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의병 전쟁
을미의병 1895 → 을사의병 1905 → 정미의병 1907 →13도창의군 서울진공작전 1908 → 남한대토벌 1909 |
연도 암기
- 레일공사 의정공사 시설공사 보안공사 1904
- 가영포을 한국영혼 1905
- 헌정열다 화폐재료 시일장담
- 경부선 공단서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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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감 열려 1906
- 정미7 경칠 1907
- 한국공치 국채골치 1907
- 신민골치 신문골치 1907
- 오산꼴찌 헤이그 공쳐 1907
- 진공장판 1908
두문자
● 을미의병 - 허기(진)유이
- 허 경상도 허위
- 기 전라도 기우만
- 유 충청도 유인석
- 이 강원도 이소응
항일 의병 전쟁
전개 : 을미의병 1895 → 을사의병 1905 → 정미의병 1907 →13도창의군 서울진공작전 1908 → 남한대토벌 1909
주도 : 지방의 유생과 농민
성격 : 즉각적인 무장투쟁
- 민족 생존권 사수를 위한 무력항쟁으로 일제침략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민족적 저항
● 을미의병(1895) : 항일의병운동의 시작
(1) 배경 :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 갑오개혁에 따른 반일감정, 을미사변, 단발령
(2) 주도 :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양반 유생
(3) 구성원 : 일반 농민과 동학농민군의 잔존 세력
(4) 활동 : 친일적인 갑오정권 타도와 일본군 수비대를 주요 공격대상을 삼음
(5) 해산 :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의 붕괴 후 단발령 철회, 국왕의 해산 권고조칙으로 대부분 해산했고, 일부는 고종의 해산조칙을 거부하고 만주로 들어가 재기, 항전을 준비하기까지 하였다. 나머지는 화적과 활빈당으로서 투쟁을 지속했다.
(6) 전개
① 의병의 시작 - 1894년 6월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사건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 1894년 8월 안동에서 서상철이 거병하였다. 1895년 7월에는 평안도 상원에서 김원교가 의병을 일으켰다.
② 을미사변 직후에는 유성에서 문석봉(무과 출신)이 거병하였고, 단발령이 발표된 후에는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다.
- 제천의 유인석∙ 서상렬, 춘천의 이소응, 이천 여주의 박준영, 선산의 허위, 강릉의 민용호, 홍주의 김복한, 산청의 곽종석, 문경의 이강년, 전라도 장선의 기우만 ∙ 이춘영
* 유인석 : 격고팔도별읍의 격문- 지구전론과 북계지역인 백두산과 그 주변 고을을 중심으로 독립전쟁 근거지를 구상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자 그는 문인들에게 앞으로 대처하기 위한 세 가지 방향으로서 자기 몸에 소중화 나라의 화맥을 지키는 수화어신의 길인 처의삼사를 제시하였다.
* 이강년 : 무과출신으로 구식군대의 맹장이었다. 1908년 죽기에 앞서 고결팔역동지의 글을 남겼다.
(7) 을미의병의 성격
① 존왕양이론에 철저한 척사적이며 임금에 충성하고자 하는 근왕적이다.
- 중화적인 가치를 지키려는 주자학적 윤리관과 단발로 상징되는 개화를 야만시하는 반개화의식, 국모 시해에 대한 대일 복수의식을 포괄하는 반개혁, 반침략적인 무장투쟁이었다.
② 대부분은 유생층이 중심이 되어 민중을 모집한 형태로 농민층의 호응을 받지 못하여 전투능력이 취약하였다.
- 양반유생들의 투쟁이념은 위정척사적인 것으로 농민층의 자발적 참여를 불러올 수 있는 것이 못되었다.
양반들이 의를 일으켜도 군사력이 되어야 할 농민들이 모이지 않아 해산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몇몇 부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의병부대들은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애초부터 전투를 벌일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③ 보수적 유생과 민중들 사이에 계급적 대립이 나타나고 있다.
- 유인석 부대에서 포수 출신의 선봉장 김백선을 양반불경이라는 이유로 처형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 을사의병 (무력항일운동 제 2기, 1905년)
(1) 전개 :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을 계기로 다시 일어난 의병운동으로 을사조약 반대와 친일내각 타도를 목표로 하여 반개혁, 반침략 노선을 가졌다. 그리고 을미의병의 국구보복에 대신하여 을사의병은 국권회복을 전면에 내세웠다.
