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고대

공무원 한국사, 테마 분류사, 고대

Jobs 9 2023. 12. 3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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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서술 두 경향

 

1. 객관적 측면의 역사(일제강점기에 들어옴) ⇒ 事實 [ 객 사 랑 ]

1) 사실로서의 역사: 과거에 실제 있었던 사실, 시간적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모든 과거

2) 랑케: 역사가는 자기 자신을 죽이고 오직 역사적 사실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3) 이병도: 실증주의 사관, 진단학회

4) 역사가의 임무는 사실을 정확히 기록하는데 있다, 자신의 시대정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2. 주관적 측면의 역사 ⇒ 史實

1) 기록으로서의 역사: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 탐구하여 획득한 지식, 역사가가 주관적으로 재구성

2) 이에치 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역사가는 자신의 생각으로 사실을 만든다.`

3) 크로체, 콜링우드, 토인비,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주의 사학과 관련

4)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신채호), 역사는 만인과 만인의 투쟁이다(토인비)



3. 한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

- 단일민족 국가로서의 전통, 충ㆍ효 사상, 두레등 공동체 조직 발달, 세형동검, 잔무늬거울 제작, 상감청자, 금속활자의 발명, 불교문화의 호국사상과 현세구복적 신앙, 삼국시대 귀족회의, 한글

- 보편성: 백남운“사회ㆍ경제사학”⇒ 유물 ↔ 관념(민족주의) / 보편 ↔ 정체성론



4. 사료비판

- 내적비판: 사료의 내용이 신뢰할 만한 것인가를 분석하고 사료의 성격을 밝히는 작업

- 외적비판: 사료의 형식이나 그 자체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





고대사회 발전 단계설 (국가발전 3단계설)

성읍국가 (군장국가) 연맹국가 (초기국가) 중앙집권국가 (고대국가)
청동기 문화 철기문화 철기문화
고조선, 옥저ㆍ동예, 삼한의 소국 가야, 삼한(목지국), 부여, 위만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왕 X (부족장 개념)
선민사상
왕 O (선출제)
왕권미약(군장세력 强)
사출도(5부족연맹체)
관료조직은 존재
흉년, 수해시 귀족들이 왕에게
책임을 물음
왕 O (세습제: 형제 → 부자상속)
왕권강화(군장세력 弱)
족장세력의 중앙귀족 흡수
율령반포 ⇒ 신분제 복제 마련
불교수용
영토확장(한강)
중국과 항쟁
지방관 파견

 

 

선사시대 구분

구 분 구 석 기
(70만~1만년)
중 석 기
(~ BC.80C)
신 석 기
(~ BC.20C)
청 동 기
(~ BC. 5C)
철 기
(BC 5c,AD 1c ~)
유적지 천성승만두상수석
(전국구석에 12곳)
최 홍 만 부 임 고 동 오 암 남 수 지
(강가나 바닷가)
오 초 미 흔 송
(전국에 걸쳐 다수)


토 기 인골화석: 승만두상
양면주먹도끼: 연천전곡
X
X 이른민무늬토기
덧무늬 토기
빗살무늬토기
압인문토기
덧띠새김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미송리식토기
붉은간토기
중국식 회도
덧띠토기
김해식(가야)토기
검은간토기
주 거
형 태
막집+동굴

해안ㆍ강가(수변생활)
움집+동굴

(원형,방형,중앙에화덕)
내륙에 집단취락
야산의 구릉지
움집+지상가옥
(사각,장방형,한쪽에화덕)
귀틀집, 초가집
온돌구조
배산임수
산성거주
석 기 뗀석기 잔석기(세석기) 간석기 간석기

유 물 주먹도끼 팔매돌
슴베찌르개 찍개
찌르개 새기개
긁개 밀개(조리용) 자르개
톱 낫 활 작살
이음도구
뼈바늘 가락바퀴(방추차)
갈돌⋅갈판(조리용)
돌괭이ㆍ돌보습
비파형동검(북방계통)
거친무늬거울(조문경)
홈자귀 반달돌칼
고령양전동 암각화
울주반구대 암각화
세형동검(마한지역
영산강ㆍ금강유역)
잔무늬거울(세문경)
거푸집
명도전
경 제 사냥 채집 어로 토끼 여우 등 사냥 채집 어로 초기: 사냥 어로
후: 농경⋅목축시작
농경발달
벼농사시작(BC8)
(중국에서전래) *만주X
농업혁명
*世界最古 볍씨: 
청원소로리 발견
농 사
기 구
X X 조 피 수수 기장
돌괭이 돌보습
보리 콩 벼
반달돌칼 홈자귀
벼농사 발달
철제(청동X) 농기구
철제무기(청동기의기화)
무 덤 X X 토장묘(웅기굴포리서포항 동침앙와신전장) 고인돌 돌널무덤
돌무지무덤
널무덤
독무덤(=옹관묘)
신 앙 주술적 신앙(선각화)
(수양개 석장리)


원시신앙
(애니미즘⋅샤머니즘)
선민사상
제정일치(단군왕검)
제정분리(소도)
국 가
형 태
무리사회 (무리사회) 씨족⋅부족사회 군장(성읍)국가 초기: 연맹국가
후기: 고대국가
사 회 평등사회
이동생활
평등사회
이동생활
평등사회
부족사회
정착생활(집단취락X)
족외혼(폐쇄적)
족장(군장)사회
분업사회(집단취락O)
가부장적사회
사유재산⋅계급발생
친족공동체사회
사유재산
계급분화 심화
민 족
기 원
한반도 최초거주 해빙기 겪음 우리민족의 기원
민족의 기틀마련
우리민족의 주류

일 본
영 향
조몽 토기 야요이 문화 가야→스에키토기
삼국→아스카문화
통신→하쿠오문화
기 타 ※ 한민족: 韓族 + 예맥족(조선족ㆍ부여족) *漢族 X


※ 동방문화권: 요령ㆍ길림을 포함하는 만주지역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에 넓게 분포하여 중국의 문화권과는 다른 독특한 것이 특징. [요만한]



 

유적지 

∘ 단양 금굴: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最古)
* cf. 한반도 최고의 신석기 집터 유적지: 양양오산리 (덧무늬토기 발견)

∘ 공주 석장리: 해방 후 남한에서 발견된 최초의 구석기 유적(전기~후기)

∘ 종성 동관진: 일제 강점기(1933)에 발견된 최초의 구석기 유적지, 일본학자들은 인정 X

∘ 인골 화석: 덕천 승리산, 만달리유적, 청원 두루봉(흥수아이, 장례흔적), 단양 상시리(남한최초), 제천 점말동굴, 역포 대현동

∘ 선각화(주술적신앙): 단양 수양개, 공주 석장리 *cf.암각화 X

∘ 암사동 선사유적지
- 1979년 7월26일 사적 제267호로 지정, 서로 다른 시기의 문화층이 발견
- 맨 밑에 층에서 신석기 유물 발견, 두 번째 층에서 신석기 유물과 청동기 유물이 동시에 출토, 맨 위층에는 백제의 유적도 발견 , but 고인돌 출토X

∘ 황해도 봉산 지탑리ㆍ평양 남경 유적: 탄화된 좁쌀 발견 ⇒ 신석기 시대 후기의 농경 흔적

∘ 경기도 여주 흔암리ㆍ충남 부여 송국리: 탄화미 발견 ⇒ 청동기 시대의 벼농사 흔적, 중국에서 전래

∘ 제주 한경면 고산리 유적: 신석기 시대를 BC 6천년에서 BC 8천년으로 앞당김, 한반도에서도 구·신석기
시대가 자연스럽게 연결됨을 입증. * 청동기 시대를 500~1000년 앞당겨 BC 2천 ~ BC 1500년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 된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은 덧띠새김무늬토기


∘ 암각화: 울주 반구대(고래ㆍ짐승 등 사냥감), 울주 천전리(제1암각화-사냥감, 제2암각화-기하무늬), 고령양전동 알터(○ + △ 기하무늬), 칠포(국내 최대규모)

 

 

 

● 단군 신화
1.특징: 단기원년(BC.2333) → 청동기문화 바탕(재산성립ㆍ계급사회ㆍ농경생활ㆍ태백산신시(구릉산간지))
2.모계사회(웅녀), 토템사회(곰→동물숭배), 제정일치 사회(단군+왕검), 태양숭배사상(햇빛을 보지 아니~)
3.고려시대에 부각 → 원간섭기(식민지하)
4.문헌기록- 삼국유사(충렬), 제왕운기(충렬), 세종실록지리지(단종), 응제시주(세조), 동국여지승람(성종), 동국통감,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역대총목, 동사강목 (※삼국사기X) [유제세 응제 동국 동사]
5.고조선의 8조 금법 vs. 부여의 4대 금법
● 고조선 
1) 기록문헌 : 반고의 <한서지리지>에 3개 조목만 전해짐
2) 성격 : 관습법, 보복법, 만민법 (성문법X)
3) 내용 및 분석 (살인죄, 상해죄, 절도죄, 간음죄(추정), 연좌법X )
①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 생명 중시, 형벌제도 존재
② 사람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 농경사회, 사유재산 인정, 노동력중시
③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되, 자속하려는 자는 돈 50만전을 내야 한다. ⇒ 노비제도 존재, 계급사회, 화폐의 사용 (*화폐의 주조×, 널리유통×) ⇒ 일부지배층만 화폐사용
④ 부인들이 貞信하여 음란하지 않았다.(추정) ⇒ 가부장적 사회.
4) 변천 : 한 군현이 설치된 후 토착민의 저항으로 인해 60조로 증가(풍속의 각박 증명)
● 부여
1) 기록문헌 : 진수의 <삼국지위지동이전>에 4개 조목이 전해짐
2) 성격 : 관습법, 보복법, 만민법 (성문법X)
3) 내용 및 분석 (살인죄, 절도죄(1책12법), 간음죄, 연좌법○)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는다. ⇒ 생명존중 & 연좌법 적용, 노비제도
절도자는 12배를 배상한다. ⇒ 1책12법, 사유재산보호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 가부장적 가족제도
④ 부녀의 투기를 사형에 처하되 그 시체를 남쪽산에 버려서 썩게 한다. 단, 시체를 가져 가려면 우마를 바쳐야 한다. ⇒ 가부장적 가족제도, 사유재산제도
● 고조선 ※ 신석기(단군조선)ㆍ청동기(고조선)ㆍ철기(위만조선) * 중국은 춘추전국시대
1. 청동기시대(군장국가)에 건국 → 철기시대(연맹왕국)에 멸망 * 고조선의 통치이념: 민본주의 사상
 
2. 고조선의 유물, 유적 [파송 거친탁] 천부인권X
1) 비파형동검 2) 미송리식토기 3) 거친무늬거울 4) 탁자식 고인돌(=북방식)
 
3. 고조선(청동기) ⇒ 강성기(BC. 3C경)
1) 요령자방과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 문화를 이룩하면서 발전
2) BC 4c ~ 3c: 요서지방을 경계로 연나라와 대립 할 만큼 강성, 부왕ㆍ준왕 등의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 세습
3) 상ㆍ대부ㆍ대신ㆍ장군 / 도위(지방관) 등의 관직을 정비(BC 4 ~ 3C 경)
4) BC 3c초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으로 요동을 상실하고 세력이 약화되어 한반도로 이동
* 한군현(한4군)
1. 점제현신사비(1C) - 낙랑
① 열수가 대동강인 사실을 알려준다.
② 현존최고의 금석문
2. 가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3. 철기 문화의 한반도 전 지역으로 확산

5) BC 108년 우거왕ㆍ성기 등의 주전파가 중국 한 무제에 맞서 대항하다 1년 만에 왕검성 함락
⇒ 한4군 설치(8조법이 60개 조로 증가)

4. 위만조선(철기, BC 194 ~ BC 108)
1)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한 증거
- 위만이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흰옷을 입음
- 위만은 나라 이름을 그대로 조선이라 함
- 토착민 출신중 높은 지위에 오른 자가 많음.
⇒ 위만조선은 중국인 이주자들에 의한 전면적 교체로 이루어진 식민정권이 아니라, 토착민 중심의 토착정권의 성격이 강함을 알 수 있다

2) 발전
- BC 2c경 고조선 북방에 와서 이주민 세력의 대표가 된 위만은 왕검성에 들어가 준왕을 몰아내고 왕위 찬탈
- 위만은 철기를 가진 이주민집단으로 아직 청동기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토착 부족장세력과 연맹하여 반한정부를 수립하며 성장, 위만에게 밀려난 고조선의 준왕은 진국으로 가서 한왕이라 자칭.
- 철기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수공업이 발전 (*처음X, 철기는 이미 고조선 사회에서 수입)
- 중계무역의 실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동방의 예나 남방의 진이 중국의 한과 직접교역을 막음
- 한의 침입과 지배층의 분열에 의해 멸망 (BC 108) ↳ (단군조선의 계승 근거는 될 수 없음)
- 한의 위만조선 침입 이유
• 위만조선의 중계무역으로 한의 경제적 손실
• 위만조선이 철 산지인 요동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북방의 흉노족과 연결되는 것을 우려 *선비족X
 
5. 풍속: 가부장적인 가족제도가 확립, 순장의 실시, 부여에서 성행, 신라지증왕 때 금지
공무도하가는 고조선의 서정가요로 해동역사에 수록된 우리나라 최초의 시가이다.
 
