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조(1869~1927) |
신소설 작가. 호는 동농(東濃), 열재(悅齋). 경기 포천(抱川) 출생. 언론계에 종사하면서 <제국신문>과 <매일신보> 등을 통해 30편에 가까운 신소설을 발표하였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종(自由鐘)”(1910)은 주인공들의 토론형식을 빌어 정치이념을 제시한 작품이며 “화(花)의 혈(血)”(1910)은 부패관리의 부정을 폭로한 소설이다. 대체로 그의 신소설은 신교육과 개화사상을 고취하면서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반영하였다. “철세계(鐵世界)”는 프랑스의 베른의 소설을 번안한 것이며, 그 밖에도 한국의 고대 소설을 신소설화하여 “춘향전(春香傳)”을 “옥중화(獄中花)”, “심청전”을 “강상련(江上蓮)”, “별주부전”을 “토의 간”, “흥보전”을 “연(燕)의 각(脚)”으로 개작 발표하였다. 그 밖에 “춘외춘(春外春)”, “빈상설(上雪)”, “월하가인(月下佳人)”, “구마검(驅馬劍)”, “모란병(牡丹屛)”, “화세계(花世界)”, “원앙도(鴛鴦圖)”, “봉선화(鳳仙花)”, “비파성(琵琶聲)” 등이 있다.
▶ 원앙도(鴛鴦圖)
1. 줄거리
양덕군을 다스리는 민 군수는 조 감사가 새로 평양 감사로 부임해 오자 전전긍긍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두 집안의 선대(先代)에 혐의(嫌疑)진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 군수에게는 열 한 살밖에 안 되었지만 지모가 아주 뛰어난 ‘말불’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말불’이가 술수로써 조 감사의 병부를 훔쳐와 아버지에게 가해질 화를 면하게 하고 오히려 조 감사를 곯린다. 한편, 조 감사에게는 열 살 난 딸 ‘금쥐’가 있었는데 그녀 또한 ‘말불’에 못지 않은 기녀(奇女)라, ‘금쥐’도 계략을 써서 잃었던 조 감사의 병부를 되찾게 만든다. 이렇듯 재자(才子)와 기녀(奇女)의 지혜는 이루 측량할 수 없어 막상 막하로 겨루다가 끝내는 양가의 오래된 혐의(嫌疑)를 해소시키고 두 사람도 백년 가약을 맺게 된다. 이상이 <원앙도>의 전반부에 해당되며 후반부는 다음과 같다. 조 감사의 아우는 정부를 개혁하려다 붙들려 참변을 당하고 조 감사도 연루되어 잡혀 가게 된다. 금쥐는 안경지가 해주로 데려가서 보호한다. 그런데 안경지가 출타한 사이에 안경지의 아내가 ‘금쥐’를 해주 본관에 팔아먹는다. 그러나 금쥐는 조 감사와 막역지간인 해주 본관(本官)의 보호를 받게 된다. 이렇게 만난을 극복한 금쥐는 말불과 결혼, 출옥한 조 감사와 더불어 세 사람은 해외로 떠난다.
2. 핵심 정리
◎ 배경 및 시점 : 개화기의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시류에 따라 변해 가는 두 벼슬아치 집안을 배경으로 하는 전지적 작가 시점
◎ 주제 : 서구 문화의 수용. 전통적인 남존여비 의식에서 벗어나 여권 신장 의식 고취. 개화 의식 고취
3. 등장 인물
◎ 말불 : 민 군수의 아들. 지모가 아주 뛰어남.
◎ 금쥐 : 조 감사의 딸. 지혜가 뛰어난 기녀(奇女). 말불과 대립․갈등 관계에 있으나 결국 만난(萬難)을 극복하고 말불과 결혼하게 됨.
4. 이해와 감상
<원앙도>는 1911년 12월 30일 <보급서관>과 <동양서원>에서 발간된 개화기 신소설이다. 이 작품의 중심 구조는 ‘말불’이라는 민 군수의 아들과 ‘금쥐’라는 조 감사의 딸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다. 그러나 이들은 만난을 극복하고 화해를 이루며 갈등을 해소한다는 ‘해피 엔딩’의 결말을 보인다. 전반부의 말불과 금쥐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갈등 해소로 인한 백년 가약, 후반부의 파란 만장한 사건 전개 끝에 주인공들을 해외로 출국시킴으로써 사건의 대단원을 맺는 ‘양대 구조’를 지닌 작품이다. 따라서 <원앙도>는 소설의 갈등 구조가 다른 개화기 작품들에 비해 뚜렷하고 개연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밖에도 이 작품은 개화기의 시대적 사회상을 반영한다든지 정치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인신 매매, 관리들의 부패상 등을 깊이 있게 다룸으로써 당대의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 자유종(自由鐘)
1. 줄거리
작품의 배경은 1908년 음력 1월 16일 밤 이매경 여사의 집이다. 등장하는 인물은 신설헌, 이매경, 홍국란, 강금운 등 네 사람이다. 이 가운데에서 신설헌 부인이 사회격으로 제일 먼저 토론회를 제의한 다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그녀는 먼저 구시대의 유습인 여성의 인종(忍從)과 예속이 타파되어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는 여성 역시 새 시대의 의미, 국가와 민족의 앞날에 대해서 생각하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신설헌 여사의 말로 토론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여권(女權) 문제와 교육을 통한 개화․계몽, 국가 사회의 부강․자주책, 미신 및 계급․지방색 타파 등에 미친다. 먼저 여권 문제에 대해서는 남자가 절대 지배권을 행사하는 우리 사회의 폐습이 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와 동시에 교육, 계몽이 부국 강병과 새 사회 건설의 필수 요건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조상 숭배나 윤리․도덕 정신을 앙양하는 제사나 관혼 등 길사가 오로지 형식에 치우치고 있는 폐단도 시정해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한다. 한편 이 작품에서는 2세 국민들의 교육에 대해서 진지한 의견들이 펼쳐진다. 여기에서는 지난날의 부모 우선주의가 철폐되어야 할 과제로 제기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자녀 공물론'이다. 다음으로 사회 개혁과 부국 강병의 실현을 위해서 거론된 것은 신분간의 문제점 해소와 계층간의 난점 해소 방책 등이다. 여기에서는 우선 적서(嫡庶)의 그릇된 인식과 차별의 폐지가 주장되었다. 그에 따르면 인재 등용은 국익에 비추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 사회가 부당하게 서북 출신을 백안시했던 풍조를 비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바닥에 깔린 주제 의식은 신설헌 부인이 제시하는 말로 총괄된다. 이매경 여사는 꿈 이야기를 빌어서 자신이 꿈꾸는 우리 사회의 이상적 건설 상태를 피력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신소설, 정치 소설, 토론 소설
◎ 배경 : 시간(개화기) / 공간(이매경 여사의 집)
◎ 성격 : 개화기 사상 반영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표현 : 토론회 형식을 빌어 개인적인 의견과 자주 정신을 드러냄.
◎ 주제 : 자주 독립과 부국 번영. 여권 신장. 남녀 평등 의식 고취. 애국 정신 고취와 자유 교육 주장
3. 등장 인물
◎ 이매경 : 주인공. 생일날을 맞아 여러 손님을 초대함.
◎ 신설헌 : 숙부인(婦人). 토론회를 제의함.
◎ 홍국란과 강금운 : 그 밖에 토론하는 사람들
4. 이해와 감상
1910년 광학서포(廣學書鋪) 간행. 개화기의 사상을 반영한 일종의 정치소설로 '토론 소설'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이매경이라는 가정 부인의 생일에 초대받은 신설헌 등 몇몇 부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여권 문제, 자녀 교육과 자주 독립, 계급 및 지방색 타파와 미신 타파, 한문 폐지 등에 관하여 밤새도록 토론을 한 후 제각기 자기의 꿈을 이야기한다는 줄거리이다. 이 작품은 당시 지식 여성들의 입을 통하여 개화와 계몽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를 시사했으며, 토론이 성행한 개화기적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다. 전체가 40여 페이지 분량으로 비교적 짧지만 당시의 사회상과 개화 의식이 두드러진 초기작이다. 작품의 배경은 ‘가련한 민족이 된 통곡할 시대’에 생일을 맞은 이매경의 집이다. 이 날 초대받은 네 여자들이 토론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데, 우선 그 구성이 너무 단순하고 평면적이다. 또한 전개되는 사건이 독자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있다. 너무 단조로운 장면과 대화로만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자유종”은 여러 신소설 작품 가운데 주목받을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강한 시대 의식과 상황 의식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는 반봉건과 근대화 시도, 반외세(反外勢)와 자주 독립과 주체성의 확립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자유종”의 저변에는 이 두 개의 정신적 단면이 강한 줄기를 이루고 있다. 또, 이 작품은 대화체 형식과 논설 형식을 지니고, 계몽성과 정론성의 내용을 담은 특이한 유형으로 구분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대화체 형식이나 토론 형식, 혹은 문답 형식은 개화기 서사 문학의 한 장르로 삼을 수 있다.
▶ 화(花)의 혈(血)
1. 줄거리
전라도 장성의 호방을 지낸 최씨는 퇴기(退妓) 춘흥이와의 사이에서 선초와 모란이라는 두 딸을 두었다. 큰딸인 선초는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가졌다. 그러나 퇴기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기적(妓籍)에 그 이름이 올라 있다. 그러나 그녀는 행실이 곧고 마음이 단단하였다.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모여드는 뭇 사내들을 물리치면서 그녀는 장차 일부종사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선초의 아름다운 모습과 곧은 마음가짐에 대한 소문은 멀리 서울에까지 퍼진다. 당시 서울에는 제 잘난 체하고 호색으로 이름이 난 이 도사가 있었다. 그녀의 소문을 들은 이 도사는 곧 음심(淫心)이 동한다. 마침 나라에서는 동학당의 난리로 인해 전라도 지방의 소요를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던 터였다. 이 도사는 고관들에게 손을 써서 암행 어사격인 시찰사가 되어 장성 고을을 목표로 전라도 지방 시찰에 나선다. 이 고을 저 고을을 돌보는 체하면서 부정을 덮어 주고 그 대가로 뇌물을 받아 챙긴다. 반면에 자기의 눈에 거슬리는 자들은 가차없이 동학도의 누명을 뒤집어씌워 처단해 버린다. 장성 고을에 도착한 이 도사는 선초를 손에 넣으려다 실패하자, 이 도사는 선초의 아버지 최 호방을 묶어 들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선초는 눈물을 머금고, 부친을 놓아 줄 것과 정식으로 결혼하여 정실 부인으로 자기를 맞이할 것을 조건으로 이 도사의 요구에 응하기로 한다. 선초는 이 도사에게 계약서를 쓰게 하고 첫날밤을 보낸다. 그러나 하룻밤을 지내고 나자 이 도사는 도장을 찍어 주겠다고 속여 계약서를 도로 가져가 버린다. 그 후 이 도사는 선초에게 10원짜리 지폐와 함께 절연장을 보내온다. 배신당한 선초는 다량의 아편을 먹고 죽어 버린다. 선초가 죽자 장성 고을에 가뭄이 든다. 또한 그녀는 이 도사에게 밤마다 원귀가 되어 나타난다. 이에 장성 고을에서는 제사를 지내기로 하고 이 도사도 제사에 참여하여 술잔을 올린다. 그러자 다시 폭우가 쏟아지고 이 도사는 법부에 잡혀간다. 한편, 선초의 동생 모란이도 언니 못지 않은 미인으로 장성한다. 그녀는 자라면서 언니의 복수를 굳게 맹세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 도사는 3년의 형을 마친 후 다시 벼슬자리를 노려 국내외 고관들이 모인 자리에 참석한다. 거기에서 그는 미모의 기생 모란을 보고 접근한다. 모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과거를 폭로한다. 그리하여 이 도사의 출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고 끝내는 비럭질에 나서게 된다. 어느 날 좋은 사람을 만나 살림 차리고 잘 사는 모란의 집에 구걸을 하다가 모란에게 크게 창피를 당하고 쫓겨난다.
2. 핵심 정리
◎ 표현상의 특징 : 소재의 현실성과 사실적 묘사성이 강조되어 있으며, 문체는 언문 일치에 접근하고 있다. 일종의 풍속 소설
◎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 주제 : 양반 계급의 비리와 위선. 권선 징악
3. 등장 인물
◎ 선초 : 퇴기 춘흥과 최 호방 사이에서 난 딸
◎ 이 도사 : 동학난 진압차 지방을 순찰하는 흉폭한 관리
◎ 모란 : 선초의 동생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1911년 4월 6일부터 6월 21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된 소설이다. 1913년 <보급서관>에서 초판이 나왔고 1918년 <오거서창>에서 재판이 나왔다. 이해조는 신소설 작가 가운데서도 소설에 관한 한 소박한 견해를 지닌 작가였다. 그의 소설관은 이론적인 체계는 비록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소설 <자유종>, <화의 혈>, <탄금대> 등에서 간략히 피력하고 있다. 그는 <화의 혈> 끝부분에서 “소설은 매양 빙공 착영(憑空捉影, 허공에 기대어 그림자 잡기)으로 실정에 맞도록 편집하여 풍속을 교정하고 사회를 경성(警省)하는 것이 제일 목적이다.” 라고 하여 소설의 허구성에 대한 뚜렷한 의식과 견해를 보여 준다. 이러한 이해조의 소설관은 소설의 사실적 기법을 강조하면서 소설의 사회적 기능을 중시하는 작가 의식의 발로이다. 따라서 그는 문학에 대한 효용주의적 견해를 지니고 문학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였다. 이 작품의 끝부분에 언표된 다음과 같은 표현에는 이러한 그의 문학관이 잘 나타나 있다. “기자 왈, 소설이라 하는 것은 매양 빙공 착영(憑空捉影)으로 실정에 맞도록 편중해야, 풍속을 교정하고 사회를 경성(警省)하는 것이 제일 목적인 중, 그와 방불(彷佛)한 사실이 있고 보면, 애독하시는 열위 부인, 신사의 진진한 자미가 일층 더 생길 것이요, 그 사람이 회개하고 그 사실을 경계하는 좋은 영향도 없지 아니할지라. 고로, 본 기자는 이 소설을 기록하매 스스로 그 자미와 그 영향이 있음을 바라고 또 바라노라.”
이호철(1932~) |
소설가. 함남 원산 출생. 원산고 졸업. 1955년 “탈향”이 <문학예술>에 추천되어 등단. 남북 분단의 아픔, 시대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인간형을 주로 그리면서, 현실을 폭넓게 수용하는 리얼리스트 작가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본인은 스스로 낭만주의에 가깝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의 작품 속에는 현실적 조건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모습이 집중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는 정치적으로 박해를 많이 받은 작가이기도 하다. 대표작으로 “판문점”, “닳아지는 살들”, “소시민”, “서울은 만원이다” 등이 있다.
▶ 닳아지는 살들
1. 줄거리
5월의 어느 날 저녁, 밤 열두 시에 돌아온다는 맏딸을 언제나처럼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 조용하고 썰렁한 집안에는 은행에서 은퇴한 늙은 주인, 며느리 정애, 그리고 막내딸 영희가 소파에 앉아 있다. 어디서 꽝당꽝당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온다. 정애는 이 집 맏딸의 시사촌 동생인 선재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을 상기시킨다. 선재는 죽은 영희 어머니가 몹시 아낀 청년이다. 마침 이층에서 내려온 성식은 왜들 그러고 앉아 있느냐고 가시 돋친 말을 한다. 바짝 야윈, 파자마 차림의 오빠를 영희가 비꼰다. 술에 만취된 선재가 들어오자 영희가 그를 부축하고 올라가고 성식도 이층으로 올라간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정애는 까닭 없이 불안해지고 갑자기 조급해지는 것을 느낀다. 영희는 선재가 쓰는 초라한 방에서 선재의 품에 안기어 쇠망치 소리를 혼자 감당하기 힘들고 무섭다고 말한다. 그녀는 오빠의 방을 찾아가서 지금 막 결혼을 했다고 이야기하나 성식이 물끄러미 천장만 쳐다볼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영희는 쓰디쓴 웃음을 보인다. 점점 열두 시는 가까워지고 늙은 주인은 푸념을 하는 어린애처럼 코의 사마귀를 만지면서 두리번거린다. 그 순간, 시계가 열두 시를 치고, 모두의 시선이 시계와 노인의 얼굴로 향하는데, 복도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기묘한 웃음을 띤 식모가 나타나 변소에 갔었다고 말한다. 영희는 식모를 가리키면서 언니가 정말 왔다고 소리친다. 아버지는 영희의 부축을 받으면서 허공에 대고 허우적거린다. 꽝당꽝당 하는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는 온밤 내내 이어진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5월 어느 날 저녁) / 공간(어느 실향민 가정의 응접실)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표현 : 실향민 세대와 젊은 세대의 갈등이 분단의 비극에서 비롯됨을 그려 냄
◎ 구성
발단 - 20년이나 돌아오지 않는 맏딸을 기다리는 가족
전개 ① - 꽝당꽝당 하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쇠 두드리는 소리. 영희와 성식의 불협화음
전개 ② - 언니의 시사촌 동생 선재와 영희의 관계. 아무 반응 없는 오빠 성식의 태도
절정 - 열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와 식모를 가리키며 언니라고 소리 치는 막내딸 영희
결말 - 계속해서 들리는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
◎ 주제 : 전쟁이 가져다 준, 가족의 내면적 파탄의 비극. 전후(戰後)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 가족의 권태와 비극
◎ 출전 : <사상계>(1962)
3. 등장 인물
◎ 아버지 : 은행 근무하다 퇴직한 70세의 노인으로 거의 백치(白痴)가 다 된 인물로 맏딸을 기다린다.
◎ 영희 : 막내딸로서 29세의 노처녀, 가족들의 의미 없는 삶에 불만을 토로한다.
◎ 성식 : 아내와의 애정이 결핍된 채 이층 방에서 칩거하는 작가 지망생으로 현실 패배주의자이다.
◎ 정애 : 성식의 아내로서 남편에게 정을 느끼지 못하며 시아버지 모시는 일 외에는 하는 게 없는 정적인 인물이다.
◎ 선재 : 맏딸의 시사촌 동생으로 영희의 연인이다.
