 팔만 삼천 사백 팔십 원이었다. 어머니가 확인한 삼남매의 수입 총액은 팔만 이백 삼십일 원이었다.”(‘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에서) 죽어라 일을 해도 사정은 나아지질 않는다. 야근 시간에 졸다가는 반장이 들고 다니는 옷핀에 팔을 찔린다. 노동 조건의 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노동자들은 해고되어 블랙 리스트에 오르고 어딘가로 끌려가 조사를 받거나 어두운 골목에서 뭇매를 맞는다. 노동자들의 삶의 실상을 그리자면 그들의 적대 계급인 자본가와 그 주변 세력을 등장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은강 그룹의 소유주 일가와 그들의 수족으로 일하는 율사(律士)가 그들이다. 거기에다가 신애와 그 동생으로 대표되는 양심적인 중산층, 윤호의 가정교사였다가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는 지섭과 같은 행동하는 지식인이 더해져 소설은 한 사회의 전체 상을 그릴 수 있게 된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은 영수가 은강 그룹 총수의 동생을 살해하는 사건으로 귀결된다. 물론 작가의 메시지가 그처럼 극단적인 마무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의도는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 주자는 것이었으리라. 작가의 진짜 대안은 아직 살인을 저지르기 전 영수의 시점으로 이렇게 표현된다. “아버지는 그런 세상에서는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 버리고, 바람도 막아 버리고, 전깃불도 잘라 버리고, 수도선도 끊어 버린다. 그 세상 사람들은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비도 사랑으로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줄기까지 머물게 한다. 아버지는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랑을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는 말은 언뜻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현실이란 법의 간섭 없이 사랑의 작용만으로 만사가 순탄하게 돌아가는 천상계도 아니고, 악의와 증오가 지배하는 지옥도 아니다. 사랑과 미움, 이기와 이타, 탐욕과 희생이 얽혀 있는 인간계를 좀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법이라는 힘을 갖춘 사랑의 지배를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은, 다소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에 바탕을 둔 이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랑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영수와 “사랑으로 얻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은강 그룹 총수의 아들 경훈 중에서 작가가 누구의 손을 들어 줄 것인가는 쉬운 질문이 될 것이다. 아울러 이 작품의 구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이분법적 대립 구조로 되어 있다. 작가는 공간적으로 도시 변두리의 철거민 촌, 계층적으로 비숙련 노동 계층의 비참한 생활상과 잘사는 계층의 화려하고 타락한 생활상을 대조적으로 제시하고, 못 가진 자의 비참한 삶과 그들의 회의와 방황, 의식 구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는 작가가 70년대 한국의 사회상을 착취와 피착취의 이분법으로 파악했음을 극명하게 보여 준 것이다. 특히 못 가진 자의 삶의 공간으로 설정된 ‘행복동’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 구도를 확인하고 그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 설정한 것으로 반어적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 작품의 기법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은 환상과 현실의 교묘한 배합과 상징적 구조물의 중첩, 그리고 시점의 잦은 이동과 연작 형태의 다양한 시각 확보 등에서 새로운 기법을 보여 주었다. 시점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되어 있으나 장면에 따라 순간순간 바뀌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문체는 70년대의 현실 참여적인 작품들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거칠고 투박한 것에서 벗어나 세련되고 잘 다듬어진 문체를 보이고 있다. 끝으로, 연작 12편의 제목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① “뫼비우스의 띠” ② “칼날” ③ “우주 여행” ④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⑤ “육교 위에서” ⑥ “궤도 회전” ⑦ “기계 도시” ⑧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⑨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⑩ “클라인 씨의 병” ⑪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⑫ “에필로그”
