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출문제/한국사

한국사 기출 문제 해설 [조선] #12

Jobs 9 2022. 4. 21.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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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다음 <보기> 중 조선 시대 무기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모두 몇 개인가?

 

<보기>
㉠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네덜란드로부터 전래된 조총을 사용하였다.
㉡ 비격진천뢰는 심지가 다 탔을 때 폭발하면서 내부의 빙철을 사방에 뿌리는 무기였다.
㉢ 불랑기포는 16세기 중국에 전래된 청동제 포로 평양성 전투에서 사용되었다.
㉣ 세종 때 신기전을 발사할 수 있는 화차가 최초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바퀴가 달려 있어 이동이 가능하였다.
㉤ 태종 때 작고 날쌘 싸움배로 비거도선이 제조되어 수군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했다.
㉥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중 일본군에게 노획한 조총을 모방하여 제작에 성공하였으며, 이후 조선군의 주력 무기로 자리 잡았다.

 

① 1개 ② 2개 ③ 3개 ④ 4개

【해설】 정답 ②

㉠ 임진왜란 당시 일본은 포르투갈로부터 전해진 조총을 사용하여 전쟁 초기에는 조선군이 연패에 빠지기도 하였다.

㉣ 신기전이라는 화살 100개를 잇따라 발사할 수 있었던 화차는 문종 때 개발되었다.

㉡ 선조 때 이장손이 개발한 비격진천뢰는 둥근 박 모양의 무쇠 안에 화약과 닮은 철 조각인 빙철을 장전한 살상용 무기였다.

㉢ 서양식 대포인 불랑기포는 『징비록』에 따르면 1592년에 명나라 군대가 갖고 들어왔으며 평양성 탈환에 사용되었다.

㉤ 태종 때에는 거북선을 만들었고, 작고 날쌘 비거도선이라는 전투선을 만들어 수군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했다.

㉥ 우리나 라에는 1590년(선조 23) 3월 대마도주 소우 요시토시가 선조에게 조총을 진상하고 간 일이 있으나, 개발되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군은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연패를 거듭하였다. 이에 조선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조총을 입수하고 이를 모방하여 제조하려 노력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부터 조총을 제조하여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조총은 조선 후기에 후장식 소총이 도입될 때까지 조선군의 대표적인 개인용 화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Q  다음 조선 초기 향교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지 않은 것은?

 

① 원칙적으로 8세 이상의 양인 남성에게 입학이 허용되었고, 학비는 없었다.

② 전국의 부·목·군·현에 설립되었고, 군현의 규모에 따라 정원을 정하였다.

③ 매년 자체적으로 정기 시험을 치러 성적 우수자에게는 성균관 입학 자격이 주어졌다.

④ 학업 중 군역이 면제되었으나, 성적 미달로 자격이 박탈될 경우 군역을 지도록 하였다.

【해설】 정답 : ③

③ 향교에서는 매년 6월 시험을 치러 우등자에게는 생원·진사시의 초시를 면제하고 곧바로 복시에 응시할 수 있게 하는 특전을 주었다.

① 향교는 원칙적으로 천인을 제외한 양인 남성들이 입학할 수 있었으며, 향교전(학전), 향교 노비의 신공 등으로 운영되어 학비가 없었다.

② 향교의 입학 정원은 고을의 위상과 크기에 따라 차이가 났는데, 부·대도호부·목의 경우는 90명, 도호부는 70명, 군은 50명, 현은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④ 향교 생도는 군역을 면제받았는데, 이로 인해 시간이 경과하면서 향교의 생도는 군역을 피하고자 하는 기술관이나 서리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군역을 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세조 대에는 군액을 확충한다는 명분 하에 강경 시험에서 떨어진 교생은 군역에 충당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군역을 피하기 위해 향교에 입속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이가 40세가 된 자는 충군(充軍)하고, 40세가 되지 않아도 크게 학문의 진취가 없는 자는 생도 자격을 박탈하도록 하였다.

 


 Q  다음 <보기>의 해외 견문 기록을 시기 순으로 가장 바르게 나열한 것은?

 

<보기>
㉠ 『표해록』 ㉡ 『열하일기』 ㉢ 『서유견문』 ㉣ 『해동제국기』 ㉤ 『간양록』

 

① ㉠ - ㉡ - ㉤ - ㉣ - ㉢ ② ㉠ - ㉣ - ㉢ - ㉤ - ㉡ ③ ㉣ - ㉠ - ㉤ - ㉡ - ㉢ ④ ㉣ - ㉤ - ㉢ - ㉠ - ㉡

【해설】 정답 : ③

㉣ 『해동제국기』는 신숙주가 성종 2년(1471) 왕명을 받아 작성한 견문기이다.

㉠ 『표해록』은 1487년(성종 18) 제주에 추쇄경차관으로 파견되었던 최부가 부친상을 당해 강진으로 향하던 중 표류하여 중국에 도착, 육지로 귀국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 『간양록』은 1597 년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형조좌랑 강항이 2년 7개월간 체험했던 일본 생활을 기록한 책이다.

㉡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의 중국 기행문집으로, 1780년(정조 4)에 저술되었다.