4. 이해와 감상
월남하여 북에 두고 온 맏딸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실향민의 아픔과 고뇌를 그린 이호철의 단편 소설이다. 그러나 모두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저 기다림과 무기력 속에 침몰해 가는 한 가정의 분위기가 더없이 어둡고 무겁게만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한 가정을 무대로, 20년이나 돌아오지 않는 맏딸을 기다리는 초조한 상황을 소설화하고 있다. 시간적 배경은 5월의 어느 날 저녁에서 열두 시까지의 현재의 상황에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이 삽입된 구조이며, 공간적 배경은 현실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점점 폐쇄되어 가는 어느 가정이다. 작가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이 소설은 속편 격인 “무너앉는 소리”와 함께 안톤 체호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꽝당 꽝당 울리는 쇠붙이 소리를 배경음으로 하여 분단의 비극이 한 가정에 가져다 준 정신적 고통을 상징적으로 처리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뚜렷한 사건의 전개가 없고, 등장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 역시 한결같이 단절된 마음의 벽을 느끼게 해 준다. 특히, 등장 인물들간의 심리적 갈등은 긴장감을 고조시키면서 특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묵중한 침묵과 불길하면서도 음산한 분위기는 이 작품의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특징이다. ‘문’ 역시 그러한 분위기 형성에 이바지하는 소설적 장치인데, 이는 아마도 그 가족 구성원들의 삶이 거의 폐쇄된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왜냐 하면, 이층으로 통하는 ‘문’에서는 침묵 일변도의 오빠 성식이만 등장하며, 복도로 통하는 문에서 나타난 사람은 기다림의 대상이 결코 아닌 식모였기 때문이다. 긴장감과 기대감이 일시에 무너지자 막내딸 영희는 식모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는 '정말 언니가 왔다.'고 아버지를 향해 소리친다. 그것은 이 지루하고 무의미한 기다림을 그만 끝내자는 반발의 외침이며, 기다림이 좌절된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의 감정이다. 이 소설의 기본틀을 ‘기다림 → 기다림의 좌절 → 기다림을 재촉하는 쇠붙이 소리’로 본다면 이 가족은 또다시 끝없는 기다림의 늪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세월 속에서 가족 간의 유대감은 점점 마멸되어 제목 그대로 '살이 닳아지는' 아픔만이 남게 될 것이다.
▶ 소시민
1. 핵심 정리
◎ 배경 : 현대사의 격동기의 삶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주제 : 한 소시민의 왜곡된 삶과 피해 의식
2. 등장 인물
◎ 나 : 소자본으로 이룩한 제면소의 주인. 단순하고 무식한 인물
◎ 신씨 : 일제 시대 자원병으로 버마 전선까지 다녀온 인물
◎ 정씨 : 고등교육을 받고 남로당에 입당한 경험이 있는 인물
◎ 천안 색시 : 전쟁에 남편을 잃은 양공주
3. 이해와 감상
<소시민>은 1964년 <세대(世代)>지에 연재된 장편소설로서 이호철의 작품 세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이호철의 작품 세계는 인간의 삶의 아름다움을 구체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러한 그의 인식은, 이기적인 낭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물들이 겪는 순간 순간의 ‘사람다움의 체험’을 의미하고 있다. 그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삶의 찌든 모습을 안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사람다움의 순간들을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다움의 체험은 바로 작가 자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소시민>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삶의 실상도 이러한 범주에 속해 있다. <소시민>에는 다음과 같은 삶의 실상들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북에서 피난 와서 처음으로 부두 노동을 하다가 우연히 제면소(製麵所)에서 일하게 된 ‘나’, 단순하고 무식하면서도 전쟁의 혼란 속에서 원조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어 팔아 소자본을 이룩한 제면소 주인, 소자본가로서 먹을 것 걱정은 없으나 복잡한 가정 문제로 신경질을 부리고 성적(性的) 불만을 적당히 해결하는 주인 여자, 일제 시대 지원병으로 버마 전선에까지 끌려갔다 온 일이 있고 지금도 일본군을 절대절명의 존재로 생각하며 전란의 소용돌이를 피안의 불로 바라보면서 주인에게 순종만 하는 신씨(氏), 고등교육을 받은 후 징용도 다녀오고 남로당에 가담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제면소에서 찌들고 있는 정씨(氏), 옛날 정씨의 부하로서 제면소 시절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 마침내 정전(停戰)지지 테러에 가담하는 김씨(氏), 지식인 출신으로 제면소에서 기식(寄食)하다가 자살한 강 영감, 지주 아들 출신으로 소시민적 허세가 심한 곽씨(氏), 전쟁에 남편을 잃고 제면소 식모에서 양공주가 된 천안 색시 등등 온갖 계층의 인물들이 제면소를 중심으로 혼란기를 살고 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인물들 하나 하나의 삶의 밑바닥에 감추어진 어떤 진실들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을 느끼게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각자의 삶은 그들 자신의 책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의식은, “어차피 사회 전체의 격동 속에서는 종래의 형태로 있던 사회 각 계층의 단위들이 그 단위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모든 계층들이 한 수렁 속에 잠겨서 격한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탁류를 이루게 마련이었다.”는 작가의 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따라서, <소시민>은 삶의 희극적인 요소를 소설의 표면에 보다 많이 제시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작품이다. 여기서 말하는 희극적 요소들이란, 그 자체의 내면적 비극성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상황과의 관련 아래서 삶의 연극성을 인식한 데서 나온 것이며 인간의 본성에 대한 긍정적인 파악에서 나온 것이다.
▶ 판문점
1. 줄거리
날이 개기 시작하자 진수는 호텔에서 나와 버스에 몸을 싣고 판문점으로 향했다. 그는 몸조심하라고 당부하던 형님의 말이 생각났다. 버스 안에서 외국인 기자 하나가 별로 우습지도 않은 얘기로 상대방을 웃기려고 떠들어대자 뒷자리에 앉은 어떤 작자가 그 기자에게 면박을 주었다. 다른 한 편에서는 부부인 듯한 외국인 기자 둘이 작은 소리로 정답게 소근거리고 있었다. 버스가 판문점에 도착했다. 외국인 기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에 바빴다. 이어 북쪽 기자들도 도착했다. 남쪽과 북쪽 기자들은 자연히 어울리게 되고 그 중 서로 안면 있는 기자들끼리는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회담이 시작될 무렵, 남색 원피스 차림에 붉은 완장을 두른 북측 여기자가 서울이 어떠냐고 말을 걸어왔다. 이어서 북측 여기자와 진수는 남과 북의 체제에 대한 토론을 벌였으나 합일점 없는 대화만 오고 갔다. 날이 갑자기 흐려지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끼는가 하더니 이내 소나기가 퍼부었다. 진수는 다급한 나머지 북측 여기자의 손목을 쥐고 옆의 지프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잠시 후, 엉겁결에 함께 차를 타게 된 그녀는 당황해 했다. 자신이 납치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하는 눈치였다. 진수는 부드러운 말로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자, 형님은 재미있었느냐고 물었고 진수는 괜찮았다고 대답했다. 진수는 제 방에 가서 잠을 청했으나 잠이 오질 않았다. 북측 여기자의 재잘대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는 잠시 상상의 날개를 펴 보았다. 먼 훗날, 판문점이 사라지고 판문점이라는 단어는 고어가 되어 사전에서나 찾을 수 있을 그런 때를 상상해 보았다. ― 상상 속의 그 날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날도 그녀는 판문점으로 취재차 나왔다. 저번 취재 때 익살을 떨던 안경잡이 기자와 그가 누님이라고 불렀던 북측의 중년 여기자는 오늘도 오뉘처럼 다정스레 인사를 나눈다. 전날 진수가 만났던 그 여기자는 남쪽 사람과 북쪽 사람이 만날 때면 으레 짓는 그런 경계와 방어 태세가 껴묻은 표정으로 진수를 피했다. 그러한 그녀의 뒷모습을 건너다보면서 진수는 ‘기집애 조만하면 쓸 만한데, 쓸 만해.’ 하며 혼자 쓸쓸하게 웃었다. ― (이 작품은 진수의 이런 상상으로 끝난다.)
2. 핵심 정리
◎ 배경 : 1960년대 초의 판문점
◎ 시점 : 작가 관찰자 시점
◎ 주제 : 분단의 아픔과 고착된 이데올로기의 거리
3. 등장 인물
◎ 진수 : 판문점 취재 기자
◎ 여기자 : 스물 네 살의 북측 판문점 취재 기자
4. 이해와 감상
1961년에 발표된 <판문점>은 그 해 <현대문학> 신인상 수상작이다. 주인공 진수의 가슴 깊은 곳에 뚜렷이 자리잡고 있는 은밀한 화해의 목소리가 미미하지만 작품 전체를 울리어 끊임없는 메아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소설 <판문점>은 주인공 진수가 북측 여기자와 자신의 형을 묘사하면서 분단의 상황 속에서 각자의 상황을 허물어 버리고 화해의 상황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식의 세계를 깊이 있게 드러낸 작품이다. 따라서 <판문점>은 <탈향>, <나상>, <만조> 등 그의 초기 작품과 <남풍북풍>, <카레이우라> 등 최근 작품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전쟁으로 인한 분단의 엄청난 상황 아래서 청소년의 개인적 삶과 인간성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판문점>을 비롯한 <소시민>, <부시장 부임지로 안 가다>, <문> 등에서는 점차 사회적인 관심으로 작품 세계를 확대해 나갔다. 그것은 분단 현실 속에서 인생에 대한 내면적인 해법을 보여 주고자 한 작가 정신에서 기인한 것이다. 주인공의 소외감을 짙게 깔고 있는 이 작품에서 남북 간의 합치될 수 없는, 그러나 합치되어야 할 깊은 '장벽'을 밀도 있게 형상화한 것도 분단 현실에 대한 작가의 해법을 제시한 것이 아닐까.
▶ 탈향(脫鄕)
1. 줄거리
한 마을에 살다 6․25 전쟁으로 함께 월남한 네 청년은 부산에 도착하여 궁핍한 피난살이를 시작한다. 기거할 방을 마련하지 못하여 역에 정차해 있는 화물차의 빈칸에서 새우잠을 자야 하는 어려운 삶이지만, 고향에 돌아갈 때까지 고생스럽더라도 함께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성격이 원만하여 부산 토박이들과 잘 어울리는 광석과 무뚝뚝하고 사교성이 없는 두찬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네 명 사이에는 거리감이 생기고, 이들은 서서히 각자 자기의 살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자는 도중 화차가 떠나자 화차에서 뛰어내리다 잘못 되어 광석의 팔이 잘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두찬은 다친 광석을 내버려두고 가자고 하였지만, ‘나’는 하원의 청으로 광석을 화차로 데려와 눕히나 광석은 결국 죽고 만다. 이후 남은 세 사람 사이는 더욱 삭막해진다. 두찬은 광석을 버리고 가자고 한 데 대해 자괴감을 느끼면서 더욱 성질이 사나워지고 급기야 ‘나’와 하원을 버리고 떠난다. 두찬을 두려워하던 하원이 ‘나’와 함께 둘이서 잘 살아 보자고 희망에 차서 이야기하지만, ‘나’ 역시 하원을 버릴 생각을 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6․25 전쟁 직후) / 공간(부산 역과 부두 근처)
◎ 성격 : 실존적
◎ 표현 : 간결체 문체로 사건을 속도감 있게 전개함.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구성
발단 - 부산에 피난 와서 화차 칸을 전전하여 위험하게 살아가는 광석, 두찬, 하원과 ‘나’
전개 - 성격 차이로 인해 광석과 두찬 사이가 벌어짐.
위기 - 광석이 출발한 화차에서 뛰어내리다 다쳐서 죽음.
절정 - 광석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던 두찬마저 ‘나’와 하원을 버리고 떠남.
결말 - 남은 둘이서 잘 살아가자고 말하는 하원을 버리고 떠날 생각을 하는 ‘나’
◎ 제재 : 월남한 네 청년이 피난지에서 겪는 체험
◎ 주제 : 전후(戰後) 월남한 실향민의 고통과 비애
◎ 출전 : <문학예술>(1955)
3. 등장 인물
◎ ‘나’ : 19살 청년으로, 홀로 월남하다 같은 고향의 광석, 두찬, 하원을 만나 부산 역 근처의 화차 칸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물. 냉철한 성격으로, ‘나’를 포함한 네 인물이 피난지에서 갈라서게 되는 과정을 서술한다.
◎ 광석 : 24살 청년으로, 토박이 부산 사람들과 손쉽게 친해지는 원만한 성격을 지녔으나 열차 사고로 죽는다.
◎ 두찬 : 24살 청년으로, 자존심이 강하고 냉정하여 광석의 죽음을 방치한 후 자책감을 느끼나 ‘나’와 하원을 버리고 혼자 살길을 찾아 떠난다.
◎ 하원 : 18살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연약한 성격의 인물이다.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6․25 전쟁 때 월남한 실향민이 어떻게 ‘타향 살이’를 시작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등장 인물들이 함께 살아가려고 하다가 급기야 서로 갈라서게 되는 과정은 이들이 ‘고향’을 벗어나(제목인 ‘탈향’의 의미임) 각자 개별화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상징한다. 고향이란 하원이 늘상 그리워하는 순백색의 눈이라든가 형수의 웃음이 상징하는 공동체의 삶의 공간임에 비해 이들이 피난 온 부산의 역과 부두라는 공간은 고향과 같은 정착의 장소가 아니라 늘상 버리고 떠나는 일이 벌어지는 이주(移住)의 공간으로, 현대 사회를 상징한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벌이는 ‘탈향’은 단순한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공동체적 삶이 이루어지던 전통 사회로부터, 각각 갈라서서 개별화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 사회로의 시간적 이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단순 구성 방식을 취하면서 부분적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 역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친밀하던 네 사람의 관계가 점차 벌어지면서 갈등이 고조되어 가는 단순 구성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간결한 문체로 사건을 속도감 있게 전개하고 있는데, 인물들의 대상에 사투리를 사용하여 인물을 현실감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1인칭 시점으로 ‘나’의 관점에서 인물과 정황들을 묘사하고 있으나, ‘나’의 주관적 평가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고 객관적인 관찰과 묘사에 가깝다.
이효석(1913~1990) |
소설가. 강원도 평창 출생. 호는 가산(可山). 제일 고보, 경성 제대 영문과 졸업.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소설 “도시와 유령” 발표하여 등단. 함북 경성농업학교,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편 생활. 초기에는 '동반자(同伴者) 작가'로서 경향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인간의 순수한 자연성, 원초적 욕망의 세계를 탐구, 서정성 높은 작품을 발표. 1933년 구인회(九人會) 회원으로 참가하기도 했음. 대표작으로 “노령 근해”, “돈(豚)”, “산”, “분녀”, “들”, “메밀꽃 필 무렵”, “장미 병들다” 등이 있다.
▶ 돈(豚)
1. 줄거리
주인공 ‘식이’는 고지식한 농촌 청년이다. 그는 돼지새끼를 받아 세금을 내고 분이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겠다는 꿈을 가지고 소박하게 살아간다. 푼푼이 모은 돈으로 돼지 한 쌍을 사서 길렀다. 얼마 뒤 놈은 죽고 마랑T고 암놈만 겨우 살아 남았다. 그는 암놈을 방에다 지푸라기를 깔아주고 자기 밥그릇에 먹이를 주어가며 길렀다. 이 돼지는 식이의 전체 희망이 걸려있는 돼지인 것이다. 그는 어서 돼지 새끼를 갖고 싶은 마음에서 여섯 달 밖에 안 된 어린것을 종묘장에 데리고 갔으나 교섭에 실패한다. 달포 후 두 번째로 데리고 가서야 어렵게 성사를 시킨다. 식이는 암놈이 고통을 당하는 동안 구경꾼들의 낄낄거리는 음담 속에서 달아나 버린 분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분이는 박 초시의 딸로서 그가 아주 공을 들이면서 손에 넣으려 했던 여성이다. 그런데 그녀는 입술이 늘 뾰로통해 있었고 쌀쌀하게 굴더니 그녀가 그만 며칠 전에 가출해 버린 것이다. 돼지와 분이를 놓고 여러 가지 공상을 하던 식이는 철도 건널목을 지나오면서 하마터면 기차에 칠 뻔하였다. 말하자면 다른데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앞에 끌고 가던 돼지는 흔적도 없이 차에 깔려 사라져 버렸다. 그 역시 위기 일발의 순간에 목숨을 건졌으나 건널목 망꾼에게 따귀를 얻어맞는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종묘장에서 건널목에 이르는 길(공간적 배경은 처음부터 사건이 일어나는 종묘장으로 분이의 가출과 돼지의 철도 사고에서 오는 황폐한 공간이며, 시간적 배경은 현재의 시간이 계속되다가 돼지의 교미를 연상하는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과 분이와 함께 살 것을 상상하는 미래의 시간이 섞여 있다.)
◎ 경향 : 낭만주의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표현 : 인간의 내면에 잠재한 애욕을 동물에 빗대어 표현
◎ 구성
발단 - 식이는 어린 암퇘지를 데리고 종묘장에 가서 접을 붙이나 쉽게 성공하지 못한다.
전개 ① - 씨돼지는 화차같이 말뚝 위를 엄습하고, 식이는 도망간 분이 생각에 열중한다.
전개 ② - 씨받이 후 암퇘지와 돌아오면서 식이는 분이가 차장이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절정․결말 - 분이 생각에 빠진 식이는 건널목에서 돼지를 기차에 치어 날려보낸다.