<참고> 연작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전체 내용
□ 뫼비우스의 띠 : 아이들이 신뢰하는 수학 교사는 마지막 시간에 아이들에게 뫼비우스의 띠와 굴뚝 이야기를 들려준다(사이, 곱추와 앉은뱅이는 헐값에 팔아버린 아파트 입주권을 되찾기 위해 입주권을 산 사내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곱추와 앉은뱅이는 사내의 이득 몫을 뺀 나머지 이십만 원을 자신들의 몫이라며 찾아온다). 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오려서 그 양끝을 맞붙이면 안과 겉 양면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한번 꼬아 양끝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한 쪽 면만 갖는 곡면이 된다.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는 곧 우리가 갇혔다고 생각한 세상도 갇히지 않는 곳이며, 억압되어 있다고 느껴 탈출을 시도해도 되돌아 올 수밖에 없는 곳이다. 수학 교사는 아이들에게 말한다.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 제군은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 문학과 지성 1976년 여름 / 세대 1976년 2월
□ 칼날 : 꿈 많고 총명했던 신애는 책을 쓰는 게 소원이었던 현우와 희망을 품고 결혼한다. 그러나 죽어라 돈을 벌어도 허덕이게 된 부부는 이제 가족 간의 의사 소통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신문만 보는 현우,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는 큰아들, 라디오를 켜 놓고 공부하는 딸. 이들 가족은 공무원, 제과회사 차장 집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들은 다 돈이 많은 자들로 수도를 놓고 밤에 물 받는 걱정을 안 한다. 신애는 수도꼭지를 낮춰 달면 물 받기가 수월해진다는 난쟁이의 말을 믿고 그에게 일을 맡긴다. 화가 난 수도 설치하는 사내들은 신애네 집으로 찾아와 난쟁이를 폭행한다. 신애는 부엌의 생선칼로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사내들은 살의를 갖고 있는 신애가 두려워 도망간다. 수도꼭지를 단 그 날 밤 난쟁이의 말처럼 정말 수돗물이 흘러 나왔다. / 문학사상 1975년 12월
□ 우주 여행 : 윤호의 아버지는 윤호를 A대학 사회계열에 보내기 위해 지섭을 가정교사로 데려왔다. 윤호는 지섭을 알게 된 후 세상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하게 되었다. 지섭은 윤호에게 날개를 쓰지 않아 퇴화된 도도새 이야기를 해 주기도 하고, 우주인을 만나게 해 주겠다며 윤호를 데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도 갔다. 난쟁이와 그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 날 밤 윤호와 지섭은 달나라에 관한 얘기를 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산소가 없고, 권태로운 달나라 얘기를 한 윤호와 달리 지상에 없는 행복이 달에 있을 거라고 지섭은 말했다. 윤호는 대학에 떨어졌고 지섭은 쫓겨났다. 윤호는 학원에 나가 강의를 받고 개인 그룹을 지어 족집게 특수 지도를 받았다. 윤호는 특수 지도를 받는 아이들 가운데 맑고 깨끗한 은희를 알게된다. 예비고사 날 윤호는 특수 지도반 아이들 중 타락하고 쓰레기 같은 인규로부터 답안지를 보여 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대신 인규가 은희에 대한 관심을 끊겠다는 일종의 거래였다.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낀 윤호는 자살하기 위해 아버지가 숨겨둔 권총을 찾았다. 그 때 은희가 윤호를 방문하고, 윤호는 은희에게 권총을 쏴 자신을 달나라로 보내달라고 한다. 은희는 권총을 쏘는 대신 어머니가 없는 윤호를 어머니처럼 두 팔로 감싸안았다. / 뿌리 깊은 나무 1976년 9월 / 문학과 지성 1977년 봄