(2) 의병장 : 강원도의 원용팔, 경기도의 이문호, 전북의 최익현 ∙ 임병찬 ∙ 양한규, 전남의 백낙구 ∙ 고광순 ∙ 양회일, 경상도의 신돌석 ∙ 정용기 ∙ 이현규 ∙ 유시연, 황해도의 이진룡
① 을사조약 2개월 전에 강원도 원주에서 원용팔 부대가 거병하고 경기, 강원, 충청, 경북 일대에서 소규모 의병이 일어났다.
② 민종식 - 을사조약 체결 후 관직을 버리고 1906년 3월 의병을 일으켜 충남 정산에서 거병, 홍주의 이세영 ∙ 안병찬과 합세하여 홍주성 점령 → 일본군 대부대와 대치
③ 정용기 - 고종의 밀칙을 받은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에게 의병 봉기를 지시하였다. 경상도 영천에서 600여 명으로 의병을 편성하고 청하, 청송지방을 전전하면서 활약하였다. 의병장 정용기가 전사하자 부친인 정환직이 그 뒤를 이었지만 또한 전사했다.
④ 신돌석 - 1906년 3월 의병을 일으킨 평민의병장으로 경상, 강원도 접경에 있는 일월산을 거점으로 평해, 울진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사람들은 신돌석을 ‘태백산 호랑이’라고 불렀다. 의병의 수가 약 3000여명 → 1908년 11월에 암살당하였다.
⑤ 최익현 - 1906년 4월 전북 태인에서 포고팔도사민 격문 : 제자 임병찬과 함께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거의하고 태인 관아를 점령하고 순창에 입성하여 관군과 대치하였으나 동족끼리 싸움을 중단, 포로가 되어 1907년 1월 쓰시마섬에서 순국하였다.
(3) 을사의병의 특징
① 전직관료들이 의병을 일으킨 사례가 많아졌다.
② 평민의병장이 등장하였으며 민중이 의병의 주도세력으로 명확하게 자리잡아갔다.
- 민중이 독자적인 조직을 통하여 독립된 부대를 지휘하는 경우가 나타났다.
③ 창의 목표는 무엇보다도 국권회복에 있었고 따라서 전투능력 확보에 노력하였으며 수성전에서 유격전 형태로 변화되어 갔다.
- 을미의병의 척사적인 입장이나 성리학적 명분론을 내세웠던 것에 비하여 발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상소와 시위형태의 활동을 지양하여, 포수와 포군을 주력으로 한 전투적인 부대로 편제하여 일본군의 주둔지와 일본인 거류지, 통신시설을 공격하였다. 이것은 일제의 정치, 경제적 침탈이 가속화되는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④ 다수의 유생들이 참여하였으며, 여전히 계급적 한계가 있으면서도 초기의 유생의병장에 비하면 의식적 발전이 있었다.
- 유생의병장은 대체로 제국주의 침략을 단순한 소중화문명의 파괴라는 것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국권이 침탈되었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나아가 제국주의 국가를 하나의 국가로 인식하고 이들의 침략을 만국공법, 외교적 절차 등의 수준에서도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교적, 봉건적 한계로 의병전에 대해 매우 소극적이고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 정미의병 (1907년 의병전쟁으로 발전, 전면적인 항일전 제 3기)
(1) 계기 :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
(2) 정미 7조약과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의 조직과 화력이 강화되어 의병전쟁형태로 발전하였다. : 일본과의 전면전의 성격을 띠는 대일항전으로 확대되었다. 박승환자결 후 시가전을 벌였던 시위대와 각 지방 진위대 등 해산군인의 합류로 우수한 지휘관과 새로운 무기가 공급되어 의병의 전술과 화력이 강화되었다. 해산군대 중 원주진위대(김덕제, 민긍호)와 강화분견대(지홍윤, 유명규)의 투쟁이 가장 치열하였다.
(3) 의병연합부대 형성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시도하였다.
① 유생이 주도한 의병활동의 절정으로 서울 근교까지 진격
- 의병연합부대(13도 창의군)가 경기도 양주에 집결
- 군사장 허위가 거느린 300명의 선발대가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서울근교에서 패하고,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자 불효는 불충이라고 하면서 귀가해버려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하였다.
* 13도 창의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경기 황해 창의대장 권중희, 관서 창의대장 방안관, 관동 창의대장 민긍호, 관북 창의대장 정봉준, 호서 창의대장 이강년, 호남 창의대장 문태수, 영남 창의대장 박정빈
②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외교 활동 -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전단체로 승인 요구
③ 창의군 해산 이후 -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긍호는 전사하고, 이인영, 이강년은 붙잡혀 사형을 당하였고, 허위는 옥사하였다.
