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

공무원 한국사 테마 분류사-근대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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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권침탈 과정 시영용 러의협 가영포을 정기경 ]

시모노세키조약 1895.3 청일전쟁이후에 체결(일본에 의한 한국지배의 승인), 日의 요동반도점령
1차 영일동맹 1902.1 군사적 동맹(러시아 견제), 영국(청)과 일본(한국)의 우월권 인정
용암포사건 1903.4 러시아가 한국의 용암포를 강제점령하고 조차를 요구. 러일전쟁을 유발
러일전쟁 1904.2 원인: 러의 남하정책, 영일동맹, 용암포사건 ⇒ 결과: 포츠머츠 조약
러일전쟁 직전 대한제국의 중립화선언(1904.1)
한일의정서 1904.2 황무지개간권 요구, 군사시설이용권, 충고권, 항해권 [의황사충고]
한일협정서 1904.8 제1차 한일협약고문정치(외교:스티븐스재정:메가다) 화폐정리사업(1905.6) [협고]
가쓰라ㆍ태프트 밀약 1905.7 미국(필리핀)과 일본(한국)에 대한 지배권 인정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한 조약
2차 영일동맹 1905.8 영국(인도)과 일본(한국)의 지배권 인정
포츠머츠강화조약 1905.9 러-일, 일본의 한국 지배를 국제적으로 인정
조약 1905.11 제2차 한일협약감정치(통감부설치), 교권박탈, 이그밀사사건(1907.6),
을사오적(박제순,권중현,이지용,이근택,이완용) ⇔ 한규석,민영기,민영환
정미7조약 1907.7 제3차 한일협약(=한일신협약), 차관정치, 군대해산, 고종퇴위 [정차관군대해산]
통감의 권한확대 명문화, *헤이그특사(이상설,이준,이위종)가 배경
기유각서 1909.7 사법권박탈(사법부와 재판소가 폐지), 감옥사무이관 [기사감]
한일합방(경술국치) 1910.8 주권박탈(총독정치), 경찰권강탈(6월), 헌병경찰제도 도입 [경주총독]

 

*고문파견: 임오군란, 아관파천, 1차 한일협약

* 을사조약의 체결에 대한 저항운동

1) 민간

- 민영환ㆍ조병세 상소ㆍ자결, 나철ㆍ오기호 등이 5적 암살단의 조직 → 대종교의 창시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발표, 신채호가 대한매일신보에 시일야우방성대곡 발표

- 최익현ㆍ민종식ㆍ신돌석 등 의병장의 활약(을사의병), 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 사살(1909)

※ 황현의 절명시:‘매천야록’을 남기고 자결 → 한ㆍ일 합방조약 후(1910.8)

2) 정부

- 고종황제의 노력: 대한매일신보에 무효를 선언한 친서의 발표, 워싱턴에 헐버트를 특사로 파견

- 헤이그특사 파견(1907):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특사로 파견, 이준 분사

⇒ 결과 : 고종의 강제 퇴위(양위), 한·일 신협약의 체결(1907), 차관통치의 실시,

군대의 해산 → 시위대장 박승환자결, 일본군과 해산군인의 시가전, 해산군인 위병 합류

 

 

 일제식민지 문화정책과 친일문학가

 

1. 조선교육령

1차 1911(우민화정책) 2차 1922(유화정책) 3차 1938(황국신민화정책) 4차 1943(말살정책)
①일본어학습강요
②사립학교ㆍ서당억제
③보통교육,고등보통교육
④실업교육,전문학교교육
⑤교육연한단축(6→4년)
⑥대학ㆍ전문학교는 미설치
⑦충량한 황국신민육성목표
①사범학교설치,대학허용
(민립대학설립운동⇔경성대학)
②교육시설 3면1교
③수업연한연장
(보통학교6년, 고등보통학교5년)
③조선어 필수과목 지정
④전문학교 교육의 강화 ⑤복선제 도입
(일인ㆍ한인분리교육)
①교명변경(보통학교→심상소학교/고등보통학교→
중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고등여학교) * 소학교 → 국민학교(41년)
②초등학교 확충 1면1교
③국어국사 폐지(필수→수의)
④황국신민서사 제정암송 강요
⑤일본어 보급 확대
⑥국제명징,내선일체,인고단련
①민족교육기관탄압
②군사능력배양 목적
③조선어, 조선사의 완전 폐지
④수업연한 축소
⑤교과목 통폐합

 

 

2. 종교탄압

1) 유교: 60세이상 유생에게 상치은사금을 지급,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개편, 유도진흥회 대동사문회조직

2) 불교: 승려법 제정, 사찰령(1911)공포, 총본사(조선불교중앙교무원)를 두고 총독이 사찰 주지 임명

3) 기독교: 안악사건, 105인사건, 일본조합교회와 조선기독교를 합병하려 했으나 실패.

4) 민족종교인 천도교ㆍ대종교 등은 일제의 탄압이 특히 심하여 종교활동의 자유가 제한됨.

 

 

3. 친일문학가 (40년대 초 일제의 징용과 징병을 부추기며 선동하는 글 작성)

1) 최남선: 미영 격멸의 용사로서 황군이 된 참정신을 떨치라고 징병 독려, 조선사편수회 편찬위원,

제헌의회 반민특위 체포, 사이토총독의 후원하에 동명잡지간행, 조선총독부 참의 역임

2) 이광수:민족적 경륜에서 자치론을 지지하여 독립운동에 좋지 않은 영향

일제 말기 학생들에게 ‘공부는 나중에 하고 당장 전쟁에 참가해야 한다’는 등의 친일시 씀

3) 주요한: 잡지 「신시대」와 「대한매일신보」에 친일시 발표

4) 서정주: 매일신보에 시의 이야기ㆍ인보정신ㆍ송정오장송가 발표,‘나는 그때 일본이 200년은 갈 줄 알았다’

5) 기타: 모윤숙, 김억, 정비석, 이인직, 김동인, 채만식, 노천명, 최린

 

 

4. 저항문학가(저항시인): 윤동주[별을헤는 밤], 이육사(청포도ㆍ광야ㆍ자오선), 한용운(님의 침묵)

 

 

5. 각계각층의 친일활동

1) 친일경찰: 김태석(강우규의사 고문), 노덕술(고문경찰 대명사)

2) 친일예술인: 이면상(종군 간호부의 노래작곡), 홍난파(정의의 개가작곡), 현제명(정성의 파수작곡)

3) 친일자본가: 김성수(경성방직회사 사장), 박흥식(화신백화점 사장)

4) 교육인: 김활란(이화여대 전 교장)

 

 

 

 식민사관 VS. 민족사관

  실증사학
(진단학회 ⇔ 청구학회)
   
민족사관 식민사관
사회경제사학
(유물사관)
백남운
신민족주의사학
(정신사관)
신안손이
민족주의사학
(정신사관)
신박정문
1. 타율성론
- 남한경영설, 반도사관,만선사관, 외인론
2. 일선동조론⇔최남선(불함문화론)
3. 정체성론⇔백남운(사회경제사학)

1. 민족주의 사학자와 활동(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문일평): 우익의 특수성

1) 20년대 일제의 식민주의사하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주성과 한국사 주체성과 우리문화의 우수성 강조

2)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국권 회복을 위한 정신적 투쟁의 중요성 강조

3) 역사발전에 있어 정신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 물질을 중시하는 사회경제사학과 대립, 실증사학의 비판을 받음

4) 조선학 운동(1934): 백남운,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등이 <여유당전서>의 간행을 계기로 시작

- 정약용서거 99주기를 맞이하여 민족주의학자들이 모여 운동 시작. 조운백정문안 ]

- 기존의 민족주의 역사학이 국수주의적이었음을 비판, 우리 학문의 주체성을 찾으려 노력.

- 조선후기 실학을 주목하고, 고대사 뿐 아니라 조선시대를 발전적으로 이해

 

 

2. 신민족주의 사학자와 활동(1940~1950년대 등장): 좌ㆍ우 양극단을 배제, 좌ㆍ우협진, 국제협력 도모

1) 학자 (안재홍, 손진태, 이인형, 홍이섭) [신안손이]

- 해방직후 한국사의 역사적 전환기에 대응해서 당면과제인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모색하는 방안으로 제기.

- 안재홍: 신민족주의사학의 이론적 기초 제공, 신채호의 사학계승. 중도우파적견해 대변[조선상고사감]

- 손진태: 역사를 통한 민족의 단결과 계급화해ㆍ민족균등 강조. [조선민족사개론],[조선민족설화의 연구] 저술

“단결하면 흥하고, 분열되면 망한다”,“평등하면 단결하고 불평등하면 분열한다”강조

2) 한계: 사실의 역사에 대한 의의를 이해하기 어렵고, 지나친 현재적 관심에 가치판단의 중점

 

 

3. 사회경제사학(1930년대): 좌익의 보편성

1)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을 깨려고 노력, 민족사학을 비판, 봉건주의의 강조(유물사관과 관련)

2) 한국사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

3) 백남운: 우리역사를 세계사적 발전법칙에 따라 체계화 [조선봉건사회경제사] [조선사회경제사] 저술

4) 이원 [조선사회사본] [조선역사독본], 전석 [조선사교정][조선경제사]

 

 

4. 실증주의 사학(1934~1942)

1) 이병도: 객관적 역사 서술 지향. [한국고대사연구]

2) 진단학회 조직(1934): 청구학회의 한국사 왜곡에 반발. 손진태, 신석호, 이윤제, 이병도 중심. <진단학보> 발행

3) 개별적인 역사적 사실의 정확하고 충실한 이해를 중시, 역사를 위한 역사를 강조, 랑케사관을 강조

4) 유물사관, 민족주의사관을 모두 거부민족운동의 운동으로서의 역사연구를 거부

5) 독립운동에는 직접 기여하지 않았지만, 문헌고증의 역사연구를 통해 우리역사 연구의 새지평을 여는데 기여

6) 식민사관의 허구성을 폭로하여 독립을 쟁취해야하는 시기에 현실역사인식이 부족

 

