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공동체 사회
● 구석기 시대
1. 구석기 시대 - 동굴, 바위그늘, 평지(집터)
․함북 웅기 굴포리 ⇒ 두만강
종성 동관진 ⇒ 맘모스, 코뿔소 화석, 석기, 골각기
․평남 덕천 승리산동굴 ⇒ 아래턱뼈
평양 만달리동굴 ⇒ 머리뼈, 아래턱뼈
평양 상원 검은모루동굴
․황해도 평산 해상동굴
․경기도 연천 전곡리 ⇒ 주먹도끼(아프리카 아술리안형 도끼와 유사)
․충남 - 공주 석장리 ⇒ 집터(화덕자리,후기구석기)
․충북 단양 상시리 ⇒ 바위그늘, 인골(상시인)
청원 두루봉동굴 ⇒ 어린이뼈(홍수아이인)
제천 점말동굴
․강원도 명주 심곡리
․제주도 빌레못동굴
2. 구석기인의 생활과 문화 - 수렵, 채취생활
․사냥도구 - 주먹도끼, 찍개, 찌르개
․요리도구 - 긁개, 밀개
․공작도구 - 새기개
● 신석기인의 등장
1. 신석기인의 등장 (B.C. 4000 ~ B.C. 10세기)
․전기 (BC 6000) : 원시 민무늬토기(原始無文土器),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
- 함북 굴포리, 평북 만포, 강원도 오산리, 부산 동삼동, 경남 상노대도
(만주 흑룡강 중류, 대마도)
․중기 (BC 4000) :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 함북 굴포리, 평남 대동 청호리, 서울 강동 암사동, 경기도 양주 미소리, 부산 영도 동삼동
(요동반도, 송화강 유역, 內몽고, 발해주)
․후기 (BC 2000) : 平底즐문토기, 물결무늬토기(波狀文土器), 번개무늬토기(雷文土器)
⇒ 중국 칠무늬(彩文土器) 영향받음
- 함북 청진 농포동, 평남 온천 궁산리, 황해도 봉산 지탑리, 경기도 부천 시도,
강원도 춘천 교동
2. 신석기인의 생활 - 강가, 바닷가, 내륙지방(후기)
․어로 - 돌로 만든 그물추(石錘), 작살, 낚시, 조개잡이
사냥 - 돌로 만든 화살촉, 창 - 사슴, 노루, 멧돼지
과일 채집
․농경 시작 - 괭이, 반달돌칼(추수용)
피, 기장, 조 같은 밭곡식 재배
․주거지 - 움집, 원형→정방,장방형 변화
가운데 화덕자리, 저장구덩
뼈바늘, 가락바퀴(직물), 꾸미개
● 신석기시대의 사회와 문화
1. 씨족 공동체의 사회 - 취락을 이루고 집단생활, 자급 자족하는 경제 독립체
․기본 사회 단위 - “씨족” ⇒ 촌락을 이루고 삶 (혈연중심)
예) 혁거세의 전설 - 6村
․토테미즘 - 자연물과의 친근관계 ; 다른 씨족과 구별지음
예) 곰, 호랑이...
․씨족회의 → 신라의 和白
․공동 생산활동 → 두레
2. 무속신앙
․애니미즘 - 우주의 만물이 영혼을 지니고 있다 ; 영혼 불멸 사상
예) 태양, 산, 강, 나무
․샤머니즘 - 주술 (질병·불행 퇴치)
3. 원시예술
․토기 - 빗살무늬토기, 번개무늬(雷文)토기
․조각품
- 암사동 : 동물모양 토우
- 오산리 : 흙으로 빚은 안면상
- 동삼동 : 눈과 입을 뚫은 패면(貝面), 장식용 구슬
성읍국가, 연맹왕국
● 청동기의 사용과 성읍국가의 성립
1. 청동기의 사용 (B.C. 10세기 ~ B.C. 4세기)
․비파형동검, 다뉴조문경, 무문토기, 고인돌(支石墓) ⇒ 송화강, 요하유역, 한반도
2. 청동기인의 생활 - 구릉지대 생활 (농경생활)
․청동제 도끼, 칼, 공구
※ 청동제 농구는 발견되지 않음
․벼농사 시작 : 반달돌칼(半月形石刀) - 추수할 때 이삭 자르개
홈돌자귀(有溝石斧) - 땅을 가는 기구
․조, 수수, 보리 등도 경작 (벼는 중국에서 전래 추측)
․움집 : 화덕자리는 모서리에 위치, 두 개 있는 경우도 있음
․고인돌(支石墓)과 돌널무덤(石棺墓)
- 마제석검, 청동기 발견
3. 성읍국가의 성립
․권력 집중 ; 청동기 소유, 고인돌
● 고조선의 성립과 발전
1. 고조선사회의 성장
․고조선(요하와 대동강 유역), 부여(송화강 유역), 예맥(압록강 중류 지역)
임둔(동해안 함흥평야), 진번(황해도), 진국(한강이남)
2. 철기의 사용 (B.C. 4세기)
․대동강 유역 → 일본 야요이 문화
․농구의 발달, 철제무기
․세형동검, 청동과(창) - 독자적인 양식
․다뉴세문경
․온돌 문화 시작(움집), 목조가옥
․널무덤(土壙墓), 독무덤(甕棺墓)
․중국 문화의 영향 - 명도전, 오수전, 왕망전(김해패총)
3. 위만조선
․한(漢)과 대립
․한 武帝의 침략 (B.C. 109) ⇒ 1년후 멸망 (B.C. 108)
4. 한의 군현
․한 4군현 설치 (낙랑,진번,임둔) + 현도(濊의 땅)
- 20년후 진번, 임둔 폐지 (B.C. 82) ← 토착 세력의 반발
현도군의 만주로 이동 (B.C. 75) ← 고구려 신흥세력
- 후한 공손씨 대방군 설치 (옛 진번군 땅)
- 고구려에 의해 낙랑군 소멸 (A.D. 313)
백제에 의해 대방군 소멸
․목곽분(木槨墳), 전축분(塼築墳)
․고조선 시대의 8조목 → 60여 조목
● 여러 연맹왕국의 형성
1. 부여
․중국과 우호, 고구려와 적대
․A.D. 494년 멸망
2. 고구려의 등장
․A.D. 1세기초 “王” 칭호
․태조왕(53~146?)
- 옥저 복속, 요동 공격
3. 진한과 삼한
․고인돌, 간돌검(마제석검) 부장
․한과 직접 무역원했지만 위만조선의 방해로 좌절
․철제농기구, 청동검, 붓
● 연맹왕국의 사회와 정치
1. 촌락과 농민
․농업
- 밭농사 : 잡곡재배
논농사 : 벼재배 ⇨ 저수지
- 신농제 : 5월 씨뿌린후
추수감사제 : 10월 추수후
․목축성행 (관직이름에 동물이름)
- 부여 : 소·말·돼지·개
삼한 : 소·말·닭
․어로 - 반구대 암각화 (고래 등 물고기 그림)
2. 성읍국가의 구조
․양인 신분이 대다수
․지배자(豪民) : 부족장
- 부여 : 가(加성)
고구려 : 형(兄), 상가(相加)
옥저·동예 : 삼노(三老), 거수(渠帥), 읍군(邑君)
삼한 : 신지(臣智), 읍차(邑借), 험측(險側), 불례(不例)
․노예
3. 왕권의 성장
․성읍국가 → 연맹왕국 → 중앙 집권적 지방통치 체제
- 부여의 四出道, 고구려의 5部 (고국천왕)
․형제상속 → 부자상속
․大加 : 정치적인 권력 소유자
- 使者 거느림 ⇨ 연맹체적인 遺制
고구려 : 使者,조의(皂衣),先人
- 순장 ⇦ 많은 노예 거느림
● 연맹왕국 시대의 문화
1. 법률 - 단순, 엄격
․고조선 8조목
- 사람을 죽인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 남에게 상해를 입힌자는 곡물로서 배상한다.
- 남의 물건을 훔친자는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
단, 스스로 속죄하려는 자는 1인당 50만전을 내야한다.
․부여의 4조목
- 사람을 죽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
- 절도를 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갚는다.
-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
- 부인의 질투를 특히 미워하여 이를 사형에 처한다.
시체를 가져 갈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한다.
․살인과 상해에 대한 처벌 - 개인의 생명과 노동력 존중
․절도에 대한 처벌 - 사유재산 존중
․간음과 질투에 대한 처벌 - 가부장적인 가족제도
2 종교
․제정일치 → 종교 분리(주술사→제사장)
․삼한 : 천군(제사장) - 소도(蘇塗)주관
․추수 감사제
- 부여 : 영고 (12월)
고구려 : 동맹
삼한 : 시월제 (10월)
동예 : 무천
․신농제 (5월)
․영혼 불사 ⇨ 장례를 후하게 지냄 (부장,순장,후장)
- 조상 숭배사상
․점복(占卜)의 습관
3. 예술
․청동 장식구 - 사실적인 조각, 기하학적 무늬
․암각화
- 고령 양전동 : 동심원, 십자형, 가면
- 울주 천전리 : 원, 삼각형, 능형(菱形) 무늬에 동물그림
반구대 : 고래·거북·사슴·범·곰·멧돼지·토끼, 사냥장면, 고래잡이
중앙집권 귀족국가의 발전-삼국시대
●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성장
1. 고구려의 성장과 백제의 흥기
1) 고구려의 성장
․태조왕(53~146?) - 소노부에서 계루부 高氏로의 왕위계승 확립
․고국천왕(179~196) - 왕권강화, 통치체제의 중앙 집권화
- 5族 → 5部
- 형제상속 → 부자상속
- 연나부 명임씨 출신의 왕비
- 진대법 실시
․미천왕 14년 - 낙랑군 축출 (대동강유역), 대방군 차지
2)백제의 흥기
․고이왕(234~286)
- 27년(260) : 6좌평, 16관등의 관직·복색
- 뇌물, 도둑질 - 3배 벌금
․근초고왕(346~375)
- 24년(369) : 마한 차지
- 26년(371) : 고구려 평양성 공격 → 고국원왕 전사
- 부자상속, 眞氏 왕비
- 백제의 國史 “書記” 편찬 (博士 고흥)
․침류왕
- 원년(384) : 불교수용
2. 고구려의 융성
․고국원왕(331~371) - 전연과 백제에게 침입 당함
․소수림왕(371~384) - 국가 체제의 재정비
- 2년(372) : 불교 수용, 태학 설립
- 3년(373) : 율령 반포
․광개토왕(391~413) - 정복활동 추진
- 요동, 만주 차지 ⇨ 숙신(肅愼)복속
- 임진강, 한강까지 영토 확대
- 신라를 도와 왜 섬멸 (낙동강)
- ‘永樂’ 연호 사용 ⇨ 중국과 대등한 입장 과시
․장수왕(413~491)
- 중국 남·북조 동시외교 ⇨ 견제
- 15년(427) : 평양천도
→ 나제동맹(433) - 눌지마립간
→ 백제(개로왕 18년,472)가 중국 북조 위에 고구려 남침 요청
- 63년(475) : 백제 서울 한성 함락, 개로왕 처형
→ 백제 웅진(공주) 천도
- 죽령~남양만, 만주, 요동 점령
3. 신라의 흥기와 가야
․내물마립간(356~402) : 이사금 → 마립간 왕호 사용, 金氏 왕위 독점
․법흥왕 19년(532) : 본가야 점령
․진흥왕 23년(562) : 대가야 점령
․본가야 (낙동강 하구) - 해상활동 (낙랑·대방, 예, 왜 등과 교류)
4. 신라의 융성과 백제의 중흥
1) 신라의 융성
․눌지마립간(417~458) : 부자상속제 확립
․자비~소지마립간 : 6村 → 6部
․소지마립간 : 사방에 우역(郵驛) 설치, 서울에 시장 개설
․지증왕(500~524)
- ‘왕’칭호, ‘新羅’ 국호 사용
- 우경 시작, 수리사업 진행
- 朴氏 왕비족
- 우산국 정복
․법흥왕(514~540) : 중앙 집권적 통치체제 완성
- 7년(520) : 율령반포
- 14~22년(527~535) : 불교 공인
- 19년(532) : 본(금관)가야 점령
- 23년(536) :‘建元’ 연호 사용
- 병부와 상대등 설치
․진흥왕(540~576)
- 23년(562) : 대가야 점령
- 한강점령, 함흥평야 진출
- 순수비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2) 백제의 중흥
․웅진(공주)시대
- 동성왕(479~501) : 南濟와 외교, 소지왕과 결혼외교, 탐라 복속
- 무녕왕(501~523) : 梁과 교류, 지방에 22담로 설치
․사비(부여)천도 - 성왕(523~554) : 국호를 ‘남부여’ 개칭
- 22부의 중앙관부, 5부·5방의 지방제도
- 승려 겸익 등용 ⇦ 불교 진흥
- 중국 남조와 외교
- 진흥왕과 동맹 → 한강 진출
→ 신라의 한강 독차지 → 신라공격, 관산성에서 전사
● 대외적인 정복활동과 한족과의 투쟁
1. 대외 관계의 전개 - 영토확장 위한 항쟁, 중국 남·북조 대립 이용
북방유민·왜 이용, 중국 문화의 섭취
1) 고구려 : 북조와는 투쟁, 남조와는 교섭 (遠交近攻 정책)
․동천왕(227~248) - 압록강입구 서안평 공격
- 18년(244) : 위 모구검의 침입 → 국내성 함락
- 19년(245) : 왕기의 침입 → 동천왕 동해안 피난
․미천왕14년(313) : 낙랑군 축출, 요동 공격 ⇦ 위 멸망, 晋의 통일
․고국원왕
- 12년(342) : 모용휘의 침입 ⇦ 중국 5호16국 난립, 전연(선비족) 만주 진출
- 41년(371) : 백제 근초고왕 평양 침입, 고국원왕 전사
․소수림왕 - 국가 체제 재정비
2) 백제
․남·북조 모두 교류 ⇨ 고구려 견제
․왜 이용 신라 공격 → 광개토왕의 왜 정벌 → 고구려의 압력 강화
→ 나제동맹(눌지마립간 17년,433)
2. 고구려의 隋·唐과의 투쟁
․6세기 후반 신라의 한강 진출 → 고구려·백제 동맹
→ 중국과의 통로인 당항성(남양) 공격
․중국 남·북조 → 수의 통일(589), 북방 돌궐 흥기
- 고구려 : 돌궐과 연결하여 수에 대항
- 백제 : 왜와 교섭
- 신라 : 수와 연결
․영양왕 9년(598) - 요서 공격 → 수문제 고구려 침략 ⇨ 실패
․영양왕 23년(612) - 수양제 요동성,평양 공격 → 을지문덕 활약
․수 멸망, 당 설립 ⇨ 고구려 천리장성 축조
- 연개소문의 독재정치, 김춘추의 외교 거절(보장왕 원년,642)
․보장왕 4년(645) - 당 태종 침략 ⇨ 안시성 전투
● 정치와 사회
1. 중앙 귀족의 탄생 - 중앙 집권적인 귀족국가
1) 고구려 : 왕족 계루부 고씨, 옛 왕족 소노부, 왕비족 절노부(명임씨)
- 대대로(大對盧) 취임, 선거 권리
2) 백제 : 왕족 부여씨, 왕비족 진씨, 석씨 - 주요 관직 독점
- 16관등을 3구분하는 색복제도
3) 신라 : 골품제 (성골, 진골, 육두품~일두품)
- 육두품(득난),오두품,사두품 : 일반 귀족
삼두품,이두품,일두품 : 일반 평민층 → 후에 소멸
- 골품에 따라 가옥규모, 복색, 車騎, 器用 제한
- 갈문왕(고구려의 古雛加)에 왕족과 왕비족만 임명
․진골 : 17관등 모두 승진 가능
- 이벌찬까지, 군부대(6정) 최고 지위관 장군(급벌찬~이벌찬) 가능
․육두품 : 6관등인 아찬(阿湌)까지
․오두품 : 10관등은 대내마(大奈麻)까지
․사두품 : 12관등 대사(大舍)까지
2. 정치조직 - 국왕을 중심으로한 일원화 된 관등체제
1) 관등체제
․고구려 - 14등급
- 수상 : 대대로(莫離支)
- 兄(족장), 使者(가신) 존재
․백제 - 3구분 16등급
- 紫服 : 좌평(佐平), ~율(率)
緋服 : ~덕(德)
靑服 : 문독(文督) 이하
․신라 - 17관등
- 紫服 : 이벌찬(伊伐湌) ~ 대아찬(大伐湌)
緋服 : 아찬(伐湌) ~ 급아찬(級伐湌)
靑服 : 대내마(大奈麻) ~ 내마(奈麻)
黃服 : 大舍(知) ~ 조위(造位)
2) 관부
․백제
- 한성시대 : 6좌평
- 사비시대 : 내관 12부, 외관 10부 (22部)
3) 회의제도
․고구려 : 귀족들의 선거에 의한 대대로 임명
조의두대형(皂衣頭大兄) 이상 - 국가 정사를 담당
․백제 : 정사암회의(政事巖會議) - 재상선출
․신라 : 화백제도 (상대등이 의장) - 진골출신(대등) 참여
4) 행정구획
․城 → 郡
- 城主 : 고구려 - 처여근지(處閭近支) (都使)
백제 - 郡將
신라 - 郡太守
․고구려 : 5部 (동,서,남,북,內)
․백제 : 5方 (中,동,서,남,북)
․신라 : 州 단위
․왕경 - 중앙귀족의 근거지
- 백제, 고구려 : 5部
신라 : 6부
3. 군사조직
․신라 - 왕경의 6부, 지방의 52성에 법당(法幢) 설치
→ 州 단위로 설치된 6停이 중요한 구실
- 6정 : 명망군(名望軍), 진골출신 장군
서당 : 모병(募兵)
․지방행정조직 → 군사조직
․고구려의 경당(扃堂) - 지방군의 보충
4. 촌주와 농민
․良人인 자영 농민들이 큰 비중
․신라의 村主 - 오두품, 사두품에 해당하는 특권
- 眞村主, 次村主
● 귀족문화의 발전
1. 문자의 보급
․한자를 우리말 순서대로 배열 - 壬申誓石記 → 吏讀 (釋讀 보충)
․향찰 - 실질적 의미(語幹)는 석독으로 표기, 문법적 요소(접미사)는 음독으로 표기
․순수한 한문식 문장 - 광개토왕릉비(고구려), 사택지적비(백제)
2. 史學과 유교
1) 史學
․고구려 : 國初 “유기(留記)” 100권
→ 영양왕 11년(600) 이문진에 의해 “新集” 5권으로 改修
․백제 : 근초고왕(346~375)때 고흥이 “書記” 편찬
․신라 : 진흥왕 6년(545)에 이사부에 의해 “國史” 편찬
2) 유교
․고구려 : 소수림왕 2년(372) 太學 설립 - 유교 교육
지방 扃堂 - 독서, 활쏘기
․백제 : 博士 제도
․신라 : 원광의 세속오계, 임신서석기
3. 불교의 수용 - 왕실에서 주도
․고구려 : 소수림왕 2년(372) 前秦에서 順道가 불상과 불경 전래
․백제 : 침류왕 원년(384) 東晋에서 摩羅難陀가 불교전래
․신라
- 눌지마립간(417~458)때 고구려를 거쳐온 阿道(黑胡子)에 의해 지방 전래 → 실패
- 梁의 사신인 승려 元表에 의해 왕실에 보급 → 귀족 반대로 실패
-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 순교 → 법흥왕 22년(535) 공인
․호국적 성격이 강함 (인왕경 존중)
- 백좌강회(인왕회) : 국가의 평안을 비는 의식
- 팔관회
․계율종(戒律宗) 주류
- 백제의 겸익(謙益), 신자의 자장(慈藏) : 大國統으로 불교 총관
→ 고구려, 백제 말기에 변화
- 普德의 열반종(涅槃宗) : 금강석 같은 불성을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음
⇦ 도교의 불로장생 사상에 대항
4. 詩歌와 음악 - 종교적인 성격이 강함
․가야 - 구지가, 신라 - 會蘇曲,혜성가
․악기 : 관·현·타악기 등 수십종, 서역에서 받아 들인것도 있음
- 고구려 왕산악이 晋의 칠현금 개량하여 현학금 만듬
가야의 가야금은 우륵을 통해서 신라 전래
5. 미술 - 소박하고 사실적 (건강미)
1) 건축
․고구려 - 현존 지상 건축물은 없음
- 석총(石塚) : 피라밋 식으로 석재를 쌓아 올림 - 태왕릉, 장군총
- 토총(土塚) : 석재로 널방(玄室)을 만든후에 흙으로 봉분 - 쌍영총
․백제
- 초기 귀족 무덤은 고구려와 비슷 (피라밋식 석총) - 서울 석촌동
- 내부를 전(塼) 또는 석재로 쌓은 횡혈식 토총 ⇨ 벽화
- 현존 석탑 : 부여 정림사지탑
익산 미륵사지탑 (목조탑형식)
․신라
- 황룡사 9층 목탑 → 몽고 침입때 소실
- 분황사 모전탑(模塼塔)
- 첨성대
․사원 : ‘一塔三金堂式’ → ‘一塔一金堂式’
2) 조각 - 불상이 主 (석가상이나 미륵반가상을 많이 조각)
․고구려 : 금동미륵반가상
․백제 : 서산 마애석불
낮고 간소한 四花冠을 쓴 금동미륵반가상
․신라 : 답형이 새겨진 높은 寶冠을 쓴 금동미륵반가상
3) 회화
․고구려 : 고분의 벽화 - 토총의 널방(玄室) 사면벽, 말각조정(抹角藻井)의 천장
- 四神총, 角抵총, 무용총, 수렵총
․백제 : 고구려의 것보다 우아함
- 공주 宋山里 전축분, 부여 陵山里 석실분
․신라 : 수혈식(竪穴式) 적석총에는 고분 벽화는 없음
- 馬具의 다래(障泥)에 그린 천마도
전제왕권의 성립-남북국시대
● 신라의 반도 통일과 발해의 건국
1. 신라의 반도 통일
1) 백제의 멸망
․신라 김춘추 - 당과 연맹
→ 소정방의 백제 공격 (의자왕 20년,660), 김유신 공격
․백제 멸망 (의자왕 20년,660)
․백제 부흥군
- 복신(왕족), 도침(승려)등이 주유성(한산)에서 부흥운동
→ 내분으로 와해, 周留城 함락(663)
- 흑지상지 任存城(대흥)에서 부흥운동
→ 임존성 함락(665)
2) 고구려의 멸망
․보장왕 20년(661) : 소정방 대동강 입구를 거쳐 평양공격
→ 연개소문에 패해 퇴각(662)
․보장왕 26년(667) : 당의 李勣 재공격, 신라도 공격 가담
․보장왕 27년(668) 멸망 - 1년간 항쟁하였으나 멸망 (문무왕 8년)
․안승을 받든 검모잠의 2년간 부흥운동
․안승이 신라에 망명하여 고구려왕(보덕왕)에 임명됨 (670)
2. 신라의 당 축출
․당의 지배의도
- 옛 백제땅에 웅진도독부 설치,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을 웅진도독에 임명
- 경주에 계림도독부 설치 (문무왕 3년),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에 임명
→ 문무왕과 부여륭으로 하여금 웅진(공주) 취리산에서 화친케 함
- 고구려 멸망후 9도독부두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둠 (668)
․당 축출
- 검모장의 부흥운동 지원, 안승을 고구려왕에 임명 (670)
- 부여륭의 백제군과 당군 격파
→ 사비성 함락 소부리주 설치 (문무왕 11년,671) ⇨ 옛 백제땅 지배권 장악
- 당은 김인문(문무왕 동생)을 일방적으로 신라왕에 임명하고 신라공격
→ 매초성(의정부) 전투 (문무왕 15년,675)
- 한강유역 전투에서 당군 축출 (문무왕 16년,676)
→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옮김 (676)
- 대동강 ~ 원산만 이남의 땅 점유
3. 발해의 건국 (698)
1) 대조영의 발해 건국
- 동모산(길림성 돈화 부근)을 근거, 震國王이라 칭함
- 고구려 유민 + 말갈인
2) 대외 관계
․초기 : 당과 신라에 적대적
- 무왕(719~737)때 해군을 보내 登州(산동반도) 공격 (732)
- 신라는 북경에 장성을 축조 (721)
- 신라·당 연합세력 발해 협공 (733)
- 북쪽 돌궐, 남쪽 일본과 외교
․후기 : 신라와도 교류
3) 영토 확장
․무왕(719~737) : 북만주 일대 차지
․문왕(737~794) : 당의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요동반도 지배
- 소고구려국 흡수
․선왕(818~830) : 전성기를 이룸
→ 동-발해주, 서-開元, 남-함남, 북-흑룡강
4. 신라의 대외 정책의 전환
1) 당과의 교류
- 당의 침략 세력 후퇴 ⇨ 신라·발해 모두 당과 평화적 외교관계 유지
․경제적인 교류 : 조공의 형식
- 수출품 : 원료적인 것 → 공예품, 수공업제품 (만불산,견직물)
- 수입품 : 의료·의류·공예품 - 귀족들의 사치품
→ 흥덕왕 9년(834) 사치를 금하는 令
․문화의 수입
- 서적, 미술품 수입
- 유학 : 승려 → 유학자 주류
2) 일본, 아라비아 상인과 교류
● 전제주의(專制主義)下의 신라사회
1. 전제왕권과 귀족
․성골의 소멸 : 선덕여왕,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대가 끊김
․진골 출신 태종무열왕(654~661) 등극
-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누르고 왕위 차지
- 왕비족 : 박씨 → 김씨
- 갈문왕제도 사라짐
․전제왕권의 성립 : 신문왕(681~692)
- 귀족세력의 숙청 (김흠돌의 반란 계기)
- 정치,군사제도의 정비
․전제 왕권의 안정 : 성덕왕(702~737)
- 萬波息笛으로 상징됨
․왕족인 김씨가 정치적 특권 독점 ⇨ 일반 진골 세력의 약화
- 육두품 세력의 상대적 부각 (왕권과 결합)
2. 정치 기구의 정비
․집사부의 중요시 - 진덕여왕 5년(651) 설치
- 집사부 中侍(侍中)의 부각 : 왕권의 지배
- 상대등의 약화 : 귀족의 대표자, 화백회의 長
․지방 조직의 정비 (9州 5小京)
- 州 : 신문왕 5년(685)에 9州로 정비
州의 장관은 문무왕때 軍主에서 總管으로 변함 → 원성왕때 都督으로 개칭
- 5소경 : 중원경(충주), 북원경(원주), 금관경(김해), 서원경(청주), 남원경(남원)
- 군(태수), 현(령), 촌
- 향·소·부곡 설치 : 천민집단
․신문왕 9년(689)에 달구벌(대구)로 천도 계획 → 실패
․총관(도독)~현령은 중앙귀족 임명
촌주, 주·군·현의 吏職에는 토착세력 임명
⇨ 세력 견제위해 상수리제도, 사민정책 생겨남
3. 귀족 경제의 변화
․국가에 공을 세운 귀족 : 食邑, 사전(賜田), 馬阹(牧馬場),租(곡물)
일반 관료 : 祿邑 지급 (租+勞役)
․신문왕 7년(687) : 관료전 지급 - 조의 수취만 허용
․신문왕 9년(689) : 녹읍의 폐지
→ 歲租(녹봉제)의 지급
․경덕왕 16년(757) : 녹읍의 부활 → 관료전과 세조 폐지
⇦ 귀족들의 전제주의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세력이 커짐
․귀족들의 중심지 : 왕경인 金城(경주)
4. 군제의 개편
․6정 → 9誓幢(중앙), 10停(지방)
- 9서당 : 왕의 직속부대, 고구려·백제·말갈인 포함
* 신라인 : 녹금서당, 자금서당, 비금서당
백제인 : 백금서당, 청금서당
고구려인 : 황금서당, 벽금서당(보덕국인)
말갈인 : 흑금서당
- 10정 : 국방 + 치안
5. 민중생활
․촌 : 10호 가량의 혈연집단 거주
촌주를 통하여 국가의 지배, 장적(帳籍) 작성
- 장적 : 연수(煙數)-戶數, 인구수, 牛馬수, 토지면적
뽕나무, 잣나무(柏), 호두나무(楸)의 本수
戶口·牛馬의 감소 기입됨
→ 3년에 한번씩 조사
․力役 징수 기준 : 연령에 의하여 6등급 분류
丁의 수에 의하여 9등급 분류
․官謨畓(田)·내시령답(內視令畓)·麻田 경작
- 촌주 : 국가로부터 촌주위답(村主位畓) 받음
- 촌민 : 연수유답(烟受有畓) 받음
● 전제주의하의 신라문화
1. 불교의 발전
․당 유학 : 자장, 의상, 원측
인도 유학 : 혜초 - 왕오천축국전
․교종 5교 성립 : 열반종, 계율종,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
․의상 : 화엄종 성립, 부석사 창건
→ 중앙집권적 지배체제, 귀족사회에서 환영받음
․원효 : 법성종이 主이긴 하나, 불경 연구범위 매우 넓음
․정토신앙 : 나무아미타불 → 극락왕생
- 원효에 의해 널리 전도됨
․지방사회 : 법상종의 미륵신앙 크게 유행
- 진표 : 경덕왕때 금산사 중심활동 (백제유민 출신)
2. 유교의 대두
․국학(國學) 설립 : 신문왕 2년(682) → 태학감(太學監)으로 개칭
- 3科 구분 : 논어·효경·禮記·周易
” · ” ·左傳·毛詩
” · ” ·尙書·文選
* 논어·효경 + 오경or문선
․독서삼품과 설치 : 원성왕 4년(788)
- 관리채용 위한 국가 시험제도
․진골 중심의 골품제와 이를 옹호하는 불교에 대항하는 성격
3. 학문과 기술
․史學
- 김대문 (성덕왕,진골출신) : “계림잡기”,“고승전”,“화랑세기”,“악본”,“한산기”
→ 不傳
- 김장청 : “김유신행록”
․천문학, 曆學
- 선덕여왕(632~647)때 첨성대 건축 ⇦ 통일전
- 물시계(漏刻) 널리 사용 → 漏刻典 설치 (성덕왕 17년,718)
- 김암 (혜공왕代) : “둔갑입성법(遁甲立成法)” 저술
․수학, 주조술, 목판 인쇄술 발달
- 銅佛, 銅鐘
- 석가탑 “다라니경” : 현존 最古 목판인쇄물 (경덕왕 10년,751 이전)
4. 향가와 한문학
․향가 : 처음 4구체 → 10구체의 정형시
- 득오 : “모죽지랑가”
월명사 : “두율가(兜率歌)”,“제망매가”
충담사 : “찬기파랑가”,“안민가”
- 진성여왕(887~897)때 대구화상과 위홍에 의해서 “삼대목”으로 집대성
․한문학
- 강수 : “청방인문서(請放仁問書)”
설총 : “풍왕서(諷王書)”,“甘山寺 造像記”
- 김필오 : “聖德大王 神鐘銘” 碑文
5. 음악과 무용
․악기의 다양화
- 3현 :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
3죽 : 대금, 중금, 소금
拍板, 大鼓 등..