(4)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이후 : 각지에서 연합부대를 형성하여 연합작전을 벌였다. 1909년 전라도에서 전해산, 심남일 등이 연합작전을 벌였으며 이외에도 함경도 지방의 홍범도 부대와 평안도 지방의 채응언 부대 등이 정미의병의 대표적인 부대들이다.
1908년 초반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홍범도부대는 삼수, 갑산, 단천, 함흥 등지를 무대로 1909년 무렵까지 활동하다 만주, 연해주지역으로 이동하여 의병전쟁을 지속하였으며, 채응언부대는 1907년 무렵부터 출발하여 1911년 무렵에도 200여 명의 병력으로 활동했으며 1913년에 마지막 전투를 벌이는 지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5) 1908년을 전후하여 장기항전에 대비한 의병기지 건설을 추진하였다. : 중부이북의 의병들은 북계책을 추진함으로써 국외에서 항쟁의 근거지를 찾아 간도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의병의 기지를 건설하였고, 남부지역의 의병들은 지리산과 해안 도서지역을 의병의 기지로 주목하였다.
(6) 의병의 확산
① 활동 영역도 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확산되었으며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 1908년 8월 홍범도, 이범윤 등은 연해주 의병을 이끌고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② 1908년 3월 전명운, 장인환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스티븐슨사살
③ 1909년 12월 이재명이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7) 정미의병의 특징
① 전면적인 민족전쟁으로 발전
- 평민출신, 군인출신의 의병장 수가 양반 유생출신의 의병장 수를 능가하였고, 농민 ∙ 노동자 ∙ 광부 등의 전 민중의 의병참여로 의병의 활동지역은 1907년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한 경기, 황해, 충북, 강원, 경북 외에도 전남, 전북, 함남지역까지 확대되었다.
- 일본군 통계에 의하며 전국의 의병장과 부장 225명 중 그 출신 성분이 양반 유생은 25%였고, 기타는 농민, 사병, 화적, 광부, 장교 등이었다.
- 해산군인을 비롯한 빈농과 행상 등 평민출신의 의병장이 증가하였다. 홍범도, 안규홍, 차도선, 김수민, 연기우 등이 평민출신 의병장이다.
② 양반 유생이라도 전과 같이 신분적 위계질서를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 후기 의병에서 유명했던 전해산, 심남일, 안계홍 등 양반의병장들은 모두 몰락양반 출신이었다.
③ 군대해산 이후 전투력은 향상되었고 부대규모는 점차 축소되고 유격전법을 사용하였다.
④ 쌀 수출을 하던 지주, 부농과 일본 미곡 상인을 상대하던 상인까지 공격대상이 되었다. 나아가 자체적으로 방곡령도 하였다.
⑤ 양반 유생 지휘하의 의병운동은 반일, 반개화, 근왕적 성격이 강하였으나 평민 지휘하의 의병운동은 반일, 독립전쟁적 성격을 띠었다.
⑥ 지역주민과 유대강화에 힘썼다. - 의병들은 주민들을 괴롭히는 부호의 토색이나 관리의 가렴주구 등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으며, 주민들은 의병들에게 숙식과 정보를 제공하며 서로 도왔다.
⑦ 1908년 ~ 1909년은 전국적으로 의병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는데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 한일합방 전후기의 의병 (1909. 10 ~ 1914) : 항일의병 제 4기
(1) 위축 : 1909년 목포의 일본인 상업회의소는 전남 의병을 조속히 진압해줄 것을 통감부에 호소하였다. 일본군의 남한대토벌 작전(1909. 9, 전라도 지역이 주된 탄압대상)을 계기로 국내의 의병활동은 크게 약화되어 의병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전환되었다. 1910년에는 이러한 작전을 경상북도 북부와 황해도에 대해서도 실시하였다.
(2) 계승 : 잔존 의병은 만주와 연해주로 옮겨 독립군으로 항전하였으며, 국내에서는 황해도와 경상북도 산악지대에서 의병투쟁이 분산적으로 지속되었으나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의 체포(1914)와 독립의군부에 대한 검거사건(1914)을 고비로 조직적인 활동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 항일의병전쟁의 의의
(1) 국가 멸망의 시기에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저항정신과 자주정신을 잘 보여 주었다. 또한 보호국 체제하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을 주도했고, 식민지체제하에서 무장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20세기 초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2) 전 민족적 반일, 반제국주의 항전이었다. : 일제의 통계를 따르더라도 의병전쟁에서 1907년 8월부터 1910년까지 일본군과 2852회의 전투를 전개했고 17779명의 의병이 전사했다. 이는 일제의 한일합방의 합법성 강변이 얼마나 거짓인가를 입증해 주는 가장 확실한 근거이다.