◎ 주제 : 원시적인 욕정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 생활의 애환. 자본주의 횡포에서 오는 좌절감과 인간의 순수한 애욕. 인간의 의식 속에 잠재한 성적 본능
◎ 출전 : <조선지광(朝鮮之光)>(1933)
3. 등장 인물
◎ 식이 : 주인공. 가난하고 소극적이며 고지식한 농촌 청년. 돼지를 교미시켜 새끼를 받아 분이와 결혼해 살아가고자 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한 정적 인물
◎ 분이 : 식이의 연인. 그러나 본문에는 직접 등장하지 않음.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의 주인공 식이는 한 시대의 사회 현실로부터 똑바로 걸어나온 인물이다. 종묘장의 묘사도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면서 생생하고, 식이가 분이를 생각하는 대목도 무리 없이 자연스럽다. 특히, 분이와 돼지에 대한 공상 장면이 짤막한 서술자로서 상황을 집약해 준다. “장에 가서 돼지를 팔면 노자가 되겠지. 차 타고 노자가 자라는 곳까지 달아나면 그곳에 곧 분이가 있지 않을까… 농사같이 초라한 업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못살기는 일반이니… 분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 돈과 사랑에 굶주린 그에게 있어 돼지의 상실은 곧 분이의 상실임을 암시한다. 더욱 그 당시 우리 농촌 현실의 어려운 단면이 제시된 점도 흥미로운 일이다. 또한, 이 소설은 돼지의 교접 행위를 통하여 잠재의식 속에 내재해 있는 인간의 성적본질이 되살아난다고 하는 독특한 섹스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즉 동물의 성행위와 등장인물의 성적 욕구를 별치시킨다거나, 암퇘지의 상실과 분이의 상실을 대응시킨 것과 같은 반복된 기법을 구사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의 성욕이 갖는 동물적 본능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이 나타나 있다. 이를테면, “돈”에서 식이가 암퇘지를 성욕의 대상으로 분이와 동일시한 것으로 파악되며, 그 외에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생원과 당나귀, “수닭”에서 을손과 수탉에서도 진한 관계가 엿보인다. 이와 같이 이효석의 동물 세계는 유독한 인물과 일대일 대응의 관계로 동거동식하여 주인공의 분신이나 애정의 투사 대상으로 동물들이 나타난다. 한편 “분녀”에서 돼지꿈, “독백”에서 종묘장 돼지 등 동물들이 등장 인물의 성욕을 환기시키는 소재로도 이용된다. 작가는 성에 대한 문제를 윤리적 가치를 부여한 적극적인 방법이 아닌, 성 자체에 대한 집념으로 동물적 애욕을 추잡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삶에서 성이 갖는 궁극적 의미보다는 동물적인 본능 그 자체로써 제시한 이 작품은 향토성 짙은 문학의 하나로 평가된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이효석은 경향파 문학에서 탈피하여 자연성을 예찬하는 서정적 문학으로 돌아섰다.
▶ 들
1. 줄거리
학교를 퇴학 맞고 처음으로 도회에서 쫓겨 시골로 내려온 '나'는 변하지 않은 버들 숲 둔덕과 과수원의 모습을 보며 기쁨을 느낀다. 나는 들에서 전에 느껴 보지 못한 평안함과 따뜻함을 느끼며 들과 벗삼아 지낸다. 어느 날 나는 개울 녘 풀밭에서 한 자웅의 개가 장난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곤 그것을 계속 지켜보다가 주위에 옥분이가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득추에게 가난하다고 파혼 당한 처지이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측은히 생각했고 그녀도 자기를 동정해 주는 ‘나’를 좋아했다. 일요일이 되어 ‘나’는 문수와 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나’의 책을 학교에서 뺏길 뻔하였다고 문수가 이야기를 한다. ‘나’와 문수는 이 협착한 땅에 자유로이 책도 읽고 지낼 수 있고 아무리 자유로운 말을 외쳐도 중지당하는 법이 없는 ‘들’이 있음을 기쁘게 생각했다. 어느 날 ‘나’는 과수원으로 몰래 딸기를 따러 가다가 옥분을 만나 하룻밤을 같이 자게 된다. 그 후 계곡에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옥분이와는 이제 남이 아니라는 생각에 골몰하다가 몸에 상처까지 입는다. 문수와 함께 사냥 갔을 때, ‘나’의 상처를 보게 된 문수가 어찌된 일인가고 묻자 ‘나’는 옥분과의 일을 말해준다. 그러자 문수 또한 옥분과는 남이 아닌 처지라며 지난 일을 얘기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무거운 감정이 가벼워짐을 느끼게 된다. 그 후 문수는 정학 처분을 받았으나, 영영 학교를 쫓겨나게 된다. 그래서 ‘나’와 문수는 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돌연히 문수가 끌려간 후 소식이 없게 된다. ‘나’는 문수가 돌아오면 함께 지낼 여러 가지 재미있는 여름 계획을 세운다. 문수가 돌아오면 풋콩을 구워 먹이고 기름종개도 많이 떠 먹이고 씨름을 해서 몸도 불려 줄 생각을 한다.
2. 핵심 정리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배경 : 어느 산골 마을
◎ 주제 : 인간의 본능적인 관능과 자연과의 친화
3. 등장 인물
◎ 나 : 사회 운동을 하다가 학교를 퇴학 맞고 들을 벗삼아 지내는 청년
◎ 문수 : ‘나’의 친구. 정학 처분을 받고서 어디론가 끌려가 돌아오지 않음.
4. 이해와 감상
이 소설은 사회 운동을 하다가 학교에서 쫓겨나서 ‘들’을 벗삼아 사는 한 주인공의 이야기로, 세상 사회의 부자유스러움과 속박에서 벗어난 기쁨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도 『화분』과 마찬가지로 죄 의식이 전혀 없는 성(性)의식이 나타나 있다. 즉, ‘들’의 서정적인 배경 속에서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는 자연적 욕구의 일부분이면서 도덕적 가치 이전의 근원적인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이효석의 에로티시즘의 미학은 그의 자연 회귀 소설의 기저를 이루는 미학적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효석을 가리켜 흔히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 또는 「위장된 순응주의자」라는 단적인 평가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종래의 경향적 색채에서 탈피하여 자연으로의 회귀를 통한, 인간의 근원적인 서정 세계를 구축했다는 의견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 메밀꽃 필 무렵
1. 줄거리
봉평장의 파장 무렵,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 생원은 장사가 시원치 않아서 속이 상한다. 조 선달에 이끌려 충주집을 찾는다. 거기서 나이가 어린 장돌뱅이 ‘동이’를 만난다. 허 생원은 대낮부터 충주집과 짓거리를 벌이는 ‘동이’가 몹시 밉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계집하고 농탕질이냐고 따귀를 올린다. ‘동이’는 별 반항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물러난다. 허 생원은 마음이 좀 개운치 않다. 조 선달과 술잔을 주고받고 하는데 ‘동이’가 황급히 달려온다. 나귀가 밧줄을 끊고 야단이라는 것이다. 허 생원은 자기를 외면할 줄로 알았던 ‘동이’가 그런 기별까지 하자 여간 기특하지가 않다. 나귀에 짐을 싣고 다음 장터로 떠나는데, 마침 그들이 가는 길가에는 달빛에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달빛 아래 펼쳐지는 메밀꽃의 정경에 감정이 동했음인지 허 생원은 조 선달에게 몇 번이나 들려준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 한때 경기가 좋아 한밑천 두둑이 잡은 적이 있었다. 그것을 노름판에서 다 잃어버렸다. 그리고 그는 평생 여자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런데 메밀꽃이 핀 여름 밤, 그 날 그는 토방이 무더워 목욕을 하러 개울가로 갔다.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성 서방네 처녀를 만났다. 성 서방네는 파산(破産)을 한 터여서 처녀는 신세 한탄을 하며 눈물을 보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허 생원은 처녀와 관계를 맺었고, 그 다음날 처녀는 빚쟁이를 피해서 줄행랑을 놓는 가족과 함께 떠나고 말았다. 그런 이야기 끝에 허 생원은 ‘동이’가 편모(偏母)만 모시고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발을 빗디딘 허 생원은 나귀의 등에서 떨어져 물에 빠지고 그걸 ‘동이’가 부축해서 업어 준다. 허 생원은 마음에 짐작되는 데가 있어 ‘동이’에게 물어 보니 그 어머니의 고향 역시 봉평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동이’가 자기처럼 ‘왼손잡이’임을 눈여겨본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순수 소설
◎ 배경 : 시간(오후부터 밤까지) / 공간(봉평 장터, 대화로 가는 달밤의 시골길, 메밀 밭, 제천)
◎ 성격 : 서정적, 낭만적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갈등 : 허 생원 ↔ 동이
◎ 표현 : 낭만적 흐름을 보이면서도 사실적 묘사가 많이 나타남. 대화의 진행과 암시에 의한 주제 부각. 지명의 반복으로 의식과 감정을 고조시키는 효과를 냄.
◎ 구성
발단 - 장돌뱅이 허 생원과 조 선달이 파장하고 대화장으로 갈 준비를 한다.
전개 - 허 생원은 과거 성 처녀와의 연분을, 동이는 불행했던 자신의 성장을 말한다.
절정 - 허 생원은 동이의 어머니가 성 처녀가 아닐까 생각한다.
결말 - 허 생원은 동이에게서 혈연의 정을 느끼고 성 처녀를 찾아 제천으로 가려 한다.
◎ 제재 : 장돌뱅이 허 생원 일행의 삶
◎ 주제 : 인간 본연의 애정
◎ 출전 : <조광>(1936)
3. 등장 인물
◎ 허 생원 : 주인공. 장돌뱅이. 과거의 추억 속에 사는 고독한 인물. 숫기가 없고 아둑시니 같지만 투전을 하는 면, 서정적인 일면도 있음. 유랑의 원형을 가진 떠돌이 인생
◎ 동이 : 장돌뱅이. 젊은 혈기와 순수함을 간직한 젊은이. 행동에서 허 생원의 친자식으로 암시되는 인물
◎ 조 선달 : 보조적 인물. 장돌뱅이. 남의 흉허물을 덮어줄 줄 아는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의 특징은 공간적 배경이 직접 작품 주제에 관여한 점이다. 작품 전체의 공간적 배경은 강원도 땅 봉평에서 대화에 이르는 80리의 밤길이다. 이 밤길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즉 일정한 목적지로 가기 위하여 설정된 단순한 수단으로서의 통로가 아니다. 이 밤길은 떠돌이 주변인, 유랑객들에겐 정신의 고향으로서 안식처(安息處)다. 푸른 달빛에 젖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밤길―이 아름답고 낭만적인 자연이야말로 그들에겐 꿈과 같은 환상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세계이다. 부드러운 달빛이 흐르는 달밤에만 옛 연분 얘기를 꺼내는 허 생원의 심리를 더 없이 밝히는 이 낭만적인 배경과 분위기가 이 작품을 더욱 매력적(魅力的)으로 만들어 준다. 한편 이 작품에서는 시대성이나 사회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이 점은 이 작품이 정치적 현실을 외면하고 짙은 예술성을 지향하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관능적(官能的) 정서를 고유의 토착(土着)정서에 여과(濾過)시킴으로써 한국 산문 예술에서의 서정(抒情)을 승화시키는 데 사용하였으며, 특히 회상 형식으로 이어지는 장돌뱅이 허 생원의 애수는 산길, 달밤, 메밀꽃, 개울로 연결되면서 한국 정서로 자리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은 1930년대의 어려운 상황(일제 치하)에서 또 다른 산문 문필의 한 영역을 개척(開拓)했다 하겠다. 그리고, 이 작품은 남녀간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친자 확인(親子確認)이라는 두 가지 이야기가 기본 줄기를 이룬다. 이 이야기가 겉과 속을 이루면서 미묘한 운명을 드러내는 과정에 ‘길’이 등장한다. 그 ‘길’은 낭만적 정취를 듬뿍 머금은 달밤의 산길이다. 물론, 그 길은 허 생원 일행에게는 생업(生業)의 길목이지만, 괴로운 인생사의 현장이기보다는 삶과 자연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세계이다. 온갖 각다귀, 잡배가 우글거리는 장터의 산문적(散文的)인 현실과는 격리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는’ 운문적(韻文的)인 몽환(夢幻)의 세계이다. 여기에 사랑의 추억과 인연(因緣)의 끈질김이 어우러지면서 한 늙은 장돌뱅이의 애환이 드러난다. 이 작품의 두드러진 묘미는 인간과 동물의 본능적 애욕을 교묘하게 병치(竝置)시킨 구성방식에 있다. 허 생원이 술집에 들어가 충주집을 탐내고 있을 때, 그의 당나귀는 암놈을 보고 발정(發情)을 한다. “늙은 주제에 암샘을 내는 셈야. 저놈의 짐승이….” 하는 아이들의 말소리를 허 생원은 자신에 대한 조소처럼 느낀다. 이것만이 아니다. 메밀꽃이 하얗게 핀 달밤에 허 생원은 성 서방네 처녀와 꼭 한번 정을 통한다. 평생 처음이요, 마지막 기회였다. 허 생원이 처녀에게 잉태시킨 것처럼 당나귀는 읍내 강릉집 피마에게 새끼를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나귀의 까스러진 갈기, 개진개진한 눈은 허 생원의 외양(外樣)과 흡사하다. 이 소설은 세련된 언어와 시적 분위기 속에서 낭만적 정서의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궁싯거리다’, ‘칩칩스럽다’, ‘농탕치다’ 등의 다채로운 어휘와 함께, 허 생원 일행이 달밤에 걸어가는 장면은 언어 예술의 한 진경(眞境)을 이루고 있다. 그러기에 김동리(金東里)는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고 평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낭만적 필체만을 지닌 것은 아니다. 파장 무렵의 시골 장터 풍경 묘사, 주인공 허 생원을 닮은 나귀 묘사 등은 뚜렷한 사실성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인간의 삶을 운명적으로 표현한 세 가지는, 단 한 번의 연애에 대한 추억과 동행하는 ‘동이’가 아들이라는 생각, 그리고 세 인물이 모두 불행하고 가난하고 외롭다는 점이다.
<참고> 허 생원과 나귀
이 작품에는 주인공 ‘허 생원’과 함께 그와 정서적으로 융합하는 동물로 ‘나귀’를 상징적으로 등장시켜 이 소설의 예술성을 한껏 높이고 있다. 즉, 주인공 ‘허 생원’의 성격이나 작품상의 효과를 위해서, ‘나귀’의 과거 내력이나 초월적 운명과 함께, 그 형태상의 외모나 행동의 양상까지도 유사하게 설정된 것이 그것이다. 이리하여 양자 사이엔 공통점이 있게 되며, 정서적인 융합까지도 가능했기 때문에 서정적 정감을 더 한층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소설의 주제를 이끌어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나귀’의 목 뒤 털과 눈곱 낀 젖은 눈은 바로 ‘허 생원’의 모습이요, 암나귀를 보고 발광한 늙은 ‘나귀’의 행위는 충주집을 찾아간 ‘허 생원’의 행위와 부합되고, 단 한 번의 일로써 강릉집 피마에게 새끼를 보게 한 ‘나귀’의 운명은 ‘허 생원’이 성 서방네 처녀와 단 하룻밤의 인연에서 동이를 얻게 된 것과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허 생원’과 ‘나귀’의 등식 관계가 단순한 묘사 관계에 머물지 않고, 주제와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원초적인 삶과 본능의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합일점을 발견하고, 거기서 인간의 참된 모습을 찾으려는 이 작품의 기본 관념과 일치하고 있다.
<참고> 등장 인물에 대하여
이 작품은 주로 세 사람의 인물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데, 중심 인물인 허 생원은 숫기가 없는 ‘아둑시니’ 같지만 때로는 투전을 해서 모은 돈을 몽땅 날려버리는 호탕한 면도 있는 장돌뱅이이다. 젊은 시절, 성 처녀와 맺은 단 한 번의 애정의 연분(緣分)을 잊지 못하고 사는 외로운 인물이지만, 달빛에 감동하기도 하는 정서적인 일면도 있으며 평생을 나귀와 함께 장터에서 보낸 그는, 외곬으로 살아 온 소박한 자연인이란 점에서 전통적 토속 한국 사회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부인물격(副人物格)인 조 선달은 독특한 자신만의 성격이 나타나 있지 않고, 허 생원의 성격을 보조적으로 가끔씩 나타내 주는 인물이다. “진종일 실수만 하니 웬일이오, 생원.” 같은 대화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다른 하나인 동이는 미혼 청년으로, 허 생원의 친자(親子)인 것으로 암시되는 외로운 인물인데, 크게 보면 허 생원의 분신(分身)이라 해도 과하지는 않을 듯하다. 그러나 떳떳지 못한 어머니의 직업이나 행위(의부를 얻음)에도 별 불만 없이 주어진 환경에 순응(順應)하며 집을 나와 돈을 벌어 어머니를 모시려고 하는 효자다. 본능적으로 여자(충줏댁)를 접하지만 허 생원의 질책(叱責)에 순종하는 그도 역시 자연인의 전형(典型)이라 할 것이다. 특히 별 기교가 없는 순박미(純朴美)를 지닌 점에서는 허 생원과 그 맥락(脈絡)을 같이 한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세상살이의 핵심에서 벗어나 소외된 떠돌이 주변인(周邊人)들이다. 즉, 하나같이 고독(孤獨)하고 쓸쓸한 사람들이다. 그 중 주인물(主人物)인 허 생원이야말로 정착할 곳 없는 유랑인(流浪人)의 가련하고 고독한 모습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지은이는 그러기에 아이들의 나귀에 대한 놀림이나 ‘허 생원은 모르는 결에 낯이 뜨거워졌다.’ 등의, 주막에서의 묘사를 통해 허 생원을 늙고 볼품 없는 나귀의 몰골에 자주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즉, 주인공 허 생원의 성격이나 작품상의 효과를 위해서 나귀의 과거 내력이나 초월(超越)적 운명과 함께, 그 형태상의 외모나 행동의 양상까지도 유사하게 설정했는데, 이는 소설의 예술성을 한껏 높이고 있다. 결국 양자 사이에는 깊은 공통점이 있게 되는데 정서적 융합까지 가능했기 때문에 서정적 정감을 더 한층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소설의 주제를 이끌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나귀’의 목뒤털과 눈곱 낀 젖은 눈은 바로 허 생원의 모습이고, 암나귀를 보고 발광하는 늙은 나귀의 행위는 충줏집을 찾아간 허 생원의 행위와 부합(符合)되며, 단 한 번의 일로써 강릉집 피마에게 새끼를 보게 한 나귀의 운명은 허 생원이 성서방네 처녀와 단 하룻밤의 인연에서 동이를 얻게 된 것과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허 생원과 나귀의 등식 관계가 단순한 묘사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주제와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원초적인 삶과 본능의 세계를 추구(追求)함으로써 자연과 인간의 합일점(合一點)을 발견하고 거기서 인간의 참된 모습을 찾으려는 이 작품의 기본적인 관념과 일치(一致)하고 있다 할 것이다.