□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 난장이 가족이 사는 낙원구 행복동에 이십 일 안에 자진 철거하라는 철거 계고장이 날아들었다. 동생 영호는 집에서 떠날 수 없다고 버티었고, 울기 잘하는 영희는 훌쩍훌쩍 울기만 하고, 어머니는 무허가 건물 번호가 새겨진 알루미늄 표찰을 떼어 간직했다. 새 아파트에 들어갈 형편이 되지 않는 행복동 주민들은 하나, 둘씩 입주권을 팔기 시작했다. 입주권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아 갔다. 난쟁이네 집도 입주권을 팔고 전셋돈을 빼 주어야 했지만 난쟁이네 가족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을 이어 나르고 시멘트를 직접 발라 만든 집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 이웃집 명희 어머니는 명희가 죽고 남긴 통장에 든 돈을 난쟁이네 집에 전셋돈 빼주라고 빌려주었다. 명희는 나(난쟁이 집 큰아들 영수)를 좋아했다. 그녀가 바라던 건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공장에 가지 않고 공부를 많이 해 큰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명희는 다방 종업원에서 캐디로, 버스 안내양으로 전전하다가 통장에 십구만 원을 남기고 자살했다. 나와 동생(영호)은 아버지가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인쇄 공장에 나가게 됐다. 아버지는 당신의 형편에 어울리지 않게 길 건너 고급 주택에서 가정교사를 하는 지섭과 얘기를 나누곤 했다. 지섭은 사랑이 없이 욕망만 떠도는 땅을 떠나 달나라로 가야 한다고 아버지에게 말하고 “일만 년 후의 세계”라는 책을 빌려주었다. 인쇄 공장 사장은 불황이라는 단어를 빌미로 삼아 우리에게 쉬지 않고 일할 것을 강요했다. 나와 영호는 사장에게 가서 힘든 노동 시간에 대해 사장과 협상하려다 일도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하고 공장에서 쫓겨났다. 아버지는 나와 영호에게 큰 일을 한 것이라고 추켜 주었다. 입주권 가격이 자꾸 올라가자 난쟁이네 가족은 이십오만 원을 받고 검정 승용차를 타고 온 남자에게 입주권을 팔았다. 집은 헐리고, 영희와 아버지가 사라졌다. 영희는 검정 승용차를 타고 온 남자를 따라갔다. 남자는 영희에게 대꾸하지 않고 말만 잘 듣는다면 많은 돈을 주겠다고 말했다. 영희는 남자를 따라가 좋은 음식을 먹고 남자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영희는 자신이랑 환경이 많이 다른 남자의 집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 곳에서 뭐하냐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영희에게 들려왔다. 영희는 남자의 금고에서 자신의 집 대문에 달려 있던 알루미늄 표찰을 되찾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영희는 표찰을 내고 아파트 입주 신청서에 아버지의 이름과 주민등록 번호를 적어 넣었다. 신애 아주머니는 열이 나 아파하는 영희를 방에 데리고 가 간호를 해 주며 말했다. 아버지가 굴뚝 속에서 죽은 채로 발견 됐다고 / 문학과 지성 1976년 겨울
□ 육교 위에서 : 신애는 위가 나빠 병원에 누워 있는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혼잡한 사람들을 헤집고 육교를 지나가던 신애는 동생과 단짝 친구가 일하는 직장의 건물을 보고 동생과 동생 친구의 대학 생활과 또 소원해진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동생과 동생 친구는 학교 때 제대로 자신들의 의사를 밝힐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대학 신문에 기고하기로 결정하고 교수였던 주간에게 보여 준다. 그러나 주간은 불온한 글이라며 싣지 못하게 했다. 둘은 몰래 등사를 해 교내에서 학생들에게 그 글을 나누어 준다. 주간은 둘의 행동에 대해 사태에 대해 정확히 판단하지 못했으며 이제 현실을 파악하라고 충고한다. 둘은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들마저 떠나고 둘 만 남은 느낌을 받는다.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만난 동생과 동생친구는 입장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친구의 직장에 주간이 우두머리가 되어 왔고 주간은 자신이 끌어 줄 테니 함께 일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후 동생 친구는 변했다. 좋은 집에, 아내와 아이를 기르며 안락한 생활의 길로 접어들었다. 신애는 병원에 들려 동생의 아이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웃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 세대 1977년 2월