6. 요령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한반도(북부)로 발전 (초기: 요령중심 → 후기: 대동강유역중심)
1) 고조선 중심지 관련 학설
- 요령중심설: 조선초 권람의 [응제시주]에서 등장, 17C 남인학자의 요동설 체계화, 19C 신채호 주장
- 대동강중심: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등장, 18C 정약용ㆍ한치윤 등 실학자가 고증, 북한(평양단군릉)

2) 기자동래설
- 기록된 문헌: 상서대전(尙書大全), 이승휴의 제왕운기, 조선사림파, 일제 만선사관



 

 

초기국가들의 생활상

부 여 고 구 려 옥 저 동 예 삼 한
영고(12월, 수렵사회) 동맹(10월) 무천(10월) 수릿날(5월)
계절제(10월)
말 주옥 모피 맥궁 오곡 맥포 생선 소금 단궁 과하마 반어피 쌀 철(변한)
형사취수제 데릴사위제
(예서제 서옥제)
민며느리제(예부제)
王(1c초 중국식 왕호사용)
>부족장(馬牛猪狗
>가신(대사자ㆍ사자)
제가회의
사출도(5부족연맹)
흉년이 들면 왕교체

>수상(상가ㆍ고추가
ㆍ대로ㆍ패자) >
관리(주부ㆍ우태ㆍ승) >
가신(사자ㆍ조의ㆍ선인)
5부족 연맹체
(소 계 절 순 관)
王 없음,
읍군ㆍ삼로
王 없음,
읍군ㆍ삼로ㆍ후
 
위나라에 조세납부
범 토템 신앙
진왕(한왕) 
> 신지ㆍ견지(대군장)
읍차ㆍ부례(소군장)
 
* 저주지관리권: 
신지ㆍ견지
선비족 침입 받음(346)
순장, 후장(얼음사용)
시체를 집에 오래 둠
곽은 사용하나 관은X
우제점법 백의숭상
조두라는 그릇 사용
1책12법 반농반목
후장(금은 부장품만)
부경(절약ㆍ약탈경제)
1책12법
결혼 초부터 수의제작
국동대혈: 다산풍요
(유화부인,지모신,농경신)
가족공동묘(세골장)
두벌묻기(목곽)
쌀항아리
소ㆍ말 少, 
步戰에能
 
동성혼금지(족외혼)
삼베⋅누에(방직기술)
별자리점, 책화
소말의 활용에 能
凸ㆍ呂자형 집터
곡령(목둘레가 둥근 옷)
죽거나 병들면 새집으로 이사
후장(소ㆍ말 합장)
장례시 큰새 날개
관은 있고 곽은 없다
소도(천군) 토실거주
상투⋅문신, 두레
마한의 주구묘

* 씨족사회(신석기)의 유습: 족외혼(동), 책화(동), 서옥제(고), 화랑도(신), 화백회의(만장일치), 두레(사유제산이전단계)

* 초기고구려 신분구조: 가(부족장), 호민(경제부유층), 하호(농민), 노비 ⇒ 전쟁에는 가와 호민이 참여

*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삼한의 위치를 고증 ☞ 마한(백제국 ⇨ 백제), 진한(사로국 ⇨ 신라), 변한(구야국 ⇨ 가야)

 

 

 

삼국시대별 王 

Cen 고 구 려 백 제 신 라
2C 태(조)기 계 옥 동 현 숙
고(국천) 5부족 부자 진대 국
   
3C 동(천) 서 오 위 고(이) 기 남 한 6 16  
4C 미(천) 대 낙 서
고(국원) 초 선비 전연
소(수)
광(개) 동 강북 영 왜 호
근(초) 고 마 해 칠 부 가 아직 완 서
침(류) 마라 동진
내(물) 김 광
5C 장(수) 한 경 중 평 광
 문(자) 부여 최대
문(주)
삼(근)
동(성) 결혼 탐라
눌(지) 부 나 652
소(지) 결 역 시
6C   무(령) 남조 22 단
성(왕) 사 22부 노리 지 결렬
지(증) 순 신 왕 우 동
법(흥) 본 건 병 상
진(흥) 한 대 황 국 비 품 화 개 대 불량 결렬
7C 영(양) 아차 여수 살수 신집
보(장) 안 연 천
668년 멸망
무(왕) 서 미 관
의(자) 황 사
660년 멸망
(진)평 위 예 옥대 걸 세 임신 복 남산
선(덕) 여 황9 첨
(진)덕 집 창 태평
무(열) 진 사 갈
문(무) 통일
신(문) 95 관 공 예 외 국 시 흠
8C   * 나제동맹 *
• 5C(433): 비유 + 눌지
• 5C(493): 동성 + 소지(결혼)
• 6C(553): 성왕 - 진흥(결렬)
성(덕) 전 누각 最古상
경(덕) 녹 태 불국
혜(공) 대공 最大종

 

 

삼국 왕의 주요 업적

기초(기틀)마련 고(태조왕2) 백(고이왕3) 신(내물4)
한강유역차지 백(고이왕3) 고(장수왕5) 신(진흥6)
고대국가완성 백(근초4) 고(소수4) 신(법흥6)
령반포 백(고이3) 고(소수4) 신(법흥6)
부자상속제 고(고국천왕2) 백(근초고4) 신(눌지5)
교수용 고(소수4) 전진-순도 백(침류4) 동진-마라난타 신(눌지5) 고구려-묵호자
사편찬 (삼국사기有)
역사서의 경우 삼국사기 이전의 것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쪽만 정치사랑 연관되기에 중요)
백(근초), 서기-고흥 신(진흥), 국사-거칠부 고(영양7), *유기(소수림왕)
유기100권→신집5권-이문진
최대영토 백(근초고왕) 고(문자왕) 신(진흥왕)
귀족회의 고(제가회의) 백(정사암회의) 신(화백회의)
수상 고(대대로) 백(상좌평) 신(상대등→시중)
지방제도 5부5부,3경 5부5방,22담로 6부5주,2소경

1. 건국순서: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건국되었다고 하나, 중앙집권국가의 형성은 고, 백, 신의 순서

2.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고구려의 처음성립(연맹왕국) ⇒ 동명성왕(주몽)
1) 태조왕(1~2C)
- 기틀마련, 중앙집권국가의 형성(여러 집단들이 5부 체제로 발전)
- 왕위세습(계루부(전에는 소노부), 형제상속), 옥저ㆍ동예 복속(영토확장)
2) 고국천왕(2C)
- 부자상속제의 확립, 진대법 실시, 부족적 전통의 5부를 행정적 5부로 개편
3) 동천왕(3C): 오와의 통교를 바탕으로 위를 견제, 서안평 공격 실패, 위장 관구검의 반격으로 수도함락
4) 미천왕(4C)
- 서안평 점령(중국의 5호 16국 시대로 정치적 분열기), 낙랑군 축출(중국세력의 축출), 대방군 복속
5) 고국원왕(4C 중반): 선비족(전연)인 모용씨가 침입하여 수도 함락, 평양성에서 근초고왕에게 패사
6) 소수림왕(4C 후기)
- 전진과 수교(372), 불교 공인(전진의 순도)
- 태학 설립(최초의 국립대학, 상류층 입학), 율령 반포ㆍ관복 제정(고대국가 완성)
- 백제와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으며, 거란족의 침략을 받기도 함
7) 광개토대왕(4C말 ~ 5C초): 연호 사용(영락, 연수)
- 왜의 격퇴(400): 신라의 내물왕을 원조(근거: 호우명 그릇) → 전기 가야연맹 해체의 결정적 계기
- 후연 격파 ⇒ 요동지역 확보(중국의 5호16국 정치적 분열기), 한강이북진출, 거란정벌, 동부여 복속
8) 장수왕(5C): 중국 남북조의 분열을 이용하여 중국과 교통하면서 남진정책을 추진
- 광개토대왕비(=호태왕릉비) 건립(414): 세계의 중심이라는 천하관 반영, 중국퉁구 집안현(평양X), 예서체, 1880년에 발견 (일제강점기X)
- 평양천도(427): 평양천도 이전(남북조, 북방 민족과 다면외교), 평양천도 이후(남하정책)
- 백제 수도인 한성C): [신집]5권(이문진),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수나라 문제 섬멸),
*영양왕 연계: 온달의 전사가 영양왕 원년에 있었던일// 수나라의 요서지역을 고구려가 선제공격
11) 보장왕(7C): 안시성싸움, 연개소문의 천리장성(부여성~비사성)
* 고구려의 정복 순서 : 동(옥저) 서(요동) 남(남한강) 북(부여)의 순으로 정복

3. 백제의 성립과 발전 : 근초고왕 때 우리나라 역사상 해외진출이 가장 활발함
1) 고이왕(3C)
- 중앙집권국가 형성, 한강유역 장악, 율령 반포, 관등제 정비(16관등), 정치체제정비(6좌평), 관복제 도입
- 형제 상속의 왕위 세습, 남당 설치, 낙랑과 대방군을 공격
2) 근초고왕(4C)
부자상속제의 확(위례성) 함락 → 남한강유역 차지(중원고구려비)
- 경당 설립: 사학, 무술 교육, 평민 입학, 개항이후에 성립된 원산학사와 비슷
9) 문자왕(5C말 ~ 6C초): 부여 복속(494), 고구려의 최대영토 확보
10) 영양왕(7립, 마한의 완전 정복, 담로제의 실시
- 전라도 장악: 마한의 소국들을 정복.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킴.
- 낙동강 유역에 가야에 대해서 지배권 행사, 동진과 수교, 일본에 아직기 파견, 칠지도 하사(368)
- 요서지역 점령, 산둥반도, 일본 규슈 지방까지 진출하여 고대 상업 세력권을 형성 cf. 요동은 고구려 점령중
- 고흥(서기 편찬)
3) 침류왕(4C말): 동진(마라난타)에서 불교의 수용
4) 개로왕 : 장수왕에 의해 전사, 5C에 북위에 국서를 보냄(고구려의 남하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 백제가 중국의 북조와도 교역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근거.
- 백제의 한문학의 발전을 보여줌.
5) 문주왕(475~477) : 웅진으로 천도(475, 고구려의 평양천도(427)가 먼저 이루어 짐), 왕권약화
6) 동성왕(479-501) : 왕권강화, 신라 소지왕과 결혼동맹(493), 탐라국 정복
7) 무령왕(6C초) : 22담로 → 지방세력의 통제 (*무령왕이 처음 설치X, 담로는 한성시대부터 존재)
- 중국 양나라와 수교(521), 사신을 파견하여 영동대장군의 작위를 받음
- 5경 박사의 파견 : 단양이와 고안무를 각기 일본에 파견
8) 성왕(6C) : 사비로 천도, 국호를 남부여로, 왕족의 성을 부여씨로 바꿈
- 5부, 5방의 지방 제도를 정비, 22부의 중앙 관청을 확대, 정비
- 겸익 등의 승려를 등용(소승불교), 일본에 불교전파(노리사치계 파견),
- 중국 양나라와의 국교강화, 일본과의 교류 활발
- 한강하류의 일시회복 → 진흥왕의 배신으로 상실 ⇒ 나·제동맹의 파기(553), 신라를 공격하다가 옥천 관산성에서 전사
9) 무왕(7C) : 미륵사와 왕흥사의 건립(익산으로 천도 추진→실패)