㉢ 『서유견문』은 유길준이 저술한 서양 기행문으로 1889년에 저술되어 1895년에 간행되었다.

 



 Q  다음 <보기>의 서적을 편찬된 시기 순으로 가장 바르게 나열한 것은?

 

<보기>
㉠ 『의방유취』 ㉡ 『동의보감』 ㉢ 『향약구급방』 ㉣ 『향약집성방』 ㉤ 『향약채취월령』

 

① ㉢ - ㉤ - ㉠ - ㉣ - ㉡

② ㉠ - ㉢ - ㉡ - ㉣ - ㉤

③ ㉢ - ㉣ - ㉤ - ㉠ - ㉡

④ ㉢ - ㉤ - ㉣ - ㉠ - ㉡

【해설】 정답 : ④

㉢ 고려 고종 때 편찬된 『향약구급방』은 현재 전해지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의학 서적이다.

㉤ 『향약채취월령』은 월별로 채취해야 할 약재를 기록한 것으로, 조선 세종 대인 1431년에 간행되었다.

㉣ 『향약집성방』은 조선 세종 15년(1433)에 유효통, 노중례 등이 편찬 한의서이다.

㉠ 『향약집성방』이 완성된 뒤 다시 한방 의서들을 모아 편집하기 위해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의방(醫方)을 수집·편찬하게 하여 1445년 『의방유취』가 완성되었다.

㉡ 허준의 『동의보감』은 선조의 명에 의해 편찬되기 시작하여 광해군 2년(1610)에 완성한 의학 서적이다.



 Q  다음 <보기> 중 밑줄 친 ‘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모두 몇 개인가?

 

은 계지술사(繼志述事)를 내걸고 전통문화를 계승하면서 중국과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여 국가 경영을 혁신하였다. 또한 재정 수입을 늘리고 상공업을 진흥하기 위해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자유 상업을 진작하고, 전국 각지의 광산 개발을 장려하였다.

 

< 보 기 >

㉠ 무위영을 설치하였다.

㉡「동문휘고」를 편찬하였다.

㉢「수성윤음」을 반포하였다.

㉣ 한구자(韓構字)와 정리자(整理字)를 주조하였다.

㉤「동국여지도」를 편찬하였다

.㉥ 노비공감법을 실시하였다.

 

① 2개   ② 3개   ③ 4개   ④ 5개

【해설】 정답 : ①

제시된 자료의 밑줄 친 ‘왕’은 정조이다. 정조는 선왕(先王)의 뜻을 이어간다는 ‘계지술사(繼志 述事)’를 실현하는 공간으로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신해통공’을 실시하였다.

㉡ 정조는 사대문서를 작성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관련 기록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더불어 당시에 다양하고 활발하게 전개된 문화 정책 중 하나인 편찬 사업의 일환으로 외교 문서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여 『동문휘고』를 편찬하였다.

㉣ 정조 대에는 활발한 활자 주조가 이루어졌다. 세손 시설 만든 임진자(壬辰字, 1772)를 비롯하여, 정유자(丁酉字, 1777), 한구자(韓構字, 1782), 목활자로서 생생자(生生字, 1792), 구리로 만든 정리자(整理字, 1795), 철로 만든 춘추 관자(春秋館字, 1797) 등 도합 80여만 자를 만들어 규장각에 비치해 서적 간행에 이용하도록 하였다.

㉠ 1881년(고종 18) 종래의 5 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2 영으로 개편하면서 5 군영 가운데 훈련도감·용호영·호위청을 합하여 무위영으로 하였다. 정조 대에는 국왕의 친위대로서 장용영이 설치되었다.

㉢ 영조 대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세 군영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를 갖추었다(수성윤음, 1751).

㉤ 『동국여지도』는 영조 대 신경준이 왕명을 받아 제작하였다.

㉥ 영조 때 외거노비의 신공(身貢)을 줄여 노비의 도망을 방지하는 노비공감법을 시행하였다.

 

 


 Q  다음은 사단칠정에 대한 어느 유학자의 견해이다. <보기>에서 이 유학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모두 몇 개인가?

 

(가) 사단(四端)의 발(發)은 순리이므로 선(善)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七情)의 발(發)은 이기 (理氣)를 겸하였기 때문에 선악(善惡)이 있다.
(나)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함에 기(氣)가 따른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함에 이(理)가 탄 것이다(理乘之)

 

< 보 기 >
㉠ 이(理)는 무형(無形)하지만 기(氣)는 유형(有形) 하므로 이통기국(理通氣局)이라 주장하였다.
㉡ 간략한 해석을 곁들인 10개의 도형으로 성리학의 핵심 내용을 집성하여 왕에게 바쳤다.
㉢ 형이하(形而下)의 현실세계를 기(氣)의 능동성으로 파악하여 경세적으로는 경장(更張)을 강조하였다.
㉣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고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 이기호발, 이발기수 등을 주장하였다.

 

① 1개
② 2개
③ 3개
④ 4개

【해설】 정답 : ③

제시된 자료는 사단칠정논쟁 당시 퇴계 이황이 주장한 내용이다. 이황은 이와 기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이의 능동성으로 인해 상호 간에 발동한다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하였다.