<참고> 작품의 배경
이 작품은 허 생원의 한평생의 이야기를 펼쳐 가는 일련의 플롯과 봉평장에서 대화장으로 옮겨가는 장돌뱅이들의 이동이라는 일련의 플롯이 뒤섞여 있다고 하겠다. 이 가운데서, 장돌뱅이들의 이동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공간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봉평장 → 객주집 → 산길(개울, 메밀밭) → 대화장
즉, 봉평장을 끝내고 술집에서 두 사람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 밤길에서 허 생원이 자신의 추억을 말하는 것, 개울을 건널 때 친자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 이 작품을 ‘혈육 찾기’라는 핵심적 모티브(motive)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배경은 단순한 사건의 환경이 아니라 잊혀졌던 과거를 회상시키고, 더 적극적으로는 동이와 허 생원의 다툼을 화해(和解)시키는 기능(機能)을 하기도 한다. 이런 배경(背景)은 작은 사건보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플롯 진행에 참여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개울’이라는 배경은, 동이와 허 생원간의 혈육(血肉)의 정을 더욱 강화(强化)시키는 기능을 한다. 즉, 허 생원이 개울에 빠져 동이의 등에 업힘으로써 오히려 동이에게 혈육 같은 정을 느끼고 그로 하여금 동이의 어머니가 있다는 제천으로 가볼 결심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작품의 정신적 배경은 향토적(鄕土的), 서정적(抒情的), 원시적(原始的), 육감적(肉感的)이라는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물론 그 네 배경이 모두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 속에서 간접적으로 시사(示唆)해 준다고 할 것이다. 특히, ‘향토적이고 서정적이며 육감적’인 정신적 배경은 동이와 허 생원에게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轉換點)을 이루었던 몇몇 행동 속에 철저히 투영(投映)되고 있다. 허 생원이 성 서방네 처녀와 물레방앗간에서 인연을 맺을 때 동이와 허 생원 사이의 관계가 암시되면서 그 점이 잘 드러난다 하겠다.
<참고> 작품의 구조와 골격
이 작품은 사람의 ‘인연과 길’이라는 한민족의 의식(意識)의 원형(原型)과 관련되어 있다. 못생긴 위인(허 생원)이 미모의 여인(성 서방네 처녀)과 단 한 번의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앞의 동기(動機)를 독자들에게 더 강하게 호소하게 하는 요인(要因)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허 생원과 동이가 부자 지간이라는 구체적인 복선을 깔아놓고, 성적(性的)인 만족을 자신과 상사형(相似形)인 나귀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하기도 하고 동이의 이야기와 행동으로 부자 관계의 실마리를 암시적으로 풀어나가는 동안, 그녀에 대한 본능적인 향수(鄕愁)에 젖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작품의 구조상의 골격이다. 여기에 달밤과 메밀꽃밭이라는 자연의 조명(照明)이 있어 서정적인 정취(情趣)를 자아내게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이 작품의 줄기는 남녀 이합(男女離合)과 친자 확인(親子確認)의 두 가지 이야기 단위가 결합된 유형을 이룬다. 이 이야기가 겉과 속을 이루면서 병렬적으로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 ‘길’이 있다. 그 ‘길’은 세상살이가 잡다히 펼쳐지는 현장을 떠나 시적(詩的) 서정성(抒情性)을 가득 머금은 달밤의 산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산길은 허 생원 일행에게는 도피처(逃避處)가 아닌, 삶이 전개되는 현장이다. 그러나 이 길은 괴로운 인생사의 현장을 보여 주기보다 삶을 아름다운 우리 강산(자연)과 융화(融和)시킨, 승화(昇華)된 서정의 세계이다. 온갖 잡배가 우글거리는 장터의 현장과는 격리된 밤의 산길에 달빛, 메밀꽃, 개울이 어우러지고, 여기에 인연(因緣)의 연쇄(連鎖)와 애욕(愛慾)의 신비가 젖어 흐르는 낭만적인 자연 환경을 무대로 하여 늙은 떠돌이 장돌뱅이 허 생원의 애수(哀愁)가 서려 흐른다. 늙고 꾀죄죄하여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나귀와 허 생원, 나귀 새끼와 동이의 대비를 통하여, 어쩌면 동명왕 주몽의 신화(神話)와도 이어지는 ‘친자 확인과 만남’의 주제가 흐르고 있다 할 것이다. 허 생원이 풋내기 장돌뱅이 동이가 자신과 같이 왼손잡이임을 발견하는 대목은 과학적 유전 법칙의 문제가 아닌 예술적 건설로서 주인공 허 생원에게는 일생 일대의 감격이며 충격이다. 따라서 제천으로 가 어머니를 만나게 될 설렘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 분녀
1. 줄거리
분녀는 어느 날 밤, 방에서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곤하게 자다가 농장에서 함께 일하는 명준에게 겁탈 당한다. 그러나 명준은 금광을 찾아 떠나 버린다. 분녀는 단오 무렵에 또 상점을 차려 놓고 장사를 하는 만갑에게 겁탈을 당하고, 만갑으로부터 지폐 한 장을 받게 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만갑의 상점 심부름꾼인 천수가 만갑처럼 꾸미고 와서 분녀를 겁탈한다. 이러한 성(性) 체험을 겪으면서 분녀의 윤리 의식은 변하게 된다. 한편, 분녀에게서 싫증을 느낀 만갑은 다른 계집과 놀아나고 분녀와 가까이 지내던 상구도 감옥에 들어 간다. 주변의 사내는 하나 둘 떠나지만 오히려 분녀의 내면에는 성적 욕정이 끓어오른다. 그래서 중국인 왕가와 출옥한 상구에게 스스로 몸을 허락한다. 그러나 그녀의 성적 타락을 본 상구는 분녀 곁을 떠난다. 결국, 분녀의 성적 타락에 얽힌 소문들이 돌기 시작하자 그녀의 어머니는 분녀를 찾아 나선다. 그 때 분녀는 죽을 결심을 하고 들녘을 방황하며 떠돌고 있었다. 이 때, 그녀의 첫 성적 대상이었던 명준이가 나타난다. 분녀는 명준이와 일생을 함께 하겠다고 생각한다.
2.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1936년에 발표된 단편으로 『장미 병들다』, 『화분』 등과 함께 인간 본연의 원시적 성(性) 의식을 다루고 있다. 이 같이 『분녀』를 비롯한, 성적 의식을 담고 있는 이효석의 작품들은 관능적인 감각과 인간 본연의 생명 감각이 혼융된 구조를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 또한 농장에서 잡일이나 하고 사는 분녀가 성적(性的)으로 타락해 가는 변모 과정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분녀의 성적 타락 과정은 전통적 윤리 의식에 정면으로 대응하면서 인간 본연의 삶 의식을 추구하려는 원시적 생명감에 충만되어 있다.
▶ 산(山)
1. 줄거리
‘중실’은 머슴살이 7년 만에 아무것도 쥔 것 없이 맨주먹으로 쫓겨났다. 김 영감의 첩을 건드렸다는 엉뚱한 오해로 그 집을 나오게 된 것이다. 그는 갈 곳이 없어 빈 지게를 걸머지고 산으로 들어간다. 그 넓은 산은 사람을 배반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산에서 벌집을 찾아내어 담배 연기를 사용해 꿀을 얻었고, 산불 덕택에 불에 타 죽은 노루를 얻어 여러 날 양식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소금이었다. 어느 날, 그는 나무를 팔러 마을 장에 내려와 나무 판 돈으로 감자, 좁쌀, 소금, 냄비를 샀다. 그리고 김 영감의 첩이 면 서기 최씨와 줄행랑을 쳤다는 소식도 들었다. 지금쯤 머슴을 내쫓고 뉘우치고 있을 김 영감을 위로하고 싶었으나, 그는 다시 산이 그리워져 물건들을 지게에 지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이웃집 용녀를 생각한다. 그녀와 더불어 오두막집을 짓고 감자밭을 일구며 염소, 돼지, 닭을 칠 것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낙엽을 잠자리로 삼아 별을 헤면서 잠을 청한다. 하늘의 별이 와르르 얼굴 위에 쏟아질 듯싶게 가까웠다 멀어졌다 한다. 별을 세는 동안에 ‘중실’은 제 몸이 스스로 별이 됨을 느낀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어느 해 가을) / 공간(어느 산)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성격 : 낭만적, 묘사적, 서정적
◎ 구성
발단 - 머슴살이에서 쫓겨난 '중실'은 온갖 잡목에 묻혀 자신이 나무가 됨을 느낌.
전개① - '중실'은 꿀을 따 요기하고 불에 타 죽은 노루를 먹음.
전개② - '중실'은 나뭇짐을 팔아 생활을 꾸림. 김 영감네 첩이 면 서기와 줄행랑을 침.
절정․결말 - 용녀를 생각하며 잠을 청함. 별을 세며 자신이 별이 됨을 느낌.
◎ 제재 : 자연에 동화된 삶
◎ 주제 : 자연에 젖어 사는 물아일체의 열락(悅樂). 한 인간의 소박한 삶과 자연애
3. 등장 인물
◎ 중실 : 주인공으로 머슴. 산 속으로 들어가 자연과 동화되는 인물. 주인인 김 영감의 오해로 집에서 쫓겨 나와 자연과의 교감을 가지며 행복해 함.
◎ 김 영감 : 주인이지만 실제 등장하지는 않음.
◎ 용녀 : 중실이가 그리워하는 여인이지만 실제 등장하지는 않음.
◎ 둥글개 : 김 영감의 첩이지만 실제 등장하지는 않음.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이효석의 여러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간형, 즉 자연과의 교감으로 행복을 느끼고 그 생활에 자족하는 인간형을 서정적인 문체로 묘사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소설의 진정한 등장 인물은 '나무'인지도 모른다. 산오리나무, 물오리나무, 가락나무, 참나무, 줄참나무, 박달나무, 사수레나무, 떡갈나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무가 등장한다. 주인공 ‘중실’은 이 모든 나무들을 한 가족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 바심할 때의 짚북더기보다도 부더러운 나뭇잎 속에 목을 파묻고 있으면 몸뚱어리가 마치 땅에서 솟아난 한 포기의 나무와도 같은 느낌이다. 두 발은 뿌리요, 두 팔은 가지다. 살을 베이면 피 대신에 나무진이 흐를 것만 같다. 잠자코 섰는 나무들의 주고받는 은근한 말을…… 해가 쪼일 때에 즐겨 하고 바람 불 때 농탕치고 날 흐릴 때 얼굴 찡그리는 나무들의 풍속과 비밀을 역력히 번역해 낼 수 있다…….” 그는 나무들이 마을의 인총보다도 많고 사람의 성보다도 흔하다고 생각한다. 즉, 나무들의 세계를 인간 세계로 여기고 자신을 나무처럼 여긴다. 특히,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중실’이 산으로 쫓겨가는 행위의 작가적 의미이다. 시대 상황과 연결 지어 보면, 이는 이상향을 꿈꾸는 이효석이 <신경향파> 노선을 버리고 ‘산’으로 도피한 사실에 대응(對應)한다. 이는 김유정이 현실의 각박함을 유머와 해학으로 넘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이효석의 이 지극한 자연애(自然愛)는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正體性)을 확인하려다 실패한 뒤에 선택하고자 하는 참다운 조화의 태도는 아니다. 이효석의 자연, 즉 ‘중실’의 자연은 인간이 돌아가 의지해야 할 가치적 대상이기보다는 일시적 위안이나 망각의 ‘뒤안길’에 불과하다. 별을 하나 둘 세는 사이에 제 몸이 스스로 별이 됨을 느낀다는 마지막 대목은 인간과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만이 있고 인간은 배제된 몽환(夢幻)의 세계임을 드러낸다. 결국, 작가는 ‘중실’이라는 등장 인물을 빌려서 서정성을 잠시 객관화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엄밀한 의미의 소설은 아닌 것이다.
▶ 수탉
1. 줄거리
을손은 다니던 잠사학교에서 무기 정학 처분을 받고 집에서 놀고 있다. 숙직을 하다가 밤에 이웃 과수원의 사과를 따먹은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리고 이 일 때문에 그는 사귀던 복녀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복녀의 어머니가 복녀를 다른 남자에게 시집 보내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을손은 이래저래 패배감에 빠진다. 을손의 집에는 기르는 수탉이 있다. 이 닭은 수탉 구실도 제대로 못하고 이웃집 수탉과 싸워서도 매번 지기만 한다. 그런 수탉을 지켜보는 을손은 마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화가 난다. 어느 날 수탉은 또 싸워서 지고 피를 흘리며 돌아왔다. 을손은 자신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손에 잡히는 물건을 닭을 향해 집어던진다. 을손이 던지는 물건에 맞은 닭은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면서 죽어 간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1930년대) / 공간(어느 농촌)
◎ 성격 : 향토적
◎ 특징 : 콩트처럼 짧은 작품
◎ 주제 : 무능(無能)에 대한 개탄과 비애
◎ 출전 : <삼천리>(1933)
3. 이해와 감상
이효석은 1930년대 이전에 주로 사실주의적 경향의 현실 고발적 작품 세계를 선보이며 ‘동반자(同伴者) 작가’로서 경향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지은이의 다른 대표작인 “돈(豚)”과 함께 이 작품을 기점으로 새로운 경향의 작품을 쓰게 된다. 이후 이효석은 순수 문학에 눈을 뜨면서 서정적이고 향토성 짙은 작품을 발표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마치 콩트와 같이 아주 짧다. 수탉과 자신의 처지를 교묘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 아주 흥미롭게 전개되는데, 작품의 바탕에는 자신의 무능에 대한 비애가 깔려 있다. 침울한 분위기를 아주 간결하면서도 치밀하게 표현하고 있어, “메밀꽃 필 무렵”에 익숙해 있는 독자들에게 이효석 소설의 다른 면을 보여 주고 있다.
▶ 장미 병들다
1. 줄거리
극단 <문화좌>의 단원이었던 현보와 남죽은 지방 공연에서 단원들이 검거 당하고 극단이 해산되자 서울로 올라온다. 그들이 7년 만에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극단 <문화좌>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만남도 극단의 해산으로 인해 다시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현보와 달리 서울이 집이 아닌 남죽은 시골 고향으로 내려가야 하지만 고향 갈 차비가 없었다. 그래서 현보 친구들에게 돈을 빌렸으나 그 돈은 현보와 술 마시고 춤추고 여관에서 육체 관계를 맺는데 다 써 버린다. 이 때문에 현보는 다시 남죽의 차비를 구해 주는 일에 직면하게 된다. 현보가 차비를 구하기 위해서 집을 떠났기 때문에 며칠 동안 이들 남녀는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된다. 현보가 가까스로 차비를 구해 함께 묵었던 여관으로 남죽을 찾아갔을 때, 그녀(남죽)는 이미 그 곳을 떠나 버린 뒤였고 남죽이 어떤 남자에게 몸을 팔아서 그 몸값으로 차비를 하여 떠났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러나 더욱 현보를 놀라게 한 것은 자신이 남죽에게서 성병이 옮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현보는 남죽과 함께 드나들던 술집에 가게 되고 거기에서 남죽과 잠을 자고 그녀에게 돈을 준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 남자도 이미 성병에 걸려 있었다. 두 남자는 씁쓸한 마음으로 함께 술을 마신다.
2. 이해와 감상
『장미 병들다』는 1938년 <조광>에 발표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이효석의 에로티시즘은 성적(性的) 개방 의식을 통한 인간성 회귀를 담고 있다. 이 같이 그의 에로티시즘 경향은 성(性)의 자연적인 개방과 이를 통한 인간의 생명력을 추구하려 한다는 평을 받는다. 그 이유는 그가 아마 C. H. 로렌스의 소설적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 화분
1. 줄거리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하는 5월 어느 날, 현마와 그의 처 세란, 그리고 세란의 동생 미란이가 사는 ‘푸른 집’에 자그마한 사건이 생겼다. 찔레꽃 순을 따던 미란이가 뱀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그 바람에 목욕탕에 들어간 미란은 예정보다 빨리 월경을 한다. 때마침 들어온 현마와 그의 비서 겸 스틱 보이인 단주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자, 미란이는 집을 뛰쳐나가고 그녀를 달래기 위해 단주가 따라 나간다. 두 젊은 남녀는 영화 「실락원」을 본 후, 좀채 멈추지 않는 폭풍우를 피해 단주의 아파트로 가서 ‘전원 교향곡’을 들으며 밤을 지새운다. 아직 성인의 세계에 뛰어들 용기를 갖지 못한 두 사람은 그 밤을 무사히 보내지만, 어른들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동경(東京)으로 도망친다. 한편, 현마와 세란이는 갑자기 사라진 두 사람, 미란과 단주를 수사 끝에 동경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잡아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영화사를 운영하는 현마는 사업 관계로 동경에 가는 김에, 뾰로통해진 미란을 달래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떠난다. 그녀는 처음 보는 서양 문명을 구경하느라 바쁘고 즐거운 일정을 보내는데 특히, 현마와 함께 가 본 천재 소녀의 피아노 독주회에서 커다란 감명을 받는다. 그리하여 미란은 자신을 은근히 탐내는 현마에게 한 번의 키스로 피아노를 얻는 데 성공한다. 한편, 현마 대신 집을 지키러 온 단주는 연상의 유부녀인 세란의 유혹에 넘어가 육체 관계를 맺지만, 마음 한 쪽으로는 미란을 고대한다. 드디어 기다리던 미란이가 돌아왔으나, 미란이는 피아노에 더 열중할 뿐 아니라 피아노 살 때 다투었던 청년인 영훈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으면서 그에게 빠져드는 등 상황은 옛날과 아주 달라졌다. 영훈이가 ‘푸른 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날, 질투에 사로잡힌 단주는 식모 옥녀와 장난하다가 못에 빠져 다리를 다친다. 다리를 다쳐 아파트에 누워지내던 단주는 미란과의 사이를 은근히 방해하는 세란을 밀치며 다친 자신을 동정하는 미란이의 처녀성을 범한다. 한편, 영훈은 자기를 사모하는 사팔뜨기 제자 거야의 약혼자인 갑재와 결투한 후 어디론가 사라진다. 여름이 되자 만태와 죽석 부부의 초대를 받은 현마 부부와 미란은 주을 온천의 노비나 별장 지대로 피서를 간다. 여기에서 영훈이를 만난 미란은 새로운 사랑과 피아노 공부를 하면서 현마 부부와 죽석 부부와 함께 독서와 춤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영훈이가 없는 가운데서 술 파티 끝에 술래잡기를 하는데 만취한 현마가 평소 탐내던 미란을 겁탈한다. 미란은 뛰쳐나와 영훈의 집에 가 있다가 뒤늦게 돌아온 영훈에게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지만 영훈의 애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푸른 집’에 남아 옥녀와 육체의 향연에 빠지던 단주는 미란을 찾아온 현마와 교대로 노비나 별장에 간다. 피서지에서 돌아온 일행은 사라진 미란의 소식을 모른 채 옛날 생활로 다시 돌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세란과 단주의 불륜의 관계가 현마에게 발각되어 치고 받는 싸움이 벌어진다. 한편, 구라파를 향해 하르빈으로 가기로 한 미란과 영훈은 가야가 죽자 계획을 구체화시키고 미란은 돈을 얻기 위해 현마를 찾는다. 그 사이에 일어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미란은 그에게 여비조로 3천원을 받고, 음악가를 꿈꾸는 미란과 영훈은 미련 없이 이상의 나라로 떠나게 된다.