● 항일의병전쟁의 인식의 변화
(1) 척사론적 입장에서 벗어나 일본이나 서구 열강도 조선과 동등한 국가로 인식하여 격문, 문서에 만국공법(한말 유학자 곽종석은 외국공관에 글을 발송할 때)을 인용하였다.
(2) 척사적, 근왕주의에서 서서히 탈피하면서 민족의식이 부상해 갔다. 따라서 근대국가의 주권수호를 위한 독립전쟁의 형태로 변화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신분제적 봉건성을 극복하면서 참가 주도층은 양반 유학자에서 점차 평민출신으로 바뀌어 갔다.
● 항일의병전쟁의 한계
(1) 무력적 열세로 일본군을 제압하지 못하였고, 국제적 고립으로 국제적 지원을 받지 못하였다.
(2) 초기 : 사상적 제약 - 보수적 유생 층의 지도노선으로 결속이 강화되지 못하였다.
(3) 의병전선에 봉건성을 탈피하면서도 근대적 지도이념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하였다.
Q 다음 조칙이 발표된 이후의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관보≫ 호외 짐이 생각건대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여 이용후생에 응용함이 급무라. 현재 군대는 용병으로서 상하의 일치와 국가 안전을 지키는 방위에 부족한지라. 훗날 징병법을 발표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할 때까지 황실시위에 필요한 자를 빼고 모두 일시에 해산하노라. |
<보 기> ㄱ. 신돌석과 같은 평민 출신의 의병장이 처음으로 등장 하였다. ㄴ. 단발령의 실시로 위정척사 사상에 바탕을 둔 의병 운동이 시작되었다. ㄷ. 연합 의병 부대인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어 서울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다. ㄹ.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의병 부대의 근거지가 초토화되었다. |
① ㄱ, ㄴ ② ㄱ, ㄹ ③ ㄴ, ㄷ ④ ㄷ, ㄹ
【해설】 정답 ④
제시문에서 “황실시위에 필요한 자를 빼고 모두 일시에 해산하노라. ” 부분을 보고 1907년 정미조약으로 한국군의 해산을 떠올렸다. 1907년 이후의 상황을 고르면 된다.
㉠ 신돌석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하여 외교권이 상실되자 이래서는 나라가 망하겠구나 해서 유생이 아닌 평민도 애국심을 발휘하여 의병장으로 나타남
㉡ 단발령은 을미사변 1895년 이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미개혁을 주친한 결과이다. 당시 김홍집 내각은 단발령을 선포하였는데 이에 대한 반발로 “ 목은 자를지언정 머리는 못자른다”로 맞서 전국 각지에서 유생 의병의 항쟁이 있었다. 이는 단순한 단발령의 반발이 아니라 일본에 대한 저항의 차원에서 일어난 것이다.
㉢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은 1908년에 총사령 이인영, 군사장 허위의 지휘에 의해 계획된 것이다.
㉣ 1909년 일제는 ‘남한대토벌작전’ 이라면서 “항일의병의 씨를 말려야 한다”며 이러한 만행을 저질렀다.
을미의병 1895 → 을사의병 1905 → 정미의병 1907 →13도창의군 서울진공작전 1908 → 남한대토벌 1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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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감 열려 1906
- 정미7 경칠 1907
- 한국공치 국채골치 1907
- 신민골치 신문골치 1907
- 오산꼴찌 헤이그 공쳐 1907
- 진공장판 1908
Q 다음 두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사실로 옳은 것만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 일제에 의한 군대 해산 |
ㄱ. 안중근이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ㄴ. 민영환이 일제에 대한 저항을 강력하게 표현한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ㄷ. 장지연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황성신문에 발표하였다. ㄹ.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연합 의병 부대(창의군)가 서울진공작전을 시도하였다. |
【해설】 정답 :ㄱ, ㄹ
정미의병 (1907년 의병전쟁으로 발전, 전면적인 항일전 제 3기)
을미의병 1895 → 을사의병 1905 → 정미의병 1907 →13도창의군 서울진공작전 1908 → 남한대토벌 1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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