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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문화 성격, 한중일 연관

Jobs9 2021. 10. 4.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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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문화의 혼성적 성격

 

I. 한국 대중문화 형성의 혼성성

 

2006년 현재 한국에서 한, 중, 일 문화공동체를 논하는 것은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를 놓고 볼 때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실제로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는 곧 수입된 해외 대중문화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특히 일본의 식민지배를 중심으로 일본의 대중문화가 사실상 한국대중문화를 그 기초적 형태부터 형성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대중문화는 또한 1930년대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기에 중국문화의 요소들을 그 안에 받아들여 또 다른 의미에서의 한, 중, 일 문화교류와 혼성 현상마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타났던 한, 중, 일의 문화적 혼성과 교류는 2006년 현재의 맥락에서 한국 정부와 지식인들이 논의하고 싶어 하는 문화적 교류 또는 문화공동체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즉 한국 대중문화 형성기의 한, 중, 일 대중문화의 지형도는 일본의 일방적이고 지배적인 헤게모니 아래서 중국문화가 편입되어 들어간 형국이고, 한국의 경우는 한국적인 문화적 주체성이라고 내놓을 만한 것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일방적인 지배-피지배의 국면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2006년 현재 한국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한, 중, 일 문화교류 이야기는 소위 ‘ 한류’ 라는 용어로 대표되는 한국 대중문화 상품의 일부가 한국인들이 보기에 ‘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들의 대중문화를 형성하는데 있어 절대적으로 지배적 위치에 있어왔던 일본과 그리고 그 이전 시기부터 자신들에게 문화를 전수해주면서 아시아적 문화 헤게모니를 지배해왔다고 인식되는 중국의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고있는 ‘ 놀랍고 감격스러운’ 현상을 발견하면서 등장하게 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대중문화계에서 일고 있는 한, 중, 일 문화교류 내지 문화공동체와 관련된 담론, 보다 구체적으로는 ‘ 한류’ 와 관련된 한국내의 담론이 갖는 성격을 위치매기고 상대화시켜 살펴보기 위해서는 한국 내에 유입, 이식되어온 해외 대중문화 영향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과 그것을 바탕으로 이후를 전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해방 이후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는 일제시대 동안 이미 강하게 형성된 일본문화의 영향에 뿌리를 둔 채 다시 한반도에 진주한 미국의 문화적 홍수가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한 미국문화의 영향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한편 해방 직후는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갈구와 일제 식민지배의 영향을 벗어나고자 하는 동기 또한 워낙 강하여서 정치적으로 일본 대중문화의 유입통로를 차단하기 위한 정책적인 노력이 수십 년에 걸쳐 지속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이와 함께 1940년대 말 공산화된 중국 대륙의 대중문화는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상 그 문화산업적 수준이 박약했던 것도 사실이거니와 ‘ 공산국가’ 의 문화적 영향 유입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도 겸하여져서 중국대륙의 대중 문화적 요소 또한 오랜 동안 유입이 정책적으로 차단되었다. 대신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홍콩에서 발전한 무협영화 또는 무술영화들을 기본으로 하는 오락성 영화들이 한국 영화산업에서 무시하지 못할 열풍을 일으켰고, 이후 ‘ 홍콩영화’ 로 대변되는 중국영화들의 한국 내 위치를 공고히 했다. 

일본 대중문화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수입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현실에 있어서의 영향은 여전히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대중문화의 수입이 금지된 해방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동안 일본 대중문화는 우선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있어서 하나의 교과서적인 역할을 해온 것이 현실이다. 또한 1980년대 후반에 들어 여행의 증가와 비디오 및 디지털 대중 미디어의 발달에 따라 일본의 문화상품들을 한국내로 반입해 들어오는 것이 쉬워졌고, 케이블 텔레비전의 시청권 확산은 대중문화 상품의 국경개념을 무력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한국 시장개방을 단계적으로 시작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일본 대중문화가 한국의 대중문화의 제작과 소비영역에서 커다란 영향을 계속 미쳐오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2000년대 초기부터 현재까지 동아시아 여러 곳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한국 대중문화 산업 상품들의 의미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 위에서 어떤 위치를 점할 것인가? 특히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 한류’ 담론은 한국 대중문화사에 대한 인식위에서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될 것인가? 나아가 거기서 대중문화 상품들을 중심으로 한 “ 한, 중, 일 문화교류” 의 활성화와 “ 문화공동체” 형성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지게되며 어떤 역사적 상황 위에서 탄생한 담론적 산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이같은 문제의식을 지닌채 이 글에서는 개항기 이후 한국에서 ‘ 대중문화’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형성되는 초기에서부터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했던 해외문화의 유입 현상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II. 일제시대의 한국 대중문화 형성

 

대중사회의 형성이라는 것 자체가 근대적 산물이라는 점을 전제하고, 대중적 매체를 활용한 문화소비상품을 대중문화 상품이라고 한다면 한국에서 해외 대중문화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식민지적인 근대화를 겪기 시작한 개항기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는 곧 해외 대중문화 유입의 역사와 함께 출발했다. 그리고 그것은 수요와 공급의 자연스러운 시장적 상호작용에 따른 것이기보다는 식민지적 상황이라고 하는 특수한 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대중문화의 소비 자체가 모두 강압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으며, 다수의 대중문화 상품은 한국인들 스스로의 자발적인 문화소비 욕구에 부응하는 형태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문화적 영향의 방향은 일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중문화를 제작, 유통, 소비할 수 있는 장치와 자본, 그리고 공간의 마련에 있어서 그러한 일방성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1. 한국 영화사 출범기 일본의 영향

 

좌파영화인으로서 ‘ 경향파’ 의 대표적 활동가이기도 했던 임화(林和)의 기록(2002)에 의하면 한국의 영화사는 광무 7년(서기 1903년) 동경의 흥행업자 길택상회(吉澤商會)가 한반도에 수입해서 공개한 영미연초회사의 선전필름이 활동사진 형태로 한국 내에서 상영된 것을 효시로 본다. 즉 그 내용물은 미국계 담배회사의 선전필름이었으며, 그것을 들여와 상영한 주체는 동경의 상업 자본이었으므로 한국인들은 단순 소비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영화 이전 ‘ 활동사진’ 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역시 일본 상인들이 들어와 상영한 것으로서 내용물은 미국 유니버설 회사와 프랑스 파테 회사의 단편 및 장편, 일본의 신파물을 담은 활동사진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 중 일부는 본래 일본인 관객을 위해 만들어진 조선 풍물을 담은 활동사진도 있었는데, 이것이 다시 한국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활동사진 시대는 일본에서도 활동사진 제작이 활발하기 이전의 시기여서, 미국과 프랑스 등 영화산업을 처음 일으킨 구미의 작품들이 일본인들의 손을 통해 수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 활동사진 시대’ 에는 한국에서 제작된 것이 전무하며 따라서 제작과 유통에 한국인이 참여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고 판단된다.

이후 한국에서 짤막한 필름들이 제작되기 시작하는 것은 1918년경 신파 연극이 유행의 한 고비를 넘을 무렵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니까 신극좌, 혁신단, 문예단 등의 극단이 동경에서 일본인 활영기사를 데려다가 일본에서 ‘ 신파연쇄극’ 이라 불리던 연극을 모방한 내용을 한국에서 공연할 때 연극의 장면과 장면 사이에 스크린을 내리고 비춤으로써 극의 역동성을 보조하는 필름들이 나타났던 것이다(김종욱 2002: 73). 여기서 한 가지 더 지적해 둘 것은 당시 한국에서 인기를 끌던 ‘ 신파극’ 이라고 하는 것들의 상당수가 -- 가장 대표적이며 인기를 끌기도 했던 [장한몽]을 비롯하여 -- 유럽 등에서 만들어진 문예물 원작을 일본에서 각색, 번안하여 일본 내에서 신파극으로 올렸던 작품들을 그 원전으로 삼고 있었던 사실이다. 한국의 신파극들은 이렇게 유럽 문예물 원작에서 일본의 맥락에 맞게 각색된 작품이 다시 한국에 들어오면서 인물의 이름과 배경설정을 한국식으로 번안, 혹은 각색하여 올리는 것들이 많았다.

좀더 완전히 흥행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작품은 당시 황금관과 조선극장 두 개의 극장을 경영하던 早川金太郞(또는 早川宅舟)이라는 일본인이 1922년에 동아문화협회라는 회사를 만들어 거기서 제작한 것으로, [춘향전]이라는 타이틀을 올렸다. 이 [춘향전]은 하야가와(早川)가 감독하고 촬영은 [의리적 구투]츨 촬영했던 일본인 히로가와가 맡았다. 다만 주연배우는 한국인이어서 당시 조선극장의 변사였던 김조성과 김선초가 주연으로 출연했다(김화 2001:24).

