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한국사능력검정시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 해설-제50회

Jobs 9 2021. 4. 11.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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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01 - 구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

정답> ②

'공주 석장리에서 남한 최초로 (가) 시대의 유물인 찍개, 주먹도끼 등의 뗀석기가 출토되었다. 이번 발굴로 우리나라에서도(가) 시대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시대'는 구석기 시대를 가리킴을 알수 있다. 공주 석장리 유적 발굴을 통해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 연구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주로 (석회암) 동굴이나 막집에서 거주하였다.

오답 해설>

① 반달 돌칼로 벼를 수확한 것은 청동기 시대의 일이다.

③ 거푸집을 이용하여 청동 무기를 제작한 것은 청동기 시대의 일이다. 거푸집은 금속을 녹여 부어 어떤 물건을 만들기 위한 틀이다.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에 금속 도구의 제작을 위해 사용되었다.

④ 빗살무늬 토기를 제작하여 식량을 저장한 것은 신석기 시대의 일이다.

⑤ 가락바퀴와 뼈바늘을 이용하여 옷을 만든 것 역시 신석기시대의 일이다.

 

 

 Q  02 – 위만조선(고조선)

정답> ⑤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 이르러서는 ······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좌장군이 두군대를 합하여 맹렬히 (가)을/를 공격하였다. 상 노인, 상 한음, 니계상 참, 장군 왕협 등이 서로 [항복을] 모의하였다. ·······[우거]왕이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 한음, 왕협, 노인이 모두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나라'는 고조선, 정확하게는 위만조선*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 일반적으로 왕조의 개창자를 국명으로 칭하지 않는 점에서 '위만조선'이라는 용어가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위만 왕조'나 '위만집권기의 고조선'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고 한다.

ㄱ.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한 것은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 대(재위 501-523)의 일이다.

ㄴ.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진대법을 실시한 것은 고구려 제9대왕인 고국천왕 대(재위 179-197)의 일이다(194, 고국천왕16).

ㄷ. 진번과 임둔을 복속시켜 세력을 확장한 것은 위만 집권 시기이다(기원전 2세기 전반). 이때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한다.

ㄹ. 살인, 절도 등의 죄를 다스리는 범금 8조가 있었던 나라는고조선(위만조선)이다.

위만조선(고조선)에 대한 설명으로 에서 옳은 것은, 'ㄷ과 ㄹ'이다.

 

 

 Q  03 – 초기 국가, 동예

정답> ③

'(가)의 사회와 경제'라는 제목 아래 풍습으로 '산천을 중시하며, 산과 내마다 읍락의 경계가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 다른 읍락을 침범하면 소, 말 등으로 변상하게 하는 책화(責禍)가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특산물로 '낙랑의 단궁이 그 땅에서 나고, 바다에서는 반어피가 산출된다. 무늬 있는 표범과 과하마 등이 유명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가) 나라'는 초기 국가, 동예임을 알 수 있다. 동예에는 읍군이나 삼로라는 지배자[군장]가 있었다.

오답 해설>

① 신성 지역인 소도가 존재한 나라는 삼한이다.

② 정사암에 모여 재상을 선출한 나라는 백제이다(정사암 회의).

④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연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이다.

⑤ 도둑질한 자에게 12배로 배상하게 한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와 고구려이다(1책 12법).

 

 

 Q  04 – 신라 신문왕

정답> ⑤

'용이 검은 옥대를 바쳤다. ······ 왕이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금·옥으로 보답하고,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서 바다로 나오자, 산과 용은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이어 '왕이 감은사에서 유숙하고 ······ 행사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하였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 비가 오고 비올 때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파도가 평온해졌다,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유명한 '만파식적 설화'로, 자료 속 ‘용(龍)’은 신라의 제30대 왕인 문무왕(재위 661-681)이고, '왕'은 제31대 왕인 신문왕(재위 681-692)을 가리킨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흩어져 있던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의 마음[민심]을 통합해 나라의안정을 꾀하려는 호국 사상이 담겨져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문왕은 즉위 직후인 원년에 김흠돌을 비롯한 진골 귀족 세력을 숙청하였다(681, 김흠돌의 난).

오답 해설>

① 병부와 상대등을 설치한 신라의 왕은 제23대 왕인 법흥왕(재위 514-540)이다(각 517/531).

②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복속한 신라의 왕은 제22대 왕인 지증왕(재위 500-514)이다(512, 지증왕 13).

③ 마립간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신라의 왕은 제17대 내물(재위 356-402)이다.

④ 매소성 전투에서 당의 군대를 격파한 신라의 왕은 문무왕이다(675, 문무왕 15).

 

 

 Q  05 – 살수 대첩

정답> ②

(가)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인 한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성문을 닫고서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 군사가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사람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왕이 어찌할 바를 몰라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니,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해쳤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여기서 고구려 왕 거련은 곧 고구려의 제20대 왕인 장수왕(재위 413-491)이고, 피살된 왕은 백제의 21대 왕인 개로왕(재위 455-475)으로, 제시된 자료 속 사건은 고구려 장수왕이 475년 백제의 도읍인 한성(위례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사건을 가리킨다. 이로써 백제의 한성시대는 끝나고 웅진(공주)시대가 시작되었다.

(나)에는 '여러 장수가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 60일 동안 50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토산을 쌓았다. 토산의 정상은 성에서 몇 길 떨어져 있고 성 안을 내려다 볼수 있었다. 도중에 토산이 허물어지면서 성을 덮치는 바람에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3일이 지나도록 이길수 없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당 태종의 고구려 침략으로 벌어진 안시성 전투임을 알 수 있다(645, 고구려 보장왕 4).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의 수대를 물리친 것은 영양왕 23년인 612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미천왕이 서안평을 점령한 것은 재위 12년인 311년의 일이다.

③ 고국원왕이 백제(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으로 전사한 것은371년의 일이다.

④ 관구검이 이끄는 위의 군대가 고구려를 침략한 것은 동천왕18년인 244년의 일이다. 이때 고구려의 환도성이 함락되었다.

⑤ 광개토 대왕이 군대를 보내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한 것은 재위 10년인 400년의 일이다.

 

 

 Q  06 – (금관)가야

정답> ⑤

'문화재청이 김해 대성동과 양동리 고분에서 출토된 목걸이 3점에 대한 보물 지정을 예고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유물은 김수로왕이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가)의 수준 높은 공예 기술을 보여준다. 또한 출토지가 명확하고 보존 상태가 온전하여 학술 및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나라'는 (금관)가야임을 알수 있다. 가야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과 왜 등에 수출하였다.

오답 해설>

① 골품에 따라 관등 승진에 제한이 있었던 나라는 신라이다.

② 만장일치제로 운영된 화백 회의가 있었던 나라 역시 신라이다.

③ 여러 가(加)들이 별도로 사출도를 주관한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이다.

④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한 나라는 신라이다.

 

 

 Q  07 – 백제 성왕의 업적

정답> ⑤

'이것은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석조 사리감이다. 이 사리감에 새겨진 글을 통해 능산리 절터가 관산성에서 전사한 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왕'은 백제의 제26대 왕인 성왕(재위 523-554)임을 알 수 있다. 성왕은 재위 29년인 551년에 신라의 진흥왕과 연합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되찾았다.

오답 해설>

①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한 왕은 백제의 제30대 왕인 무왕(재위 600-641)이다(639, 무왕 40).

②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한 왕은 백제의 제15대 왕인 침류왕(재위 384-385)이다(384, 침류왕 원년).

③ 윤충(?~?)을 보내 대야성을 함락하게 한 왕은 백제의 제31대 왕인 의자왕)재위 641-660)이다(642, 의자왕 2).

④ 고흥(?~?)에게 서기를 편찬하게 한 왕은 백제의 제13대 왕인 근초고왕(재위 346-375)이다(375, 근초고왕 30).