 

5. 식민사관(고대사 부분을 왜곡, 가장 심함) [타일정당]

1) 타율성론 (남한경영설, 임나일본부설, 반도사관, 만선사관, 사대외교, 지정학적 숙명론)

- 우리민족의 독자적ㆍ자주적 발전을 부정, 우리역사가 주체적이지 못하고 주변국가에 종속되어 전개됨을 주장

- 우리역사는 시작부터 기자, 위만, 한의4군현 등 중국에 의하여, 삼국시대에는 임나일본부를 설치한 일본에 의해 지배

2) 일선동조론(동조동근론, 내선일체, 단군조선부정, 조선 일본 민족적 근원 같다.) ⇔ 불함문화론

3) 정체성론(봉건제결여론)

- 한국의 개항기는 일본의 10C에 불과, 한국사는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법칙에 참여하지 못함

- 우리민족사 자체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어왔다

- 정체성론의 반박 ⇒ 세계사적 보편성을 중시하는 유물 사관에 입각하여 연구(사회경제사학)

4) 당파성론: 학연 지연 등이 역사현실로 반영된 것이 당쟁 때문, 당파성이 조선왕조멸망의 결정적 원인

 

 

 

 한말 애국계몽독립단체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민족 2대 운동
좌파 우파
독립전쟁론
- 의병전쟁
- 무력투쟁
- 생존권사수
- 양기탁, 이동휘
애국계몽운동
- 국권회복
- 실력양성
- 산업,교육
- 안창호 중심

 

스티븐스死 이토死 이완용 사이토 종로서 일왕궁성 동ㆍ척 일 왕 시라카와
1908 1909  1909 1919 1923 1924 1926 1932 1932
장인환 전명운 안중근 이재명 강우규
(실패)
김상옥 김지섭 나석주 이봉창 윤봉길
의열단 애국단



의열단(1919): 3.1운동이후 개별적 폭력투쟁.
만주에서 김원봉(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조직, 파괴와가살의 행동목표를 지침 ⇒ 신채호조선혁명선언강령- 민중.혁명.폭력
김상(23, 이 있는 종로경찰서)ㆍ나석(26,()동척)ㆍ김지섭(24,황궁이중교)ㆍ김익(21,총독부폭파)
----------->폭탄던지니 한계를 느낌. 그래서 중국시스템배우러 황포군관학교 들어감. 그리고 조선혁명간부학교 세움.


애국단(1926): 임정이 계속위기 후 최후로 던진카드
상해에서 김구가 조직, 한ㆍ중양국의 우의증진과 일본요인 암살 목적, 독립노선의 갈등 으로 인한 임시정부침체를 극복하기위해 조직
만주사변후--이봉창(실패)--상하이사변--윤봉길(32,중국국민당의 지원 강화 → 한국 광복군 창설)



연도 명칭 지역 인물 특징
1896 독립협회 서울 서재필ㆍ남궁억 ⇔ 황국협회
1904 보안회 서울 송수만ㆍ원세성, 황무지개간 철회성공, 농광회사(이도재) [황보]
1905 헌정연구회 서울 일진회에 대항, 입헌군주제 수립과 민권확대 주장 [ㅇㅈㅎ]
1906 대한자강회 대한민보발해, 고종퇴위 반대운동 [자퇴]
1906 대한협회 대한자강회+대한구락부 → 친일변질
1907 신민회 서울 - 안창호ㆍ양기탁등 ⇔ 105인사건
- 최초공화주의주장, 비밀결사, 
- 대한매일신보(기관지)
대성학교(평양)ㆍ오산학교(정주)ㆍ태극서관(대구)ㆍ자기회사(평양),→ 흥사단(LA) → 수양동우회로 발전(26)
1909 국민회 미국 이승만 신한민보발행, 한인합성협회+공립협회, 대한인국민회로 발전
1910 성명회 연해주 유인석ㆍ이상설 광복의 그날까지 피의 투쟁을 다짐,
한일합방의 부당성 비판(일왕에게 편지)
1910 경학사 삼원보
(=서간도)
이상룡, 경제적 자립을 위한 민단, 부민단 → 한족회로 발전
* 신흥강습소(백서농장) → 신흥무관학교(독립군양성기관)
1911 중광단 북간도 서일, 대종교단체, 대한정의단 → 북로군정서(김좌진)
1911 동제사 상하이 신규식, 상해유학생조직
1912 독립군부 전국적 임병찬(최익현과 다르게 대마도에서 도망쳐온), 고종의 밀지(고종의 반환요구서제출/어이없게→거절당하자 의병전쟁계획), 복벽주의(전제군주제 회복), 비밀결사
국권반환 요구서 제출 → 거절 당하자 의병전쟁 계획
1913 대한광복단
(풍기광복단)
만주 채기중 주도


박상진김좌진, 공화주의, =1915 조선(대한)광복단(회)
군대식으로 조직, 만주에 독립군 사관학교설립(독립군간부양성)--친일부호 찾아다니며 의연금 or 처단


==> 향후 조선국권회복단 일부와 합류해서 대한광복회로 발전
1914 대한광복군정부 연해주 이상설ㆍ이동휘독립전쟁을 준비한 최초의 국외정부, 공화주의
권업회가 모체, 노령정부로 불림, 임시정부수립의 계기 제공
1915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대구 서상일ㆍ이시영, 단군신앙을 바탕, 시회로 가장


-->대한광복회로 발전(1915, 대한광복단+조선국권회복단)
오인은 대한의 독립된 국권을 광복하기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함에 공함은 물론..
국권을 회복하기까지 절대 불변하고 일심육력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함
1917 신한혁명당 상하이 신채호ㆍ박은식, 대동단결선언, 공화주의, 임시정부수립 주장
1918 신한청년당 상하이 김규식ㆍ여운형ㆍ김구, 파리강화회의 김규식파견 <독립청원서> ⇒ 실패
1919 대한국민의회 연해주 손병희, 정부수립선언, 이후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



복벽주의: 대한제국(봉건질서) 회복 ⇒ 민단조합, 대한독립의군부, 대한독립단 [임신복]

공화주의: 왕정X, 민주정(국민주권) ⇒ 민회(최초주장), 대한광단, 한혁명당, 정(실현)
----->신민회와 대한광복회 느낌 비슷

조소앙의 삼균주의: 균부(국유제)ㆍ균권(보통선거)ㆍ균학(공비교육)의 평등강조
무오독립선언서(1919, 만주),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강령(1941, 충칭)



3.1 운동이후 국내 무장단체: 구월산대(1920,황해도) 천마산대(1919,평북의주) 보합단(1919,평북의주)

- 이들까지 합법으로 해줄순 없음. 게릴라전이라.. 불법

 

 

북만주: 밀산부의 한흥동(최초의 독립운동 기지, 이상설ㆍ이승희)

서간도(남만주): 삼원보(신한민촌), 경학사→부민단→한족회→서로군정서(공화주의)ㆍ대한독립단(복 (신민회활동) 벽주의),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 육군주만 참의부

북간도(만주길림): 용정촌(서전서숙, 이상설), 명동촌(명동학교, 서일), 간민회→대한국민회→국민회군(안무), 대한독립군(홍범도, 군무도독부(최진동), 중광단(서일) → 대한정의단 → 북로군정서(김좌진)

상하이: 동제사 → 신한혁명당 → 신한청년당, 대동보국단(시베리아 간도 국내의 연락기능)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 한민회(해조신문, 한민학교), 
성명회, 권업회, 
13도의군, 대한광복군정부, 대한 국민 의회 (연 해 주), 신민단, 경비대, 혈성단

미 국: 
대동보국회(1945, 신규식, 박은식), 한인합성협회+공립협회=대한인 국민회(미 국)(신한민보발행),
흥사단(1913,안창호,LA,[동광]잡지발행), 공립협회(안창호,SF), 
신민회(하와이,1903, 홍승하ㆍ윤병구 중심, 동족단결ㆍ민지개발ㆍ국정쇄신)

 

 