㉡ 이황은 갓 즉위하여 17세의 국왕이었던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리학의 요체를 가르쳐주고자 10개의 핵심적인 도표로 성리학을 정리한 『성학십도』를 편찬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 이황은 원리, 원칙이자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이(理)를 중시한 주리론자로서 이존기비, 이귀기천 등을 내세웠다. 즉,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현상인 기(氣)를 천시한 것으로 그의 이러한 학문적 성향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고 근본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연결되었다.

㉤ 이황은 기대승과의 사단칠정 논쟁에 서 ‘4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그것에 따르는 것이고, 7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그것에 타는 것이다.’라고 하여 이기호발설, 이발기수설을 주장하였다.

㉠ 이통기국론은 이의 보편성과 기의 국한성을 언급한 논리로 이이가 주장한 이기론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 형이하의 현실세계를 기가 변화하는 능동성으로 파악하여 개혁 즉, 경장을 강조한 인물은 율곡 이이이다.



 Q  다음 <보기>의 정책이 실시된 왕대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 보 기 >
백성들이 2 필의 응역(應役)에 괴로워하였기 때문에 …… 그 폐단을 줄이려 하였으나 오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에 1 필을 감하고 어(漁), 염(鹽), 선(船)에 세를 거두어 그 감액을 보충하려 하였다. 아! 예부터 민역(民役)을 줄이는 방도는 경비를 절약하여 백성을 넉넉하게 해주는 것보다 나은 방도가 없는 것이다.

 

① 자의 대비의 복제 문제를 둘러싸고 예송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② 국제 정세를 이용하여 명과 후금의 사이에서 중립 외교 정책을 취하였다.
③ 호포제를 시행하기 위하여 창경궁 홍화문에 나아가 백성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④ 흉년을 당해 걸식하거나 버려진 아이들을 구휼하기 위하여 「자휼전칙」을 반포하였다.

【해설】 정답 : ③

제시된 자료는 양인의 군포 부담을 2 필에서 1 필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 균역법(1750)을 실 시하는 내용으로, 이와 관련된 국왕은 ‘조선 영조’이다.

③ 균역법 논의는 영조 25년 충청감사 홍계희의 ‘양역변통’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이와 관련된 논의에서 영조는 즉위 전부터 호포제를 최상의 방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 때 호포제는 가장 유력한 양역변통책으로 부상하였고, 이에 대해 영조는 창경궁 홍화문에서 오부(五部)의 사서(士庶)와 지방에서 올라온 금군 등 50여 명을 불러 모아놓고 호포와 결포 가운데 어느 것이 편한지 물었다(一次臨門). 거의 모두가 호포가 편하다고 대답하였고, 영조는 호포제를 단행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준비·시행 과정에서 호포제의 시행은 어렵다는 것으로 결론이 모아지면서 양역의 완전한 혁파를 전제로 한 개혁보다는 용이하고 절충적인 방편이 적극적으로 검토되었다.

① 예송 논쟁은 효종과 효종 비 인선왕후의 죽음에 따른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의 복상(服 喪) 기간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2차에 걸친 논쟁을 말하며 모두 현종 재위 기간에 전개되었다.

② 광해군 재위기의 사실이다.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조선은 명의 원군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하였다.

④ 정조는 탕평책으로 당쟁을 억제하고 산업 진흥, 혹형의 폐지, 문교 진흥에 힘쓰는 한편, 흠휼전칙과 자휼전칙을 정하여 걸호 및 난민 구제 사업을 폈다.

 



 Q  다음 <보기>의 밑줄 친 ‘이 사람’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 보 기 >
이 사람은 1501년 출생하여 1572년에 타계한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그의 학문사상 지표는 경(敬)과 의(義)이다. 마음이 밝은 것을 ‘경(敬)’이라 하고 밖으로 과단성 있는 것을 ‘의(義)’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바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여 수양하는 기본으로 삼고 ‘의’로써 외부 생활을 처리하여 나간다는 생활 철학을 표방한 것이었다. 

 

① 문인(門人)들이 주로 북인(北人)이 되었다.
② 이황과 서한(書翰)을 주고받으면서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③ 「동호문답」, 「만언봉사」, 「성학집요」등을 저술하였다.
④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해설】 정답 : ①

제시된 자료의 밑줄 친 ‘이 사람’은 경(敬)과 의(義)를 근본으로 하는 실천적 성리학풍을 강조 한 남명 조식이다.

① 북인은 조식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경(敬)과 함께 의(義)를 강조하여 절의를 중시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임진왜란 때 곽재우, 정인홍 등 많은 의병장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② 이황과 이기심성론에 관해 사단칠정 논쟁을 벌인 것은 고봉 기대승이다.

③ 『동호문답』이나 『만언봉사』 등의 시무 관련 상소를 올려 다양한 사회 경장론을 제시한 인물은 율곡 이이이다.

④ 이황이 주자의 주요 편지글을 모아 편찬한 『주자서절요』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 성리학에 영향을 주었다.