4. 신라의 성립과 발전
1) 내물왕(4C말) : 형제상속, 영토확장(낙동강 지역의 진한 지역 거의 차지), 전진과 수교(고구려를 통해서)
- 고구려군의 신라 주둔: 왜구(399)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군대가 신라 영토안에
머물기도 하였음 → 광개토대왕릉비의 비문과 호우명 그릇
2) 눌지왕(5C초): 백제의 비유왕과 나·제 동맹 체결(433), 왕위 부자 세습,
고구려의 묵호자에 의해 불교의 전래(457)→토착신앙으로 인해 융성하지 못함
4) 소지왕(5C후반) : 우역의 개설(487), 6부의 행정 구역 마련, 시장의 개설, 백제 동성왕과 결혼동맹
5) 지증왕(6C초) : 한화정책(왕, 신라로 개정), 우경의 실시(장려)
- 주, 군을 정비하고 주에 군주를 파견, 우산국 정벌: 이사부를 최초의 군주로 삼음
- 동시전설치(통일신라 : 동시, 서시, 남시의 설치.번성) : 시장 감독 기관
- 순장을 법으로 금지
6) 법흥왕(514~540) : 연호의 사용(건원)
- 병부를 설치(최초), 상대등 설치(왕권과 귀족 세력 간의 타협의 산물)
- 율령반포 : 17관등제 및 백관의 공복을 정비, 골품제도가 정비됨
- 불교의 공인(527) :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가 공인, 불교식왕명(법흥왕~진덕여왕)
금관가야(본가야)의 복속(532). 백제를 통해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수교
7) 진흥왕(540~576)
- 한강유역 차지 : 상류(단양적성비), 하류에 신주 설치(북한산비) → 당항성을 중심으로 중국과 직접 교섭
- 대가야의 복속, 함경도 진출(황초령비, 마운령비, 568)
- 황룡사의 건립, 화랑도의 정비, 연호사용(개국, 대창, 홍제)
-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함
- 관제의 정비 : 재정 업무 담당 관청으로 품주를 설치(565)
- 불교교단 정비(황룡사, 홍륜사 등의 사찰 건립), 국통(최초는 고구려에서 온 승려 혜량)→신라에만 존재
8) 진평왕(579~632)
- 관제 정비 : 위화부, 조부, 예부 등을 설치
- 수와 통교 : 원광법사를 통하여 수나라에 걸사표를 바침. 세속오계 : 원광법사가 화랑도에게 내린 규율
9) 선덕여왕(7C 전반)
- 당과의 통교
- 승려 자장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 9층 목탑을 건립(백제의 아비지)
10) 진덕여왕(7C 중반)
- 왕권강화: 선덕여왕 말기의 진골에 의한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 연호를 태화라고 함
- 관제 정비: 품주를 창부와 분리하여 집사부로 고침, 당과 교류 활발(나당동맹,648): 김춘추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군사 원조를 부탁, 왕이 지은 태평송을 비단에 새겨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을 시켜 고종에게 바침
- 중국식 복제와 연호 사용: 649년 처음으로 중국의 의관을 착용, 650년 독자적 연호 대신 중국의 연호를 받아들임
11) 무열왕
 12) 문무왕(7C) : 고구려 정복(668), 당군 격퇴(매소성, 기벌포) → 삼국통일
 13) 신문왕

 

 

 

● 가야의 성립과 발전


1. 전기가야연맹은 2ㆍ3c 김해부근의 금관가야(본가야) 중심으로 변한지역에서 성장,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풍부한 철의 생산과 해상교통을 이용하여 왜의 규슈지방을 연결하는 원거리 중계무역으로 성장ㆍ발달

2. 신라와 함께 토착세력이 이주민 세력을 통합하면서 발전

3. 4~5C초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전기가야 영역이 낙동강 서쪽연안으로 축소
→ 5C이후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대항하여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가야연맹의 형성
→ 고구려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신라ㆍ백제와 동맹하여 전쟁에 참여하기도 함
→ 6C 대가야는 중국남조에 사신을 파견하고 신라와 혼인동맹(522, 이뇌왕 + 법흥왕), 백제ㆍ신라와 거의 대등한 세력

4. 가야 연맹의 쇠퇴
- 전기 가야연맹의 약화: 4C초 백제와 신라의 팽창에 의해 약화 → 5C초 광개토왕의 공격으로 해체
- 후기 가야연맹의 약화: 6C 초반 백제와 신라의 압박 강화
- 백제와 연합하여 저항: 백제성왕이 이끄는 백제ㆍ가야ㆍ왜 연합군이 관상성에서 신라군에 패배(554)

5. 가야 연맹의 멸망 (중앙집권국가로 발전X)
- 금관가야 멸망(532): 법흥왕에게 금관가야가 항복, 대가야 멸망(562): 진흥왕에게 대가야 항복

6. 가야의 경제: 벼농사 발달, 토기 제작 기술의 보급(신라와 일본 스에키 토기에 직접 영향),
중계무역 발달(낙랑과 규슈지방 연결)

7. 유물과 유적: 함안 말이산 고분, 부산 복천동 고분, 창녕 계남리 고분, 고령 지산동 고분 등
- 독무덤ㆍ널무덤ㆍ돌덧널무덤 등 출토(돌무지 덧널무덤X), 철제 무기와 갑옷ㆍ수레형 토기ㆍ벽화 등 발굴
- [개황록]은 가야유민이 쓴 역사서로 후에 삼국유사에 인용됨

8. 김유신 등 금관가야의 유민들이 신라의 문화발전과 삼국통일에 기여: 우륵(가야금), 강수(유학),
김암(둔갑술) * 거문고(고구려의 왕산악이 중국 진의 7현금을 개량)

 

 

 

 삼국의 항쟁과 신라의 삼국통일

 

1. 고구려와 수의 전쟁 : 고구려가 먼저 요서지방을 공격, 을지문덕의 살수대첩(612)


2. 고구려와 당의 전쟁
1) 천리장성(7C) : 연개소문이 당의 침략에 대비 (부여성 ~ 비사성)
* 고려(덕종 ~ 정종, 11C) : 북방(거란과 여진) 침입을 대비 (압록강 ~ 도련포)
2) 연개소문, 양만춘 등이 안시성 대첩(645)에 의해 격퇴


3. 백제 멸망(660년)
1) 부흥운동의 전개(660 ~ 663)
- 주류성(복신, 도침), 임존성(흑치상지)에서 왕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를 일으킴
- 200여성을 회복하고 왜의 수군이 지원(백강전투)했으나 나ㆍ당 연합군에 의해 진압으로 실패
- 부흥운동 진압후 당은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문무왕을 계림도독으로 임명하과,
웅진에도 도독부를 설치하여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664)


4. 고구려 멸망(668년)
1) 부흥운동의 전개(668 ~ 671)
- 검모잠(한성ㆍ재령), 고연무ㆍ고연수(오골성)가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중심으로 부흥 운동 전개
- 신라의 후원으로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하였으나 안승이 신라로 망명하면서 좌절
- 당은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임명(674)


5. 나ㆍ당 전쟁(668 ~ 676년)
1) 원인(당의 지배 야욕) 및 결과
- 계림도독부 설치(663): 신라 땅을 지배하기 위해 경주에 설치 하고 문무왕을 도독으로 임명
- 웅진도독부 설치(664): 백제 땅에 설치 하고 부여융을 도독으로 임명 * 웅진은 지금의 공주
- 안동도호부 설치(668): 고구려 땅을 지배하기 위해 평양에 설치 하고 설인귀 임명,
기벌포전투 후 당군을 대동강 이남에서 완전히 축출 (평양 → 요동)
- 삼국통일: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의 영토를 차지(676)


6. 삼국통일의 한계성
1)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는 완전한 통일이지만, 영토적으로는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상실한 불완전한 통일(국경선 : 대동강 ~ 원산만 이남)
2) 외세 의존적이라는 한계
 

 

 

 

 신라의 시대구분

구 분 삼국유사 삼국사 왕권장악 수 상 정 치 형 태
박혁거세~지증왕 상고 상대 성골독점 상대등 귀족연합 정치(화백회의)
상대등 지위 강대
법흥왕~진여왕 중고
무열왕~혜공왕 하고 중대 무열계
진골
집사부
중시
(시중)
전제왕권 강화, 집사부 시중 권한강화
화백회의 기능약화, 상대등 권한약화
6두품 사회진출 활발 (집사부시랑)
선덕왕~경순왕 하대 내물계
진골
상대등 귀족 연합정치 재연, 왕위쟁탈전,
6두품세력의 몰락(신라비판세력화)

[삼국유사]는 불교식 왕명을 중심으로, 앞의 역사를 상고ㆍ뒤의 역사를 하고로 구분

[삼국사기]는 왕의 혈통을 기준으로, 상대ㆍ중대ㆍ하대로 구분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

  백제 부흥운동 고구려 부흥 운동
운동자 도침,복신(주류성ㆍ한산)
지수신,흑치상치(임존성)
→왕자 풍을 왕으로 추대
안승(한성), 검모잠(재령ㆍ한성)
고연무ㆍ고연수(오골성)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왕으로 추대
식민관청 웅진도독부(664)
(신라가 소부리주 설치(671) →
백제에 대한 지배권 확립)
안동도호부(668)-설인귀
과 정 200여 성을 회복
왜의 수군이 백제 지원(백강 입구까지 진출)
→나ㆍ당 연합군에 진압 → 부흥 실패
평양성 탈환
→신라의 도움을 받았으나 실패

 

 

 신라 왕의 칭호 • 거서간: 정치적 군장의 출현(군장)
• 차차웅: 정치적 군장과 제사장의 기능이 분리되면서 차차웅의 칭호 생성(제사장)
• 이사금: 철기를 가지고 온 석탈해 집단의 등장으로, 박ㆍ석ㆍ김의 3부족이 연맹하여 교대로 선출(연장자)
• 마립간: 김씨가 왕위 세습권을 독점하면서 왕권강화를 표시하기 위해 호칭변경(대수장)
• 왕: 부자 상속제와 6부를 개편하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면서 중국식 왕호사용

 

 

 신라 토지제도의 변화 * 녹읍(관직의 대가)ㆍ식읍(공로의 대가) ⇒ 수조권 + 역징발권 ☞ 귀족중심
1. 통일전: 녹읍(귀족) → 귀족들은 백성들에게서 조세와 공물을 징수하고 노동력까지 마음대로 징발
2. 신문왕: 녹읍폐지ㆍ식읍제한, 관료에게 녹봉대신에 주던 토지로 관료전 지급(수조권만 인정) ⇒ 왕권 강화
3. 성덕왕: 정전지급 → 왕토사상에 기초하여 일반 백성에게 토지 지급, 국가의 역역파악 강화의미 ⇒ 왕권 더욱 강화
4. 경덕왕: 녹읍 부활, 귀족 권력 다시 강화 ⇒ 왕권 약화

 

 

 발해

 

1. 698년 고구려 장군 대조영이 동모산 ‘돈화’ 에서 건국하고 국호를 “진”으로 칭함 ∼ 926 거란에 멸망

2. 발해에 관한 기록 [제발해 조아동동]
- 구당서(발해말갈전, 대조영이 고구려 출신이라 서술), 신당서(발해전, 대조영을 말갈인으로 서술)
- 제왕운기(이승휴): 최초 발해사 연구, 서사시로 구성
- 발해고(유득공): 신라 발해 南北國 주장, 발해사만 다룬 최초사서
해동역사(한치윤): 발해를 고,백,신,고려와 같은 비중으로 다룸
조선상고사(신채호): 발해, 신라 양국시대론
아방강역고(정약용): 발해사를 우리민족사로 다룸
동사강목(안정복): 삼국사기를 읽고 北國이 발해임을 밝혀냄, 삼한정통론 주장(이익, 안정복)
동사(이종휘): 단군 기자 삼한 후조선 본기와 따로<세가>편을 서술하면서 발해세가를 기자 부여 가야세가와 더불어 입전시킴

3. 발해가 우리민족이 세운나라 라는 증거
①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무왕: 고구려와 부여를 계승한 국가로 선언문왕: 고려국왕 대흠무라 표기)
② 당과 신라는 발해를 고구려의 후신국가로 인식
③ 발해기록 역사서(구당서, 신당서)
④ 지배층의 구성: 지배층(고구려인), 피지배층(말갈인) * 국민의 구성×, 연호의 사용×
⑤ 문화의 유사성 (굴식돌방무덤(정혜공주묘), 불상(이불병좌상), 온돌)
 

4. 발해의 대외관계

① 돌궐: 친교(교류) 
② 일본: 친교(교류) ← 신라 견제 목적, 발해가 적극적
③ 당: 초기(무왕) 적대, 후기(문왕) 친교 
④ 신라: 친선과 대립의 교차
* 발해 5도: 영주도ㆍ조공도(당), 일본도(왜), 거란도(거란), 신라도(신라)
#동경용천부가 일본도의 시발


5. 발해의 위대한 왕들



* 문왕때의 도읍이동: 동모산 → 중경 → 상경 → 동경(동쪽으로 국력신장)
성왕(8C말, 대화여): 마지막 상경천도, 중흥이라는 연호사용
* 남북국 비교: 발해건국 698(⇔신라 효소왕), 무왕(⇔성덕왕), 문왕(⇔경덕ㆍ혜공ㆍ선덕), 선왕(⇔하대)
* 성덕왕때 당의 요청으로 신라는 발해를 공격하여 대립, 후에 문왕대 신라도를 개설하여 교류
 
6.부흥운동 (* 장안국: 신라하대 김헌창의 난때 일시 건국된 나라)
열만화의 정안국, 흥료국, 대발해국, 대원국, 오사국, 고욕의저항 ⟷ 동란국(거란이 발해고지에 세움)

 

 

