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특성, 관계주의
한국 사회는 ‘집단주의’ 성격이 강하다? 서구에 비해 집단의 소속감을 중시하고, 집단의 목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고, 집단을 개인보다 중요시한다는 것이 집단주의의 핵심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한국 사회는 그다지 집단주의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한국 사회는 개인주의, 집단주의와는 다른 ‘관계주의’에 가깝다. 관계주의는 집단의 목적보다 타인과의 관계에 더 목적을 둔 행동을 많이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집단의 공정성, 효율성보다는 주변 사람 챙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면 부정부패를 많이 저지를 수 있다.
이런 관계주의는 일상에서 존댓말을 사용할 때 실수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식당에 가 보면 ‘음식 나오셨습니다’와 같은 잘못된 표현을 종종 듣는다. 음식을 높이는 말이 잘못됐음을 알지만, 듣는 손님의 입장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말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방송에서 강의를 할 때도 ‘우리나라’라는 표현을 쓰면서 듣고 있는 청중과 시청자를 생각하면 ‘우리나라’라는 표현이 맞지 않나 싶어지기도 한다. 상대하고 있는 개인의 입장과 체면에 대한 배려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밥 먹었니’ 할 때와 ‘밥 안 먹었니’라는 표현으로 물어보는 것도 관계주의를 보여주는 언어 표현이다.
서양의 경우, ‘밥 먹었니, 밥 안 먹었니’하는 질문에 상관없이 ‘네, 먹었습니다(Yes, I did)’, ‘아니요, 안 먹었습니다(No, I didn’t)라고 대답한다. 내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에 대한 상태만 대답하면 되는 것이다. 질문과 상관없이 나를 중심으로 대답하는 영어와는 달리, 한국어는 대답이 복잡하다.
“밥 먹었니” - > “예(긍정), 먹었습니다(긍정)” / “아니요(부정), 안 먹었습니다(부정)”
“밥 안 먹었니” -> “아니요(부정), 먹었습니다(긍정)” / “예(긍정), 안 먹었습니다(부정)”
이런 상황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은, 한국어에는 나의 상태를 전달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내 말을 잘 듣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능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언어는 기술적 언어와 소통의 언어 두 가지가 있다. 기술적 언어는 정확하고 효율적인 정보 전달에 초점(영어)을 맞추는 반면, 소통의 언어는 나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물론 상대방에 대한 반응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 말은 모호한 표현이 가능하다. 모호하게 대답해도 상대방이 잘 이해하면 언어 소통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주의적인 한국 사회에서 소통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광우병 사태’이다. MB정권에 큰 타격을 줄 만큼 중요했던 사회 이슈 ‘광우병 사태’를 우리가 그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일 일이었을까, 하는 물음에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광우병은 발병 확률이 매우 낮았고, 동물성 사료를 오래 전부터 주지 않고 있어 사라지고 있는 추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비합리적이라고 판단한 국민의 반응에 합리적 정보를 끊임없이 제공하며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국민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당시 국민들은 광우병의 위험도에 대한 정보(기술적 언어)보다, 국민의 불안함에 대한 정부의 적절한 반응(소통의 언어)을 기대했던 것이다. ‘안전합니다, 발병 확률이 낮습니다’ 하는 기술적 언어로만 대응했던 정부와 불안감을 호소하는 국민 간의 소통이 될 리가 없었다.
이런 소통의 기술은 개인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흔히 부부 사이에서도 부인이 ‘슬프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남편은 ‘왜 슬픈지’에 대해 캐묻는다. 반복되는 질문에 아내는 짜증이 솟구치고, 몇 년 전 있었던 일까지 끄집어내어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남편은 기술적 언어, 아내는 소통의 언어를 사용하여 서로 다른 목적의 대화를 하다가 참사를 맞이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기술적 언어도 물론 중요하지만, 진정한 소통을 위해 ‘관계’를 생각해야 하고, 그 방법을 달리 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