․향악(鄕樂)의 발전
- 향악에 맞춰 추는 무용 : 처용무, 상염무
․당악 : 궁중의식, 불교의식
6. 미술 - 무르익은 기교로써 이상적인 조화미 강조
․불국사, 석굴암
․석가탑, 다보탑, 화엄사 사자탑
․굴불사의 사면석불, 감산사의 아미타불상·미륵반가상
․범종
- 상원사종 (성덕왕 24년,725) : 현존 最古
성덕대왕 신종 (혜공왕 7년,771) : 현존 最大
․분묘
- 통일전 : 수혈식 적석총 (竪穴式 積石塚) ⇨ 도굴 곤란
- 통일후 : 횡혈식 석실분 (橫穴式 石室墳) - 법흥왕代 무렵에 시작
* 김유신 괘릉 - 12지신상, 문무석, 석사자
․서예
- 김인문 : 태종무열왕碑의 碑額, 화엄사의 화엄경 석경
김생 : 郎空大師碑
● 발해의 사회와 문화
1. 정치와 사회
․지배층 : 고구려 유민
피지배층 : 말갈인
․3성 6부 - 당의 제도 모방
- 3성 : 선조성(宣詔省,門下省), 中臺省(中書省), 政堂省(尙書省)
- 6부 : 忠部(吏部), 仁部(戶部), 義部(禮部), 智部(兵部), 禮部(刑部), 信部(工部)
- 정당성의 大內相이 행정기구의 해고위
․5京 15府의 행정구획 - 고구려적 요소
2. 문화의 양상
․당과 외교관계 수립후 많은 문화 수용
․불교가 널리 행해지고, 지배층은 유교도 중요시
3. 발해의 역사적 위치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
․말간인 - 거란축출 金(여진) 건국 (고려 예종 10년,1115)
호족(豪族)의 시대 - 후삼국, 고려의 통일
● 골품제도의 모순
1. 진골 귀족의 분열
․경덕왕(742~765) : 신라문화 절정기
→ 진골 귀족들의 전제왕권에 대한 반발 시작 (관료전·세조 폐지, 녹읍의 부활)
→ 정치개혁 실패
→ 혜공왕代 혼란
․혜공왕(765~780)代 대혼란
- 혜공왕 4년(768) : 대공의 난 - 3년동안 계속
- ” 10년(774) : 良相(귀족파) 정권탈취
→ 김은거 등 왕권회복 시도 → 실패
- 양상(선덕왕) 즉위 (780)
- 敬信(원성왕) 즉위 (785) ⇨ 태종무열왕계에서 원성왕계로 교체
․下代(원성왕~)의 시작 ⇦ 전제왕권에 대한 귀족들의 반항 - 귀족(진골)연립적 성향
- 상대등의 재부각
- 귀족 연립적 성향에 대한 반항 : 김헌창(태종무열왕계)의 난
․녹읍의 부활 (경덕왕 16년,757)
- 귀족들의 개인재산 증대
- 정치력, 무장력에 의한 왕위 계승 ⇨ 下代 150년 사이 20명의 왕 교체
2. 육두품 세력의 대두
․강수, 설총, 여삼, 녹진, 최치원(10여조의 시무책 - 과거제 포함)
․반 신라적 성향, 신라 진골 귀족에 대한 반항
● 호족의 대두
1. 해상무역의 발달 (9세기 중반)
․장보고 - 청해진 (완도)
․왕봉규 - 강주 (진주)
․작제건(왕건의 조부) - 송악 (개성)
2. 군진 세력의 대두
․해안의 요지에 군진 설치 : 청해진(완도), 당성진(남양), 혈구진(강화)
․패강진(평산) : 선덕왕 3년(782) - 대동강 이남지역 군사담당
․청해진(완도) : 흥덕왕 3년(828) - 당·일본과 무역 → 문성왕 13년(851) 폐지
3. 城主의 자립
․지방 세력가 → 성주, 장군 호칭
․몰락한 중앙귀족, 육두품, 토착촌주 출신
․촌락민에게 조세와 力役 부과 ⇨ 중앙 정부의 경제적 기반 잠식
● 후삼국(後三國)
1. 농민의 봉기
․정부의 조세 독촉 (진성여왕 3년,889) ⇨ 농민 이중부담 (정부+성주)
→ 농민 반란
․상주(사벌주)의 원종과 애노(889), 원주(북원)의 양길,궁예
준산(죽주)의 기훤, 전주(완산)의 견훤
2. 후백제와 태봉
․견훤
- 전주를 근거로 후백제 건국 (효공왕 4년,900)
- 경주(금성) 습격 → 경애왕 사망
․궁예
- 개성의 근거로 후고구려 건국 (효공왕 5년,901), 반신라적 성향
- 국호 : 후고구려 → 마진(도읍을 철원으로 이동) → 태봉
- 관부 정비, 9관등 설정
3. 고려의 건국
․왕건 : 개성(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
- 고려 건국 (경명왕 2년,918), 연호를 천수(天授)
- 친 신라적 성향 ⇦ 견훤 타도
● 고려의 통일
1. 후삼국의 통일
․고려와 후백제 : 안동(고창)~진주(강주)에 이르는 낙동강 서부지역의 전선 형성
․후백제 : 남중국과 교류 ─┐
고려 : 산동반도를 거쳐 북중국과 교류 ─┴─ 중국 五代의 혼란기
․신라의 항복 : 경순왕 9년, 태조18년(935)
․후백제 멸망 : 후삼국의 통일 (태조 19년,936)
2. 호족 연합정책
․북진 정책 : 청진강까지 국경 확장
․신라귀족 우대, 후백제인 냉대
․전국적으로 통일된 관계제도 실시
․지방호족들과 타협·연합 ⇦ 왕권의 불안정 (지방관 파견 못함)
․태조 : “정계”, “계백료서”, “십훈요”
3. 왕권과 호족
․정종 : 왕권강화 위해 평양천도 계획 → 실패
․광종 - 왕권의 안정화
- 광종 7년(956) : 노비 안검법 실시 ⇨ 지방세력 소유의 노비 축소
- ” 9년(958) : 과거제도 실시 - 중국인 쌍기(雙冀)의 건의
⇨ 새로운 관료체계의 기초
- ” 11년(960) : 紫·丹·緋·綠의 공복 제정
- 개국 공신의 축출
․경종
- 전시과 제정 ⇨ 새로운 중앙관료들의 경제적 뒷받침
● 호족의 문화
1. 유교의 성장
․육두품 출신 유학자 - 지방호족이 세운 지방학교를 통해서 유교전파
2. 선종의 유행
․신라 下代 : 선종유행 ⇦ 개인주의적인 경향
․선종 9산 성립 → 지방 호족들로부터 환영
3. 풍수지리설
․도선 : 불교의 선근공덕사상 + 음양오행설
4. 미술
․願塔 유행 : 경주 창림사 삼층석탑(문성왕),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민애왕)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헌안왕)
․비로사나불의 조상 유행, 鐵佛 주조 주류
․부도(浮屠)와 탑비의 유행
문벌귀족 사회 - 고려 시대
● 고려 귀족사회의 성립
1. 귀족정치의 지향
․광종의 개혁 - 과거에 합격한 문벌없는 학자, 중국인 중용 → 광종 사망후 제거
․신라 육두품 계통의 유학자 득세
- 중앙 집권적인 귀족사회 목표, 왕권의 전제화 반대
- 최승로 : 28조의 ‘時務策’
․성종 (981~997)
- 중앙에서 지방관 파견
- 향직 개혁 (향리제도 실시 의미) ⇨ 지방호족들의 지위 격하
- 지방호족들을 중아 귀족으로 흡수 노력
- 혈통을 중시하는 신분제 사회
2. 귀족사회의 확립
․문벌귀족 형성 : 육두품 출신, 지방호족
․가문의 세력 (문벌) 확장 ← 혼인을 통해서 ⇨ 외척세력으로 성장
3. 신분체제의 재편성
․일정한 범위의 친족을 단위로 세습됨
․음서제도 : 5품 이상 문·무반 - 아들 1명에게 관직을 줌
․군반, 향리는 자손이 그 직책 세습 ⇨ 영업전 지급
․신분 변동 빈번 ⇦ 과거시험
- 향리→문반, 군반출신 군인→무반
백정(양인),노비 → 군반걸쳐 무반으로 상승 가능
● 귀족적 통치기구
1. 정치기구 - 성종 2년(983) ~ 문종 30년(1076)
1) 중앙
․3省 체제 :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
- 중서성+문하성 = 중서문하성 or 宰府
․중서문하성(재부) : 2품이상 재신 - 정책결정
3품이하 郎舍 - 간쟁기능
․상서성 : 정책시행 담당
- 6部 : 이부(문관의 인사), 병부(무관의 인사,군사,郵驛)
호부(호구와 조세), 형부(법률,소송)
예부(의례,외교,교육,과거), 공부(山澤,工匠,營造)
산택,공장,영조
․중추원(추부) : 성종때 처음설치, 왕명출납과 군기의 장악
→ 추밀원(樞密院)으로 바뀜
․재신, 추신 : 재추회의 (도당)
․어사대 (→ 사헌부) :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의 잘못 규탄
․어사대 + 낭사 : 臺省 - 서경(署經)권한 (관리의 임명, 법률의 개폐) ⇨ 왕권제약
2) 지방
․12牧 : 성종 2년(983) - 최초의 중앙관 파견
․5道 양界 - 현종 9년(1018)
- 도 : 안찰사(按察使), 군(郡)·현(縣) 설치
- 계 : 병마사(兵馬使), 진(鎭) 설치
․3京 : 開京(개성), 西京(평양), 東京(경주)→南京(서울) ⇦ 풍수지리설
․5都護府 : 안동,안남,안서,안북,안변 ⇦ 군사적인 방비의 중심지
→ 안동과 안남은 후에 폐지
․중앙관 파견 : 고향 지방에 장관으로 임명될 수 없음, 일정기한 설정
․長吏(鄕吏) : 일반 국민과 접촉하는 실제적인 행정사무 담당
․토착세력(향리제도) 억제 : 사심관(事審官)제도, 기인제(其人制)
- 사심관 : 그 지방 출신의 중앙관리를 사심관으로 임명
- 기인제 : 그 자제들을 인질로 상경 숙위(宿衛)케 함
2. 군사조직
1) 중앙군 : 2軍 6衛
․6위 : 성종 14년(995)경에 형성
-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 수도 개경 수비, 변방에 대한 방술(防戌) 임무
- 금오위 : 경찰
- 천우위 : 의장
- 감문위 : 대문의 수위
․2軍 : 6위보다 우위, 6위보다 약간 늦게 형성
- 응양군, 용호군 : 국왕의 친위군
․지휘관 : 상·대장군 ⇨ 중방(회의기구)
․2군 6위는 총 45領으로 구성
- 領 (보승,정용,역령,상령,해령,감문위령)
- 지휘관 : 장군 ⇨ 장군방(회의기구)
2) 지방군
․光軍 (정종 2년,947) → 州縣軍으로 개편
․界 : 鎭마다 사군,좌군,우군의 정규군 주둔
․道 : 보승·정용 - 치안, 방술
一品 - 공역 (노동에 동원)
3. 과거와 음서
․과거 : 제술업, 명경업, 잡업
- 제술업 : 詩·賦·頌·策 등 문학 문신등용, 제술업 중요시
- 명경업 : “書”,“易”,“詩”,“春秋” 등 유교경전
- 잡업 : 명법업·명산업·의업·축금업(점업)·지리업 - 기술관 등용
- 무신등용 과거 시험은 공양왕(마지막 왕)때 실시
- 良人이상 시험 자격, 천민, 승려의 자식은 응시못함
- 심험관 : 지공거(知貢擧)
․음서제도
- 문음(門蔭) : 5품이상 관리의 자손에게 관직허락
- 공음(功蔭) : 공훈이 있는 관리의 자손에게 관직허락
⇨ 특정 가문의 세력을 확대시키는 구실도 됨 ( 예 : 仁州 李氏 )
4. 교육기관
․국자감 (성종 11년,992) : 일종의 종합대학
- 인종(1122~1146)때 京師6學으로 정비 (국자학,태학,사문학,율학,서학,산학)
* 국자학(3품이상),태학(5품이상),사문학(7품이상) - 5經과 經學을 배움
율학,서학,산학 - 8품이하 관리의 자제, 庶人 입학
․성종때 지방자제 상경시켜 교육 → 실패
⇨ 경학박사·의학박사 지방에 파견 → 향교로 발전
● 귀족사회의 경제구조
1. 토지제도
․역분전 (태조 23년,940) : 통일뒤의 논공행상
․전시과
- 경종 원년(976) : 다원적인 원칙 (관품,인품,···)에 의해 지급
- 목종 원년(998) : 성종때의 관제를 기준으로 18科로 구분하여 토지와 柴地 지급
- 科田 : 관리에 대한 보수 → 사망시 반납
組의 수취 국가에서 관장, 직접수취 허락되지 않음
․공음전 : 5품이상 관리, 세습허용한 영업전
租의 직접 수취 (사유지 성격이 강함)
- 문종(1046~1083) : 공음전시과의 지급, 전시과를 개정 확립
․외역전 : 향리, 세습이 되는 영업전 ⇦ 향역이 세습
租의 직접 수취
․군인전 : 군인, 세습가능 ⇦ 군역이 세습
- 군역을 이을 자손이 없으면 반납
→ 구분전 지급 (전쟁 미망인, 군인유족, 생계유지 못하는 관리)
․내장전 : 궁성에 소속, 왕실의 사유지
․공해전 : 관아의 비용 충당
․사원전 : 사원 소유 (영업전이라 부르지는 않음)
2. 귀족의 경제 기반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과전의 세습화, 租의 직접 수취
․사유지를 넓혀감 - 병작제에 의한 수확고의 1/2 수취
․장생고 : 殖利(고리대업) - 귀족,국가,사원
․보(寶) - 이자의 취득으로 운영
- 학보 : 국자감 학생의 장학
- 광학보 : 승려의 장학
- 제위보 : 가난한 사람 구제
- 팔관보 : 팔관회의 경비를 위해
․殖利활동 - 곡물이나 布 사용
3. 민중의 생활
․양인 농민 (白丁) - 국가로부터 토지 못받음
․민전 경작 : 수확의 1/10을 租로 국가에 바침
貢賦 부담 : 주로 布로 바침 (금·은·소금·牛皮 등 특산물)
요역의 의무 : 16~60세 장정, 공사동원
․鄕·部曲·所·驛·津·館 거주자 - 양인 농민보다는 천대 → 양인화
- 향·부곡 : 농업
- 소 : 수공업
- 역·진 : 교통기관
- 관 : 숙박소
․노비계층 - 외거노비의 증가 ⇨ 양인으로 신분상승
- 화척(양수척, 조선시대의 백정), 재인(조선시대 광대) 포함
․구제기관 ⇨ 근본적인 대책은 못됨
- 제위보 : 가난한 사람 구제
- 동서대비원 : 빈민이고 병든자 구호·요양
- 혜민국 : 약을 제공
- 의창 : 흉년에 빈민 구제
- 상평창 : 물가조절
● 대외정책
1. 거란과의 항쟁 (契丹,遼)
․태조 : 청천강까지 국경선 확장, 북진정책
․정종 : 서경천도 계획 → 실패
光軍 조직 - 거란 침입 대비
․성종 12년(993) : 제1차 침입 (소손녕)
- 서희의 외교활동 → 압록강 동쪽 영토화 (강동6주)
․현종 원년(1010) : 제2차 침입 (성종)
- 강조의 패배, 거란의 개경 점령 → 현종 나주 피난
․현종 9년(1018) : 제3차 침입 (소배압)
- 감감찬 활약
․현종 10년(1019) : 평화적인 관계 유지
2. 여진정벌 및 金과의 관계
․천리장성 축조 : 덕종 2년(1033) ~ 정종 10년(1044), 거란·여진 침입 대비
․별무반(別武班) 편성 - 숙종
- 신기군, 신보군, 융마군(승병)
․여진정벌 : 예종 2년(1107)에 윤관에 의해 단행 → 9城 축조
→ 9城 환부 (예종 4년,1109)
․여진 통일, 金건국 : 예종 10년(1115)
․金에 굴복 : 인종 4년(1126) 이자겸 ⇦ 정권유지 위해
⇨ 금의 고려에 대한 군사적 침략은 없었음
3. 宋과의 관계 : 일시적 단절있었으나 대체로 우호 교류관계
․수출 : 금·은·동·인삼·잣(원료품), 종이·붓·먹·부채(수공예품)
․수입 : 비단·책·자기·약재·향료·악기
- 책 → 고려 목판 인쇄에 영향
- 자기 → 고려 청자에 영향
․아라비아 상인과 교류 : 예성항, 수은·향료·약품 수입
● 문신귀족의 문화
1. 유교와 사학
․사학의 발달 ⇦ 고려 귀족들의 문벌존중 풍조
․구제학당(최공도,문헌공도) - 문종(1046~1083)때 최충
→ 12徒 형성 : 국자감보다 선호, 학벌 형성
․관학의 진흥책
* 예종(1105~1122)
- 7재(or 제) 설립 : “주역 - 여택재”, “상서 - 대빙재”, “毛詩 - 경덕재”, “周禮 - 구인재”, “대례 - 복응재”,
“춘추 - 양정재”, “武學 - 강예재” 강좌
- 양현고 설치 : 장학재단
- 궁성안에 청연각, 보문각 설치 : 經史연구
* 인종(1122~1146)
- 경사 6학 설립
․삼국사기 편찬 : 김부식, 기전체의 正史
․유교와 불교는 서로 병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
2. 대장경과 천태종
․대장경의 조판 : 현종(1009~1031) 초년에 착수 ~ 선종 4년(1087) 완성
- 거란의 2차 침입 (1010)
․거란의 침입을 막으려는 염원, 불교의 교리 정리
․고려대장경 : 고종때 강화에서 재 조판, 해인사 보관
․의천(대각국사) : 교장도감 설치 → “속장경” 간행
- 교종과 선종의 일치 주장 (천태종)
- 대장경 : 교종의 교리를 정리 (선종 관계 서적은 없음)
- 고려의 귀족들은 교종 추종, 선종도 여전히 성행
․천태종의 성립 ⇦ 교종(화엄종)과 선종의 분열과 대립 해소를 위해 (교종위주)
3. 불교와 귀족사회
․功德사상 : 국가나 개인의 현세에 있어서의 행복을 좌우하는 현세이익의 종교로 인식
→ 많은 사찰과 불교행사
․上元(1월15일)의 연등회, 仲冬(11월5일)의 팔관회
- 祈福道場(국왕생일), 忌辰道場(국왕의 기일), 석가탄신일 법회(4월8일)
菩薩戒道場(6/15,국왕의 보살계), 㿻蘭盆道場(7/15,부모명복)
除夜道場(12/30), 仁王會(국가의 평안 기원)
․과거제도에 승과제도 창설
- 敎宗選(승통), 禪宗選(대선사)
․役의 의무에서 면제 → 승려의 수 늘어남
․사원전 - 면세의 특권, 경제적으로 부유 → 佛寶·장생고 운영, 상업·양주·목축 시행
⇨ 승병양성(재산보호 목적) → 정치적 간섭
4. 문학과 음악
․고려 초기에는 신라향가 이어짐 → 소멸
- 균여 “보현십원가” 11수
․한문학 성행
- 문신월과법 : 매달 詩를 지어바침
- 漢詩 유행
․향악, 당악, 아악(宋에서 수입)
5. 미술
․청자 - 宋磁의 영향 받음
․청동제품 : 은상감향로, 정병(淨甁), 촉대, 거울
․石浮屠 : 충주 정토사의 홍법국사 실상탑 (현종 8년,1017)
원주 법천사의 지광국사 현묘탑 (선종 2년,1085)
․석탑 : 개풍의 현화사 7층탑, 오대산 월정사 9층탑, 익산 왕궁리 5층석탑
․불상 : 영주 부석사의 아미타소상
․회화 : 인종때의 이녕·이광필 부자
․서예 : 문종때의 유신, 인종때의 탄연, 고종때의 최이(우) (+ 신라 김생 = 신품사현)
- 간결한 구양순체 환영
● 귀족사회의 동요
1. 이자겸의 난 (12세기 초)
․이자겸의 득세 : 仁州 李氏
․척준경에 쫓겨 귀양 (인종 5년, 1127)
2. 묘청의 난
․인종 5년(1127) 15조의 개혁령 : ‘이자겸의 난’이후 왕권강화 노력
․묘청의 난 (인종 13년,1135)
- 묘청·백수한·정지상 등 서경인 (서경파,풍수지리설파)
- 김부식(개경파,유학파,사대파)에 의해 진압
무인정권(武人政權)
● 무인의 집권
1. 무신의 반란 (12세기 후반)
․무신에 대한 천대, 군인들의 불평
․무신의 반란 : 의종 24년(1170) 정중부,이의방,이고
2. 무인간의 정권쟁탈
․重房을 중심으로 정치
․정치·경제적 장악 → 군사력 확장 ⇨ 실력에 의한 정권교체
․이의방이 이고를 제거하고 집권
․정중부의 득세 → 경대승에 의해 피살 (경대승 都房 신설하여 안전도모) - 병으로 사망
․이의민의 집권 → 최충헌·최충수 형제에게 살해 (명종 26년,1196)
3. 최충헌의 집권
․독재정권 수립 : 최충수,박진재 제거
․명종·희종 폐하고, 신종·희종·강종·고종 옹립
․사원 세력 억압
․농민·노비의 봉기 진압
- 토벌 및 회유 (관직, 향·소·부곡등을 현으로 승격)
․아들 최이(우)에 이르러 무인정권 정비
● 농민과 노비의 봉기
1. 민란의 발생
․농민들의 流民化 경향 - 12세기 초 예종(1105~1122)때부터
개경에서 가까운 지역에서 심함
․명종 2년(1172) : 서계(평안도) 창주(창성)·성주(성천)·철주(철산) 지방
⇦ 지방관의 횡포 → 묘향산을 근거로 지속 (조위총)
․ ” 6년(1176) :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의 난 → 공주·청주·아산 일대 점령
․ ” 12년(1182) : 전주에서 군인과 관노의 반란 → 전주 점령
2. 민란의 발전
․명종 23년(1193) : 운문(청도)의 김사미, 초전(울산)의 효심의 반란 → 연합화 경향
→ 밀성(밀양)의 싸움에서 패함
․반란군들의 연합전선 - 10여년 지속 ⇨ 신분질서 개혁, 정권탈취 목적으로 발전
․신종 원년(1198) : 개경에서 만적의 반란 - 노비들의 신분개혁, 정권탈취
● 최씨 무인정권
1. 사병의 양성
․도방의 확대 ⇦ 신변호휘 목적
․마별초 조직 - 기병부대(의장대)
․삼별초 - 야별초(→좌별초,우별초),신의군 ← 경찰·전투 등 공적인 임무
- 6위의 유명무실화 영향으로 창설
- 최씨의 사병같은 존재
․사유지 확대 - 사병 양성의 경제적 기반
2. 최씨정권의 지배기구
․중방 - 무신란 직후 정권행사
․흥녕부 (최충헌) : 도방·정방·서방으로 구성 → 권력행사 기구
- 정방 (최이) : 인사기구
- 서방 ( ” ) : 문인들로 조직
● 몽고와의 항쟁
1. 무인 정권의 대몽항쟁
․고종 18년(1231)에 제1차 침입 ⇦ 몽고사신 피살
- 사례탑 귀주를 돌아 개경 압박 → 고려가 강화 요청
․최이 몽고와 항쟁 결의, 강화도로 천도 (고정 19년,1232)
․30년간 6차례 침입
2. 농민의 항쟁
․초기에는 농민·천민들이 강한 대몽항쟁 펼침
․농촌의 황폐화로 농민생활 곤란
․강도(강화)정부의 가혹한 수취
3. 무인정권의 몰락과 대몽강화
․농민들의 지지 감소
․대장경 재간행 : 해인사 “고려대장경” ⇦ 불력에 의존
* 현존 고려 대장경은 몽고 침입을 막으려는 염원에서 만들어짐 (원본은 거란 침입)
● 무인정권 시대의 문화
1. 설화 문학과 서사시
․설화 문학의 유행
- 임춘 “공방전” : 돈을 의인화
이곡 “죽부인전” : 죽부인을 의인화
이규보 “국선생전” : 술을 의인화
이인로 “파한집”, 이규보 “백운소설”, 최자 “보한집”
․서사시 : 민족의식 양양
- 이규보 “동명왕편”
2. 조계종의 성립
․지눌 (보조국사) : 선종을 主로한 교·선 통인
- 돈오점수를 중심 취지 (인간의 마음이 부처님의 마음, 깨달음을 꾸준히 실천)
․왕실·문신귀족과 결탁 거부 → 무인정권에 의해 옹호
* 교종 : 공덕 쌓음으로써 현실세계에서 이익 추구
․心性의 도야 강조 → 성리학의 터전 구실
신흥사대부( 新興士大夫)의 등장 - 고려후기, 조선 시대
● 친원정책과 권문세족
1. 元에의 굴복
․일본원정 - 충렬왕 즉위년(1274), 7년(1281)
․원의 공주를 正妃로 맞음
․3성 → 첨의부(僉議府), 중추원(추밀원) → 밀직사(密直司)
이부+예부 → 전리사(典理司), 호부 → 판도사(版圖司)