한국 최초의 춘향전 영화는 이렇게 일본인의 제작, 감독, 촬영으로 만들어져서 일본인 소유의 극장에서 일본인 기사의 손으로 상영되었다. 이 작품은 당시의 기준으로 보아 흥행에 성공했고, 일본에 수출되어 상영됨으로써 한국에서 제작된 영화의 일본 수출에서도 첫 기록을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당시의 맥락에 있어서는 이것이 한국영화의 일본 수출이라고 인식되지 않았을 것이며 사실상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도 결코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영화사의 시작은 당시 ‘ 일본영화사’ 의 일부에서 진행되던 ‘ 포함관계’ 속의 ‘ 부분의 역사’ 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춘향전]의 흥행 성공에 자극받은 단성사의 사주 박승필은 단성사의 영사기사 이필우에게 촬영을 맡겨 한국인이 촬영을 맡은 최초의 작품인 [장화홍련전]을 제작, 상영하였다. 이 작품은 최초로 한국인 제작자와 촬영기사에 의해 만들어진 극영화로 영화사내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작품 이후로 박승필은 영화제작에서 손을 떼게 된다. 그리고 이어 설립되는 최초의 대형 영화사는 1924년 조선에 건너와 있던 일본인들이 공동출자하여 부산에서 설립되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제시대에 한국에서 제작되는 초기 영화들이 시초부터 일본시장을 염두에 두고 제작에 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아직 규모가 크지 못한 한국 상영시장은 거기서의 흥행을 바탕으로 보다 규모가 큰 일본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한 발판이라는 의미를 당시부터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2000년대에 들어 일본에서 인기를 끄는 일부 한류 문화상품들이 한국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일본시장에 들어가 흥행수입을 올리고자 하는 기획 성격을 갖는 것과 비교해보면 보다 흥미로운 사실로 인식될 것이다. 1926년이 되어 한국의 영화사는 나중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흥행작품을 낳는다. 요도라는 일본인이 설립한 영화회사에서 제작을 맡은 나운규 각본, 감독, 주연의 [아리랑]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나운규의 시나리오를 본 일본인 사장이 시나리오의 작품적 완결성을 인정하여 주저없이 나운규에게 감독과 주연을 모두 맡겼다고 하는데(김화 2001:42-43), 작품 내에서 은연중에 일본 제국주의에 시달림을 당하는 조선 민족의 식민 비애를 반영시켰다는 해석이 이루어져 조선 총독부의 검열에서 여러 차례 말썽을 빚었다. 나운규의 [아리랑]과 함께 무성영화기 한국 영화의 2대 걸작으로 거론되기도 하는 [임자없는 나룻배]는 1932년 이규환의 연출로 탄생되었다. 이규환은 일본대학 예술과를 나온 친구의 자극과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영화예술연구소에 입소한다. 6개월간의 기초공부를 마치고 일본의 쇼치쿠 촬영소에 들어가려 했으나 좌절하고 서울에 왔다가 다시 상하이로 간다. 상하이에서 시나리오를 쓰며 기회를 기다리던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영화의 거장으로 인정받던 도요다시로(豊田四郞), 스스키 주키치 등에게 사사하면서 본격적 영화수업을 받는다. 이후 1935년은 무성영화 시대가 막을 내리고 발성영화가 발표되어 인기를 끌게 되었는데, 발성영화가 녹음장비와 기술을 요구했던 만큼 상대적으로 기술력과 자본력이 부족했던 한국인들의 영화사는 불리한 상황에 놓인다. 따라서 더 많은 영화인들이 일본 영화사에서 한국인 스탭으로 일하면서 한국에서의 영화 제작활동을 하게 되며, 이와 함께 일본에서 직수입된 영화의 상영이 한국 내 영화소비시장에서 상대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얻게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2. 일제시대 대중가요 형성기의 해외문화 유입

 

1) 유성기 음악과 일본, 미국

한국에서 대중가요가 대중적 문화상품의 형태로 소비된 것 또한 영화와 마찬가지로 일제 식민치하의 근대화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중가요 또한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 등지의 유성기와 음반이 직접, 혹은 일본의 영향을 거쳐 소개되고 소비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한국인들이 유성기를 최초로 접한 것은 1880년대로 알려지고 있으며 (한국대중문화예술연구원 2003:37) 일반인들에게 축음기가 인식된 것은 1925년 무렵으로서 당시에는 일본에서 만들어 낸 레코드가 주로 유통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의 목소리가 음반에 담긴 최초의 일은 1895년 6월 미국 시카고의 만국 박람회에 알렌의 주선으로 박춘재를 비롯한 한국 국악인 10명이 도미하여 빅타(Victor)회사에서 창과 민요 등을 녹음한 일이다. 박춘재는 이후에도 다시 4명의 기생을 데리고 미국 빅타 회사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가서 경기도 잡가들을 여섯 곡 취입하였다. 그러니까 미국 음반제작회사의 일본 지사에서 한국인들이 당시의 대중적 노래라고 할 수 있는 민요들을 취입한 것이다. 이후 1907년 3월 경기명창들이 일본에 있는 미국 콜럼비아사 스튜디오에서 녹음 후 음반을 제작하는데 참여하여 그것이 상업음반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이 음반들은 다시 국내로 수입, 판매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유성기의 국내 보급이 아직 미약해서 그 경제적 의미는 아직 미미한 단계였다고 판단된다. 1910년 한일합방 후 한국경제와 문화가 사실상 일본의 그것에 편입되면서 한국의 명창들이 일본에 가서 취입하고, 그 음반이 다시 한국시장에 반입, 판매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이 무렵부터는 미국 유성기, 축음기 회사 뿐 아니라 일본축음기 상회 등의 일본 하드웨어 제작사들이 역시 음반을 녹음해서 제작하고 한국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녹음되는 곡도 전통민요에서 서서히 벗어나 창가, 찬송가, 일본의 유행가와 양악 등을 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빅타, 콜럼비아가 한국에도 지점을 설치하고자 노력하면서, 1930년부터 1945년까지의 약 15년 동안 한국에는 콜럼비아, 빅타, 포리돌, 제축(帝蓄). 킹구축음기 회사 등이 일본 본사 혹은 일본 자회사의 한국지점으로 활동했다. 해방 전 순수하게 한국에서만 활동한 음반사는 돔보와 뉴코리아레코드사 등 두 개가 발견된다.

 

2) 서양음악의 도입과 일본식 창가

개항기에서 일제시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들어온 서양음악은 1880년대 중국을 거쳐 예수교의 찬미가가 들어온 것부터 시작된다. 보다 본격적인 서양음악의 국내 유입은 1893년 미국 선교사들에 의한 것으로 특히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이 서양음악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1905년이 지나면서 미국의 교회들에서 한국 교회를 위한 찬미가를 발간, 보급시키기 시작했다. 보다 대중적인 유행가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는 ‘ 창가’ 의 도입이다. 먼저 중국과 일본에서 서양의 'song'이나 ‘ leid'의 뜻을 한문으로 설명하면서 창가란 말을 썼는데, 한국 개화기에는 찬송가와 유사한 서양노래로서의 창가가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로 한국의 대중가요에서는 미국 찬송가 식의 영향이 들어간 곡과 더불어 서양음악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곡, 그리고 서양음악이 일차로 일본화한 뒤 다시 들어오는 일본풍의 곡들이 한국말로 번안, 혹은 번역되어 소비는 두 줄기 물결로 대별된다. 이 두 가지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대중가요의 주된 흐름은 일본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습득하여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게 된다. 즉, 음반, 신파극, 그리고 대중가요 등 모든 것이 일면 서양의 것을 원전으로 삼으면서도 그것이 다시 일본에서 해석, 변형되어 들어오거나 아니면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 음악적으로는 변화를 거치지 않으면서 가사만 번안되어 들어와 소비되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바, 엄밀히 말한다고 할 때 한국의 초기 대중가요는 일본의 대중가요의 한 부분집합을 이루고 있는 형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한국 대중음악의 태생적 식민지성과 종속성은 이후 20세기 내내 가요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정체성의 위기의식과 ‘ 왜색 논쟁’ 을 낳는 원인이 되며, 20세기가 다 끝날 무렵에 이르기까지 일본 대중음악을 공식적으로 수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유로 자리를 잡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일제시대 내내 서양음악의 영향 또한 끊이지 않고 한국에 유입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근대화가 궁극적으로 곧 서양화라고 하는 당시의 사고가 작용한 때문이기도 하며, 대중문화계 전체에서 그러한 영향이 지속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을 비롯한 서양음악 요소들이 한국 대중가요 및 대중음악에 유입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주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어디까지나 일본풍의 가요였다. 즉 일본 가요곡 중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끈 곡들은 의례껏 일본계나 한국의 레코드사들에 의해 한국말로 번안되어 불리워지고 레코드 취입이 이루어졌다. 한국인의 작곡 작품도 이미 일본노래의 영향을 받았었으며, 그것이 다시 취입 전 일본인의 손으로 편곡되어 취입되었으므로 전주나 간주에서 오는 분위기가 일본 가요와 별 차이가 없는 엔카조의 노래가 된 것이다.

