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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지정학적 가치, 세계의 원자로

Jobs 9 2025. 3. 1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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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지정학적 가치

 

지구상에서 가장 무서운 장소(The scariest place on Earth)

빌 클린턴

 

북쪽으로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있고 강폭이 좁은 곳을 개마고원이 막고 있으며 한반도 내에는 청천강, 대동강, 임진강, 한강 같은 넓은 강이 연이어 있고 이들 강이 좁은 곳은 백두대간이 막고 있기에 근대 이전까지는 강이 얼어붙는 겨울이 아니면 공격하기 어려웠다. 영향력이 전세계적이라 해당 관련국이 목숨 걸고 사수하는 지브롤터 해협, 말라카 해협, 수에즈 운하, 파나마 운하, 바브엘만데브 해협, 호르무즈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 등과 비교했을 때 중요성이 덜하지만 적어도 동아시아 대륙에서는 태평양으로 뻗어나가고, 동시에 태평양에서 동아시아 대륙으로 확장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최고의 거점이다.

 

한반도 내부 지정학

한반도의 분수계 형세. 백두대간이 천혜의 방벽 역할을 한다.

 

 

한반도에 있던 국가들은 지리적 조건을 활용하면서 대륙에 위치한 중원 국가 및 만주의 국가들과 외교전을 벌여왔으며, 해양 국가인 일본과도 외교 관계를 맺어 왔다. 한반도 지리를 보면 수-당의 대군이나 북방 유목민들이 고전한 이유와 일본이 임진왜란 때 점거했던 경남 지역에 왜성을 구축한 이유, 이순신의 보급로 차단이 가져온 전략적 성과, 6.25 전쟁 초기 국군이 일찌감치 전략적 후퇴를 감행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한 이유 등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 몽골 등의 이민족 왕조들이 오랜 전란(戰亂)을 끝내고 강력한 통일국가로 변모할 경우, 넘처나는 힘을 투사(投射)하는 곳이 바로 한반도였다. 한나라, 수·당제국은 통일 후 바로 한반도로 눈을 돌렸고, 거란, 몽골, 후금은 중원을 공략하기 전에 후방 안정화를 위해 한반도를 공략했으나 위에서 서술된 수많은 침략사례들의 결말에도 나오듯 한반도의 지리가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기에 한반도를 완벽히 점령하는데 성공한 세력은 근대 시대 열강이었던 일본 제국 밖에 없었다. 수천 년의 역사에서 외세에 한반도 전체가 완전히 병합된 건 35년으로 상당히 짧다. 수나라와 거란은 아예 탈탈 털려서 멸망 또는 하락세에 접어들었고, 당나라와 몽골은 몇십년간 고생하다가 겨우 눌러놓고 조용히 시키는데 성공했으나 당은 신라와 연합한 점 때문에 한민족 국가의 힘을 빌렸고 이마저 백제와 고구려를 먹고 신라마저 집어먹으려다 나당전쟁에서 오히려 역공을 당해서 크게 패배하는 바람에 신라를 멸망시키지 못하고 한반도에서 쫒겨나고 이후 발해의 건국을 막지 못해 요동, 만주 지역까지 토해내야 했고 몽골 또한 고려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고 부마국으로 삼는데에 그쳤다. 또한 16세기 도요토미 정권 또한 명의 지원과 조선군민의 처절한 저항 끝에 처음 목표로 했던 조선 점령에 실패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결국 패전 후 쫓겨나다시피 하면서 돌아갔다. 17세기 청나라는 병자호란에서 단기간에 조선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후방에 명나라가 아직 존속 중이었고 본 목적이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는 것이었으므로 조공국으로 삼는데 그쳐 조선이 청나라에 합병되거나 멸망하지는 않았다. 이후 19세기 후반 임오군란 때 청나라가 임오군란을 진압하여 조선을 간섭하긴 했으나 이번에도 조선은 청나라에 병합되거나 멸망하진 않았으며 얼마 못가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하여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났다.

 

한반도의 일부 지역이라도 점령하는데 성공한 경우는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한나라와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에 잠시나마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두어 관리했던 당나라, 고려의 철령 이북을 점령하고 한반도를 간섭했던 몽골 제국 정도였고, 한반도 전체를 완전히 점령했던건 일본 제국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일본 제국마저 조선이 당시 세도 정치로 청나라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막장이었던 점도 크고 일본 제국도 이 막장 국가 조선을 먹기 위해 상당히 고전했으며 상술했듯 일본 제국을 제외하고는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하진 못했다.