 고대국가의 중앙ㆍ지방제도

고려 (조선) 발해 백제 통신 담당사무
도병마사(의정부) 정당성 정사암 집사부 최고행정기관
이부 (조) 좌평 화부 인사 공훈
호부 (조) 좌평 재정 공부
예부 (조) 좌평 의례 외교
병부 (조) 좌평 국방 군사
형부 (조) 좌평 좌우방부 형사 노예
공부 (조) 사좌평(경비) 장부 예작부 토목 건축

 

구 분 고 구 려 백 제 신 라 통일신라 발 해
관 등 10여 관등(~형, ~사자) 16관등(~솔, ~덕) 17관등(~찬) 17관등(~찬)  
중앙관제 내평, 외평, 주부
(내무)(외무)(재정)
6좌평(고이왕)
22부(성왕)
병부 등 10부 집사부 등 14부(신문왕) 3성 6부(유교식-독자적 성격)
수 상 대대로 상 좌 평 선거 상대등(선거) 중시(임명) 대내상
막리지 내신좌평
합 의 제가회의 정사암회의 화백회의 화백회의 정당성
수도 5부 5부(도솔) 6부 6부 (사로 6촌의 전통계승) 상경
지방 5부(욕살)
→성(려근지,도사)
5방(방령)
→군(장)
5주(군주)
→군(수)
현(현령)
9주(총관→도독)
→군(태수)→현(현령)→촌(촌주),향. 부곡
15부(도독)→62주(자사)→현(현승)
특수구역 3경제
(통구, 평양, 재령)
22담로
(왕족파견)
2소경(사신)
(강릉,충주)
5소경(원주,충주,청주,남원,김해)-사신 파견 5경제
(고구려의 영향)
군사제도 평 시(성주, 족장)
유사시(대모달, 말객)
방령, 군장이 주관 서당,6정
(군주가 주관)
9서당, 10정 10위
(대장군,장군)

 

 

 귀족합의 기구 변천

삼국시대 발해 고려전기 고려후기 조선전기 조선후기
제가 회의(고)
정사암회의(백)
화백 회의(신)
정당성 도병마사 도평의사사 의정부 비변사

 

※ 고구려 신분구조: 가(부족장) → 호민(경제부유층) → 하호(농민) → 노비
cf) 고추가(전왕족, 왕비족 등의 왕권버금세력) = 백제(길사), 신라(갈문왕)
 
※ 감찰 기구 변천
사정부(통ㆍ신) → 중정대(발해) → 어사대(고려) → 감찰사(원간섭) → 사헌부(조선) → 도찰원(고종) → 감사원(현재)
 
※ 역대 최고 교육기관
태학(고구려, 소수림) → 국학(통ㆍ신, 신문왕) → 태학감(경덕왕) → 국학(혜공왕) →
주자감(발해, 문왕) → 국자감(고려, 성종) → 성균관(조선)

 

발해: 감정 도적 대주자 접사 (감찰-중정대, 도서관-문적원, 대학-주자감, 외빈접대- 사빈시)

 

 

 

 

 조세제도 및 삼국의 경제

 

1. 조세제도: 
당나라 때 확립된 
租(토지를 기준으로 생산물을(=곡물) 징수),(삼국시대엔 인두세 중심 (노동>토지생산성)
庸(호를 기준으로 노동력 제공),
調(호를 기준으로 지방특산물(=공물) 징수),


1) 조(租)
① 고구려(경무법 - 밭이랑), 백제(두락제 - 파종량), 신라(결부제 - 생산량),
통ㆍ신(농민에게 정전을 지급하고 조를 징수) 
⇒ 호마다 조는 곡식, 인두세는 포나 곡식을 징수
② 고려 - 태조(수조권상 공ㆍ사전 1/10, 소유권상 사전1/2ㆍ공전1/4)
③ 조선 - 과전법 하 1결당 30두(수등이척법) → 영정법 하 1결당 4두(양척동일법)
2) 용(庸) - 조선(16∼60세 정남의 농민이 부담 → 조선영조 균역법 군포1필, 결작2두)
3) 조(調) - 조선(방납의 폐단으로 대동법 하 1결당 12두)
 * 당이전은 삼국, 당영향받는 이후는 통일신라


2. 경제생활
1) 삼국의 경제생활
(1) 고구려는 토지보다 노동력의 다과를 고려하여 상ㆍ중ㆍ하호의 3등급으로 구분하여 수취
(2) 삼국의 무역은 4C이후 크게 발달, 대개 왕실과 귀족의 필요에 의한 공무역의 형태로 이루어 짐
(3) 신라는 한강유역 진출 이전에는 중국과는 고ㆍ백을 통한 간접 교역 형태


2) 통일신라의 경제생활
(1) 방직 기술(견직물, 마직물)과 공예품(금은 세공품, 나전칠기) 제조기술의 발달
(2) 귀족중심의 사치생활(금입택,사절유택,안압지) ⇒ 흥덕왕은 사치를 금하는 명을 내렸지만 실효는 없었다.
(3) 수공업은 어아주, 조하주, 능라 등의 비단부문에서 높은 수준을 보임
(4) 수출품: 금ㆍ은ㆍ인삼등 주로 원료, 수입품: 비단ㆍ서적등 주로 귀족들의 사치품ㆍ완제품
(5) 대당 교통로: 남양만~산둥반도, 영암~양자강입구, 최대무역항은 울산항 (※ 신라는 당항성)
(6)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 왕의 승낙을 얻어 전남 완도에 설치(828), 서남해안에서 활동
(7) 흥덕왕 때에 김대렴이 당에서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 쌍계사에서 차를 재배


3) 발해의 경제생활
(1) 농업: 기후조건으로 밭농사가 중심, 일부지역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짐
(2) 목축, 수렵: 돼지, 말, 소 양 등의 사육 활발. 솔빈부의 말은 주요 수출품 중 하나
(3) 수공업: 직물업, 도자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달
(4) 국제무역: 당(당이 산둥지역(덩저우)에 발해관의 설치), 일본(신라 견제를 위해 끝까지 우호관계 유지)
① 수출품 : 인삼, 금, 은, 모피, 녹용, 사향, 불상, 도자기
② 수입품 : 비단, 책등 귀족들의 수요품 (백성의 생활안정과는 무관)


4) 고려의 경제생활
(1) 태조 때부터 취민유도의 원칙에 입각하여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3등전(상ㆍ중ㆍ하)(불역전(상경전)/일역전/재역전)으로 나누고
조세율을 1/10로 하여 세금을 수취
* 녹비 퇴비 =>휴경지의 감소
(2) 건국초기에 파견된 금유ㆍ조장ㆍ전운사 등은 지방을 순회(상주X)하면서 조세관련 임무 담당(삼국시대“도사”와 비슷)
(3) 공물은 상공ㆍ별공(필요에 따라 수시로 거둠)으로 호를 9등호로 구분하여 수취 * 진상은 조선
(4) 전기의 상업은 도시를 중심으로 발달, 후기에는 시전규모가 확대되고 업종별로 전문화 되었다(O)
(5) 고려는 남부 5도에 12개의 조창이 있었고 전라도에 가장 많은 조창 존재


5) 조선시대 조세운반제도(조운제도): 조창을 설치해서 뱃길을 통해 세곡을 운반
(1) 전라도ㆍ충청도ㆍ황해도는 바닷길, 강원도는 한강, 경상도는 낙동강과 한강을 통해 서울의 용산과
서강에 있는 경창으로 운송
(2) 강원도의 소양강창(춘천)ㆍ흥원창(원주), 충청도의 공진창(청주)ㆍ가흥창(충주), 전라도의 덕성창
(용안)ㆍ법성포창(영광)ㆍ영산창(나주), 황해도의 조읍포창(강음)ㆍ금곡포창(배천)
(3) 평안도와 함경도, 제주도는 잉류지역 * 면세가 아니라, 징수하여 사신접대비ㆍ국방비 등에 충당
(4) 수령이 징수와 운반책임을 지며,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
(5) 국가재정은 세입표인 공안과, 세출표인 횡간에 의거해 집행

 

 

 신라 토지제도의 변화 * 녹읍(관직의 대가)ㆍ식읍(공로의 대가)(녹읍과 비슷한데 전쟁에서 확보한 토지 일부줌) ⇒ 수조권 + 역징발권(즉 실질적 지배) ☞ 귀족중심
1. 통일전: 녹읍(귀족) → 귀족들은 백성들에게서 조세와 공물을 징수하고 노동력까지 마음대로 징발
2. 신문왕: 녹읍폐지ㆍ식읍제한, 관료에게 녹봉대신에 주던 토지로 관료전 지급(수조권만 인정, 노동력x) ⇒ 왕권 강화
3. 성덕왕: 정전(민정문서에서 연수유답) 지급 → 왕토사상에 기초하여 일반 백성에게 토지 지급, 국가의 역역파악 강화의미 ⇒ 왕권 더욱 강화
* 왜 백성? 신라통일하면서 신라사람아니었던 사람의 땅에 세금과 역을 지급하라. 안그러면 땅 뺏겠다. 그래서 토지주인은 백성.
4. 경덕왕: 녹읍 부활, 귀족 권력 다시 강화 ⇒ 왕권 약화
* 경제는 꺽였으나.. 문화는 이때가 전성기...불국사 석불암 에밀레종 제작시작(혜공왕완성)

 

 

 

 토지의 종류

기 본 구 분 내 용
소유권
(남의땅)
공 전 왕실이나 관청 등이 소유한 국·공유의 토지 (1/4)
민 전(사전) 귀족이나 농민(정전) 등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토지 (1/2) ⇒ 지주전호 관계
수조권
(내 땅)
공 전 국가가 직접 수조권(수세권)을 갖는 토지 (1/10)
사 전 개인(관리)·사원 등이 수조권을 갖는 토지 (1/10) ⇒ 전주전객 관계
* 민전은 수조권을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수조권이 누구에게 귀속되느냐에 따라 사전일 수도, 공전일 수도 있다

 즉, 전주전객제는  지주와 관리와의 수조권관계

                        관리<-- 국가10

                                       ㅣ

                                      지주50

                                        ㅣ

                                        전호(소작농)100

 

 

 

 

 삼국의 사회와 신분

 

1. 관등수: 고(14), 백(16), 신(17)
2. 이원적 관등체계
- 왕경인은 경위제(17관등의 경위: 골품제 포함)
- 지방인은 외위제(11등급의 외위: 골품제 불포함)
3. 골(성골/진골)ㆍ품(6,5,4/321)ㆍ321은 평민化 (노비X)
4. 6두품: 중대(왕권과 결합하여 진골에 대항, 득난)
하대(반골품세력 + 지방호족 + 선종)
5. 골품은 개인의 정치적출세, 사회생활, 가옥, 복색 등이
다르게 규정되어 사회생활의 제약이 많음!

 

 신라의 골품제도
1) 성립: 신라가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삼국을 통일하는 과정 X, 통일전부터 존재O)에서 부 족장세력을 통합, 편제할 때 마련, 원래 골품은 8개였으나 무열왕 때 4개로 정비 → 신라하대에 동요

2) 특징
(1) 개인의 신분뿐만 아니라 그 친족의 등급도 표시, 개인의 사회활동과 정치활동의 범위를 엄격히 제한
(2) 통일 이후에 3두품에서 1두품은 소멸(평민과 동등), 17등급까지 존재
(3) 관등의 승진에 “상한선”은 있으나 하한선은 없고, 하급신분이 상급신분보다 높은 관등을 담당할 수도 있었다
(4) 신분에 따른 관직 입명시 제기되는 하급신분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중위제(重位制)를 실시.
(5) 중위제 (중시X)를 통해 제한된 관등을 넘지 않고도 승진을 계속할 수 있었음(호봉의 개념)
(6) 4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는 방의 길이와 너비가 15척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7) 복색은 골품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관등”에 따라 결정
(8) 고구려 귀족은 6두품의 골품을 받았고, 백제 귀족은 5두품의 골품을 받았다.