□ 궤도 회전 : 아버지의 기대와 어긋나게 셋째 해 예비고사에서 떨어진 윤호는 철사로 매를 맞았다. 아버지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워진 윤호는 ‘노동 수첩’이라는 책을 읽었다. 윤호는 행복동에서 북한산으로 이사간 깨끗한 동네에서 이 책을 읽었다. 어느 날 길 건너 집에 살고 있는 고등학생 경애를 알게 되었다. 경애는 윤호를 ‘십대 공원’이라는 토론 주제 모임에 참가시킨다. 윤호는 이 모임에 나가 자신이 만난 난쟁이 가족에 대해 얘기해 준다. 은강시 공장에서 일하는 난쟁이의 아들, 딸에 대해 얘기를 해 주었으나 아이들은 지루해 하고 색다른 프로그램을 원하고 있었다. 윤호는 경애에게 말한다. 십대 공원이라는 이 모임을 빌미로 너는 불쌍한 아이들을 팔았다고. 또 회사 대표였던 경애의 할아버지가 공원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을 제대로 분배하지 않았으며, 경애 또한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고통받는 걸 몰랐다는 것조차 죄라고 말한다. 경애는 윤호와 함께 있고 싶었던 것도 죄인가로 되묻고 집으로 돌아간다. 경애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이 치러졌다. 윤호는 이에 자신이 가져야 할 사랑, 존경, 자유와 같은 과제를 떠올려 보았다. / 한국문학 1977년 6월
□ 기계 도시 : 윤호는 삼수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가 보았던 난쟁이 가족이 살고 있는 동네를 잊지 못한다. 윤호와 사귀는 은희도 윤호가 난쟁이 가족이 일하고 있는 은강을 큰 부피로 떠올리고 있다. 은강은 서울에서 가까운 서해 반도부에 위치한 곳으로 금속, 도자기, 화학, 유지, 조선 등으로 유명한 곳이다. 면적은 백 구십 육 제곱킬로미터에 인구는 팔십 일만 명이다. 공장은 북쪽 지대에 있고 바람이 바다에서 육지로, 육지에서 바다로 불기 때문에 매연이 이동을 했었는데 어느 날 공장 지대 상공에 머물던 매연이 주거지를 향해 불었다. 사람들은 고통을 호소했다.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많은 양의 폐수는 바다로 흘러갔다. 은강에서 일하는 대다수 공원들은 빈곤 때문에 일자리를 얻었으며, 인간적인 대우를 이 곳에서는 기대할 수 없고, 앞으로 이 곳 생활이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난쟁이의 큰아들 영수는 윤호에게 은강 그룹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해방시키기 위해 은강 그룹의 경영주를 죽이겠다고 말한다. 윤호의 옆집에 사는 은강 그룹의 경영주를 죽일 수 있도록 자신을 윤호의 집에 머물게 해달라고 한다. 윤호는 난쟁이의 큰아들 혼자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위해 도울 생각을 해 본다. / 대학신문 1977년 6월
□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 영희는 나(영수)에게 독일에 있다는 릴리푸트읍 얘기를 한다. 억압, 공포, 불평등이 없는 난쟁이 마을 얘기였다. 벽돌 공장 굴뚝 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아버지는 릴리푸트읍 같은 마을에 사셨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은강 자동차에서, 동생 영호는 은강 전기 제일 공장에서, 막내 영희는 은강 방직 공장에서 일한다. 특별한 기술을 익히지 못한 우리는 그 곳에서도 제일 낮은 계급에 속했으며, 어머니는 우리가 벌어주는 돈으로 빠듯하게 생계 유지를 해 나가셨다. 하루 아홉 시간 이상의 고된 노동에 잠깐의 휴식이 우리 생활의 전부였다. 나는 월급을 탄 날 지부장을 만나러 가 시간외 근무 수당의 부적절한 지급과 동료의 부당 해고 문제에 대해 항의했다. 그는 나의 말에 모두 동의했지만 회사 사람이었고 노동자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해고자 명단에 오르기 전에 은강 자동차에서 나와 은강방직 공장으로 옮겨갔다. 은강에서는 생존을 위해 죽어라 일해야 했다. 우리의 생존비용으로 가득 채워진 어머니의 가계부를 덮으며 나는 릴리푸트읍에 대해 생각했다. / 문학사상 1977년 10월