● 신민회와 독립군 기지건설

신민회(1907~1911) 신간회(1927~1931)
•  
• 비밀(항일)결사 단체
• 목표: 공화정체 국권회복과 독립 자주 국가 건설
* 최초 민주공화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
• 구성: <대한매일신보> 중심의 구국단체. 다양한 세력참여, 엄격한 심사를 통한 입회 허용(안창호,이동녕,김구,신채호,양기탁)
• 이념 :‘선실력 후기회론’
• 4대 강령(신민회 활동목표)
①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킬 것
② 동지를 발견하고 단합하여 역량을 축적할 것
③ 교육기관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 교육 진흥
④ 상공업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부력 증진
• 활동
- 기관지: <대한매일신보> 국채보상운동 참여(후원) 기관잡지: 최남선의 주도 하에 <소년> 간행
-대성학교(평양,안창호)ㆍ오산학교(정주,이승훈), 양산학교(안악) [ 안대 이오 ]
- 민족산업의 육성:자기 제조 주식회사(평양), 태극서관(평양ㆍ서울ㆍ대구,국민계몽),협성동사
- 삼원보(신한민촌, 신흥강습소): 이동녕, 이회영
- 안악사건(1910)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 사건(1911)으로 확대, 105인 사건을 계기로 조직 와해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 건설시도 좌절
- 애국 계몽 운동이 항일 의병 운동과 연대하는 계기 마련, 3·1운동 이후 독립군 부대에 의한 항일무장투쟁의 기초가 마련.
- 해외의 독립군 기지건설 주력
• 후신: 흥사단(LA,안창호,1913)
•“신간출고목”이라는 말에서 취하여 명칭을 정함
• 합법적 단체로 승인 (→합법과 비합법노선 사이의 모순) (20년대는 합법이 많음)
• 창립배경: 자치운동론대두, 중국의 제1차 국ㆍ공합작, 북경촉성회 창립, 조선민흥회 조직, 정우회 선언, 6ㆍ10만세운동, 코민테른의 승인
•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을 목표로 합법적 단체로 승인받으면서 일제치하 최대의 항일 단체로 발전
• 구성: 자치운동을 배격하고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이상재, 안재홍) 사회주의가 결합하여 결성
• 조직: 1929년 전국 144개의 지회 설치. 일본까지 확대.
• 3대 강령 (후에 수정발표: 민족운동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활동노선을 제시)
①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② 우리는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함
③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 활동 (중앙: 비타협적민족주의, 지회: 사회주의)
① 항일 운동의 전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진상 조사단 파견
- 갑산 화전민 학살 사건 진상 규명 운동
- 원산총파업(1929)ㆍ단천농민투쟁(1930) 지원
② 청년, 여성, 형평 운동과도 조직적으로 연계
③ 민중 대회와 연설회 개최(광주학생운동 도중)
• 신간회 해체(1931.5.15): 자진해산
- 본부가 자치론자들과 제휴를 주장하는 등 우경화경향을 보이자 해소론 등장
- 9월테제에서 코민테른은 일제와 타협하는 개량주의적 단체로 규정하여 해산을 종용
- 최초로 개회된 신간회 전국대회에서 해소가 결의
* 좌우합작(1920년대)
민족유일당촉성회, 신간회, 전국연합진선협의, 건국동맹, 상해촉성회(27), 조선청년동맹(1924),조선민흥회, 근우회, 국민부, 북경촉성회(26)

 

 신민회와 독립군 기지건설

신민회(1907~1911) 신간회(1927~1931)
•  
• 비밀(항일)결사 단체


• 목표: 공화정체 국권회복과 독립 자주 국가 건설
* 최초 민주공화제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


• 구성: <대한매일신보> 중심의 구국단체. 다양한 세력참여, 엄격한 심사를 통한 입회 허용(안창호,이동녕,김구,신채호,양기탁)


• 이념 :‘선실력 후기회론’
• 4대 강령(신민회 활동목표)
①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시킬 것
② 동지를 발견하고 단합하여 역량을 축적할 것
③ 교육기관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 교육 진흥
④ 상공업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부력 증진


• 활동
- 기관지: <대한매일신보> 국채보상운동 참여(후원) 기관잡지: 최남선의 주도 하에 <소년> 간행


- 대성학교(평양,안창호)ㆍ오산학교(정주,이승훈), 양산학교(안악) 안대 이오 ]


- 민족산업의 육성:자기 제조 주식회사(평양), 태극서관(평양서울대구,국민계몽),협성동사


- 삼원보(신한민촌, 신흥강습소): 이동녕, 이회영


- 안악사건(1910)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 사건(1911)으로 확대, 105인 사건을 계기로 조직 와해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 건설시도 좌절


- 애국 계몽 운동이 항일 의병 운동과 연대하는 계기 마련, 3·1운동 이후 독립군 부대에 의한 항일무장투쟁의 기초가 마련.


- 해외의 독립군 기지건설 주력


• 후신: 흥사단(LA,안창호,1913)
•“신간출고목”이라는 말에서 취하여 명칭을 정함


• 합법적 단체로 승인 (→합법과 비합법노선 사이의 모순) (20년대는 합법이 많음)


• 창립배경: 자치운동론대두, 중국의 제1차 국ㆍ공합작, 북경촉성회 창립, 조선민흥회 조직, 정우회 선언, 610만세운동, 코민테른의 승인


•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을 목표로 합법적 단체로 승인받으면서 일제치하 최대의 항일 단체로 발전


• 구성: 자치운동을 배격하고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이상재, 안재홍) 사회주의가 결합하여 결성


• 조직: 1929년 전국 144개의 지회 설치. 일본까지 확대.


• 3대 강령 (후에 수정발표: 민족운동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활동노선을 제시)
①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② 우리는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함
③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 활동 (중앙: 비타협적민족주의, 지회: 사회주의)
① 항일 운동의 전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진상 조사단 파견
- 갑산 화전민 학살 사건 진상 규명 운동
- 원산총파업(1929)ㆍ단천농민투쟁(1930) 지원
② 청년, 여성, 형평 운동과도 조직적으로 연계
③ 민중 대회와 연설회 개최(광주학생운동 도중)


• 신간회 해체(1931.5.15): 자진해산
- 본부가 자치론자들과 제휴를 주장하는 등 우경화경향을 보이자 해소론 등장
- 9월테제에서 코민테른은 일제와 타협하는 개량주의적 단체로 규정하여 해산을 종용
- 최초로 개회된 신간회 전국대회에서 해소가 결의


좌우합작(1920년대)
민족유일당촉성회, 신간회, 전국연합진선협의, 건국동맹, 상해촉성회(27), 조선청년동맹(1924),조선민흥회, 근우회, 국민부, 북경촉성회(26)
민족주의(우익)
- 우파: 자치론ㆍ타협론ㆍ기회주의ㆍ실력양성 →이광수, 송진우
- 좌파: 반자치ㆍ비타협ㆍ절대독립→ 안재홍, 권동진
사회주의(좌익)- 무정부주의 → 박헌영, 김일성

 

 

 한민족의 해외이주

북만주: 밀산부의 한흥동(최초의 독립운동 기지, 이상설ㆍ이승희)

서간도(남만주): 
삼원보(신한민촌), 
경학사→부민단→한족회→서로군정서(공화주의)ㆍ대한독립단(복 (신민회활동) 벽주의),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 육군주만 참의부

북간도(만주길림): 
용정촌(서전서숙--최초의 국외학교이상설), 명동촌(명동학교, 서일), 
간민회→대한국민회→국민회군(안무), 
대한독립군(홍범도), 군무도독부(최진동), 

중광단(서일) → 대한정의단 → 북로군정서(김좌진)

상하이: 
동제사 → 신한혁명당 → 신한청년당, 대동보국단(시베리아 간도 국내의 연락기능)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 한민회(해조신문--해삼위의 조선신문, 한민학교), 13도의군,
--국권피탈 후--
성명회,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최초의 국외정부, 1914), 대한국민의회, 신민단, 경비대, 혈성단

미 국: 
대동보국회(1945, 신규식, 박은식), 한인합성협회+공립협회=대한인국민회(신한민보발행), 
흥사단(1913,안창호,LA,[동광]잡지발행), 공립협회(안창호,SF), 
신민회(하와이,1903, 홍승하ㆍ윤병구 중심, 동족단결ㆍ민지개발ㆍ국정쇄신)

 

1. 생활터전을 찾아 만주와 간도로

1) 1910년대: 일제의 토지국유화정책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사업에 의해 토지 잃고 이주(북간도 용정촌)

항일운동 전개ㆍ독립운동기지 건설(남만주 삼원보, 북만주 한흥동)

2) 1920년대: 독립군의 항일무장 투쟁, 간도참변(1920)

3) 1930년대: 만주국 성립으로 만주개발을 위한 조선인 강제 이주

 

2.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1) 1905년 이후: 러시아 변방개척위해 조선인의 연해주 이주 허용, 한인 집단촌 형성(원호인)

2) 1910년대: 13도 의군 결정, 대한광복군 정부(블라디보스톡), 대한국민의회(1919)(손병희), 권업회, 성명회

러시아 혁명 이후 볼세비키 군대와 연합하여 항일투쟁 전개

3) 1920년대: 자유시 참변→ 민족운동 약화

4) 1930년대: 소련 당국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1937년)

 

3. 일본 이주

1) 19C 말: 일본의 선진학문을 배우기 위한 유학생 이주

2) 1910년대: 산업 노동자로 취업(노동착취, 민족차별)

3) 1920년대: 관동대학살(1923)

4) 1930년대: 전시 동원 정책에 의해 강제 징용→ 현재 재일동포 사회구성의 토대

 

4. 미주 이주 (현재 재미동포는 100만명으로 이주동포 가운데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다.)

 

5. 우리 민족의 인구분포

일제 강점기 1910년 1313만명 (이천만 넘는 시기: 30년을 전후로)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 후 강제연행으로 해외 이주자 급증
1943년 2439만명
해방직후 해외의 귀환 인구는 주로 남한에 집중되어 인구 압력을 가중
한국전쟁 1955년부터 1960년까지 남한에서 베이비붐 현상이 일어나 인구 급증

- 이회영: (경부신)- 경학사(발갈며 공부하자), 부민단,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중간에 서명 북간도 - 중광단(대종교계열), 간민회, 서전서숙(헤이그간 이상설),-->명동학교

- 연해주(헤이그갔다온 이상설) : 석명회(소리내서 울다), 권계민 권업회, 계동학교, 한민학교// 러시아는 정치적자유가 좀 있기에.....대한광복군정부(이상설, 이동휘-한인사회당;좌파)// 대한국민의회

 

반응형

 

 31운동

국외적 배경 3ㆍ1운동 국내적 배경
베르사유 체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동경 2ㆍ8독립선언
만주 무오선언
고종 독살설
국내운동침체에 대한 반성
동경 2ㆍ8독립선언에 충격
국제정세에 유리함
신한청년당의 활동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파견
3ㆍ1운동의 영향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무단통치 → 문화통치
- 외국의 민족운동에 영향
(중국의 5ㆍ4운동, 인도의 스와라지운동)