3) 내용
(1) 성골: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소멸
(2) 진골: 성골이 소멸된 이후에 왕위를 계승(무열왕 이후)
① 장관 및 군대의 최고지휘관 등 요직을 독점(집사부 시중, 화백회의 의장인 상대등(귀족장))
② 모든 관등에 등용, 1관등부터 5관등은 독점 (처음부터 받는 관등은 대아찬이다.✕)
③ 모든 공복을 착용, 자색은 독점, 골품제도에 집착 => 6두품의 개혁요구에 반대
④ 고구려와 가야유민은 편입되는 경우가 있음. 백제×
⑤ 집사부시중은 2위 이찬에서 5위 대아찬까지 임명 (이벌찬 X)
(3) 6두품 (최치원, 설계두, 강수): “득난”이라 불림
① 학문과 종교 분야에서 활동, 도당유학생(숙위학생)의 대부분을 차지
② 아찬까지만 승진(대아찬×) 할 수 있었으므로, 신라 상대부터 이미 골품제에 불만을 가짐
③ 6두품은 법제적으로 집사부의 시중은 될 수 없음, 시랑까지 됨(5두품도 시랑자격 有)
④ 6두품은 법제적으로 중앙장관이 될 수 없었다
⑤ 6두품은 법제적으로 지방장관(도독)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 지방장관도 진골이 독점.
⑥ 중대에는 왕권과 결합하여 왕권의 전제화에 기여 (왕의 정치적조언자 역할, 집사부 시랑직)
⑦ 하대에는 호족과 결합: 신라사회 비판세력으로 부각(능력중심의 인재등용(과거제)과 불교중심의
사회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유교정치 이념을 제시 * 김운경: 최초의 빈공과 합격

* 신라중대: 김대문(진골) - 계림잡전ㆍ화랑세기ㆍ고승전ㆍ한산기 / 설총(6두품) / 강수(6두품)

===>통일신라 역사서

* 신라하대: 최치원(6두품) - 시무10조ㆍ토황소격문(그후 신라로 돌아옴 그때가 진성여왕--원종/애노/적고적--삼대목(진성여왕 남편둘이 지음))ㆍ4산비문(탑비 4개썼다--신라하대, 유불도에 다 능함)계원필경ㆍ제왕연대력 / 최언위 / 왕거인

                         

 삼국의 사회생활모습
1) 고구려인의 생활모습
① 절을 할 때 한쪽다리만 꿇고, 걸음을 걸을 때도 뛰는 듯이 행동을 빨리한다
② 반역ㆍ반란자는 화형 후 목을 베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③ 적에게 항복ㆍ패한자는 사형, 절도한 자는 12배 배상
④ 지배층은 왕족인 고씨와 5부족 출신의 귀족으로 형성
⑤ 남의 소나 말을 죽인자는 노비로 삼거나, 빚을 갚지 못한 자는 그 자식을 노비로 삼음
⑥ 혼인 풍습은 형사취수제와 서옥제(데릴사위제)
⑦ 신부집에서 예물을 받은 때는 딸을 팔았다고 부끄럽게 여겨 돼지고기와 술 이외의 예물은 주지 않았다
⑧ 지배층은 정략결혼, 피지배층은 남녀간의 자유로운 교제를 통해 혼인

2) 백제인의 생활모습

① 키가 크고 의복이 깔끔하다는 중국의 기록
② 반역한자나 전쟁에서 퇴각한 군사와 살인자는 목을 베었다
③ 남의 물건을 훔친자는 귀양 보냄과 동시에 2배 배상
④ 관리가 횡령을 했을 때에는 3배를 배상하고, 종신토록 금고형
⑤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형성, 한문구사에 능숙 (부여씨 + 8성귀족)
⑥ 투호와 바둑ㆍ장기와 같은 오락은 지배층의 놀이(일반인X)

 

 

 벽화

벽화 O 벽화 X
쌍영총, 무용총, 각저총, 강서대묘, 정효공주묘, 삼실총
어숙묘, 송산리 6호분
장군총, 천마총, 호우총,
무령왕릉, 정혜공주묘
서울 석촌동 고분

 

 

 

 삼국의 고분 (크게보면 신라빼고 돌무지--> 굴식돌방)

1. 고구려
1) 초기: (계단식--청동기는 아님)돌무지무덤(=적(누적)석총)
- 벽화X, 껴묻거리(부장품)X ⇒ 도굴 당함
- 시기: 청동기(고조선 여대시의 강상묘ㆍ누상묘) ~ 삼국시대
장군총: 동방의 피라미드라(큰규모), 화강암을 가공후 피라미드형으로 쌓음(백제한성시대 무덤양식에 영향)


2) 후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고분) →“돌로 널방을 짜고”,“널방과 앞방을 구분(전실과 현실)”
- 벽화발견(초기에는 생활모습 ⇰ 후기 사신도와 같은 추상적으로 변함), 부장품×
*현무: 사신도의 하나로 북쪽 방위신
- 강서대묘(2004년에 북한 것으로 세계문화유산에 지정), 강서(수산리)고분: 일본다카마스고분벽화

- 쌍영총: 서역계통의 영향(여인도, 우차도, 무사도), 팔각기둥 [쌍여우무서, 무용수, 각씨천, 강사]

- 무용총(무용도, 수렵도), 각저총(씨름도, 천문도)

2. 백제

1) 한성(위례성) 시대---고구려초기랑 똑같다
(1) (계단식) 돌무지무덤 󰃚 서울 석촌동고분(벽화X,부장품X)
⇒ 고구려 유이민이 백제를 건국한 사실 입증

(2)굴식돌방무덤: 가락동 고분, 방이동 고분 (석촌동)


2) 웅진시대(규모가 크고 웅장, 소박)

(1) 굴식돌방무덤: 벽화○, 부장품X, 송산리 1~5호 고분


*근데 후기 굴식돌방으로 안넘어간 2개!!
(2) 벽돌무덤(전(벽돌)축분): 중국남조의 영향(북조X, 고구려X) *벽화는 없지만 벽돌개개의 무늬는있다.
① 무령왕릉 (벽돌영향 남조 양나라): 껴묻거리 발견, 벽화는X
② 송산리 6호분벽화○(사신도, 일월도), 껴묻거리X

3) 사비시기(규모가 작음, 세련)----이땐 다 굴식돌방

(1) 굴식돌방무덤: 벽화○, 부장품×, 능산리고분(금동대향로 출토)
(2) 돌무덤, 구덩식 돌곽무덤(돌덧널무덤)

3. 신라

1)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규모가 큼, 마립간시기의 묘제, 주곽+부곽, 단장묘(무덤을 합치는 합장도 안됨.), 벽화×, 부장품○(도굴이 힘드니까...) /// 굴식돌방무덤과 비교유형

- 천마총(155호분): 천마도(마구에 그린 그림--벽화아님), - 황남총

- 호우총: 고구려와 신라의 긴밀한 관계 입증(호우명 그릇 발견)

2) 굴식돌방무덤: 통일 이전부터 신라에서도 만듦, 합장○ 벽화○(벽있으니), 부장품× 󰃚 어숙묘


4. 가야

1) 토광묘(움무덤), 석곽묘 등이 주류. 후기에는 석실분이 많이 축조, 순장풍습○
2) 고령 지산동 고분군, 고령 고아동 고분(벽화○)

5. 통일신라 (⇒ 벽화X)

1) 화장불교의 영향, 백제부터 계승 → 통일신라때 유행 → 16세기이후 침체 󰃚 문무왕릉
2) 소규모 굴식돌방무덤(세련): 고구려와 백제 영향, 12지신상 조각(도교의 영향) 󰃚 김유신묘ㆍ성덕대왕릉ㆍ괘릉 

6. 발해 (고구려-/ 혼합- ) 문왕의 둘째 넷째딸

1) 정공주묘(육정산고분): 굴식돌방무덤(고구려 영향), 돌사자상 발견, 벽화 X, 모줄임천장구조
2) 정공주묘(용두산고분): 벽돌무덤(당의 영향)--평행고임천장(고구려 모줄임의 일종), 벽화(12인물상, 도교적 요소), 봉토 위에 탑을 만듦, 껴묻거리 발견

7. 특징

1) 삼국은 모두 굴식돌방무덤을 축조
2) 서울 석촌동 고분은 고구려의 유이민이 백제를 건국한 사실을 입증
3) 신라는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굴식돌방무덤으로 변하였다.
4) 12지 신상은 통일신라시대에 시작되어 고려와 조선의 왕릉에 계승 (굴식 돌방무덤)
5) 무령왕릉, 송산리6호분, 정효공주묘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 [벽 무 효 송]
6) 신라의 무덤에서는 껴묻거리가 발견될 가능성이 많음.(돌무지덧널무덤)

 

 

 우리나라 금석문

1. 주요 금석문의 순서 [ 영 울 단 북 창 황 마 남 임 ]

* 낙랑 점제현 신사비(85): 현재 한반도에서 발견된 비석 중 가장 오래된 비석. 산신을 제사한 기록,

낙랑군 지역으로 비정하는데 결정적 근거. 일부 이설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존재

* 광개토대왕릉비: 한강의 유역의 차지와는 관계없음. 중국집안현 19C 농부에 의해 발견, 삼국의 대외관계 증명
평양천도 이전에 건립(414, 장수왕 2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이용, 지봉유설에서는 고구려유물이 아닌
여진족의 금나라 시조비로 오해

* 영일냉수리비: 눌지왕 27년 또는 지증왕 3년으로 추정, 이두의 성립시기와 성립과정을 추정하는 단서

* 진흥왕 순수비: 중앙집권이후 영토확장을 알려주는 금석문으로 진흥왕의 중앙관제와 지방제도를
알 수 있음 (나제동맹 결렬이후부터 순수비 건립)

 

 

 민정문서 (신라장적, 신라촌락문서)

 

1) 목적: 조세 수취와 노동력 징발의 기준을 설정하기 위해. 귀족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2) 통일신라 때 문서로 일본 동대사 정창원(도다이사 쇼소인)에서 발견됨. * 삼국시대×

3) 조사지역: 서원경(청주) * 중원경(충주)×
- 자연촌락의 기반 위에 행정촌을 편제하였다.
촌주(파견된x, 토착세력)가 자연촌 단위로 매년 변동사항을 조사하여 3년마다 다시 작성, 수취는 매년 이루어 짐
- 재산 정도에 따라 호를 나누어 곡물과 포를 거두었다.

4) 촌주
- 지방의 토착세력을 중앙에서“임명”. * 지방관 파견×
- 여러 개의 자연촌락을 관할 ┳ 혈연중심의 자연촌락마다 촌주가 임명 ×
                                       ┗ 촌락마다 민정문서의 작성 ○
- 직역의 대가로 촌주위답을 받았다(보수가 있음) → 고려시대에 외역전으로 계승
- 촌주는 매 촌마다 있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촌을 관할하는 촌주. 일부는 호족으로 성장

5) 내 용
- 민정문서는 촌락단위의 문서로 인구ㆍ가축의 수, 토지면적과 소유관계, 지역특산물 등은 알 수 있으나, 마을에서 내는 세금량, 호별 토지 소유량, 토지의 증감상태 등은 알 수 없다
- 통일신라 시대에 당시 촌락의 경제상황과 국가의 세무행정을 알 수 있다.(생활상황✕)
- 사람(인구): 남녀별로 구분하고, 연령을 기준으로 6등급(평민, 노비, 어린이, 노인 포함)으로 구분
* 남자나이기준 (o)
호구:“사람(人丁)”의 많고 적음을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파악(재산×, 토지×)
* 생활수준 알수있다(o)
- 토지: 연수유답(=정전, 가장많은 비중)(왕토사상이 있어도 개인토지가 있다는 증거, 왕토사상은 세를 거둘 근거일뿐), 내시령(내시령꺼)답, 관(관청)모답, 촌주위답(촌주직역의 대가), 마전(말공동경작)
- 소, 말, 뽕나무(유실수), 잣나무(유실수), 호두나무, 오동나무, 토산물 등의 기록 *적전X, 궁방전X, 식읍X
- 토지보다 노동력을 가장 중요시 함

 

 

 지역관련 정리

주요 지역 내 용
함경도 • 원산: 북관대첩비(18C), 강화도 조약(원산 개방), 원산학사(1883), 원산노동자총파업(1929)
충청도 • 단양: 구석기 유적(금굴, 상시, 수양개), 신라 진흥돵의 단양적성비
경상도 •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고려 후기), 부석사 소조아미타여래좌상
• 울주: 천전리 바위그림, 대곡리 반구대 바위그림
• 안동: 신세동 7층전탑(塼塔, 통신), 봉정사극락전(현존, 최고의 목조건축, 려말),
병산서원, 도산서원, <징비록: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
• 부산: 신석기 패총, 김해 조개더미, 가야 유적지, 조선 왜관 설치, 임시정부의 백산상회,
6ㆍ25중 임시 수도(발췌개헌)
제주도 • 제주빌레못동굴, 삼별초의 난, 탐라총관부, 잉류지역, 이제수의 난(19세기)
강화도 • 신라하대에 군진 세력의 하나인 혈구진이 있었음
• 조선시대 실록을 보관하던 강화도 마니산 사고
• 조선시대 왕실에서 초제를 지낸 강화도 마니산
• 개항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의 침입을 받았던 정족산성과 문수산성
• 정제두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양명학파를 형성한 장소
• 1876년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곳(연무당):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산성 內

* 의주는 청천강이 아니라 압록강변에 위치한 지역이며, 고려의4도호부에도 속하지 않는다. 청천강변에 위치한 고려의 도호부는 안북 도호부(평안남도 안주)다.