2. 핵심 정리
◎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 배경 : 평양 교외의 집과 동경(東京), 그리고 주을 온천
◎ 주제 : 애욕적 사랑의 비극
3. 등장 인물
◎ 현마 : 영화사를 경영하는 탐욕적인 인물
◎ 세란 : 현마의 아내
◎ 미란 : 세란의 동생. 음악 학도
◎ 단주 : 현마의 비서
4. 이해와 감상
『화분』은 1939년 <조광>지에 연재된 작품으로서 에로티시즘을 통한 비극적인 사랑을 낭만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혈육간의 애욕 내지 근친상간을 그린 이 작품은, 그 자체가 이미 비극적 애정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애정 소설의 전형으로써 그린 작품은, 무의미한 인간의 심층에 깔려 있는 관능적인 애정에 대한 탐미적 의식과 윤리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효석의 『화분』은 우리에게 가장 원초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임철우(1954~) |
전남 완도 출생. 198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개도둑”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목격자로서 광주의 문제를 소설의 중심 테마로 삼고 창작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문학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1980년대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관련된 것이라 하겠다. 비록 직접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그리지 않는 작품이라도 광주 문제와 연관되지 않은 작품이 없을 정도로 그 문제에 집착하고 있다. 최근 장편 “봄날”을 통해 그것을 정리하고 있을 정도이다. 최근 들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작가로서, “그들의 새벽”, “뒤안에는 바람소리”, “잃어버린 집”, “사평역”, “그 밤 호롱불을 밝히고”, “늑대의 여름”, “동행”, “직선과 독가스”, “눈이 오면”, “사산하는 여름”, “곡두 운동회”, “불임기”, “달빛 밟기”, “붉은 방”, “붉은 산, 흰 산”, “바람의 혼”, “불의 얼굴”, “그 섬에 가고 싶다”, “등대 아래서 휘파람”, “불꽃의 초상” 등 많은 작품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 붉은 방
1. 줄거리
‘나(오기섭)’는 어느 날과 같이 출근길에 나섰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두 사내가 내 이름을 확인하더니 ’나‘를 차에 태웠다. 분명히 뭔가 착오가 일어난 것이었다. ‘나(최달식)’는 며칠만에 집에 들어갔다. 아들은 자기 방에 냄새가 난다며 못 들어가겠다고 했다. 노망 든 어머니가 손자 방에 일을 본 것이었다. 인민군이 떠나간 뒤 아버지는 인민군에 가담했던 두 사내를 할아버지, 백부와 숙부 가족을 죽인 원수라며 내 눈앞에서 직접 쏘았다. ‘나(오기섭)’는 경찰서에서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냐고 물었다. 사내는 이상준이 잡혔다며 더 이상 시치미를 떼지 말라고 한다. ‘나’는 수배 중이라는 그를 일주일쯤 재워 준 일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차에 태워져 시야가 가리워 진 채로 교외인 듯한 어느 건물 지하로 끌려갔다. 사면이 붉은 페인트로 칠해진 방이었다. 사내들은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고 곧 몽둥이찜질이 시작되었다. ‘나(최달식)’는 부하들을 내보내고 자백하지 않는 그를 좀 더 팼다. 아버지는 가족 외에는 아무도 믿지 말라고 했었다. 그는 군대 동기인 서정민의 부탁에 의해 이상준을 재워 주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 따위는 뻔한 얘기다. 옆방에서 서정민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에게 자술서를 쓰게 한 뒤 방을 나왔다. ‘나(오기섭)’는 지난 가을 서정민의 부탁으로 이상준을 집에 재워 주었지만 이런 곤욕을 치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사내가 다시 들어와서 내 집이 사회주의자들의 아지트가 아니었냐며 추궁했고 곧 ‘나’는 전기 고문을 당했다. 사내는 월북한 내 큰아버지 이름도 알고 있었다. ‘나(최달식)’는 어머니가 또 일을 저질렀다는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가 철길에 몸을 던진 것은 결국 도처에 있는 빨갱이들 때문이었다. ‘나(오기섭)’는 드디어 집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사내는 어느 새 존댓말을 쓰고 있다. 차에서 내린 ‘나’는 행인에게 오늘이 며칠이냐고 소리를 지른다. ‘나(최달식)’는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는 붉은 방에 혼자 앉아 하느님께 기도를 시작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중편 소설
◎ 배경 : 시간적(1980년대 중반) / 공간적(서울 모처에 있는 수사 기관의 비밀 아지트)
◎ 시점 : 복합 시점(두 사람이 번갈아 1인칭 주인공 시점을 구사함)
◎ 주제 : 이데올로기 대립의 역사적 근원과 현실 사이의 대비
◎ 출전 : <현대문학>(1988)
3.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당시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그것에서 비롯된 고문과 폭력, 그리고 이로 인한 정신적 상처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월북한 큰아버지를 둔 오기섭이라는 인물이 우연히 수사 기관에 납치되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작품에서 일상적인 소시민적 삶을 살아오던 오기섭은 붉은 방에서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 생각해 온 모진 취조와 고문을 받으며, 자신의 고통과 불행의 근원을 절망적으로 더듬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오기섭이 취조와 고문을 받고 있는 ‘붉은 방’은 분단으로 인한 역사적 상흔(傷痕)과 폭력이 횡행하는 공간과 다를 바 없는 곳이다.
▶ 아버지의 땅
1. 줄거리
나와 오 일병이 길을 걷고 있다. 까마귀 떼가 푸드득 날자 오 일병은 돌멩이를 던지며 불쾌해 한다. 그러면서 꿈속에 상여를 본 것 때문에 오늘 이 일이 있었다고 불평한다. 나는 흉물스런 새 떼의 모습에 까닭 없이 마음이 우울해진다. 어머니는 철새가 날아오면 하늘을 한참 바라보았다. 새도 때가 되면 제 고향에 찾아올 줄 아는 법이라고 말하며 멀리 사라지는 새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었다. 인가에 도착해 어떤 노부부에게, 참호를 파다 유골을 한 구 발견하였다고 말한다. 진지를 구축하던 중 오 일병과 내가 맡은 위치에서 참호를 파던 중 시체가 나온 것이다. 시체의 몸통은 피피선으로 묶인 채였다.노파는 노인에게 지난 밤 꿈이 맞지 않느냐고 말한다. 노인은 술을 준비시키고 두루마기를 차려 입은 후 우리를 따른다. 철새가 날아오는 가을이면 어머니는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중학생이 되고서 아버지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추궁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 변명을 했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죄인인 아버지의 환영은 이제 어디에나 숨어 있어, 핏자국처럼 지워지지 않는 저주와 공포로 나를 끝끝내 휘감아 버렸다. 현장에 도착한 영감에게 소대장은 전투가 치열했겠다고 말한다. 지형적인 특색으로 이 곳을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게 되었고, 이름과 고향을 모르는 시체들이 즐비해 묻어 주었다고 말한다. 영감은 뼛조각을 하나씩 주워 잘 닦아서는 신문지 위에 가지런히 놓고 있다. 빨갱이 시체인지 아닌지를 따지고 있는 소대원들에게 영감은 소리친다. 이제 그게 대관절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죽어서까지 이쪽 저쪽을 따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노인은 몸통을 감싸고 있는 결박을 풀어 멀리 내던진다. 어머니가 모래밭을 걸어오고 있는 뒤편에 한 사내가 따르고 있었다. 아버지였다. 가까이 왔을 때 아버지의 환영은 사라지고 어머니의 발자국만 모래밭에 찍히고 있었다. 꿈이었다. 우리는 정돈된 유해를 다시 묻었다. 음복을 했다. 어머니의 기다림이 떠오르고, 아버지가 가슴과 팔목에 철사 줄을 동여 매인 채 겁먹은 얼굴로 서 있는 모습이 환영으로 떠오른다. 총성이 들려 왔다. 순간 눈앞이 부옇게 흐려 온다. 아버지는 어느 버려진 밭고랑에 잠들어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에 잠긴다. 산을 내려오며 나는 노인과 대화를 나눈다. 노인의 형도 그렇게 죽어 갔다고 한다. 좀 전의 시체가 혹시 형님의 것이 아니냐고 물어 본다. 노인은 이제 그를 알아볼 수 없고, 그저 불쌍한 영혼 하나를 편안히 잠들게 한 것에 만족해한다. 첫눈이 내리고 있다. 첫 휴가를 갔을 때, 어머니는 무심코 오늘이 하필 아버지의 생일이라고 했었다. 어머니는 얼결에 말해 놓고는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마구 화를 내었었다. 죽은 사람 기다릴 필요도 없고, 차라리 죽어 버린 게 우리에게 낫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말에 섭섭해했다. 어머니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자상한 눈빛으로만 남았던 것이다. 어머니의 눈물은 끈덕진 기다림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기다림이 까마득히 멀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인은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까마귀가 운다. 나는 얼어붙은 땅 밑에서 웅크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눈이 내리고 있다. 새 떼, 들판, 산들을 하얗게 지우고 있다. 그것은 어머니의 소반 위에 올려진 사기대접의 눈부시도록 하얀 빛깔이었다.
2. 핵심 정리
◎ 구조
철사줄에 묶인 시체- 까마귀떼가 낢 - 노인의 한 - 철사줄 풀어 주기 - 함박눈이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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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죽음) (새떼를 보던 어머니) (어머니의 한) (어머니에의 이해) (아버지에 대한 용서)
-화자와 아버지의 거리 좁히기의 과정(이념 대립을 해소하는 과정)-
◎ 주제 : 이념 대립을 극복하는 사랑과 용서의 방법론
3. 이해와 감상
□ 역사의 단절과 지속 : 한국 전쟁을 제재로 한 작품은, 전쟁을 직접 치렀던 세대에 의해서 작품화되거나, 어릴 때 그것을 목격한 세대들이 어른이 된 후 어린 목격자의 눈으로 재해석하는 작품이 한국 전쟁 소설의 주종을 이루었다. 한국 전쟁 이후의 미체험 세대에 의한 작품이 쓰여졌다는 점이다. 따라서 전쟁을 해석하는 눈은 조금 달라질 가능성을 애초부터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땅>은 전후 세대가 유산처럼 안게 된 부담과 불행에서 그 날에의 이해로 거리를 축소해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소설은 참호를 파다 밭고랑에서 발견된 유해(遺骸) 한 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유해는 오랜 세월 땅 밑에 묻혀 있다 눈앞에 모습을 보이는 순간 과거의 일은 현재성을 지니고 목전에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시체의 발견 자체가 문제성을 안고 이 시점에 부각되는 것이다. 이 시체를 둘러싼 인물들, 소대원과 마을 노인의 위상은 상당한 차이를 가진다. 소대원들은 이 시체와 화자의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다. 그러나 노인의 경우는 그 거리가 가깝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하였고, 또 그의 형이 그 피해의 당사자란 점에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안고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 시체와 노인의 관계는 밀접한 것은 아니다. 그의 형의 시체라고 단정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노인도 그렇게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노인이 시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대단히 따뜻하다.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표현이면서, 노인의 가슴에 내재된 한의 표현이기도 하다. 노인은 전후 세대인 소대원과 달리 과거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존재이다. 노인에게 역사는 지속되고 있지만, 소대원은 한국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단절돼 있다. 이 연결과 단절의 차이가 결국 시체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다. 작가는 바로 이 점을 주제 의식으로 삼는다. 한국 전쟁은 과연 사라진 역사적 사실일까. 현재에도 끈질기게 남아 우리를 제약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인 것이다. 노인이 한으로 끈덕지게 얽매여 있듯이 그 날의 비극은 민족사의 앙금으로 남아 여전히 현실을 아프게 한다는 메시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과거와의 철저한 만남, 그것은 바로 ‘나’에 의해 구체화된다. 시체와 무관했던 ‘나’가 혈육과 같은 끈끈함으로 맺어지는 것을 통해 그 점은 구체화된다. 술이 가득 차 오른 반합 뚜껑을 나는 두 손으로 받쳐들었다. 저것 봐래이. 날짐승도 때가 되면 돌아올 줄 아는 법이다. 어머니가 말했다. 저만치 웬 사내가 서 있었다. 가슴과 팔목에 철사 줄을 동여맨 채 사내는 이쪽을 응시하며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퀭하니 열려 있는 그 사내의 눈은 잔뜩 겁에 질려 있는 채로 였다. 애앵. 총성이 울렸고 그는 허물어지듯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불현듯 시야가 부옇게 흐려 왔다. 아아,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쓰러져 누워 계실 것인가. 해마다 머리맡에 무성한 쑥부쟁이와 엉겅퀴 꽃을 지천으로 피워 내며 이제 아버지는 어느 버려진 밭고랑, 어느 응달진 산기슭에 무덤도 묘비도 없이 홀로 잠들어 있을 것인가. 반합 뚜껑에서 술이 쭐쭐 흘러 떨어지고 있었다.
화자는 드디어 이 무연고 시신 앞에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잊고 싶었던 과거와 처절하게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저주와 공포로 얼룩졌던 아버지의 기억이 다시금 다사로운 눈물과 애정으로 화하는 승화된 만남이 되는 것이다. 한국 전쟁은 이렇게 잊혀지지 않고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어 전후 세대에 이어지고 있음을 이 작품은 보여 준다. 지금도 어머니처럼 철새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는 세대가 여전히 살아 있고, 자신처럼 비록 무관한 것으로, 때로는 무거운 짐으로 남아, 버려야 할 악귀와 같이 냉담하게 인식하던 것에 대해 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전후 세대는 그 아픔의 역사를 고스란히 유산으로 받았기 때문에 결코 거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것의 부정성에 매몰되지 않고 따뜻한 애정으로 수용하게 된다면 잃었던 아버지도 마음에 살게 되며, 용서와 화해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다. 노인이 던진 말, “이렇게 죽어 누운 다음에까지 이쪽이니 저쪽이니 하고 그런 걸 굳이 따져서 무얼 하자는 말이오.”에 그 해답이 담겨 있다.
□ 표현과 구성의 힘 : 이 작품은 이런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 구조와 표현의 면에서 세심한 배려를 한 흔적이 뚜렷하다. 시체를 두고 벌어지는 현재 상황과 어머니의 이야기가 중첩되게 하여 현재와 과거를 이어가고 있으며, 세대간의 갈등과 화해의 메시지를 이런 이중 구조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러나 이 작품을 더없이 아름답게 하고, 감동을 주는 요소는 그 상징적 표현에 있을 것이다. 서사 구조도 탄탄하지만 그 구조를 떠받드는 표현의 상징성은 주제를 더욱 선명히 하면서 문학적 감명을 암시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어느 틈에 날아왔는지 길 옆 밭고랑마다 수많은 까마귀들이 구물거리고 있었다. 온 세상 가득히 내려 쌓이는 풍성한 눈발 속에 저희들끼리만 모여서 새까맣게 구물거리며 놈들은 그 음산함과 불길함을 역병처럼 퍼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도 틈만 나면 이데올로기를 들추며 사랑과 화해를 방해하는 세력들을 까마귀로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어떠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살도 녹이고 뼈까지도 녹슬게 만든 그 오랜 시간과 땅 밑의 어둠을 끝끝내 견뎌 내고 그렇게 시퍼렇게 되살아나는 그것의 놀라운 끈질김과 냉혹성이 언뜻 소름 끼치도록 무서움증을 느끼게 했다. 시체를 감싸고 있는 철사줄은 여전히 우리를 구속하고 있는 이념의 잔인성을 상징한다. 노인이 그 철사를 풀어 푸른 하늘에 버리는 행위에서 이제는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얻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철사줄을 통해 보여 준다. 어머니가 늘상 해 오던, 새 바라보기도 그러하다. 어머니는 철이 되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새 떼를 보며 아버지를 끊임없이 기다린다. 그것은 지울 수 없는 한이다.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기다림에 매달리지 않고서는 한 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것이다. 어머니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이념과 무관한, 그저 자상한 모습의 남편일 뿐이다. 어머니는 기다림이라는 행위를 통해 아버지의 원래 모습을 가슴에 영원히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굵고 탐스러운 눈송이들은 세상을 가득 채워 버리려는 듯이 밭고랑을 지우고, 밭둑을 지우고, 그 위에 선 내 발목을 지우고, 구물거리는 검은 새 떼를 지우고, 이윽고는 들판과 또 마주 바라뵈는 거대한 산의 몸뚱이마저도 하얗게 지워 가고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새벽마다 샘물을 길어 와 소반 위에 떠서 올려 놓곤 하던, 바로 그 사기대접의 눈부시도록 하얀 빛깔이었다. 눈은 까마귀와 대조되어 있다. 까마귀가 불길함을 상징한다면, 눈은 그것을 지우는 것으로 표상된다. 시체가 묻혔던 밭고랑도 지우고, 이념도 갈등으로 충돌했던 그 참혹의 현장이었던 산도 지우고, 그 동안 내가 지녔던 편견과 몰이해를 지우고, 아직도 큰 힘으로 음모를 획책하는 세력들을 지워, 모든 하얀 색깔 하나로 어우러진 세상을 염원하는 주제가 이 눈 오는 광경의 묘사를 통해 상징화되고 있는 것이다. 순백의 눈으로 원래의 순수를 되찾아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증오의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어 나갈 때 전쟁의 아픔은 더 큰 가슴에 의해 아늑히 품어질 것이다.