병부 → 군부사(軍簿司), 형부 → 전법사(典法司)
2. 대원관계의 발전
․정동행성 설치 (충렬왕 6년,1280) ⇦ 일본원정 목적, 원의 연락기구
- 좌승상에 고려국왕 임명 ⇦ 내정간섭
․영토의 일부를 빼앗김
- 쌍성총관부 : 화주(영흥), 철령 이북 땅 → 공민왕이 무력으로 수복
- 동녕부 : 서경, 자비령 이북 ─┐
- 탐라 총관부 : 제주도 ─┴─ → 곧 반환
3. 권문세족과 농장·노비
․친원세력의 형성 → 권문세족으로 발전, 막대한 농장·노비 소유
․권문세족들의 도평의사사 회의에 참석
․전시과 붕괴후 녹과전 제정 (원종 12년,1271) - 경기 8현의 토지를 현직자에게 분배
⇨ 권문세족들의 관심을 끌지 못함
․농장 : 귀족들의 사유지에서 발전 - 면세·면역의 특권
- 개경에 사는 不在地主, 토지겸병으로 전호들은 여러명에게 租 부담
● 신흥사대부 세력의 성장
1. 신흥사대부의 진출
․사대부 : 학자적 관료
- 과거를 통한 정치 진출
- 軍功등으로 신분상승 (閑良)
- 무인정권에 의해 귀족정치 붕괴후 등장, 무인정권 타도후 활발한 정치적 진출
2. 공민왕의 개혁
․공민왕 (1351~1374) - 원·명 교체기에 즉위
- 친명·반원 정책, 권문세족 억압
․정동행성 폐지, 쌍성총관부 무력 탈환
․정방 폐지 : 인사권 장악, 왕권견제, 신흥사대부 진출 억제 → 해소
․전민변정도감 설치 (공민왕 15년, 1366)
● 조선 왕조의 성립
1. 이성계의 집권
․홍건적의 침입 : 공민왕 8년(1359), 10년(1361)
- 개경 점령, 공민왕 안동으로 피난
․왜구의 창궐 : 충정왕 2년(1350) 이후 → 漕運 방해
․무장세력 등장
- 최영, 이성계, 정지 → 왜구소탕
- 최무선 화포 사용 (화통도감)
- 박위 대마도 정벌 (창왕 원년,1389)
․명의 철령위 설치 (옛 쌍성총관부) → 요동정벌 → 위화도 회군
2. 전제 개혁
․공양왕 옹립 (1389) - 이성계, 정도전, 조준
․귄문세족, 불교의 사원세력 배척 ⇦ 막대한 농장 소유
․새로운 양전 작업 (창왕 원년,1389), 종래의 公私田籍 불살라 버림 (공양왕 2년,1390)
․과전법 공포 : 공양왕 3년(1391)
- 경기도에 한하여 관직에 따라 분배
- 경기도 이외의 지역은 公田으로 편입 → 농장 몰수
⇨ 조선왕조의 경제적 기초
3. 조선왕조의 성립
․이성계 왕위 등극 (공양왕 4년,1392)
● 신흥사대부의 문화
1. 성리학의 전파
․경사교수도감 설치 (충렬왕) : 사장·훈고 → 경학·史學
․성리학의 도입 : 안향
- 백이정, 이제현, 이숭인, 이색, 정몽주, 길재, 정도전, 권근
․“주자가례”에 의하여 家廟 세움
2. 史學
․고려실록 : 현종(1009~1301)때 태조~목종까지 칠조실록 편찬··․ → 不傳
․인종 23년(1145) : 김부식 “삼국사기”
․의종 (1146~1170) : 김관의 “편년통록” → 不傳
․고종 (1213~1259) : 각훈 “해동고승전” - 교종 입장에서 불교 정리
․충렬왕 (1274~1308) : 원전 “고금록”, 정가신 “ 천추금경록” → 不傳
일연 “삼국유사”, 이승휴 “제왕운기” ← 단군을 시조
․충선왕 (1308~1313) : 민지 “본국(조)편년강목” → 不傳
․공민왕 (1351~1374) : 이제현 “史略” → 不傳, 일부 史論만 현존
3. 景幾體歌와 長歌
․경기체가, 어부가 : 무인정권기 사대부들의 귀족문학
- 제유 “한림별곡”, 안축 “관동별곡”,“죽계별곡”
․장가 : 작자 미상의 민중문학
- “청산별곡”,“서경별곡”,“가시리”,“정읍사”,“동동”,“쌍화점”
4. 미술
․현존 목조건물 : 고려 중기 이후, 주심포 양식
- 13세기 : 안동 봉정사 극락전 - 현존 最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 14세기(고려말) : 영주 부석사 조사당
덕산 수덕사 대웅전
- 조선초기 : 서울 남대문
․회화 : 문학화, 낭만적
- 흑죽, 은일도, 유연계회도, 사군자도 유행
- 이규보, 이제현 등 ‘詩畫일치론’ 주장
- 공민왕 “천산수렵도”, 혜허 “수원관음도(양류관음도)”
부석사 조사당 벽화 “천왕상도”, 수덕사 벽화 “수화도”, 신광사 “오백나한도”
․석탑
- 개풍의 경천사탑 : 대리석 사용 ← 원의 영향
․石浮屠 : 石鐘 형식의 소박한 형태로 변함
- 여주 신륵사 ‘보제사리석종’
․목조공예품
- 하회탈
․서예 : 조맹부의 우아한 송설체 유행 → 조선시대 계승
- 충선왕때 이암
5. 과학과 기술
․농업 기술의 발전
- 시비법, 수리시설(제방,보) ⇨ 休閑法 극복, 연작법 시행
- 중국 농업기술, 이암이 원의 “농상집요” 간행
․衣料의 발전
- 공민왕 (1351~1374)때 문익점 : 삼베·모시·명주 → 무명
․의학의 발전
- 전통적인 향약 연구개발
- 고종 23년(1236) “향약구급방” ← 현존 最古 의학서
- “삼화자향약방” - 임상서
․화약의 제조
- 최무선 : 우왕 3년(1377) 화통도감 설치 → 창왕(1389)때 폐지
․인쇄술
- 활판인쇄 : 고종 21년(1234) “상정고금예문” -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 不傳
-공양왕 4년(1392)에 국가에서 서적원 설치
양반사회(兩班社會)의 성립 -조선 초기
● 조선 양반사회의 성립
1. 사대부와 왕권
․건국초기 : 태조 (1392~1398)
- 도평의사사 : 개국 공신들의 회의기관
- 유교적 이상정치를 표방한 법전 편찬
정도전 “조선경국전”, 정도전·조준 “경제육전” ⇦ 개국 공신들의 이익위해
․태종 (1400~1418)
- 정도전등 개국공신 숙청후 왕위 등극 (1400)
- 사병혁파 ⇨ 병권집중
-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침 → 권한 축소
- 6조직계제 실시
- “원육전”, “속육전” 편찬 ⇦ 왕권강화 위해
․세종 (1418~1450)
- 집현전 확대(1420) → 집현전 학자들의 영향력 커짐
- “정전” 6권 편찬
* 집현전에서 편찬된 책 : 고려사,농사직설,오례의,팔도지리지,삼강행실,치평요람,
동국정운,용비어천가,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의방유취
․세조 (1455~1468)
- “경국대전”착수 → 성종 16년(1485) 반포 시행
- 집현전 폐지
2. 양반사회
․과거의 중요성 증대
․양반 : 役의 의무(力役,軍役) 면제
- 배타적, 城밖의 촌락에서 거주
- 하급 관리인 서리(아전), 군교(군관,교졸)등은 하지 않음
- 서얼의 자손은 文科에 응시 못함
- 재삼가녀의 자손은 벼슬 못함
- 평안도·함경도 출신 차별
● 양반관료 국가의 통치기구
1. 정치기구
1) 중앙
․의정부 : 최고기관 - 고려 도평의사사보다는 권한축소
․6曹 : 이·호·예·병·형·공
․승정원 : 왕명출납, 비서기관
․홍문관·사헌부·사간원 - 견제기구
- 홍문관 : 집현전 후신, 국왕의 고문 역할
- 사헌부 : 감찰기관, 정치득실 논하고 관리잘못 규찰, 풍기·풍속 교정
- 사간원 : 국왕의 잘못 논하고, 관리 임명 논박·시정 기구
* 사헌부+사간원 = 대간(臺諫), 관리는 言官
→ 서경 권한 : 임명 관리의 신분·경력 조사하여 가부승인
2) 지방
․8道 : 관찰사(監司), 方伯 (임기 1년)
․府(부윤, 부사), 牧(목사), 郡(군수), 縣(현령,현감) (임기 5년→3년)
․향청(군,현) : 지방 양반들로 조직(좌수,별감), 수령보좌·풍속기강·향리규찰
․경재소 : 서울에 위치, 그 지방출실 중앙관리를 좌수·별감으로 임명하여 향청장악
․6房 : 이·호·예·병·형·공 (지방의 각 행정단위에 설치)
- 지방 토착의 향리 담당
- 향역이라하여 세습
- 사무연락 위하여 서울에 京邸吏(경주인), 감영(도청소재지)에는 營邸吏(영주인)
- 수령(왕권을 대행)과 향청(지방 양반세력)간의 교량적 구실 담당
- 양반으로의 신분상승은 제약됨 (* 고려 향리는 중앙 귀족으로 상승하는 세력가)
- 평안·함경·제주에는 토관 임명 (향리보다는 지위가 높음)
2. 군사조직
1) 중앙군
․의흥삼군부 (태조) → 사병으로 인해 병권 집중은 안됨
․태종의 사병혁파 (정종 2년,1400) → 삼군부에 귀속
․오위도총부 (세조 10년,1464)로 개편 → 5위 지휘
․5衛 (세조 3년,1457)
- 의흥위(중위), 용양위(좌위), 호분위(우위), 충좌위(전위), 충무위(후위)
- 각기 통할하는 지방이 지정됨
- 각 위는 5部로 나뉘고, 각 부는 4統으로 구성
- 甲士와 같이 시험을 거쳐 편입되는 전문적인 군인이 중심 병력을 이룸
2) 지방군
․영진군(남방), 익군(북방)의 이원체제 → 익군체제로 일원화
․진관체제 (세조 3년,1457)
- 도에 兵營과 水營이 하나씩
(경상·함경도에는 여진과 왜의 침입에 대비하여 병영·수영이 둘씩,
전라도에는 수영이 2개)
- 진수군 (영진에 소속된 군인) : 영진군(정수부대),수성군(노동부대),선군(해군)
* 영진군 - 병농일치의 군대,良人
3) 중앙군과 지방군의 일원화 (진관체제의 성립)
․평상시 농업에 종사, 징발되면 서울이나 지방의 요새지에 가서 군복무 (正兵)
․봉족제도 : 2丁을 1保로 삼아 1정에 1보 배당, 정병에게 면포제공
․봉수제, 역마제의 시행
3. 과거와 교육
․음서의 제한 : 공신 및 3품이상 관리의 자손 ⇒ 南行
․문관 채용 시험 : 생진과(小科), 문과(大科)
- 생진과 : 사서·오경을 시험하는 生員科
시·부·표·책 등 문장으로 시험하는 進士科
→ 지방의 초시에 합격하면, 서울에서 복시를 치러 생원과 진사를 뽑음 ⇒ 司馬
- 문과 : 생원과 진사가 되면 성균관에 진학
→ 초시·복시를 거쳐 33명의 합격자 결정
궁궐안에서 殿試시행하여 갑·을·병 3科로 등급 결정
(갑과 1등 : 장원급제자 → 6품이상의 참상관으로 임명)
․관학인 四學이나 향교보다 사학인 書齋가 더 환영
․3년마다 정기적인 실시 式年科擧 → 나중엔 부정기의 과거가 증설되어 해이해짐
- 증광시(국가 경사), 별시(보통 경사), 알성시(국왕이 성균관에 가서 시행)
․무과 :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 (문과와 동일)
28명의 합격자 (先達)
․잡과 : 기술관 채용
- 역과·의과·음양과·율과
- 보통 中人의 자제가 이를 세습하여 응시
● 양반 관료국가의 사회·경제적 구조
1. 양반의 토지소유 형태
․고려말 : 과전법
- 모든 관리는 18科로 구분하여 科田 지급, 柴地는 포함되지 않음
- 경기도 지방의 토지에 한함 ⇦ 양반 관리들의 지방세력 성장방지
- 一代에 한하는 것이 원칙이나 실질적으로는 세습 경향
* 사망후 아내가 수절하면 守信田
부모가 사망한 어린 자녀에게 휼양전
․공신전의 증가
- 경기도 지방에 한함
- 세습허용
․세조 12년(1466) : 과전법 폐지하고 직전법 실시
- 현직 관리에게만 수여
- 명종 11년(1556)에 폐지 → 녹봉만 지급
․군전 : 지방 유력자인 한량에게 지급, 세습 - 고려 군인전과는 다름
내수사전 : 왕궁소유 (고려 내장전과 같음)
․중앙관부의 비용을 위해 지급된 공해전은 곧 없어짐 → 조세와 공물로 충당
․지방 관아에는 늠전(廩田), 外役을 담당하는 자에게 구분전 지급
․학전(성균관·四學·향교), 사원전(사찰), 관둔전(지방 관아)
국둔전(진술군으로 경작케하여 軍資 충당)
2. 농민의 생활
․농업기술의 향상 ⇨ 농민의 사회적 지위 향상
- 비료의 사용 → 連作가능
- 보통 직파법, 이앙법도 실시
- 가뭄 대비하여 많은 저수지 만듬
- 견종법(畎種法) 보급 - 밭고랑에 씨를 뿌림
․호패법 ⇦ 토지의 경작, 役의 징발
- 농민은 이주의 자유 없었음
- 호패 : 성명,출생,신분,거주지 등을 기록
- 이징옥의 난 (단종 원년,1453), 이시애의 난 (세조 13년,1467) 이후 강화
농민들의 뒷받침 받음
- 오가작통법 실시 ⇨ 이탈 감시
․田租
- 과전법 : 수확량의 1/10, 세종 26년(1444) : 수확량의 1/20
-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의 폐단 (가을 수확기에 실제 수확량 조사)
→ 전분6등, 연분9등법으로 고침 (정액수조법)
- 농민과 田主 사이의 병작제가 일반적 - 수확량의 1/2 부담
․공납 : 각지의 토산물을 바치는 것
․役의 의무
- 교대로 번상하는 군역
- 1년에 일정기간 노동에 종사하는 요역
(적전의 경작, 궁궐·산릉·성곽 등의 토목공사, 광산노동)
- 경작하는 토지 8결마다 1夫 차출, 1년에 6일 이내 → 실제는 관아 임의대로 징발
3. 수공업과 공장
․면직업의 성행 ← 목면의 재배
- 稅로서 면포를 대신 납부하기도 함
․관영수공업 : 고려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큰 비중
- 군기감(무기), 상의원(의류), 사옹원(자기), 조지서(종이)
․순수 사영수공업자도 등장함
4. 상업과 화폐
1) 상업
․서울 : 종로를 중심으로 한 시전 - 관설 점포를 상인들에게 임대한 것
- 육의전 : 선전(비단), 면포전(무명), 면주전(명주)
저포전(모시), 지전(종이), 어물전(어물)
․지방 : 場門이라 부르는 상설시 발달
- 보부상들의 활동 : 합법적 단체권을 가진 부상청 조직
- 수로의 행상인 船商의 활동은 활발하지 못함
2) 화폐 - 稅를 거두는데 이용하려는 목적 → 널리 유통되지 못함
․태종 원년(1401) : 저화(楮貨)
․세종 5년(1423) : 조선통보(朝鮮通寶) - 銅錢
․세조 10년(1464) : 전폐(箭幣)
․물품거래의 매개물은 포백(布帛) : 정포(麻布) → 면포
5. 천민의 상태
․공노비
- 입역노비 : 일정기간 관부의 노역에 종사
- 납공노비 : 일정한 身貢을 바칠 의무
․사노비
- 솔거노비 : 주인집의 잡역이나 농경을 하는 입역노비
- 외거노비 : 일정한 신공을 바치는 납공노비
․자신은 종모법에 따라 어머니편에 소속
공노비와 외거노비는 독립된 세대를 이루고, 독립된 가계를 이룸 - 평상시 농업에 종사
․백정 : 도살,제혁,유기제조 → 법제상으론 양인 대우
광대,사당
․향·소·부곡의 소멸 ⇦ 천민 신분이 양인 신분으로 향상하는 경향
● 조선초의 대외정책
1. 대명외교(對明外交)
․수출 : 말,인삼,모피,모시,화문석
․수입 : 견직물,약재,서적,도자기
․여진인 송환문제 등으로 분규가 있기도 함
2. 북방개척과 野人
․태조 : 두만강까지 영토편입 → 야인(여진)의 침입으로 경성까지 후퇴
․세종 (1418~1450)
- 두만강 유역에 6鎭 설치 (김종서) : 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
- 압록강 방면에 4郡 설치 (최윤덕,이천) : 어연,자성,무창,우예
→ 세조때 4군은 철폐된 적도 있으나, 여전히 압록강 국경 유지
3. 대왜정책
․세종 원년(1419) :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 ” 8년(1426) : 삼포에 왜관을 두어 교역 - 내이포(웅천),부산포(동래),염포(울산)
․ ” 25년(1443) : 계해약조 - 왜의 교역제한
1년에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섬
․중종 5년(1510) : 3포에서 왜의 소란 → 3포 폐쇄
․중종 7년(1512) : 임신약조
세견선 25척, 세사미두 100섬으로 반감
* 수출품 : 미곡·면포·마포·저포 등 생활필수품
나전·도자기·화문석 등 공예품
대장경·유교서적·범종·불상 등 문화재
* 수입품 : 동·주석·유황 등 광산물
약재·향료 등 사치품
● 양반관료의 문화
1. 한글의 창제
․한글의 반포 (세종 28년,1446) ← 훈민정음 창제 (세종 25년,1443)
․정음청(언문청) 설치
- 용비어천가 : 왕실 조상의 덕 찬양
- 월인석보 (월인천강지곡,석보상절) : 부처님의 덕 찬양
- 동국정운 : 한자음 연구
* 정인지,성삼문,최항,신숙주,박팽년,강희안,이개
* 세조때 내경청으로 개편 → 중종 1년(1506)에 폐지
․간경도감 (세조 3년,1457)) : 불교경전 번역 출판
- 불경언해
- 삼강행실도 : 유교도덕 강조
* 성종 2년(1471)에 폐지
2. 실용적 학문 ⇦ 유교적 입장에서 실제 사회에 유용하다 생각되는 실용적인 성격의 것들
1) 史書
․조선왕조실록
- 태종 13년(1413)에 “태조실록” 편찬
- 춘추관에서 사관들이 편찬 (춘추관 관원이 예문관 겸직)
* 예문관 사관이 역사 자료 기록 : 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
- 서울(춘추관),성주,전주,충주 등 4곳의 史庫에 보관
- 실록에서 국왕의 훌륭한 언행 발췌하여 “국조보감” 발행 : 세조 4년(1458)에 처음 간행
․고려사
- 세종때 시작 문종 원년(1451) 완성
-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여 새 왕조 건설의 정당성 위해
- 기전체
․고려사절요
- 문종 2년(1452)
- 편년체
․동국통감
- 성종 16년(1485)
- 단군조선부터 고려말까지 역사를 적은 최초의 사서
- 편년체
2) 지리서
․팔도지리지
- 세종 14년(1432), “세종실록”에 수록
- 각 지방의 연혁·산천·관방·산성·토지·호구·토산·교통·영진·군정·봉수·능묘·土姓·인물
․동국여지승람
- 성종 12년(1481), 중종 26년(1531)에 증보되어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 → 현존
- 樓停·학교·佛宇·사묘(祠廟)·고분·명환(名宦)·인물·제영(題詠) 등
인문에 관한 항목이 늘어나고, 관련있는 시문 첨가
3) 정치서
․치평요람
- 세종 23년(1441), 과거의 정치적 사적과 성쇠
․국조오례의
- 세종때 착수, 성종 5년(1474)에 완성
- 吉·凶·가(嘉)·賓(빈)·軍의 五禮에 관한 기록 → 국가 의식의 기준
․삼강행실
- 세종 14년(1432)
- 충신·효자·열녀들의 행실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임
- 유교 도덕 강조하여 양반 사회의 질서를 옹호
- 한글로 번역 출판
3. 과학과 기술
1) 농업
․농사직설
- 세종 12년(1430), 정초에 의해 편찬
- 한국의 지리조건에 맞는 농사법
․금양잡록
- 성종(1469~1494)때 강희맹에 의해 편찬
2) 천문기상학
․측우기 : 세종 24년(1442)
․풍기죽(風旗竹) : 풍향관측기
․세종 16년(1434)에 경복궁에 간의대 축조하고, 대간의 설치하여 천문관측
․혼천의(전구의),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역법 발달 : 이순지의 “칠정산 內·外篇” 저술 (세종 24~26년)
․세조때 규형(窺衡)·인지의(印地儀) 제작하여 양전사업에 이용
3) 의학
․향약집성방
- 세종 15년(1433), 한국인의 경험기초
․의방유취
- 세종 27년(1445), 중국의 역대 의서를 수집 편찬한 의약백과서
4) 인쇄술
․금속활자가 서적 간행에 널리 이용
․태종 3년(1403) 주자소 설치, 동활자 사용 → 계미자
․세종 16년(1434) → 갑인자
5) 군사기술
․화포 : 방어용에서 공격용으로 발전 ← 북방개척에 따른 야인과의 전투
․태종 13년(1413)에 龜船 제조
․세종 30년(1448)에 “총통등록” 편찬 : 화포의 제작법과 사용법
․문종 원년(1451)에 火車 제조
4. 미술
․회화에서 문인화라 불리는 수묵화 유행
- 세종때 강희안,안견,최경
- 중종때 이상좌
․서예
- 고려말부터 송설체(조맹부체) 유행, 안평대군(세종 셋째아들)
- 초서에 능한 양사언, ‘해서(楷書)’로 유명한 한호
․자기
- 초기의 분청자기 → 백자 : 실용적
5. 문학과 음악
1) 음악
․음악의 정리 : 세종때 박연
․성종 24년(1493)에 “악학궤범” - 아악·당악·향악의 3부로 나누어 정리
․樂章 : 정도전 “신도가”, 정인지 “용비어천가”
권근 “상대별곡” (←경기체가)
2) 문학
․“동문선” - 성종 9년(1478)에 서거정이 우리나라 시문을 뽑아 한국의 한문학 정리
․설화문학 유행 - 서거정 “필원잡기”, 성현 “용재총화”, 어숙권 “패관잡기”
․“금오신화” - 김시습, 소설의 선구
6. 불교의 후퇴
․태조 : 도첩제 실시
․태종 6년(1406) : 242개를 제외한 사원 폐지, 토지와 노비 몰수
․세종 : 궁성안에 내불당 설치
․세조 : 원각사, 간경도감을 두어 불경의 언해 간행
․성종 : 도첩제 전폐, 출가 금함
․중종 2년(1507) : 승과 폐지
․명종 : 문정왕후 섭정때 보우 중용, 승과 재설치 (명종 7년,1552)
봉은사 (선종), 봉선사 (교종)
사림세력의 등장
● 훈구세력 지배하의 사회적 변화
1. 훈구세력의 지배
․훈구세력
- 개국공신 : 정도전,조준, ···
- 세조 추대 : 정인지,최항,양성지,신숙주,서거정, ···
- 높은관직, 많은토지(농장), 노비 소유한 집권세력
- 실용적 학문에 능하여 많은 관선사업에 참여한 관학자
- 주로 경기도 지방에 거주, 近畿派
․반 훈구세력
- 생육신 :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 ⇦ 세조 찬탈 비판
- 죽림칠현 : 남효온, ··· ⇦ 출세 제약 (종실,향리 출신)
2. 농장의 확대와 貢賦의 증가
․농장의 확대 : 과전(사실상 세습), 공신전, 별사전, 매입·겸병·개간 등 소유지 확대
→ 국가의 공적인 수입 감소, 농민생활 곤궁 (병작제 등..)