- 3ㆍ1운동의 과정 -

단계 1단계(점화기) 2단계(도시 확대기) 3단계(농촌 확산기)
주체 학생과 민족대표자(종교계) 학생이 주도, 상인과 노동자 가세 농민이 적극 참여
지역적 범위 주요도시 도시를 중심으로 확대 농촌과 국외로 확산
전개양상 독립선언의 만세시위
비폭력주의
만세시위의 확산, 파업과 철시, 비폭력주의 무력적 저항, 폭력적



오독립선언서
(1918.11.13)
2ㆍ8독립선언서
(1919.2.8)
미독립선언서
(1919.3.1)
천도교주독립선언서
(1922)
*우리나라 최조 독립선언
*만주길림, 중광단인사 중심 *[대한독립선언서] 조소앙집필
*우리 같은마음 같은덕망의 2천만
형제자매여~, 무장투쟁주장
*일본 유학생들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받아
*이광수집필
*일본에 대해 영원한 혈전을 선포하게 될 따름이다
*본문 최남선, 공약삼장
한용운 집필
*오등에 자에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일절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
*천도교의 제2의 3ㆍ1 운동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
*존경하는 천도교인과~
다시 기미년의 감격을
재현하기위해

 

1. 배경

1) 러시아 혁명(1917) : 레닌은 제국주의 하에서 고통 받는 식민지 국가를 지원하겠다고 선언

2)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 : 승전국의 식민지는 해당×, 일본은 승전국 ⇒ 우리의 현실과는 무관

3) 상해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민족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

4) 고종의 독살설 : 고종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1919.1.22) → 일본 독살설 유포 → 민족운동 분위기 조성

5) 국외의 활발한 독립 운동

- 대한 독립 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1918.11) :“무장 투쟁을 통해 완전 독립을 쟁취하자”

- 2ㆍ8 독립선언(1919년) : 일본 유학 중이던 학생들이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발표

 

2. 경과

1) 독립 선언(1919. 3. 1):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문을 발표

2) 일제의 무력탄압 : 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

3) 제1기: 비폭력주의 → 제2기: 학생들이 주도적 역할 → 제3기: 전국의 농촌으로 확산

→ 제4기: 국외로 확산 무력 저항 운동으로 전환

4) 민족대표들은 대중적 시위를 지도하지 못함

 

3. 의의

1) 중국의 5 · 4운동, 인도의 비폭력·무저항운동에 영향을 줌

2) 각지의 임시정부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1919.11) :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

3) 무장독립운동의 본격화

4) 일제는 무단통치를 문화통치로 바꿈

4. 한계성 : 비현실적 낙관주의, 열강의 지지를 받지 못함, 민족 대표의 소극적 자세

 

※ 국외에서 만세시위

• 연해주(국민의회주최), 미국(대한인국민회,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고 독립선언식 거행)

일본(도쿄유학생 중심, 조선청년독립단)

 

 

 

 대한민국 임시정부

1. 3ㆍ1운동 이후 독립노선

 

절대독립론(선독립) 선독립 후실력 양성론, 민족주의 좌파, 반자치론ㆍ무력투쟁으로 연결
독립전쟁론: 노령정부, 신민회 등 다수 단체의 독립노선
실력양성론(후독립) 민족주의 우파, 애국계몽과 민족산업ㆍ교육진흥에 노력, 자치론ㆍ외교론과 연결
외교독립론: 초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노선

 

 

 

2.개헌(제정당시ㆍ1차개헌ㆍ5차개헌 때 3권 분립이 지켜짐, 3차 개헌헌법이 가장 오래 지속) 대 내 집 주 부 ]

 

임시헌장제정
(1919.4)
임시의정원 중심(의정-이동녕, 국무총리-이승만) 현행헌법과 비교
제1차 개헌
(1919.9)
대통령중심제(이승만,박은식) → 삼권분립 1공화국 대통령제 이승만
제2차 개헌
(1925.7)
국무령중심의 내각책임 지도제(김구) → 사법권 조항 삭제 2공화국 내각제 윤보선/장면
제3차 개헌
(1927.3)
국무위원중심의 집단지도체제(김구,이동녕 등 10명), 14년간 3공화국 대통령제 박정희
4차 개헌
(1940.10)
주석중심의 강력한 지도체제(김구) 4공화국 유신 박정희
제5차 개헌
(1944.4)
주석(김구),부주석(김규식)중심체제 → 사법권조항 부활 5공화국 대통령제 전두환
6공화국 대통령제 노태우

 

 

 

3. 임시정부의 통합(1919.11)

1) 3ㆍ1운동이후 체계적이고 통합적인 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하고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흡수하여 통합정부인 상해에서 수립

* 한성정부: 3. 1운동 이후 국내에서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하여 수립, 임시정부의 법통정부

 

2) 상하이에서 수립되어 충칭에서 광복 : 초기에는 외교활동을 전개하였음을 입증

3) 임시 의정원(입법), 국무원(행정), 법원(사법)으로 구성된 3권 분립에 입각한 최초 민주공화제 정부

4) 대통령 지도 체제 : 대통령(이승만). 국무총리(이동휘)

5) 대한민국임시정부 선포문 :“신인일치로 중외협응하여 한성에서 의를 일으킨 이래...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 헌장을 선포하노라”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6) 이동경로: 상하이(1919~32) → 항저우 → 난징 → 한커우 → 광저우 → 류저우 → 충칭(40~45)

 

 

 

4. 활동

1) 군자금 모금: 애국공채 발행, 의연금 모금, 백산상회(부산, 1927년 완전해산)ㆍ이륭양행(만주, 1922년 와해)

2) 군자금의 전달: 연통제(1921년 붕괴, 국내외 연결하는 비밀행정 조직망)

교통국(비밀 통신망. 군자금 모금과 정보 수집에 기여)

3) 사료편찬소 설치: 안창호[한일관계사료집], 기관지[독립신문] 간행(이광수 주필)

4) 외교활동과 군사활동

 

초기: 외교활동 전개 군사활동으로 전환
국제연맹으로 부터 독립을 보장받고 그것에 가입 하는데 일차적 목표를 두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조소앙을 스위스만국사회당회의에 파견했으나 모두 실패, 2차 목표로 미영중소 등 각국으로부터 개별적 승인을 얻고자 워싱턴에 구미위원부 설치(이승만),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서재필), 파리에 파리위원회를 두었으나 역시 실패.
국제사회의 외면 → 1923년 국민대표회 개최요구
북로군정서,서로군정서,대한독립군의 지지선언 (→ 직할 부대로 통합하는 데 실패) 소련과 공수동맹(1920)
광복군 총영이라는 직할부대를 편성(1920)
육군무관학교를 상해에 설치(독립군양성), 그 후 1940년에 중경으로 옮기고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광복군을 조직, 대일선전포고 후 대일전에 참가
*임시정부 직할부대(광복군 사령부ㆍ광복군 총영ㆍ육군 주만 참의부ㆍ한국광복군)

 

 

 

5. 국민대표회의(1923.1)----4년동안 뭐했냐?

1) 배경 : 독립운동에 대한 노선 갈등(외교 독립론 대 무장 투쟁론), 비밀행정 조직망의 붕괴 등

2) 원인 : 이승만의 위임 통치안 제출, 임시 정부의 무력함에 대한 비판 대두

3) 전개 :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

  태도 대표자(운동 노선)
개조파 임정 인정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은 임시정부이므로 임정을 중심으로 운동전개. 안창호등 선실력 후독립론을 주장
창조파 임정 불신임 박은식ㆍ신채호등 민족주의 좌파계열과 노령종산주의자들 지지(무장투쟁론),임정해체 후 새 정부 수립주장
현상유지파 임정 인정 이동녕ㆍ김구등이 주장, 2대대통령 박은식, 내각책임제로 2차개헌

 

국민대표회의 소집 이에 본 주비회는 시세의 움직임과 민중의 요구에 따라 과거의 모든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완전하고 확실한 방침을 세워서, 우리들의 독립운동이 다시 통일되어 조직적으로 진행하도록하고자 한다. 이에 국민대표회의 소집 사항도 주비하여 책임지고 성립시킨 것이다 <주비위원회 선언서>

- 25년이후 김구중심의 현상유지파가 이끌면서 민족운동의 올바른 이념을 제시

- 정부 옹호파의 대두: 윤기섭, 김구 등을 중심으로 협성회 조직. 임시정부 지지 선언

- 이승만의 태도: 신규식을 국무총리 대리로 임명한 후 미국으로 떠남.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키려 함

4) 결과 :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1923. 6)

- 이승만 파면(25. 3), 2대 임시 대통령 박은식 선출(4개월만에 병사),국무령중심 내각책임제로 전환(25.7)

- 이후 침체된 상황에서 명맥만 유지, 임시정부체제 급격히 약화

5) 무장 투쟁의 전개

- 한인애국단 조직(1931): 국민대표회의 결렬후 임시정부의 침체를 극복하고, 만보산사건으로 인한 한ㆍ중 사이의 악감정 우호증진을 위해 김구가 조직 → 윤봉길의 홍커우 공원의거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이 지원.