 Q  다음 중 조선 후기에 설치된 5군영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① 1652년 남한산성에 왕실 호위, 수도 방어를 위해 금위영을 두고 경기도 광주 및 그 부근의 제진을 경비케 하였다.
② 1682년 수도 서울에 총포병과 기병을 위주로 한 정예 부대인 수어청을 두었다.
③ 1624년 서울과 경기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서 총융청을 설치하고 경기 내의 군인을 여기에 소속시켜 경기 지역의 제진을 통솔케 하였다.
④ 1626년 도성 수비를 목적으로 기병과 훈련도감군의 일부를 주축으로 어영청을 설치함으로써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임란 중에 만들어진 훈련도감을 포함해서 5군영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해설】 정답 : ③

③ 인조 대 이괄의 난을 진압한 후 도성 수비를 담당하는 어영군의 강화와 함께 수도 외곽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이서(李曙)의 주관하에 경기군을 정비하면서 총융청이 설치되었다. 이후 수어청이 설치(1626)된 후에는 경기도의 남부 방위는 수어청에게 맡겨졌고, 총융청은 북한산성을 중심으로 수도의 북부(개성·광주·남양·양주·장단·수원 등)를 방어하게 되었다.

① 금위영은 조선 숙종 대 설치된 5군영 중의 하나이고, 남한선성을 중심으로 광주 및 그 부분의 제진을 방어한 것은 수어청이다. 병자호란 후 반청(反淸) 운동의 하나로 남한산성이 재건되면서 수어청 중심의 남한산성 방어 체제가 확립되었고, 효종 대에 북벌론이 전개되면서부터는 광주 부윤(府尹)을 수어부사로 삼아 군사·행정 책임을 일원화(1652)하였다.

② 1682년(숙종 8)에 설치된 군영은 금위영이다.

④ 숙종 대 수도 경비와 국왕 숙위를 담당한 5군영이 설치되면서 중앙군으로서 5군영 체제가 완비되었다.

 


 Q  조선 후기 노론 내부에 주기설과 주리설의 분파가 생겨 이른바 ‘호락시비(湖洛是非)’로 불리는 큰 논쟁이 일어났다. 다음 <보기>에서 이 호락(湖洛) 논쟁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모두 몇 개인가?

 

< 보 기 >
㉠ 영조 때에 한원진과 윤봉구로 대표되는 충청도 노론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다르다고 보는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내세웠다.
㉡ 호론의 주장에는 청나라를 중화로 보려는 대의 명분론이 깔려있다.
㉢ 이간, 김창협 등으로 대표되는 서울 중심의 노론은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 (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다.
㉣ 낙론의 주장은 북학파의 과학 기술 존중과 이용후생 사상으로 이어졌다.

 

① 1개
② 2개
③ 3개
④ 4개

【해설】 정답 : ①

㉡ 호론의 주장은 화이론을 계승한 것으로, 이들의 사상은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여 보려는 배타적 입장을 띠고 있었으며, 이후 위정척사 사상으로 연결되었다.

㉠ 호락논쟁은 송시열의 직계 제자들이 벌인 사상 논쟁인데 한원진과 윤봉구로 대표되는 충 청도 노론은 인성과 물성은 다르며, 미발심체에 선악이 존재하며, 성인과 범인의 심체가 다르다는 ‘인물성이론’을 내세웠다.

㉢ 권상하의 제자인 이간과 김창협이 중심이 된 낙론은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다.

㉣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 던 ‘낙론(洛論)’의 사상은 북학사상의 배경이 되었으며, 19세기 최한기에 의해 서양의 경험 철학과 연결되어 화이론을 극복하는 개화사상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다.

 



 Q  (가), (나) 시기 사이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가) 나는 답험(踏驗)의 폐단을 영원히 없애려고 하여, 모든 대소 신료와 서민들에게까지 의견을 물어본 결과, 시행하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으니, 백성들의 의향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조정의 의론이 분분해서 잠정적으로 정지하고 시행하지 않은 지 몇 해가 되었다. …… 호조에서는 시행하기에 알맞은 사목(事目)을 자세히 마련하여 아뢰라.

(나) 전하께서 신에게 명하여 해동 여러 나라와 조빙(朝聘)으로 왕래한 고사(故事), 관곡(館 穀)을 주어 예우한 전례를 찬술해 가지고 오라 하셨다. 나는 삼가 옛 문적을 상고하고, 보고 들은 것을 덧붙여서, 지도를 그리고 간략히 세계(世系)의 본말과 풍토를 서술하고, 우리나라에서 접대하던 절차에 이르기까지 수집해 모아 책을 만들어 올렸다.

 

① 현량과가 실시되었다.

② 모문룡이 가도에 주둔하였다.

③ 수신전과 휼양전이 폐지되었다.

④ 낭사가 사간원으로 독립하였다.

【해설】 정답 ③

(가)는 세종 때 공법 시행과 관련된 내용, (나)는 성종 때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편찬에 대한 내용.

 수조지가 부족해지자 세조 때 직전법을 실시하며 수신전과 휼양전이 폐지되었다.

① 중종 때 등용된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 세력은 지방의 어진 사림과 성균관의 유생들을 정치에 참여시키기 위한 천거식 관리 등용제인 현량과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② 후금에 쫓긴 명의 장군 모문룡이 이끄는 군대가 조선의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섬인 가도에 주둔하였다(1622, 광해군 14). 이는 이후 정묘호란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

④ 태종 때는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낭사를 독립시켜 사간원을 설치하였다.