․공납의 폐해 : 방납제도 → 농민 부담 가중
↳ 폐단 개혁위해 이이는 수미법 주장
․군역의 요역화 : 보법의 성립으로 군사의 수가 늘어나자 요역담당자 감소
→ 군사들을 요역에 동원 ⇨ 이중부담
․환곡제도의 폐해 : 의창의 기능 상실 → 상평창에서 대신 맡음 (‘모곡’이라하여 1할이자)
․많은 농민들의 유민화, 도적의 무리 빈발
- 명종 14년(1559)~17년(1562) : 황해도 일대의 임꺽정
● 사림세력의 등장
1. 사림의 진출
․사림세력
- 지방거주 재야의 讀書人群
- 중·소 지주층
- 향촌에서 유향소나 향청을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던 세력
- 詞章보다 經學 중시, 도덕적 수양 중요시
- 길재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 ⇢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
- 성종의 훈구세력 견제위해 중앙진출
→ 3사 계통에 자리, 언론문필 담당
․무오사화 (연산군 4년,1498)
- 김일손이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올린 것이 발단
- “성종실록” 편찬시 발견 → 사화 발생
․갑자사화 (연산군 10년,1504)
-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 → 훈구세력 반발
- 연산군 생모 윤씨의 폐출 사사사건 계기
- 훈구 및 잔존 사림세력 제거
․을묘사화 (중종 14년,1519)
- 중종의 조광조 등용
- 조광조의 개혁 ┌ 향약 실시 (미신타파,권선징악,상호부조)
└ 현량과 설치 (인물천거 관직등용) → 훈구세력 반발
- 위훈삭제 사건 발단으로 조광조 세력 제거
․을사사화 (명종 즉위년,1545)
- 명종의 외척세력이 반대파(인종 추대) 제거
2. 서원과 향약
․사림세력의 토대 : 서원·향약·농장 ⇨ 선조(1567~1608)때 정계 지배
․서원 : 교육 + 선현을 봉사하는 祠廟 ⇨ 사림의 성장터전 마련
- 중종 38년(1543)에 풍기군수 주세붕의 ‘백운동서원 → 소수서원’, 사액서원의 시초
- 사액서원 : 국가에서 서적·토지·노비 수여
․향약 : 사림의 지위를 굳게 함
- “소학”의 정신 실현
- 선조(1567~1608)때 전국적으로 널리 시행
- 향약의 간부인 約正등에는 지방의 유력한 사림이 임명, 일반 농민은 자동적으로 포함
- 농민에 대한 강한 지배력 가짐
․농장 : 사림의 경제적 기반
3. 사림정치
․3司의 정치적 입지 확대
․3司의 의견 조정 → 이조전랑
․사림의 의견이 정치에 그대로 반영
4. 붕당의 발생
․동·서의 붕당 (선조 8년,1575)
- 동인 : 김효원 등 신진관료 (강경파) ⇢ 이황,조식 (主理派)
- 서인 :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기성관료 (온건파) ⇢ 이이,성운 (主氣派)
․붕당 초기 : 동인의 득세
- 정여립의 모반사건 (선조 22년,1589) → 동인세력 일부 제거
․동인의 남·북 붕당
- (서인) 정철의 건저의사건을 계기
- 남인 (온건파) : 이황의 문인
북인 (강경파) : 조식의 문인
․북인의 광해군(1608~1623) 추대
․서인의 인조 옹립 (인조반정,1623)
● 왜(倭)·호(胡)와의 항쟁
1. 임진왜란
․왜의 간헐적 침략으로 ‘비변사’설치
․왜군의 부산상륙 (선조 25년,1592)
․이순신 활약 : 옥포·당포·당항포·한산도·부산
․의병들의 봉기 : 조헌 (충청도 옥천), 곽재우 (경상도 선녕), 고경명 (전라도 장흥)
김천일 (수원), 정문부 (함경도), 휴정 (묘향산), 유정 (금강산)
․명의 육군, 권율의 행주대첩
․정유재란 (선조 30년,1597) → 경상도 지역
- 이순신 : 명랑·노량 대첩
2. 병자호란
․광해군 (1608~1623)
- 史庫의 정비, 서적의 간행, 호패의 실시
- 뛰어난 외교정책 (강홍립의 후금투항)
․인조 (인조반정,1623)
- 서인 집권, 向明排金
- 이괄의 난 (인조반정에 대한 공신책정에 불만) → 후금의 침략 종용
- 정유호란 (인조 5년,1627) → 형제관계 수립
․병자호란
- 후금의 淸 개국 (인조 14년,1636) → 조선에게 군신관계 요구 → 병자호란 발발
- 인조의 남한산성 피난 → 삼전도에서 항복
- 소현세자, 봉림대군 볼모
척화파인 3학사(홍익한,윤집,오달제) 죽음, 김상헌 옥고
․효종
- 북벌계획, 북한산성·남한산성 수리
● 사림의 문화
1. 성리학의 융성
․지방의 사림학자들은 서원을 중심으로 학문연구, 후진교육
․성리학의 융성 ← 형이상학적 추구
- 주리파 : 이언적 ⇢ 이황 ⇢ 유성룡,김성일 ; 영남학파(동인) ⇨ 일본에 영향
- 주기파 : 서경덕 ⇢ 기대승 ⇢ 이이,성운 ⇢ 김장생 ; 기호학파(서인)
2. 譜學과 禮學
․족보 : 사림중심 양반사회에서 가계는 중요한 사회적 세력 단위
․예학 : 상장제례에 관한 지식
- “주자가례”에 의해 행하여짐
- 김장생 “가례집람” → 아들 김집에게 계승
3. 가사와 시조
․가사 : 조선 중기에 크게 발달, 4·4조의 산문
- 정철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시조 : 고려말 발생
- 박인로 ⇢ 신흠 ⇢ 윤선도 “산중별곡(오우가)”
광작농민과 도고상인의 성장 - 조선 중후기
● 붕당 정치
1. 벌열(閥閱)정치 ≓ 붕당정치
․인조반정(1623)이후 서인의 집권
- 효종(1649~1659)때 송시열 등용
․남인의 등용
- 예송논쟁 (숙종 즉위년,1674), 세자책봉 문제 (숙종 15년,1689)
․숙종 20년(1694)이후 서인 장기 집권 (갑술환국)
- 노론 : 송시열 계열
- 소론 : 윤극 중심
․벌열의 성립 : 노론을 중심으로 한 장기집권
- 소수 가문에 의한 정권 독차지
- 많은 사림학자들의 지방 낙향 → 서원 설립 (숙종때 300여개)
- 농업에 종사하는 잔반 생김 ⇦ 오랜기간 관직 못나감
2. 탕평책
․노론의 벌열정치에 대한 반발 → 성리학 지상주의 비판
- 실학사상, 양명학, “정감록”, 서학(천주교) 추구
․탕평책 ⇦ 왕권의 권위회복
- 영조(1724~1776) ~ 정조(1776~1800)
- 붕당간의 대립완화 → 왕권신장
․시파(時派)와 벽파(辟派)의 대립 ⇐ 노론의 분열
- 시파 :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
- 벽파 : 죽음의 정당성 주장
․이인좌의 난 (영조 4년,1728) → 노론의 우세
․정당주의·무사안일주의 → 세도정치로 발전
● 수취제도의 변화
1. 대동법의 실시
․재정의 궁핍
- 전란에 의해 농토 황폐
- 양안에서 빠진 음결의 증가
(임진왜란 전 170만결 → 광해군때 54만결)
- 토지개간 장려, 양전 실시 → 숙종때 140만결
- 면세지 (궁방전, 관청·군영 소속의 둔전 등) 증가 ─┐
중앙권신, 지방 세력가들의 토지점유 확대 ─┴─ 조세액의 감소
․대동법의 실시 : 공물을 미곡으로 대신내는 수미법
- 조세의 감소와 방납의 폐해로 실시
- 광해군 즉위년(1608) : 이원직의 주장으로 경기도 시행
- 인조 원년(1623) : 강원도 실시
- 효종 (1649~1659) : 김육의 주장으로 충청도,전라도 시행
- 숙종 34년(1708) : 전국실시
․田 1結당 米 12斗 징수
- 선혜청 담당
- 쌀대신 布나 錢으로 납부가능
- 공납제도의 폐지 → 농민들의 경제적 부담 가벼워짐
- 상업자본 발전 (貢人 중심) → 독립적인 수공업 발전
2. 役法의 변화와 균역법
․임진왜란시 5위의 사실상 유명무실
→ 임진왜란 중 ‘훈련도감’설치하여 군사양성
․5군영 성립 : 중심부대
- 모병제의 실시
- 군역대신 1년에 2필의 군포 바침 (황구첨정,백골징포,인징,족징 등 폐단)
․균역법의 실시 (영조 26년,1750)
- 군포를 1필로 감함
- 왕실소속 어세·염세·선세를 정부 수입으로
- 양반소유 토지포함 모든 田結 (평안도·함경도 제외) 1결당 2두의 결작 징수
- 한유자등에게도 선무군관포 징수
․균역법 실시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군포부담 여전
● 경제적 성장
✽조선후기 농,상공업의 변화
1. 광작농민과 농촌분화
1) 광작의 보급
․이앙법의 발달 → 이모작 가능
․우경의 보편화, 볏을 가진 쟁기 사용 ⇨ 소요 노동력 감소로 廣作의 보급
․저수지 시설
- 현종 3년(1662)에 제언사(堤堰司) 설치
- 정조 2년(1778)에 “제언절목” 반포
․부농의 광작 확대 → 빈농의 이농 가속화
- 두레 조직, 임노동자 이용
․소작농들의 임대 광작
- 打租法(1/2 상납) → 賭租法(정해진 양) ⇨ 자유로운 농업경영
․특수 재배물에 대한 상업적 생산 발달
- 인삼·담배·목면
* 담 배 : 광해군때(1600년代) 전래
고구마 : 1763년(영조 39년) 조엄이 대마도에서 가져옴
감 자 : 1800년대 전래
2) 신분질서 변화
․농업 기술향상, 농업 경영방식 발전, 상업적 농업생산 발달 → 평민지주 탄생
․부농들의 신분상승, 빈농들의 유민화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잔반 생김
2. 도고상업의 발달
1) 도고상인 : 수공업을 지배하여 상품을 독점 판매
․貢人의 활동
- 대동법 실시로 공납제도의 폐지, 관부에서 필요한 물품조달
- 공인자본의 성장 → 독점적 도매상인 ‘도고’로 성장
․사상들의 활동
- 서울 江商 : 한강을 따라 경기·충청 일대에서 미곡·소금·어물 판매, 조선업 지배
- 개성 松商 : 경기를 중심으로 육로를 따라 황해·평안지방, 충청·경상지방에서 인삼 판매
․시전상인
- 금난전권 이용하여 수공업 지배
2) 국제무역
․의주의 만상 : 의주의 중강·봉황시의 책문에서 淸과 私무역
․동래의 내상 : 일본과 사무역
․송상이 만상과 내상을 끼고 인삼과 은을 매개로 중개무역 전개
3) 場市의 발달
․신해통공 (정조 15년,1791) : 육의전 제외한 시전들의 금난전권 페지
․일반 장시의 발달
- 보부상을 상대로하는 도고인 객주나 여각이 발달 (은행업 겸함)
․운수업 발달
- 私船 이용, 선박·항로 개척
․상인 단체들의 조직
- 공인들의 공인계
- 육의전을 중심으로 한 ‘都中’이라는 조합조직
- 보부상들의 ‘보부상단’
4) 금속화폐의 사용 ⇦ 상업의 발달
․숙종 4년(1678)에 상평통보 주조
․17세기 말에는 화폐가 전국적 유통
․부를 축적하는데 사용 → 전황(전귀) 발생
․소작료를 화폐로 지불하는 ‘도전법(賭錢法)’ 발생
3. 수공업과 광업의 새양상
1) 수공업
․관영 수공업의 쇠퇴 : 공장안(工匠案) 페지 - 정조(1776~1800)
․수공업의 성장 ← 대동법의 실시
- 상인들이 주로 수공업 지배 (17·18세기)
- 철기·유기 제조업자들은 자립화하는 경우도 있음
2) 광업
․광업의 민영화 경향 (17세기)
- 設店收稅法 실시 → 別將에 의해 대행
․別將制 폐지 → 守令收稅制 실시 (18세기)
- 상업 자본가인 物主에 의해 광산운영이 크게 발달
● 실학의 발달
1. 실학의 발생
․실학 : 사회적 모순에 대응하기 위한 학문
- 17·18세기 붕당정치에 따른 몰락 양반 발생
- 광작에 의한 영세민들의 유민화
- 도고 상인들의 상공업 지배에 따른 영세 상인 몰락, 물가 폭등
․오랫동안 정권에서 벗어나 있던 남인 출신 실학자가 많음
⇦ 현실 개혁위한 정권 담당자들에 대한 비판
․연구 대상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음 - 현실적·실증적·민족적 성격
2. 농업중심의 이상국가론
․經世致用의 학문 : 토지제도·행정기구·군사조직 같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
․유형원 (효종,현종)
- 현종 11년(1670) “반계수록” - 전제·敎選·임관·職官·祿制·병제 검토·비판
- 공전제 주장 : 국가에서 토지를 공유하여 농민에게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나누어 줌
․이익 (숙종~영조)
- “성호사설” : 천지·만물·인사·經史시문의 5개부문, 백과사전적 저술
- “곽우록(藿憂錄)” : 국가제도 전반에 관한 의견 (개혁사상)
- 균전제 주장 : 농가의 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도의 영업전의 소유를 확보
․정약용 (정조,순조)
- 순조 원년(1801) ‘신유사옥’으로 18년간 강진에서 유배 생활
- “경세유표” : 중앙의 정치조직에 관한 의견
- “목민심서” : 지방 행정에 관한 개혁
- “흠흠신서” : 형정에 관한 의견
- “탕론”,“전론” 등 사회개혁사상 발표
- 여전제 : 한마을(閭)을 단위로 토지를 공동 경작하여 노동량을 기준으로 수확 분배
- 정전제 : 가족의 노동력을 기준으로 농업 종사자에게 “井”字로 구분한 토지의 8구를 분배,
1구의 수확을 세금에 충당
․농업을 중심으로 한 이상국가 구상
- 士農一致의 원칙에서 신분적인 차별 폐지
- 교육의 기회균등, 능력위주로 관리 등용
- 상공업의 발전이나 화폐의 유통에 의한 농촌 경제의 침식 방지
3. 상공업 중심의 부국안민론
․이용후생의 학문 : 상공업 발전을 통하여 사회의 번영 이룩 ⇨ “北學”이라 부름
․유수원 (영조)
- “우서” : 영조 5년(1729)~13년(1737)
문답형식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대한 개혁안 제시
․박지원 (영조,정조)
- “열하일기” : 정조 4년(1780), 청의 문물소개 및 자기의견 제시
․홍대용 (영조,정조)
- “燕記” : 청에 갔던 기행문
- “의산문답” : 實翁과 虛字의 문답형식, 우주와 인간의 문제를 논함
․박제가
- “북학의” : 청에 갔던때의 견문기, 항목별로 그 시대 제반 문제에 대한 개혁 언급
․이덕무
- “연기” : 청에 갔던 견문기
․청의 문화 배우고, 현실개혁 의지
- 무위도식하는 양반유학자 비판
- 상공업·농업을 높이 평가
- 상공업 발전에 큰 관심
- 기술적인 발전으로 생산촉진·교통수단 발전으로 국가 경제력 증강 주장
- 신분제 폐지, 균등한 교육에 의한 직업적 관리 양성 주장
4. 國學의 발전
1) 한국의 역사에 관한 연구
․이수광
- “지봉유설” (광해군 6년,1614)
천문·지리·유교·식물, 한국의 옛 사회나 정치에 대한 견해
․이익
- “성호사설” (1740년경 정리), 백과사전적 저술
․“동국문헌비고” (영조 46년,1770)
- 지리·정치·경제·문화 등에 관한 한국학 백과사전
․안정복
- “동사통목” : 정조 2년(1778), 단군조선~고려말
- “열조통기” : 조선시대 역사
․한치윤
- “海東繹史” : 정조때, 외국 사서에서 한국의 역사 발췌, 기전체
․이긍익
- “연려실기술” : 영조때,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2) 만주사에 대한 관심
․이종휘 : “東史” - 고구려에 큰 비중
․유득공 : “발해고” - 정조 8년(1784), 신라통일의 불완전성 강조
․홍양호 : “해동명장전” - 정조 18년(1794)
3) 역사지리서
․한백겸 : “동국지리지” - 선조때
․신경준 : “강계고(疆界考)” - 영조때
․한진서 : “해동역사지리고” - 순조때
․정약용 : “강역고”,“대동수경” - 순조때
4) 인문지리서
․이중환 : “택리지” - 영조때
․신경준 : “도로고”,“산수고” - 영조때
5) 지도
․정상기 : “동국지도” - 영조때
6) 國語에 대한 연구
․신경준 : “훈민정음운해” ─┐
․유 희 : “언문지” - 순조때 ─┴─ 한글에 대한 음운 연구서
* 영조 代
․“속대전” : “경국대전”이후의 교령을 편찬
․“속오례의” : “오례의” 수정
․“속병장도설” : “병장도설” 개편
․“동국문헌비고” : 한국의 문물제도를 분류·정리한 백과사전적 저술
* 정조 代
․“대전통편” : “경국대전”,“속대전” 및 그후의 교령을 합쳐서 편찬
․“문원보불(文苑黼黻)” : ‘반교문’,‘위유문’,‘제문’,‘교서’,‘國書’등
관각(館閣) 제신(諸臣)들의 문장수록
․“추관지” : 형법에 관한 역사와 내용 기록
․“도지지” : 戶曹의 사례 편집
․“무예도보통지” : 무예에 관한 그림과 설명
* 관찬 사업의 성행에 따라 ‘韓構字’,‘整理字’등 활자 주조
5. 西學의 전파
1) 서학에 대한 관심
․광해군때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 소개
․이익·안정복 등 실학자들 서학에 관심 ⇒ 사상적으로는 비판적
2) 신앙운동 - 정조때 남인학자들을 중심
․정조 7년(1783)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
․이승훈·이벽·이가환·정약전·정약종·정약용·권철신·권일신 등 남인 (이익의 문인들)
김범우(조선 최초의 천주교 순례자) 등의 中人
․서양 선교사의 전도보다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천주교 서적들을 읽고 깊은 관심
3) 典禮문제로 사회적 논란
․정조 9년(1785) : 서학을 사교로 규정하고 금지령
․ ″ 10년(1786) : 북경으로부터 서적 수입금지
․ ″ 15년(1791) : 전북 진산에서 神主를 없앤 윤지충을 사형 ⇒ 신해사옥
․ ″ 19년(1795) : 중국인 신부 주문모 입국,활약 → 교세확장,4천여명의 신자
4) 서학에 대한 박해
․정조때는 서학을 묵인하는 방향, 영의정 - 남인 채제공
․순조(1800~1834) 즉위하면서 서학에 대한 혹독한 박해
- 신유사옥 (순조 원년,1801) ⇦ 대왕대비 김씨와 연결되는 노론벽파가 남인시파를 타도
이승훈·이가환·정약종 등과 주문모 사형, 정약전·정약용은 유배
․황사영이 몰래 북경에 帛書를 보내려다 발각당해 사형 당함 → 탄압정책 심해짐
6. 과학과 기술
1) 농서 : 17·18세기에는 농업기술 향상에 대한 관심이 커짐
․신 속 “농가집성” : 효종 6년(1665), “농사직설”·“금양잡록” 합하고, 자신의 의견 추가
․박세당 “색경(穡經)” : 숙종(1674~1720)때, 과수·축산·원예·수리·기후 등에 중점
․홍만선 “산림경제” : 숙종때, 농업·임업·축산·양잠·식품가공·저장 등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알아두어야 할 사항
․서호수 “해동농서” : 정조(1776~1800)때 왕명, 한국의 농학을 종합
․고구마 재배법 ⇦ 구황식물로서 고구마에 대한 관심
- 강필리 “감저보” : 영조때
- 김장순 “감저신보” : 영조때
- 서유구 “종저보” : 순조 34년(1834)
․정약전 “자산어보” : 순조 15년(1815), 물고기에 대한 책
2) 의학서
․정약용 “마과회통” : 정조 22년(1798), 종두법 처음 소개
3) 서양의 새로운 과학과 기술의 도입
․선조(1567~1608) 말년에 명에 갔던 사신이 유럽지도 가져옴
․인조 9년(1631)에 정두원이 명에 사신으로 갔다오는 길에 천주교 서적과 함께
화포·천리경·자명종·만국지도·천문서·서양풍속기 가져옴
․소현세자 귀국시 과학서적 가져옴 (동생 봉림대군 ⇒ 효종)
․인조 6년(1628), 네덜란드인 웰테브레(박연) 표착 → 훈련도감에서 대포 만듬
․효종 4년(1653), 네덜란드인 하멜 표착 → 탈출하여 “표류기” 저술
김육의 노력에 의해 새로운 역법 연구 → 개량曆 시행
․정약용 - 기중기를 고안해서 화성(수원성) 축조에 이용
․지동설 - 김석문,이익,홍대용
7. 성리학에 대한 비판
․독자적인 견해 (주자의 설에 만족하지 않음) - 실증적인 태도로 유교의 경전들에 접근
- 윤휴 “중용주해” ─┐
- 박세당 “사변록” : 도가사상에 접근 ─┴─ 사문난적으로 몰림
- 정약용
․양명학의 수용
- 남인과 소론 계통의 학자들, 정치적 진출에 제약을 받는 종실이나 서얼출신이 많음
- 정제두 “존언”
● 예술의 새 양상
1. 한문학의 변화
․실학의 정신 반영됨
- 박지원 “열하일기”속에 실린 “허생전”,“호질(虎叱)”
“방경각외전”에 실린 “양반전”,“민옹전”
․민간 설화의 소설화 (한문)
- “동패낙송(東稗洛誦)”,“청구야담”
․서얼·중인·서리 출신의 문인
- 홍세태 “해동유주” : 숙종(1674~1720) 때, 시 모음
- 고시언 “소대풍요” : 영조 13년(1737) ─┐
- 천수경 “풍요속선” : 정조 21년(1797) ─┼─ 매 60년마다 시집 간행
- 유재건 “풍요삼선” : 철종 8년(1857) ─┘
2. 古小說과 사설시조
․한글소설 (17·18세기)
- 허균 “홍길동전” : 광해군(1608~1623) 때
- 김만중 “구운몽” : 숙종 15년(1689) 경
- “장화홍련전”,“창선감의록”,“심청전”,“흥부전” → 권선징악
“임진록”,“임경업전” → 군담소설
“옥루몽”,“숙향전”,“춘향전” → 애정소설
․시조
- 長詩, 사실성, 소재의 다양화 → 사설시조의 출현
- 김천택 “청구영언” : 영조 4년(1728)
김수장 “해동가요” : ” 39년(1763)
3. 미술의 새풍조
1) 회화
․진경산수화 출현
- 정 선 (숙종~영조,18세기) : ‘인왕제색도’,‘금강전도’ 등
- 김홍도 (영조,정조,18세기) : ‘총석정도(叢石亭圖)’ 등
․속화의 유행
- 김홍도,신윤복,김득신 등
2) 자기
․청화백자 발달 - 정조(1776~1800)때 국산 안료 사용하면서 크게 발달
중인층의 대두와 농민의 반란 - 조선 후기
✽조선후기(양란 이후) 수취제의 변화 ✽ 조선후기 신분제의 변화
● 세도정치
1. 세도정치
․순조 (1800~1834)
-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 → 외척세력이 왕권 압도