 

- 1932년 상해 사변으로 인해 임시정부는 항주(항저우)로 이동

 

충칭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정치ㆍ경제ㆍ교육의 균등을 주장한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받아들여 41년에 대한민국건국강령 발표, 충칭에서 중국국민당의 지원하에 광복군을 창건하고 중국내의 군사작전에도 참가

 

 

 610 만세운동과 광주학생 항일운동

 

1. 6·10 만세 운동(1926): 순종의 인산일을 계기 → 거족적 운동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실패

- 주도세력 : 학생과 사회주의자

- 각급 학교에 독서회 등의 비밀 항일 결사가 조직, 신간회가 결성(1927)되는 데에 직접적 영향

2017/04/19 - [한국사/1 근현대 요약] - --- 독립단체, 신민회, 독립군 기지건설, 해외이주

- 사회주의계와 민족주의계가 함께 항일 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는 가능성 제시

- 사회주의계는 격문을 배포하다 발각되어 제2차 조선공산당이 해산되는 계기

 

2.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년 10월 ~ 1930년 3월까지 5개월간 지속)

1) 배경: 식민지 노예 교육, 6ㆍ10만세운동 이후 각급 학교에 항일결사ㆍ동맹휴학 전개

신간회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 고양

2) 발단: 일본 남학생의 한국 여학생(박기옥) 희롱사건(박준채) → 메이지절(11.3. 메이지 일왕의 생일)

3) 전개

① 일제의 편파적 수사로 광주시민과 학생들 분노

② 신간회: 조사단 파견.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전국화를 위한 지원 활동 시작

4) 전국적 확대: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산 → 신간회의 전국적 운동으로 발전시도 → 실패

5) 역사적 의의: 3ㆍ1운동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학생운동 (* 6ㆍ10 만세운동X)

 

 

6·10 만세 운동 때의 격문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의 격문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이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 독립 만세
학생 대중들이여 궐기하라! 검거된 학생은 우리 손으로 탈환하자.
언론·결사·집회·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식민지 교육 제도를 철폐하라.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를 확립하라! 용감한 학생, 대중이여!
최후까지 우리의 슬로건을 지지하라.
그리고 궐기하라. 전사여! 힘차게 싸워라

 

 

 일제의 식민정책

무단통치(1910~1919)   문화통치(1920~1930)   민족말살통치(1930~1945)
• 헌병경찰제
(제복ㆍ칼착용, 즉결처분권)
• 조선총독부(총독정치)
• 중추원(총독부자문기구)
• 민족억압(언론,출판,집회x)
• 105인사건(안악사건)
• 조선태형령(1912)
• 보안법(애국계몽단체ㆍ일진회 해산)

• 보통경찰제(유화정책)
• 문관총독임명 제도화
• 치안유지법(1925)
• 친일분열정책(친일파양성)
• 조선ㆍ동아일보 발행 허가
*신문지법은 1907년 제정
• 궁성요배ㆍ신사참배강요(1936)
• 황국신민화(1938)
• 창씨계명
• 국어ㆍ국사 금지
• 조선어학회사건(1942)
• 민족 언론의 폐간(1940)
• 병참기지화 정책
•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 토지조사사업(1912~1918)
• 회사령(허가제, 1910)
• 어업령(1911),산림령1911)
• 광업령(1915), 임야조사령(1918)
• 전매제도 시행
• 문화유적 파괴
(창경궁→창경원,경희궁 철거)
3.1
운동
• 산미증식계획(日공업화정책)
• 회사령 철폐(신고제=계출제)
• 관세철폐(1923)
• 신은행령(1927)


• 조선농회령(1926)
→[조선농회]:지주중심


• 중공업투자시작(부전강 수력 발전소, 흥남질소비료공장)
세계경제공황

만주사변
• 남면북양정책
• 징용ㆍ징병ㆍ정신대
• 국가총동원령(1938)
• 농촌진흥운동(32~40)
→ 어용운동(허구적관제)


• 농산물수탈과 통제
㉠공출과 배급제 실시(39)
㉡신조선 미곡증산계획(40)
㉢조선식량 관리령(43)

 

 

제1절 식민통치 체제의 변화 - 무단통치(1910~1919) = 헌병경찰통치

1. 통치방법

1) 조선총독부 설치(1926, 경복궁 근정전 앞에 청사 건립완공)

- 총독은 무관으로 임명(3·1 운동 이후 문관으로 임명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는 한명의 문관총독도 없음)

- 총독부 산하기구: 정무총감(행정사무), 경무총감(경찰사무), 철도국·전매국·임시토지조사국, 직속 재판소

 

2) 중추원(자문기구) - 조선인에 대한 일종의 회유책(3ㆍ1 운동 때까지 소집된 적이 없음)

3) 일반교원, 관리에게 제복을 입힘. 칼을 차게 함(공포분위기 조성)

4) 사립학교와 서당의 통제 -> 1920년대에는 폐쇄

5) 조선태형령(1912) : 조선인에 한해 적용

6) 헌병에게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고, 모든 정치결사를 해산시키고 민족적 신문·잡지의 발행 금지

7) 3ㆍ1 운동을 계기로 문화 통치로 바뀜

 

2. 경제약탈 : 토지의 약탈, 산업의 침탈

1) 토지약탈 - 토지조사사업(1912~1918)의 실시(기한부 신고제)

⑴ 배경: 임시 토지 조사국 설치(1910) → 토지 조사령 공포(1912) cf)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1908)

 

⑵ 목적: 식민 통치를 위한 지세 확보, 한국인의 토지 약탈과 지주층 회유(친일지주 양성--도지권 부정해주니..), 식민지주제를 통한 조선의 일본식량공급지화, 일본인의 토지소유

 

⑶ 주체: 총독부 + 지주 ⇒ 지주는 몰락하지 않음(대부분의 한국인 지주들은 기한내 신고하여 자기토지를 지킬수 있었다O)

 

⑷ 한계 : 짧은 신고기간, 절차복잡. 소유권만 인정(도지권X, 입회권X, 경작권X) ⇒ 지주에게 유리

 

⑸ 결과 : 영구경작권 상실, 자작농 몰락, 식민 지주제 강화, 농민들의 해외유랑급증(1920년대)

① 지주의 권리만 인정, 경작권 부정 → 지주수 증가. 대부분 농민은 기한부 소작농으로 전락(그래서 국외로)

② 전 농토의 40%가 총독부 소유(동척과 총독부가 최대 지주) ⇒ 자영농↓, 소작농↑, 임노동자↑, 지주수↑

③ 조선총독부로부터 넘겨받은 토지를 일본인들에게 헐값에 불하 (→ 미군정 때 신한공사로 바뀜)

④ 소작농이 늘어나자 소작쟁의 발생, 급속도로 증가(*노동쟁의는 30년대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급증)

 

2) 민족산업의 통제

- 회사령(1910)의 제정, 공포 : 허가제 → 문화통치 때 신고제로 바뀐다.

- 전매사업(인삼, 소금, 담배 등)의 실시, 기간사업의 독점(철도, 항만, 도로, 통신 등)

- 농공은행, 조선 식산 은행, 각종 금융 조합을 통해 한국의 산업 경제권이 통제

 

3) 임야, 산업의 침탈 : 산림령, 임야조사령, 어업령, 광업령의 공포

 

 

제2절 문화통치(1919~1931) = 보통경찰통치(고등경찰통치) =>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시작함

1. 성격 : 근본적 변화는 없음(기만성)

 

2. 통치방법

1) 소수의 친일분자를 양성 → 우리민족의 분열

 

* 사이토의 조선 민족 운동의 대책
ㄱ. 일본에게 절대 충성하는 자에게 관직을 준다
ㄴ. 친일적 인물을 찾아내어 각 계층 마다 침투시켜 친일 단체를 만든다.
ㄷ. 친일파를 각종 단체의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둔다.
ㄹ. 농민을 통제 조종하기 위해 유력한 인사가 이끄는 친일 단체를 만들어 국유림의 일부를 불하해
주고, 수목 채취권을 주어 회유 이용한다.

 

2) 보통경찰제의 실시 = 고등경찰통치 → 경찰의 수와 관서의 수는 이전보다 크게 증가

 

3) 언론·출판자유의 제한적 허용: 한글신문과 잡지가 간행, 사전검열, 정간, 삭제 등으로 제 역할 못함

 

4) 총독의 임명 제한을 철폐 → 문관 총독의 임명“가능”, 실제로는 1명의 문관총독도 없었음

 

5) 교육기회의 확대(제2차 조선교육령): 초급학문과 기술교육만을 허용 → 민립대학 설립 운동 전개 → 일제가 경성제국대학(1924) 설립, 사립학교와 서당을 탄압ㆍ폐쇄시킴

 

6) 치안유지법의 공포(1925) - 독립운동을 탄압

7) 도·부·면에 협의회를 설치 - 의회를 설립하여 참정권을 부여한다는 명목 아래 지방행정기관인 도·부·면에 협의회를 설치하여 친일 인사들을 위원으로 임명 하였다.

 

8) 관동대지진 → 관동대학살

 

9)만보산사건을 계기로 발생한 만주사변을 계기로 민족말살통치로 바뀜

 

만보산사건 - 1931년 7월에 중국 지린 성(吉林省) 완바오 산 부근에서 관개 수로 때문에 한국과
중국 농민 사이에 일어난 분쟁 사건. 일본은 경성일보를 통해 사건을 확대보도, 동아일보가 정정
보도하여 사건수습, 일본의 책동으로 일어나 국내에서 화교에 대한 박해 사건으로 발전하였으며,
일본은 이를 구실로 삼아 만주 사변을 일으켰다.