 

 

III. 해방 후 한국 대중문화의 전개

 

1. 영화산업의 경향: 미국, 일본, 중국의 영향

미국영화의 수입은 사실상 해방 직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 초기부터 있었다. 다른 대중문화 영역도 그렇지만 일본영화의 영향이라는 것 자체가 미국영화를 일본에서 소비하거나 그것을 바탕으로 하면서 영화를 만든 것이 다시 일본 식민치하에 있던 한국으로 들어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한국의 극장들에서 상영되던 영화들은 한국영화, 일본영화, 미국 영화 셋으로 대별될 수 있는데, 형식과 회사구성형식 등에 있어 한국영화와 일본영화는 실질적으로 구별하기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신 미국영화는 그 문화적 이질성과 흥행의 매력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1) 미군정의 시작과 미국영화의 장악

해방을 맞이하면서 일제말기 오랫동안 숨죽여 오던 한국의 영화계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1945년 직후의 한국 영화시장에서 가장 주목할 사건은 일본영화의 직접적인 수입이 사실상 중단되는 대신 헐리우드영화 중심의 미국영화와 봇물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로 한국 영화계는 오랫동안 미국영화의 절대적인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해방 직후 영화시장에서 보이는 또 한 가지 특징은 미국영화만이 아니라 소련영화, 프랑스 영화, 그리고 중국 영화 등 비교적 다양한 나라에서 제작된 영화들이 수입되기 시작하였다는 점과, 중국과의 영화교류가 눈에 뜨인다는 점이다. 한 가지를 더 이야기 한다면 일본영화의 수입이 원칙적으로는 금기시되는 분위기 속에서, 아직 정부가 성립되지 않은 혼란의 공간을 이용해 일제시대 제작된 조선총독부의 국책영화가 일부 제목만 바뀌어 상영된다든지(서울신문 1946.3.4.), 일본에서 상영되었던 미국영화가 일본말 자막을 그대로 달고 있는 상태에서 한국에 수입되어 상영되는 현상들(조선일보 1946.4.1.)이다. 해방직후의 시기 한국 영화소비시장의 경향 중 눈에 뜨이는 또 한 가지는 미국영화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다양한 나라로부터 영화들이 수입되거나 부분적인 교류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1945년 11월에 소련영화가 6편 수입된 것이다. 이후 1947년 7월에는 중국촬영공사에서 제작된 영화 [충의지가(忠義之家)]가 수입됨으로서 해방 후 처음으로 중국영화가 수입되고(자유신문 1947.7.12.) 이후로도 1948년 초까지 8편 가량의 중국영화가 한국에 수입, 상영되고 있다. 또 1948년 11월에는 프랑스 영화의 한국 배급을 대행하는 회사인 한영사가 설립되어 프랑스 극동 지배인의 경영아래 활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대신 같은 기간에 해외로 수출된 한국영화도 있었는데, 해방의 감격을 표현한 한국영화 [자유만세] 중국어판이 “ 조중(朝中)친선과 문화교류를 위해” 중국에 수출되어 상해를 비롯 중국 각지에서 6개월간 상영되는 계약이 성립되었다(대동일보 1947.6.8.). 그러나 중국과의 영화 교류는 1949년 중국대륙이 공산화되면서 사실상 중단되기에 이르고, 이후 1950년대 말 쇼 브러더즈의 설립을 기점으로 홍콩의 영화산업이 본격적으로 부상하기까지 사실상 별다른 교류나 수입이 없는 시기를 맞는다.

 

2) 외국영화 수입의 통제를 통한 한국영화 보호강구

 

해방직후 미국영화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상황에서 아무런 통제없이 활동하던 미국 영화배급 대행사가 한국의 극장들에 제시한 불공정 조건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일본어 자막의 외국영화에 대한 금지가 필요하다는 여론도 지속적으로 있었다. 이에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공연 및 영화관련 법률들이 제정되고 통제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데, 그 가장 큰 골격은 한국영화를 보호하고 진흥시키기 위한 보호책이었다. 이후 미국영화의 수입은 표현상의 내용에 있어 윤리성을 중심으로 하는 검증이 적용되었고, 일본영화는 원칙적으로 수입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1950년에 발발한 6.25 사변이후 고착화된 분단 상황은 중국영화의 수입이나 중국과의 영화합작에 있어서 공산화된 중국과는 애초부터 일체의 교류를 차단하는 한편, 영국령 하에 있던 홍콩과의 교류, 수입에 집중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된다. 영화를 비롯한 문화산업 상품 전반에 있어서 반일, 반공 경향은 매우 미세한 곳에까지 작용했던 바, 예를 들면 1957년 홍콩에서 제작하여 국내에 수입, 상영허가가 내려졌던 ‘ 중국영화’ [애루]에는 주연급 배우 중 세 사람이 공산 중국에 우호적인 활동을 벌인 “ 중공계 인물이라는 데 말썽이” 생겨 상영이 금지되기에 이른다(조선일보 1957.11.20.) 한편 1957년에는 한국영화 중 홍콩과 동남아에 처음으로 영화 [시집가는 날]이 영어와 중국어 자막을 달고 수출되었다. 이 영화는 1958년 동경에서 개최되는 아세아영화제에 [백치 아다다]와 함께 한국 대표작품으로 선정, 출품되어 간접적이나 일본과의 문화교류가 조금씩 가능성을 타진하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이후 1960년대 한국 영화는 이른바 ‘ 중흥기’ 에 접어들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영화의 제작과 상영편수가 늘어나고, 아직 텔레비전 수상기가 일반에게 널리 보급되기 전이에서 한정된 오락수단만 가지고 있던 새로운 대중사회의 주역인 소비자들은 극장에서 손쉬운 오락을 찾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지한 고민이 결여된 영화들의 남발로 인해 한국영화에 식상한 관객들도 늘어났고, 이들은 규모와 볼거리에서 차원이 다른 외국영화,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영화로만 몰려가기 시작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해방 직후부터 한국영화의 존립에 위협을 느끼며 국산영화 보호책을 부르짖던 문화계인사들과, 역시 자국 대중문화의 일정한 영역을 보호할 필요를 느낀 정부는 극단적일 만큼 강력한 영화통제 정책을 시행하면서 그 안에 한국영화 보호의 장치로 수입쿼터 제한 조항을 포함시키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5.16 혁명 직후 들어선 군사정권에 의해 1962년 공포된 영화법이다. 1962년 영화법 중 외국영화의 한국수입에 관련된 조항은 외국영화 수입권을 원칙적으로 국산영화 제작사에만 부여한다는 것이며, 전체적인 국산영화 제작 편수에 비례해서 수입쿼터를 조절한다는 것이었다. 전체 국산영화 제작편수 대 외국영화 수입 쿼터수는 3대 1의 비율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르면 1980년대 초 기준으로 볼 때 대체로 년 25편 정도의 외국영화가 수입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25편에 대한 외국영화 수입권을 두고 각 국내영화 제작사들이 경쟁을 하는 구도가 진행된 것이다. 결국 1962년의 영화법을 통해 한국영화 제작 편수는 일정량을 확보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중 극장에서 실제 상영되는 비율은 70퍼센트 남짓이었고, 상영일수도 형식적인 것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몇 몇 중요한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미국영화 중심의 흥행시장 성격이 이 기간 내내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러는 가운데 홍콩과 대만의 무협영화와 권격 영화들이 한국 내에서 비교적 장기간에 걸친 흥행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또 한 가지 거론할 것은 1970년대 초 텔레비전 시대가 개막되었다는 점이다.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극장 영화에서 미국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늘어났다. 텔레비전의 작은 화면에서 충족될 수 없는 큰 화면의 만족감에 걸맞는 큰 규모 예산의 영화들이 헐리우드에서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새로운 무협과 권격 영화 바람을 일으키게 된 홍콩영화계의 쇼 브러더즈 및 골든 하베스트 영화사 작품들이 뛰어난 오락성을 무기로 한국 극장의 영화소비 시장에 대규모로 쏟아져 나온 것도 이 시기이다.