- 안동김씨 집권 : 김조순 등
․헌종 (1834~1849)
- 풍양조씨 집권 : 조만영,조인영 등
․철종 (1849~1863)
- 안동김씨 재집권 : 김문근,김흥근,김좌근 등
․과거의 문란 ← 세도정치의 영향
2. 三政의 문란
․세도정치로 인하여 정치의 문란 → 田政·軍政·還穀의 문란으로 농민들이 피해
․田政의 문란
- 전정 : 토지를 결수를 기준으로 하여 받는 각종의 세
- 실제 토지세는 20斗에 못미침 (총 수확량의 1/10 안됨)
- 지방의 관례에 따른 부가세와 수수료가 높음 (총 수확고의 1/2 되는 경우도 있음)
- 백지징세 : 황폐한 진전(陳田)에서도 세를 징수
도결(都結) : 사적으로 소비한 공금을 보충하기 위한 세
․軍政의 문란
- 군정 : 丁 1인에 대하여 군포 1필씩을 징수
- 포 1필은 米 6斗에 해당 (전세 4斗보다 많은 양)
- 황구첨정,백골징포,족징,인징 등 폐해
- 전정보다 군정의 피해가 더 컸음
․還穀의 문란
- 환곡 : 춘궁기에 미곡을 빌려준 후, 추수기에 1/10의 모곡(耗穀)을 가산하여 되받음
- 일종의 고리대로 변하여 삼정중에서 가장 큰 폐해
- 강제로 륵대(勒貸), 허위보고(反作), 허위장부(虛留), 겨를 섞음(半白,分白)
․지방관,향리들의 부정 → 국가 재정 위협
● 신분체제의 변화
1. 잔반과 중인층
․잔반의 증가 ← 벌열정치,세도정치
․서얼의 차별 타파
․中人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
․지역차별 감소 추세
2. 농민의 변화와 노비의 해방
․양인 농민의 변화
- 부농으로 성장하여 양반 신분까지 상승
- 영세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토지를 잃고 임노동자로 전락 ← 광작의 영향
- 농번기에 농촌에서 임노동하거나, 수공업이나 광산채굴에서 임노동 함
- 양인 농민이 노비로 전락하는 경우는 없었음
․노비의 해방
- 임진왜란 때 奴婢案이 불타버림
- 양역인 군역에 종사하여 신분상승
- 몰락 양반들이 사노비 유지 어려워짐
- 순조 원년(1801)에 노비안을 국가 스스로 불살라 버림
노비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님
● 농민의 항거
1. 계(契)의 유행
․계 : 현실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하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짐
- 향약이 양반사회의 붕괴현상과 함께 그 의의를 잃은데 반하여 계는 성행함
․친목과 공제를 목적 (초기)
- 宗契·同甲契·洞契
- 양반들이 많이 관여함
․경제적 곤란을 공동으로 타개하려는 계가 주류를 이룸
- 제언계·군포계·牛契·농구계
․구황식물에 관심
- 고구마 : 영조 39년(1763)에 일본에 통신사로 갔다오던 조엄이 종자를 가져옴
- 감 자 : 헌종(1834~1849)때 청으로부터 전래, 널리 보급됨
2. 유민과 도적
․유민의 증가
- 화전민의 증가 → 세를 받아감 → 간도·연해주 등으로 이민 증가
․괘서(掛書)·방서(榜書) 사건 증가 - 정부·조정 비방
․도적의 빈발
- 서울의 서강단, 평양의 폐사군단, 才人들의 채단, 유민들의 유단 등
3. 민란의 빈발
․몰락한 잔반들에 의하여 지도되어 대규모적인 반란으로 확대되는 경우가 많음
․홍경래의 난
- 순조 11년(1811)
- 평안도 지방의 몰락한 양반 출신
․진주민란
- 철종 13년(1862)
- 兵使 백낙신의 악행 ⇒ 잔반 출신 농민인 유계춘 중심
․포악한 관리의 제거를 목적으로 하는 자연 발생적인 성격
→ 벌열정치·세도정치에 의해 병든 양반사회 자체에 대한 반항으로 진전
● 중인층 및 평민의 문화
1. 학문과 사상 (순조 이후)
․학문의 종합적 정리에 대한 노력이 두드러짐
- 서유구 “임원십육지” : 일상생활·산업·예술 등 사회생활 전반
- 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 : 천문·지리·정치·사회·경제·역사 등 전 분야에 대한 변증
- “대전회통” : 고종 2년(1865)에 조두순 등
- “증보문헌비고” : 융희 2년(1908)에 박용대 등
․고증학적 방법
- 김정희 : 청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특히 금석문을 깊이 연구
“금석과안록” - ‘진흥왕 순수비’에 대한 연구
- 김정호 : 철종 12년(1861) “대동여지도”
고종 원년(1864) “대동지지” - 지리서
․몰락한 양반이나 중인출신 학자들의 진출
- 최한기 (몰락 양반 출신)
“人政” : 철종 11년(1860), 사농공상 구별없이 인재 등용·교육, 문호개방
- 최성환 (중인 출신)
“고문비략(顧問備略)” : 행정 실무를 합리적으로 개혁
․서얼 출신들이 서얼의 역사인 “규사(葵史)” (철종 10년,1859) 편찬 - 차별대우 철폐
향리 출신인 이진흥은 향리의 역사인 “연조귀감” (헌종 12년,1846)
․중인 출신 조희용 “호산외기” (헌종 10년,1844) - 향리의 지위향상 주장
서리 출신 유재건 “이향견문록” (철종 13년,1862)
중인 출신 이경민 “희조질사” (고종 3년,1866)
→ 미천한 신분이여서 正史에 오르지 못한 인물들의 전기
2. 천주교의 전파
․순조(1800~1834) 때 ; 안동김씨 (김조순이 時派)
-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하지 않음
- 조선교구 독립 (순조 31년,1831)
- 서양인 신부 입국 ; 모방(헌종 2년,1836), 샤스탕, 앙베르 등
․풍양조씨 (辟派)
- 기해사옥 ; 헌종 5년(1839) → 세 신부와 많은 신도 순교
- 김대건의 귀국활동 ; 헌종 11년,1845 → 순교
․철종(1849~1863) ; 안동김씨 재집권
- 많은 선교사 입국, 신도가 2만명에 이름
- 여러 가지 천주교 서적 출판
․19세기에 이르러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많이 믿음
․서울과 그 부근에 신자 집중 ⇨ 도시 중심의 종교
3. 東學의 발생
․동학 ⇨ 농촌 중심의 종교
․최제우 (철종때)
- 유·불·선 + 천주교 + 무속신앙 (표면적으론 천주교에 대항)
- “동경대전”,“용담유사”
- 인내천 사상
- 현실을 개혁하려는 사회운동 → 부국안민, 정치개혁
- 철종 14년(1863)에 최제우 체포되어 다음해에 사형
․최시형
- “동경대전”,“용담유사” 등을 편찬하여 교리정리
- 포·접 이라는 조직망 설치
4. 문예의 양상
․한문학 - 서얼·중인·서리들의 문학이 크게 일어남
- 서리 출신 유재건 “풍요삼선” : 철종 8년(1857)
- 풍자시인 : 정수동(정지윤), 김립(김병연)
․국문학
- 박효관,안민영 “가곡원류” : 고종 13년(1876) → 시조의 집대성
- 판소리의 성행
- 신재효 : 판소리 사설의 정리
․탈춤의 성행
- 남사당...
5. 미술계의 변화
․회화 - 문인화의 유행
- 김정희 : “세한도” - 고차원적 이념의 세계
- 흥선대원군(이하응) : 난초..
- 장승업 : “홍백매병”
․서예
- 김정희 : 추사체
- 신위,조광진
․목공예·죽공품·화각공예품·나전칠기 발달
● 대원군의 개혁과 쇄국정책
1. 대원군의 개혁
․대원군의 실권장악 - 고종의 12세 즉위 (1863년)
- 왕권강화 노력 (안동김씨 축출, 사색 고루등용, 지방·신분차별 배제)
- 군포를 호포라 개칭하여 양반에게도 부과
- 환곡제도를 사창제도로 개선
- 경복궁 재건 ; 고종 2년(1865) ~ 고종 4년(1867)
농민에게 1결에 1백문의 결두전 부과
도성문을 통과하는 물품에서 문세 징수
원납전 강제 징수
당백전 발행 → 경제에 혼란
․서원의 철폐
- 서원 : 막대한 농장과 노비 소유, 면세·면역 특권, 국가 통제에서 벗어남
- 고종 2년(1865) : 만동묘 철폐
” 5년(1868) : 서원에도 납세 의무
” 8년(1871) : 47개소 이외의 모든 서원은 철폐
- 유학자들의 맹렬한 반대 → 대원군 하야의 한 원인
2. 쇄국정책
․이양선의 출몰
- 순조 32년(1832) : 영국 상선 1척이 충청도 해안에서 무역 요청
- 헌종 11년(1845) : 영국 군함 1척이 다도해 수역을 측량, 통상요구
- ” 12년(1846) : 프랑스 군함 3척이 충청도 해안에 출현
- 철종 5년(1854) : 러시아 군함 2척이 함경도 해안 측량
- 고종 3년(1866) : 독일 상인 오페르트 두차례 통상요구
→ 고종 5년(1868)에 남연군 무덤 도굴
- ” :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대동강에서 통상 요구하다 화공 당함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 초기에는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
- 러시아 남하 움직임에 천주교 신자 남종삼의 건의에 의하여 프랑스 끌어들일 계획 → 실패
- 조두순등의 배외정책 → 천주교 대탄압
- 고종 3년(1866)에 9명의 프랑스 선교사, 남종삼등 수천명의 신도 처형
3. 양요(洋擾)
․서양이 무력적인 위협에 의해서라도 통상 관계를 맺으려고 함 → 양요 발생
․병인양요 (고종 3년,1866)
- 고종 3년(1866)에 천주교 박해, 프랑스 선교사 순교
- 프랑스 군함 (Roze) 7척, 한강 입구 봉쇄하고 강화읍 점령, 군기·서적 약탈
- 문수산성에서 한성근, 정족산성에서 양헌수가 프랑스 군대 격퇴
․신미양요 (고종 8년,1871)
- 고종 3년(1866)에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 소각
- Low와 Rodgers가 미국군함 5척 거느리고 침략, 초지진·광성진 점령
- 광성진 전투에서 어재연이 거느린 수비병의 완강한 저항
- 갑관(甲串)에 상륙한 미국 군대도 강화 수비병의 공격으로 패퇴
․서울과 지방 각처에 ‘척화비’ 세움
․조선은 서양·일본 배척, 청과 외교
※ 일본 ┌ 철종 5년(1854)에 미국과 화친 조약
└ 고종 4년(1867)에 明治政府 성립
개화세력(開化勢力)의 성장 - 개화기
● 개화정책과 그에 대한 반발
1. 통상 개화론의 대두
․초기 통상론
- 박제가 (북학파) : 청,일본,서양과 통상해야 국가 부강 주장
- 이규경 : 순조 32년(1832), 영국상선 통상 요구때 허락 주장
- 최한기 : “지구전요” 저술, 무호개방 주장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에 의한 통상론 추진
- 박규수 : 박지원의 손자
- 오경석 : 중인 출신의 역관, 청 왕래하면 “해국도지”등 수입
- 유홍긱 : 중인 출신 醫 종사
․대원군의 정권 하야 (고종 10년,1873)
2. 開港
․운양호 사건 : 고종 12년(1875)
- 대원군의 정권 하야를 통상조약 강요의 기회로 삼음
- 譯官 오경석이 우의정 박규수를 움직여 통상 수교 방침을 결정
- 신헌(申櫶)을 파견하여 구로다와 협상
․朝日修好條規 (병자수호조약, 강화도조약) : 고종 13년(1876)
- 12조로 구성
┌조선이 자주의 국가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 청의 종주권 배격
│20개월을 기하여 부산과 그 밖의 2개의 항구를 개항 - 원산만,인천
│일본은 수시로 조선의 해안을 측량
└ 개항장에는 일본인의 조차지(租借地)를 설정, 일본인의 치외법권 규정
- 원산만 :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
인 천 : 정치적 이용 - 인천으로부터 쌀의 수출은 금지됨
3. 개화정책의 추진
1) 개화정책에 따른 문화 도입
․김기수를 수신사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
- 고종 13년(1876) ; 강화도 조약이 성립된 해
- “일동기유”를 저술, 고종에게 바침 ⇢ 신문명에 대한 조심스런 비판
․일본은 하나우사를 公使로 파견, 서대문밖의 청수관(청연정)을 假 공사관으로 삼음
․김홍집(김굉집)이 수신사로 방일
- 고종 17년(1880)
- 청의 황준헌 “조선책략”, 정관응 “이언(易言)”을 가져옴
* 조선책략 : 나라가 부강하려면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배우고,
러시아 남침을 막으려면 친중국·결일본·연미방하여 자강을 꾀하여야 함
* 이언 : 국가를 부강하게 하려면 기술뿐만 아니라 정치제도도 받아들여야 함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
- 고종 18년(1881), 조준영·박정양·어윤중·홍영식 등
- 각종 시설을 시찰하기 위한 전문 위원의 파견
․청의 권고에 따라 김윤식을 영선사로 삼아 청의 천진기기국 파견
- 양반 출신의 학도, 공장(工匠) 수십명
- 신식무기 제조법, 군사관계의 기초과학을 배움
2) 개화 정책에 따른 정치개혁
․군사제도의 개편 (고종 18년,1881) ⇦ 왕권 강화를 위한 군대 개혁
- 5군영 → 양영(무위영,장어영) : ‘大將’에 국왕의 친근자 임명
- 별기군 신설 : 일본인 장교초빙, 국왕의 근위병 성격
- 사관생도 교육 : 양반의 자제 100여명
․행정기구의 개혁
- 대체로 청의 제도를 참작
-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
그 밑에 12司 (사대·교린·군무·변정·통상·군물·기계·함선·어학·典選·理用) 설치
4. 위정척사 운동
․위정척사 사상 : 개화의 조류에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사상
- 성리학에 근본을 두고, 그 밖의 다른 이질적 문화를 배척
- 양요와 강화도 조약의 영향으로 척화론의 형태를 띰
- 이항노 ┌고종 3년(1866;병인양요가 있던 해)에 상소 → 주전론 주장
│고종 4년(1867) 언행록인 “화서아언” - 침략 배격
│內修가 있은 연후에 外攘이 가능
│의병을 조직하여 관군과 호응하여 외적과 싸울 것 주장 ⇒ 의병운동에 영향
└경제적 침략에 대한 경고 → 서양 물품을 사용하지 말 것을 주장
- 강화도조약 이후 ‘왜양일체론’ 대두 ← 최익현의 ‘五不可疏’ 고종 13년(1876)
․김홍집(김굉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에 대한 유학자들의 반발
- 영남 유학자들이 이만손을 疏頭로 하고 낸 ‘영남만인 疏’ ⇒ 축출되었던 대원군 추앙받음
5. 임오군란
․대원군의 정권 복귀 노력
- 고종 18년(1881), 이재선을 국왕추대 → 실패
․임오군란 (고종 19년,1882)
- 개화와 수구 세력의 대결로 정계혼란, 일본 세력 침투에 대한 민족적 반항심
- 별기군 창설후 구식 군대에 대한 차별대우 등에 의해 발발
- 별기군을 훈련하던 일본인 장교 살해, 일본 공사관 습격
․대원군의 재집권
- 양영과 별기군 폐지 → 5군영 부활
- 통리기무아문 폐지
6. 청·일의 침략행위와 열강과의 통상
․일본의 출병소동 → 청의 군대파견 (영선사 김윤식의 의견)
- 일본에게 빼앗긴 조선에 대한 우월적 지위 회복 목적
- 대원군을 납치하여 텐진(天津)으로 호송 ← 군란의 책임자라는 이유
․제물포조약 (조선,일본) : 고종 19년(1882)
- 군란의 주모자 처단, 일본인 피살자 유족에게 위문금 지불,
일본 정부에 손해 배상금 50만원 지불,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 주둔
․제물포조약이 체결되긴 했지만, 청이 주도권 계속 유지
- 정권을 담당한 명성황후는 청에 의존
- 조선의 요청으로 청은 묄렌도르프와 馬建常을 외교고문으로 파견
- 고종 19년(1882)에 ‘통리교보통상사무아문(외아문)’과 ‘통리군국사무아문(내아문)’ 설치
↳ 외교와 통상 ↳ 군국의 기무와 내정의 일체
- 군사제도 : 친군영을 세우고 그 밑에 4영(좌·우·전·후), 청국식으로 훈련
- ‘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 : 청국인의 조선안에서의 거주·영업·여행의 자유 인정
→ 청국 상인의 수 급증하여 조선 상인에게 타격 ⇒ 반청감정
․열강과의 통상 ⇐ 일본의 진출을 막으려는 청의 의도
- 고종 19년(1882)에 미국과 통상조약, 그 다음해(1883)에 비준
- 영국·독일과도 고종 19년에 의정되었다가, 익년에 작성, 그 다음해(1884)에 비준
- 이탈리아·러시아 : 고종 21년(1884)에 조인
- 프랑스 : 고종 23년(1886)에 조약
- 오스트리아·벨기에·덴마크 등과 통상조약 체결
● 개화당의 개혁운동
1. 개화당의 탄생
․개화당(독립당)의 탄생 : 급진적 개화정책 주장
- 김옥균·박영효·박영교·서광범·홍영식 등 (민비에게 압박받는 양반층) ← 유홍기의 영향
- 이동인(승려), 변수(중인), 유상오 부자(무인), 이창규(상인) 등 참여
- 신분차별 폐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떠 정치쇄신, 청의 간섭배격 등
↳ 일본에게 원조받기를 희망
․개화당의 활동
- 임오군란 이후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고종 19년,1882)부터 활발
김옥균·서광범 등이 동행
- “한성순보” 간행, 일본에 유학생 파견
우정국(우편), 전환국(화폐주조), 기기국(무기제작) 설치
- 경기도 광주에서 신식군대 양성 → 민비세력의 반대로 곧 중지
- 열강의 외교사절과 빈번히 접촉 ← 외교 활동의 중요성 인식
․민비 세력의 반발과 일본의 지원 미비로 활동에 한계
2. 갑신정변
․정변의 준비
- 김옥균이 일본으로부터 300만원의 차관 계획 (고종 20년,1883) → 실패
- 고종 21년(1884)에 ‘청불사변’ 발생 ⇒ 청의 간섭을 배격할 기회로 생각
- 서재필 등 합류, 일본(다케소에)의 지원 약속
․갑신정변 단행 (고종 21년,1884)
- 홍영식이 총판(總辦)으로 있는 우정국 개국 축하연 이용
- 대원군의 귀국 요청 ⇐ 민비세력 압도위해
문벌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
국가에 해를 끼친자 처벌 ⇐ 민씨 일파의 척족세력 제거
- 재정을 호조로 단일화
타조법 개혁하여 국가 수입 확대
관제를 개혁하여 회의로써 정책 결정
․갑신정변의 실패
- 청군의 출동으로 실패 (서울주둔군 - 청:1500명, 일:200명)
- 일본군 물러나자 김옥균·박영효 등 일본으로 망명
- 다케소에 공사는 공사관에 방화한 뒤에 일본으로 귀국
- 일본 경비대 본부, 일본인 거류지 등이 군중의 습격 받음
3. 열강세력의 침투
․한성조약 (고종 21년,1884)
- 이노우에가 대표로 갑신정변의 책임문제보다는 선후책의 강구를 위주로 하는 해결 꾀함
- 일본인 피살자에 대한 위휼금 지불, 공사관 건축비 배상 등...
․天津條約 (고종 22년,1885) : 청-일
- 일본은 갑신정변을 계기로 청의 주도권을 약화시키려 함
- 청·일 양군의 철병
- 교련을 위한 인원 파견 금지, 파병시 사전 통고
- 청의 원세개는 서울에 남아 심한 간섭 → 청 상인들의 집단거주
․러시아 세력의 등장
- 러시아와 통상조약 : 고종 21년(1884)
- 러시아 대표 웨베르의 외교활동 → 정부(고종,민비)의 친러적 성향
- 청의 러시아에 대한 경계 ┌ 대원군 귀국, 뭴렌도르프대신 Denny를 외교 고문으로 추천
└ 뭴렌도르프에 의해 개선된 조선해관의 사무를 청에 예속
- ‘조러육로통상약정’ 체결 ┌경흥이 러시아와의 무역에 개방
│러시아인 조차지 허용
└ 러시아인의 두만강 항행 인정
- 원산과 절영도에 저탄소(貯炭所) 설치 시도 → 청의 간섭으로 실패
․영국의 러시아에 대한 견제
- 청의 양해하에 전라도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 (고종 22년,1885)
- 러시아의 반발로, 청의 중재하에 영국함대 철수 (고종 24년,1887)
․조선의 열강 침투에 대한 반발
- 유길준 “중립론” : 고종 22년,1885 → 발표도 못됨
- 박정양을 주미 전권공사로 미국에 파견 (고종 24년,1887)
- 독일 영사 부들러의 영세국외 중립국 제안 → 묵살
● 동학 농민군의 항쟁
1. 농민의 동요
․정부의 재정 궁핍 → 농민에게 전가
․일본의 경제적 침투
- 일본의 곡물 수입(침탈) 증가
․방곡령
- 고종 26년(1889) : 함경도
- ” 27년(1890) : 황해도
- 일본의 항의로 효과를 거두지 못함
2. 동학 농민군의 봉기
․교조신원 운동 (고종 29년,1892)
- 전라도 삼례에서 충청·전라 감사에게 교조의 누명 풀것과 교도에 대한 탄압금지 요구
- 교조신원은 기각되었으나 교도탄압 금지 약속
- 고종 30년(1893)에 박광호를 소두로 복합상소 → 실패
- 충청도 보은에 2만여명 집결 →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구호
- 정부는 탐학한 향리를 징벌할 것을 약속하여 해산시킴
․군사행동 (고종 31년,1894)
-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 → 만석보 水稅의 강제 징수
- 전봉준의 지휘 아래 고부군청 점령 → 무기탈취, 곡식 빈민들에게 분배, 만석보 파괴
- 전부는 안핵사 파견 조사 → 전기 민란의 책임을 동학 교도에게 떠 넘김
-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을 중심으로 재 봉기
↳ 倡義文 산포, 보국안민을 위해 궐기 호소
‘民은 국가의 근본이다...’