 

 

3. 경제약탈 : 식량의 약탈(일본의 공업화 정책에 따른 자국내 식량부족의 대안)

1) 산미증식계획실시(1920~26/26~1934): 증산량은 계획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수탈량은 계획대로 추진

- 식량부족의 심화 → 미곡소비량 감소, 잡곡 소비량 증가, 대지주 이익 증가, 자ㆍ소작농 몰락

- 조선농민은 쌀수탈 + 비료대금ㆍ곡물운반비ㆍ수리조합비까지 부담하는 이중고통으로 인해 유랑민화

- 30년에 공황기의 미가하락으로 인한 수리조합의 경영악화, 정부알선자금의 급격한 감소 때문에 수탈량 감소

- 33년에 일본내 농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탈 중단

 

2) 회사령의 철폐(1920) : 신고제

- 일본인의 투자는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전환, 일본의 회사가 침투해 오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민족자본이 성장되는 경우도 있었음 󰃚 경성 방직 주식회사, 평양 메리야스 등의 회사 설립

 

3) 일본상품의 관세 철폐(1923) → 일본상품의 유입 → 물산 장려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

 

4) 신은행령(1927) : 중소 규모의 은행을 모두 강제로 일본 은행에 합병

 

 

제3절 민족말살통치(1931~1945) - 1940년대부터 본격화

     (3시기로 나눠봐야한다)

1. 배경: 만주사변(1931)//  중일 전쟁(1937)//  태평양 전쟁(1941)을 도발 → 한반도를 전쟁의 병참 기지화

 

 

2. 통치방법

 

1)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 : 일선동조론, 내선일체

 

-‘황국신민서사’암송 강요. 신사 참배(36년)ㆍ궁성 요배 강요

- 신교육령 제정(1938): 우리말과 글의 사용 금지, 우리 역사 교육 금지

- 일본식 성명 강요: 창씨개명

- 민족 언론의 폐간(1940)

 

 

2) 경제약탈: 중공업 중심의 투자 시작(1926년 흥남 조선 질소 비료 공장)으로 경제약탈의 본격화

 

1) 1930년대 중반까지 *흥남 질소 비료공장: 친일파가 아닌 일본인이 직접 설립.

- 병참기지화(1930년대 이후): 중화학 공업, 광업 생산에 주력 → 소비재 부족 현상. 공장이 북부에 집중(지역간 불균형 초래)

- 남면북양(南綿北羊)정책: 일제의 공업 원료 증산 정책을 실시

- 농촌진흥운동(1932): 농민의 반발을 무마하고 농촌 통제를 강화하기위해 농민경제의 안정화를 명분

 

2) 중·일 전쟁(1937) 이후(1937~1945): 전쟁 동원과 군 위안부 징용, 국가총동원령의 반포(1938)

⑴ 물적 자원 수탈

① 국방헌금징수, 쇠붙이 공출제, 가축증식계획 실시, 산미증식계획 재개(40~45. 각 개인에까지 할당)

② 경제생활의 규제: 국내 식량사정 극도악화 → 식량 배급제 실시.

⑵ 인적 자원 수탈 (지원병제 → 국가총동원 → 국민징용제 → 학도지원병제 → 징병제 → 정신대)

① 강제 징병제: 지원병 제도(1938) → 학도지원병 제도(1943) → 강제 징병제(1944)

② 강제 징용제: 국민 징용령(1939) 공포 ⇒ 탄광, 철도, 군수 공장 노동자로 한국인을 동원 → 국내 농촌의 농업 생산력이 급격히 하락. 대략 170여 만명이 강제 징용에 동원

③ 종군 위안부: 국민정신총동원 연맹(1938) 조직 → 여자 정신대 근무령(1944)

 

 

 

 일제에 저항한 종교활동

개신교 ① 선교초기: 애국계몽운동에공헌 ,알렌,서재필, 1903황성기독교청년회(YMCA)
② 일제말기: 신사참배운동(1935)거부
천주교 ① 사회사업(양로원, 고아원) ② [경향] 잡지 ③ 무장항일투쟁(민단) [천주의]
천도교 ① 병희 창시 ② 제2의 3ㆍ1운동 계획 ⇒ 1922년 자주독립선언문 ③ 기관지[세보]
④ 선농민사 ⇒ 개간운동, 저축운동, 소비조합운동 등 개량적 운동
소년운동: 방정환, 어린이날제정, 잡지[어린이]발간(1923)
⑤ 1919년 개벽사 설립 ⇒ [벽]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 ⑥ 덕여학교 [2천만조손동개청]
대종교 나철ㆍ오기호, 군숭배, 광단(1911) → 북로군정서조직, 해외항일운동 정신적 지주
불교 한용운, 조선불교유신론(1913), 만당결성(1930, 항일비밀조직, 卍黨)
유교 박은식, 유교구신론(1909) ⇔ 일제대동학회
원불교 박중빈, 개간사업, 저축사업, 새생활운동(남녀평등ㆍ허례허식폐지ㆍ미신타파)

1) 천주교

- 조·프 수호 통상 조약(1886)을 통하여 선교의 자유를 얻음

-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 경향신문 등을 간행, 의민단(1919)을 조직하여 무장항일 운동을 전개

2) 개신교

- 교육운동과 의료사업의 전개: 알렌, 에비슨 등

- 한글 보급, 미신타파, 근대 문명의 소개, 남녀평등 사상의 보급, 신사참배의 거부하는 운동 전개

- 천도교와 함께 3ㆍ1 운동에 적극 참여, 105인 사건, 안악사건 등으로 탄압받음

3) 천도교(민족종교) ↔ 시천교(친일종교)

-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 보성사, <만세보> 발간 <어린이>, <개벽>, <학생>, 어린이날의 제정, 3ㆍ1 운동 주도

- 제2의 3ㆍ1운동의 계획: 자주독립선언문(1922)을 발표 “~으뜸 국민임을 재차 선언합니다.~”

4) 대종교(민족종교)

- 나철ㆍ오기호 등이 단군신앙을 발전시켜 창시, 국수주의 성격이 가장 강함(보수적)

- 중광단 조직 → 3·1운동 직후 북로군정서로 개편하여 무장항일운동을 전개(청산리대첩 등에 참여)

- 해외항일운동의 정신적 지주

5) 유교 : 박은식이 “양명학”의 영향을 받아 유교구신론의 저술 → 대동교의 창시

 

* 박은식의 유교구신론: 유교가 대발전을 하지 못함은…3대 문제를 들어 개량 구신의 의견을 바치
노라…우리 유가에서 쉽고 정확한 학문(양명학)을 구하지 아니하고 질질끌고 되어가는대로 내버려
두는 공부(성리학)를 전적으로 숭상함이라.

6) 불교

- 한용운이 <조선 불교 유신론>의 저술 → 불교의 혁신과 자주성 회복을 추진(민족불교의 강조)

- 만권당의 조직과 민족종교의 전통유지에 노력

7) 원불교 : 개간사업과 저축운동을 전개, 남녀평등,“허례허식의 폐지”등에 앞장섬, 새생활운동

 

* 종교의 친일화: 대동학회(유교), 동양전도관(기독교), 본원사(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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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에 저항한 민족문화

 

1. 연극: 3․ 1이전(신파극), 3․ 1이후(극예술협회(1921)ㆍ극예술연구회(1931)), 민중계몽수단

토월회(1923~1926): 박승희ㆍ김기진, 본격적 근대극

2. 영화: 나운규 아리랑(1926), 조선 영화령 발표(1940)

3. 미술: 전형필(간송미술관, 문화재수집보호) * 친일: 조선문인협회, 조선음악가협회, 조선연극협회조직

4. 문학

 

1910년대 이전
(개화기)
신소설
신체시
번역문학
①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장르가 등장,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의 중간단계인 과도기적 특성
② 창가: 개화가사+찬송가+일본음악의 영향 󰃚독립가,권학가,경부철도가(최남선)
③ 신체시: 개화사상+창가와 근대시의 과도기적 형태
- 최남선(해에게서 소년에게): 언문일치 확립의 선구자 ⇒ 발전: 신채호(천희당시화)
④ 신소설: 고전소설과 현대소설의 과도기적 형태
- 이해조(자유종,모란병,새댁) - 안국선(금수회의록)
- 이인직(혈의누,치악산,귀의성,모란봉) - 최찬식(안의성,추월색)
1910년대 계몽문학 ① 최초의 현대시(주요한[불놀이])와 소설(이광수[무정])탄생
② 계몽주의 문학과 2인 문단시대 (이광수ㆍ최남선)
③ 신파극 유행과 창작 희곡의 등장(조중환의 병자삼인)
1920년대 반계몽주의
신사조 등장
① 3ㆍ1운동 이후 동인지가 간행되고 순수문학을 추구하는 경향 등장
② 계몽성 탈피와 다양한 문예사조 전개 (사실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③ 20년대 중반 현실과 생활의 반영을 강조하는 신경향파 문학 대두
1925년 KAPF(조선프롤레타리아동맹) 결성: 프로문학(박영희,김기진)
④ 20년대 중반이후 프로문학에 반대하는 국민문학운동ㆍ시조부흥론
(최남선[백팔번뇌]), 한용운(님의침묵), 김소월(진달래꽃) 등
⑤ 동인지 활성화 *동인지순서 [창개 폐장백 금영 조해문]
- 창조(19,자연주의,김동인,전영택) - 개벽(20,사실주의,현진건,염상섭)
- 폐허(20,퇴폐주의,염상섭,김억) - 장미촌(21,낭만주의,박종화,변영로)
- 백조(22,낭만주의,박종화,나도향) - 금성(23,낭만주의,양주동,이장희)
- 영대(24,민족주의,주요한,김소월) - 조선문단(24,민족주의,이광수)
- 해외문학(27,외국문학번역,김진섭) - 문예공론(29 민족+사회주의,양주동)
1930년대 이후 저항문학
순수문학의 부흥
① 사실주의ㆍ모더니즘 등의 다양한 작품 창작(청록파, 시문학파, 생명파, 전원파)
② 브나로드운동의 영향으로 계몽운동 재등장
③ 중ㆍ일전쟁 이후 일제가 간접적ㆍ우회적인 항일표현도 금지
④ 친일(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김활란, 노천명, 최린, 김억, 모윤숙)
⑤ 저항시인: 이육사(청포도ㆍ광야ㆍ자오선),윤동주(서시ㆍ별을 헤는 밤), 한용운(님의침묵)

 

 

 일제에 저항한 사회적운동

 