 

3) 홍콩/ 대만 영화의 영향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1950년의 6.25이후 한반도의 분단체제가 고착화되면서 한국(남한)에서는 이제 공산화된 중국 본토와의 교류가 실질적으로 중단되는 국경폐쇄기에 들어간다. 중국본토로부터 영화와 가요, 기타 문화상품이 한국으로 흘러들어오는 통로가 모두 차단되었으며, 이는 198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되는 시기 전까지 계속된다. 대신 이후 한국에 유입되는 중국 대중문화라는 것은 사실상 홍콩과 대만의 대중문화 상품이 된다. 그중에서도 한국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강한 영향력을 미쳐온 것은 역시 홍콩의 영화산업 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에 이르는 10여년은 홍콩 무협영화의 황금기로 불린다. 이 시기 홍콩영화의 영향은 한국의 영화소비시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갖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초기의 전통 무협지 방식에 따른 무협극에서 이후 이소룡과 성룡 등으로 대표되는 보다 현대적인 내용과 구성을 지닌 권법영화로 발전한다. 그러나 홍콩영화의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장르를 바꾸어가며 계속 히트하여 세계적인 차원에서 그 시장을 넓혀갔다. 한국의 영화시장 또한 여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1958년에 설립된 홍콩의 영화사 쇼 브러더즈와 1971년에 설립된 영화사 골든 하베스트가 한국시장에 풀어놓기 시작한 무협영화들은 이미 이전부터 한국 내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던 무협소설의 매력을 바탕으로 삼고 있었다. 이후 1970년대 초는 고전적 무협영화와 쿵푸 중심의 권격영화가 봇물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한국에서도 전문 무술인을 기용한 본격 권격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당연히 홍콩 권격 영화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홍콩 무협 및 권격 영화에 한국인 배우들이 진출하여 연기한 경우도 여럿 존재했다(오현리, 2001 :21). 홍콩영화들은 이렇게 한국 인력을 그 안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형식에 있어서 곧바로 한국영화에 영향을 주기도 하면서 한국 영화소비시장 전반에서도 오랫동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왔으며, 그 오락성을 인정받아 비교적 안정된 흥행을 누려왔다. 1962년 영화법이 적용되면서 외국영화 수입쿼터의 제한을 피하기 위해 한국과 형식적인 ‘ 합작’ 을 구성할 파트너로서도 가장 손쉬운 대상으로 여겨졌었고, 사실상의 흥행에서도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그 결과 영화법이 개정되기 직전인 1985년, 1년에 25편의 외국영화만이 수입 가능했던 때에도 미국영화 21편을 제외한 나머지 4편이 프랑스나 독일영화가 아니라 홍콩영화들의 차지로 돌아갔다. 또한 영화법 개정을 통해 원칙적인 외국영화 수입개방이 이루어진 다음인 1990년 한국에서 상영된 253편의 외국영화 중 홍콩영화는 무려 98편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 해 137편이 상영된 미국영화와 함께 한국 국내의 외국영화 시장을 거의 양분하다시피 하는 막강한 위치를 점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다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홍콩영화의 인력과 기술은 대거 헐리우드로 이동해갔다. 홍콩영화의 영향력 자체가 급격히 약화되면서 결과적으로 한국영화소비 시장 내에서 홍콩영화의 존재도 그 명맥을 잇기 어렵게 되었다. 성룡과 주윤발, 이연걸과 서극은 이제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 한국의 극장을 장식하게 되었다.

 

2.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TV 드라마, 영화 - 일본대중문화의 실질적 유입

 

1945년 해방 이후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부는 일본의 대중문화산업 상품에 대해서 지속적인 수입 불허 원칙을 고수해왔다. 199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일본 대중문화 산업 상품에 대한 단계적인 수입개방을 준비, 적용하게 된다. 2005년 지금까지도 아직 일본의 대중문화산업 상품들은 한국 영토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수입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식민지 형태를 통한 근대화로 인해 현대 한국의 대중문화 탄생 자체가 일본문화와 동질적인 정서구조 및 모방의 형태로 형성되었다는 데서 오는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감이 전반적으로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은 보다 복잡한 작용들이 각 시대에 존재해온 것도 사실이다. 유신헌법 시대의 특수한 정치적 맥락에서 별도의 해석이 필요한 것이지만 한국에서 만들어진 대중가요 상품에 대해서까지도 거기에 ‘ 일본적 색채’ 가 있느냐 없느냐는 ‘ 왜색시비’ 가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일부 한국 대중가요에 대해서까지도 ‘ 왜색’ 이라는 이유로 정부에서 그 유통과 공개적 소비를 금지시키는 역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1945년 이후 1990년대 중반의 공개적 일본 대중문화상품에 대한 단계적 개방 시작 사이에 50여년동안 단절이 있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중문화는 현실에 있어서는 항상 한국 대중문화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본 환경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1980년대부터는 멀티미디어의 발전을 통해 일본 대중문화산업 상품들이 별다른 장애 없이 한국의 문화소비 시장 안에 깊숙이 들어와 일상적으로 소비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출판물의 형태를 띤 만화, 청소년 전자 오락실에서 청소년들의 놀이와 감수성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환경으로 존재해 온 PC게임, 그리고 텔레비전 등에서 역시 어린이들의 정서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만화영화들이었다. 한편, 직접적으로 완성된 작품이 일본에서 수입된 것은 결코 아니지만 한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고 편성하는데 있어서 오래 전부터 일본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료 제공처 역할을 해왔음 또한 관련업계에 종사하는 이들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오래 전부터, 적어도 1980년대 초부터 한국의 TV 쇼프로그램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 그리고 드라마들 중 상당수는 일본TV의 형식과 스토리 라인을 표절했거나 번안, 재편성 짜집기 하는 방식을 통해 창작되고 한국의 안방에서 소비되어왔다고 할 수 있다. 출판만화의 경우는 출판물에 대한 수입에는 제한이 없었으므로 일찍부터 일본의 만화는 한국의 만화시장에서 유통될 수 있었다. 특히 일본만화의 그림은 그대로 둔 채 지문만을 한국어로 바꾸어 번역 혹은 번안한 작품들이 일찌감치 한국의 만화 소비층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게됨에 따라 일본만화의 스토리 구성과 만화의 정서들은 곧바로 한국 만화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한국의 TV에서 방영되었던 어린이 만화영화 중 상당수 역시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 번역, 번안되어 방영되었는데, 당시 한국의 소비자들은 그것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만화인 것을 잘 모른채 소비하기도 했다. 어른들은 그것이 일본에서 제작된 작품들이라는 것을 알았을지 모르나 [우주소년 아톰]과 [사파이어 왕자], [캔디 캔디], [마징가 제트]를 매일 보며 자라던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어린시절 웃음과 울음을 함께하며 지내온 그 프로그램들이 ‘ 일본’ 의 것인지 ‘ 한국’ 의 것인지를 알지 못했으며, 그런 사실이 중요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전자장비의 발달과 함께 1980년대부터 한국 청소년들의 놀이문화 중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 전자오락실’ 의 프로그램 대부분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데서 더욱 강화된다. 오락에 사용되는 그림과 캐릭터만으로는 그 문화적 국적성이 곧바로 인식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일본산 전자오락 프로그램들은 일찍이 한국의 미래 문화소비 세대의 감수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아이템들을 제공하며 그들과 함께 성장해 왔다. 그럼에 따라 이미 1980년대부터 일반에게 꽤 알려지기 시작했던 일본 대중문화의 상품들은 1990년대에 들어 국가의 대중문화시장 개방과는 무관하게 한국 내에서 점점 널리 유통, 소비되기 시작했다. 막상 일본영화가 한국 시장에서 단계적으로 개방되기 시작한 1998년의 경우, 세계적인 성가를 얻고 있었던 일본영화 작품들이 국내에서 개봉되었을 때 그 관객 수가 예상했던 수치를 훨씬 미치지 못했던 것은 그 작품들이 실제로 인기가 없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즉 이미 그 작품에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들은 공식적 시장개방 이전에 다른 경로와 매체를 통해 그 작품들을 감상해 버렸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한국의 대중문화 상품들 상당수가 그동안 이미 일본대중문화 상품의 요소들을 그 안에 담은 채 일본 대중 문화적 성격들을 한국 소비자들에게 간접 혹은 직접적으로 소비시켜왔으며, 이제 한국의 대중문화산업 상품들은 일본 대중 문화적 성격의 흡수에 더하여 미국 대중문화상품의 성격을 거의 자기 것으로 체화하고 흡수함으로써 그러한 복합문화적 성격을 토대로 한 자기 자신의 대중문화 성격을 만들어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IV. 한국의 아시아 대중문화 유입경향과 혼성성의 발전

 

1. 대중문화 시장의 개방과 이후의 추세

 