- 고부를 점령한 뒤에 白山에 진을 옮겨 대오정비
3. 집강소의 설치와 항일전
1) 관군의 격파
․전주에서 출동한 관군을 황토현의 싸움에서 격파 → 정읍·고창을 거쳐 무장 점령
→ 영광을 거쳐 함평에 도달
․정부에서는 홍계훈을 양호초토사에 임명 토벌 → 장성에서 패배 → 동학 농민군 전주 점령
2) 휴전의 성립
․독학 농민군이 전주 점령 즈음, 청군·일본군 출동 → 정부의 휴전제의
․폐정 개혁을 조건으로 휴전 성립
- 양반들의 부당한 가렴주구 배격
- 외국상인의 침투 반대
․동학 농민군의 해산
- 각 촌마다 包를 설치 (村村設包)
- 전라도 53군에는 집강소(일종의 민정기관) 설치 → 폐정개혁에 착수
- 전주에 집강소의 총본부인 大都所를 두어 전봉준이 총지휘
- 요직에는 행정에 대한 지식이 있는 잔반이나 향리들이 임명
․개혁의 요강
- 탐관오리, 횡포한 부호,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 징벌
- 노비문서 불태울 것
- 천인의 대우 개선, 제한적인 과부 개가 허락
- 인재등용, 명분없는 잡세 폐지
- 公私債의 무효화
- 토지를 평균으로 나누어 경작하게 할 것
- 일본의 침략에 내통하는자를 엄벌
․동학 세력은 三南 지방을 비롯하여 평안도·함경도까지 미침
3) 동학 농민의 재 봉기
․청군·일본군의 출동으로 정세 혼미 → 斥倭를 구호삼아 북진
․공주에서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에게 패하고, 태인에서 패배
→ 전봉준이하 많은 지도자들이 체포 혹은 피살 → 해산
4) 동학 운동의 의미
․양반 사회에 항거하여 일어난 대규모적인 농민들의 반항운동
․외국의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
4. 청·일의 침략경쟁
․동학운동 → 청·일은 조선에 있어서의 세력확장의 기회로 보고 군사 출동
․청의 공동 철병 제안 → 일본의 거부, 공동으로 내정개혁 추진 제의
․청일전쟁 발발 → 일본의 승리
․하관조약(시노모세키 조약) 체결 (청-일)
- 조선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로 확인 ⇒ 청의 종주권 부인
- 청이 요동반도와 대만을 일본에게 할양
● 갑오개혁
1. 개혁의 실시
1) 일본의 내정 개혁 요구 → 정부의 거절 → 군대 출동하여 경복궁 점령,
대원군 집정, 김홍집을 수반으로 한 친일·중립계 정부 구성
2) 갑오경장 (고종 31년,1894)
․군국기무처의 설치
- 김홍집을 총재관으로 17명의 회의원으로 구성
- 초정부적 존재 → 국왕·왕비·대원군 무시
- 세력 제거되자 군국기무처 폐지시키고 개혁 진행
․정치상의 개혁
- 開國紀元 사용 → 청과의 종속관계 벗어남을 나타냄
- 의정부와 궁내부를 구별
┌궁내부 : 과거의 왕실 관계 여러 관부를 정리하고 간소화
└의정부 : 총리 대신을 최고로 하여 8개 아문 (6조+외무,농상)
-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치고 7부(외부·내부·탁지부·법부·학부·농공상부·군부) 둠
- 관리의 品級을 개정하고, 品에 따르는 월봉제도 수립
- 과거제도 폐지, 새로운 관리 임용법 시행 → 양반·상민이나 문반·무반의 차별 없앰
- 지방관제 개혁 ┌ 8道 → 23府 → 13道 개편
└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군사권 박탈
- 사법권을 행정기구에서 분리 독립 ← 재판소 구성법 공포
┌ 1심 재판관 : 지방 재판소, 개항장 재판소
└ 2심 ” : 고등 재판소, 순회 재판소
- 경찰권 일원화
┌ 서울 : 경무청
└ 지방 : 관찰사 지휘하에 경무관 둠
․경제적 개혁
- 재정의 일원화 ┌ 탁지부(度支部)에서 재정에 관한 사무 담당
└ 탁지부 관하에 220개 처의 徵稅署, 9개처의 管稅司 설치
- 화폐제도 정리 : 신식화폐장정에 의하여 은본위제 채택, 수종의 동화로써 보조화폐
⇒ 조세의 금납제
- 도량형 개정 통일
․사회적 개혁
- 신분제도 철폐
- 고문이나 연좌법 폐지
- 남녀의 조혼은 금함 (남자20세, 여자16세)
- 모든 과부의 재가 허용, 관직에서 물러난 후 상업 종사 가능
- 양자 제도의 개정, 의복 제도의 간소화
2. 개혁의 파문
․일본의 자본주의가 침투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
- 일본 화폐 혼용 가능
- 군사제도의 개혁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음
․조세의 금납제
- 농촌에까지 화폐가 널리 유통되지 않아서 농민들에게 부담
․대원군의 불만 → 일본은 공사를 오오도리에서 이노우에로 교체하여 대원군 축출
-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 성립
- 홍범 14조 (한국 최초의 헌법)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요동반도를 청에게 다시 반환시킴
→ 배일·친러 세력 형성 : 민씨세력
→ 박영효 등 친일세력 축출 →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파 기용
․을미사변 (고종 32년,1895)
- 일본의 친러세력 축출, 친일세력 부활 의도
- 이노우에의 뒤를 이은 미우라가 주도
- 김홍집을 수반으로한 새 내각 조직
․급진적 개혁의 추진 (을미개혁)
- 태양력 채용
- 어린애에 대한 종두규칙 발표
- 서울에 소학교 설치
- 충주·안동·대구·동래에서 우체 사무개시
- 一世一元의 연호 사용, 이듬해부터 건양(建陽)
- 군제 변경 : 중앙에 친위대, 지방에 진위대
- 단발령
․을미사변, 단발령 등으로 반일 분위기 고조
→ 의병 (유인석·이소응·이춘영 등) 봉기
● 개화기의 상공업과 사회사상
1. 개항후 상공업의 변화
1) 개항초기 : 외국 상인의 활동범위 제한
․객주·여각(도고상인)은 보부상을 통하여 수입품 판매나 수출품 매입으로 재부 축적
2) 외국 상인의 내륙에서의 상업활동 개시
․객주·여각 및 보부상에게 큰 타격
․객주·여각의 진취적 상인들은 상사회사를 조직
- 평안도人이 처음 평야에 설립한 대동상회 등...
- 서적출판 목적의 廣印社 ─┐
- 술을 양조 판매한 長春社 ─┴─ 민간의 합자회사
- 농민들의 稅穀 환금 담당한 米商會社 - 관설회사
⇢ 관설회사의 수가 더 많았음, 정부로부터 특권
3) 상인단체 조직
․고종 20년(1883)에 보부상 보호 목적으로 혜상공국 설치
- 보부상단은 특권의식 때문에 근대적 상인단체로 성장하지는 못함
․개항장의 객주들이 객주상회 조직
- 고종 20년(1883) : 원산의 상회소
- ” 22년(1885) : 부산 상법회사, 인천 객주상회(紳商協會)
4) 공업
․고종 20년(1883) ┌ 근대적인 무기 제조하는 기기국(機器局)
│ 화폐 주조하는 전환국(典圜局)
└ 출판물 인쇄하는 박문국(博文局)
․고종 22년(1885) - 방직을 위한 직조국(織造局)
․고종 24년(1887) ┌제지를 위한 조지국(造紙局)
└근대식 채광법에 의한 광산 개발을 위한 광무국(鑛務局)
․개항 초기의 근대식 공장은 정부에 의해서 운영됨
5) 해운
․고종 23년(1886) - 轉運局 설치하여 근대식 汽船을 구입하여 해운업 경영을 담당
․ ” 29년(1892) - 官民합판회사인 利運社 설립하여 세곡 운반등에 종사
2. 개화사상의 전개
․개화사상 :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상공업을 발전시킴으로써 부국강병의 실을 거두려 함
․초기에는 무기와 농업기술의 도입에 큰 관심
- “해국도지”의 설명에 따라 신식전함 제조 시험, 대포 제작하여 강화도에 배치
- 최경석은 농무목축시험장에서 미국에서 도입한 종자 재배, 가축 기름
- 새로 설치된 잠상공사에서는 독일인 초빙하여 새 양잠법 시도
- 안종수는 고종 18년(1881)에 “농정신편” 저술 ─┐
- 정병하는 ” 23년(1886)에 “농정촬요” 저술 ─┴─ 서양의 근대 농법 소개
․정치와 사회의 개혁을 중요시하는 급진적인 개화사상으로 발전
- 김옥균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
│서구식 무기로 무장한 신식군대 양성
│자본주의적 경제 조직과 근대적인 산업을 건설
│양반 중심의 신분제도 폐지, 만민의 평등권 확립하여 근대적인 시민사회 추구
└학교의 설립, 종교의 자유
- 유길준 ┌고종 26년(1889) “서유견문”에서 서양의 근대문명을 모범으로하여 개화에 노력
│허명개화, 실상개화 언급
│법치주의적 민주주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수립 목표
└당시의 한국에서는 군민이 함께 다스리는 정치체제가 적절한 것이라 함
- 고종 20년(1883) “한성순보”에 발표된 ‘회사설’
→ 상업하는 방법으로서 여러사람이 자본을 모아 서양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필요
● 대한제국과 독립협회
1. 대한제국의 성립
․아관파천 : 건양 원년(1896)
- 을미사변으로 전국 혼란 → 러시아 대표 웨베르는 공사관 보호 명목으로 水兵 100명 파견
- 친러파인 이범진 등이 국왕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데려감
- 친일 내각의 김홍집·어윤중 등 살해, 유길준 등은 일본 망명
-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내각 성립
- 러시아의 이권 획득이 열강을 자극하여 아관파천 이후 많은 이권이 외국인 손으로 넘어감
․대한제국 성립 : 광무 원년(1897)
- 아관파천으로 국민의 비나 집중 ⇐ 독립협회 등..
-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겨와 국호를 大韓, 연호를 光武, 왕을 황제 칭함
2. 독립협회의 창립과 발전
․정부가 외세에 의존하여 국가를 보존하려는데 반발한 신지식층들이 각종 정치단체를 창설
․독립협회
- 건양 원년(1896)에 갑신정변 실패로 미국에 망명하였던 서재필이 귀국하여 조직
- 윤치호·이상재·남궁억·정교·한규설 등 참여
- 회원 가입의 전적인 개방 : 정부 관료들 중심에서 일반 시민을 중심으로 한 협회로 변화
- 광무 2년(1898)에 조직된 공주지회를 필두로 지방으로 확대
(서울의 본회가 해산된 후에도 계속 활동)
- 신지식층을 선두로 하여, 새로이 성장한 시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음
3. 독립협회의 활동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 세움, 독립관·독립공원 만듬
․계몽운동 전개
- 일요일마다 독립관에서 토론회 개최
- 기관지 발행
공 식 : 월간 『대조선 독립협회 회보』
비공식 : 일간신문 『독립신문』 ← 독립협회 창설전에 간행, 순 한글
독립협회에 참여한 유교의 혁신파 : 『황성신문』
․독립협회의 활동 목표
- 자주독립 옹호
외국의 정치간섭 배격, 이권양여 반대, 침탈된 이권도 되찾을 것
열강의 세력을 균형 유지시켜 자주적인 중립외교
- 일반국민을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민권 신장
국민의 참정권 주장 : 개인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권, 언론과 집회의 자유권,만민의 평등권, 국민 주권론
중추원을 개편하여 의회를 설립 제의 → 고종의 승낙을 받기도 함
- 국가의 자강을 이룩
촌마다 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실시
방직·제지·철공업 등의 공장을 건설하여 상공업 국가로 발전
자위를 위해 근대적인 국방력을 양성
․독립협회의 활동에 의한 영향
-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알렉세프)의 본국 소환, 한로은행 폐쇄
-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경운궁으로 돌아옴 (경복궁 아님)
- 광무 2년(1898) 10월에 종로광장에서 관민공동회 개최
↳헌의 6조 건의 : 입헌정치와 법치행정 요구, 홍범 14조 등 장정 실행 요구
- 정부의 독립협회에 대한 해산 명령 → 만민공동회 개최 → 무력으로 시위군중 해산
⇒ 독립협회의 해산
● 일제의 정치적 침략과 의병의 항쟁
1. 러·일의 침략 경쟁
․러시아의 만주에 대한 지배력 강화후 대한제국에 대해서도 강력한 침투 시도
→ 실력에서 뒤지던 일본은 러시아와 타협을 원함
→ 러·일간 니사(西)-로젠 협정(광무 2년,1898) 체결
- 한국의 내정 불간섭, 훈병교관과 재무고문의 파견은 사전 협의,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적 침투 인정
→ 러시아의 해군 근거지 확보위한 마산의 토지 조차 시도 (광무 4년,1900) → 실패
․러·일 전쟁
- 광무 4년에 청에서 ‘의화단의 난’ 일어남
- 러시아 만주에 군대 파견 → 영·일 동맹 체결
- 러시아는 압록강을 넘어 용암포에 주둔, 조차 요구 (광무 7년,1903) → 일본 항의로 실패
- 광무 8년(1904) 2월에 일본이 旅順 기습공격으로 러일전쟁 발발
2. 일제 침략의 국제적 승인
․한국의 국외중립 선언 : 광무 8년(1904) 1월
․한일의정서 성립 : 광무 8년(1904) 2월
- 일본이 무력으로 위협하여 강제 성립, 일본의 정치적·군사적 간섭을 합리화
- 한국과 러시아간의 모든 조약 폐기
- 전쟁을 위한 필요에서 경의·경부선 착공, 통신망 강점, 한국의 해안과 하천의 항행권 획득
- 토지의 강탈을 위한 황무지 개척권 요구 → 여론의 반대로 철회
- 일본인 고문관의 초빙을 강요 ⇐ 내정 간섭 목적
․한일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 광무 8년(1904) 8월
- 일본이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고문으로 초빙, 자문후 시행
” 외국인 1명을 외교고문으로 초빙, 일본과 협의하여 시행
→ 재정고문:메가다, 외교고문:스티븐스
- 협약에 없는 군부고문·경무고문·궁내부고문·학정참여관 등 파견 ⇨ 고문정치 시행
- 독일·프랑스·일본·청 등에 파견 되었던 한국공사 소환됨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 인정
-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연승
- 루스벨트는 미국의 필리핀 지배 승인 대가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 인정
→ 태프트·가쯔라 비밀협약 : 광무 9년(1905) 7월
- 영국도 영일동맹을 개정하여 일본의 한국 보호조치 승인 : 광무 9년(1905) 8월
- 포츠머드 강화조약 : 광무 9년(1905) 9월
→ 일본의 한국 지배를 러시아가 인정
⇒ 일본의 한국에 대한 독점권리 확보
3. 을사조약
․일진회 : 송병준·이용구 등이 조직한 친일단체 → 보호조약의 필요를 선전
⇔ 헌정연구회 : 이준, 양한묵
․을사조약 (한일협약) : 광무 9년(1905) 11월
- 일본 정치계 원로 이토, 주한일본공사 하야시에 의한 강제 조약
※ 안중근의 이토 살해 (융희 3년,1909) - 한일합방 전
- 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
→ 일본은 간도를 안봉선 개축 조건으로 청에게 넘겨줌 (융희 3년,1909)
- 통감(統監) 정치 : 규정상에는 외교에 관한 사항만 관리하게 되어있었지만,
실제로는 한국의 모든 내정을 관장
․국민적인 반항
- 상소문·연설·시위·철시가 끊이지 않음
- 시종무관 민영환 자결
- 조병세·홍만식·송병선·이상철 등 많은 憤死者
- 의병들의 봉기 : 민종식(홍성), 최익현·임병찬(순창), 신돌석(경상도)
4. 헤이거특사 파견과 한일신협약
․“대한매일신보”에 고종의 친서 발표
․헤이그 특사 파견
- 광무 11년(1907)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
- 이상설·이준·이위종 → 참석하지는 못함
- 이위종은 만국기자협회에서 실정을 폭로, 이준은 순국
․고종의 양위
-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일본은 지배의 강화를 꾀하려 함
- 일본의 강요로 순종 황제 즉위 (광무 11년 7월), 연호를 隆熙
- 시위운동 확산, 일진회의 기관지인 『국민신보』의 사옥 파괴
․한일신협약 (정미7조약) : 융희 원년(1907)
- 통감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정식으로 가짐
- 施政개선, 법령제정, 중요한 행정처분, 고등관리 임명, 외국인 초빙등에 통감의 동의필요
- 고문을 없애고, 각 부의 차관이하에 다수의 일보인 관리 임명 ⇨ 차관정치
․군대의 해산 : 융희 원년(1907) 8월 - 한일신협약 직후
- 해산된 군대는 일본과 시가전을 전개하였으나 탄약이 떨어져 패배
- 해산되어 지방으로 내려간 군대들은 각지의 의병과 합류
- 지방의 진위대들도 의병에 참가
5. 일제의 식민지화
․경술국치=한일합방 (융희 4년,1910)
- 일본은 육군대신 데라우치를 새 통감으로 임명
- 데라우치는 부임전 동경에서 경찰권을 위양받는 조약을 맺어서 한국으로 옴
- 일본 헌병 2000여명을 증원시켜 경찰업무 담당
- 『황성신문』·『대한민보』·『대한매일신보』 등을 정간시킴
- 총리 이완용과 더불어 병합안을 꾸미어 8월 22일에 조약에 조인
․총독부 설치
- 총독은 육·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 입법권·사법권·행정권 및 군사통수권 가짐
- 초대 총독에 데라우치 → 강압적인 통치
- 헌병 경찰제도 실시
- 1910년 안명근의 데라우치 암살 미수사건
→ 그 이듬해에 신민회의 윤치호·양기탁·이승훈 등 600여명 검거, 105명 기소 (105인 사건)
- 한국인의 모든 정치활동 금지 : 집회취체령(集會取締令)
- 총독부 부속 관청으로 중추원 만듬 → 일본 자문기관
↳추원 의장에 정무총감(일본인), 의원은 일본이 임명, 부의장에 이완용 등 임명
6. 의병항쟁의 격화
․의병활동은 을미사변(고종 32년,1895)때부터 있었지만 활동은 미비
․군대 해산(융희 원년,1907) 후 서울의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 합류 후 본격화
- 서울의 시위대는 일본군과 항전 후 지방으로 내려가 의병과 합류
- 원주의 진위대는 민긍호의 지휘하에 원주·충주·여천·춘천 등에서 왜군 격파
- 강화의 진위대는 유명규의 지휘하에 일본군 격파하고 황해도로 가서 의병과 합류
- 허위는 적성 등 임진강 일대를 중심으로 활약
- 이인영은 강원도에서, 이강년은 안동 진위대와 함께 경북·강원 일대에서 활약
- 신돌석(평민출신 의병장)은 경상도에서 활약
․융희 원년(1907)에 이인영,허위 등이 전국 의병 1만으로 ‘십삼도창의군’ 결성
→ 서울 동대문 앞 30리 지점까지 진격
․융희 2년(1907)을 고비로 의병활동은 점차로 약화되었으나,
한일합방 이후에는 만주·발해주로 무대를 옮기어 독립군으로 전환
●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민족자본
1. 토지의 약탈
․광무 8년(1904) 6월에 황무지 개척이라는 구실로 토지의 약탈을 강행하려 함
- 이도재 등이 농광회사 조직하여 황무지 개척은 우리손으로 해야한다고 주장
→ 정부의 승인 받음
- 보안회에서 대중적인 반대운동
⇒ 황무지 개척안은 철회되었으나, 국유미간지이용법 제정 (광무 11년,1907)하여 목적달성
․일본인 자본가들의 농업회사 설립
- 국유 미개간지 뿐만아니라 역둔전 등까지 침탈해서 대규모 농장소유
- 한국농업주식회사(광무 8년,1904)·한국흥업·한국실업·산음도산업 등 많은 농장 소유
- 동양척식주식회사(융희 2년,1908)는 1년 6개월동안 3만 정보의 토지소유
- 일본 농민의 이주가 급격히 증대
- 철도용지·군용지를 빙자한 토지수용 방법으로 약탈
→ 국유지는 무상으로 약탈, 사유지는 한국정부가 매입하여 제공
․토지조사 사업
- 1910년 토지조사국 설치
- 1912년 토지조사령 반포 → 공공기관 소유, 신고하지 않은 모든 토지 총독부에 몰수
- 1911년 산림령, 1918년 임야조사령 → 국유산림, 소유자 불확실한 산림이 총독부 소유
※ 1930년 통계 : 총독부가 소유한 전답과 임야 : 888만 정보 (전 국토의 40%)
- 총독부가 점유한 토지의 일부는 동양척식회사 등 일본인 토지회사나 이민들에게 헐값으로 불하
2. 자원의 독점
․금의 확보를 한국에 의존 ← 일본의 자본주의가 金本位制로 전환
․병합이후 일본인 소유 광산 증가
․삼림채벌 - 1920년 이후에 심해짐
․독도를 불법적으로 일본 영토로 편입 ← 일본인 어부 보호
․총독부는 철도·항만·통신·항공 등의 시설운영, 인삼·소금·담배·아편 등을 전매
3. 공공사업의 지배
․전신시설
- 고종 22년(1885)에 서울과 인천 및 의주와의 연락위해 처음 가설 → 청의 관리
- ” 25년(1888)에 서울과 부산 사이에 전신선 가설,
부산에서 해저선을 통하여 일본으로 연결 → 한국 정부가 운영
-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수중으로 넘어감
․우편사무
- 고종 21년(1884)에 우정국 설치 → 갑신정변으로 폐지
- ” 32년(1895)에 우편사를 두고 우편사무 시작
- 광무 4년(1900)에 외국과의 우편물 교환도 실시
-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관리에 위임
․철도의 가설
- 경인선 : 일본이 양해로 먼저 얻었음
→ 건양 원년(1896)에 미국에게 경인선 부설권이 넘어감
→ 다음해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일본에게 인계되어 광무 4년(1900)에 완성
- 경부선·경의선 : 러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이 가설
- 을사조약 이후 통감부 철도관리국의 관장하에 놓였고, 이어 총독부 관하로 들어감
․전기시설
- 광무 2년(1898)에 한국과 미국의 합자로 한성전기회사 설립되어 전차·전등 가설
- 전기시설만은 통감부의 관리를 받지 않았음 → 병합후에는 모두 총독부의 지배
4. 금융의 지배
․화폐의 정리 (광무 9년,1905)
- 한일협정서 (광무 8년,1904)에 의하여 재정고문으로 온 메가다에 의해 실시
- 엽전(상평통보)과 백동화가 주로 유통되고 있었음
- 제일은행(일본소유)으로 하여금 새 화폐를 만들어 교환·정리
- 백동화를 갑·을·병으로 구분하여 병(전 백동화의 2/3)은 교환해 주지 않음
→ 한국 상공업자는 막대한 손해
- 일본의 은행이 한국의 금융업계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됨
․일본 금융기관의 침투
- 1900년경에 제일은행,제십팔은행,제오십팔은행,일본흥업은행 등 지점과 출장소 설치됨
- 제일은행의 한국지점은 광무 9년(1905) 3월이래 통화발행권을 가짐 → 한국의 중앙은행 구실
- 융희 3년(1909)에 한국은행 설치되어 제일은행의 업무 계승
→ 총재에는 제일은행 한국총지점 지배인이 취임
- 합방후인 1911년에 한국은행을 조선은행으로 만들어 중앙은행의 구실을 담당케 함
- 광무 10년(1906)에 설치된 농공은행(식산은행)은 식민지가 된 후에 주로 일본인 상·농민 지원
․정부의 국채 증가
- 통감부는 금융기과의 구제, 도로의 개수, 일본인 관리의 고용 등의 비용을 정부에게 부담시킴
- 정부는 통감부의 주선으로 일본정부 및 일본인 은행에서 차관을 함
- 국채의 부담은 정부로 하여금 더욱 일본에 의존하게 만듬
→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광무 11년,1907)
- 병합된 뒤에 총독부는 한국국민의 세금으로 이를 모두 상환함
✽경제적 구국운동
5. 민족산업의 수난
․민족자본에 의한 근대적 기업 활동이 활발해짐 : 1897~1907
- 독립협회가 활발한 사회적 활동을 하고, 대한제국이 성립되던 무렵 이후
․객주조합은 개항장에서 근대적 상인단체로 성장
→ 고종 32년(1895)에 ‘상무회의소규례’가 발표되면서 상무회의소로 바뀜
→ 광무 9년(1905)에 서울에 설치된 상무회의소가 한성상업회의소
- 화폐개혁으로 인한 금융공황의 구제책을 강구하는 것이 목적
- 상업은행 설립을 계획하여 광무 10년(1906)에 한일은행 창립
- 기관지인 『상공월보』 간행
- 한성상업회의소는 일제의 식민지가 된 후에 해산,
한국 상업인들도 일본인 주도하의 경성상업회의소에 흡수
․민간 기업인들에 의한 근대적 공장 건설
- 가장 관심을 가진 분야는 방직(紡織)공장
안동수의 대한직조공장, 백목전의 종로직조사, 김덕창의 김덕창직조공장
- 요업·정미업·담배제조업·제분업 등의 공장도 늘어남
․철도를 민족자본으로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
- 광무 2년(1898)에 부산과 하단을 연결하는 철도 가설 위해 박기종 등이 부하철도회사 설립
- 광무 3년(1899)에 설립된 대한철도회사는 경의선·경원선·함경선 등 건설 계획
- 자본 부족으로 시작을 못하자, 정부는 광무 4년(1900)에 철도원을 두고 건설 계획 세움
- 광무 6년(1902)에 경의선 건설을 위해 서북철도국을 신설하여 기공식까지 함
→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게 부설권 강탈당함
․해운에 있어서는 관민합판회사인 이운사 몰락후, 민간 해운업 점차 설립됨
- 광무 4년(1900)에 대한협동우선주식회사·인천우선회사·인한윤선주식회사·통운사 등 설립
․김종한 등이 건양 원년(1896)에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금융기관인 조선은행 설립
- 이어 한성은행·대한천일은행·한일은행 등 설립
- 광무 7년(1903)에 중앙은행 설립위한 조례 반포
→ 한국 정부에 의한 중앙은행은 실현되지 못함
● 애국계몽운동
1. 정치·사회 단체의 활동
․보안회
- 광무 8년(1904)에 송수만 등이 조직
-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운동을 일으켜, 일본으로 하여금 철회케 하는데 성공
- 이상설을 회장으로 하는 협동회로 발전 → 일본의 탄압으로 해산
․공진회
- 광무 8년(1904)에 독립협회 계통의 인사들로 조직
- ” 9년(1905)에 헌정연구회로 발전
․정치·사회 단체의 활동은 정부·일본의 탄압으로 사회문화 운동으로 변화
․대한자강회
- 광무 10년(1906)에 헌정연구회의 후신으로 조직됨
-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자 반대운동 전개
- 통감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으나, 대한협회로 이름바꾸고 계몽운동 전개
․국채보상운동
- 광무 11년(1907)에 국채보상기성회 조직
- 간사인 양기탁의 구속으로 더 이상 진전없이 좌절
․신민회
- 통감부의 감시속에서 정치·사회 운동이 많은 제약을 받자 조직된 비밀단체
- 광무 11년(1907)에 윤치호·안창호·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갑·이승훈 등이 조직