 

주요 지역 내 용
중원경
(충주)
• 삼국시대: 5C장수왕에 의해 중원고구려비 설립
• 6C까지 고구려 국원성으로 불림
• 6C 중반 진흥왕이 진출하여 국원소경을 설치하였고, 경덕왕 이후 중원경으로 불림
• 다인철소(용인)가 부근에 있었음(고려)
• 몽고 침입시 김윤후와 특수행정구역 소속민들이 적극 항전(충주성전투)
• 조선후기 가흥창이 있어 경상도 북부 고을의 조세를 이 지역으로 운반
• 임진왜란 때 신립이 왜군에 대항하여 싸우다 전사(탄금대)
위례성
(한성)
• 백제 초기 수도(가장 오래 유지)
• 몽촌토성, 풍납토성, 석촌동 돌무지 무덤
• 아차산성: 개로왕, 고구려 온달 장군
웅진
(공주)
• 공주 석장리 유적지(구석기 유적)
• 삼국시대 초기 백제가 마한으로부터 정복 → 웅진시대 백제 2차 도읍지
• 넓은 지역에 걸쳐 고분군 발견: 공주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사마왕)
• 후삼국시대 당이 공주에 웅진도독부 설치
• 고려 명종 대 공주명학소의 난(망이ㆍ망소이의 난)을 계기로 충순현으로 승격
• 조선 동학 농민 운동 시 공주 우금치 전투
사비
(부여)
• 정림사지 5층석탑
• 능산리 고분군(굴식돌방, 작고 세련). 백제 금동향로(용봉 봉래산 금동향로)
• 창왕명 석조 사리감
※익산: 무왕의 천도 시도, 익산미륵사지 석탑
개경
(개성)
• 고려 신종(1198) 대 최충헌의 사노 만적이 난을 일으켜 신분해방을 꾀함
• 성종 대 3경중 하나로 지정
• 송도 3절: 황진이, 서경덕, 박연폭포
• 관음사, 만월대(고려 왕궁터), 고려박물관(옛 고려 성균관)
• 고려 충신 정몽주가 숨진 선죽교, 왕건왕릉, 공민왕릉
- 현종때 강감찬의 건의로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여 개경에 나성을 축조하였다  - 2016 9급 교행 


• 대각국사 의천이 창건한 영통사
• 6ㆍ25전쟁 중 미국과 북한 사이에 휴전 협정이 개최된 곳.
서경
(평양)
• 상원군 검은모루(구석기), 평양 남경유적(신석기, 청동기 농경관련)
• 고조선, 고구려 5C장수왕의 천도로 역사적인 고도(古都)
• 고려의 분사제도, 1135년의 묘청의 난, 1279년 원(元)의 동녕부 설치
• 2004년 유네스코문화유산(고구려 고분-강서고분, 쌍영총 등)
• 보통문(조선 전기), 단군 무덤(최근)
•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성전투¹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킴
• 고려시기 최광수가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고려 정종은 평양천도 계획
• 무신기 서경유수 조위총의 반무신 난을 일으킴. *김보당은 동북면병마사
• 평양성전투²임진왜란 때 조ㆍ명연합군과 왜군과의 사이에 벌어졌던 공방전
경주
(금성)
•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경주 역사지구/ 석굴암,불국사)
• 유적의 성격에 따라 모두 5개 지구로 구분
-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인 대능원지구,
-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

 

 

주요 지역 내 용
요동 • 고조선/고구려(광개토대왕, 안시성싸움, 천리장성)
• 발해 선왕 / 고려~조선초 요동수복운동
• 일본의 차지(시모노세키조약) → 삼국간섭(요동반환) → 포츠머스조약(일본 차지)
• 제2차 대전 후 중국 영토
요서 • 고조선 / 백제 근초고왕: 송서 양서
산둥 • 통일신라(신라방, 신라소, 신라원, 신라관), 장보고의 법화원
• 발해(8세기 초 무왕 공격, 8세기 후 문왕 교류, 발해관 설치)
• 19C 독일 차지 →1915년 일본 차지 →5ㆍ4운동 발생(1919)→ 워싱턴 회의(1921), 중국에 반환
만주
(간도)
•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요, 금, 청, 중화민국, 만주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
• 무장독립운동 격전지(1910년대 - 1920년대 - 1930년대 - 1940년대)
• 민족의 시련 : 간도참변(1921)
• 기원전 37 ~ 기원후 668년 고구려 영토
• 698 ~ 926년 발해 영토
• 1712년 청나라가 백두산정계비 세워 조청(朝.) 경계 설정
• 1909년 청와 일본간의 간도협약으로 중국 귀속
• 1932년 만주국 수립
• 1945년 일본 패망 후 중국군이 간도지역 점령
• 1952년 옌벤 조선족 자치구, 1955년 엔벤조선족 자치주
• 1962년 북한과 중국 비밀리에 백두산 천지 분할, 북한은 간도 요구 중단
• 2002년 동북공정 2003년 중점 과제 중 하나로 간도문제 선정
북만주 • 밀산부의 한흥동(최초의 독립운동 기지, 이상설ㆍ이승희) 한민학교
서간도
(남만주)
• 삼원보(신한민촌), 경학사→부민단→한족회→서로군정서(공화주의)ㆍ대한독립단(복벽주의),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 육군주만 참의부
북간도 • 용정촌(서전서숙, 이상설), 명동촌(명동학교, 서일), 간민회→대한국민회→국민회군(안무),
대한독립군(홍범도, 군무도독부(최진동), 중광단(서일) → 대한정의단 → 북로군정서(김좌진)
연해주 • 발해 차지 → 숙신(肅愼)·말갈(靺鞨)·여진(女眞) 차지→중국 차지
• 1860년 베이징조약(러시아 차지)
• 1905년 이후 무장투쟁의 중심지 → 13도의군, 성명회, 대한광복군정부(1914), 대한국민의회(1919)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 한민회(해조신문), 권업회, 신민단, 경비대, 혈성단
• 민족의 시련: 자유시참변(1921,대한독립군단),1937년 한인 강제이주(중앙아시아)
• 1991년 북한의 나진ㆍ선봉지구무역 자유지대 연결
상하이 • 동제사 → 신한혁명당 → 신한청년당, 대동보국단(시베리아 간도 국내의 연락기능)
미 국 • 대동보국회, 한인합성협회+공립협회=대한인국민회, 흥사단(LA), 공립협회(안창호,SF)
신민회(하와이,1903, 홍승하ㆍ윤병구 중심, 동족단결ㆍ민지개발ㆍ국정쇄신)


- 대조선국민군단(1914, 하와이) : 박용만, 군사훈련 실시

 

 

 

주요 지역 내 용
경복궁
(법궁, 북궐)
조선의 정궁
1) 배치: [주례] 의거 - 좌묘우사, 전조후시
① 좌우대칭 일직선 구조
② 주산 -백악(북악산), 안산- 목멱산(남산), 좌청룡-타락산, 우백호 - 인왕산
2) 경복궁 앞 육조 거리 조성
① 왼쪽- 의정부, 이조, 호조, 한성부 ② 오른쪽- 예조, 병조, 형조, 사헌부 등
3) 정문: 광화문
4) 근정전
① 정전으로 조회, 세자 책봉, 사신 영접 등 공식적인 행사 진행
② 문관은 동쪽의 일화문, 무관은 서쪽의 월화문을 통해 근정전에 들어감
5) 사정전(편전) : 왕의 집무실
6) 내전 공간 : ① 강녕전(임금 거처) ②교태전(왕비 거처)
7) 경회루; 중국 사신 접대 연회장으로 사용,
8) 태조때 건립, 임란 때 소실, 대원군 복원(원납전ㆍ결두전ㆍ묘지림ㆍ통행세 부과)
9) 명성황후 시해사건, 일제에 의해 훼손
창덕궁
(동궐)
1) 태종때 건립, 이궁(離宮)으로 출발, 임란때 소실, 광해군 중건
2) 우리나라 궁궐의 비정형적 조형미(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
3) 돈화문: 정문
4) 인정전: 정전,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5) 선정전: 왕이 평소에 국사를 논하는 곳(청기와)
6) 희정당: 왕의 침실이 딸린 편전, 왕이 일상적인 업무를 보다가 이후 어전 회의실로 사용
7) 대조선: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 침전과 왕의 침전 배치
8) 주합루: 창덕궁 후원의 왕실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 2층 열람실 건물로 조선후기
왕과 신하들이 학문과 정사를 논하던 곳(정조 설치).
9) 연경당: 순조 28년, 왕세자인 효명세자가 세운 양반 저택
10) 후원: 부용정(+자형 정자), 존덕정(정조의‘만천명월주인옹자서’기록)
11) 기타: 낙선재 * 경복궁을 중심으로 궐(경희궁), 궐(경궁)
경운궁
(덕수궁)
1)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개인저택 → 임란때 선조의 행궁으로 사용→ 광해군이
경운궁으로 명칭 →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 정문: 대한문
2) 일제강점 이후; 고종이 여생을 보낸 궁. 고종 승하후 주로 빈객의 접대장소로 이용
3) 석조전 : 우리나라 최고의 서양식 건물로 미소공동위원회의 회담장소로 사용

 

 

 

 

고려 교육제도 (유학)

1) 초기(성종)
⑴ 교육입국조서의 반포(성종): “교육이 아니면 인재를 얻을 수 없다.”
* 갑오개혁 이후 고종의 교육입국조서 반포(1895) : 국가의 부강은 신민의 교육에 있다.
⑵ 향교 설치(지방): 유학교육기관, 주요 군현에 설치 *조선은 모든 부, 목, 군, 현에 하나씩 설치
⑶ 국자감(국학)의 정비(설립): 중앙, 귀족자제 대상
① 비서성(개경), 수서원(서경)이라는 학문연구소의 설치 (*비서성은 분사제도가 아님)
② 유학부(경학부)는 신분별 입학 ⇒ 국자학(3품이상)ㆍ태학(5품이상)ㆍ사문학(7품이상)
기술학부(잡학부)는 교과별 입학 ⇒ 율학ㆍ서학ㆍ산학(8품 이하) ⇰ 유학부 + 기술학부 = 경사6학
③ 평민은 국자감에 입학하여 기술학만 학습 = 서민은 국자감에 입학하여 기술학만 학습(유학은 학습X)
④ 국자학(3품이상)과 태학(5품이상)에 입학하는 사람에게는 공음전과 음서제의 특전 부여
 율ㆍ서ㆍ산학 이외의 기술교육은 해당관청 담당 ⇒ 조선은 모든 기술교육을(중앙과 지방의)해당관청 담당
⑥ 향리의 자제는 사문학에 입학하여 유학을 교육받을 수 있음
⑦ 국립대학은 과학기술 발달에 영향을 주었다

2) 중기 : 사학의 발달

⑴ 배경 : 지공거가 설립(조선에는 없음)
⑵ 대표적 : 9재학당 (문헌공도: 최초, 최충이 설립, 사학의 효시) ⇒ 사학12도의 융성
⑶ 결과 : 관학(국자감)의 침체, 문벌중시의 풍토 만연

3) 관학 진흥책 : 실패해서 사학이 발달

⑴ 배경: 사학의 발달(9재학당)에 의한 관학의 침체 ⇒ 침체된 관학의 진흥을 통한 왕권강화의 추진
⑵ 내용: 국자감×, 9재학당×
① 숙종: 서적포 설치 → 목판 활자로 서적간행 활성화 *서적: 공양왕때 주자와 금속활자 인쇄 담당
② 예종: 국자감 → 국학(개칭), 국학 내 7재 설치(전문강좌, 강예제에서 무술교육),
양현고(장학재단→관학 경제기반강화), 청연각·보문각(도서관 겸 학문연구소)
③ 인종: 향교를 증설, 중앙교육 강화를 목적으로 경사6학 정비(국자학, 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산학),
김부식의 등용

4) 후기 : 위축된 관학 교육을 다시 진흥 하는 데 힘씀 (* 장학제도: 학보, 광학보, 양현고, 섬학전)

⑴ 충렬왕 : 섬학전(양현고의 부실을 보충) 설치, 국학이 개칭된 성균감을 성균관으로 개칭, 
홍사번이 건의한 평민 18사 수용 (위민정치실시), 문묘 재건립(공자 사당), 
경사교수도감 설치(경전과 역사에 능한 교수들을 도감에 소속시켜 7품이하의 하급관리(참하관)를 교수)
⑵ 공민왕 : 성균관의 부흥(기술학부를 없애고 순수한 유교 교육기관으로 개편하여 유교교육을 강화)
 

조선 교육제도 (유학)

1) 초등교육기관: 서당
2) 중등교육기관: 중앙에 4부 학당/ 지방에 서원ㆍ향교(군현의 인구비례에 따라 정원책정, 교수ㆍ훈도를 파견)
- 향교: 모든 군현에 설치하여 수령이 관리, 평민입학 가능, 학업우수자 소과의 초시 면제 특혜
3) 고등교육기관: 성균관(태학지, 청금록, 권당)
- 성적우수자 대과 초시면제, 학업성적 300점이상시 관시 응시 기회부여
4) 유학중심교육: 기술학인 잡학은 천시되었고, 무신을 위한 교육시설은 없었다.