□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 아버지가 꿈꾸던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서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법을 가져야 하는 세상이라면 이 세계와 다를 것이 없다고 나(영수)는 생각했다.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영희는 섭씨 30도 이상 되는 공장 내부에서 졸면서 일했고 작업반장은 조는 영희에게로 다가와 빨간 피가 배어 나게 옷핀을 찔렀다. 나는 그곳에서 기사 조수로 일했다. 공장에서 사고가 일어나 공원들이 죽어갔다. 노동조합 지부장이 끌려가고 공원들이 무더기로 해고당하는 좋지 않은 사태가 공장 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새로 선출된 지부장인 영이를 어느 날 영희가 내게 데리고 왔다. 영이와 나는 자주 만나 사용자측과의 만남을 대비한 준비를 했다. 노사 대표가 만나는 회의가 열렸다. 근로자 측은 임금 인상과 정당한 이윤 분배를 요구했다. 사용자측은 근로자 측을 사사건건 부정적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로 규정짓고 들어줄 것이 없다고 답했다. 나는 사랑을 갖지 않는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말했던 아버지의 말이 옳았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나 잘 못을 저지르고 있으며 은강에서는 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 문예중앙 1977년 겨울
□ 클라인 씨의 병 : 나(영수)는 은강 방직에서 노동 조합 운동을 하게 된다. 교회 목사로부터 다른 동료들과 함께 의식화 교육을 받는다. “근로자의 손해는 경영주의 이익이라는 단순한 지적이 우리의 뒤통수를 쳤다. 부의 증가는 저임금 근로자의 수의 증가와 비례해 왔다는 역사를 그가 들춰냈다. 우리는 그를 믿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머니는 내가 공장 일만 하기를 바란다. 그러던 어느 날 행복동 철거반원과 몸싸움 끝에 끌려 갔다온 지섭이 노동운동가로 변해 나를 만나러 왔다. 지섭은 내게 노동현장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해 준다. 지섭이 떠나고 나는 과학자가 만든 이상한 병을 보게된다. 안과 밖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기묘한 형상을 한 클라인 씨의 병이라고 이름 붙은 이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따라서 안과 밖의 구별이 없으므로, 우리의 세계도 갇혀 있지 않으면서도 갇힌 것이고 갇혔다는 것도 착각이라는 명제를 나는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 문학과 지성 1978년 봄.
□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 숙부를 은강 그룹의 회장으로 착각한 공원의 칼에 맞아 숙부는 죽었다. 사촌은 미국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가 나(은강 그룹 경영주 아들 경훈)와 함께 법정에 참석한다. 범인은 은강 방직 기사로 일하던 난쟁이 가족 큰아들이었다. 사람이 죽은 엄연한 사실을 갖고 변호인 측은 은강 그룹 회장이 노동자의 억압의 중심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죽여야 했다는, 부정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투사적 논리까지 펴나간다. 변호인 측 증인으로 등장한 손가락이 여덟 개뿐이 없는 지섭은 난쟁이의 큰아들은 이상을 펴려다 고생을 했으며 지금도 난쟁이 큰아들과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것은 집단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논리를 편다. 마음 약한 사촌은 그들의 논리에 열심히 귀 기울이고 무엇이 사실인가를 나에게 설명한다. 공판은 끝나고 사촌형은 떠났다. 재판 결과는 난쟁이 큰아들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기대를 품었던 공원들은 혼란과 착각에 빠졌고 재판에 승소할 것처럼 기세 등등하던 변호인은 낙담했다. 이번 일로 나는 공원들의 행복과 부모님이 내게 주신 사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 창작과 비평 1978년 여름
□ 에필로그 : 수학 선생은 예비고사 성적에서의 부진을 이유로 윤리 교사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런 상황으로 몰리게 된 제도적 문제점과 그래서 그가 지구를 떠나 우주로 여행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한다(‘뫼비우스의 띠’에 등장했던 꼽추와 앉은뱅이는 약장사를 따라 떠났으나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지내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앉은뱅이와 꼽추는 자신들을 따돌리고 도망쳐 버린 사장을 찾아 한 밤중 떠난다. 도중에 그들은 난쟁이 큰아들이 갇혀있다 죽어 나온 형무소를 보게 된다. 꼽추는 앉은뱅이에게 사장을 죽이기 위해 품고 있는 칼을 버리라고 말한다). / 문학사상 1978년 3월
<참고>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 씨의 병’이 상징하는 것
“교사는 분필을 들고 돌아섰다. 그는 칠판 위에다 ‘뫼비우스의 띠’라고 썼다.
