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국어/현대문학

해바라기, 최승호 [현대시]

Jobs 9 2022. 3. 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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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최승호

 

빛의 자식인 양 보라는 듯이
원색의 꽃잎들을 펼치는
해바라기는
太陽神을 섬기는 인디언
추장의 머리 같다

자기를 섬기든 말든 개의치 않고
太陽神이 비틀어놓는
늙은 머리들

그래도 오로지
생명의 빛깔이 원색인 곳을 향해
해바라기는 고개를
든다

 

 

 

북어 /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全集 / 최승호
놀라워라, 조개는 오직 조개껍질만을 남겼다.


조개가 조개껍질을 남긴 것이 조개가 살아 온
날들의 모두를 기록한 전집이라 하였다

우리 생에 단 한 줄 마음을 기록한 그 무엇을
남기고 떠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대설주의보 / 최승호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끄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만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끊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숫소 / 최승호

저놈은 숫소다.
눈썹이 검고
불알은 크고
머리엔 도깨비의 뿔이 솟아올랐다.
저놈은 숫소다.
콧구멍이 내뿜는 콧김은
증기 기관차의 증기처럼 거세고
다리는 다리의 다리처럼 튼튼한데
쯧쯧, 저런!
숫소가 쿵 하고 드러눕는다.
빼빼 마른 백정 앞에서
덩치 큰 숫소가 드러눕는다.
드러누워
버둥거리다가
도살장 천장 향해 검은 울음을 게우다가
저것 봐, 숫소가 일어선다.
도끼와 뿔의 박치기다.
아니다.
도끼와 급소의 박치기다.
숫소는 글썽글썽한
큰 눈알을 부릅뜬 채 죽어간다.

 

 

무지개 / 최승호

흰 대머리바위들을 적시며
한 차례 소나기가 지나가더니
인왕산 위에
무지개 떴다

동물원 우리에서 보았던
앞뒤가 영 딴판인 공작새
부채 같은 꼬리 깃털들 떠오른다

굳이 새삼스럽게 말하자면
내 몸 안에도 무지개가 있는데
다름아닌 오욕칠정(五慾七情)이 나의 무지개

찬연할 때도 있다
음울할 때도 있다

 

 

공터 / 최승호

아마 무너뜨릴 수 없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빈 듯하면서도 공터는
늘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공터에 자는 바람, 붐비는 바람,
때때로 바람은
솜털에 싸인 풀씨들을 던져
공터에 꽃을 피운다
그들의 늙고 시듦에
공터는 말이 없다
있는 흙을 베풀어 주고
그들이 지나가는 것을 무심히 바라볼 뿐.
밝은 날
공터를 지나가는 도마뱀
스쳐 가는 새가 발자국을 남긴다 해도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의 빗방울에 자리를 바꾸는 모래들,
공터는 흔적을 지우고 있다
아마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요가
공터를 지배하는 왕일 것이다

 

 

회전문 속에 떨어진 가방 / 최승호

 

빙글빙글 도는 회전문 속에서, 가방을 놓치고,
회전문 밖으로 나와서 가방을 본다. 이것은
죽음의 한 경험인가. 옷 가방을 떨어뜨린 채,
회전문 밖으로 밀려나오는 알몸이 죽음이라면,
옷 가방 끈을 어깨에 걸친 시절이 삶이었다는
말인가. 회전문 밖에서, 회전문 안에 떨어진
가방을, 남의 가방 보듯 들여다본다. 내용물은
별것도 아니지만, 나 없으면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지금 잃는다면, 슬픔도 꽤 따를 것이다.
장례식에는 산 자들의 슬픔의 총체보다도, 죽은
자의 더 큰 슬픔이 있다. 

 

* '94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거울 / 최승호

거울을 볼 때마다        
점점 젊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요귀지 사람이랴

거울공장 노동자들은         
남의 거울을 만들어 놓고 
거울 뒤편에서 주물처럼 늙는다

구리거울을 만들던 어느 먼 시절의 남자를       
훤히 비추던 보름달 하나        
곰팡이도        
녹도        
이끼도 없이        
빌딩 모서리 스모그 위로 솟고 있을 때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다가       
껄껄껄 웃을 만큼       
낙천적인 해골은 누구인가

 

 

세속 도시의 즐거움 2 / 최승호

 상복 허리춤에 전대를 차고
곡하던 여인은 늦은 밤 손익을
계산해 본다.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끌어모은 것들을 다 빼앗기고
(큰 도적에게 큰 슬픔 있으리라)
누워 있는 알거지의 빈 손,
죽어서야 짐 벗은 인간은
냉동실에 알몸거지로 누워 있는데

흑싸리를 던질지 홍싸리 껍질을 던질지
동전만한 눈알을 굴리며 고뇌하는 화투꾼들,
그들은 죽음의 밤에도 킬킬대며
잔돈 긁는 재미에 취해 있다.

외로운 시체를 위한 밤샘,
쥐들이 이빨을 가는 밤에
쭉정이 되는 추억의 이삭들과 침묵 속에서
냄새나는 이쑤시개를 들고 기웃거리는
죽음의 왕.