장용학(1921~) |
소설가. 함북 부령 출생. 1948년 “육수(肉囚)”를 탈고하고 1950년 “지동설”, 1952년 “미련 소묘”가 <문예>지에 추천되어 정식으로 등단하였다. 1950년대 전후 문학(戰後文學)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었다. 손창섭, 김성한과 더불어 당대를 풍미하였는데, 손창섭이 보여 주었던 전후(戰後)의 구체적 실상과는 달리 그는 관념적인 세계에서 전후의 참상을 소설화하였다. 그런 면에서 김성한과 유사하다 하겠는데, 이 관념성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한다. 특히 실존주의 문학을 다루었으며, 기계화되어 가는 현대 문명 속에서 속박된 개인의 자유를 되찾으려는 치열한 투쟁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
▶ 비인(非人) 탄생(誕生)
1. 줄거리
화가인 지호는 학교 선생을 하다 결석 일수로 인해 우등상을 받지 못한 학생 때문에 교장과 언쟁을 하고 학교를 그만둔 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여 살던 집에서 쫓겨나 산 속의 굴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애인인 종희를 모델로 ‘마녀의 탄생’이란 그림을 그려 프랑스로 초대받았으나 가지 못한 채 근대의 합리적 세계의 부조리함을 인식한다. 종희는 돈 많은 노인과 결혼하겠다며 사라졌는데, 지호가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으로 자신의 그림을 태워 버리던 날 그 노인(녹두 노인)이 나타나 인간을 버리고 천진난만하게 살라고 충고하면서 ‘마녀의 탄생’을 들고 가 버린다. 어느 날 도둑으로 오인되어 경찰서에서 며칠 지내고 나오니 어머니가 죽어 있다. 현대에서의 무의미한 삶에 지친 지호는 장작을 실어 와 어머니를 화장하여 인간이 아닌 비인(非人)으로 재탄생한다. 마침 나타난 녹두 노인이 쏟아진 비속에서 불길을 살리려 하는 사이에 지호는 비인으로서 산 속으로 들어간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중편 소설
◎ 성격 : 관념적
◎ 특징 : 전후(戰後) 세대의 비판적인 현대 비판 의식을 반영한 작품
◎ 제재 : 현대 세계의 부조리와 그 속에서 좌절한 화가의 삶
◎ 주제 : 현대의 합리적 세계의 비인간성에 대한 비판
◎ 출전 : <사상계>(1956년)
3. 이해와 감상
합리주의에 기인한 현대 사회에 대한 지은이의 비판적 의식이 잘 반영된 작품이다. 사실주의적인 기법이 무시되고 주인공을 통해 관념을 있는 그대로 나열하고 있는 관념 소설의 계열에 속한다. 따라서 스토리의 전개가 중요하지 않으며 작품 속에 제시되는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인(非人)’의 탄생이란 이성과 숫자에 기반을 둔 현대 세계에서의 삶을 거부하는 존재를 의미하며, 현대의 비인간성에 대한 역설적 비판의 의미를 지닌다.
▶ 요한 시집(詩集)
1. 줄거리
이 소설은 크게 네 부분으로 짜여져 있다. ‘서(序)’는 토끼의 우화, ‘상(上)’은 동호의 1인칭 서술에 의한 내적 독백, ‘중(中)’에서는 누혜의 죽음과 그 동기가 동호의 의식 속에서 드러나며, ‘하(下)’는 누혜의 유서이다.
‘서(序)’ - 동굴 속에 갇힌 토끼가 빛을 찾아 밖으로 나왔을 때, 강렬한 햇살에 실명(失明)한다는 우화이다.
‘상(上)’ - ‘나(동호)’는 의용군으로 6․25에 참전했다가 미군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힌 후, 이제 막 그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인물이다. ‘나’는 회상에 잠긴다. 2년 전 인민군 신분으로 미군과 싸웠다. 어느 일요일, 미군을 습격하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반공 포로로 수용소 생활에서 풀린 ‘나’는 누혜 어머니가 있는 산속의 하꼬방에 정착한다(누혜는 전쟁에 같이 참전했으나, 이미 수용소에서 자살한 뒤이다). 누혜의 어머니는 고양이가 잡아 온 쥐를 먹으며 목숨을 연명해 왔다. 노파는 실낱같은 목소리로 누혜를 부르며 죽어 간다.
‘중(中)’ - 누혜의 죽음의 동기가 ‘나’의 추억과 분노 속에 표현된다. 누혜는 수용소 내의 비인간적인 살인에 대해 절망을 느끼고 죽음을 통해서 마지막 위로와 안식을 택한다. 그의 시체는 ‘인민의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혀 눈알이 뽑힌다.
‘하’ - 누혜가 쓴 회상 형식의 유서이다. 그는 순수를 지향하는 시인이고자 했다. 해방이 되면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인민의 벗이 되었으나 살육의 현장에서 그는 절망한다. 그런데 포로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생활 양식을 찾는 착각에 빠진다. 노예의 생활 속에서 자유의 새로운 맛을 본 느낌이다. 그러나 자유도 욕망의 대상이란 점에서 인간 정신에 대한 하나의 구속이므로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판단한다. 누혜는 드디어 마지막 돌파구로 자살을 택한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6․25 전후)
◎ 경향 : 실존주의(實存主義)
◎ 성격 : 사변적(思辨的)
◎ 문체 : 잠언적(箴言的) 문체
◎ 시점 : ‘상’․‘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 ‘중’ 부분은 3인칭 서술자 시점을 보이며, 사건 진술에 따라 시점의 이동이 보임.
◎ 표현 : 우화(寓話)의 삽입
◎ 구성
서(序) - 토끼를 통해 전체의 내용을 암시
상(上) - 누혜의 친구인 동호가 내적 독백을 통해 6․25의 체험을 드러낸다.
중(中) - 누혜의 죽음의 동기를 동호가 상상적으로 인식한다.
하(下) - 누혜의 유서 내용이 소개되면서 그의 실존적 고통이 밝혀진다.
◎ 주제 : 극한 상황 속에서의 실존적 자각
◎ 출전 : <현대문학>(1955)
3. 등장 인물
◎ 동호 : 자의식이 강한 청년. 이 작품 전체의 서술자. 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다. 수용소에 있다가 풀려 나온 후 친구 ‘누혜’ 모친의 임종을 맞는다.
◎ 누혜 : ‘동호’가 수용소에서 만난 인물. 이북에서 내려온 인민군으로 공산주의 신봉자(信奉者). 수용소 내부의 처절한 살상 행위에 환멸을 느끼고, 자유를 추구하다 절망 상태에서 자살. 그 ‘무엇’이 나타나기 위해서 죽어야 했던 ‘요한’적 존재로 부각되어 있다.
4. 이해와 감상
작가 장용학(張龍鶴)은 ‘작가의 변’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자유를 ‘요한’적인 존재로 본 데에 있다. … 예수가 올 길을 닦고 요한이 죽은 것처럼 그 ‘무엇’이 오려면 ‘자유’가 죽어야 한다. 그래서 자유를 죽이려고 한 것이 바로 ‘요한 시집’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작가가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嘔吐)”를 읽고 실존주의에 관심을 보이던 중, 거제도 포로 수용소 생활 수기를 읽은 것이 직접적인 집필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의 중심 문제는 ‘진정한 자유는 가능한가’에 있다. 그러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누혜’가 자살을 택하게 되는데, 자유를 모색하고 갈구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고뇌가 6․25 전쟁과 포로 수용소에서 전개된다. 이 작품에는 일관된 시점과 구조가 나타나지 않는다. ‘서’는 한 마리 토끼가 굴속에 갇혔다가 자유를 찾아 거기를 빠져 나오면서 겪는 좌절, 고통 그리고 죽음이 주인공 동호의 내적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나’는 의용군으로 6․25에 참전했다가 미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인물이다. ‘중’에서는 누혜의 죽음과 그것의 동기가 서술자의 직접적인 목소리와 뒤섞여서 나온다. 서술자는 강대국에 의해 유린당하는 우리의 근․현대사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하’에서는 자살한 누혜의 유서로 되어 있다. 여기서 누혜는 어린 시절부터 대학에 다닐 때까지의 삶의 과정을 회상하고 있다. 누혜는 새로운 시도, 마지막 기대로 자살을 택했다. 자유(自由). 이 소설의 중심 과제는 자유이다. 자유는 ‘참다운 것을 위해 겪어야 하는 또 하나의 구속’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성서에 나오는 ‘요한’에 비유하였다. 즉, ‘예수’의 출현을 위해 죽어야 하는 존재가 ‘요한’이었듯이, 자유란 찾아올 그 무엇을 위해 견뎌야 하는 고통이다. 자유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목적을 위한 희생이란 뜻이다. 토끼의 우화는 누혜의 유서에 나타난 삶과 밀접히 대응된다. 동굴 속의 삶은 ‘주어진 대로 사는 삶’이며 토끼가 어느 날 깨달은 것은 ‘실존적 자각’이다. 누혜도 서서히 세상의 벽을 깨닫고 그 벽을 뚫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다. 그는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히는데 그 곳 역시 이데올로기를 빙자해서 온갖 만행이 자행되며 그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 그는 외로움과 절망을 느끼고 마지막 탈출을 시도한다. 그것은 자살로 ‘실현’된다. 그러므로 토끼가 바깥 세상의 빛에 의해 눈이 멀고 죽음에 이르는 것은 누혜가 진정한 자유가 없음에 절망을 느끼고 자살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의 실존적 선택이다. 인간은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념을 준비하고 전쟁을 일으켰으나, 결국 그 전쟁으로 인해 희생되었을 뿐이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실존 그 자체일 뿐, 신이니 자유니 하는 인위적인 것들은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신과 자유는 결국 또 다른 구속이요 벽일 뿐이다. 이 작품은 동호의 내적 독백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실인지 환상인지 구별되지도 않는 숱한 생각들이 일관된 스토리를 갖지 않은 채 나열되고 있다. 역사에 대한 비관련된 동호의 내면 의식이 어지럽게 이어진다. 그러나 그 모든 독백은 결국 ‘나란 무엇인가’라는 실존적 물음에 귀착된다. 만약 ‘실존’이라는 것이 창조적인 주체가 되어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고자 하는 꿈이라면, 이 소설은 그러한 꿈을 지향하는 인물의 비극적 체험을 6․25의 배경 속에서 그린 작품이다.
▶ 원형(圓形)의 전설(傳說)
1. 줄거리
주인공 이장은 나이가 들면서 자기 부모들이 친부모가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의 아버지 이도무와 어머니는 보안부 사원들에게 총살당했고 이장은 방골 마을에서 벼락치던 날 태어난 사생아란 사실을 들어 알게 된다. 그 후, 이장은 의용군에 들어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털보 영감에 의해 구출된다. 털보 영감은 그의 딸 윤희와 같이 사는 노인으로, 이장에게 윤희와 하룻밤 자기를 원한다. 마지못해 이를 허락한 이장은 윤희와 동침하는 도중 윤희가 자기 아버지 털보 영감의 아이를 밴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다음날 윤희는 목을 매어 자살한다. 북으로 향하던 이장은 내무서원에게 붙들려 포로 수용소에 갇힌다. 수용소를 나온 이장은 북에 남기로 한다. 북에서 이장은 탄광에서 노무관리를 한다. 그 후,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교편생활을 하다가 간첩 교육을 받고 7년 만에 남한 땅을 밟게 된다. 이장은 북에 있을 때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게 된다. 오택부와 오기미는 매우 다정한 남매 사이다. 기미가 다른 남성에게 관심을 둘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어느 날 밤 그녀는 어떤 남성(오빠인 오택부)에게 강간을 당해 아이를 갖게 된다. 방골 마을에 벼락이 치던 날, 오기미는 아이를 낳은 뒤 벼락맞은 나뭇가지에 가슴이 찔려 죽는다. 근친상간에 의해 사생아로 태어난 그 아이는 이도무에게 넘겨졌고 이장이란 이름으로 호적에 올렸다는 것이다. 이장은 이복 여동생 지야와 함께 친아버지 오택부를 만나 약혼을 발표하여 오택부를 당황하게 한다. 이장은 현 화백에게서 빌린 차를 타고 그가 전에 갇혔던 동굴로 가서 지야와 함께 지내고 있는데, 이장은 그 곳에 온 오택부와 격투를 벌이다가 이장의 총에 맞아 오택부는 죽는다. 총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오는 사이에 동굴에 벼락이 떨어져 이장과 지야도 동굴 속에 묻혀 죽는다. 결국 이장은 벼락 치는 날 사생아로 태어났다가 벼락으로 죽은 ‘원형의 전설’의 인물이 된다.
2. 핵심 정리
◎ 배경 : 6 25와 그 후의 사회 현실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주제 : 인간 존재에 대한 원초적 탐구와 그 비극성
3. 등장 인물
◎ 이장 :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인물. 의용군으로 참전, 포로가 됨. 그 후 간첩으로 남파되어 대학 교수로 활동함. 그의 이복 여동생인 지야를 사랑하여 이를 막는 아버지 오택부를 죽이고 동굴에서 죽는다.
4. 이해와 감상
“원형의 전설”은 1962년에 발표된 장용학의 대표적인 장편소설이다. {요한 시집}을 비롯한 {비인 탄생}, {태양의 아들} 등과 함께 그의 소설은 전후(戰後) 한국 소설을 대표하는 획기적 작품 세계를 보여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원초적인 존재 의식을 당대 사회의 역사적 현실과 밀도 있게 조응시키면서 인간의 존재 의식을 파고든 작품이다. 장용학은 실존적 의미를 “민족이냐, 계급이냐! 자유냐, 평등이냐!” 등의 외부적 상황과 결부시키기보다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의식 속에서 해명하려는 문학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원형의 전설}에서 작가는 “세계란 원래 원형처럼 둥근 것인데, 이것을 나누어서 시초와 끝을 만들고 경계와 매듭을 지은 데서 인간의 병적인 문명이 있게 되었다”고 진단하는 신화적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전광용(1919~1988) |
소설가. 호는 백사(白史). 함남 북청(北靑) 출생. 1946년 경성고등상업학교, 1951년 서울대학 문리대 국문과, 1953년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일찍이 문학에 심취, 1939년 <동아일보>에 “별나라 공주와 토끼”가 입선되고, 1947년 <시탑(詩塔)> 등 동인으로 활동, 1955년 단편 “흑산도”가 <조선일보>에 당선되고, 논문 “신소설 연구”가 <사상계> 발표되면서 본격적인 문단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서울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동혈인간(凍血人間)”, “충매화(蟲媒花)” 등의 단편을 발표, 현실에 아부하지 않는 건실한 작풍을 보여주었다. 1962년에는 세속적 출세주의자를 풍자한 단편 “꺼삐딴 리”로 동인문학상(東仁文學賞)을 받았고, 이어 장편 “태백산맥”, “나신(裸身)”, “창과 벽”, 단편 “세끼미” 등을 발표했다. 한편, 학자로서도 역할이 커, 1955~1984년 서울대학 국문과 교수, 1972년 문리대 문학부장으로 있으면서, 1973년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동안 소설연구에 착수하여 “설중매(雪中梅) 연구”(1955), “이인직(李人稙) 연구”(1957) 등을 비롯하여, “한국어 문장의 시대적 변천” 등 평론과 논문을 다수 발표, 한국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 사회 활동에도 참여, 1974~1981년 펜클럽한국본부 부회장, 1980~1985년 한국비교문학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4년부터는 서울대학 명예교수․세종대학 초빙교수로 지냈다. 대한민국 문학예술상,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그 밖의 주요 작품에는 “모르모트의 반응”, “G.M.C”, “편지의 미학” 등이 있다.
▶ 꺼비딴 리
1. 줄거리
주인공 이인국은 권력과 돈에 매우 집착하는 의사이다. 그렇게 처신함으로써 종합 병원을 방불케 하는 개인 병원을 지니게 되었다. 어느 날, 미국으로 가기 위해 미 대사관 브라운과 만날 시간을 맞추려고 회중 시계를 본다. 회중 시계를 매개체로 하여, 이야기는 30년 전 제국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광복 전 그는, 아이들을 일본인이 다니는 소학교에 보내어 일본어만 가르치고, 자신은 일본인에게만 친절하게 처신하여 부(富)를 누리고 산다. 광복이 되자, 친일 행각이 탄로나 감옥에 갇혔으나 러시아어를 배운 덕분으로, 뺨에 혹이 난 소련군 장교를 수술해 줌으로써 위기를 오히려 행운으로 전도시킨다. 또, 1․4 후퇴 때 월남한 후에는 영어로 그 처세술을 바꾸고, 병원의 고객은 권력층과 재벌에 국한시킨다. 급기야 미 국무성의 초청으로 도미하기에 이른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1940~1950년대) / 공간(남한과 북한)
◎ 경향 : 신심리주의적 수법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성격 : 풍자적, 냉소적, 비판적
◎ 구성 : 역순행적, 몽타주 구성
현재 - 이인국의 처세술과 인간성(회상 매체①-회중시계. 과거-일제 치하 일어로 처세)
현재 - 미 대사관으로 가는 차 안(회상 매체②-신문기사. 과거-광복 후 러시아어 처세)
현재 - 고려 청자를 선물함 미 국무성의 초청 받음.
◎ 주제 : 시류에 따라 변절하면서 순응해 가는 기회주의자 비판. 출세 지향적 삶과 현대사의 아픔
3. 등장 인물
◎ 이인국 : 외과 의사로서 인술보다는 돈과 권력에 따라 살아가는 이기주의자이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적응해 가는 인물이다. 지조나 신념, 공동체 의식이 전혀 없는 변절자이다.