 

 

 Q  08 – 발해

정답> ②

'(가), 남북국 시대를 열다'는 제목 아래, ' 동모산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우다', ' 당의 등주를 공격하고 요서에서 격돌하다', ' 일본에 국서를 보내어 고려 국왕이라 칭하다'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국가'는 발해임을 알 수 있다. 발해의 중앙 관제는 3성 6부로(문왕 때), 정당성의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오답 해설>

① 9서당 10정의 군사 조직을 갖춘 국가는 통일 신라이다(687,신문왕 7).

③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해 외사정을 파견한 것은 신라 문무왕13년인 673년의 일이다.

④ 위화부 등 13부를 두어 행정 업무를 분담한 국가는 통일 신라이다.

⑤ 마진이라는 국호와 무태라는 연호를 사용한 국가는 후고구려이다(904).

 

 

 Q  09 – 견훤

정답> ②

'(가)은/는 상주 가은현 사람이다. ······ [왕의] 총애를 받던 측근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러 기강이 문란해졌다. 기근까지 겹쳐 백성들이 떠돌아다니고, 여러 도적들이 봉기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에 (가)이/가 몰래 [왕위를] 넘겨다보는 마음을 갖고 ······ 드디어 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아직 감히 공공연하게 왕을 칭하지는 못하였다.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그 백성들이 환영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상주 가은현 사람'이라는 점, '무진주(지금의광주)'와 '완산주(지금의 전주)'라는 부분에서 제시된 '(가) 인물'은 900년에 후백제를 세운 견훤(867~936)임을 짐작할 수있다.

ㄱ. 후백제는 건국 후 남중국의 후당, 오월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옳은 설명이다.

ㄴ. 광평성을 비롯한 각종 정치 기구를 마련한 인물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918)이다(904). 틀린 설명이다.

ㄷ. 신라의 금성을 습격하여 (신라의 제55대 왕인) 경애왕(재위924-927)을 죽게 한 인물은 견훤이다(927). 옳은 설명이다.

ㄹ.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의 규범을 제시한 인물은 고려의 태조 왕건이다(936, 태조 19). 틀린 설명이다. 따라서 에서 견훤에 대한 옳은 설명은, 'ㄱ과 ㄷ'이다.

 

 

 Q  10 – 고려 성종(시무 28조)

정답> ⑤

'내 몸은 비록 궁궐에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백성에게 있노라. 지방 수령들의 눈과 귀를 빌어 백성의 기대에 부합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에 우서(虞書)의 12목 제도를 본받아 시행할 터이니, 주나라가 8백 년간 지속되었듯이 우리의 국운도 길이 이어질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우서의 12목제도를 본받아 시행'한다는 부분에서 제시된 '왕'은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절도사)를 파견한 고려의 제6대 왕, 성종(재위981-997)임을 알 수 있다(983, 성종 2).

고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982, 성종 원년).

오답 해설>

① 천수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왕은 고려 태조(재위918-943)이다(918, 고려 태조 원년).

② 관학을 진흥하고자 양현고를 설치한 왕은 고려의 제16대 왕인 예종(재위 1105-1122)이다(1119, 고려 예종 14).

③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관리를 채용한 왕은 신라의 제38대왕인 원성왕(재위 785-798)이다(788, 신라 원성왕 4).

④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을 수복한 왕은 고려의 제31대 왕인 공민왕(재위 1351-1374)이다(1356, 고려 공민왕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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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11 – 원 간섭기의 관제 격하

정답> ③

'이곳은 김방경(1212~1300)의 묘입니다. 그는 개경 환도 이후 몽골의 간섭이 본격화된 이 시기에 여·몽 연합군의 고려군 도원수로 일본 원정에 참여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시기'는 원 간섭기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원 간섭기는 일반적으로 1270년(원종 11)부터 1256년(공민왕5)까지로 본다(다른 주장 있음).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은두 차례 이루어졌는데 모두 실패하였다[1차 원정은 1274(원종11), 2차 원정은 1281(충렬왕 7)].원 간섭기에 고려의 관제가 격하되었는데,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은 첨의부로 개편되었다(2성 6부 → 1부 4사).

오답 해설>

① 삼수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이 창설된 것은 조선 선조 26년인 1593년의 일이다.

② 삼군부가 부활하여 군국 기무를 전담한 것은 조선 고종 2년인 1865년의 일이다.

④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초계문신제가 시행된 것은 조선 정조5년인 1781년의 일이다.

⑤ 국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비변사가 (임시로 처음) 설치된것은 조선 중종 5년인 1510년의 일이다(3포 왜란 발생 → 3포폐쇄). 을묘왜변이 발생한 명종 10년인 1555년에 상설 기구화되었다.

 

 

 Q  12 – 삼국유사

정답> ①

'(가) 범어사본, 국보로 승격'이라는 제목 아래 '부산 범어사가 소장한 (가) 권4~5가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번에 국보로 승격된 범어사 소장본은 일연이 저술한 (가)의 현존 판각본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미 국보로 지정된 판각본의 누락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문화재정 관계자는 밝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역사서'는 일연(1206~1289)이 1285년경(고려 충렬왕 11)* 편찬한 삼국유사임을 짐작할 수 있다. * 삼국유사 편찬 연도를 지금까지는 1281년(고려 충렬왕 7)로 표시하였으나, 불교 전문 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라 이제부터는 1285년경(고려 충렬왕 11)으로 표시함. 삼국유사에는 단군의 건국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오답 해설>

② 사초, 시정기 등을 바탕으로 편찬된 역사서는 '실록'이다.

③ 왕명에 의해 고승들의 전기를 기록한 역사서는 각훈(?~?)의해동고승전이다(1215, 고종 2).

④ 삼국유사는 본기, 열전 등 기전체 형식으로 서술된 것이 아니라 설화를 중심으로 한 기사본말체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⑤ (장편) 서사시[5언시] 형태로 고구려 계승 의식이 반영된역사서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다(1193, 고려 명종 23). 무신집권기라는 사회 혼란 속에서 고려의 역사 전통을 고취할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Q  13 – 고려 광종 대의 모습

정답> ④

왼쪽 말풍선에 '얼마 전 왕께서 친히 위봉루에 나가 과거 급제자를 발표하셨다'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한림학사 쌍기가 이번에 처음 치러진 과거의 지공거를 맡았다' 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왕'은 고려의 제4대 왕인 광종(재위 949-975)임을 알 수 있다. 광종은 재위 7년인 956년에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였다.

오답 해설>

① 녹과전이 시행된 것은 고려 원종 12년인 1271년의 일이다. 녹과전은 경기 8현에 한정하여 수조권을 지급한 토지이다.

② (일종의 독서당인) 만권당이 설치된 것은 고려 충숙왕 원년인 1314년의 일이다. 상왕인 충선왕이 원의 연경에 세웠다.

③ 주전도감이 설치된 것은 고려 숙종 2년인 1097년의 일이다.

⑤ 금속 활자로 직지심체요절이 인출된 것은 고려 우왕 3년인 1377년의 일이다(충북 청주 교외의 흥덕사).

 

 

 Q  14 – 고려 시대의 불상

정답> ②

'불상으로 보는 불교 문화 사진전'이라는 제목 아래 '이 실에서는 ○○ 시대 불상의 사진을 전시합니다. ○○ 시대에는 대형철불이 유행하였으며,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처럼 거대한 불상이 조성되기도 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선지 ②는 유명한 경주 석굴암 본존불이다. 신라 경덕왕 10년(751) 불국사가 창건될 시기에 같이 조성되었다.

오답 해설>

① 광주 춘궁리 철불로 고려 초기의 불상이다. 이전까지 석불, 금동불이 주류를 이루다가 고려 초인 10세기 말부터 철불이 유행하였다.