시체 냉동실은 고요하다.
홑거적 덮은 알몸의 주검이
혀에 성에 끼는 추위 속에 누워 있는 밤,
염장이가 저승의 옷을 들고 오고
이제 누구에게 죽음 뒤의 일을 물을 것인지
그의 입에 귀를 갖다댄다
죽은 몸뚱이가 내뿜는다 해도
서늘한
허(虛)

 최승호 시집 <세속도시의 즐거움> 1990

 

 

몸의 신비 혹은 사랑 / 최승호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스스로 꿰매고 있다.
의식이 환히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헛것에 싸여 꿈꾸고 있든 아랑곳없이
보름이 넘도록 꿰매고 있다.
몸은 손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몸은 손이 달려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구걸하던 손, 훔치던 손,
뾰족하게 손가락들이 자라면서
빼앗던 손, 그렇지만
빼앗기면 증오로 뭉쳐지던 주먹,
꼬부라지도록 손톱을
길게 기르며
음모와 놀던 손, 매음의 악수,
천년 묵어 썩은 괴상한 우상들 앞에
복을 빌던 손,
그 더러운 손이 달려 있는 것이
몸은 부끄럽지 않은 모양이다.

벌어진 손의 상처를
몸이 자연스럽게 꿰매고 있다.
금실도 금바늘도 안 보이지만
상처를 밤낮없이 튼튼하게 꿰매고 있는
이 몸의 신비,
혹은 사랑.

 

 
人魚에 대한 상상 / 최승호

지하철 양재역에서
말죽거리 시장 쪽으로
하반신을 통째 고무가죽으로 싼

한 남자가 포복한다
동전 몇 닢 담긴 그릇을
보도블록으로 밀고 가는
그 느림은 지루하고
고통스럽다
兩棲類的 상상력에서
인어들이 태어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반신이 물고기가 있는가 하면
물고기대가리에 인간의 하체가 달린

인어도 있다.
그 두 인어가 바닷가에서
결혼식을 올린다고 상상해 보라
기념 사진을 찍어도 그 부부만큼
그로테스크한 고독이 있을까

 
- 최승호 시집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죽뻘 / 최승호

1
죽뻘에서 죽는다는 것은
배설물처럼 죽뻘에 반죽이 되는 것이다
죽뻘에는 무덤이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무덤들은 죽뻘에서 뭉개져 죽뻘이 되었을 것이다

죽뻘에서 죽는다는 것은
썰물과 밀물, 그 반복되는 바다의 애무 밑에서
침대 없이 잠자는 것이다
죽뻘에는 비석이 없다 그러나 나는 게를 위해 묘비명을 쓴다;
- 한 평생 옆으로 걸었노라!

구멍에서 나왔다가 구멍으로 들어가는
얇은 흔적들은 뭉개지고 지워진다
죽뻘에서 죽는다는 것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혼돈의 반죽 같은 상태로
바다의 부드러운 애무를 받는 것이다 베개도 없이

 

2
젖무덤들의 만다라처럼
끈적끈적한 죽뻘에서
배를 밀며 기어다니고 꿈틀거리는 것들,
어디가 입구멍이고 어디가 똥구멍인지
그 구멍이 그 구멍 같을 때
앞장서는 구멍에 끌려가는 구멍이 항문 아닐까

광활한 갯지린내 속의 갯가재, 아무르불가사리,
가시닻해삼, 큰구슬우렁이, 서해비단고둥,
만약 뻘이 만물의 어머니라면
우리는 족보 어지러운 뻘家의 자식들인가?

 

 
해바라기에 두 팔이 있었더라면 / 최승호

 

해가 중천에 솟아 있는데, 키가 껑충한 해바라기는
넘어져 있다. 해바라기에 짧게나마 두 팔이 있었더라면,
저렇게 땅에 얼굴을 처박듯이 쓰러져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로 누워 있는 해바라기의 얼굴, 석가도 저런
자세로 열반에 드셨다. 길 위에서의 열반, 그곳에 와서
그곳으로 가는, 길 위에서의 죽음, 그러나 오로지
한자리에 서 있는 삶을 고집하던 해바라기는, 뿌리
밑에 늙은 얼굴을 파묻을 듯이, 긴 여름의 해를 등진
채 넘어져 있다.

 

 

밤의 자라 / 최승호

긁어댄다, 대야를
내 청신경을 긁어댄다
시마詩魔에 끄달리며 무슨 글을 쓰는 것이냐고 
내 글쓰기를 긁어댄다
밤늦도록 잠자지 않고 
대야를 긁어댄다
벅벅 긁어댄다, 긁어댄다,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다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간다
대야의 자라는 
목을 딱딱한 등딱지에 집어넣고
나를 관찰한다
자물통처럼 생긴 
자라야
네가 껍질을 벗어놓고 글을 써볼래?
나는 네 대신 늪으로 들어가 
흐린 물 속을 알몸으로 헤엄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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