지난 10여년간 한국의 아시아 대중문화 유입 현황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98년 일본의 대중문화상품에 대한 단계적 시장개방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대중문화 상품에 대해서는 홍콩 및 대만의 문화상품의 경우 해방이후로도 계속 단절이 없이 문화상품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어왔기 때문에 실질적인 단절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홍콩의 영화산업 상품과 무협 및 역사 드라마 등은 1970년대 이후 한국의 대중문화 소비시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해왔고, 작품과 스타에 따라서는 열광적인 국내 팬들을 보유해오기도 했다. 중국 본토의 경우는 1949년 이후 중국의 공산화이래 198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있기 전까지는 문화상품 수입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 시기 중국 본토는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 대중문화 산업을 발달시킬 여건을 지니지 못하고 있기도 했다. 반면 일본 대중문화 상품은 1945년의 해방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공식적인 국내 수입이 금지되어왔다. 한국의 근대화시기에 식민종주국으로 자리 잡으면서 한국의 현대 대중문화 성립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결정지어온 일본이기에 한국 정부는 해방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 대중문화산업에 대해 경계를 지속해왔다. 따라서 1998년의 일본 대중문화 산업에 대한 수입개방이 있기 전까지는 공식적인 차원에서 일본 대중문화 산업의 상품을 수입할 수 없었고, 일본 대중문화의 한국 내 영향을 최소한으로 차단하고자 하는 정책적 기조가 이어져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중문화 상품들은 여러 가지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특히 1980년대 이후 한국에서 활발히 소비되었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근대화 초기 한국 대중가요의 형식과 내용을 직접 만들어내고 유통시켰던 일본의 대중음악산업은 법률과 정책에 관계없이 한국에서 만들어지고 판매되던 대중음악 안에 항시 존재해온 영향력 있는 요소이기도 했다. 비공식적인 차원에서 일본의 음반과 음악들은 불법복제를 거치거나 아니면 한국 대중음악에서 그 원전 표절의 시비를 끊이지 않게 발생시키며 보이지 않는 영향력으로 존재해 온 것이다. 이 점은 드라마를 비롯한 영상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 기간동안 한국의 대중문화 상품들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그것이 일본의 것을 베꼈는지 여부, 일본의 문화적 색채를 너무 많이 지니고 있지는 않느냐는 비판 등이 끊이지 않아, 일본 대중문화 상품에 대한 경계는 해방 이후 항시 존재해온 중요한 담론 및 정책적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는 가운데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방침이 발표되고 이후 한국 대중문화 시장에서는 일본 대중문화 상품에 대한 단계적 수입개방이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해방 후 미국 및 서양의 대중문화 상품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스스로의 내부에 흡수하며 소비해온 한국의 대중문화 산업계가 다시 중국 및 일본의 문화적 요소들을 그 안에 포함시킨 혼성적 성격을 지닌 문화상품들을 내놓게 되면서 최근 동아시아 일대에서 몇 가지 문화상품들을 인기리에 판매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일찍부터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온 홍콩의 영화산업 상품이나 일본의 영화,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게임 등과는 차원이 다르게, 이제 몇 작품들이 동아시아 일부에서 인기를 끌고 수출되기 시작하는 초기적 단계라고 판단되는 현재, ‘ 한류’ 상품에 대한 극단적인 찬양과 필요이상의 평가절하들이 겹쳐지는 국내담론을 낳고 있다. 이에 이러한 한류현상에 대한 분석과 담론 평가 이전에 현 단계 한국에서 나타나는 동아시아 대중문화 상품의 유입형태와 현황을 정리해보는 것이 필요하며, 이에 바탕을 둔 실질적인 평가 및 전망이 있어야 할 것이다.

 

2. 영화와 드라마 상품의 유입

 

2001년경부터 2004년 사이 한국 영화시장에서는 외국영화가 수입되는 편수에 있어 몇 년간 하락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특히 2003년과 2004년 국내 극장에서 몇 편의 한국영화가 흥행에 큰 성공을 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2005년부터는 그러한 추세의 지속 여부가 불분명하다. 또한 2001년 이래 한국영화의 흥행성공 내용을 보면 그것은 사실상 몇 작품에 치중된 것으로서, 한국영화 전반의 제작과 상영편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거나 다양해진 것은 아니라는 점도 유의할 사실이다. 2002년을 기준으로 볼 때 국내 극장용으로 수입된 영화의 원산지를 보면 미국 영화가 170편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그 다음으로는 일본(18편), 프랑스(16편), 독일(11편), 홍콩(10편)의 순서를 보인다. 중국의 경우 대중문화 산업이 아직 미약한 중국 본토의 작품들은 비교적 적은 편이며, 여전히 홍콩의 오락영화가 대종을 이룬다. 일본의 경우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작품 중심으로 수입이 이루어지고 있었기도 하지만, 일본 영화와 드라마가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끈 것으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과, 극장보다도 비디오 대여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셸 위 댄스] 및 [철도원], 그리고 몇 편의 이와이 슌지 감독 작품이 눈에 뜨인다.

 

1) 중국과 홍콩 영화의 유입 추세

 

1996년 홍콩의 중국본토 반납 이후 홍콩영화는 그 영향력이 급격히 상실되었다. 그에 따라 적어도 20여년간 한국 영화소비 시장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온 홍콩영화의 수입과 극장에서의 소비가 급격히 감소했다. 그렇지만 극장에서의 소비를 대신하는 미디어 매체로서의 비디오 플레이어가 널리 보급되면서 홍콩영화는 비디오 대여점에서 지속적으로 소비되고 있는 확실한 한 영역을 점하고 있다. 2005년 최근에는 1980년대 말 홍콩 느와르의 전통을 잇는 [무간도] 시리즈가 한국의 홍콩 느와르 매니아 층에게 크게 환영을 받기도 했다. 홍콩의 무협영화와 드라마들의 경우는 현재 한국의 케이블 TV 채널 중 아예 중국 무협극만을 전문으로 하는 방송국이 여럿 존재한다. 공중파 텔레비전에서도 1990년대 중반에 큰 인기를 끌었던 [판관 포청천]을 비롯 여러 작품들이 많은 한국 소비자들에 의해 소비되었으며, 이후에도 인기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여러 편의 중국 역사극과 무협극이 공중파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어 왔다. 이는 한국 내에서 증가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관심과 중국 역사극이 갖는 오락성, 그리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프로그램의 가격 경쟁력이 조합되어 이루어지는 현상이며, 앞으로도 다양한 형태로 진화되어 갈 가능성이 있다.

 

2) 일본영화의 한국 내 소비

 

중국과 일본에서 한국으로 수입되는 영화와 드라마들은 그 쟝르에 따라 매우 뚜렷이 구분되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면 2000년 한 해 동안 중국으로부터는 6만7천달러 규모의 드라마 수입이 있었지만, 드라마 수입이 아직 허용되지 않았던 일본으로부터는 드라마 수입실적이 전무하다. 대신 만화(애니메이션)에 있어서는 중국과 홍콩으로부터 수입된 것이 한 건도 없지만 일본으로부터는 1백 8십만달러 상당의 애니메이션 작품이 수입되어 국내에서 방영되었다. 어찌 보면 한국 내 일본영화에 대한 소비는 아직 미미한 수준인 것이 사실이다. 겨울연가 열풍이 일본 대중문화시장에서 중요한 화제가 되었던 2004년 한국 내 일본 영화의 극장 흥행은 서울 관객 기준, 1편당 평균 3만 2천명이었고, 극장 점유율은 2.1%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영화의 극장 상영은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단계적 개방조치 이후 이제 시작되고 있는 시기일 뿐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새로이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05년에는 2월말부터 4월초까지 한국 극장가에서 상대적으로 손님이 들지 않는 비수기에 다섯 편의 일본 영화가 개봉되었다. 이 영화들은 일본 사회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 작품부터 순애보를 담은 멜로물, 젊은이들의 생활에 대한 묘사를 담은 청춘물까지 다양하다. 일본영화가 과거 1960년대에 구가했던 세계적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과거의 일본영화들은 여전히 현재 한국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감독들의 중요한 교과서적 역할을 했고 세계 영화계에 기여한 바도 컸다. 그리고 상대적 침체기에 처해있다고 이야기되는 현재도 일본영화들은 한국 영화소비 시장으로의 진출을 준비하는 시기에 있을 뿐이다. 특히 애니메이션 분야에 있어서는 1960년대 이래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당시 한국 어린이들의 추억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처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세계적 영향력 아래 있는 작품들이 2000년대 한국 어린이들의 어린시절을 형성하는 필수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비디오를 통해 [이웃집의 토토로]를 보지 않은 어린이가 없을 정도이다. 또한 [포켓 몬스터]와 [유희왕]은 2000년대 한국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의 일상 전역에 깊숙이 자리잡으며 그들의 어린시절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줄거리와 캐릭터를 제공하고 있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어린이들 뿐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수많은 관객층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의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한국에서 자리잡아가는 지평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한국의 문화연구 여론에서 그 비중과 영향력을 애써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학문적 담론차원에서도 침묵이 지속되고 있는 편이다.