◎ 주변 인물 : 아들과 딸, 일본인, 소련인, 미국인 등이 있지만 이인국의 생애를 그리는 데 필요한 소도구적 인물이다.
4. 이해와 감상
제7회 동인문학상 수상 작품으로 <사상계> 1962년 7월호에 발표되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능란하게 변신하는 기회주의자 이인국 박사의 모습을 통해 일제강점기 말에서 6․25전쟁에 이르는 격동기의 현대 한국사에서 출세하는 사회지도층의 위선을 폭로한 풍자 소설이다. 외과 의사이면서 종합병원 원장인 이인국은 일제강점기에는 친일을 했다가 광복 후에는 소련인에게 아부를 하고 1․4 후퇴 때 월남한 이후로는 미국인에게 접근하여 자기만의 영달을 꾀하는 카멜레온 같은 기회주의자로 한국 현대사의 왜곡된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의술 덕택에 극적으로 삶의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 그 와중에 그의 부모가 죽고 아들과 헤어지는 비극적인 일이 닥친다. 그러나 그는 한순간도 자기 삶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않는다. 민족이나 국가의 이익은 그에게는 염두에도 없다. 그러한 그이지만 식민지 시대 제국대학 출신의 일류 의사로 명망을 얻고 한국 사회에서 지도층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월남 이후 미국의 영향력을 체감한 그는 영어로 처세술을 바꾼 뒤 소련에 가 있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을 가려고 한다. 마침내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고려 상감청자를 선물로 바치고 국무부 초청장을 받는데 성공한다. 그는 자신이 미국에 가서도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귀가 길의 택시에 오른다. ‘꺼삐딴’은 영어의 캡틴(Captain)에 해당하는 러시아어로, 소련군이 북한에 주둔하면서 ‘까삐딴’이 우두머리 또는 최고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발음이 와전되어 ‘꺼삐딴’으로 통용된 것이라고 한다. 작가는 ‘꺼삐딴 리’라는 제명을 통해 주인공 이인국이 출세와 영달에 눈먼 기회주의자의 최고봉인 동시에 한국 사회의 지도층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일제 강점기에서 미국 군정기에 이르는 한국의 암울한 현실을 배경으로 민족의 발전과 긍지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주인공 꺼삐딴 리의 처세술과 내면 세계를 다루고 있다. 작가는 반민족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도 흥분하거나 매도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시종일관 주인공의 심리를 철저하게 객관적으로만 묘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 문학사의 빈약한 장르인 풍자 문학의 한 가능성을 보여 준다.
▶ 사수(射手)
1. 줄거리
‘나’는 병원에서 눈을 뜨며 과거를 회상한다. B와 ‘나’는 한 학급의 급우로 막역한 친구였다. 그런데 ‘나’와 B는 모두 경희를 좋아하게 된다. 졸업반으로 진급하던 봄의 어느 날, 우리 집에 놀러 왔던 B는 내 책갈피에 끼어 있는 경희의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B에게 경희와의 약혼의 뜻을 솔직히 말하고 B의 양보를 기대하나, 그는 의외였다. 결국 ‘나’와 B는 공기총 싸움을 하는데, ‘나’는 그 싸움에 지게 되고 ‘나’의 귓불에는 공기총 탄환의 자국이 남는다. 6․25 전쟁으로 인해 모두 흩어지게 되고 ‘나’는 새로 전속되어 온 부대에서 B를 만나게 된다. ‘나’는 함성을 지르며 B의 손을 덥석 잡고 반가워했으나, B가 외출해서 돌아올 때 B의 옆에 그의 아내가 된 경희가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B는 모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나’는 B의 구명 운동을 하게 되나 결국은 사형 집행 사수로 지명된다. “쏘아!”라는 구령이 끝나기 바쁘게 일제히 ‘빵!’ 소리가 났지만, ‘나’는 아직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그러다가 이제나마 그와의 대결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될 것 같아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B가 다른 네 명의 사수가 쏜 탄환을 맞고 쓰러진 뒤다. 그는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나’에게 이겼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총 소리와 함께 ‘나’ 자신도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6․25 전쟁 상황
◎ 문체 : 간결체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표현 : 심리 전개를 속도감 있게 표현함
◎ 구성
발단 - ‘나’는 깨어나면서 과거를 회상한다.
전개 - 선생님께 벌을 받게 되면서 첫 대결을 벌인다. 실력 경쟁도 심하게 벌인다.
위기 - 경희를 차지하기 위한 공기총 대결에서 ‘나’는 패배한다.
절정 - 전쟁 중 B를 다시 만나고 경희가 B의 아내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결말 - B는 이적적(利敵的)인 모반 혐의로 구속되고 ‘나’는 B의 사형 집행 사수가 된다.
◎ 주제 : 인간 사이에 운명적으로 내재해 있는 대결 의식
◎ 출전 : <현대문학>(1959)
3. 등장 인물
◎ ‘나’ : 어린 시절부터 친구 B와 끝없는 대결의 상황을 맞이하는 인물. 그와의 대결 속에서 이겨야 한다는 오기와 함께 늘 지고 있다는 패배감을 동시에 느끼는 인물이다.
◎ B : ‘나’의 영원한 적수이다.
◎ 경희 : ‘나’의 연인으로 나중에는 B의 아내가 된다.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의 구성은 ‘나’와 B의 대립 관계가 몇 개의 사건을 통해서 전개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같은 대립 관계를 통해서 인간 사이에 음험하게 자리잡고 있는 대결 의식과 그 비극적 결말을 그리고 있다. ‘나’와 B는 어렸을 때 같은 반에서 공부를 했다. 둘이서 선생님의 ‘엠’ 소리를 세고 웃다가 함께 벌을 받게 된다. 서로 뺨 때리기를 하는 사이에 감정이 격앙되고 결국에 ‘나’는 코피를 흘린다. ‘나’는 깊은 패배감을 느낀다. 선생님의 벌이 두 친구를 적대 관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들은 또 실력 경쟁을 한다. 그런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대립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한 반에 있지 않았다면 이 같은 경쟁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경희를 두고 대결을 벌인다. 경희가 우연히 그들 사이에 나타났고, 경희가 나타난 자리에 두 친구가 다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후 그들은 극적인 상황에서 다시 만난다. ‘나’는 사수로서, B는 사형수로서, 이미 여러 번 경쟁을 벌였던 그들이라 피차간에 적수가 된 지 오래되나, 이 상황에서 그 대결의 질과 농도는 확연히 다르다. ‘나’는 B의 심장에 붙은 붉은 딱지에 총을 겨눈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왜냐하면 무방비 상태에 놓인 친구를 죽여야 한다는 데서 오는 갈등, 절친했던 친구에게 총구를 겨누게 만든 어떤 불가사의한 힘에 대한 반발감, 그리고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망설임이 순간적으로, 정말 순간적으로 ‘나’의 뇌리에 스쳤기 때문이다. ‘나’는 또 다시 B를 이길 수 없는 패배감에 젖는다. ‘나’는 방아쇠를 당긴다. 그것은 B를 향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패배감을 ‘사살’하려는 반발심의 방아쇠이다. 그러나 이미 B는 다른 네 방의 탄환을 맞고 쓰러진 뒤였다. ‘나’는 이겼어도 비굴하게 이긴 것 같다. 인간은 무수한 형태의 대립 관계를 겪어 가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 모든 대립은 스스로의 인간적 의지에서보다는 그와 같은 대립을 요구하는 외부적 상황에 의해서 이루어진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미묘한 인간 관계를 통하여 비극의 본질과 그 책임의 궁극적 소재를 탐구해 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흑산도
1. 줄거리
주인공 복술이는 항상 육지를 동경하고 살아간다. 가난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것도 복술이의 숙원이다. 이러한 숙원을 풀기 위하여 곱슬머리와 새로운 약속도 다짐해 놓았다. 그러나 복술이에게는 전부터 좋아하던 용바우가 있다. 젊은 어부 용바우, 이제는 바다에 나간 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용바우다. 복술이는 그를 잊지 못해서 결국 곱슬머리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이 흑산도에 그녀의 운명을 그대로 얽어두고 만다.
2. 이해와 감상
<흑산도>는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이다. 1939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별나라 공주와 토끼>가 당선되고 1949년 3월 <대학신문>에 단편 <압록강>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광용의 작가로서의 출발은 이 <흑산도>부터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직접 체험과 관련되어 있다. 이 작품도 학술 답사를 통해 체험한 사실들을 엮은 것이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흑산도를 무대로 삼고 이 섬에 운명적으로 매달려 있는 어민들의 생태를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의 바탕에는 감상이나 낭만보다는 빈곤이 자리잡고 있다. 어업 기술의 부족과 그 같은 조건으로 바다에 도전하며 항상 패배를 거듭해야 하는 비참한 생활에 대한 현실적 감각이 더 농후한 작품이다. 그것이 특히 이 지방 민속제나 민요나 방언을 통해서 더욱 생생하게 표현된 것이다. 그의 소설들은 매우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결말을 보이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흑산도>에서도 복술이의 할아버지 박 영감이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채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사라져 버리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전상국(1940~) |
소설가. 강원 홍천 출생.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행(同行)”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의 작품은 크게 분단 현실을 주제로 한 것, 교단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인간 탐구, 고향 상실의 아픔과 고향에의 회귀 의식을 주제로 한 것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가 이런 실제 체험을 소설화하면서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폭력과 같은 부정성은 근원적으로 내재하고 있으며, 그것에 의해 사회의 부정성은 싹튼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언제나 사회적 맥락이라는 커다란 흐름이 작은 체험 속에 녹아 있다. 대표작으로 “육아 일기”, “고려장”, “아베의 가족”, “우리들의 날개”, “늪에서 바람이”, “하늘 아래 그 자리”, “여름의 껍질”, “외딴 길”, “좁은 길”, “음지의 눈”, “퇴장”,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 “사이코 시대” 등이 있다.
▶ 동행
1. 줄거리
낯선 두 사람이 동행이 되어 강원도 산골, 눈 덮인 밤길을 가면서 추천 근화동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키 큰 사내, 그리고 키 작은 사내 ‘억구’이다. 둘은 어릴 적의 일을 말하게 된다. 키 큰 사내의 회고담은 토끼 사냥에 얽힌 이야기이다. 새끼 토끼를 잡고 어미 토끼는 놓쳤는데, 어미 토끼의 ‘살기 차고 공포에 질린’ 모성을 확인했던 것이다. 소년은 생물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해부되었다가 술안주가 될 토끼 새끼를 구하려 했지만, 도덕적 규범 때문에 생물 선생님 집 얕은 담을 넘지 못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억구’가 유년의 일을 들려준다. 아홉 살 때였다. ‘억구’는 자신을 멸시하고 자존심을 짓밟은 ‘득수’의 장갑 낀 손을 물어뜯어 살점이 드러나게 했고, 그 벌로 계모한테 붙들려 광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 후로 그는 추위와 어둠의 공포를 강박 관념처럼 갖고 살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동네의 천더기로 따돌림당하던 그는 6․25 때 빨갱이로부터 감투를 얻어 쓰고 ‘득수’를 죽였다. 국군이 동네에 들어 왔을 때, ‘억구’의 아버지는 ‘득수’ 동생 ‘득칠’에게 죽임을 당하고, ‘억구’는 도망을 쳤다. 끈덕지게 버둥거리며 서른 여섯 해를 살아 왔다. 그리고 부친을 죽인 ‘득칠’을 죽이고 부친의 무덤에서 죽으려고 구듬치 고개를 오르고 있는 것이다. ‘억구’는 부친의 무덤이 있는 산에 이르자 스스로 ‘득칠’을 죽인 사실을 실토한다. 그를 놓칠까 경계하던 키 큰 사내 -그는 형사인데 -는 새끼 토끼를 구하기 위해 넘으려다 무서워 넘지 못한 담을 회상하며, 이제야 넘을 결심을 하게 된다. 형사는 그를 체포하지 않는다. 권총이나 수갑 대신 열여덟 개피 남은 담배갑을 건네며 하루에 한 개피씩만 피우라고 웃어 보인다. ‘억구’는 그 사내의 신분도 모른 채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린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1960년대 어느 해 겨울) / 공간(강원도 눈 내리는 산골의 밤길)
◎ 성격 : 사실주의, 여로형 소설 성격
◎ 시점 : 작가 관찰자 시점
◎ 표현 : 두 사람의 관계를 비밀스럽게 유지하는, 감추는 듯한 객관적 시점과 간결한 문체는 극적 효과를 높인다.
◎ 구성
발단 - 서로 신분을 감춘 두 사내가 눈 덮인 산길을 걸음.
전개 - 키 큰 사내의 소년 시절 토끼 이야기와 ‘억구’의 지울 수 없는 공포의 기억 소개
위기 - ‘억구’의 기구한 운명과 고난의 역경이 밝혀짐.
절정 - ‘억구’는 자신이 살인자임을 말하고 가친의 무덤에서 죽으려 함.
결말 - 연민의 정을 느낀 형사는 그를 놓아 줌.
◎ 주제 : 한국 전쟁의 아픔과 그 비극의 치유를 모색함.
◎ 출전 : <조선일보>(1963)
3. 등장 인물
◎ 억구 : 어릴 때부터 천덕꾸러기로 자람. 아버지 무덤에서 자결할 결심으로 귀향하는 중이다.
◎ 형사 : 감성과 지성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인물. 남의 어려운 처지에 마음이 약해지는 인간적 면모를 지님.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로형 소설의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범인과 형사가 서로의 신분을 감춘 채 동행인이 되어 눈길을 간다. 진행되는 사건은 너무나 단순하다. 범인과 동행하던 형사는 범인의 과거를 알고 그를 놓아준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단순한 사건의 전개가 입체감을 얻게 되는 것은 길을 가면서 삽입되는 두 사람의 과거담 때문이다. 길은 시작과 끝이 있는 법이다. 그 중앙에 ‘구듬치 고개’가 위치한다. 길을 찾아 이 고개를 향해 오르는 과정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상승되어 가다가 내리막길을 가는 중에는 대립과 갈등이 서서히 풀리면서 결말에 이른다. 이것은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뜻하는 것으로 구성의 안정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대립적인 인물의 설정이 구성의 치밀성을 더한다. 한 사람은 쫓기는 자요, 또 한 사람은 쫓는 자이다. 전자는 키가 작고, 춥고 험한 길을 나서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을씨년스럽고 초라한 차림새에 걸음걸이마저 허전한 느낌을 준다. 이에 반해, 후자는 키가 크고, 방한에도 빈틈없이 준비된 차림에 걸음걸이도 정확하다. 뿐만 아니라, 성격도 대조적이다. 앞뒤 가리지 않는 저돌성과 잔인성을 가진 사람은 쫓기는 범인이고, 조심성과 내성적 성격,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성격을 가진 사람은 형사이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 인물을 같은 길 위에 놓음으로써 위기와 긴장감을 고조시킴과 동시에 구성상 안정감을 얻게 하는 효과를 낳는다. 범인 억구의 유년 시절의 일(광속의 추위와 공포)과 형사가 경험했던 소년 시절의 일(토끼 사냥과 새끼 토끼 구출을 위해 담을 넘으려다 넘지 못함)도 중요한 기능을 지닌다. 억구의 것은 그의 성격, 인생의 질까지도 암시하면서 살인의 발단으로 작용하고, 형사의 과거사는 성격을 드러내 주는 동시에 결말 처리의 빌미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이 소설은 우리의 삶이 알게 모르게 6․25와 닿아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이청준의 ‘소문의 벽’이 6․25가 남긴 정신적 외상을 그린 것이라면, 이 소설은 더욱 깊숙하게 그 상처를 드러내 주고 있다. 주인공 억구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살인을 하고 보복을 당하고, 그 후 다시 보복 살인을 하고 36년 동안 쫓겨다니는, 6․25의 최대 피해자인 것이다.
▶ 아베의 가족
1. 줄거리
‘나’의 가족은 이복형 ‘아베’를 한국에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미국에서의 삶에서 바뀌어진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의 태도이다. 즉, 한국에 있을 때는 가족의 생계를 도맡았던 어머니가 마치 정신 이상자처럼 무력하게 살아가게 되고, 반면에 한국에서는 무기력했던 아버지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적극적이고 강한 생활력을 보이게 된 것이다. ‘아베’는 백치이다. ‘아베’는 6․25 때 미군에게 강간당한 어머니가 낳은 아들로, 우리 가족의 삶의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존재이다. 이 ‘아베’ 때문에 우리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지만, 우리 가족은 버리고 온 ‘아베’를 떠날 수 없음을 재인식하게 된다. 즉, 미국에서 누이동생 정희가 성폭행을 당하자, 가족들은 어머니의 그늘의 뿌리인 ‘아베’란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나는 한국 주둔 미군에 자원하여 ‘아베’라고 하는 숙명의 뿌리를 찾아 나서게 된다. 어머니의 지나온 삶을 되밟으면서 ‘아베’를 추적해 보지만 결국 ‘아베’의 형상은 잡히지 않는다.