- 산업을 위하여 자기회사 세우고, 교육을 위하여 학교설립, 출판활동을 위하여 서점을 경영
- 무장활동을 목표로 한 준비도 하고 있었으나, 1911년에 105인 사건으로 활동 중지
2. 언론기관의 발달
·『한성순보』
- 한국 최초의 신문
- 고종 20년(1883)에 김옥균 등 개화당의 노력에 의하여 박문국에서 발행
- 갑신정변으로 1년만에 폐간
·『독립신문』
- 건양 원년(1896)에 서재필이 창간
- 한글전용으로 처음 1주일에 3회에서 일간으로 발전
- 독립협회에서도 서구문화를 흡수한 신지식층의 견해를 대변
·『황성신문』
- 광무 2년(1898)에 남궁억 등이 창간
- 독립협회에서 유교의 혁신파 세력의 견해를 대변, 국한문 혼용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오건조약체결전말’이라하여 상세보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 실음
·『제국신문』
- 광무 2년(1898)에 이종일 등이 발행
- 중류이하의 대중과 부녀자를 상대로 하는 순한글로 된 신문
- 정치적 문제보다는 사회적인 계몽운동에 주력
·『대한매일신보』
- 광무 8년(1904)에 영국인 베델(배설)이 양기탁과 함께 창간
- 영국인의 경영이라하여 일본의 검열을 받지 않음
- 처음에는 국한문 혼용으로 간행하였으나, 한글판·영문판(The Korea Daily News)도 간행
- 을사조약 후 고종의 친서 발표
·『만세보』
- 광무 10년(1906)에 손병희·오세창 등 천교도 계통
- 일진회에 대한 비난
·『대한민보』
- 융희 3년(1909)에 대한협회에서 간행
- 일진회 등과 맞서 싸움
․광무 11년(1907)에 통감부는 신문지법 제정하여 언론을 탄압
- 1910년 경에는 『대한매일신보』만이 민족의 대변지 구실
→ 병합후 총독부에 매수되어 『매일신보』로 개제
- 미국에서 『신한민보』, 발해주에서 『해조신문』이 간행되어 국내로 배달
․융희 2년(1908)에 완전히 금지됨
3. 교육열의 팽창
․정부는 고종 23년(1886)에 육영공원 설립하여 서양의 새 학문에 대한 교육 실시
․고종 32년(1895)에 교육입국의 조서를 내려, 교육의 중요성 강조
․사립학교의 설치
- 원산학사 : 고종 20년(1883)에 덕원부사 정현석이 원산에 세움 ⇨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
- 배재학당 : 고종 23년(1886) 미국 선교회 계통의 아펜젤러가 세움
- 을사조약 체결 후에 한국인에 의한 사립학교가 많이 세워짐
․사립학교는 양반보다는 평민 출신들이 설립을 많이 하였고, 관심도 많았음
․을사조약 이후 노동야학이 크게 성행함
․통감부시대에 사립학교령(1908)을 제정하여 인가제로 하고, 교과서도 인가된 것만을 사용케 함
→ 많은 사립학교가 폐교
․병합후에는 총독부가 실용주의 교육을 내세움
- 보통교육에서는 일본어를, 실업교육에서는 기술을 교육시킴
4. 종교운동
․기독교(신교)의 영향
- 고종 21년(1884)에 미국 북장로회의 알렌,
고종 22년(1885)에 언더우드, 미국 북감리회의 아펜젤러 등이 활발한 선교활동
→ 전도의 한 수단으로 의료 등 사회사업을 경영
- 사상적으로 자유주의를 고취하고 민족의식 양양에 커다란 구실
- 광무 7년(1903)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설립, 활발한 정치적·사회적 운동 전개
․천도교
- 동학계통의 일부가 일진회로 흡수되자, 손병희는 천도교란 이름을 내세우고 민족운동에 가담
-『만세보』를 발간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
․유교
- 보수적인 입장이여서 근대화의 방향과 반대인 경우가 많았지만,
강한 척왜사상으로 상소문이나 의병활동 일으킴
․불교
- 불교를 혁신하려는 운동 전개
-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1913)이 간행됨
․대종교
- 나철·오적 등이 단군신앙 부활, 민족적 입장 강조
5. 계몽적 학문
․학문적인 계몽 단체들의 조직
- 李甲 등의 서북학회 (서우학회+한북흥학회) → 『서북학회월보』
- 이광종 등의 기호흥학회 → 『기호학회월보』
- 장지연 등의 영남학회
- 이채 등의 호남학회 → 『호남학보』
- 남궁억 등의 관동학회
- 유길준 등의 흥사단
- 김윤식 등의 대동학회
- 진학신 등의 여자교육회
․계몽적인 잡지
-『대조선독립협회 회보』·『대한자강회월보』·『소년』
- 여성 계몽을 위하여 신민회의 『가정잡지』, 여자교육회의 『여자지남』
- 광학서포·회동서관 등 기업적인 출판사 설립
․國語 연구
- 유길준의 “조선문전”(19세기 말) : 최초의 문법서 → 1909년 “대한문전”으로 간행
- 주시경이 국문동식회, 지석영이 국문연구회 조직
- 주시경은 “국어문법”,“말의소리” 등 저술, 많은 제자 배출 → 후에 조선어학회 결성
․國史 연구
- 장지연·박은식·신채호 등 “을지문덕전”,“강감찬전”,“최도통전”,“이순신전” 등 전기 전술
- 역사지리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국토에 대한 애호 강조
- 한국의 고전을 발굴하여 그 가치를 재인식하려는 노력,
최남선이 조선광문회 조직 “조선총서” 간행
- 세계사에 대하여도 큰 관심 (건국사·망국사)
“서사건국지”,“미국독립사”,“의대리독립사”,“월남망국사”,“파난말년전사”
- “이태리건국삼걸전”,“비사맥전”,“피득대제”,“애국부인전” 등 영웅들의 전기가 환영됨
6. 소설과 가사
․신소설 : 구소설로부터 신문학으로의 다리를 놓는 역할
- 순한글, 권선징악적 주제, 인물들이 틀에 박힌듯한 유형
- 등장인물이나 사건을 현대에서 취하고, 언문일치의 문장을 사용
- 민족의 자주독립, 신교육의 필요성, 남녀평등, 미신타파, 과학문명의 필요를 역설
- 이인직 : “혈의 누”,“치악산”,“귀의 성”
이해조 : “자유종”,“모란병(牡丹屛)”
최찬식 : “추월색”
안국선 : “금수회의록”
- 신소설은 1911년에 이광수가 “무정”을 발표할때까지 소설의 주류를 이룸
․새로운 형태의 가사(창가)가 크게 유행
- 애국·독립·신교육·신문화 등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
․외국 문화의 소개도 늘어남
- “성경”,“천로역정” 같은 기독교물
- “이솝이야기”,“로빈손표류기”,“걸리버여행기” 등 아동문학
✽개항기 문화
● 3·1 운동
1. 망명과 비밀결사
․한일합방이후 많은 민족운동자들이 해외로 망명함
․무력에 의한 독립쟁취 움직임
- 삼원보 : 이시영·이동녕·이상용 등이 중심이 되어 서간도에 설치
→ 1911년에 군사훈련을 위한 신흥무관학교가 세워짐
- 대한광복군정부 : 연해주에 건설한 신한촌 등 여러 한국인 거주지를 토대로,
1914년 이상설·이동휘 등이 블라디보스톡에 세움
- 미국에서는 박용만이 1909년 헤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 설립
→ 1914년에는 하와이에 대조선국민군단 편성하고, 사관을 양성하기 위한 사관학교 설립
․외교적 수단에 의하여 독립을 쟁취하려는 움직임
- 상해에서 활동하던 신규식은 1912년에 동제사 조직, 중국의 혁명가들과 연결
- 미국으로 간 이승만은 1909년 대한인민국회(국민회)를 조직,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
- 안창호는 강제 해산당한 신민회의 후신으로 흥사단 조직
- 중국에 망명한 독립운동자들은 1917년 스톡홀름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회의에 대표 파견
․국내에서의 독립활동
- 안창호가 1907년에 비밀결사인 신민회 조직 → 105인 사건으로 강제해체
- 장일환이 중심으로 1917년에 기독교 계통의 조선국민회 조직
․독립군의 조직
- 대한독립의군부 : 1912년에 임병찬이 중심이 되어 조직
- 조선국권회복단 : 1915년에 서상일등이 조직
- 대한광복회 : 1913년에 채기중 등이 조직하고, 뒤에 박상진 등이 강화
2. 3·1 운동의 발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약소민족들이 독립함
․1919년 1월에 상해에 모인 망명지사들이 신한청년당 조직
- 2월에 파리의 평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
- 국내와 일본·만주·시베리아 등 각지에 대표를 보내 구체적인 독립활동 모색
․2·8 독립선언
- 일본 동경의 유학생인 최팔용 등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계획
- 이들 유학생 600여명은 1919년 2월 8일 동경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선언서와 결의문 발표
․3·1 운동의 시작
-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계획
- 고종의 장례일인 3월 3일을 앞두고, 전국 각지의 군중들이 서울에 집결
-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발표
- 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 후 시위 행진
3. 3·1 운동의 전개
․민족대표 33인에 의하여 작성된 독립선언서의 발표와 더불어 시작
․평화적인 시위운동의 전국적인 확대 → 만주·연해주 등 해외로도 번져감
․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인 일본의 국제적인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열강의 지원은 못받음
4. 임시정부의 수립
․강력한 통일된 조직의 필요성 대두
- 3·1 운동 직후에 국내외에 여러개의 임시정부가 생김
-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됨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 의정원과 국무원으로 구성
- 임시정부와 국민과의 연결은 연통제를 통하여 이루어 짐
- 1919년 5월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 주장케 함
- ” 8월 스위스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대표 파견
- 만주와 발해주 지방의 독립군을 일원적으로 재편성하고, 안동현에 광복군 총영을 설치
- 임시정부 기관지로서 『독립신문』 간행
1910년대 저항운동
3.1운동과 임시정부
민족운동(民族運動)의 발전
● 일제 식민정책의 전환
1. 문화정치의 표방
․3·1 운동의 영향으로 일본은 헌병경찰정치를 버리고 문화정치를 실시한다고 발표
- 새 총독 사이토의 부임과 함께 표방됨
- 총독에 문관도 임명될 수 있게 함 ⇒ 실제론 한명의 문관도 총독에 임명되지 않음
- 보통경찰제도의 채용 → 경찰기관과 인원은 오히려 증가함
- 언론 통제의 완화 → ‘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 등이 창간되었지만 검열이 심했음
․일본에서 관동대지진(1923)이 일어났을 때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
2. 식량의 약탈
․1918년 일본에서 쌀값이 급등하여 미소동 발생 → 한국의 쌀에 대한 요구 증대
․산미증식계획
- 1910년대에 시작한 미작개량 정책이 더욱 강력하게 추진된 것
- 쌀의 증산은 1.5배도 못되었지만, 수출량은 8배 이상 증가하여 국내에 큰 피해
- 일본의 산미증식계획은 1934년에 중지되었지만, 증가된 수리시설에 의한 농민들의 부담 증가
3. 상품시장의 구실
․1920년에 일본과 한국과의 관세제도가 철폐
- 일본으로부터 한국으로 수입되는 것은 완제품(의료·실·술·담배·종이·기계 등 일용품)이 주류
- 한국으로부터 일본으로 수출은 쌀을 주로하는 식료품과 원료·원료제품이 대부분
․193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투자의 증가로 인해 완제품의 수입은 감소됨
4. 중공업에의 투자
․1920년에 총독부는 회사령을 철폐
- 회사의 설립은 허가주의에서 신고주의로 변함
- 낮은 임금과 값싼 수력전기의 개발 가능성으로 일본인 자본의 투자 증가
- 1926년에 조선수력 전기회사가 설립되어 부전강의 수력이 개발
- 그 전력을 이용하는 조선질소비료회사가 흥남에 건설 →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1931년에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지배하게 되어 더욱 투자가 촉진됨
- 일본은 국방국가 건설의 필요로 공업의 비중이 급속도로 커짐
5. 광산자원의 약탈
․1930년대 중반부터 광산액이 급증
-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에 필요로 하는 석유·고철·공작기계 등의 수입하는데 필요한 금을
얻기위해 금광을 집중 개발
․1941년에 미일전쟁이 벌어지면서 철·석탄·중석·흑연·水鉛·마그네사이트 등으로 옮겨감
- 한국을 일본의 병참기지화하는 성격이 나타남
6. 민족말살정책
․일본은 1937년에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을 개시하고, 1941년에는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
․일본은 ‘내선일체’라는 표어를 내걸고 민족말살정책을 감행
- 모든 민족적인 문화활동을 금지시킴
-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한글로 발행되는 신문과, ‘문장’ 등 한글로 된 잡지가 모두 폐간
- 조선어학회(한글학회), 진단학회 등의 활동이 금지됨 ⇐ 한국어,한국사에 대한 연구 금지
- 신사참배 강요, 창씨개명 강요함
․식량·원료 및 노동력의 강제적인 동원
- 쌀의 강제 공출, 각종 금속기가 강제로 헌납됨, 인적 동원의 강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
● 민족자본과 농민·노동자의 상태
1. 민족자본의 상태
․일제의 정치적 보호하에서 군수공업·광업 등 일본 자본이 급성장 함
․민족자본의 성장
- 김성주의 경성방직
1919년에 호남지방 지주를 중심으로 한 민간자본으로 창립된 민족기업
특히 민족정신이 강한 서북지방에서 환영
중앙중학과 보성전문을 맡아 민족교육을 담당
동아일보’를 운영하여 민족의 여론을 대변
- 안희제의 백산상회
영남지방 지주들의 자본으로 부산에서 창립
독립운동의 자금을 공급, 장학사업·협동조합 운동을 전개
- 평양의 메리야스공업, 고무공업
메리야스공업은 1920년 이후에 활기를 띰, 주로 양말을 생산
가난한 소상인 출신(공신양말-이진순,삼공양말-손창연)의 경영주가 많았음
이병두가 고무신을 고안하여 일반 대중으로부터 환영받음
일본의 기업이 따르지 못하는 중요한 민족기업으로 성장
2. 농민의 영락
․토지조사사업으로 일본인 대지주 증가, 양반 지주들의 특권은 인정됨
․많은 농민들이 영세소작농으로 전락
- 자작농이라도 지극히 적은 농토밖에 소유하지 못한 영세농이 절대적인 비중
- 소작료는 생산량의 1/2, 비료대·수리조합세·곡물운반비·지세 등을 소작농이 부담
- 농민의 생활이 점점 곤란해져 화전민이 격증함
․농민들의 반항운동이 격화되자 일본은 농촌진흥운동(1933년) 실시
- 자력갱생에 의하여 춘궁을 퇴치하고 부채를 근절하여 농가의 경제를 갱신
- 농가의 식량생산과 부업을 장려
- 영세농민이 절대다수인 현실에서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음
⇒ 농민의 반항운동이 격화되었기 때문에 이를 완화시키려는 일본의 정책적 수단에 지나지 않음
3. 노동자의 생활
․광공업의 발전에 따라 노동자의 수도 급증
․한국인 노동자의 임금은 한국거주 일본인 공장 노동자의 절반 수준도 안됨
․많은 노동자들이 재해와 질병으로 고생, 실업자도 증가
⇒ 노동문제가 당시의 중요한 사회문제로 부각
● 민족운동의 새 양상
1. 물산장려운동과 소작·노동쟁의
․물산장려운동
- 1920년대에 상인 및 지주들이 많이 기업으로 진출하였지만, 일본의 자본에 비해 미약
- 1923년에 물산장려회가 조직되어 국산품 애용운동 펼침
․소작쟁의
- 1920년대 중반부터 크게 증가
- 소작권 이동에 대한 반대와 소작료의 인하가 주된 요구
- 일본인 지주의 농장에서 많이 일어남
(함남 고원의 동척농장쟁의, 평북 용천의 불이농장쟁의)
․노동쟁의
- 일본의 대기업들이 진출하여 광공업이 발전함에 따라서 급격히 증가
- 1920년에 조선노동공제회, 1922년에 그 후신인 조선노동연맹회가 조직되어 적극성을 띰
- 1921년 부산 부두노동자 파업, 1923년 서울 고무여공 파업, 1929년 원산 노동자 총파업 등
․1920년대에 크게 일어난 물산장려운동이나 소작쟁의 및 노동쟁의는 일제에게 큰 위협
→ 일본은 탄압정책으로 일관, 1930년대에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강행하면서 더욱 탄압이 심해짐
2. 신간회의 활동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방향을 모색하게 됨
․사회주의와의 연결
-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레닌은 약소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주장
- 1921년 상해에서 이동휘를 중심으로 고려공산당이 세워지고, 레닌으로부터 자금 원조도 받음
- 1925년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노동쟁의 등을 통한 조직적 항일운동을 일으킴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운동이 일어남
- 절대적인 자유를 내세워 일체의 권력을 부인하는 이 운동은 폭력항쟁의 과격한 방법을 취함
- 1923년 박열의 일황암살계획
․신간회의 조직
- 6·10 만세운동 다음해인 1927년에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공동전선을 펴서 조직
- 일본은 문화정치 표방과 한국 민족운동의 내막 파악위해 합법적인 기관으로 인정함
- 신간회의 강령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 일본 경찰의 심한 감시가 있었지만, 전국에 많은 지회가 설립되고 회원도 3만에 이름
- 여성단체인 근우회가 방계단체로 신간회의 활동에 동조
-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 때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대회를 계획함
- 만주사변이 일어나던 1931년에 사회주의 계열의 주장에 의하여 해산됨
3. 6·10 만세운동과 광주학생운동
․6·10 만세운동
- 1926년 4월에 순종의 붕어
- 장례일인 6월 10일에 항일시위운동 계획 → 일본의 삼엄한 경계
- 6월 10일에 가두 시위를 벌임
“2천만 동포여! 원수를 구축하라. 피의 값은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
․광주학생운동
- 1929년 한국학생과 일본학생들과의 충돌로 발생 → 일본은 한국학생들 검거
- 검거된 학생들의 석방과 민족차별의 철폐, 약소민족의 해방, 제국주의 타도 등을 외치면 시위
- 1930년까지에 걸쳐서 국내 각지에 파급됨
4. 해외의 독립운동
․1920년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 봉오동 전투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합세하여 일본군에게 승리
- 청산리 전투 :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이 일본군 격파
-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만주의 한국인 부락을 습격 (경신참변)
․경신참변 후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 등지로 흩어졌으나, 효과적인 활동을 위하여 통합운동 전개
- 만주의 독립군은 참의부·정의부·신민주 셋으로 정리됨
參議府 : 집안현을 중심으로 압록강 연안지방에 설립 (임시정부 직할 하)
正義府 : 길림성과 봉현성을 중심으로 성립 → 남만주 지방에서 한족행정부로 성장
신민부 : 북만주에서 自由市사변 이후 러시아로부터 돌아온 독립군을 중심으로 통합
- 한국인의 자치를 집행하는 민정기관과 독립군의 훈련과 작전을 관장하는 군정기관 갖춤
․만주에서 독립군의 활동이 계속되자, 일본은 1925년에 총독부 경무국장 미쯔야를 보내어 탄압
- 만주의 군벌 장작림과 협약(三矢협약)을 맺고 탄압
- 한국의 독립운동자들은 중국인 관리에게 붙잡혀서 일본으로 인도됨 → 독립군에게 큰 타격
- 만주사변(1931) 이후 독립군은 반만중국군과 연합하여 투쟁
- 중국, 연해주 등으로 흩어짐
․공포수단에 의한 항일투쟁
- 김원봉의 의열단과 김구의 애국단의 활동이 두드러짐
- 의열단원 나석주 : 서울에서의 동척폭탄사건 (1926)
- 애국단원 이봉창 : 동경에서의 일황 암살을 위한 수류탄투척사건 (1932)
” 윤봉길 : 상해에서의 홍구공원 사건 (1932)
․임시정부의 활동
-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반대 문제, 이동휘의 레닌으로부터 받은 자금 사용문제 등으로 분열
- 이를 단합시키려고 1923년에 국민대표회의가 소집(→실패), 재정의 궁핍으로 활동이 거의 중단
-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통일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남
- 1941년에 미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다시 단결함 (상해에서 중경으로 이동)
- 임시정부는 미일전쟁이 일어난 다음날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하고 대외적인 외교활동 벌임
- 정치단체의 통합과 함께 여러 독립군도 임시정부 밑에 있는 광복군으로 통합
- 중국군·영군군 등과 협동작전을 수행
● 민족문화의 수호
1. 민족교육의 저항
․3·1 운동 이후 문화정치가 표방됨에 따라 일본의 교육방침에도 표면상의 변화가 일어남
- 일본은 한국인의 교육 정도를 일본인과 같게 한다는 구호를 내세움
- 학교도 늘고 서울에 대학까지 설치되었지만, 일본인을 위한 교육기관의 확장이였음
․1930년대 들어서 일본은 ‘교육즉생활주의’를 표방
- 일본어와 실업 교육에 치중 ⇐ 군수공업의 발달에 따른 필요
․전쟁말기에는 민족말살정책에 따라 한글수업 폐지, 일본어 상용을 강요
․교육에 대한 민족적 요구에 따른 움직임
- 교육기관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보조 교육기관의 필요성이 증가됨
- 재래의 서당이 개편되어 개량서당으로 발전, 농촌 아동들의 초등교육기관의 구실을 함
- 개량서당 중에는 보통학교로 승격하는 경우도 있었음
- 3·1 운동 이후 노동야학이 크게 발전함 →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줄어듬
- 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브나로드 운동) 전개
2. 국학연구
1) 國語 연구
․주시경의 제자들로써 조직된 조선어학회가 그 중추적 역할을 담당
- 1921년 조선어연구회로 발족한 후 1931년에 조선어학회로 개칭 (현 한글학회)
- 이윤재,이극로,최현배,김윤경 등이 중심
-『한글』이란 잡지를 발간하여 국어 보급에 힘씀
- 사전 편찬에 착수, 맞춤법의 제정, 표준어의 사정, 외래어 표기법의 통일 등 업적
- ‘한글날’의 제정
2) 國史 연구
․1920년대에는 애국적 사학의 전통을 이은 민족주의적 사학이 성하였음
- 박은식 :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 저술
- 신채호 : 고대사 연구에 주력, 郞家思想을 강조, “조선사연구초”,“조선상고사” 등 저술
- 정인보 : “조선사연구”(오천년간 조선의 얼) 저술
- 최남선 : “兒時朝鮮” ‘조선정신’의 표현으로서 단군신화를 연구
- 문일평 : “한미오십년사” ‘조선심’의 발로로서 한국사를 이해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사에 있어서의 사회적 발전에 주목하여, 그 발전과정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학풍이 나타남
- 안 곽 : “조선문명사”
- 백남운 : “조선사회경제사”,“조선봉건사회경제사” ⇐ 유물사관의 입장
․개별적인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고 충실하게 이해하려는 실증사학이 발생
- 1934년에 조직된 진단학회를 중심
- 이병도·손진태·이상백·김상기·고유섭·최현배 등
- 일본 학자들의 연구 활동에 맞서서 ‘진단학보’ 발행
3. 현대문학의 성장
․3·1 운동 이후, 문학을 하나의 독립된 예술활동으로 인식
- 1919년에 ‘창조’, 1920년에 ‘폐허’, 1922년에 ‘백조’ 등 문학 동인지 탄생
- 김동인 “감자” : 자연주의 문학
- 염상섭 “삼대” : 사실주의 문학
- 감상적인 심미주의에 흐른 문학이 일어나기도 함
․1920년대 중엽에는 병약한 감상의 예술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경향이 일어남
-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문학 : 한용운 “님의 침묵”, 이병기의 시조 현대화
- 신경향파 문학 : 당시의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아서 가난에 허덕이는 인간들을 주로 묘사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험악한 현실과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는 경향이 나타남
- 1939년에 이태준,정지용 등이 참여한 ‘문장’ 발행
- 문학을 정치세계로부터 옹호하려는 경향이 나타남
- 순수문학이 주장되기도 함
․일제 말기에는 순수문학의 활동도 탄압의 대상이 됨
광복과 대한민국
● 8·15 광복
1. 광복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 1943년 6월에 이탈리아의 항복
- 1943년 12월에 미·영·중 3국의 ‘카이로선언’ 발표
→ 한국의 자유·독립 인정
- 1945년 2월 미·영·소 3국은 소련의 대일 참전과 38선의 분할을 결정 : 얄타회담
- ” 5월에 독일의 항복
- ” 7월에 미·영·중 3국의 ‘포츠담선언’, 8월에 소련도 참가
→ 카이로선언의 재확인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광복후의 국내의 양상
- 송진우 계열과 여운형 계열의 대립
송진우 계열 : 연합군이 즉시 진주하고, 임시정부가 곧 귀국하여 정권을 담당할 것을 주장