 

3) 일본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수입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한 수입개방이 있기 오래 전부터 한국에서는 일본 텔레비전 드라마와 기타 프로그램 수입이 금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방송 프로그램은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위성 텔레비전을 통해 한국의 안방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한국 텔레비전의 드라마를 포함한 각종 프로그램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일본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여 기획되었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아, ‘ 표절시비’ 가 항시 있었다. 이러한 표절시비는 최근에 들어 지적재산권에 대한 의식과 국제적 법률조치가 강화되고, 다른 한편에서 일본 대중문화 상품에 대한 개방이 이루어지면서 그 국면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즉, 시장 개방조치에 따라 한국 텔레비전에서는 일본 텔레비전 프로그램 무단 복제는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한국의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일일연속극이나 일부 드라마 제작 능력 외에는 일반 프로그램들을 창의적으로 기획하는데 여전히 한계를 느끼고 있었고, 결국 이전에는 표절과 베끼기를 해오던 것을 이제 ‘ 포맷 수입’ 이라는 이름으로 프로그램 형식을 수입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2005년 현재도 한국 텔레비전의 오락프로그램들 중 적지 않은 수는 여전히 일본 프로그램의 형식을 수입해서 모방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오락프로그램 포맷 수입이 수출에 비해 절대적으로 많은 것으로 나타남에 따라, 시장개방 이전부터 한국 오락 프로그램들이 일본의 그것을 표절하거나 모방해왔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다고 보아야 한다. 3. 음반과 대중가요: 일본 대중음악 상품의 진입 증가 한국 음반 산업은 대부분이 국내시장을 겨냥한 것으로 이루어져왔다. 따라서 음반의 수출입은 국내 음반시장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적어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음반이 국내로 수입되는 경우는 해외에서 제작된 음반이 국내 라이선스 회사에서 제작, 발매되는 형식을 띠거나 직배사가 직수입을 통해 유통시키는 형태를 띤다. 그런데 국내 라이선스 회사에서 제작, 발매되는 형식을 띠게 되는 경우, 그 콘텐츠는 해외의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수치를 매기는 데 있어 해외음반의 수입으로 잡히기 보다는 국내 제작된 음반의 국내유통으로 포착된다. 따라서 이러한 해외 음악콘텐츠의 유통을 수치상으로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여기에 더하여 인터넷의 발달로 해외 음악의 국내 수입 및 소비경로가 다양해짐에 따라 국가적 차원의 통제나 관리가 더욱 어려워졌다. 일본 대중가요 상품에 대한 수입규제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던 최근까지 일본의 대중가요가 음반을 통해 국내에서 소비된 사례는 최근까지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그러다가2004년에 들어 일부 일본 가수들에 대한 국내 팬클럽이 결성되고 광범한 소비층을 확보하기 시작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리고 2005년에는 일본 대중음악에 대한 보다 의미 있는 소비증가 조짐이 한국 국내시장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5년 3월, 한국 국내 유명 음반 체인인 교보 핫트랙스의 일본음악차트 ‘ 위클리 톱10’ 에서는 나카시마 미카의 ‘ 뮤직’ 이 1위, 보아의 ‘ Best of Soul'이 2위에 올랐다. ‘ 더 차트’ 의 ’ 주간 팝 앨범 차트‘ 에서는 보아의 ’ Best of Soul'이 1위, 케니지의 “ At Last: The Duets Album'이 2위, 그리고 나카시마 미카의 ‘ 뮤직’ 이 3위에 올랐다. 나카시마 미카가 일본 내에서 인기 있는 다른 일본 J-Pop 가수들을 제치고 유독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가 부른 노래 원곡이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주제곡으로 번안되어 불리워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나카시마 미카의 음악이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한 가지 짚어둘 점은 보아의 ‘ Best of Soul'이 한국에서 판매되는 음반 중 ’ 일본음악'으로 분류되어 들어갔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미 중심의 대중음악 장르를 대상으로 하는 ‘ 주간 팝 앨범 차트’ 에서 다시 보아의 음악과 나카시마 미카의 음악이 나란히 등장해 있다는 사실이다. 일부 국내 언론에서는 심지어 “ 태극소녀, 일본의 심장부에 태극기를 꽂다” 라는 제목까지 붙이며 민족주의적 착각과 흥분을 하기도 하지만, 보아의 음반산업적 성격은 처음부터 다국적적이고 혼성적이다. 그 중 특히 ‘ Best of Soul'은 경우에 따라 일본 대중음악인 J-Pop으로 분류될 수도 있고 일반 팝 음악으로도 분류되어 판매된다는 점에서, 문화의 전지구화와 혼성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아직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일본어로 된 가창곡을 삽입해 넣을 수 없지만, 한국 가수가 일본 원곡을 한국말로 리메이크(번안) 해서 부르게 되면 이는 곧바로 일본 가수의 음악에 대한 홍보효과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현재 이루어지는 대중문화 소비가 역시 다중적 채널, 다차원적 매체의 혼합과 상호영향으로 얽혀 진행된다는 점이다. 한국 드라마의 국내 인기가 일본 대중가요의 국내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거꾸로 한국 드라마의 일본 내 인기가 한국 대중가요의 일본 진출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시 각국의 모바일 캐릭터와 게임에 교차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주면서 문화의 쟝르별 혼성화, 국적적 혼성화, 문화상품 정체성의 혼성화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대중문화산업 원류로서의 미국 대중문화가 가장 기본적인 환경이자 리소스의 제공자로서 튼튼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일찌기 식민지 초기부터 한국의 대중문화를 형성시켰던 일본 대중문화 자체가 서구 대중문화를 도입시키는 창구의 역할부터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4. 게임 소프트웨어 - 일본 게임의 절대적 영향력

 

일본의 게임 프로그램 수입에 있어서는 사실상 그동안 별다른 제한이 없었다. 전반적인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2(PS2) 게임 프로그램은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 것처럼 한국 안에서도 절대적인 시장적 지배력을 지니고 있다. 소니, 세가, 닌텐도 등이 세계시장의 99%를 석권하고 있는 게임기용 비디오 게임물 시장은 2003년 말 추가로 개방되기 이전부터 소니 플레이스테이션용 프로그램 한 가지 종류만 해도 한국 내에서 2002년에 1500억원, 2003년에는 2500억여원의 매출을 기록했으며, 2004년에도 그 증가추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이 경우는 게임 소프트웨어가 일본어로 제작된 것에 대해 수입이 금지되어 있던 당시 유럽과 미국 지사를 통해 영문판이 우회공급된 것이다. 현재는 일본에서 새 게임 출시 후 한국수입까지 3개월 이내에 이루어지며, 한글판 게임의 동시제작도 어렵지 않아 시장 활용의 동시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상태다. 플레이스테이션 이전부터 한국에서 널리 소비되어온 세가와 닌텐도의 소프트웨어는 그 매출액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적으나 한국 내 게임 소비시장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비중을 확고히 해왔다. 그렇지만 한국의 게임 소프트웨어 시장이 일본 상품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문화적 콘텐츠 성격으로 볼 때는 중국의 영향 또한 적지 않다. 또한 한국에서 주축이 되어 개발, 판매하기 시작한 한국산 게임 소프트웨어 안에서도 일본과 중국의 대중문화적 성격들이 강하게 담겨져 있으며, 개발자들은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일본적 성격과 중국적 성격을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그들의 상품을 만들어가고 있다.

 

1) 한국 게임산업 속에 존재하는 중국과 일본의 문화산업 중국 게임시장에서 한국에서 개발된 게임에 대한 인기가 높은 것은 우선 스토리에 있어서 삼국지와 수호지를 비롯한 다양한 중국 무협소설의 스토리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에서 개발되어 일본과 중국으로 팔려나가는 게임들에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일본 게임산업 소프트웨어의 캐릭터들이 가지고 있던 요소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거기에 덧붙여 중국의 고전적 무협지적 내용이 다시 1970년대 이후 중국과 홍콩의 무협 영화적 성격을 입고 발전되었으며, 1990년대 이후 서극 감독류의 특수효과가 게임에서 한층 발전된 형태로 활용됨으로써 중국 뿐 아니라 한국,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끄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중국 내 한국 온라인 게임의 인기 원인은 중국 무협과 서양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환타지 풍의 요소를 섞어놓은 스토리와 캐릭터들인 것으로 이야기된다. 한국에서의 인기에 못지않게 중국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미르의 전설 2]은 중국식 무협과 서양 환타지풍이 혼합된 한국 게임소프트웨어의 대표작이고(조선일보 2001. 11.28.), 2004년에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발표되어 인기를 끌어온 [라그나로크]는 일본 만화와 게임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 귀여운 캐릭터’ 와 일본게임의 오락성 요소를 적절히 결합시킨 게임적 성격이 그 특징(조선일보 2004.6.27.)으로 인식되고 있다. 웹젠사에서 개발한 온라인 게임 ‘ 뮤’ 도 마찬가지 성격이다.

