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01 - 신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
정답> ④
신석기 시대에는 빗살무늬 토기를 만들어 식량을 저장하였다.
오답 해설>
① 주로 (석회암) 동굴이나 (바위 그늘), 강가의 막집에서 (사람들이) 산 것은 구석기 시대의 일이다.
② 지배층의 무덤으로 고인돌을 축조한 것은 청동기 시대의 일이다.
③ 거푸집을 이용하여 세형동검을 제작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의 일이다.
⑤ 쟁기, 쇠스랑 등의 철제 농기구를 사용한 것 역시 초기 철기시대의 일이다.
Q 02 – 초기 국가, 고구려
정답> ①
'이 나라에는 왕이 있고 벼슬로는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부·우태·승·사자·조의·선인이 있으며, 존비(尊卑)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모든 대가들도 스스로 사자· 조의·선인을 두었는데, 그 명단은 모두 왕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모여 회의하여 즉시 사형에 처하고, 그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나라'는 초기 국가, 고구려임을 알 수 있다. 초기 국가, 고구려에는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창고가 있었다.
오답 해설>
② (매년)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부여이다.
③ 혼인 풍습으로 민며느리제가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옥저이다.
④ 읍락 간의 경계를 중시하는 책화가 있었던 나라는 초기 국가, 동예이다.
⑤ 제사장인 천군과 신성 지역인 소도가 존재한 나라는 삼한(三韓)이다.
Q 03 – 가야의 문화유산
정답> ③
'이곳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 10호분 발굴 조사 설명회 현장'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대형 덩이쇠 40매와 둥근고리큰칼, 화살촉 등 130여 점의 철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번 발굴로 김수로왕이 건국하였다고 전해지는 (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전망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가야임을 알 수 있다.
③은 가야의 철제 판갑옷과 투구이다.
오답 해설>
① 백제의 산수문전이다. 보물 제343-1호이고, 1937년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의 옛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산수문양을 얕은 부조(浮彫)로 판형을 떠서 구워 만들었다. 신선 사상을 바탕으로 전개된 산수문의 특징과 함께 초기 산수화의 시원적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단에는 수면을, 중간의 넓은 부분에는 선산(仙山)으로 생각되는 산악을, 상단에는 구름이 떠 있는 하늘을 표현하였고, 산악의 중앙 하단과 그 오른쪽 아랫 부분에는 건물과 스님 같은 인물이 묘사되어 있다. 둥근 삼산(三山) 형식의 토산(土山)은 약간 도톰하게 부푼 모양으로 처리하고, 윤곽은 선조(線彫)로 강조하여 나타냈다.
② 백제의 칠지도이다. 백제의 제14대 왕인 근구수왕(재위375-384)이 왕자로 있을 때 일본 사신을 통해 왜왕에게 보냈다(372, 근초고왕 27, 『일본서기』).
④ 백제의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묘수이다. 무덤을 수호하는 목적으로 무덤 속에 놓아둔 신상(神像)이다. 주로 짐승 모양을하고 있다.
⑤ 발해의 정혜 공주 묘 앞에 있었던 돌사자상이다.
Q 04 – 한강 유역 수복(백제와 신라)
정답> ⑤
(가)에는 '백제왕 모대가 사신을 보내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신라]왕은 이벌잔 비지(比智)의 딸을 보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나)에는 '신라를 습격하기 위해 왕이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구천(狗川)에 이르렀는데, 신라 복병을 만나 그들과 싸우다가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가)는 493년 신라(소지 마립간)와 백제(동성왕) 사이에 맺은 혼인 동맹[제2차 나제 동맹이라고도 함, 모대(牟大)는 백제 동성왕의 이름, 말다(末多) 또는 마제(摩帝)라고도 부름]을 가리키고, (나)는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이 전사한 것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백제(성왕)가 신라(진흥왕)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수복한 것은 551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고구려가 낙랑군을 축출한 것은 미천왕 14년인 313년의 일이다.
② 백제가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한 것은 침류왕 원년인 384년의 일이다.
③ 신라가 고구려의 도움으로 왜를 격퇴한 것은 내물 마립간 45년인 400년의 일이다.
④ 고구려가 동옥저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한 것은 태조왕 4년인 56년의 일이다.
Q 05 – 나당 동맹 결성
정답> ②
'당에 파견되었던 이찬 김춘추가 오늘 무사히 귀국하였는데, 김춘추가 그곳에서 큰 환대를 받았고, (당) 태종의 군사적 지원을 이끌어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김춘추의 대당외교 결과 '나당 동맹'이 결성된 것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나당 동맹이 결성된 것은 648년의 일이므로, 연표에서는 (나) 시기에 해당한다.