 

 

 

한반도 외부 지정학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중간지인 한반도

 

 

이렇게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통일을 한 후, 해양세력은 대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북방세력은 중원공략 전 후방안정화를 위해 틈만 나면 한반도를 공략했다. 또한 근, 현대에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그리고 미국, UN과 중국이 참전한 6.25 전쟁 등 1900년 ~ 2000년도까지 국제급 전쟁이 한반도 인근에서 수차례 터졌다는 것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예일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 20세기까지 해양 국가인 일본의 국력이 대륙 국가인 중국의 국력을 앞섰기에 해양 국가와 대륙 국가의 길목이라는 의미가 커졌던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섬이라는 고립된 위치가 일본이 문물을 수용하는데 있어 어려움을 주었고 발전의 속도가 한반도에 비해 현저히 늦었다. 이로 인해 국력이 한반도의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낮았기 때문에 일본이 백제의 요청으로 군사를 보내거나 왜구들이 약탈하는 것을 제외하면 일본이 공식적으로 한반도를 침략한 것은 임진왜란이 근대 이전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임진왜란도 명나라가 희대의 암군인 만력제의 시대였고 조선도 선조 시기인데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군사력이 최고조였고 조명 연합군의 지휘권을 가진 명나라군이 전투에 적극적이기 보다는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려 했고 일본도 초기의 대륙 진출보다는 삼남 지방 지배로 목표를 수정했기에 조명연합군과의 전쟁에서 7년을 끌 수 있었다.

 

다만 고립된 지형 상 서구 문물이 도달하는데 어려움이 많아서 한반도 대신 중국 대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청나라, 일본 열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일본의 영향 때문에 서구와의 교류가 다른 동북아시아보다 꽤 늦었다. 그래서 반도임에도 특유의 지정학적 이점을 별로 누리지 못하였는데 이를 '빼앗긴 반도성'이라 하며, 한반도가 섬으로 표기되는 지도가 17세기까지 존재했을 지경이었다. # 일본은 당시에 네덜란드와 직접 교역을 하였고, 중국에도 16세기에 마테오 리치가 활동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서구화가 늦은 것이 산업화를 어렵게 하였으며, 전기 가로등 같은 문물을 영국이 1881년에 도입할 때 조선은 1887년에 그리스나 오스만 제국보다 이르게 도입할 정도로 아주 이런 문물 도입에 소극적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일본의 국력을 따라잡지 못하게 되어 나라가 일본에 빼앗기게 된다. 중국, 일본이나 기타 북방 민족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의식했으나, 러일전쟁이나 청일전쟁이 발발해서야 한반도의 중요성은 서양에 좀 인식되고 6.25전쟁이 발발하고 더 그 인식이 커졌으며, 본격적으로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한국의 발전과 중국의 위협으로 인해 서양에서도 한반도의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지정학적 의미가 근대 이전에도 작진 않았다. 대륙의 패권 교체기에 북방 유목민족이 중원을 칠때 후방에서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 한반도 세력인 고려와 조선이었다. 그래서 북방 유목민족들은 중원을 치기 전에 꼭 한반도를 공격했고 한반도를 공략하는데 실패한 세력은 결국 중원 전체를 손에 넣지 못했는데 예를 들어 거란과 수나라는 고려와 고구려에게 패배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고, 원과 청은 고려와 조선을 공략해 조공국으로 삼은 후, 중원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선사 시대 이후 몇천 년 이상 한반도는 이처럼 북방 유라시아의 유목제국 vs 중국 본토의 한족 농경국가 동쪽에 연결된 경첩 포지션으로 동아시아의 패권 균형의 추였다. 다만 18세기 청나라가 중앙아시아의 준가르를 없애며 유목 세력을 절멸시켜 동아시아의 절대자가 되고, 19세기 다시 아편 전쟁에 휘말리며 종이호랑이가 되면서 이 때부터 현재 우리가 아는 대륙 vs 해양 구도로 재편되어 지정학적 의미가 세계 스케일로 확대되었을 뿐.

 

 

 

세계의 원자로

주요 열강 세력권이 전부 맞닿아 있는 한반도

 

 

현대에 들어와서는 주변에 러시아, 중국, 일본이라는 강대국 3국이 자리잡았고, 보너스로 태평양을 통해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도 동맹을 맺는 골때리는 상황이 펼쳐졌다. 일본 측에선 원나라의 일본원정 등을 사례로 들어 한반도가 일본을 공격하기 좋은 위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카쿠라 카쿠조(岡倉覚三)는 한반도에 대하여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단검'이라며 교두보로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Okakura 1905: 280) 물론 러일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한 말이라고 하며 저런 주장 자체는 정한론을 펴는 자들이 한일병합을 밀어붙이는 근거로 써먹었다. 한편 지금은 예전과 의미가 조금 달라졌지만 러시아의 경우 한반도를 얻을 수 있다면 극동함대가 부동항을 얻을 수 있다. 중국의 경우 한반도를 장악할 수 있다면 동해와 서해를 내해로 쓸 수 있으며, 동아시아 장악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뿐더러 대표적 반중 국가이자 태평양 일대 군사력 구도에서 미국과 가까운 군사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을 견제 및 침공 할 수 있는 사실상의 불침항모를 얻는다. 덤으로 한국군에 의한 위협도 크게 줄어드는 건 보너스.