③ 안동 이천동 마애여래 입상으로, 역시 고려 초기의 불상이다(11세기경 제작 추정), 불두(佛頭)를 따라 제작하여 불신(佛身)이 새겨진 암벽 위에 얹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④ 영주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이다. 신라 시대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며, 흙으로 만들어졌다.

⑤ 하남 교산동 마애약사여래 좌상이다. 질병에서 모든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약사불을 형상화하였다. 역시 고려 초기의 불상이다(977, 고려 경종 2).

 

 

 Q  15 – 최충헌

정답> ④

한국사테이터베이스 사이트라는 제목 아래 '고려사절요'를 검색하는 창이 제시되어 있다. 명종 26년(1196) 4월에 '이의민을 제거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명종 26년 5월에 '봉사 10조를 지어 바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신종 3년(1200) 12월에는 '도방을 설치하다'는 내용이, 희종 2년(1206) 3월에는 '진강후로 책봉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인물은 최씨 무신 정권기를 연 최충헌(1149~1219)임을 알 수 있다. 최충헌은 고려 희종 5년인 1209년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스스로 교정별감이 되어 인사, 재정 등 국정 전반을 장악하였다. 최충헌은 집권 시 2명의 왕(명종과 신종)을 폐하고, 4명의 왕(신종과 희종, 강종과 고종)을 세우는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오답 해설>

① 서경에서 난을 일으키고 국호를 대위로 한 인물은 묘청(?~1135)이다(1135, 고려 인종 13). 연호를 천개, 자신들의 군대를 천견충의군이라 하였다.

② 화약과 화포 제작을 위한 화통도감 설치를 건의한 인물은 최무선(1325~1395)이다(1377, 고려 우왕 3).

③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로 이동하여 대몽 항쟁을 펼친 인물은 배중손(?~1271)이다(1170, 고려 원종 11).

⑤ 전민변정도감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권문세족을 견제한 인물은 신돈(?~1371)이다(1366, 고려 공민왕 15).

 

 

 Q  16 – 고려의 대외 항쟁

정답> ①

(가)에 '양규가 이수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석령까지 추격하여 2,500여 명의 머리를 베고 사로잡혔던 남녀 1,000여 명을 되찾아 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무신 양규(?~1011)가 활약한 것은 거란의 제2차 침입 때의 일이다(1010, 고려 현종 원년). 이때 별장 김숙흥(?~1011)과 함께 무로대, 이수, 석령, 여리참등에서 기습하여 7전 7승하고 백성 1만여 명을 구하였다.

(나)에는 '윤관 등이 여러 군사들에게 내성(內城)의 목재와 기와를 거두어 9성을 쌓게 하고, 변경 남쪽의 백성을 옮겨 와 살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윤관(?~1111)이 동북 9성을 쌓은 것은 1107년(고려 예종 2)의 일이다.

(다)에는 '적군이 30일 동안 귀주성을 포위하고 온갖 방법으로 공격하였으나, 박서가 임기응변으로 대응하여 굳게 지켰다. 이에 적군이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서북면 병마사) 박서가 귀주성을 지킨 것은 몽골의 제1차 침입 때의 일이다(1231, 고려 고종 18)(귀주성 전투).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나)-(다)'가 된다.

 

 

 Q  17 – 고려 시대의 경제 상황

정답> ④

위의 자료에는 '토지의 비옥함과 척박함을 구분하여 문무백관에서 부병(府兵),. 한인(閑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과(科)에 해당하는 토지[즉 '전지']를 주고, 또 과에 따라 땔나무를 구할 땅[즉, '시지']을 주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곧 고려 시대 때의 전시과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래의 자료에는 '도평의사사에서 방을 붙여 알리기를, 지금부터 은병 1개를 쌀로 환산하여 개경에서는 15~16석, 지방에서는 18~19석의 비율로 하되, 경시서에서 그 해의 풍흉을 살펴그 값을 정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은병[활구]이 발행된 것은 고려 숙종 6년인 1101년의 일이다.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한 것은 고려 때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모내기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② 덕대가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한 것 역시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③ 면화, 담배 등이 상품 작물로 재배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⑤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어 전세를 거둔 것은조선 전기의 일이다[전분6등법, 1444(조선 세종 26)].

 

 

 Q  18 – 선농단[종묘]

정답> ②

'답사 계획서'라는 제목 아래 주제로 '조선 왕의 자취를 찾아 길을 걷다'가 제시되어 있다. 이어 1일차로 '(가) 경복궁 → (나)종묘'가 2일차로 '(다) 남한산성 → (라) 수원 화성'이, 3일차로'(마) 영릉 → 신륵사'가 나와 있다. 국왕이 신농, 후직에게 풍년을 기원하던 의례를 행한 곳은 선농단(先農壇)으로(조선 태조),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종묘는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이다.

오답 해설>

① 조선 건국 이후 한양으로 천도한 것은 태조 3년인 1394년10월의 일이다(경복궁).

③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신하여 청과 항전을 벌인 곳은 남한산성이다(1636, 인조 14).

④ 장용영 외영이 창설된 곳은 수원 화성이다(1793, 정조 17).장용영 내영은 도성을 중심으로, 장용영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⑤ 훈민정음이 창제된 것은 세종 25년인 1443년의 일이다. 여주 영릉은 세종대왕릉이다. 여주 신륵사는 영릉의 원찰(願刹)*이기도 하였다.

* 원찰(願刹) : 망자의 화상이나 위패를 모시고 망자의 명복을 빌기위해 건립한 사찰. 원당(願堂) 또는 비보(裨補)라 부르기도 한다.

 

 

 Q  19 – 명에 대한 조선의 정책

정답> ③

작품명 '의순관영조도'가 제시되어 있고, '이 나라 사신이 만력제(신종)의 등극을 알리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있던 의순관에 도착하는 모습을 그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조선의 관리들이 예를 갖추어 의순관 앞에서 사신 일행을 맞이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만력제(신종)은 중국 명(明)의제13대 황제(재위 1572-1620)로, 이를 통해 제시된 '이 나라' 는 명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의주는 중국에 대한 외교활동의 요지였으며, 떄문에 많은 그림과 시문이 산출되었다. '의순관영조도'는 1572년 10월, 명의 사신을 조선의 관리들이 맞아들이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조선은 건국 초인 태조 때 삼봉 정도전(1342~1398)을 중심으로 (명에 대한) 요동 정벌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오답 해설>

① 광군을 조직하여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 것은 고려 정조때이다(947, 정조 2).

② 한성에 동평관을 두어 (왜의) 무역을 허용한 것은 조선 태종 때이다(1407, 태종 7).

④ (왜와) 기유약조를 체결하고 부산에 왜관을 설치한 것은 조선 광해군 원년인 1609년의 일이다.

⑤ 포로 송환을 위하여 사명대사 유정(1544~1610)을 회답 겸쇄환사로 파견한 것은 조선 선조 37년인 1604년의 일이다.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를 만나강화를 맺고 이듬해에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하여 귀국하였다.

 

 

 Q  20 – 추사 김정희

정답> ⑤’

이곳은 (가)이/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머물럿던 장소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세한도를 그렸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추사 김정희(1786~1856)임을 알 수 있다. 세한도는 국보 제180호로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책을 보내준 제자 이상적(1804~1865)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그렸다고 전해진다(1844, 헌종 10).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장무상망(長毋相忘)]는 인장을 통해 그림을 그린 추사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에서)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처음으로 고증하였다(1852, 철종 3).

오답 해설>

① 100리 척을 사용하여 동국지도를 제작한 인물은 정상기(1678~1752)이다(1740년대).

② 무한 우주론을 주장한 의산문답을 집필한 인물은 담헌 홍대용(1731~1783)이다(1766, 영조 42).