일제의 식민
정책
(민족
탄압책)
사회적 저항
운동
농민ㆍ노동자 운동 • 소작쟁의, 노동쟁의
• 조선노농총동맹(1924) → 조선농민ㆍ노동총동맹(1927)(분리됨)
-->원래 같은 필드가 아닌데..힘이없어서 합침
청년운동 • 지식개발과 사회교화 →자주독립의 기초
• 좌ㆍ우 청년의 통합(조선청년총동맹,1924)
• 6ㆍ10만세운동, 광주학생 항일운동
소년ㆍ여성운동 • 꿈, 희망, 용기→ 애국심(천도교)
• 여성계몽, 여성지위 향상, 근우회(1927)
사회주의 운동 • 사상적 단합, 조직면에서 효과적
• 타 운동에 영향을 줌
민족유일당 운동 • 독립운동노선의 통일 → 신간회(1927)
기타운동 • 형평사운동(1923), 수양동우회(1926), 문맹퇴치운동(1930)

 

 

1. 사회적 민족 운동의 전개

1) 청년 운동: 조선청년총동맹 결성(1924) : 청년계의 민족 유일당

2) 소년 운동: 중일전쟁 이후 1937년 해산

- 천도교 소년회의 조직: 어린이날(1922.5.1) 제정 → 조선소년연합회 조직

3) 여성 운동: 부인회, 조선여자교육회, 조선여자청년회, 조선여자기독교 청년회

- 20년대 초반: 여성 계몽적 성격의 실력 양성 운동

- 20년대 후반: 여성 해방을 계급 해방, 민족 해방의 문제로 간주하여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전개

- 근우회(1927.5): 신간회 출범 후 김활란 중심, 여성노동자의 권익옹호와 새생활 개선을 내걸고 여성계

민족 유일당 운동전개 → 1931년 신간회 해산과 함께 해산

 

근우회취지문 “일어나라, 오너라 단결하자 분투하자 조선의 자매들아,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4) 형평운동

- 조선형평사(1923.4.25): 백정 이학찬, 진주에서 조선형평사를 창립, 전국으로 확대

- 사회적 차별의 철폐를 통한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구현

→ <형평>이라는 잡지가 발간, 형평사의 운영을 위한 피혁공장이 설립

- 형평사조선대회 개최(1925.4) → 신파, 구파의 노선 대립으로 갈등 심화로 형평운동 분열

- 1935년 대동사로 개칭: 사실상의 기능을 상실 → 이후 순수 경제적 이익향상운동으로의 변질

-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다, 지금까지 백정은 어떠한 지위와 압박을 받아왔던가?

5) 문맹 퇴치 운동

⑴ 1920년대: 문맹 퇴치 운동(학생, 지식인) 농촌계몽운동(언론사)

⑵ 1930년 전후: 언론사를 중심

① 문자 보급 운동(1929): 조선일보“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② 브나로드 운동(1932): 동아일보. 문맹 퇴치와 구습 타파, 생활 개선 목적. 한글 보급 운동

③ 조선어 강습회(1932): 조선어학회 주도

⑶ 일제의 탄압(1935): 엄격히 금지시킴

 

 

 

 

2. 경제적 민족 운동의 전개

1) 농민 운동(소작쟁의 ⇒ 소작권이동반대 > 소작료인하요구)

⑴ 1920년대 초반: 소작인조합 중심(농민은 노동자와다르게 계층있기에)생존권투쟁이기에. 암태도소작쟁의(1923),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작쟁의(1924)

⑵ 1920년대 후반: 사회주의 영향으로 조선농민총동맹(전문화)(1927.9) 결성 → 전국에 농민조합 결성(조직적 전개)

⑶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식민지배 자체를 부정하는 반제국주의적 항일 민족운동 성격(폭발적 증가), 전반은 총독이 우가끼.

① 혁명적 농민 운동(비합법)으로 방향 전환

② 쟁의 수 산발적으로 증가(35년:2만5천건, 37년:3만2천건). 실제 참여하는 농민 수 감소(31~34)

 1935년 이후에는 급격히 줄어듦: 30년대 후반에 일제의 강경탄압으로 잠복기

2) 노동 운동(노동쟁의)

⑴ 1920년대 초반: 생존권 투쟁의 합법적 양상

⑵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 사상 유입으로 조선노동총동맹(1927) 결성 → 노동운동 조직화

󰃚 영흥 노동자 총파업(1928), 원산 노동자 총파업(1929)석유회사

⑶ 1930년대 이후: 반제국주의족 항일 민족 운동. 비합법 투쟁(폭력투쟁)

→ 일제의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1930~1935년 노동쟁의가 집중적으로 발생 →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1936년 이후 급감 → 1940년 이후 거의 소멸

 

 

 

3. 민족 협동 전선 운동

1) 사회주의 운동의 대두

- 배경 : 레닌의 약소민족 독립운동 지원약속 이후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

- 국내 사회주의 단체 활동 : 서울청년회, 무산자동지회, 신사상연구회, 화요회, 북풍회

- 1차 조선공산당(1925.4) → 2차 조선공산당(1925.12) → 3차 조선공산당(1926.9) → 4차 조선공산당

- 2차조공(6.10만세운동의 격문살포시도 탄로되어 해체), 3차조공(정우회가 중심이 되어 신간회 결성에

영향, 신간회와 긴밀한 관계), 4차조공(반제국주의 혁명노선)

- 12월 테제(1928.12):= 코민테른, 인텔리 중심의 당 해체와 노동자·농민 중심의 당 재건을 명령, 식민지하에

서의 투쟁에 있어서 공동연합전선에 대한 포기를 촉구하고, 계급해방 전선을 강조(좌우연합에 대한 지원철회)

- 9월 테제(1930.9):= 프로핀테른, 신간회를‘소부르주아적 정당조직’으로 간주, 신간회 해소와

소시민적 노동운동을 혁명적 노동운동으로 전환할 것을 지령

- 결과: 민족주의 운동과 대립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이 분열. 민족유일당의 필요성 대두 → 민족유일당 운동

 

2) 민족 유일당 운동(서울청년회 + 조선물산장려회)

- 자치운동론의 대두(1923) → 중국의 제1차 국공 합작(1924) → 북경촉성회의 창립(1926.10) →

6·10만세운동(1926) → 조선민흥회 조직(신간회 창립의 중요한 계기) → 정우회 선언(1926.11)

신간회(1927~1931) : 이상재, 안재홍‘비타협적 민족전선의 수립’제창

 

 

정우회 선언 “우리가 승리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모든 조건을 충분히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종래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싸워야 할 것이다.”

 

 

 독립군에서 광복군까지

 

1.독립군 활동 추이 봉 훈 산 간 단 자 부 미 독 호로 쌍 대 ] (보훈청 간 군자3 미쓰3 만나서 연합)

 

봉오동전투 (+) 1920.6 홍범도(대한독립군)+최진동(군무도독부군)
훈춘사건 (-) 1920.10 일제가 중국 마적(馬賊)과 짜고 간도지방의 조선인을 학살한 사건
청산리전투(+)
(봉오동의 10배)
1920.10 김좌진(북로군정서군)+대한독립군(홍범도)+국민회군(안무), 이범석
간도참변(-) 1920.10 =경신참변, 봉오동ㆍ청산리전투에 대한 보복
대한독립군단조직(+) 1920.12 간도참변후 독립군은 좀더 위로 올라가서 밀산부(이상설이 만든)에 집결후 대오 재정비, 대한독립군(서일)(싹다 모아서)
자유시참변(=흑하참변)(-) 1921 소련 영내에서 적색군에 속아 내전에 참가 후 내전끝난후  무장해제 요구에 저항, 전투참변
3부 성립(+)
참정신
1923~5 의부(압록강,23)ㆍ의부(남만주,24)ㆍ민부(북만주,25), 
민정+군정 (하나하나가 자치정부 임시정부표방은 안함. )
(북간도 없는건...간도참변때문)
미쓰야협정(-) 1925 만주군벌 장작림과 미쓰야 협정(3부인사탄압, 독립운동단속, 체포자인도)
3부 통합(+) 1929 (((1924: 중국 1차 국공합작----민족유일당 운동 영향
1925 치안유지법----계속 국내에서 저항하던 사회주의도 직격탄맞음
1926 순종 인산일--- 6 10 만세운동-----신간회 탄생배경)))


북만주에서 혁신의회(28)한국독립당(지청천- 국독립군)조직 후 일부 → 남만주에서 국민부(29)조선혁명군(양세봉- 선혁명군)


(3부 하나로 통합은 실패)
북만주(28): 혁신의회는 참정신에서 탈퇴한 개인이 한번에 모인것
남만주(29): 국민부는 참정신이 단체로써 한번에 모인것
만보산사건(+) 1931 일 이간질, 만주사변의 원인
만주사변(+) 1931 만보산사건과 유조구날조사건에서 비롯, 독립군분산과 광복군편입 야기
한중연합작전(+)
한조
(윤봉길의거 계기)
1932~3 독립군(지청천) + 중국호로군 ⇒ 쌍성보대전자령 사도하자 전투
혁명군(양봉) + 중국의용군 ⇒ 흥경성영릉가 전투


(((의용은 징병의 반대말. 즉 자원. 의용은 다 빨간색.)))


but 34년에 일제가 만주차지
조선민족혁명
(조선)민족혁명
1935 김원봉, 민족주의계 + 사회주의계 (조선 민족 통일 전선), 
조소앙 3균주의 바탕(임정계열 불참)
광복진선 1937.8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민족주의 우파계열 단체
조선민족전선연맹 1937.12 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 
(근데 조선민족혁명당이 워낙유명해서 그냥 조선민족혁명당이라고 불림)


좌익단체 연합
선의용대
(국민당의 도움있음)
1938 선민족혁명당산하부대 조선의용대(김봉)→ 광복군에 흡수(1942) *조선의용군X


(장제스가 일본어로 포로심문만 시킴. 무력을 못쓰게하고.
그래서 상당수는 화북으로 감. 그곳엔 중국공산당이 있었음.
즉 중국공산당과 연대.)