여운형 계열 : 연합군이 진주할 때까지 민족대표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 여운형 계열에 의하여 건국준비위원회 조직
- 建準에는 공산주의자가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서, 안재홍 등 민족주의자들이 탈퇴
- 建準에 남아있던 좌익세력은 ‘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조직을 만들어 중경의 임시정부와 맞섬
- 민족주의자들은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국민대회 준비회’를 열어 맞섬
2. 38선 확정과 군정
․미·소 양군은 38선을 경계삼아 남북으로 갈라서 군정 실시 (1945년 8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행정을 담당할 民政府를 설치
- 비록 군정청은 설치하지 않앗으나, 실제로는 철저하게 북한의 행정을 통제 관할 함
-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와 현준혁 등 공산주의자를 포함하는 ‘5도 임시 인민위원회’를 조직
→ 행정 담당
-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조직
- 조만식을 체포·구금하고 많은 민족주의자들을 축출
․남한으로 진주한 미군은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의 모든 행정을 담당 (1945년 9월)
-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은 물론 중경의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음
- 정치적 자유로 송진우 등의 한국민주당(한민당), 안재홍 등의 국민당, 여운형 등의 조선인민당
박헌영 등의 조선공산당 등 50여개의 정당 난립
- 이승만, 김구 등이 귀국하였으나 혼란은 여전함
․정치적인 무질서에다 경제적인 혼란이 가중됨
- 군수공업 중심의 비정상적인 경제상태 형성
- 일본과의 경제적인 단결은 국내 경제에 큰 타격
- 일본이 물러나기 전 발행한 막대한 화폐로 인하여 인플레이션 초래
3. 반탁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영·소 3국 외상들은 한국을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최고 5년의 신탁통치안을 결정
․전국적인 반탁운동이 일어나, 파업 등 시위운동이 크게 번짐
- 처음 공산당은 반탁운동에 가담하였으나, 뒤에는 찬탁으로 돌아섬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1946년 3월)
- 반탁운동자의 참여 여부로 미·소간 의견 대립으로 결렬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1947년 5월)
- 소련의 반대로 미·영·중·소 회의와 유엔 감시하의 인구 비례에 의한 입법의회 설치안 좌절
-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여 신탁통치없는 한국 독립을 촉구 (1947년 9월)
● 남북한의 독립정부와 6·25 동란
1. 대한민국의 성립
․과도정부의 수립
- 1946년 12월에 45명의 민선의원과 45명의 관선의원으로 입법의원이 설치됨
- 한국인 대법원장(김용무), 한국인 민정장관(안재홍) 임명하여 형식상 행정권 이양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미국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
- 1947년 11월 유엔에서 소련의 반대를 물리치고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안을 통과시킴
- 한국위원회 설치를 가결
- 1948년 1월 유엔 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여 사무를 시작, 북한에의 입국은 거절됨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만 제헌국회의원 선거 실시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
-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국회의장 신익희, 대법원장 김병로 등
․북한에서는 1948년에 인민공화국이 수립됨
2. 대한민국 초기의 혼란과 6·25
․1948년 제주도 폭동, 여수·순천 반란사건 등 발생
․1949년 6월에 농지개혁법 공포
- 敵産농지를 국유로 하고, 유상매수 유상분배 함
․6·25 발발 (1950년)
- 1951년 6월 소련의 유엔대표 말리크가 휴전 요구
-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 1954년 4월에 제네바 회담 : 한국의 통일문제 협의
․자유당의 독재정권 강화
- 1952년 발췌개헌 : 대통령 직선제, 양원제 실시
- 1954년 사사오입 :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
- 1958년 2·4 파동 : 국가보안법, 지방자치법의 통과
● 이승만 정부(제1공화국, 1948.8.15~1960.4.26)
정부 수립(1948.8.15) -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간선제)
주한민군 철수(1948.9~1949.6)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1948.9.22)
여수·순천 10·19사건(1948.10.19)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1948.10.23)
국가보안법 제정(1948.10.27)
학도호국단 창설(1948.11.10) - 이승만의 청년·학생들 단체
대한청년당 창설(1948.12.21) - 여순반란 이후, 여러 청년단들을 통폐합하여 창설
한국민주당은 ‘민주국민당(민국당)’으로 개칭(1949.2.1) - 이승만과 한민당의 결별
국회프락치 사건(1949.5.18) - 국회 내 소장파 의원 3인을 남로당의 프락치로 활동했다는 혐의로 구속
국민보도연맹(1949.6.5) - ex)‘태극기 휘날리며’의 古 이은주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사건(1949.6.6)
김구 암살(1949.6.26)
반민특위 해체(1949.8.31)
중국의 공산화(1949.10.10)
신교육법(1949.12.31) - 민족주의와 반공교육 강화
에치슨 라인 선언(1950.1.12) -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태평양지역의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고 선언
농지개혁법(1950.3.10)
제2대 총선(1950.5.30) - 5·10총선거에 불참하였던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출마
6·25전쟁 발발(1950.6.25) - 북한의 남침
UN 안전보장이사회 소집(1950.6.26)
UN군 참전(1950.7)
국민보도연맹·형무소 재소자 학살(1950.7~)
미군에 의한 노근리 학살 사건(1950.7.26~7.29)
인천 상륙 작전(1950.9.15)
서울 수복(1950.9.28)
중공군의 참전(1950.10)
국민 방위군 사건(1950.12~1951.3)
거창 양민 학살 사건(1951.2.11)
서울 재수복(1951.3.14)
휴전협상 실시(1951.6.23)
이승만의 자유당 창당(1951.12)
부산 조선방직회사 파업(1952.3.12)
지방자치제 실시(1952.4~5) - 최초로 시·읍·면의회 의원과 도의회 의원 선거
부산 계엄령 선포(1952.5.25)
부산 정치 파동(1952.5.26) - 개헌 반대하는 야당 의원 47명을 국제 공산당의 자금을 받았다는 구실로 체포·구속
교육자치제 시행(1952.6)
제1차 개헌(발췌개헌, 1952.7.7) - 이승만 재선을 위한 대통령·부통령 직선제 개헌안
제2대 정·부통령 선거(1952.8.5)
노동관계 기본 4법의 제정(1953)
제1차 화폐 개혁(1953.2)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1953.6)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1953.10.1)
간통쌍벌죄 공포(1953.10.3) - 남편의 축첩과 부인의 외도 등 처벌
제네바회담(1954.4)
제3대 총선(1954.5.20)
부산 미군부대 한국인 종업원 파업(1954.8)
제2차 개헌(사사오입 개헌, 1954.11.29)
석탄 공사 산하 노동자 파업(1954.12)
부흥부(1955.2) - 산업경제의 부흥에 관한 종합적 계획과 그 실시의 관리와 조정에 관한 업무 담당
호헌동지회(1955) - ‘반 이승만 세력’의 결집
호헌 동지회 분열 - 민주당(신익희, 1955.9) vs 진보당(조봉암, 1955.12)
PL480(미국 공법 480호, 1956~1969) - 미국의 누적된 농산물 재고를 원조 형식으로 처리 ➜ 농산물 가격 폭락
제3대 정·부통령 선거(1956.5.15) - 대통령 이승만(자유당), 부통령 장면(민주당)
진보당 사건(1958.1.12)
제4대 총선(1958.5.2)
경향신문 폐간(1959.4.30)
2·4 정치파동(1958.12.24) - 국가보안법 개정 + 지방자치법 개정
조봉암 처형(1959.7.31)
전국노동조합협의회(1959.10)
대구 2·28 학생 시위(1960.2.28)
3·15 제4대 정·부통령 부정선거(1960.3.15)
마산 중학생 김주열의 사망(1960)
새 민법의 시행(1960.1.1)
3개년경제발전계획시안(1960.4.15)
4·19민주혁명(1960.4.19)
4·25 대학교수단 시위(1960.4.25)
이승만 하야(1960.4.26)
● 허정 과도 정부(1960.4.28~1960.8.22)
대한교원노동조합연합회 결성(1960.5.22)
제3차 개헌(1960.6.15)
- 내각책임제, 양원제 국회(민의원, 참의원), 정부의 정당 보호, 사법부 개혁, 국민의 기본권 향상
신생활 운동(1960.7~)
교원 노조 운동(1960.7.3)
은행 노조 운동(1960.7.23) - 전국은행노동조합연합회
제5대 총선(1960.7.29)
피학살자유족회(1960.8) - 전쟁 중 있었던 양민학살 피해자들 유족회
북한 김일성의 남북연방제 창설 제안(1960.8.14) - 남북 정부 대표로 ‘최고민족위원회’ 구성 제의
● 장면 내각 (제2공화국, 1960.8.23~1961.5.15)
전국대학생총연합회 결성(1960.9.12)
10·8 판결(1960.10.8) - 역사 바로 세우기에 소극적
지방자치법 5차 개정(1960.11.1)
민족통일연맹(1960.11.1)
한국노동조합총연맹(1960.11.25)
제4차 개헌(1960.11.29) - 소급 특별법
지방 자치 선거 실시(1960.12)
4H 운동(1961~)
민족자주통일협의회(1961.2)
한미경제협정(1961.2.8)
2대 악법 반대 운동(1961.3~4)
국토개발사업(1961.3)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1.4)
● 박정희 군정 (1961.5.16~1963.10.14)
5·16 군사 쿠데타(1961.5.16)
군사혁명위원회(1961.5.16)
미국의 승인(1961.5.18)
국가재건최고회의(1961.5.19)
경제질서 회복에 관한 특별성명서(1961.5.19) - 모든 노동쟁의 일체 금지
사회정화사업(1961.5.21)
국가재건비상조치법(1961.6.6)
농어촌고리채정리법(1961.6.9)
중앙정보부 조직(1961.6.10)
재건 국민 운동(1961.6.10~)
경제기획원 신설(1961.7.22)
한국노동조합총연맹(1961.8.30)
민주공화당 사전 창당 작업 착수(1961.10~) ⇨ 민간조직 창설, 4대 의혹 사건
부정축재처리법 개정(1961.10.26)
미국의 차관 도입(1962~)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
정치활동정화법(1962.3.16)
제2차 화폐개혁(1962.6.10) - 긴급통화조치
구(舊) 민주당 사건(1962.7.27)
이주당 사건(1962.7.27)
서독의 차관 도입(1962.10)
김종필·오히라 비밀회담(1962.10~11)
제5차 개헌(1962.12.17) -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와 대통령 직선제
국회의원선거법(1963.1.12)
민주공화당 창당(1963.2.26)
제5대 대통령 선거(1963.10.15)
제6대 총선(1963.11.26)
● 박정희 정부 (제3공화국, 1963.11~1972.10)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 파견 시작(1963.12.1)
한일회담 반대 시위(1964.3.24~)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례한다’(1964.5.20) - 김지하
6·3사태(1964.6.3)
무즙파동(1965.2)
한일협정(1965.6.22) → 일본의 차관 도입(1965~)
인민혁명당사건(1964.8.15)
미국의 베트남 파병 요청 수락(1964.10.31)
베트남 전쟁 참전(1965~1973)
한국 과학 기술 연구소(KIST) 착공(1966) → 설립(1969)
브라운각서(1966.3.4) - 미국의 한국군의 현대화 · 해외근무수당 부담 · AID차관 제공
한미행정협정(SOFA, 1966.7.9)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
제6대 대통령 선거(1967.5.3)
제7대 총선(1967.6.8)
동백림 사건(1967.7.8)
통일혁명당사건(1968.8.24)
국민교육헌장(1968.12.5) - ‘주체적 민족사관’ 강조, 국사와 국민윤리 교육 강화
마산수출자유지역 설치(1969)
대학교 입학 예비고사제 실시(1969)
닉슨독트린(1969.7.25) - 냉전의 완화
제6차 개헌(1969.9.14) - 3선 개헌 강행
‘40대 기수론’의 대두(1969.11) -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사건(1970.4.8)
포항종합제철 기공식(1970.4) → 준공(1973)
야스기 시안(1970.4.22) -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으로 전환
경부고속도로(1970.7)
전태일 분신(1970.11.13)
중국의 UN가입(1971)
새마을 운동(1971~)
제1차 국토개발계획(1971) ⇨ 부동산 투기 폐해
중학교 무시험 진학제 실시(1971)
제7대 대통령 선거(1971.4.27)
제8대 총선(1971.5.25)
사법부 파동(1971.7.28) - 박정희 정권의 사법부 길들이기
광주대단지(성남) 집단 폭력 사태(1971.8.10)
남북적십자 예비회담과 직통전화 개통(1971.9.20)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1971.12.27) - 노동동자들의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 제약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
7·4 남북공동성명(1972.7.4) - 자주·평화·민족적 대단결,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8·3 사채동결 조치(1972.8.3)
제1차 평양 남북적십자 본회담(1972.8.29)
제2차 서울 남북적십자 본회담(1972.9.12)
● 박정희 유신 정권 (제4공화국, 1972.10~1979.11)
대통령 특별 선언(유신헌법 선포, 1972.10.17) - 비상계엄령 선포, 비상국무회의의 헌법 기능 수행
북한 김일성 정권의 사회주의 헌법 선포(1972.10.27)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1972.11.4)
국민투표(1972.11.21)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1972.12.15)
제8대 대통령 선거(1972.12.23)
제7차 개헌(1972.12.27) - 유신헌법
포항제철 준공(1973)
제1차 석유파동(1973)
중화학공업화 선언(1973.1.12)
고등학교 입학 연합고사제 실시(1973.2)
제9대 총선(1973.2.27)
6·23 선언(1973.6.23) - 남북한 동시 UN가입 제의, 공산권에 대한 문호 개방 선언
김대중 납치 사건(1973.8.8)
유신체제 반대 운동(1973.3~) - 박형규 목사, 각급 대학교 시위, 김재준·천관우, 장준하 등
북한의 조국통일 5대 강령(1973.6.23)
이리(익산)수출자유지역 설치(1974)
건설사의 준동 진출(1974~)
전자공업육성법 발효(1974) - 삼성 반도체 생산 시작
긴급조치 1호(1974.1.8.오전)
긴급조치 2호(1974.1.8.오후)
민주청년총연맹사건(민청학련, 1974)
긴급조치 4호(1974.4.3)
8·15 평화통일 3원칙 선언(1974.8.15) - 상호불가침협정 ➜ 남북대화 ➜ 총선거
제2차(재건) 인민혁명당 사건(1975.4) - ‘사법사상 암흑의 날‘ 선포(1975.4.8)
육영수 여사 사살(1974.8.15)
언론 자유 수호 선언(1974.10.24)
제2차 국민투표 실시(1975.2.12)
민주국민헌장(1975.3.1)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65인 선언(1975.3.15)
학도호국단 부활(1975.4)
긴급조치 9호(1975.5.13)
사회-민방위대 창설(1975.9)
현대자동차 ‘포니’ 출고(1976)
3·1 민주 구국 선언(1976.3.1) - 명동성당에서 개최(천주교 신부, 문익환, 김대중 등)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
쌀의 자급자족 가능(1977~)
민주 교육 선언(1977.12.2) - 해직교수협의회에서 발표
고리원자력발전소 준공(1978)
동일방직 노조 운동(1978.2) - 민주노조의 씨앗을 뿌린 유신시대의 대표적인 노동 운동
함평 고구마사건투쟁(1978.4.24) - ‘썩은 고구마를 보상하라’(한국가톨릭농민회)
우리의 교육지표(1978.6.27) - 전남대학교 교수들이 발표
제10대 총선(1978.12.12)
제9대 대통령 취임(1978.12.21)
제2차 석유파동(1979)
Y·H 무역사건(1979.8.11)
신민당 당수 김영삼 총재 제명(1979.10.4)
부·마 항쟁(1979.10.18)
10·26사태(1979.10.26) - 영웅 김재규에 의해서 독재자 박정희 시대 종말
최규하의 제10대 대통령 당선(1979.12.6)
● ‘신군부’ 쿠데타 집권(1979.12.12~1981.3.2)
12·12 쿠데타(1979.12.12)
서울의 봄(1980.3~5)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임(1980.4.14)
5·18 광주 민주화 운동(1980.5.18)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1980.5.31)
7·30 교육 개혁 조치(1980.7.30) - 대학 본고사 폐지, 학력고사제 시행, 졸업정원제(1981)
삼청교육대(1980.8.4)
미국의 전두환 장군 승인(1980.8.8)
전두환의 제11대 대통령 취임(1980.8.27) - 통일주체국민의회에서 선출
북한의 ‘고려 민주 연방 공화국안’(1980.10.10) - 1연방국가 2체제, ‘최고민족연방회의‘ 구성
제8차 개헌(1980.10.27) - 대통령 임기7년(단임제), ‘대통령선거인단’에서 선출
국가보위입법회의 발족(1980.10.27)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1980.12)
민주정의당 창당(1981.1.15)
● 전두환 정부(제5공화국, 1981.3.3~1987)
제5공화국의 시작(1981.3.3) - ‘정의사회 구현과 민주복지국가의 건설’
제5차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1982~1986)
민족 화합 민주 통일 방안(1982.1.22) - ‘민족통일협의회’ 구성, ‘통일헌법’에 기초한 남북한 총선거 실시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발 사건(1983.10.9)
북한의 수재 물자 제공(1984.9.14)
제12대 총선(1985.2.12)
남북 경제 회담·적십자 회담 개최(1985) → 최초로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 방문(1985.9)
‘3저 호황’(1986~1989) - 저금리·저달러·저유가
제6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1987~1991)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1.14) - “탁 치자 억 하고 죽었다”
4·13 호헌조치(1987.4.13)
이한열 열사 최루탄에 맞아 사망(1987.6.9)
6월 대항쟁(1987.6)
6·10 국민대회 선언(1987.6.10)
6·29선언(1987.6.29)
7,8월 노동자대투쟁(1987.7~8) - 87.6월 민주항쟁 이후 최대 규모로 노동운동 전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1987.8.29)
제9차 개헌(1987.10.12) - 대통령 직선제, 5년 단임제, 노동 3권 보장, 헌법재판소 재설치, 군의 정치적 중립 명문화
제13대 대통령 선거(1987.12.16)
● 노태우 정부(제6공화국, 1988~1992)
북한의 대화 제의(1988.1.1)
제13대 총선(1988.4.26) - ‘여소야대’ 정국 형성
7·7 선언 =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 선언(1988.7.7)
5공 청문회 개최(1988.11)
경기 침체의 재개(1989~)
헝가리와 수교(1989.2.1)
전국교직원노동종합 결성(1989.5.29)
전대협 대표 임수경의 평양 방문(1989.6)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1989.9.11)
- 자주·평화·민주, 2국가 2체제(과도기)➜1국가 1체제(통일), ‘남북각료회의’와 ‘남북평의회’ 설치
폴란드와 수교(1989.11.1)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1990.1)
3당 야합으로 ‘민주자유당’ 창당(1990.2.9)
소련과 수교(1990.9.30)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결성(1990.11.20)
국제노동기구 가입(ILO, 1991)
수서 사건(1991.2)
부분적인 지방자치제 실시 - 기초의원선거(1991.3), 광역의원선거(1991.6)
남북한 UN 동시 가입(1991.9.17)
독일 통일(1991.10)
남북기본합의서 =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1991.12.31) - 남북한은 ‘특수관계’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1992.1.20)
제14대 총선(1992.3.24)
중국과 수교(1992.8.24)
제14대 대통령 선거(1992.12.19)
● 김영삼 정부(문민정부, 1993~1997)
3단계 3기조 통일 방안(1993)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북한 송환(1993.3.19)
공직자 재산등록 실시(1993.6.11)
3단계 3대 기조 통일방안(1993.7.16)
금융실명제·부동산실명제 실시(1993.8.12)
대전엑스포 개최(1993.8~11)
우루과이라운드 타결(1993.12.15)
‘하나회’ 정리(1994.4.16)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북한 방문(1994.6)
카터와 김일성의 남북정상회담 개최 합의(1994.6.17)
김일성 사망(1994.7.8)
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1994.8.15) - 8·15 대통령 경축사
제네바 북·미 합의서(1994.10) ⇨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북미간의 논란 끝 붕괴
국군 평시작전통제권 환수(1994.12.1)
세계무역기구 출범(WTO, 1995)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설립(1995.3.9) ⇨ 2006년 1월 중단 선언
‘민자당’ 정리와 ‘자유민주연합’ 조직(1995.3.30)
전면적인 지방자치제 실시(1995.6.27)
새정치국민회의 창당(김대중, 1995.9.5)
민자당의 ‘신한국당’으로 개칭(1996.2.6)
제15대 총선(1996.4.11)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1996.9.12)
한보그룹 비리(1997.3.31)
김영삼 아들 김현설 구속(1997.5.31)
IMF 외환 위기(1997.11.21)
제15대 대통령 선거(1997.12.18)
●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 1998~2002)
노사정위원회 설치(1998.2.6)
정주영 회장의 소떼 방북(1998.6.16)
금강산 관광 시작(1998.11.18)
‘국가안전기획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칭(1999.1.21)
제1차 연평해전(1999.6.7)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합법화(1999.7)
동티모르 파병(1999.9.28)
남북 정상 회담(2000.6.13~15)
6·15 남북 공동 선언(2000.6.15)-남측 연합제 안과 북측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 인정
제2차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2000.8.15)
비전향 장기수의 북송(2000.9.2)
남한만의 경의선·동해선 철도 연결 착공식(2000.9.18)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2000.10.13)
제16대 총선(2000.4.13)
남북한의 경의선·동해선 철도 연결 착공식(2002.9.18)
개성공업지구 착공식(2003.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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