 Q  (가) 법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서얼의 자손들이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에 진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옛 법이 아니다. …… 영락 13년 우대언 서선 등이 아뢰기를 “서얼의 자손은 현직에 서용하지 말아 적서의 분별을 하소서.”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영락 13년 이전에는 현직에도 서용되었던 것이며, 그 이후에는 다만 과거에 응시하고 정반(正班)에 진출하는 것만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가)을/를 편찬한 뒤로부터 금고(禁錮)를 가하기 시작했으니, 현재 아직 백 년도 되지 못한다.
-『패관잡기』-

 

① 『경제육전』 편찬의 토대가 되었다.

② 성종 때 6전 체제로 완성되어 반포되었다.

③ 양난 이후 새롭게 변화된 사회상을 담았다.

④ 법 조항을 원, 속, 증으로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해설】 정답 ②

『경국대전』

② 『경국대전』은 세조 때 편찬되기 시작하여 성종 때 「이전」·「호전」·「예전」·「병전」·「형전」·「공전」의 6전으로 완성되었다.

① 『경제육전』은 조준이 위화도 회군 이래 10년간의 조례를 모아서 편찬한 법전으로, 『경국대전』 편찬 이전에 제작되었다.

③ 『경국대전』은 임진왜란 이전 때 편찬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선의 사회와 정치 모든 면에서 변화가 나타나 이전의 체제로는 유지하기 힘든 점이 지속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경국대전』을 기본으로 하고, 이후 간행된 법전과 수 교 등을 종합한 법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조 때 『속대전』이 편찬되었다.

④ 『대전통편』은 정조 대 국가의 집권 체제를 확립하여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편찬한 것으로 조문은 『경국대전』을 맨 앞에, 『속대전』을 그다음에, 그리고 그 뒤의 법령 순으로 수록하고 각각 ‘원 (原)’·‘속(續)’·‘증(增)’자로 표시하였다.



 Q  다음 주장을 펼친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〇 무릇 천자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하늘이 천자를 공중에서 내려보내서 세운 것인가, 아니면 땅에서 솟아나게 하여 천자가 된 것인가. …… 여러 현장(縣長)들이 함께 추대한 자가 제후가 되며, 제후들이 함께 추대한 자가 천자가 되니, 천자란 민중이 추대하여 만든 것이다.
〇활차(滑車)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것은 두 가지 편리한 점이 있으니 첫째는 사람의 힘을 줄이는 것이고, 둘째는 무거운 물건을 떨어뜨리지 않고 안전하게 운반하는 것입니다. …… 크고 작은 바퀴가 서로 통하고 서로 튕기는 방법을 이용하면 천하에 무거운 물건이 없습니다.

 

①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저술하였다.

② 『열하일기』에서 수레와 선박 이용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노비제, 과거제 등 여섯 가지를 ‘나라의 좀’으로 규정하였다.

④ 재물을 우물에 비유하며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해설】 정답 ①

정약용의 『탕론』과 거중기 제작에 대한 내용.

① 정약용은 실학을 집대성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② 박지원은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였다.

③ 이익은 나라가 빈곤하고 농업이 피폐한 원인으로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양반 문벌제도, 사치와 미신 숭배, 승려, 게으름 등 여섯 가지를 들고 이를 ‘나라의 6 좀’이라고 규정하였다.

④ 박제가는 소비와 생산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여 절약보다는 소비를 강조하였다.



 Q  다음 보고를 받은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박권이 보고하였다. “총관이 백두산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는데, 압록강의 근원이 산허리의 남쪽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로 삼았으며, 토문강의 근원은 백두산 동쪽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이 되었으니 분수령 고개 위에 비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습니다.”

 

① 신해통공이 단행되었다.

② 괴산에 만동묘가 건립되었다.

③ 정여립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④ 황사영 백서 사건이 발생하였다.

【해설】 정답 

숙종 때 백두산정계비 건립에 대한 내용.

② 만동묘는 송시열이 남긴 뜻에 따라 제자인 권상하가 숙종 때 화양 서원 안에 세운 것으로 (1703),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의 신종과 그의 손자인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곳이다.

① 정조 15년(1791)에 채제공의 건의에 따라 신해통공을 실시함으로써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이 철폐되었다.

③ 선조 때 정여립 모반 사건 이후 동인은 정철의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열되었다.

④ 황사영 백서 사건은 순조 때 발생한 신유박해(1801)와 관련된 사건을 말한다.

 

 


 Q 
 밑줄 친 ‘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919년 3월 1일 탑골 공원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 선언서가 낭독되었다. 이 공원에 있는 탑은 이 세운 것으로 경천사 10층 석탑의 영향을 받았다.

 

① 우리나라 전쟁사를 정리한 『동국병감』을 편찬하였다.

② 우리나라 역대 문장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을 편찬하였다.

③ 6조 직계제를 실시하여 국왕 중심의 정치 체제를 구축하였다.

④ 한양으로 다시 천도하면서 이궁인 창덕궁을 창건하였다.