 

 

 한국문화의 일본전파

 

1. 신석기시대 ↠ 조몽토기 문화, 청동기시대 ↠ 야요이 문화, 가야(4C) ↠ 스에키 문화

2. 삼국시대(6~7C) ↠ 야마토정권의 성립, 아스카 문화


*백제는 학문// 고구려는 그림// 신라는 물과관련

1) 백제 : 가장 큰 영향 (대부분 이름이 두 글자 이상, 불상)
- 아직기 : 4c 근초고왕 대 일본 오진 태자의 스승(한자를 가르침.)
- 왕인: 4c 근초고왕 대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고 가르침
- 노리사치계: 6c 성왕 대 불경과 불상 전파(성왕이 불교의 완성), 고류사 미륵반가사유상, 호류사 (백제)관음상 제작
- 아좌태자 : 쇼토쿠태자의 초상화를 그림
- 관륵(관측) : 7c 무왕 대 천문, 지리 등의 기술학을 일본에 전파
- 혜총 : 쇼토쿠태자의 ‘스승’
- 5경 박사(단양이ㆍ고안무)ㆍ역박사ㆍ의박사ㆍ채약사(제약기술자)등이 건너감, 백제가람양식

2) 고구려(이름이 두글자, 고분)

- 담징 : 종이와 먹의 제조방법을 전함, 맷돌의 제작법, 호류사 금당벽화를 남김
- 혜자 : 쇼토쿠태자의 “스승” (쇼토쿠태혜자)
- 도현 : 일본세기의 저술
- 다카마스고분의 벽화(신라의 수산리 고분 벽화와 흡사)
- 혜관 : 삼론종을 전파하였다.
3) 신라(배,뚝) : 축제술, 조선술, 도자기 제조법 전해준 것으로 기록되어짐.

5. 통일신라시대(처음에는 성행하지 못하였으나 8세기에 성행) ↠ 하쿠호 문화 (아스카랑 혼동마라)

1) 원효, 강수, 설총 등의 불교, 유교 문화의 전파
2) 화엄사상 : 심상에 의해 전해져 일본 화엄종을 일으키는 데 많은 영향

6. 조선후기(임진왜란) ↠ 에도막부 문화

1) 성리학(주리론) : 이황을‘동방의 주자’라고도 함 → 일본 국학 발달에 큰 영향
2) 도자기 기술 : 임진왜란을‘도자기 전쟁’이라고 함
* 도자기 제조법을“전해준 기록이 있다”고 나오면 신라, 그냥 “어느 나라에서 전해졌나?”고 나오면 조선후기(임진왜란)

 

 

 호국신앙 (우리나라의 특징)

 

1. 불국토 사상(왕땅 = 부처땅) ↱ 중국의 신민이라는 승려가 자장(계율종)에게 권유

 

2. 황룡사 9층 목탑: 자장의 건의로 선덕여왕이 건축(몽고 3차 침입때 소실), 인왕경, 팔관회

* 황룡사 자체는 진흥왕때

 

3. 왕흥사(백제무왕), 감은사(문무왕때)- 만파식적 고사(호국 / 신문왕전제왕권 / 신라평화상징)

 

4. 세속오계(원광): 사친이효 / 사군이충 / 임전무퇴 / 살생유택 / 교우이신(진평왕)

 

5. 百高座會: 인왕백고좌도장, 고려때 호국신앙적 불교행사

 

6. 화랑도: 화랑(진골출신 자제) + 낭도(6두품이하 평민) ⇒ 계급간의 갈등조절ㆍ완화기능(귀족 ~ 평민)

① 군사적 단체(=고구려의 경당) 

② 화랑정신(최치원 - 난랑비문, 세속오계, 임신서기석)

③ 사회중견인 양성기능 

④ 삼국통일에 크게 이바지했으나 통일 후 기능약화

⑤ 삼한 이전부터 자발적으로 모여 수련하다 진흥왕이 제도화 공인 (*cf. 불교의 대중화와는 관련X)

⑥ 화랑도의 3대 수련: 상마이도의(서로 교감하고 결의, 공동체의식)

상열이가악(노래와 풍류를 통해 젊음발산, 전인교육)

유오산수 무원부지(산과 물을 직접 다니며 심신수련, 애국심함양)

⑦ 최치원은 조선상고사의 낭가사상에서“국선화랑은 진흥왕이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보고 낭가사상의 원류를 단군에서 찾고 있다.

 

※ 최치원 사산비문 [숭 진 난 낭]

난랑비문(화랑도) / 숭복사창건비문(지리도참) / 낭혜화상비(골품) / 진감선사비(유불선복합)

 

 

 

 불교 전파

 

고구려 보덕 백제에 불법을 전하고 열반종 개창(연개소문의 도교 장려에 대항)
혜자 일본 쇼오토쿠태자의 스승
담징 일본 호류사벽화, 먹, 붓, 맷돌, 5경 전함
혜관 일본에 삼론종전파
혜량 신라불교 교단 정비, 진흥왕이 신라의 국통으로 삼음
도현 일본세기 저술
소수림왕전진에서 순도가 전파  (고구려가 백제보다 10년빠름)
백제 왕인 일본에 논어,천자문 등 한학전함
아직기 일본 토도치랑의 스승, 일본에 한자전파
노리사치계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불상을 전함(성왕)
아좌태자 쇼오토쿠태자의 초상을 그림(아쇼초)
단양이,고안무 일본에 오경박사, 유학을 전함
혜총 일본에 계율종을 전함
관륵 천문, 지리, 둔갑술을 전함
침류왕동진에서 마라난타가 전파
신라 원광 수에서 열반종, 세속오계, 걸사표(진평왕)
자장 당에서 계율종 전함, 선덕여황에게 황룡사 9층목탑 건립을 건의
심상(통일신라) 일본에 화엄종 전함
의상 해동 화엄종의 시조
혜초 인도 기행문 저술(왕오천축국전)
눌지마립간고구려에서 묵호자가 전파이차돈의 순교로 법흥왕이 공인 (공인은 좀 늦음)

 

 고대 불교

1. 성격

1) 현세구복적 : 내세적× (정토종(=아미타 신앙)은 내세적)

2) 초부족적, 샤머니즘족 ⇒ 불교수용 후에도 원시신앙의 계속

 

2. 목적 : 왕권의 강화(중앙세력의 사상적 기반) - 왕즉불사상

 

3. 시기별 (소수림왕침류왕(고구려보다 12년 늦음)눌지왕(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

 

1) 삼국시대: 삼국은 모두 왕실과 귀족의 환영을 받으며 수용되어 왕권강화와 귀족의 특권을 뒷받침 해줌

                삼국시대에는 승려들의 금욕적 생활을 강조하는 계율종이 가장 발달. 교리보다는 계율의 중시

 

⑴ 고구려: 대승불교적 성격의 삼론종(승랑, 사상의 이해 강조) *대승: 중생구제, 소승: 개인해탈

- 연개소문의 억불책에 반발하여 보덕은 백제로 건너가 열반종을 개창, 도현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세기 저술

 

⑵ 백제 소승불교적 성격의 율종(계율)(겸익이 성왕 때 인도에서 율종의 불경을 가져옴---성왕 이름자체가 불교의 전륜성왕에서 나온것.)

 

⑶ 신라 : 불교와 왕의 밀착, 왕즉불 사상 특히 유행 ⇒ 업설과 미륵불신앙 중심

① 불교식 왕명 사용: 흥왕 ~ 진덕여왕 (법이 사실 불교용어)

                                                         ↱ * 고려 광종: 왕사ㆍ국사제도

② 교단 정비: 진흥왕이 고구려 승려인 혜량을 맞아 국통으로 삼고, 그 아래 주통ㆍ군통을 두고전륜성왕을 자처

 

③ 진평왕: 원광법사(걸사표(수나라에 군사 청하는 글), 세속오계(새로운 사회 윤리와 국가 정신 확립에 기여))

 

④ 선덕여왕(신라상대 끝낼때쯤): 자장은 대국통으로 신라불교를 통할, 계율종을 열고 황룡사9층탑 건립에 중요한 역할 (황룡사는 진흥왕때)

 

⑤ 중심교리: 귀족들의 특권인정

업설: 왕이 곧 부처(왕즉불)라는 사상을 통하여 왕의 권위와 귀족들의 특권인정 (너희들도 전생에 잘했으니 지금 귀족이지)

미륵불신앙: 이상적 불국토 건설 → 화랑제도와 밀접한 관련, 매향의 본래적 의의(사천매향비)

 

⑥ 신라는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 하였지만 왕실의 강력한 비호하에 호국불교로 발전, 인왕회 개최

 

2) 통일신라: 비로자나불과 약사여래상(밀교, 질병치료)이 유행

불교의 대중화 ⇒ 원효의 아미타신앙,  의상의 관음 신앙,  진표의 점찰법회,  균여의 보현십원가,  밀교

 

 

 

 5교와 9산의 개창자 보열경자계통의상화부균법상진원도태 ]

5교 개창자 중심사찰 창건시기 9산 개창자
열반종 (통일전) 보 덕(고구려)
: 연개소문의 도교장려로 짱나서 백제로 옴.
경복사(완주) 650(백제 의자왕) 가지산파(장흥) 도 의
계율종 (통일전) 자 장  통도사(양산) 645(신라 선덕여왕) 사굴산파(강릉) 범 일
법성종 (통일후) 원 효 (6두품) 분황사(경주) 643(신라 선덕여왕) 봉림산파(창원) 현 욱
화엄종 (통일후) 의 상 (진골)
 → 균여
(의상은 대중화이긴한데..정치가에 가까움)
부석사(영주) 676(신라 문무왕) 성주산파(보령) 무 염
법상종 (통일후) 진 표ㆍ원측 금산사(김제) 599년(백제 법왕) 수미산파(해주) 이 엄

※선종은 전국각지에서 개창되어 경주중심의 문화를 극복하고 지방문화를 활성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

 

 * 미륵신앙 이는 우리가 사는 이 지상이 정토가 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내세보다는 현실사회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특히 지배자의 억압이나 사회체제가 동요될 때 미륵신앙은 현실사회를 개혁하려는 사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삼국시대 지배자의 이념이 되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유행하였고, 신라는 화랑도와 미륵을 일치시켰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칭하였고, 고려에 와서 매향의 풍습으로 향도와 관련, 조선후기에는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반란세력과 결탁하기도 하였다.

 

반응형

  5교와 9산

  교종(5교) 선종(9산) : 통일직전에 수용
발달시기 신라 중대 중대에 전래, 신라 하대(신라말기)에 확산
대표 사상 화엄종(의상)
→ 통일이후에 민족을 융합하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후원, 왕권 전제화에 기여
*화엄사상: 하나 속에 우주의 만물을 아우름
모든존재는 상호의존ㆍ서로 조화
도의: 선종9산의 처음 제창(가지산파)
- 수미산파(이엄): 고려 건국의 사상적 기반
*선종불교: 부처의 가르침은 말이나 문자로
표현될 수 없다. 스스로 본래의 마음을 발
견 하려고 할 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교종은 석가모니의 해탈 매뉴얼인 불경을 탐구하는거고)
성격 1) 교리(경전)의 연구(교관겸수, 지관)
2) 형식과 권위의 중시
1) 개인의 정신수양을 강조
2) 좌선(참선)의 중시 → 견성오도, 불립문자의 표방 → 교리, 경전연구배격
3) 실천수행의 강조: 사색
4) 혁신적->당시불교의 개혁요구와 일치
5) 불립문자, 교외별전, 견성오도
(* 정혜쌍수, 돈오점수: 고려代 지눌)
지지기반 왕실, 중앙귀족 진골+호족+6두품+풍수지리설+도교노장사상
영향
조형미술의 발달(탑과 절) 1) 조형미술 쇠퇴(탑비도 조형이긴 하나 신라중대에 비해선 쇠퇴), 승탑(부도)ㆍ탑비(승려 설명)는 유행
2)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 폭을 넓힘
3) 한문학의 발달
6. 고승 1) 원효 (원효 + 요석공주 = 설총) 결혼하니 일종의 파계승.
(화왕계 ⇒ 신문왕때 유교적 도덕정치 강조)
- 십문화쟁론 저술: 일심사상, 원융회통사상 다른 종파와 사상적 대립 조화, 교종의 통합시도, 화쟁사상
→ 물과 얼음 근원이 같다. 인간평등
→ 나무아미타불 → 불교의 대중화에 공헌
*아미타=서방정토


- 금강삼매경론소, 대승기신론소(요나라에 반포)
- 화엄경 저술 → 불교의 사상적 이해기준 확립
*화엄경들어갔다고 의상아님


- 아미타신앙(내세적) 전도 (정토종 보급, 창시X)
- 무애가, 소성거서
- 법성종(원효종, 해동종, 분황사) 개창
독자적 입장에서 화엄사상 정리
- 고려시대 의천에 의해서 화정국사로 추존