제군은 이미 교과서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 역시 입학 시험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 주기를 바란다. 면에는 안과 겉이 있다. 예를 들자. 종이는 앞뒤 양면을 갖고 지구는 내부와 외부를 갖는다. 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면 사각형으로 오려서 그 양끝을 맞붙이면 역시 안과 겉 양면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한 번 꼬아 양끝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즉 한 쪽 면만 갖는 곡면이 된다. 이것이 제군이 교과서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이다.”(‘뫼비우스의 띠’에서) 연작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첫머리에 놓여 있는 ‘뫼비우스의 띠’에는 뫼비우스의 띠와 뫼비우스의 입체를 생각해 보라는, 고교 삼 학년 교실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수학 교사의 말이 작품 앞뒤에 놓여 있고, 그 사이에 앉은뱅이와 꼽추의 이야기가 끼여 있다. 그 이야기는, 헐값으로 딱지(재개발 지역의 입주권)를 넘긴 앉은뱅이와 꼽추가 브로커의 농간을 알아채고 그를 살해, 복수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연작의 첫머리에 암호처럼 놓여 있는 뫼비우스의 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소설 속 수학 교사의 말을 들어 보자. “내가 마지막 시간에 왜 굴뚝 이야기나 하고, 띠 이야기를 하는지 제군은 생각해 주리라 믿는다.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이제 나의 노력이 어떠했나 자신을 테스트해 볼 기회가 온 것 같다. 다른 인사말은 서로 생략하기로 하자.” 여기에서 교사가 공동체의 선을 위한 사회적 윤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한 쪽 면만 갖는 곡면의 세계 즉 뫼비우스의 띠의 눈으로 보는 세계의 구체적 실상은 무엇인가. 철거민들과 그들에게서 입주권을 터무니없이 싼 값으로 사 들인 부동산업자 사이의 갈등에서 피해자인 철거민이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경제적 착취에 맞서는 또 다른 폭력)이 그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별할 수 없는 현실, 여기에 안팎을 구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가 놓여 있다. 그러니까 작가는 이와 같은 비극적 현실에 분노하면서, 이런 비극을 낳는 사회 구조의 모순 쪽으로 눈을 돌릴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안팎이 없는 닫힌 공간을 보여 주는 ‘클라인 씨의 병’(뫼비우스의 입체)도 연작의 주제를 전달하는 중요한 상징이다. “이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입니다. 안팎이 없기 때문에 내부를 막았다고 할 수 없고, 여기서는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벽만 따라가면 나갈 수 있죠.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그 자체가 착각예요.(‘클라인 씨의 병’에서)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는 세상은 그러나 현실에 실재하지는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보이는 힘과 부의 편중은 갇힘과 나눔을 피할 수 없는 질서로 만들어 놓았다. 난쟁이 일가가 살고 있는 현실이 바로 그렇다. 그러나 클라인 씨의 병이 보여 주는 것은 ‘갇힘이 착각일 수 있다’는 발상의 뒤집음이다. 그것은 갇힘이 불변하는 절대적 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환기시키는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에 기대어 작가는 헤어날 길 없는 절망적 현실에 갇힌 난쟁이에게 꿈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살며 사랑으로 비를 내리게 하는’ 아름답고 순수한 세계가 그것이다. 이 ‘아름답고 순수한 세계’가 난쟁이의 경우에는 ‘달나라’이다. ‘이 땅에서 끝까지 고생하다 바짝 마른 몰골로 죽기’ 전에 ‘힘든 일에 눌려 허우적거리다 숨을 거두기’ 전에 난쟁이가 가고 싶어하는 ‘달나라’는 물론 상상 속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 상상 속의 세계는 난쟁이가 그린 ‘사랑’의 세계이다. 상상 속에서나 그 존재가 가능할 기묘한 현실이 클라인 씨의 병처럼 엄연한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이상, 난쟁이가 소망한 또 하나의 상상 속의 세계가 실재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난쟁이의 소망이 우화적인 색채를 띠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무게를 지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작가의 현실 인식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 뫼비우스의 띠