【해설】 정답 ③

‘왕’은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건립한 조선 ‘세조’이다.

③ 세조는 세종 때부터 시행되어 오던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6조 직계제를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① 『동국병감』은 조선 문종 대에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 중국과의 전쟁사를 정리한 책이다. 

② 『동문선』(1478)은 조선 성종 때 서거정 등이 신라에서 조선 초까지의 시문을 모아서 편찬한 책이다. 

④ 태종이 즉위한 후 1404년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창덕궁이 완성되었다.

 


 Q 
 (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이/가 올립니다. “지방의 경우에는 관찰사와 수령, 서울의 경우에는 홍문관과 육 경(六卿), 그리고 대간(臺諫)들이 모두 능력 있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십시오. 그 후 대궐에 모아 놓고 친히 여러 정책과 관련된 대책 시험을 치르게 한다면 인물을 많이 얻을 수 있 을 것입니다. 이는 역대 선왕께서 하지 않으셨던 일이요, 한나라의 현량과와 방정과의 뜻 을 이은 것입니다. 덕행은 여러 사람이 천거하는 바이므로 반드시 헛되거나 그릇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① 기묘사화로 탄압받았다.

②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었다.

③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지지하였다.

④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비하는 데 동조하였다.

【해설】 정답 

사료는 현량과 실시를 건의하는 내용으로, (가) 인물은 조광조이다.

① 조광조의 위훈 삭제 건의로 기묘사화(중종 14, 1519)가 일어나 조광조가 사사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사림이 큰 피해를 보았다. 

②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인물은 김일손이다. 김종직의 사초에는 훈구 세력인 이극돈의 비행이 많이 적혀 있었는데, 이로 인해 훈구 세력은 연산군에게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판한 것이라고 문제 삼았다. 이로 인해 김종직은 부관참시당하고 김일손 등이 사형을 당한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③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외척인 윤원형 등의 소윤 세력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지지하였다. 

④ 연산군은 자신의 모후의 폐비와 사형에 찬성했던 윤필상, 김굉필 등을 처형하였고, 이미 죽은 한명회, 정창손 등을 부관참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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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밑줄 친 ‘이 농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만을 모두 고르면?

 

대개 이 농법을 귀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두 땅의 힘으로 하나의 모를 서로 기르는 것이고, …… 옛 흙을 떠나 새 흙으로 가서 고갱이를 씻어 내어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무릇 벼를 심는 논에는 물을 끌어들일 수 있는 하천이나 물을 댈 수 있는 저 수지가 꼭 필요하다. 이러한 것이 없다면 볏논이 아니다.  -『임원경제지』-

<보기>
ㄱ. 세종 때 편찬된 『농사직설』에도 등장한다. 

ㄴ. 고랑에 작물을 심도록 하였다. 
ㄷ. 『경국대전』의 수령칠사 항목에서도 강조되었다. 
ㄹ. 직파법보다 풀 뽑는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① ㄱ, ㄴ ② ㄱ, ㄹ
③ ㄴ, ㄷ ④ ㄷ, ㄹ

【해설】 정답 

밑줄 친 ‘이 농법’은 ‘이앙법’

ㄱ. 세종 대 편찬된 농서인 『농사직설』에는 벼농사의 파종법인 이앙법(모내기법)과 직파법에 알맞은 경작지 유형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다. 특히 이앙법에 대해서는 ‘큰 가뭄을 만나면 농가에 매우 위험하다’고 서술되어 있다. 

ㄹ. 이앙법의 가장 큰 이점은 제초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는 것에 있었다. 직파법으로 벼를 재배할 경우 4, 5회의 전면적인 제초 작업을 실시해야 하는 것에 비해서 이앙법을 시행할 경우는 2, 3회의 제초 작업만으로 충분하였다. 

ㄴ. 밭고랑에 씨를 뿌리는 농법은 밭농사에서 행하는 견종법이다. 

ㄷ. 조선 성종 때 수령 7사를 재정비하여 『경국대전』 이전 고과조에 농사와 양잠의 흥성[농상성(農桑盛)], 호구의 증가[호
구증(戶口增)], 학교 교육의 진흥[학교흥(學校興)], 군정의 바른 처리[군정수(軍政修)], 부역의 균등한 부과[부역균(賦役均)], 송사의 간명한 처리[사송간(詞訟簡)], 간사하고 교활한 풍속을 없애는 일[간활식(奸猾息)] 등으로 규정하였다. 즉 수령 7사에서 강조하는 내용에는 이앙법이 들어가 있지 않다.

 

 

 

 Q  조선 전기 문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어우야담'을 비롯한 야담․잡기류가 성행하였다.
② 유서(類書)로 불리는 백과사전이 널리 편찬되었다.
③ '동문선'이 편찬되어 우리 문학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④ 중인층을 중심으로 시사가 결성되어 문학 활동을 벌였다.

 

【해설】 정답 ③
① 어유야담(유몽인)은 오산집(차천로) 등과 함께 17세기에 등장한 야담, 잡기류이다. 특히 17세기 중엽에 이르면 그 이전까지의 야사, 야담류 57종을 모아 대동야승이라는 책이 엮어져 나오기도 하였다. 
②, ④ 모두 조선 후기 

 

 

 

 Q  (가)에 들어갈 기관으로 옳은 것은?