2) 의상(진골출신) : 일즉다다즉일 사상
- 5교중 가장 유력한 종파 창시
화엄사상 정립 → 전제정치의 뒷받침 (일즉다 다즉일:  삼국이 본래 하나였다. 문무왕에게 짜옹. 그리고 모든끝에 당신 문무왕이있다. )


- 아미타 관음신앙의 주도 → 불교의“민간화”
(현세구복적=관세음신앙: 귀족들은 현재가 좋은데 조금 더 좋을수 있다.) 
*관음이 합쳐지면 의상, 아미타만 나오면 원효


- 영주부석사ㆍ양양낙산사 등 많은 사원 건립


- 화엄종 개창(화엄사상을 바탕으로 교단정립)
- 화엄일승법계(달팽이처럼 그림처럼 돌아가면서 썼기에) 저술: 661년 당의 지엄 문하로 유학하여 671년 저술


---이하는 그냥 키워드만 암기---
3) 원측: 당의 현장에게 유식학을 배워 규기와
대항, 서명학파를 조직하여 유식불교 강의
- 백제 땅에서 법상종(미륵+유식불교) 개창


4) 혜초: 신라의 승려, 왕오천축국전 저술
- 고려후기의 직지심체요절과 함께 프랑스에 현존


5) 김교각 (696~794)  성덕왕의 아들로 중국 안휘성 구화산에서 화엄경을 설파,   입적 후 지장보살의 화신(다시태어남)으로 평가됨


5) 진표: 점찰법회, 백제유민과 관련, 법상종
선종승려들은 지방호족출신이나 중앙
귀족출신으로서 지방에 낙향한 사람이
많았고, 진골ㆍ6두품등 출신성분이 다양


*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비문(도의)
승려 도의가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가 당나라
서당 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그러나 메추라기의
작은 날개를 자랑하는 무리들이 큰 붕새가
남쪽으로 가려는 높은 뜻을 헐뜯고, 마침내
북산에 은둔하였다.


* 아미타신앙: 원효가 직접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열었으며, 아미타신앙(정토신앙)은 교리를
터득하지 못해도,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염불만으로 극락왕생할 수 있다 ⇒ 내세신앙


* 관음신앙: 의상은 화엄종단에서 아미타 신앙과
함께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신앙으로
현세에서 질병·재해 등 현실적 고뇌를 해결해
주는 신앙(관세음신앙) ⇒ 현세신앙


* 불교의 대중화: 원효의 아미타신앙, 의상의 관음
신앙, 진표의 점찰법회, 균여의 보현십원가

 

 

 도교ㆍ도참사상ㆍ풍수지리설

 

1.도교 - 불로장생사상, 현세이익의 추구를 목적, 무위자연, 노자(도덕경), 장자(노장사상)“상선약수”

- 방법: 양생술, 숭무, 방술, 비법, 둔갑술, 신선사상, 무위자연사상

- 특징: 교단이 성립되지 못함(비조직적 신앙 → 고려 : 민간신앙으로 발전)

일관성의 결여, 불교의 요소가 강함

삼국시대
(고구려만 성행)
고구려: 강서고분의 사신도, 주몽신화, 을지문덕장군의 여수장 우중문 시(지족)
연개소문이 불교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장려(→보덕이 반발하여 백제가서 열반종(열받았종) 개창)

백제: 
산수무늬벽돌, 
사신도, 

사택지적비(사택지적=의자왕의 대좌평한사람이 인생무상)

무령왕릉지석(지석의 의미가 매지권= 즉, 땅을 샀다)---사료: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이 토지신에 보고하고 무덤을 만듬: 거기서 토지신이 도교의영향), 벽돌무덤이면 중국남조 양나라와 교류했던증거 (반대로 양나라 쪽엔 양직공도가 증거로)

금동대향로

신라: 국선도ㆍ풍류도라는 화랑도 명칭

통일신라: 
향락적ㆍ퇴폐적인 지배층의 생활에 반발, 
김유신묘 12지신상, 
최치원사산비문

발해: 정공주묘 비문(불로장생이라는 용어)
고려시대 가장 성행했던 시기 - 참성단, 도관(도교사원)--교단은 성립안함(교리가 불분명해서), 팔관회, 묘청의 팔성단, 구월산 삼성사
조선시대 해동이적(홍만종), 마니산 초제(소격서) ⇒ 민족의식 높이는 기능//소격서폐지하자(조광조), 원구단

 

* 금동용봉봉래산향로 (금동대향로):  부여 능산리 에서 발견 (사비시대) 

봉황의 턱밑에 여의주ㆍ다섯악사ㆍ인면조신상ㆍ인면수신상ㆍ호랑이ㆍ코끼리ㆍ멧돼지ㆍ사슴----불교(하단) + 도교(상단)

 

* 원구단: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왕조에서 유교적인 의례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낸 제천단(하늘모양의 둥근 형태)

고대국가부터 제천의식이 행해졌으나 유교적인 예의 관념에 따라 제도화된 원구제는 고려시대 부터 실시

지금의 환구단은 1897년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고종이 제천의식을 하면서 다시 설치

 

* 삼성사(황해도 구월산): 단군을 제사하기 위한 단군사당

* 참성단(강화도 마니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사당

* cf) 만동묘ㆍ대보단(충북 화양동): 조선시대 명나라 황제를 제사하기 위해 세운 사당

 

 

2. 풍수지리설의 발달- 

신라말기 도선과 같은 선종 승려들이 중국에서 수입 (유교사상과 적대적)

지기쇠왕설, 비보사탑설 관련, 신라정부의 권위 약화

고려시대 1) 송악길지설: 고려왕조의 사상적 배경
2) 개경길지설ㆍ서경길지설(고려시대) ⇒ 남경길지설(한양명당설)
3) 훈요십조(서경길지설, 비보사찰: 호국+풍수지리)
4) 성종: 분사제도, 3경(개경ㆍ서경ㆍ동경) → 남경길지설(문종): 북진정책의 침체 + 풍수지리
5) 인종: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3경폐지후 3소제 설치
6) 관련서적 : 도선비기, 해동비록(예종, 풍수지리설 집대성, 전하지 않음), 산천비보도감, 잡업의 지리업
조선시대 1) 한양명당설(조선의 수도선정)
2) 16C 산송문제 3) 정감록ㆍ토정비결(예언서): 조선후기 도교와도 관련

 

3. 선종 + 도교 + 풍수지리 사상 ⇒ 고려개창의 사상적 토대

 

 

 

 신라하대 지방세력의 대두

 

1. 왕위 쟁탈전의 시작 (왕권의 약화)
1) 무열왕계의 약화 : 혜공왕은 5묘제를 통해 왕권유지 시도 → 실패

 

2) 혜공왕의 피살: 대공의 난(768, 96각간의 싸움) → 김지정의 난(780)으로 혜공왕 피살 → 내물왕
10대손인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 즉위 ⇒ 무열왕계 진골에 의한 왕위 세습은 끝남(신라하대 시작)

3) 진골 간(무열계 vs 내물계)의 왕위 쟁탈전: 김헌창의 난(822) → 김범문의 난(825) → 장보고의 난(846)
① 김헌창의 난: 아버지 김주원(무열계)이 김경신(내물계)에게 밀려 원성왕이 되지 못하자 국호를 장안으로
연호를 경운으로 정하고 무열왕계 웅천도독 김헌창이 일어킨 반란 ⇒ 실패
② 김범문의 난: 김헌창의 아들, 고달산(여주)를 근거지로 산적 수신과 연합하여 반란 ⇒ 실패
③ 장보고의 난: 문서왕이 장보고의 딸을 차비로 들이려 했으나 진골귀족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자 반란,
중앙정부는 무력으로 토벌할 능력이 없었고, 장보고의 부하 염장을 통해 살해, 진압
* 김흠돌의 난: 신문왕때(중대) 진골귀족들의 무열왕계 왕위독점에 반발

4) 원성왕: 독서삼품과의 실시(효경 필수) - 왕권강화의 목적 → 진골귀족의 반대로“실패”

5) 흥덕왕(826~836) 때 사치를 금하는 왕명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6) 상대등 세력 강화, 족당정치

7) 녹읍 부활, 사원의 면세전 확대, 국가 재정의 파탄과 농민수탈 강화 → 민란 발생(원종ㆍ애노의 난(889))


2. 새로운 세력의 등장
1) 호족의 등장 (지방에서 성주, 장군을 자칭하는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
(1) 특징
① 선종ㆍ도교ㆍ풍수지리 수용
② 반골품제 성향: 6두품세력과 결탁하여 골품제를 비판하고 새로운 정치이념을 제시
(2) 호족세력의 종류
① 중앙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몰락한 중앙귀족
② 무역에 종사하면서 재력과 무력을 축적한 세력
③ 군진세력 
④ 지방의 토착세력인 촌주출신

2) 해상세력의 확대: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 왕의 승낙을 얻어 전남 완도에 청해진 설치(828),
서남해안에서 활동, 신무왕의 옹립, 당의 서주에서 무령군 소장을 지냄.
① 견당매물사 : 당과 교역 활동을 벌이기 위한 사절단
② 회역사 : 일본과의 경제 활동을 위한 사절단 → 이후 견당매물사와 통칭하여 부르기도 함
③ 교관선 : 무역 활동을 위해 파견한 무역선 [ 장 교 견 청 법 신 민 회 완 ]
④ 법화원 건립 : 신라원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함

3) 6두품세력이 반발 (최치원, 최언위, 최승우 등)

 

 

 

 고대에서 중세, 중세에서 근세사회로의 변화

고대국가(↔연맹국가) 중세고려사회(↔고대사회) 근세조선사회(↔중세고려)
①중앙집권국가
②왕권강화
③제도정비
④율령반포
⑤신분제(관료와 계급사회)
⑥불교수용
⑦영토확장
⑧중앙귀족화
⑨대중국투쟁 ⑩철기문화
①문벌귀족사회(족보편찬),호족이 문화주체
②대가족단위(평민도 성씨ㆍ본관 사용)
③유불융합 
④과거제실시
⑤전시과 
⑥4계급(중인의 등장)
⑦귀족문화와 지방문화 함께 발달
⑧평민 姓사용 (노비의 이름사용)
⑨왕권견제책 발달(서경,간쟁,봉박,상소)
⑩대장경(초→속→8만), 금속활자, 금속화폐
⑪교선통합(천태종,조계종)
①문무양반 
②억불숭유
③향소부곡X
④모든 군현에 지방관 파견
⑤향리지위↓
⑥자작농증가
⑦호패법 
⑧오가작통법
⑨이원적행정 → 일원체제
⑩향촌자치 강조
⑪성문법치국가(경국대전)

 

 

 후삼국

 

1. 후백제의 건국(900)
1) 상주 가은현 출신인 견훤이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호족세력을 토대로 건국 (견훤=군진+호족)
2) 완산주(전주)에 도읍
 
2. 후고구려의 건국(901, 송악) → 마진(철원, 무태ㆍ성책) → 태봉(철원, 수덕만세ㆍ정개)
1) 신라왕족(헌안왕)출신인 궁예가 호족세력과 초적을 토대로 건국 (궁예=초적+호족)
2) 미륵신앙의 이용하여 전제정치의 도모
3) 양길에게 부탁 → 강원도,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방 점령 →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까지 점령
4) 양길을 몰아낸 다음 송악에 도읍 →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로 정함
5) 6두품을 중심으로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골품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신분제도를 모색.
6) 국정을 총괄하는 광평성을 비롯한 9관등제의 실시, 미륵신앙을 이용하여 전제정치 도모하다가 신망 잃음
 
3. 고려의 건국(918)
1) 궁예를 축출한 신하들에 의해 추대된 왕건이 철원에서 즉위하여 이듬해 송악(개경)으로 천도(919)
2) 호족세력, 해상세력, 6두품, 선종 등이 연합
3) 왕건의 통일정책 (송악지방의 호족출신, 궁예의 신하로 있을때 신망을 얻어 광평성 시중까지 오름)
- 대외적 : 중국 5대 여러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음
- 대내적 : 왕건은 지방 호족 세력을 흡수, 통합. 신라에는 우호정책, 후백제에는 고립정책

4. 발해가 거란족에 멸망 당함(926)

5. 후백제가 대야성을 점령하고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공산전투에서 고려군 격파(927)

6. 고창(안동)전투에서 고려군이 후백제군을 격파(930)

7. 운주성전투에서 왕건은 견훤의 후백제군을 격파(934)

8.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신라 멸망, 935)

9. 후백제에 왕위계승 문제의 발생 → 신검이 견훤을 금산사에 감금 → 견훤이 고려에 투항 → 선산전투(일리천전투)에서 고려가 후백제를 멸망시킴(936) → 민심수습 및 후삼국통일기념으로 충남논산에 개태사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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