화북지대의 조선의용대는 조선독립동맹산하 선의용(김봉)에 흡수1942)
--->이 팀은 진짜 빨갱이. 그래서 한국광복군도 안들어옴.-->국공내전에 참전후--->북 인민군 그리고 남침.
전국연합진선협회 1939.9 광복진선(김구) + 민족진선(김원봉) ⇒ 실패
한국독립당 1940.5 김구, 조소앙, 이청천, 조소앙의 삼균주의 바탕
국광복군
(지청천)
창설
1940.9 중국 국민당 정부 승인을 얻어 충칭에서 창설.


대일선전포고. 
영국과 연합(인도 미얀마 참전)
미국 oss 과 연합--> 정진군 준비(그러나 일왕 항복으로..끝)

 

 

 

 

2.공산주의계 무장 투쟁

춘황ㆍ추수 투쟁 1931 소작료 인하ㆍ농민의 생존권 및 자치권 확보 요구
항일 유격대 1931

조국 광복회 국내 조직의 지원을 받아 국내진공작전 단행
(만주에 남아서 레지스탕스하던..)

동북인민혁명군 1933.8

한인 항일 유격대+중국 공산당 유격대

동북항일연군 1936.1

시안사건을 계기로 이념ㆍ노선ㆍ사상에 관계없이 연합, 재만한인 조선광복회 산하

조국 광복회 1936.5

동북항일연군+민족주의자 계급ㆍ성별ㆍ당파의 차별을 묻지않고 일치단결

보천보전투 1937.6

동북항일연군 내 항일 유격대가 보천보에 침투, 김일성

화북조선청년연합회 1941.1

화북지역 공산주의자+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조선독립동맹 1942.7

김두봉ㆍ최창익중심, 조선의용군 조직, 중국팔로군과 연합작전


.

 

 

 




3. 지역별 독립군 활동

 

1) 간도(=남만주)

1. 로군정서(1919.5, 공화주의) → 대한통군부에 흡수(1922.1)
1) 신흥강습소 → 신흥중학 → 신흥무관학교로 개편(독립군 간부 양성)
2) 예하부대: 의용군 → 육군주만 참의부에 편입(임시정부 직할부대)
3) 광한단: 서로 군정서를 이탈하여 새로이 조직, 적극적 군사행동 주장


2. 대한독립단(1919. 복벽주의) ┬민국독립단(조병준을 따르는)┬광복군 사령부(1920)(총영)
                                           └기원독립단(계속 복벽주의인)┘


3. 광복군 사령부(1920):임시정부의 통제를 받는 직속기관, 대한통군부(1922.1)에 흡수. 정예전투부대로 광복군 총영(1920) 설치


4. 대한통의부(군정+민정) ┬ 통의부(공)와 의군부(복)대립 → 정의부(1923.11)(의군부 아예 제거함)
                                    └ 육군주만참의부(1923.8)(같은편끼리 암살이 싫어서 나옴)
1) 군대 : 대한통의부 의용군
2) 광동학교 등 9개의 소학교 운영, <경종보> 등의 기관지 발행



 

 

2) 북간도

1. 북로군정서(1919.8, 김좌진):대종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 인사들이 조직
청산리대첩, 간도참변 이후 대한독립군단으로 발전, 자유시 참변 후 해체




2. 대한독립군(1919.12, 홍범도)┬봉오동전투(20.6)→ 청산리대첩(20.10)→ 간도참변(20.10) ⤵
             + 국민회군(안무) │        󰀳 자유시참변(1921.6.28) ← 대한독립군단(1920.12) ⤶
             군무도독부군(최진동) ┘             ↳ 신민부(북만주.1925.3)북간도는 일본손에 들어감.



 

 

 3) 3부 성립 후 전개 (만주사변후)

30년대 이후 관내로 들어옴

1. 3부의 성립
1) 구분 : 서간도-육군 주만 참의부ㆍ정의부 북만주-신민부(김좌진)
2) 성격 : 군사조직(군정기관) + 행정조직(민정기관), 3권 분립체제 → 사실상 3개의 정부 형태


2. 미쓰야 협정(1925.6) : 만주의 군벌 장쭤린과 총독부의 미쓰야 사이에 현상금을 건 협정


3. 3부 통합 운동(1927): 통합 회의 결렬 후 3부 해체(1929.12)(머니까 남쪽이랑 북쪽이랑 나누자 여부로)
1) 혁신의회(북만주.1928.12) → 한국독립당(1930.7, 예하부대: 한국독립군)
2) 국민부(남만주.1929.4)→ 조선혁명당(1935, 조선혁명군)


4. 만주사변(1931.9) → 만주국 수립(1932.3)


(1932 윤봉길 의거)


5. 한중 연합 작전 수행
1) 선 혁명군(양세봉, 국민부)+ 중국 의용군 → 릉가 전투(32), 경성 전투(33)
2) 국 독립군(지청천, 혁신의회)+ 중국 호로군 성보 전투(32),도하, 경박호, 전자령 전투(33), 경성


6. 한중 연합 작전의 약화
1) 한국독립군 해체(1933.10)→강제로 무장해제(그때 호로군이 사회주의 쿠데타로 바뀜). 잔여세력은 동북인민혁명군, 조선의용대로 흡수
2) 조선혁명군의 해체(1937.3) ┬→ 일부는 동북항일연군(중국이 볼때 동북)에 흡수되어 투쟁을 계속
                                         └→ 일부는 조신민족혁명당의 산하부대인 조선의용대에편입



독립군은 호로군

- 지청천 쌍사자대동 어흥

 

4) 민족 연합 전선의 형성 노력

조선민족 혁명당(1935.6) ───→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1937) ────┐
│         └ 김원봉. 만주지역 민족유일당      ↳ 조선의용대(1938.10)          ↓
│                                                                             전국연합진선협회(1939.9)
↓조소앙, 박창제, 이청천 탈퇴                                                                  ↑
한국국민당(1935.11) ─────→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1937)─-┘
선의용대(1938)┬ 조선의용대(화북.1941) → 조선독립동맹에 흡수(1942.8)
                      └ 조선의용대(충칭.1941) → 국광복군에 흡수(1942.10)

1. 조선민족 혁명당: 만주일대의 의열단, 한국독립당, 신한혁명당, 조선혁명당, 광복단이 참여.
1)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 계열 한국독립당의 경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의견이 분열
2) 민족주의계, 사회주의계 모두 참여한 통일 전선 단일 정당(민족혁명당)으로 성립
3) 목적: 토지 국유화를 바탕. 민주공화국 수립
4) 분열: 김원봉(공산주의 이념)이 명당의 전권장악→ 조소앙·박창세 탈퇴(1935.9)


2. 한국국민당: 분열되었던 임시정부세력(한국독립당)이 다시 통합되어 결성. 김구, 이동녕 등 한인애국단과 조선민족혁명당에 참가하지 않은 임시정부 고수파 중심의 우익통합체
1) 목표: 일제의 완전 박멸, 민주공화국 수립
2) 성격: 공산주의와 무산계급 혁명론 배격. 삼균주의를 강령으로 채택


3.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1937.8.17) (나간세력들이 사회주의보고 니네가 들어와)
1) 중일전쟁 이후 민족주의 우파 계열 단체가 연합하여 결성
- 한국국민당(김구)+한국독립당(조소앙)+조선혁명당(이청천)+대한인국민회(미주지역) 등 9개
2) 의의: 중일 전쟁 이후 독립 전쟁의 체제 기반을 구축음
3) 한계: 좌·우 연합에는 소극적. 완전 통합시키지 못하고 연합단계에 머묾


4. 조선민족전선연맹(조선민전.1937.12) (한커우: 한의대)
1) 계급혁명보다 민족독립을 강조
2) 조선 조직(1938.10): 조선 민족 혁명당의 직할 부대
- 분열(1940년 이후)
ㄱ. 조선의용대(화북지대)+홍군=호가장 전투, 반소탕전 → 맹에 흡수(1942.8)
ㄴ. 조선의용대(충칭본대) → 김원봉이 임시 정부 산하 한국광복군에 흡수(1942.10)
3) 한계 : 임시정부를 부정. 광복진선과 대립


5. 전국연합진선협회(1939.9.22): 민족주의+사회주의
1) 중국 국민당 정부는 광복진선의 김구와 민족전선의 김원봉에게 연합할 것 종용.
2) 단일당 결성을 위한 한국혁명운동통일7단체회의 개최. 이념의 차이로 일주일도 안 돼 와해

- 민혁 조민혁 한(한커우/우한)의대 조똑똑

 

 

5) 1940년대의 독립 전쟁

1. 한국 독립당(1940.5.9): 임시정부 그 자체

1) 전국연합진선협회의 해체 후 우파 3당만의 통합추진. 충칭에서 단일대당으로 창당.
2) 이념: 조소앙의 삼균주의(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사이의 완전한 균등)
3) 한국광복군(1940.9): 충칭(중경), 김구와 지청천 중심으로 조직
① 태평양 전쟁(1941)이 발발하자, 대일·대독 선전포고문을 발표(1941.12)
②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 : 인도, 미얀마 등지에서 영국군과 연합작전(1943)→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동 작전(1944)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국내진입작전 시도
③ 국내 정진군 편성(1945) → 일제의 패망으로 국내진입계획이 무산

4) 건국강령의 반포(1941.11) :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독립을 위한 건국강령 반포
5) 조선민족혁명당의 임시 정부ㆍ조선의용대 합류(1942.10) ⇒ 민족주의계 + 사회주의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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