 

5월에 조서를 내리기를 “개경 내의 사람들이 역질에 걸렸으니 마땅히 (가) 을/를 설치하여 이들을 치료하고, 또한 시신과 유골은 거두어 묻어서 비바람에 드러나지 않게 할 것이며, 신하를 보내어 동북도와 서남도의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라.”라고 하였다.
- 고려사 -

 

① 의창
② 제위보
③ 혜민국
④ 구제도감

 

【해설】 정답 ④
(가)는 구제도감 - 고려 예종 때 질병이나 자연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구제도감과 구급도감을 임시 기관으로 설치
● 예종 - 얘 7재야(양) 감(좋은) 보청기 구해도

얘(예) 예종
7재 관학진흥책 7재
야(양) 양현고
감 감무파견
보 보문각
청 청연각
구 구제도감
해(혜) 혜민국
도 도관건립
● 광종 - 광노안과  공복주제 송광풍 여사
광 광종
노 노비안검법
과 과거제도
공복 백관의 공복(자.단.비.녹)
주 주현공부법 州縣貢賦法
제 제위보濟危寶
송 송과외교
광 광덕
풍 준풍
여 균여
사 귀법사
① 의창은 고려 태조가 흉년에 빈민 구휼을 위해 설치한 것이며, 고구려의 진대법을 발전시킨 것
② 제위보는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고려 광종이 설치한 것이다. 
③ 혜민국은 고려 예종 때 설치한 의약을 전담케 한 의료 기구이다. 

 

 

 

 Q  다음 사건이 일어난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그들 조선군은 비상한 용기를 가지고 응전하면서 성벽에 올라 미군에게 돌을 던졌다. 창칼로 상대하는데 창칼이 없는 병사들은 맨손으로 흙을 쥐어 적군 눈에 뿌렸다. 모든 것을 각오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드는 적군에게 죽기로 싸우다 마침내 총에 맞아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① 군포에 대한 양반들의 면세특권이 폐지되었다.
② 금난전권을 제한하려는 통공정책이 시작되었다.
③ 결작세가 신설되면서 지주들의 부담이 증가하였다.
④ 영정법이 제정되어 복잡한 전세 방식이 일원화되었다.

【해설】 정답 ①
1871년 신미양요, 고종(흥선대원군 통치기)
② 신해통공 - 정조, ③ 균역법 - 영조, ④ 영정법 - 인조

 

 

 

 Q  (가), (나) 신분층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오래도록 막혀 있으면 반드시 터놓아야 하고, 원한은 쌓이면 반드시 풀어야 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다. (가) 와/과 (나) 에게 벼슬길이 막히게 된 것은 우리나라의 편벽된 일로 이제 몇백 년이 되었다. (가) 은/는 다행히 조정의 큰 성덕을 입어 문관은 승문원, 무관은 선전관에 임명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들 (나) 은/는 홀로 이 은혜를 함께 입지 못하니 어찌 탄식조차 없겠는가?


① (가)의 신분 상승 운동은 (나)에게 자극을 주었다.
② (가)는 수차례에 걸친 집단 상소를 통해 관직 진출의 제한을 없애 줄 것을 요구하였다.
③ (나)에 해당하는 인물로는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된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등이 있다.
④ (나)는 주로 기술직에 종사하며 축적한 재산과 탄탄한 실무 경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다.

【해설】 정답 ③
(가)는 서얼, (나)는 좁은 의미로서의 중인, 즉 기술관
③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된 인물들은 서얼 계층

 

 

 

 Q  다음 자료에 나타난 사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 그러므로 사람은 평등하며 차별이 없나니, 사람이 마음대로 귀천을 나눔은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 도인은 차별을 없애고 선사의 뜻을 받들어 생활하기를 바라노라.


① 이 사상에 대해 순조 즉위 이후 대탄압이 가해졌다.
② 이 사상을 바탕으로'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편찬되었다.
③ 이 사상을 근거로 몰락한 양반의 지휘 아래 평안도에서 난이 일어났다.
④ 이 사상을 근거로 단성에서 시작된 농민봉기는 진주로 이어졌다.

 

【해설】 정답 ②
동학에 대한 내용
① 천주교, ③ 홍경래의 난, ④ 임술농민봉기 

 

 

 

 Q  다음 사실이 있었던 시기의 향촌사회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황해도 봉산 사람 이극천이 향전(鄕戰) 때문에 투서하여 그와 알력이 있는 사람들을 무고하였는데, 내용이 감히 말할 수 없는 문제에 저촉되었다.