1. 줄거리
고교 3학년 학생들에게 수학 교사가 많은 이야기를 해 준다. 수학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뫼비우스의 띠’를 통해 두 가지 예를 들어 말해 준다. 첫 번째 ‘굴뚝 청소를 같이 한 뒤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깨끗한 아이 가운데 어느 쪽이 얼굴을 씻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한다.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은 상식적으로 대답을 한다. 그러나 수학 교사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을 한다. 두 번째 예는 앉은뱅이와 꼽추의 이야기이다. 앉은뱅이와 꼽추, 몸도 생활도 어려운 그들의 집은 아파트 재건축 때문에 무너져 버린다. 앉은뱅이와 꼽추는 돈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둘은 복수를 결심한다. 기름통도 준비하고 마음도 굳게 먹는다. 하지만 앉은뱅이는 적극적인 데 반해 꼽추는 겁이 난다. 앉은뱅이는 살이 피둥피둥 찐 부동산 업자를 만나서 집의 가격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부동산 업자의 거짓말에 화가 난다. 앉은뱅이는 사나이에게서 돈과 서류를 받는다. 그리고는 차에 태워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다. 꼽추는 살인을 한 앉은뱅이의 마음에 겁이 난다. 서로 같은 동기에서 복수를 하지만, 앉은뱅이는 돈으로 강냉이 기계를 사서 생활할 계획을 하고 꼽추는 이에 반대하며 약장수를 따라갈 것을 결심한다. 둘은 헤어지면서 앉은뱅이는 눈물을 흘린다. 수학 교사는 이런 ‘뫼비우스의 띠’의 많은 진리를 학생들에게 이야기하고 교실을 나간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연작 소설
◎ 배경 : 시간(1970년대) / 공간(도시 외곽의 한 철거민촌)
◎ 성격 : 사실주의적
◎ 시점 : 외부 이야기(작가 관찰자 시점), 내부 이야기(전지적 작가 시점)
◎ 특징 : 연작 소설 중의 한 부분임.
◎ 표현 : 환상적이고 상징적인 분위기를 지님.
◎ 주제 : 도시 변두리의 빈민층과 부도덕한 부자들의 대립
◎ 출전 : <세대>(1976)
3.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모두 12부분으로 이루어진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연작의 첫 편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연작 중의 하나인 ‘칼날’과 함께 난쟁이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난장이’ 연작의 의미를 구체화시킨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각각 독립된 두 개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교사가 학생들에게 ‘굴뚝 청소를 같이 한 뒤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깨끗한 아이 가운데 어느 쪽이 얼굴을 씻을 것인가?’를 묻고 이에 학생들이 상식적인 대답을 하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야기이다. 여기서 교사는 학생들의 경솔한 대답을 지적하면서 칠판에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를 그린다. 두 번째 이야기에는 앉은뱅이와 꼽추가 등장하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뫼비우스의 띠가 다양한 의미를 암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이야기에서 앉은뱅이와 꼽추는 아파트 입주권을 헐값으로 사들인 부동산 업자에게 복수를 결심하고, 결국에는 부동산 업자를 죽이게 되는데, 여기서 이 일에 소극적이었던 꼽추는 앉은뱅이의 행동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 이야기를 통해 보면, 뫼비우스의 띠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도 하는 현실의 상징이다. 또한 그것은 지식의 간사함에 대한 경계이며, 평등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희망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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