③ 명에서 천리경, 자명종, 홍이포 등을 들여온 인물은 호정 정두원(1581~?)이다(1631, 인조 9). 명에 진주사로 갔다가 귀국할 때 가져왔다. 마테오 리치의 천문서, 직방외기, 서양국풍속기등의 서적도 같이 가져왔다.

④ 침구술을 집대성하여 침구경험방을 저술한 인물은 허임(1570~1647)이다(1644, 인조 22).

 

 

 Q  21 – 관찰사

정답> ④

'이 그림은 평양에 새로 부임한 (가)을/를 환영하는 모습을 묘사한 부벽루연회도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가)은/는감사 또는 방백이라고도 불리었는데, 대개 종2품 이상의 고위관리가 임명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조선 시대에 각 도에 파견되어 지방 통치의 책임을 맡았던 최고의 지방 장관인 '관찰사'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관찰사는 관내 군현의 수령을 감독하고 근무 성정을 평가하였다.

오답 해설>

① 간관으로서 간쟁과 봉박을 담당한 이들은 사간원 소속 관리들이다.

② 6조 직계제의 실시로 권한이 약화된 이들은 3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포함한 의정부 소속 관리들이다.

③ 호장, 기관, 장교, 통인 등으로 분류된 이들은 향리들이다.

⑤ 출신지의 경재소를 관장하고 유향소 품관을 감독한 이들은 중앙의 고위 관리들이다.

 

 

 Q  22 – 천주교 박해 사건

정답> ①

(가)에 '한영규가 아뢰기를, 서양의 간특한 설이 윤리와 강상을 없애고 어지럽히니 어찌 진산의 권상연, 윤지충 같은 자가 또 있겠습니까? 제사를 폐하고 위패를 불태웠으며, 조문을 거절하고 그 부모의 시신을 내버렸으니 그 죄가 매우 큽니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최초의 천주교 탄압 사건인 '진산 사건'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1791, 정조 15). 전라도진산(珍山)의 두 선비 권상연(1750~1791), 윤지충(1759~1791)이 제시된 대로 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워 발생한 사건으로, '신해박해'라고도 부른다.

(나)에는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아! 통분스럽습니다.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의 죄가 무거우니 이를 어찌 다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사학(邪學)이란 것은 반드시 나라에 흉악한 화를 가져오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조선 순조 원년인 1801년에 발생한 신유박해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승훈(1756~1801)은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세례 교인, 세례명 베드로)이다.

(다)에는 '의금부에서, 죄인 남종삼은 명백한 근거도 없이, 러시아에 변란이 있을 것이고 프랑스와 조약을 맺을 계책이 있다면서 사람들을 현혹하였습니다. 감히 나라를 팔아먹고자 몰래 외적을 끌어들이려 하였으니, 그 죄는 만 번을 죽여도 모자랍니다. 죄인이 자백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배경지식이 좀 필요한 사료로, 천주교 순교자 남종삼(1817~1866)(세례명 요한)과 관련된 천주교 박해 사건은 병인박해이다(1866, 고종 3).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나)-(다)'가 된다.

 

 

 Q  23 – 조선 인조의 정책

정답> ④

'호패법 재실시 발표'라는 제목 아래 '금일, 왕이 호패법을 다시 시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는 문란해진 군적을 정비하고 이괄의난 이후 심상치 않은 백성들의 동태를 점검하기 위한 것으로보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호패법은 반정(反正) 직후부터 논의되어 왔으나, 새로 군역에 편입될 백성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지금까지 시행이 미루어져 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왕'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재위 1623-1649)임을 알 수 있다. 호패법은 태종 13년인 1413년에 처음 시행되었으며, 백성들의 호응이 좋지 않아숙종 초까지 5차례나 중단되었다. 인종 때 호패법 재실시 교지가 내려진 것은 1626년의 일이다(인조 4).전세를 1결당 4~6두로 고정하는 영정법이 제정된 것은 조선 인조 13년인 1635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공신에게 공로와 인품에 따라 역분전이 지급된 것은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의 일이다. ②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고자 삼정이정청이 설치된 것은 조선 철종 13년인 1862년의 일이다. ③ 시전 상인의 특권을 축소하는 신해통공이 단행된 것은 조선 정조 15년인 1791년의 일이다.

⑤ 1년에 2필씩 걷던 군포를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이 시행된 것은 조선 영조 26년인 1750년의 일이다.

 

 

 Q  24 – 농사직설

정답> ③

'한국사 과제 안내문'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에 제시된 조선의 농업 서적 중 하나를 선택하여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구황촬요, 금양잡록, 농사직설, 산림경제, 임원경제지' 가 제시되어 있다. 참고로 구황촬요는 흉년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책으로, 일종의 구황서(救荒書)이다(1554, 명종 9).정초, 변효문 등이 (왕명을 받아)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을 종합하여 편찬한 농업 서적은 농사직설이다(1429, 세종 11). 관찬(官撰)으로 간행되었다.

오답 해설>

① 목화 재배와 양잠 등 중국 화북 지방의 농업을 소개한 농업서적은 농상집요이다. 이 책은 고려 때 이암(1297~1364)이 원으로부터 수입한 책이다(1372, 고려 공민왕 21).

② 인삼, 고추 등의 상품 작물 재배법과 원예 기술을 수록한 농업 서적은 산림경제이다(1715년경, 숙종 41). 유암 홍만선(1643~1715)의 저술로 간행되지는 못하였고,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영향을 주었다.

④ 농촌 생활을 위한 백과사전으로 풍석 서유구(1764~1845)가저술한 농업 서적은 임원경제지이다(1827, 순조 27).

⑤ 사숙재 강희맹(1424~1483)이 손수 농사를 지은 경험과 견문을 종합하여 서술한 농업 서적은 금양잡록이다(1492, 성종23). 금양이라는 모범 농장을 예로 들어 농부의 경험담을 기록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강희맹이 공직에서 은퇴한 후 경기도 금양현(지금의 경기도 시흥시·광명시와 서울특별시 금천구 지역)에 묘막을 짓고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그곳 농부들과의 대화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지었다(1475~1483년 사이 저술)

 

 

 Q  25 – 서계 박세당

정답> ⑤

맨 왼쪽 말풍선에 '색경을 편찬한 인물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는 말이 나와 있다. 가운데 말풍선에는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려 당시 학계에서 배척당했다'는 말이 나와 있다. 색경을 편찬하고(1676, 숙종 2),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린 인물은 바로 서계 박세당(1629~1703)이다. 박세당은 소론으로, 유학 경전을 주자와 달리 해석한 사변록을 저술하였다. 참고로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린 또다른 인물로 남인인 백호 윤휴(1617~1680)가 있다.

오답 해설>

① 청으로부터 시헌력 도입을 건의한 인물은 잠곡 김육(1580~1658)이다(1653, 효종 4).

②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설계한 인물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1789, 정조 13).

③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조의제문을 작성한 인물은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이다(1457, 세조 3).

④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정하는 혼천의를 제작한 인물은 장영실(1390년경?~?)이다(1433, 세종 15). 이듬해인 1434년에는 자격루[물시계]를 만들었다.

 

 

 Q  26 – 성균관

정답> ④

'그림으로 보는 조선 국왕의 일생'이라는 제목 아래 '이 그림은 효명 세자가 (가)에 입학하는 의식을 그린 『왕세자입학도첩』중 「입학도」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효명 세자는 이날 궁을 나와 (가)에 도착하여 먼저 대성전의 공자 신위에 술을 올린 후, 명륜당에 가서 스승에게 교육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곧 조선의 최고 교육 기관, 성균관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효명 세자(1809~1830)는 1812년(손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817년 3월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또 1827년에 왕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청정 4년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효명 세자의 비가 이른바 '조대비'로 더 많이 알려진 신정 왕후(1808~1890)이다. 성균관은 생원시나 진사시의 합격자에게 입학 자격을 부여하였다.