 

반대로 한반도를 미국이 장악한다면 중국의 국가 역량 대다수가 집결된 동부 지역을 견제 및 타격할 수 있는 불침항모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은 물론이요, 한반도를 배제할 경우 동부 연안 상륙 혹은 중국 본토 공략에서 대륙에 다리를 놓는 결정적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다. 괜히 중국 측에서 대한민국을 견제하기 위해 북한을 지원하고 '미국 없었으면 진작에 손 봐줬을 나라'라며 게거품을 무는 것이 아니다. 거기다 미국의 입장에선 보너스로 러시아까지 동시에 견제할 수 있고 중국과 러시아 이 둘을 육지를 통해서도 견제 할 수 있기 때문에 잃으면 정말 뼈아픈 곳이다. 중국과 러시아를 처음부터 땅 밟고 가는 것과 공중전과 해전을 동시에 수행해서 생기는 틈 사이로 상륙을 해 교두보를 차지하는 것과 비교하면 난이도에서부터 차원이 다르다. 실제로 전쟁에서 공격자가 방어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불리한 형태의 작전 중 하나가 상륙작전이다.

 

이 복잡한 지정학적 조건 탓에 한반도는 국제 정세에서 큰 주목을 받았으며, 이른바 세계의 화약고 중에서도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꼽힌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 그 자체는 잘만 활용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있지만 자칫 전쟁이라도 나면 여느 화약고와 비교를 불허하는 대형 참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전에 이를 막기 위해 주변 국가들이 강력하게 통제하는 것이 마치 원자로를 관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비유하여 세계의 원자로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다만, 이 복잡한 지정학적 조건이 꼭 나쁜 것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좋든 싫든 미중일러같은 세계적인 강대국들이 관심을 갖는 지역에 있기 때문에, 선진 문물을 다른 지역보다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는 한반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역사에 흐름에 아예 뒤쳐져 버려지지는 않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는 중국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잘 흡수했고, 근대와 현대에는 남한의 경우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원조와 외자를 유치하고 최신 공업 기술과 자유민주주의를 습득해 선진국으로 부상했다. 실패 국가라 불리는 북한조차도 러시아나 중국으로부터 군사 원조와 핵무기 제작 기술이나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특히 과거 중소 간 등거리 외교로 국체를 보전하기 쉬웠으니 지정학적으로 오직 저주만 받았다고 말하긴 어렵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자리잡은 국가들은 충분히 자기 입장을 내세울 수준의 지역강국은 될 수 있었으며, 땅덩어리의 크기를 감안하면 이는 지정학적으로 훌륭한 위치에 자리잡았단 증거로 볼 수 있다. 한국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절묘하게 놓여있으면서 러시아 극동지역까지 커버할 수 있는 위치이다보니, 현대에 들어서는 대규모 인터넷망, 데이터센터, 철도, 항구, 공항 같은 정보통신과 교통 및 물류운반 시설들을 짓기 매우 좋으며, 경제적으로도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이 장점으로 작용한다. 대표적인 예시

 

게다가 세계 최고 수준의 인프라와 인구 밀집도를 자랑하는 한중일 3국의 수도인 베이징-서울-도쿄 벨트지역과, 인근의 항구도시로 한국 부산, 인천, 중국 상하이, 톈진, 일본 오사카, 일본 나고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홍콩, 마카오, 대만의 가오슝이 있으며, 이 모든 지역들이 한반도 중심부를 기준으로 반경 약 1,000km ~ 1,500 km 이내에 존재하므로 전부 다 합지면 대략 16억 남짓한 인구와 25조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하지만 전쟁이 나면 수많은 사상자와 함께 이 모든 인프라가 전부 박살나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은 문제아인 북한을 억제하려고 군사력에 상당히 집중하고, 한반도 주변 국가들도 어떻게든 한반도에 전쟁을 안 나게 하려고 분쟁을 하더라도 외교전으로만 진행하고 군사적 충돌은 안 일으키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심지어는 북한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과 9.11 테러 이후의 분노한 미국을 두고 북한이 한 행동에서 보이듯, 자기네들 때문에 진짜로 전쟁이 날 것 같으면 알아서 꼬리를 내릴 정도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세계의 화약고라는 표현과는 달리, 외교전이 아닌 실제 군사적 충돌의 위험도는 오히려 덜한 편이다. 즉 일단 전쟁이 터지면 가장 위험하지만, 그 전쟁 자체가 터질 가능성은 생각보다 낮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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