 

① 향전의 전개 속에서 수령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② 신향층은 수령과 그를 보좌하는 향리층과 결탁하였다.
③ 수령은 경재소와 유향소를 연결하여 지방통치를 강화하였다.
④ 재지사족은 동계와 동약을 통해 향촌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해설】 정답 ③
향전은 조선 후기에 벌어진 현상
③ 경재소는 1603년에 이미 폐지되었고, 유향소는 향전으로 인해 그 영향력을 점점 잃어갔으며 신향 세력들이 오히려 이곳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향회는 부세 자문기구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Q 
 
다음 사건이 일어난 왕의 재위 기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임꺽정은 양주 백정으로, 성품이 교활하고 날래고 용맹스러웠다 그 무리 수십 명이 함께 다 날래고 빨랐는데, 도적이 되어 민가를 불사르고 소와 말을 빼앗고, 만약 항거하면 몹시 잔혹하게 사람을 죽였다, 경기도와 황해도의 아전과 백성들이 임꺽정 무리와 은밀히 결탁하여, 관에서 잡으려 하면 번번이 먼저 알려주었다.

 

① 동인과 서인의 붕당이 형성되었다.
②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며 불교를 옹호하였다.
③ 삼포에서 4∼5천 명의 일본인이 난을 일으켰다.
④ 조광조가 내수사 장리의 폐지, 소격서 폐지 등을 주장하였다.

 

【해설】 정답 ② 
임꺽정은 백정 출신으로 조선 명종 때 황해도 구월산에서 활동하였다.

① 조선 선조 때 붕당이 형성되었다.

② 인종이 즉위 다음 해에 사망하자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문정왕후는 보우를 중용하고 교·선 양종을 부활시켰으며 승과와 도첩제도 다시 실시하는 등 불교를 일시적으로 중흥시켰다.

③ 중종 때 일어난 삼포왜란으로 비변사가 임시기구로 설치되었다.

④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득세하자 중종은 사림을 등용하여 이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조광조를 등용하였고, 조광조는 사림 위주의 급진적 개혁을 주도하다가 기묘사화로 제거되었다.




 Q 
 
밑줄 친 ‘그’의 저술로 옳은 것은?

서울의 노론 집안에서 태어난 는 『양반전』을 지어 양반사회의 허위를 고발하였다. 그는 또한 한전론을 주장하였으며, 상공업 진흥에도 관심을 기울여 수레와 선박의 이용 등에 대해서도 주목하였다.

 

① 『북학의』
② 『과농소초』
③ 『의산문답』
④ 『지봉유설』


【해설】 정답 ②
<양반전>은 연암 박지원의 한문 문학이다.

①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청과의 통상을 확대하고 수레와 선박 이용 및 생산 자극을 위해 절약보다 소비 중시(우물물에 비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② 정조 때 박지원이 혁신적 농업과 상업적 농업으로의 개선 및 생산성 증대 등의 내용을 담은 <과농소초>를 저술하였다.

③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실옹과 허자의 대화를 통해 지전설과 무한 우주론을 주장하였다.

④ 광해군 때 이수광(실학의 효시)이 <지봉유설>을 편찬하였다.

● 
중상학파~이용후생의 학풍, 노론중심, 지주제 인정, 서울을 배경

  • 유수원~우서, 대상인의 지역사회개발 참여
  • 홍대용~임하경륜, 의산문답, 균전제 주장, 신분제도의 철폐, 의산문답에서 지전설 주장
  • 박지원~열하일기, 과농소초, 양반전, 화폐유통의 필요성, 수레와 선박의 이용, 양반문벌제도의 모순 지적
  • 박제가~북학의, 청과의 통상강화, 수레와 배의 이용을 늘릴 것, 절약보다 소비촉진 / 정조 때 유득공, 이덕무, 박제가, 서이수 등 일부 서얼 출신들이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 정조 총애 박제가 : 정조 - 서초구 거상 융건 화장대 만행 수공 

 




 Q 
 
(가) 시기에 있었던 일로 옳은 것은?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 시행


① 과전법 공포
② 이시애의 반란
③ 『농사직설』 편찬
④ 정도전의 요동정벌 추진

【해설】 정답 ③
세종-조공왕갑칠내집혼자농삼향의총여정앙측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과 공법(전분6등과 연분9등) 실시는 조선 세종 때
세종 초기에 대마도 정벌을 실제로 주도한 인물은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
① 과전법 공포는 고려 말 공양왕 때
②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가 난은 조선 세조 때의 일이며, 이를 계기로 유향소가 폐지
③ 세종 때 정초가 최초의 우리 농서로 농민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농사직설>을 편찬
④ 조선 초 명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태조 때

 

 

 


 Q 
 
(가)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일로 옳은 것은?

(가) 남인들이 대거 관직에서 쫓겨나고 허적과 윤휴 등이 처형되었다. 
(나)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노론과 소론이 정계에 복귀하였다


① 송시열과 김수항 등이 처형당하였다.
② 서인과 남인이 두 차례에 걸쳐 예송을 전개하였다.
③ 서인 정치에 한계를 느낀 정여립이 모반을 일으켰다.
④ 청의 요구에 따라 조총부대를 영고탑으로 파견하였다.


【해설】 정답 ① 
(가)는 숙종 때 허적의 유악 사건과 허견의 역모 사건으로 남인이 실각한 경신환국
(나)는 숙종 때 인현왕후가 복위되는 갑술환국
① 경신환국 이후 장희빈의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려는 것을 송시열을 중심으로 노론들이 반대하다 사사당한 기사 환국이 일어나 남인들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② 현종 때에 해당하는 일로 (가) 이전 
③ 선조 때
④ 효종 때 나선 정벌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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