오답 해설>

① 전문 강좌인 7재가 운영된 교육 기관은 고려의 국자감이다(1109, 예종 4).

② 전국의 부·목·군·현에 하나씩 설립된 교육 기관은 조선의 향교이다.

③ (그 규모와 지역에 따라) 중앙에서 교관인 교수나 훈도가 파견된 교육 기관 역시 향교이다.

⑤ 한어(漢語), 왜어(倭語), 여진어 등 외국어 교육을 담당한 조선의 교육 기관은 기술 교육 기관 중 하나인 사역원이다.

 

 

 Q  27 – 1차 수신사(김기수) 파견

정답> ①

(가)에는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는 하나 실은 양적(洋賊)입니다. 화친이 한번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의 서책과 천주의 초상이 교역하는 속에 섞여 들어오게 되고, 조금 지나면 전도사와신도가 전수하여 사학이 온 나라에 두루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유명한 면암 최익현(1833~1906)의 지부복궐척화의소[병자지부소(丙子持斧疏)]임을 알 수 있다(1876.1.24). 당시 최익현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체결이 협의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예전 임진왜란 직전에 지부상소를 올린 중봉 조헌(1544~1592년)의 예를 따라] 도끼를 가지고 광화문 앞에 가 이같이 상소하였다.

(나)에서는 '지금 조정에서는 어찌 백해무익한 일을 하여 러시아가 없는 마음을 먹게 하고, 미국이 의도하지 않았던 일을 만들어 오랑캐를 끌어들이려 하십니까? 저 황준헌이라는 자는 스스로 중국에서 태어났다고 하면서도, 일본을 위해 말하고 예수를 좋은 신이라 하며, 난적의 앞잡이가 되어 스스로 짐승과 같은 무리가 되었습니다. 고금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역시 유명한 1881년(고종 18) 2월의 영남만인소임을 알 수 있다(이만손, 강진규, 이만운 등이중심).

창산 김기수(1832~?)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것은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인 1876년 4월의 일이다(1차 수신사).

오답 해설>

②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한 것은 1885년(고종 22) 4월의 일이다(~1887.2).

③ 평양 관민이 제너럴 셔먼호를 붙태운 것은 1866년(고종 3)7월의 일이다.

④ 거중 조정 조항이 포함된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된 것은 1882년(고종 19) 5월의 일이다. 여기서 거중 조정이란 국제기구, 국가, 개인 따위의 제3자가 국제 분쟁을 일으킨 당사국사이에 끼어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일을 말한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제1조에 규정되었으며, 고종은 이후 이 조항에 기대어 미국에게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를 막아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⑤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한 것은 1866년(고종 3) 10월의 일이다.

 

 

 Q  28 – 조선 후기의 모습

정답> ④

'김상철이 말하기를, 도성 백성들의 생계는 점포를 벌여 놓고 사고파는 데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 기강이 엄하지 않아서 어물과 약재 등 온갖 물건의 이익을 중간에서 독점하는 도고(都庫)의 폐단이 한둘이 아닙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 대조(大朝)께서 여러 차례 엄하게 다스렸으나, 점차 해이해져 많은 물건의 가격이 폭등한 것은 오로지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평시서(平市署)* 등에서 적발하여 강하게 다스렸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도고의 폐단이 나타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 평시서(平市署) : 시전과 도량형 ·물가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한 관청이다. 조선 개국 당시에는 경시서(京市署)라 하다가 1466년(세조 12)에 평시서로 개칭되었다.

왜인들에게 3포[부산포, 염포(울산), 제포(진해)]를 개항한 것은 세종 8년인 1426년의 일이다(3포 개항).

오답 해설>

① 서얼이 청요직 통청을 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결국 철종 2년인 1851년에 신해허통이 이루어져 서얼들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는 법적 규제는 철폐되었다.

② 한글 소설이 널리 유행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③ 동국문헌비고가 간행된 것은 조선 영조 46년인 1770년의 일이다.

⑤ 장시에서 판소리가 행해졌던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Q  29 – 흥선 대원군

정답> ①'신(臣) 병창이 (가) 앞에 나아가 품의했더니, 이르기를 성묘(聖廟) 동서무(東西廡)*에 배향된 제현 및 충절과 대의가 매우빛나 영원토록 높이 받들기에 합당한 47곳의 서원 외에는 모두향사(享祀)를 중단하고 사액을 철폐하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지시를 받들어 이미 사액된 서원 중 앞으로 계속 보존할 곳 47개를 별단에 써서 들인 바 계하(啓下)**하시면 각 도에 알리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전국의 서원을 47곳을 제외하고 모두 철폐한 흥선 대원군(1820~1898)임을 알 수 있다(1864, 고종 원년).

* 동서무(東西廡): 성균관이나 향교의 문묘(文廟)에서 유현(儒賢)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대성전 앞 동쪽과 서쪽에 세운 건물[행각]을 아울러 이르는 말(즉 동쪽에 세운 건물이 동무, 서쪽에 세운 건물이 서무).

** 계하(啓下): 국왕의 재가

흥선 대원군은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건립한 것은 1871년(고종 8) 4월의 일이다. 비석 표면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주문(主文)을 큰 글자로 새기고, '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작은 글자로 새겼다.

오답 해설>

② 나선 정벌을 위하여 조총 부대를 파견한 것은 효종 5년인 1654년(변급)과 효종 9년인 1658년(신류)의 일이다.

③ 각 궁방과 중앙 관서의 공노비를 해방한 것은 순조 원년인1801년의 일이다.

④ 도성을 방비하기 위하여 총융청을 설치한 것은 인조 2년인1624년의 일이다.

⑤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한 것은 성종16년인 1485년의 일이다.

 

 

 Q  30 – 갑신정변

정답> ⑤

'이것은 우정총국이 업무를 시작하면서 발행한 국내 최초의 우표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당시 화폐 단위가 '문(文)'이어서 문위 우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김옥균 등이 주도한 (가)(으)로 우정총국이 폐쇄되면서 이 우표는 더이상 발행되지 못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고종 21년인 1884년 12월에 발생한 갑신정변임을 알 수 있다. 갑신정변은 청·일 간 톈진 조약 체결의 계기가 되었다(1885.4).

참고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한성 조약이 체결되었다(1885.1).

오답 해설>

① 건양이라는 연호를 제정한 것은 을미개혁 때의 일이다(1895.8~1896.2).

② 단발령 시행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은 을미 의병이다[단발령이 시행된 것은 1895년 11월(음력)].

③ 개혁 추진 기구로 교정청이 설치된 것은 1894년(고종 31) 6월의 일이다.

④ 구본신참에 입각하여 추진된 개혁은 광무개혁이다(1897~1904).

 

 

 Q  31 – 화폐 정리 사업

정답> ⑤

왼쪽 말풍선에 '백동화를 제일 은행권으로 바꾸려고 교환소에 갔더니, 터무니없이 낮게 평가해 바꿔 주더군'이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오른쪽 말풍선에는 '백동화는 곧 사용할 수 없을 테니 손해를 보더라도 교환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라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상황은 재정 고문 메가타의 주도로 이루어진 화폐 정리 사업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1905.7~1909.12). 메가타 다네타로(1853~1926)가 대한 제국에 재정 고문으로 오게 된 것은 제1차 한일 협약 때문이다(1904.8).

오답 해설>

① 금속류 회수령(시행규칙)이 공포된 1941년 10월의 일이다.

② 국채 보상 운동이 (대구에서부터) 전개된 것은 1907년 2월의 일이다(~1908.7).

③ 산미 증식 계획이 실시된 것은 1920년이다(~1934).

