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인간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떠올리는 아이디어다.”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새 책 <십자군 이야기>의 첫 문장대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겠다는 목적으로 1095년 십자군 전쟁을 기획한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압박으로 로마 바티칸에 들어가지 못하고 유럽을 떠돌고 있었다. 그는 “신이 예루살렘의 해방을 바라시며 이것은 신의 명령”이라고 유럽의 왕과 기사들을 충동했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그러나 아랍인들에게는 학살을 뜻하는 ‘악마의 전쟁’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1291년 예루살렘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200년간 계속됐다. 이 전쟁으로 기독교인, 이슬람교인, 유대교인들이 평화롭게 순례했던 성도 예루살렘은 오늘날까지도 전쟁의 도시가 됐다.
시오노 나나미가 <십자군 이야기>를 1077년 교황 그레고리우스(그레고리) 7세가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한겨울에 맨발로 사흘 동안 카노사의 성 앞에서 교황에게 용서를 빌던 20대의 황제는 이후 그레고리 7세가 죽을 때까지 그를 압박했다. 교황은 유럽 이곳저곳을 떠돌다 죽는다. 폼 한 번 잡다가 평생을 불행하게 산 그레고리 7세의 수행 비서 노릇을 했던 사람이 프랑스 출신의 우르바누스 2세다. 십자군 전쟁이 벌어지던 200년 동안 교황권은 왕권을 완전히 누르게 된다.
책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흐름을 잘 짚어주며 흥미롭게 이어진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가 선택한 관점 덕분이기도 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기독교 관점에서 십자군 전쟁을 옹호하거나 혹은 아랍의 관점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그가 대안으로 삼은 것은 이 전쟁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록했다고 생각되는 베네치아공화국의 기록이었다. 당시 베네치아공화국은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과 교역을 멈추지 않았다. 신앙보다 돈을 중시한 셈이다.
지은이는 그래서 십자군 전쟁의 주인공에 기존의 성직자와 기사에다 상인을 추가한다. 상인의 시각으로 이 전쟁을 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접근할 경우, 십자군 전쟁의 손익계산서 파악은 물론 르네상스를 비롯해 15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제국주의의 침략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상인들은 새로운 항구가 생기면서 발생하는 무역을 독점하는 대가로 십자군의 식량과 군대를 이송해줬다. 중동에 건설된 이스라엘 왕국이 해안가를 따라 생겨난 것도 이런 이유다. 설탕을 비롯해 아랍의 향신료가 유럽에 활발히 전해진 것도 이때였다.
십자군은 1099년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유럽에서조차 드물게 사용하던 공성전 장비를 선택했다. 목재를 조립해 성보다 높게 쌓아 위치의 불리함을 극복할 수 있는 장비다. 이 장비 덕분에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한달 만에 함락시킨다.
베네치아 공화국 역시 서구의 일부이다. 중립을 지키려 애쓰고는 있으나, 서양 문명을 사랑하는 저자의 시각에서 배태된 편향성은 거슬리기도 한다. 서양 기사들을 영웅처럼 묘사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특히 북유럽 노르만족 출신인 이탈리아 풀리아 공작 보에몬드와 그의 조카인 탄크레디에 대해선 지은이의 각별한 애정도 느껴진다. 보에몬드는 다른 영주들이 십자군 전쟁을 한창 벌이던 1110년 돌연 비잔틴제국을 정복하겠다며 비잔틴제국의 항구도시 두러스를 침공했던 인물이었다. 20대의 탄크레디는 불과 24명의 기병으로 예루살렘 주변의 갈리아 지방을 점령한 수완가로 묘사된다. 이슬람의 지도자들은 좀 모자란 인물들로 느껴지게 서술했다. 수십 대 1의 수적 우세를 전혀 살리지 못하는 무능력한 리더로 그려지기도 한다.
중동의 영주들은 십자군 침공 때부터 1099년 예루살렘 함락 때까지 십자군에게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는데, 지은이는 활 중심의 아랍군과 중무장 기병 중심인 십자군의 전투 방식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온몸에 철갑을 두른 중세 중무장 기병은 활로 제압할 수 없어 아랍인들에게 오늘날의 탱크를 처음 본 것과 비슷한 충격을 줬을 것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예루살렘 해방이라는 목적으로 분열 없이 일사불란하게 진군한 십자군과 달리 적전 분열을 반복했던 아랍 지도층의 분열도 큰 원인으로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