 

2) 합작과 제휴 증가 사실상 한국 게임 소프웨어 업체들이 개발한 ‘ 한류’ 게임의 스토리와 캐릭터들은 그것이 과연 어떤 맥락에서 ‘ 한국 문화산업 산물’ 로 인식되는 것인지, 그 타당성을 의심스럽게 할 만큼 혼성적이다. 한국업체로 등록된 하이윈에서 개발한 ‘ 천상비’ (天上?)는 애초부터 중국과 대만 시장을 겨냥하고 중국식 무협극의 스토리와 캐릭터로 개발된 것의 사례 중 하나다. 중국과 동남아 등지에 게임 소프트웨어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중국 및 대만의 자본출자를 받아 현지법인을 설립하여 현지문화적 요소를 담아 개발한 상품들은 기획에서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다국적적 문화적 요소의 조합을 위해 노력한다. 한편 캐릭터와 프로그램 개발에 있어 다국 기업간 합작과 제휴도 증가하고 있다. 시장의 광역화를 위한 문화산업계 일반의 전략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현상이다. 일본의 캐릭터가 국내에 마음놓고 확산되기 시작한 것도 1998년 이후 눈에 뜨이는 현상이다. [짱구는 못말려], [드래곤 볼], [헬로 키티], [포켓 몬스터], [유희왕], 등 만화 캐릭터나 독자적 상품 캐릭터 외에 일본 통신회사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도 최근 핸드폰을 통한 모바일 게임 캐릭터가 모바일 통신망을 통해 유통 중이다.

 

5. 혼성성의 확대: 한국 문화산업 안팎의 합작 및 교류 증가

 

1) 국내 활동 아시아 출신 연예인의 증가 일본 배우로서 한국의 텔레비전과 CF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유민의 사례에 자극 받아 한국진출을 준비 중인 일본 배우가 2004년 7월 일본 연예기획사의 자료에 따르면 200명 이상으로 파악되기도 했다(스포츠 조선 2004. 7. 30.). 이들은 한국말을 배우고 한국 기획사와 계약을 모색하는 등 구체적인 준비를 하고 있다. 일본인 가수 아유미가 한국을 주무대로 가요활동을 하고 있으며,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배용준의 소속 기획사인 BOF가 다시 2004년 일본의 여중 2학년생인 에리카를 SBS 드라마스페셜 ‘ 유리화’ 에 출연시키고, 이후 한국으로 데려와 계속 뮤직 비디오와 드라마, 프로그램에 출연시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이는 일본을 주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가수들과 연예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점, 그에 못지않게 현재 국내 활동을 대부분 접어두고 중국과 동남아를 주무대로 활동하는 한국 출신 연예인 또한 늘어나고 있는 현상의 이면에서 동시적으로 전개되는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본 또는 중국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한국출신 연예인들은 ‘ 한국 작품’ 이 아니라 처음부터 중국인 기획자와 스탭, 스토리, 자본, 기타 요소들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 중국 문화산업’ 혹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의 ‘ 일본 문화산업’ 체계의 일부로 소속, 참여하고 있으며, 그런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최근까지 (공산화된) 중국 혹은 대중문화 수입금지 대상이었던 일본의 문화산업적 요소에 대해 상대적으로 폐쇄적이었던 한국에서 그러한 동 아시아적 외래문화 요소를 공식적으로 내부에 참가시키는데 약간 늦은 감이 없지 않다.

 

2) 일본만화 원작의 한국영화 칸느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한국영화 ‘ 올드보이’ 가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올드보이]는 한국 내에서도 흥행성적을 올렸으며, 그것이 일본만화를 원작으로 했다는 사실이 일본 내에서도 잘 알려짐에 따라 일본의 영화수입업자들도 [올드보이]에 관심을 보였다. 반면 한국 시장 내에 개방, 상영되기 시작한 일본영화의 한국시장 내 흥행성적은 2003년 상반기의 경우 국내 극장 점유율에서 1.5%에 그쳐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다. 그렇지만 2004년에 영화와 같은 수준으로 전면 개방되기 시작한 일본 비디오물의 국내시장 소비는 상대적으로 많은 소비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중에서도 어린이와 전 연령층을 상대로 하는 ‘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으로 상징되는 일본 애니메이션 작품의 경우는 한국산 애니메이션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세계적 경쟁력을 가지고 각 가정을 겨냥한 비디오 시장에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3) 한국 드라마의 일본 현지촬영 유치 [겨울연가]의 일본 내 열풍이 일본인들의 겨울연가 관광을 통한 한국관광 붐으로 이어지는 것에 주목한 일본의 도시들이 한국 드라마 촬영장소 유치를 위해 노력을 경주하여 그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일본 지방도시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홍보하는 데 있어 한국 드라마가 최고의 홍보매체가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조선일보 2004. 10.14) 유치경쟁을 벌여 한국 드라마의 일본 현지로케를 속속 성사시키고 있다. 일일연속극 [파리의 연인]이 프랑스 파리 현지촬영에 적지 않은 비중을 두었던 것처럼, SBS TV의 드라마스페셜 ‘ 유리화’ 의 경우, 오사카 국제공항, 고베의 기타노 지역, 하버랜드, 콘체르트 호, 산노미아에서 촬영을 하고, 다시 오사카 유흥가와 뒷골목을 배경으로 드라마를 촬영함으로써, 이제 한국 텔레비전 드라마는 그 안에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 풍물을 풍부히 담아 전달하는 매체로서도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일본의 뮤직비디오와 텔레비전 드라마 등에 한국 연예인들이 자주 참가하는 현상이 몇 년 전부터 눈에 뜨이기 시작한 것 또한 동일한 전개과정의 다른 측면이라고 할 것이다.

 