④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가 조직된 것은 1920년 8월의 일이다. 서울에서도 1923년 1월에 같은 명칭의 '조선 물산 장려회'가 조직되었다.

 

 

 Q  32 – 경인선 개통

정답> ⑤

'이 문서는 에디슨이 설립한 전기 회사가 프레이저를 자사의 조선 총대리인으로 위촉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회사는 총대리인을 통해 경복궁 내의 전등 가설공사를 수주하였고, 이에 따라 경복궁 내에 발전 설비를 마련하여 건청궁에 조선 최초의 전등을 가설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경복궁 건청궁에 조선 최초의 전등이 가설된 것은 1887년(고종 24) 3월 6일의 일이다. 노량진에서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이 개통된 것은 1899년(고종36) 9월의 일이다. 참고로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전차가 개통된 것은 이보다 4개월 전인 1899년 5월이다.

오답 해설>

① 알렌(1858~1932)의 건의로 광혜원이 세워진 것은 1885년(고종 22) 2월의 일이다.

② 박문국에서 한성순보가 발행된 것은 1883년(고종 20) 10월의 일이다.

③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이 설립된 것은 1883년(고종 20)3월의 일이다.

④ 정부가 외국어 교육 기관인 동문학을 세운 것은 1883년(고종 20) 8월의 일이다.

 

 

 Q  33 – 동학 농민 운동

정답> ②

'이곳은 공주 우금치 전적으로 (가) 당시 남접과 북접 연합군이북상하던 중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우금치는 도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으로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공주 우금치 전투'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제시된 '(가)'는 고종 31년인1894년에 전개된 동학 농민 운동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동학 농민군은 제1차 봉기 때인 1894년 4월(음력)에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파하였다(황토현 전투). 또한 2주여 일 뒤에는 장성 황룡촌에서 중앙 경군까지 격파한 후(황룡촌 전투)마침내 전주성을 점령하였다[1894.4.27(음력)].

오답 해설>

① 습재 이소응(1852~1930), 의암 유인석(1842~1915) 등이 주도한 운동은 을미의병이다.

③ 한성 조약이 체결되는 결과를 가져온 운동은 갑신정변이다(1885.1).

④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가 결의된 것은 1898년10월의 일이다(독립 협회의 자강 개혁 운동이자 자유 민권 운동).

⑤ 사건 수습을 위하여 환재 박규수(1807~1876)가 안핵사로파견된 것은 진주 농민 봉기 때이다(1862, 철종 13).

 

 

 Q  34 – 을사늑약 강요 결과

정답> ③

'사건 일지'라는 제목 아래 11월 10일에 '이토가 고종에게 일왕의 친서를 전달'하고 11월 15일에도 '이토가 고종을 접견하고 협상 초안을 제출'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11월 16일에는 ' 이토가 대한 제국 대신들에게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으며, 11월17일에는 '일본군을 동원한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조약 체결을 진행'하였으며, 마지막으로 11월 18일에는 '이토가 외부인(外部印)을 탈취하여 고종의 윤허 없이 조인'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사건은 1905년 11월 17일에 강요된 제2차 한일 협약, 이른바 '을사늑약'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제의 을사늑약 강요로 대한 제국은 외교권이 박탈되었고, 이듬해인 1906년 2월 통감부가 설치되었다(통감 정치).

오답 해설>

① 대한국 국제가 반포된 것은 1899년(고종 36) 8월의 일이다.

② 별기군 교관으로 일본인이 임명된 것은 1881년(고종 18) 5월의 일이다.

④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1896년(고종33) 2월의 일이다(아관 파천).

⑤ 제물포에서 러시아 함대가 일본 해군에게 격침된 것은 1904년 2월의 일이다(러일 전쟁 발발).

 

 

 Q  35 – 최재형

정답> ①

'(가)의 우수리스크 거주지'라는 제목 아래 '이 건물은 연해주의 한인 사회에서 명망이 높았던 독립운동가 (가)이/가 거주하였던 곳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는 1909년 대동공보 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11년에는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간하였다.

1918년 제2회 전로 한족 대표 회의에서 이동휘와 함께 명예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1920년 일본군이 자행한 4월 참변으로 우수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인물'은 최재형(1860~1920)임을 알 수 있다.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최재형이 한 일 중에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역) 의거를 지원한 것도 있다(1909.10)

오답 해설>

② (멕시코의 메리다 지역에) 숭무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인물은 지역회 회장 이근영(?~?)이다(1910.11).

③ 의열단의 활동 지침인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한 인물은 단재 신채호(1880~1936)이다(1923.1).

④ (미국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준비한 인물은 박용만(1881~1928)이다(1914.6).

⑤ (중국 상하이에서) 신한 청년당을 결성하고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인물은 우사 김규식(1881~1950)이다(1918.8).

 

 

 Q  36 – 신간회

정답> ⑤

'(가), 좌우가 힘을 합쳐 창립하다'는 제목 아래 기획 의도로 '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사회 단체인 (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살펴본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장면별 구성으로 '정우회 선언을 작성하는 장면',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되는 장면', '전국 주요 도시에 지회가 설립되는 장면', '순회 강연단을 조직하고 농민 운동을 지원하는 장면' 이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민족 협동 전선운동의 일환으로 1927년 2월에 창립된 신간회임을 알 수 있다. 신간회는 1929년 11월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생하자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동년 12월에 전국적인 민중 대회를 개최하고자 하였다.

오답 해설>

① 평양에 자기 회사(평양 자기 제조 주식회사)를 설립한 단체는 1907년 4월에 비밀리에 결사한 신민회이다(1908.10).

② 2·8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여 발표한 단체는 재일 동경 유학생들로 구성된 조선 청년 독립단이다(1918.12).

③ 제국신문이 발행되기 시작한 것은 1898년 8월의 일이다. 개신 유학자 묵암 이종일(1858~1925)에 의해 순국문판으로 발행하였으며, 주로 일반 대중과 부녀자 계층을 구독 대상으로 하였다. 민중 계몽과 한글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④ 어린이날을 제정하고(1923.5) 잡지 어린이를 간행한(1923.3) 단체는 천도교 소년회이다(1921.5).

 

 

 Q  37 – (대한)보안회

정답> ②

위의 자료에 '신(臣) 등이 들은 말에 의하면 일전에 외부(外部)에서 산림과 원야(原野)와 진황지(陳荒地)를 50년 기한으로 일본인에게 빌려주는 일을 정부에 청의(請議)하여 도하(都下)의 인심이 매우 술렁거리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아래의 자료에는 '종로에서 송수만, 심상진 씨 등이 각 부(府)·부(部)·원(院)·청(廳)과 각 대관가(大官家)에 알리노라. 지금 산림과 하천 및 못, 원야, 황무지를 일본인이 청구하니, 국가의 존망과 인민의 생사가 경각에 달려 있노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일본이 1904년 6월에 대한 제국 영토의 1/4에 해당하는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한 사실과 관련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기 위해 성암 송수만(1857~?), 심상진(?~?) 등은 (대한)보안회를 설립하였고, 결국 일본의 요구를 좌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1904.7).

참고로『해학유서』는 한말의 애국 계몽 운동가인 이기(1848~1909)의 시문집이다.

오답 해설>

① 105인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11년 9월의 일이다.

③ 독립문이 건립된 것은 1897년(고종 34) 11월의 일이다.

④ 조선 형평사가 (경남 진주에서) 설립된 것은 1923년 4월의 일이다.

⑤ 황국 중앙 총상회가 조직된 것은 1898년(고종 35) 10월의 일이다.

 

 

 Q  38 – 청산리 대첩

정답> ⑤

'이곳은 부산 해운대에 있는 애국지사 강근호(1888~1960) 길입니다. 그는 1920년 10월 백운평,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운 (가) 당시 북로 군정서 중대장으로 활약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북로 군정서(군), 대한 독립군, 대한 국민군 등 독립군 연합 부대가 10여 회의 전투 끝에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한 청산리 대첩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답 해설>

①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협력하여 진행한 전투로는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이 있다(1932~1933).