2. 핵심 정리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배경 : 6․25 전쟁의 상처를 지닌 가족의 삶
◎ 주제 : 전쟁의 상처 회복의 의지와 비극적 운명의 극복 의식
3. 등장 인물
◎ 아베 : 백치(白痴) 혼혈아. 어머니가 미군에게 성폭행 당해 태어난, 전쟁의 아픈 상처를 지니고 사는 비극적 운명의 인물
◎ 나(김진호) : 소설의 화자. 미국 국적을 가진 재미 교포. G․I. 이복형 ‘아베’의 행방을 추적하는 인물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1979년 <한국문학>에 발표된 중편으로, 전상국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제1부는 6․25 전쟁의 비체험 세대로서 작중 화자인 ‘나’(김진호)의 어제 오늘을, 제2부는 어머니의 수기 형식으로써 6․25 전쟁 직후의 상황을, 제3부는 ‘나’가 이복형 아베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작중 화자인 김진호는, 이민 생활 중 어머니가 겪었던 것과 같은 ‘난행’을 당하는 누이를 보며 자신도 역사적 과거로부터 스스로의 삶이 무관할 수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누이가 당한 폭행은 전란 중에 어머니가 당한 폭행의 변주(變奏)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버리고 온 의붓형 ‘아베’를 찾아 한국에 나온다. 그는 ‘아베’를 ‘황량한 들판에 던져진, 그 시든 나무들의 꿋꿋한 뿌리’로 인식하고, ‘가난’과 ‘범죄’로 얼룩진 자신의 과거가 있는 곳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즉, 이러한 '나'의 형상을 통해서 개인의 삶이 그 개인 이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개인을 포용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나’의 어머니는 최창배라는 독자(獨子)의 집에 시집가서 6․25를 겪게 된다. 그녀에게 있어서 6․25는 ‘폭행’으로 상징되며, 그 일에서 태어난 ‘아베’ 때문에 그녀는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다. 그 때는 ‘아베’란 존재로 인해 운명과 싸우는 것만이 그녀의 삶의 의미(?)였었다. 그리고 그러한 싸움의 부재(不在) 속에는 자신의 삶도 부재(不在)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아베’는 미군에게 강간당한 ‘나’의 어머니의 아들이며 ‘나’의 의붓형이다. 말하자면 ‘아베’는 비극적 운명의 상징적 존재이며, 어머니를 과거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하게 하는 족쇄와 같은 6․25의 잔재이다. 즉, ‘천형(天刑)’이나 다름없는 ‘아베’의 존재로 인해서 어머니는 그 역사적 비극과 함께 해야 하는 운명을 갖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간 가족들에게도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을 걸머지웠다. 즉, ‘나’의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세계 일등 국가의 시민이 되었어도 여전히 ‘나’와 가족들은 ‘아베’를 떠날 수 없었다. ‘아베의 가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 우리들의 날개
1. 줄거리
두호는 ‘나’의 여덟 살 터울진 동생이다. 두호의 출생은 손이 귀한 우리 집안의 경사이자 한편으로는 두려움의 시작이었다. 신통한 점쟁이의 점궤에 따르면 두호는 자식이 아니라 사(邪)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두호가 서로 상극(相剋)이어서 한 집안에 살면 아주 좋지 않다는 점궤는, 신통력을 발휘하듯,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집안에 깃든 사기(邪氣)를 없애기 위해 굿판을 비롯하여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고양이를 목매달아 액땜을 하던 날, 고양이가 풀려 달아나고, 어머니는 이를 두호의 짓이라고 생각하여 그에게 심한 매질을 한다. 이 날 두호는 머리를 다쳐 정상적인 발육이 저지 당한 허약아가 되고 만다. 두호에 대해 무심하던 부모는 다시 점쟁이에게서 아버지와 두호는 상극이고 그 액땜은 둘 중의 하나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두호가 일찍 죽게 될 것이라는 점궤를 전해 듣고 비정상적일 정도로 두호를 편애한다. 그러나 두호의 불장난으로 집이 모두 타 버리고, 한동안 생기를 찾고 일하던 아버지는 다시 운전 사고를 내 유치장에 갇히게 된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면회를 가고 없던 날, ‘나’는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두호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다. ‘나’는 두호를 어두운 산으로 유인한다. 산 속에 두호를 남겨 둔 채 ‘나’는 도망쳐 내려오지만 이내 다시 돌아가 무서움에 떠는 두호를 가슴에 안는다. ‘나’는 꺾여 버린 두호의 날개가 되어 주리라는 다짐을 하면서 산을 내려온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성격 : 샤머니즘적 성격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표현 :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
◎ 주제 : 인간애를 통한 갈등의 극복과 화해
◎ 출전 : <작단>(1979)
3.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샤머니즘이다. 그것은 몇 개의 기이한 사건들과 그에 대한 무속적 해석, 그리고 그 해석에 대한 뿌리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부모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샤머니즘은 다른 어떤 의미를 지시하는 장치라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흥미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것은 이 작품의 두호라는 인물이 소설 속에서 어떤 갈등도 불러일으킬 수 없는 어린아이이며, 그러므로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무속의 힘은 아버지와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는 우연과 결합되어 있어 두호에 비해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소설은 전체가 하나의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두호의 형인 ‘나’가 두호를 다시 찾아 내려오는 장면은 따라서 하나의 사족(蛇足)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무속이라는 신비적 힘에 피해자로 전락하는 두호의 모습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이야말로 작가가 강조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일 수 있다. 그것은, 신비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천진성이라는 또 하나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 우상(偶像)의 눈물
1. 줄거리
새 학년이 시작된 고등학교 2학년 학급. 자율이란 말로 학생들을 묶으면서 군림하고 싶어하는 담임. ‘나’(이유대)는 임시 반장을 맡게 된다. 이것이 최기표에게 ‘매끄럽게’ 보여 린치를 당한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량하지만 한쪽에는 이른바 재수파(再修派)가 있다. 한 학년씩 유급을 당한 아이들인데 그들의 중심에 최기표가 있다. 담임은 ‘나’에게 반장을 계속 맡아 달라고 했지만 ‘나’는 임형우를 추천한다. 담임이 학급을 위한 조언(고자질)을 부탁하나 ‘나’는 부당함을 인식하고 말하지 않는다. ‘형우’가 반장이 되고, 그와 담임의 노력으로 학급은 일사 불란한 항해를 계속한다. ‘기표’는 학생들을 폭력으로 장악한다. 그러나 의욕에 찬 담임 교사가 ‘기표’를 길들여 나가기 시작한다. 우선 ‘기표’를 재수파들로부터 고립시킬 계획을 세운다. 담임의 묵인 아래 모범생들이 ‘기표’의 시험을 돕기로 한다. 컨닝 쪽지가 그에게 전달된다. 이것이 ‘기표’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형우’는 그에게 린치를 당하고 병원에 입원하지만, 가해자를 끝내 숨겨 줌으로써 의리의 영웅이 된다. 매혈(買血)한 돈으로 ‘기표’의 생활비를 보태었던 재수파들이 ‘형우’에게 용서를 빈다. ‘기표’의 어려운 가정 사정과 재수파들의 미담이 담임에 의해서 과장되고 미화되어 알려진다. ‘기표’는 효자(孝子)로, 재수파들은 희생적이고도 의리가 깊은 친구로 둔갑한다. 월요일 조회 때마다 사회 각계에서 보내온 성금과 위문 편지가 ‘기표’에게 전달된다. ‘기표’의 이야기는 영화화될 단계에까지 이른다. 그럴수록 ‘기표’는 부끄러움을 잘 타는 아이로 변하고, 아이들은 그를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는다. 가출해 버린 ‘기표’가 여동생에게 남긴 편지에 “나는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라고 쓰여 있었고, 담임은 영화사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자신의 계획을 ‘기표’가 무산시켰다며 신경질을 부린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1970년대 말) / 공간(도시의 고등학교)
◎ 어조 : 완곡한 비판과 풍자적 어조
◎ 시점 : 1인칭 관찰자 시점
◎ 표현 : 극적 제시와 분석적 제시 방법에 의해 인물은 생동감을 획득함.
◎ 구성
발단 - ‘나’는 ‘기표’를 비롯한 재수파(再修派)에게 심한 린치를 당함.
전개 - ‘형우’가 반장으로 임명되고 반장과 담임은 ‘기표’의 비행이 없도록 노력함.
위기 - ‘기표’의 자존심을 건드린 ‘형우’는 폭행 당하고 입원하나 가해자를 밝히지 않음.
절정 - ‘기표’와 재수파(再修派)의 미담(美談)이 사람들을 감동시키나 ‘기표’는 무기력함.
결말 - 가출한 ‘기표’는 전개된 모든 일들이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는 편지를 남김.
◎ 주제 : 진실, 호의를 가장한 치밀한 위선의 무서움.
◎ 출전 : <세계의 문학>(1980)
3. 등장 인물
◎ 나(이유대) : 소설의 관찰자로서 자존심이 강하고 상대방의 심증을 잘 감지하는 학생이다.
◎ 최기표 : 불량 청소년의 전형. 갖은 비행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혹평을 별로 받지 않는 인물. 담임과 ‘형우’의 주도 면밀한 술책에 무서움을 느끼며 학교를 떠난다.
◎ 임형우 : 학급을 헌신적으로 잘 이끄는 모범생이나 위선적인 면이 있다.
◎ 담임 : 치밀한 성격에 권위주의적인 인물. 학급 관리에 능숙하다.
4. 이해와 감상
“그러한 순수한 악마만이 신을 돋보이게 하기 때문에 신은 마음속으로는 괴로운 거야. 그렇기 때문에 신은 결코 악마를 영원히 추방하지 않아. 항상 곁에 두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일에 이용할 뿐이야” -“우상의 눈물” 중에서
작가 전상국의 선악(善惡)의 관점은 위의 인용에서 잘 나타나 있다. ‘기표’는 순수한 악마로 다소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반면에, 그와 대립하는 ‘형우’와 ‘담임’은 위의 인용한 ‘신’처럼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의리와 진실과 호의를 가장한 위선자로 그려져 있다. 서술자 ‘나’는 합리적이며 날카로운 판단력의 소유자이다. 담임이 ‘기표’를 부반장으로 임명하려 할 때, “선생님, 기표 한 개인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기표의 힘을 이용하여 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니까?”와 같이 담임의 의도를 간파한 말에서도 입증된다. 또 ‘기표’의 부정행위를 돕자고 반장이 제의했을 때,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자는 거냐? 기표냐, 아니면 우리들 자신이냐?”고 물으면서, ‘기표’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어 그의 권위를 손상시키려는 반장의 속셈을 들춰내는 데서도 ‘나’의 예리한 판단력이 드러난다. 사실 ‘형우’와 담임은 속 다르고 겉 다른 인물이다. ‘형우’는 ‘기표’에 대한 적대감을 씻은 듯이 감추고 오직 우의와 신뢰 가득한 말’로써 ‘기표’를 미화(美化)하는 일에 열을 올린다. ‘기표’의 가출이 걱정 되서 찾아온 그의 어머니를 ‘내쫓듯 교무실에서 밀고’ 나갔던 담임은 흥분을 참지 못한 채 “내일 천일 영화사 사람들하고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잖아? 그런데 이 망할 새끼가….”라며 욕설을 내뱉는다.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악(惡-‘기표’)을 이용하는 담임과 ‘형우’의 무서운 위선이 ‘나’의 관찰과 서술에 의해 폭로되고 있다. 그래서 ‘기표’는 무서움을 느낀다. 담임과 반장은 합법적인 권력 편에 있다. 최기표는 벌거벗은 폭력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담임과 반장(‘형우’)은 최기표를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교묘한 술책으로 그를 굴복시킨다. 최기표의 초라한 몰락을 통하여 합법적인 권력이 더 무서운 폭력일 수 있음이 드러난 셈이다.
전영택(1894~1968) |
소설가. 종교인. 평남 진남포 출생. 호는 늘봄. 청산학원(靑山學院) 문학부 및 신학부를 졸업함.1930년 미국의 태평양 신학교 졸업 후 귀국하여 목사로 활동. 1919년 김동인, 주요한과 함께 1차 문예 동인지 <창조> 창간. 늘봄의 전기 작품인 “천치? 천재?”, “운명”, “화수분”. “생명의 봄” 등이 모두 자연주의적인 작품이나. 이들 작품에는 목사 전영택의 기독교적인 박애 정신, 인도주의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광복 후에 씌어진 “소”를 비롯하여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과 “크리스마스 새벽” 같은 후기 작품에서는 인도주의적 색채가 더욱 짙게 투영되어 있다. 김동인은 “예각적으로 본 인생관을 인도주의에 연결한 작가”라 평하였다. 즉 그의 작품 세계의 특징은 작위적인 허구성이 배제되고 인도주의적인 특징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난에 쪼들리는 생활상이 묘사된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에서 보듯이 자연주의적인 관점은 남아 있다.
▶ 화수분
1. 줄거리
아범의 식구들은 금년 9월 ‘나’의 집 행랑방에 들었다. 아범은 지게로 벌이를 하고, 그의 아내는 집안의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항상 벌이가 신통치 않아 굶기를 밥먹듯이 하며 추운 겨울을 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나의 내외는 아범의 서러운 통곡 소리를 듣게 된다. 이튿날, 나는 어멈으로부터 아범이 왕년에는 남부럽지 않은 양평 부농의 셋째아들이었으며 이름이 ‘화수분’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어젯밤 그가 울던 까닭을 듣게 된다. 화수분은 큰딸 귀동이를 제대로 못 먹이며 키우느니 남에게 주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쌀집 마누라의 중개로 남의 집 양녀로 보냈지만, 막상 보내고 난 뒤 그만 서러워 그렇게 통곡하였다는 것이다. 얼마 후 화수분은 시골에 있는 형 ‘거부’가 일을 하다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행장을 꾸려 고향으로 떠난다. 한편 겨울나기 전에 곧 오겠다던 남편이 입동 지나고 매서운 추위가 닥쳐와도 소식이 끊어지자, 남아 있던 어멈과 작은아이도 아범을 찾아 시골로 간다. 그 후 출가한 나의 동생 S가 오랜만에 놀러와 화수분의 소식을 전해준다. 시골에 도착한 화수분은 형인 거부의 몫까지 일하다가 자신도 몸져 드러누웠다. 열에 떠서 큰딸을 부르며 울다가, 마침 어멈이 시골로 떠나기 전 나의 대소로 보낸 편지를 받았다. 편지를 받고 그는 또 어멈과 작은아이를 부르며 흐느끼다가 벌떡 일어나 서울로 불쑥 떠났다. 백 리쯤 온 그는 해 저무는 어느 고개의 나무 밑에서 웅크린 채 떨고 있는 아내와 어린것을 발견하고는 달려들어 와락 끌어안는다. 화수분과 어멈은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그렇게 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지나가는 나무장수가 서로 껴안은 남녀의 시체와, 그 사이에서 장난하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곤 아이만 소에 싣고 가 버렸다.
2.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 배경 : 시간(일제 강점기 추운 겨울) / 공간(도시 및 시골)
◎ 경향 : 사실주의, 인도주의
◎ 시점 : 1인칭 관찰자(1․2․4․5장), 1인칭 주인공(3장), 전지적 작가 시점(6장)
◎ 구성 : 액자 구성
발단 - 지게꾼인 행랑아범 화수분의 네 식구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렵다.
전개 - 큰 딸애를 남에게 준다. 양평으로 간 화수분과 기다리다 못 해 찾아 나서는 아내
위기 - 아내의 편지를 받고 서울로 향하는 화수분
절정 - 겨울 산 고갯길에서 만나는 부부
결말 - 나무 장수가 남녀의 시체와 어린애를 발견한다. 나무 장수는 어린것만 데려감.
◎ 주제 : 가난 속에 피어난 어버이의 고귀한 사랑. 가난으로 인한 처참한 삶과 비극적 죽음
◎ 출전 : <조선문단>(1925)
3. 등장 인물
◎ 화수분 : ‘나'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행랑아범. 한때는 부유했으나 결혼 후 지금까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린다. 선한 인품에 우애가 돈독하고 부부애가 강함.
◎ 어멈 : 가난 속에서도 선하게 살아가는 화수분의 아내. 순박한 성격의 소유자
◎ 귀동이와 옥분이 : 화수분의 딸들. 못생긴 데다 마음씨마저 고약하고 고집 불통임.
◎ 나 : 화수분네 가족에게 연민을 가지나 적극적으로 도와 주지는 못함. 냉정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무덤덤한 관찰자로 일관함.
4.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이중 구조 즉 액자 소설의 유형을 지녀 시점의 변화 양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1인칭 관찰자 시점(1, 2, 4, 5장)과 1인칭 주인공 시점(3장) 그리고 전지적 작가 시점(6장)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이는 설명이나 해설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면서, 대상 인물인 주인공들은 가만히 있고 서술자가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구조의 작품은 서술자와 서술 내용 사이의 거리가 너무 근접해 있어서 이야기 구조의 진실성을 해칠 우려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지니는 인정의 따뜻함과 동정 어린 손길이 이러한 구조적 결함을 보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반어적 구조로 재물이 자꾸 생겨서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다는 ‘화수분’ 단어 자체의 의미와 주인공이 처한 비참한 생활이 대비되면서 비극적 결말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비극적 인물의 의도적 설정은 작가의 연민을 강하게 표출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 작품은 1920년대의 다른 사실주의 작품과는 달리 형용할 수 없는 처참한 정황을 그리면서도 주관적인 감정의 개입을 배제하고 냉정하고 객관적인 필치로 사회의 실상을 그렸다. 환경에 패배 당하는 인간의 비극적인 상황을 그려 자연주의적 경향도 지니고 있는 이 작품은 서술을 위주로 하여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고 했으며 이러한 결과 인도주의적인 주제가 줄거리의 중간에 과도하게 노출되지 않는 소설적 효과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1925년에 발표되었음에도 특별히 시대적 배경을 짐작할 만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자식까지 남의 손에 넘겨주어야 할 만큼 가난하고, 취업 기회를 좀처럼 얻을 수 없는 상황으로 보아서 일제에 의하여 극도의 피해를 입고 있는 시대적 배경을 짐작할 수 있으며 암담한 사회적 환경을 암시하고 있다. 또 하나의 배경인 극심한 추위가 몰아치는 겨울밤은 단순히 풍경으로 그치지 않고 으스스한 분위기를 형성, 주제와 연결되면서 주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사건의 개연성(蓋然性)과 필연성(必然性)이 결여되어 있으며 인물의 성격 설정 방법이나 사건의 추이를 직접적으로 진행시키지 못하고 아내의 말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게 되는 등 소설적 구조를 보아서 몇 가지 결함을 지니고 있으나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스토리를 전개하는 문체에 의해 이러한 결함을 보완하고 있다. 이 작품의 결말 부분의 화수분 내외의 죽음, 서로의 체온을 나눈 사랑의 극치인 죽음에서 사랑과 부활의 상징인 어린아이는 살아 남는데 이는 은총 속의 부활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처참한 환경, 추위가 무참히 체온을 앗아가고 목숨마저 위협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식지 않는 사랑의 정화(精華) - 햇빛 속에 토닥거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이러한 결말은 작가의 인도주의 정신이 거둔 삶의 승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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