4) 다양화되는 합작 기획 대중문화산업 초창기부터 존재했던 중국 혹은 일본과의 합작 기획은 현재의 국면을 맞이하여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한중 혹은 한일 합작 프로그램들을 다차원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2000년 10월에 이미 한국과 중국 합작 텔레비전 드라마가 추진, 성사되었으며, 2003년에는 중국 국영방송 CCTV와 KBS가 공동으로 제작한 ‘ 한중 가요제’ 가 한국과 중국에서 동시에 방영되기도 했다. 영화에 있어서는 개항기의 한국영화 상당수가 사실상 일본의 ‘ 대동아 공영권’ 내에서 이루어진, 즉 일본의 자본과 스탭, 출연진이 한국인 스탭, 자본, 출연진과 큰 구분 없이 섞여 작품을 만들어내고 유통시키기도 했던 경험이 있다. 그리고 해방 직후에도 중국과의 영화합작은 끊이지 않고 이루어졌으며, 1960년대 이후에는 홍콩과의 합작이 지속적으로 맥을 유지해왔다. 그런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현재 이루어지는 한중 합작 영화와 드라마는 새삼스런 사건이 아니다. 일본과의 합작도 마찬가지여서, 1998년의 일본 대중문화 산업에 대한 시장개방 이후 일본과 한국의 합작 영화가 여럿 제작되고 있는 것은 그리 특기할 만한 사항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시네마서비스와 일본의 쇼치쿠 영화사가 각기 6대 4 비율의 자본투자로 영화를 제작한다든지 한국의 싸이더스가 일본측과 역시 반 반의 비율로 자본을 투자하면서 양국 스탭과 배우를 모두 활용해 영화들을 제작하는 사례는 단순히 한 작품의 시장 확보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전략적 차원에서 문화산업계의 국제적 네트웤과 전략적 제휴 망을 확보하는 방안으로 인식되고 있다. V. 대중문화 교류의 전망: 문화공동체 형성(?) 1.전 지구적 문화적 혼성성의 확산과 지역적 소비 여태까지 살펴본 한국 내 동아시아 문화유입의 역사와 현황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그리고 중국과 일본에서 전개되는 동아시아권 문화산업 상품의 유입과 교류현상의 맥락을 살펴볼 때, 대중문화산업은 그 자체가 정치적인 의미에서나 경제적인 의미에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지배하는 헤게모니적 장치이자 상업적 이익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작용해 온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 형성초기에 일본과 미국의 대중문화가 대량으로 유입되어왔으며 이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곧 일본에 의한 한국의 식민지적 지배,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서냉전 구도의 형성에 한국이 최전선을 형성하면서 편입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 그 기본조건이 결정되었다. 해방 이후 일본 대중문화 상품의 유입이 차단되었던 것은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한국이 현대 국민국가, 대중사회를 바탕으로 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을 최대한 차단하여야만 국가 정체성 의식과 함께 국민국가적 건설이 가능했던 절박한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문화적 독자성을 개발하고 추구하는 방향보다는 미국으로부터 대중문화 상품을 다량 받아들이고 흡수하면서 그에 바탕한 문화산업 기반을 유지하고 문화소비를 가능케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한편 중국의 공산화 이후 중국 본토로부터의 문화상품 -- 비록 그것이 공산화된 중국에서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 이 유입되지 못하도록 차단했던 것도 자본주의 체제를 채택한 한국으로서는 스스로가 처한 정치경제적 환경 안에서 대중문화의 소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198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그리고 1990년대 한국사회와 경제의 규모가 일정한 정도 성장한 이후 다시 세계경제의 전지구화가 충분히 진행된 단계에서 각각 중국과 일본의 대중문화 요소가 유입되도록 시장을 개방한 것 자체가 그러한 기본적인 틀이 감소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감소는커녕 정치경제적 환경의 힘은 애초에 일상성의 상업화를 전제로 출연한 대중문화산업과 문화소비 현상의 기초적 환경으로서 강고하게 존재하며, 매체의 전지구화와 경제의 전지구화가 단일한 형태의 Global Culture가 아닌, 각 지역권과 각 지방의 특성에 맞게 전지구적 요소들이 재구성되고 조합되는 이른바 "cultural supermarket“ (Mathews, 2000) 현상을 전개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내에 유입되는 동아시아 대중문화 요소, 그리고 다시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곳에서 소비되는 한국 대중문화 요소는 그런 면에서 일찍부터 ‘ 국가적 차원’ 의 이동과 협력에 의존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애초부터 벗어난 다양한 영향과 이해관계 속에서 네트워크의 형태로 작동하는 문화, 정치, 산업적 복합현상이다. ‘ 한류’ 작품들 속에는 중국적 요소가 더 많이 담긴 것이 있는가 하면 미국적 요소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있고, 일본 대중문화 상품을 고스란히 베낀 것도 있다. 동시에 거기서 말하는 일본 대중문화 상품 중 상당수가 또한 유럽과 미국의 문화요소를 차용하면서 국지적 번안과 재창조를 해낸 것들이 많다. 이미 규모의 경제를 따라 위험요소를 줄이고 보다 안정된 시장 포트폴리오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을 구사해온 동아시아 문화산업계의 주체들은 시장개방이나 공식적인 문화유입 루트가 열리기 이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각국의 대중문화 요소들을 차입하거나 교환해왔고, 공식 혹인 비공식적인 채널을 따라 혹은 협력하고 혹은 경쟁해왔다. 그러한 경쟁과 협력은 국가범주나 지역범주를 벗어나 파트너를 결성시키고 문화적 구성요소들을 조합시키는 방향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따라서 대중문화산업이 ‘ 동아시아적 차원’ 안에서 먼저 공동체를 형성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또는 한, 중, 일이라는 국가적 틀을 적용하면서 어느 나라의 대중문화 상품이 어느 나라에서 팔린다는 의식을 강하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현상과 상당히 거리를 갖는 인지행동이다. 한국의 일부에서 현재 ‘ 동아시아 대중문화 교류 증진방안’ 을 이야기 하는 것은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의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 그리고 대중가요가 아시아 시장 일각에서 인기를 끄는 이른바 ‘ 한류’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다. 만약에 중국의 대중문화가 급격하게 성장해서 그 영향력이 한국 대중문화시장을 절대적인 우위에서 지배하기 시작한다고 해도 여전히 ‘ 동아시아 문화 공동체’ 와 ‘ 교류 증진방안’ 을 이야기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일찍이 일본이 스스로가 주도하는 ‘ 대동아 공영권’ 을 모색해왔으며, 현재도 새로운 제 2의 대동아 공영권을 구상해오고 있다는 점에서도 반증된다. 따라서, 대중문화산업이 아직 성숙되기 이전 단계에 있는 중국이 ‘ 한류열풍’ 에 대해 경계를 강화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한국이 최근까지도 일본 대중문화에 대해 시장을 개방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둘 이상의 존재가 있는 곳에 권력현상이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 동아시아 문화 공동체’ 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은 ‘ 누구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 공동체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자신이 중심이 될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되는 주체에게는 ‘ 문화 공동체 논의’ 가 오로지 위협으로 인지될 뿐이다. 거꾸로 자신의 ‘ 지역적 중심성’ 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일정한 정도의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는 주체의 경우는 ‘ 암묵적으로 자신의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 공동체론을 열심히 이야기하고 싶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대중문화 시장의 생산자와 소비자들은 국가적 통제의 경계를 일찌감치 벗어나 그 사이를 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자신들의 ‘ 문화경제’ 활동을 벌여왔고, 또 벌이고 있다. 거기서 국가적 단위의 문화규정과 인식은 어색하거나 의미 없는 것이기도 하다. 현 단계의 전지구화된 대중문화 생산과 소비환경 속에서는 국가적 단위로 문화를 규정한 다음, 다시 그것들을 마치 여러 나라 문화들인 것처럼 한데 모아 ‘ 협력’ 을 모색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비현실적이고 비현장적인 서술일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의 대중문화는 경제와 사회의 세계화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저절로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평등하거나 균등한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며 또한 당연하다. 모든 문화현상이 정치와 경제적 환경을 타고 발생하듯이, 더구나 경제적 이해관계를 전제로 하는 산업활동이 그 성격의 핵심을 이루는 ‘ 문화산업’ 은 지배력의 확산을 위한 만인대 만인의 경쟁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 당연하다. 거기에서 협력하고 경쟁하는 파트너 들은 끊임없이 이합집산하기 마련이다. 그 이합집산의 범주와 형태가 훨씬 다양화되고, 이합집산의 속도 또한 가속화되는 것이 정보화시대, 멀티미디어 시대, 개인주의와 부족주의가 공존하는 탈현대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2. 동아시아 문화 네트워크에 대한 질문 그렇다면 이런 맥락 위에서 동아시아 문화 네트워크 강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동아시아 여러 국가의 전문가들이 모인 학술대회에서 공용어로 한 가지 언어만 사용한다면 결코 일본어나 중국어, 한국어 중 하나가 채택되지 않는다. 대신 영어가 채택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것은 아시아의 역사적 경험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지역권으로 묶인 인접국들일수록 어느 한 나라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결코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문화 콘텐츠의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도 동아시아 국가들의 문화상품 콘텐츠는 각국들의 문화요소들이 혼합의 형태로 엮여있는 것 못지않게 미국의 대중문화 산업 콘텐츠와 매체를 공통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대중문화 상품 소비리듬의 가속화와 커뮤니케이션의 동시성이 진행되면서 대중문화 시장의 시공간적 성격도 이동하고 있다. 그에 따라 상품 생산과 유통 주역들은 기본적으로 위험성이 높은 문화상품의 리스크를 분산하면서 보다 안정적인 생산과 소비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 사이에서 스스로 끊임없이 합작과 상품의 혼성화를 모색해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가 문화산업에 대한 각종 규정을 줄이고 검열등과 같은 정책적 규제만 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혼성화와 합작의 네트웤은 시장 자체의 속성에 따라 빠른 속도로 확대되고 일반화될 것이다. 물론 거기서는 동아시아적 울타리를 다시 치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동아시아로 한정하는 문화적 울타리가 의미하는 바는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기존의 역사적 경험이 지역권적 차원에서 공유된 정도가 강하고, 그러면서 서구에 의한 근대성의 도입과정에서 식민지 혹은 피식민지 경험을 통해 대중문화의 형성 자체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동아시아 지역권 국가들 사이의 문화교류는 필연적으로 단순한 ‘ 문화교류’ 를 훨씬 넘어선 여전히 복잡한 헤게모니 다툼과 함께 진행되는 협력일 수 밖에 없다. 일반적인 상업거래와 외교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어느 한 나라도 다른 나라의 문화적 영향이 일방적으로 수입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 동아시아 문화공동체 모색’ 이란 개념은, 그것이 어느 나라에서 주창하는 것이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이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자신의 역사 안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하는 것, 일본이 제 2의 ‘ 대동아 문화권’ 을 보다 실질적으로 진행시켜온 것, 그리고 한국이 최근의 한류 붐을 타고 ‘ 동북아 중심국가’ 등의 개념을 주창하며 문화공동체론을 거론하기 시작하는 것들이 그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문화소비 현상 자체는 이미 그보다 훨씬 넓은 전지구화적 소비 네트웤으로 움직이고 있으면서. 정책적 논의는 국가단위와 최소지역권 단위 주변을 움직이고 있다. <참고문헌> Canclini, Netor Garcia, 2001, Consumers and Citizens - Globalization and Multicultural Conflicts, Univ. of Minnesot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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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대학교(University of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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