② 미국 전략 정보국(OSS)의 지원을 받은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 광복군이다(1940.9).

③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영향을 준 것은 1919년의 3·1운동이다.

④ 조국 광복회의 지원 아래 유격전으로 전개된 것은 동북 항일 연군이다(1936.3).

참고로 이듬해에 터진 '혜산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국 광복회는 큰 타격을 받아 붕괴하였다(1937.9~1938.9).

이로써 함경남도 국경 지방의 항일 조직과만주 항일 무장 투쟁 세력과의 연계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 혜산 사건 : 1937년 6월 김일성 부대의 보천보 습격 작전 이후 일본 관헌이 국내 연계 세력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조국 광복회 회원들을 무더기로 기소한 사건이다.

 

 

 Q  39 – 석오 이동녕

정답> ①

'이것은 국회 의사당의 중앙홀에 있는 (가)의 흉상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는 안창호, 양기탁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고, 국권 피탈 이후에는 서간도 삼원보로 건너가 경학사와신흥 강습소 설립을 주도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인물은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의 초대 의장을 맡았던 석오 이동녕(1869~1940)임을 알 수 있다.

오답 해설>

② 고종의 밀지를 받아 (대한) 독립 의군부를 조직한 인물은 돈헌 임병찬(1851~1916)이다(1912.9).

③ 독립 투쟁 과정을 서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한 인물은 백암 박은식(1859~1925)이다(1920.12).

④ 일제의 패망과 광복에 대비하여 조선 건국 동맹을 결성한 인물은 몽양 여운형(1886~1947)이다(1944.8).

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된 인물은 보재 이상설(1870~1917), 이준(1859~1907), 이위종(1887~?) 3인이다.

 

 

 Q  40 – 일제 강점기 말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

정답> ③

'이 사진은 을밀대 지붕 위에서 고공 농성을 벌이는 강주룡의 모습입니다. 그녀는 대공황 이후 열악해진 식민지 노동 환경에서 임금 삭감 등에 반대하며 평원 고무 공장 쟁의를 주도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사건은 자본가와 일제에 맞선 반제국주의 항일 투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평양의 을밀대 지붕 위에서 임금 삭감 등에 반대하며 '체공녀(滯空女)' 강주룡(1901~1931)이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 농성을 벌인 것은 1931년 5월 28일의 일이다. 전시 징용 정책(과 임금 체불 및 차별 대우)에 반대하여 동방광산 광부들이 투쟁한 것은 1942년 5월의 일이다(한 달 동안 휴업). 400여 명의 광부들은 악질 감독이 노동자들을 구타한 것을 계기로 취업을 거부하는 한편 광산 사무실과 선광장(選鑛場)을 비롯한 시설물들을 파괴하였다.

오답 해설>

① 조선 노동 총동맹과 조선 농민 총동맹이 창립된 것은 1927년 9월의 일이다.

② 전국 단위의 조직인 조선 노동 공제회가 조직된 것은 1920년 4월의 일이다.

④ 회사 설립 시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회사령(허가제 회사령)이 제정된 것은 1910년 12월의 일이다. 참고로 1920년 4월에 이르러 신고제(계출제) 회사령으로 전환되었다.

⑤ 일본인 감독의 한국인 구타 사건을 계기로 원산 총파업이일어난 것은 1929년 1월의 일이다(~4월까지 지속).

 

 

 Q  41 – 충남 천안

정답> ③

'○○시 근현대 역사 투어'라는 제목 아래 투어 일정이 제시되어 있다. 출발 후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 흉상'을 거쳐 '일본군 위안부 묘역, 망향의 동산'이 나와 있다. 이어 '국난 극복의 역사, 독립 기념관'과 '초혼묘와 사우(祠宇)*, 유관순 열사 사적지'가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시'는 충남 천안(시)임을 알 수 있다.

* 사우(祠宇):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나 영정을 모셔 두고 제향을 행하는 장소이다.

(1919년 4월 1일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아우내 장터는 유관순 열사(1902~1920)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같이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던 곳으로, 지금의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 있는 장터이다.

오답 해설>

① 4·3 사건으로 많은 주민이 희생된 지역은 제주도이다(1948).

②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한 지역은 충남 예산(충남 예산 덕산면 상가리)이다(1868.5).

④ (대한 국민 노인 동맹단 소속의) 강우규 의사(1855~1920)가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한 곳은 서울(역)이다(1919.9).

⑤ 지주 문재철의 횡포에 맞서 소작 쟁의가 발생한 지역은 전남 신안의 암태도이다(1923.8~1924.8).

 

 

 Q  42 – 심훈(소설 상록수)

정답> ①

왼쪽 말풍선에 '브나로드 운동을 소재로 소설 상록수를 쓴 사진속 인물에 대해 말씀해' 달라는 질문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사진 속 인물은 심훈(1901~1936)이다. 상록수는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된 심훈의 장편소설로,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소설 현상에 당선된 작품이기도 하다. 심훈은 1930년 3·1절을 맞아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던 당시의 감격을 되살려 저항시 '그날이 오면'을 지었다. 시집(표제작 '그날이 오면')을 1932년에 간행하려고 하였으나 조선 총독부의 검열 때문에 좌절되었고, 심훈 사후인 1949년에 가서야 유고집으로 간행되었다.

오답 해설>

② 근대극 형식을 도입한 토월회가 (일본 도쿄에서 도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것은 1923년 5월의 일이다(신극 운동단체). 박승희(1901~1964), 김기진(1903~1985) 등이 주도하였다.

③ 단성사에서 개봉된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 인물은 나운규(1902~1937)이다(1926.10).

④ 고대사 연구를 바탕으로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인물은 단재 신채호(1880~1936)이다(1931년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

⑤ 일제 강점기 농촌 현실을 묘사한 소설 고향을 연재한 인물은 이기영(1895~1984)이다. 조선일보에 1933년 11월부터 이듬해인 1934년 9월까지 연재되었다. '고향'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강하게 반영된 신경향파 소설이다.

 

 

 Q  43 – 조선어 학회

정답> ②

'조선말 큰사전 편찬 원고'라는 제목 아래 '(가)에서 조선말 사전 편찬을 위해 1929년부터 13년 동안 작성한 원고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 원고는 1942년 일제에 압수되었다가, 1945년 9월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단체'는 조선어 학회임을 알 수 있다(1931.12).

조선어 학회는 1933년 10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였다. 또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를 두고 1935년부터 표준어를 사정하여 이듬해인 1936년 10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간행하였다.

오답 해설>

① 국어 문법서인 대한문전을 편찬한 이는 구당 유길준(1856~1914)이다(1908).

③ 우리말 음운 연구서인 언문지를 저술한 이는 서파 유희(1773~1837)이다(1824, 순조 24).

④ 한글 연구를 목적으로 학부 아래에 설립된 것은 국문 연구소이다(1907.7).

⑤ 주시경(1876~1914)을 중심으로 국민을 정리하고 철자법을 연구한 단체가 바로 국문 연구소이다.

 

 

 Q  44 – 국민 대표 회의

정답> ⑤

(가)에는 '연통제 공소 공판, 히라야마 검사의 구형, 피고 37명에 대하여 징역형'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연통제라는 말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비밀 행정망인)연통제가 조직된 1919년 7월 10일 이후의 사실임을 짐작할 수있 다(~1921년 후반까지 연통제 유지, 제시된 신문 보도는 매일신보의 1920년 11월 19일자 기사).

