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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신료 전쟁, 스파이스 루트, 후추, 검은 황금

Jobs9 2021. 6. 1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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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스>
1975~76년 프랑스 인류학박물관 연구자들은 고대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2세의 미라를 엑스레이로 찍다가 그의 콧구멍 속에 후추 열매가 여러 알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인도 남부 열대지방에서 채취된 이 후추 열매들은 주검의 부패를 막기 위해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향신료의 역사가 30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발견이었다. 그러니까 애초 향신료는 ‘양념’처럼 음식 풍미를 더하려고 쓰였다기보다 불멸의 보존을 위해 인류사에 등장한 셈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향신료를 15세기 유럽의 근대를 열어젖힌 대항해 시대의 산물로 생각한다. 인도의 향신료를 찾아 헤매다 신대륙을 발견한 15세기 항해가 콜럼버스나 인도행 대서양 항로를 개척한 바스코 다가마가 세계사에 던진 거대한 반향 탓이다. <스파이스>를 지은 오스트레일리아 젊은 역사가 잭 터너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람세스 콧구멍의 후추 열매처럼 그만의 방대한 역사지식 창고에서 이 특별한 식재료의 숨겨진 역사를 끄집어낸다. 
람세스와 더불어 향신료 역사 첫머리에는 트로이 전쟁이 등장한다. 트로이 왕자 파리스는 스파르타의 헬레나를 꾄다. ‘신들의 음식’인 향신료 시나몬의 향이 타오르는 자신의 도성에서 ‘여신으로 대접’하겠다고 유혹한다. 시나몬이 다리 놓은 헬레나와의 결혼이 그리스-트로이 전쟁의 발단이었다. 고대 그리스·로마 역사서에는 대항해 시대보다 1500년 앞선 시기 그리스·로마 상인들이 인도행 교역로를 닦고 부를 쌓은 기록도 전한다. 중세 십자군은 지중해 동방 레반트 항구로 집산되는 희귀 향신료를 약탈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 뒤 전쟁의 떡고물로 동방의 후추, 클로브 등을 얻기 위해 비잔틴·베네치아·제노바 상인들 사이에 치열한 암투가 펼쳐졌다. 대항해 시대인 15~17세기엔 인도·동남아 산지 패권을 놓고 스페인·포르투갈·영국·네덜란드 사이에 무법천지의 ‘향신료 전쟁’이 이어졌다. 

향신료의 영단어 ‘스파이스’(spice)는 특별하다는 뜻의 ‘스페셜’(special)과 말뿌리가 같다. 그 매혹의 밑바닥엔 희소성이 있었다. 신비스런 동방에서 먼 길 지나 극소량만 왔다는 사실이 소유욕에 불을 붙였다. 로마·중세기 유럽 귀족들은 연회 음식에 향신료를 퍼붓거나 흩뿌리는 ‘멋’으로 지위를 뽐냈다. 후추 등은 국제통화·뇌물 수단으로 애용됐고, 상인들은 빚진 황제의 채무문서를 향신료와 함께 불사르는 탕감 이벤트로 아부했다. 18세기까지 역병의 나쁜 공기 기운을 막는 약재나, 발기부전을 치유하고 성감을 높이는 ‘정력제’로도 널리 쓰였음을 책 속 방대한 문헌기록들이 알려준다. 
대항해 시대 산지의 재발견은 거꾸로 향신료의 매혹을 감퇴시켜버렸다. 인도·동남아 산지에 제국들의 대규모 재배장이 들어서고 작물 특성에 대한 궁금증들도 풀리면서, 신비감이 사라진 탓이다. 하지만 코카콜라 맛의 비밀을 둘러싼 설왕설래나 요즘 식도락가들의 퓨전 요리 등엔 여전히 향신료의 옛 영화의 잔영이 남아 있다. 고대~근대기 요리책·의학서는 물론이고 풍자시, 산문, 항해일지, 성직자 수기 등을 샅샅이 섭렵하고 내놓은 이 책은 서양 요리사를 산책하는 타임머신 여행이기도 하다. 향신료투성이였던 고대 로마 귀족들의 기상천외한 연회음식 메뉴·레시피에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배를 가르면 안에서 새들이 날아오르는 멧돼지 요리, 후추로 속을 꽉 채우고 꿀로 양념한 겨울잠쥐 요리, 산 생선들이 파닥거리는 후추 와인 소스를 얹은 고기더미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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