(나)에는 '금년 1월 8일에 돌발한 앵전문 앞 대역 사건, 범인은 경성 출신 이봉창'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한인 애국단원 이봉창 의사(1901~1932)이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히로히토)에게수류탄을 던진 사건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기 위하여 국민 대표 회의가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것은 1923년 1월의 일이다(~6월).

오답 해설>

① 신규식 등이 (중국 상하이에서) 대동 단결 선언을 발표한 것은 1917년 7월의 일이다.

②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대일 선전 성명서를 공표한 것은1941년 12월 10일의 일이다.

③ 김구, 이시영 등이 (중국) 항저우에서 한국 국민당을 창당한 것은 1935년 11월의 일이다.

④ 충칭에서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한국 광복군이 창설된 것은 1940년 9월의 일이다.

 

 

 Q  45 – 조소앙(삼균주의)

정답> ④

'이 문서는 (가)이/가 마련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건국 강령 초안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건국 강령은 민족 운동의 방향과 광복 후 국가 건설의 지향을 담은 것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 헌장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이 초안에는 (가)이/가 고심하여 수정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인물'은 삼균주의를 제창한 조소앙(1887~1958)임을 알 수 있다. 조소앙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강조한 삼균주의를 제창하였다. 참고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이 (임시 정부 공보를 통해) 발표된 것은 1941년 11월 28일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대성 학교를 세우고 흥사단을 창립한 인물은 도산 안창호(1878~1838)이다(각 1908.9/1913.5).

②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여 친일파를 처단한 인물은 박상진(1884~1921)이다(1915.7).

③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한 인물은 약산 김원봉(1898~1958)이다(1932.10).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과 교섭하여 중국 난징 교외에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설립하였다.

⑤ 조선사회경제사에서 식민주의 사학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한 인물은 사회경제사학자 백남운(1897~1979)이다(1933).

 

 

 Q  46 – 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정답> ②

(가)의 제31조로 '입법권은 국회가 행한다.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으로써 구성한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제53조로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민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투표에 의하여 각각 선거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제55조로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제1차 개헌 헌법, 이른바 '발췌 개헌(안)'임을 알 수 있다(1952.7).

(나)의 제7조의2로 '대한민국의 주권의 제약 또는 영토의 변경을 가져올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 사항은 국회의 가결을 거친후에 국민투표에 부하여 민의원 의원 선거권자 3분지 2 이상의투표와 유효 투표 3분지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제55조로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단, 재선에 의하여 1차 중임할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마지막으로 부칙으로 '이 헌법 공포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 제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나)'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한 제2차 개헌,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안)'임을 알 수 있다(1954.11).

발췌 개헌은 이른바 부산 정치 파동을 거치는 가운데 국회에서기립 표결로 통과되었다(1952.5.25~1952.7.7). 1952년 5월 25일 공비 소탕이라는 구실로 임시 수도였던 부산을 포함한 경남, 전라남북도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오답 해설>

① 제헌 국회에서 제정된 헌법은 제헌 헌법이다(1948년 7월17일 공포, 제헌절).

③ 대통령의 국회의원 1/3 추천 조항을 담고 있는 헌법은 제7차 개헌, 이른바 '유신 헌법(안)'이다(1972.12).

④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제를 규정한 헌법은 제8차 개헌이다(1980.10).

⑤ 호헌 동지회(護憲同志會)가 결성된 것은 사사오입 개헌이 억지로 통과된 직후에 설립된 범야당 연합 모임에서이다(1954.11.29). 이승만 정부가 강행한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였으며, 이후 통합 야당의 창당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민주당의 창당으로 이어짐).

 

 

 Q  47 – 정전 협정 조인

정답> ④

판문점에서 6·25 전쟁 정전 협정이 조인된 것은 1953년 7월 27일의 일이다(1952년 7월의 발췌 개헌과 1954년 11월의 사사오입 개헌 사이의 시기에 해당).

오답 해설>

① 중화 인민 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2년 8월의 일이다(한·중 수교). 그보다 먼저 한·중 무역대표부가 1990년 10월에 교환 설치되었다. 참고로 한·소 수교가 이루어진 것은 1990년 9월이다.

②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6년 12월의 일이다.

③ 미국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파병이 시작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64년 9월의 일이다(~1973.3).

⑤ 미국과 한·미 상호 방위 원조 협정이 체결된 것은 1950년 1월의 일이다.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의 경제 및 군사 원조에 관한 협정(조약 제4호)이다. 참고로 대한민국과 미국 사이에 '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된 것은 1953년 10월 1일의 일이다. 명칭이 비슷하여 헷갈릴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Q  48 – 김대중 정부 시기의 사실

정답> ④

'대통령, 공명 선거와 사회 정책 방향 제시'라는 제목 아래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월드컵과 부산 아시안 게임 개최로 국운 융성의 한 해를 만들자고 강조하며, 공명한 대통령 선거와 지방자치 선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아울러 정부도 경제적 정의 실현과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여 중산층과 서민 생활 안정에 노력하겠다고 발표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정부'는 김대중 정부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1998.2~2003.2).

국민 기초 생활 보장법이 실시된 것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0년 10월의 일이다(제정은 1999년 9월).

오답 해설>

① 호주제가 폐지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8년 1월의 일이다.

② 대학 졸업 정원제가 시행된 것은 전두환 정부 시기인 1981년부터이다(~1987, 1980년 7월 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마련).

③ 노인 장기 요양 보험법이 제정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7년 4월의 일이다. 이듬해인 2008년 7월부터 시행되어 보험료 고지 및 급여의 개시가 이루어졌다(이때는 이명박 정부시기).

⑤ 중학교 무시험 진학 제도가 시작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69년의 일이다.

 

 

 Q  49 – 4․ 19 혁명

정답> ③

'이것은 대전 지역의 고등학생들이 장면 부통령 후보 유세를 기회로 삼아 시작한 3·8 민주 의거를 기리는 탑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3·8 민주 의거는 대구의 2·28 민주 운동, 마산의3·15 의거와 더불어 (가)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1960년에 발생한 '4·19 혁명'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대학 교수단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행진을 벌인 것은 1960년 4월 25일의 일이다('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시국 선언문 발표).

오답 해설>

①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여 일어난 민주화 운동은 1964년 6월의 '6 3 시위'이다.

②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내세운 민주화 운동은 1987년의 6월 민주 항쟁이다.

④ 3·1 민주 구국 선언을 통해 긴급 조치 철폐 등을 요구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것은 1976년 3월의 일이다(유신 반대 운동).

⑤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 민주화 운동은 1987년의 6월 민주 항쟁이다[제9차 개헌(1987.10)].

 

 

 Q  50 – 박정희 정부의 통일 노력

정답> ④

'광주 대단지 주민 5만여 명, 대규모 시위'라는 제목 아래 ' 지난 10일,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광주 대단지에서 5만여 명의 주민들이 차량을 탈취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이번 시위는 서울 도심을 정비하기 위하여 10만여 명의 주민들을 경기도 광주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는데 서울시가 처음 내건 이주 조건과 달리, 상하수도나 교통등 기반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채 강제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시위 과정에서 관공서와 주유소 등이 불에 탔고, 주민과 경찰 다수가 부상을 입었으며, 일부 주민들이 구속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기사의 사건은 1971년 8월 10일에 발생한 경기도 광주대단지(지금의 경기도 성남시) 사건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이주민 수만여 명이 정부의 무계획적인 도시 정책과 졸속 행정에 반발하며 도시를 점거하였다. (7·4 남북 공동 성명 결과) 남북 조절 위원회가 설치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71년 11월의 일이다(~1973.8).

오답 해설>

①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1년 9월의 일이다.

② 10·4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2007년 10월의 일이다.

③ 남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에 서명한 것은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1년 12월의 일이다.

⑤ 남북한의 교류 협력을 위한 개성 공업 지구 건설에 착수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3년 6월의 일이다(개성 공단 착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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