Q 06 – 신라 신문왕 대의 사실
정답> ③
재위 1년(원년, 681)에 '김흠돌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 죽임을 당하다'는 사실이 나와 있다. 재위 2년(682)에는 '국학을 세'웠고, 재위 5년(685)에는 '서원소경을 설치'하였다(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조직). 마지막으로 재위 9년(689)에는 '달구벌로 천도하려 한' 사실이 제시되어 있다. 달구벌은 지금의 대구로, 이상의 자료를 통해 제시된 '(가)'는 신라의 제31대 왕인 신문왕(재위 681-692)임을 알 수 있다. 신문왕은 재위 7년인 687년에 관료전을 지급하였고, 재위 9년인689년에는 녹읍을 폐지하였다.
오답 해설>
①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복속한 것은 신라 지증왕 13년인 512년의 일이다.
②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한 것은 신라 진흥왕 37년인 576년의 일이다.
④ 최고 지배자의 칭호를 마립간으로 한 것은 신라의 제17대 왕인 내물 때(재위 356-402)부터의 일이다(『삼국유사』).
참고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제19대 왕인 눌지 때(재위 417-458)부터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⑤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신라 법흥왕 14년인 527년의 일이다.
Q 07 – 원종과 애노의 난
정답> ②
왼쪽 말풍선에는 '이 탑은 진성 여왕 때 해인사 부근에서 있었던 전란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려고 세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최치원이 작성한 탑지(塔誌)를 보면 혼란스러웠던 이 시기 상황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배경지식이 필요한 문제로, 제시된 사진 속 탑은 경남 합천군 가야산에 있는 '해인사 길상탑'이다. 1965년 탑의 내부에서 157개의 소탑(小塔)과 최치원(857~?)이 지은 4장의 탑지석(塔誌石)이 발견되었는데[최치원의 '해인사 묘길상탑기(海印寺妙吉祥塔記)'], 여기에 진성 여왕(재위 887-897) 9년인 895년에 발생한 초적(草賊)의 약탈과 전란에서 불교 사원을 지키다 희생된 승려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삼층 석탑(길상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벌주에서) 원종과 애노의 난 등 (신라 전국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난 것은 신라 말의 일이다(889, 진성 여왕 3).
오답 해설>
① 빈민 구제를 위해 의창이 설치된 것은 고려 성종 5년인 986년의 일이다.
③ 복신과 도침이 주류성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은 661년의 일이다(661.9).
④ 묘청 등이 중심이 되어 서경 천도를 주장한 것은 1135년(고려인조 13)의 일이다.
참고로 이때는 서경 천도 운동이 일어난 때이며 서경 천도론은 이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넓게 보면 서경 천도론은 고려 태조 때부터 거의 모든 고려 왕들이 신봉하였던 풍수론인 '지덕쇠왕설(地德衰旺說)'*에 바탕을 두고 있다.
* 지덕쇠왕설: 지덕이 쇠퇴한 곳에서 왕성한 곳으로 도읍을 옮겨야만 왕실과 국가가 융성해진다는 설
⑤ 부처의 힘을 빌려 외침을 막고자 팔만대장경이 조판된 것은 1236년(고종 23)에서 1251년(고종 38)까지이다.
Q 08 – 발해
정답> ①'이것은 일본 나라현 헤이조큐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목간에 보이는 고려라는 명칭을 통해 일본은 이 국가를 고려, 즉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목간에는 '고려에 보낸 사절이 귀국하였으니, 천평보자 2년(758) 10월 28일 위계를 두 단계 올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국가'는 발해임을 알 수 있다. 758년은 발해 문왕 22년에 해당한다. 발해는 중정대를 두어 관리를 감찰하였다(중정대-감찰 기구).
오답 해설>
②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국가는 신라이다(536, 신라 법흥왕 23).
③ 군사 조직을 9서당 10정으로 편성한 국가 역시 (통일) 신라이다.(685, 신라 신문왕 5).
④ 골품에 따라 관직 승진에 제한을 둔 국가 역시 신라이다(신라법흥왕 대 골품제 정비).
⑤ 상수리 제도를 시행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한 국가 역시 신라이다(5세기 이전부터 실시 추정).
Q 09 – 경주의 문화유산
정답> ②
'답사 계획서'라는 제목하에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가 답사 주제로 나와 있다. 경로는 '천마총 → 첨성대 → 동궁과 월지 → 분황사지 → 불국사'가 제시되어 있다. 자장(590~658)의 건의로 건립된 것은 첨성대가 아니라 황룡사 9층 목탑이다(643, 선덕 여왕 12).
오답 해설>
① 천마도가 수습된 곳은 천마총 내부이다. 옳은 설명이다. 1973년 고분의 동쪽 중앙에서 2장의 장니[말다래] 천마도가 발견되었다.
③ (참)나무로 만든 14면체 주사위가 출토된 곳은 동궁과 월지(東宮과 月池)이다. 옳은 설명이다. 1975년 동궁과 월지 바닥에서 발견하였다. 14면체 주사위 주령구, 한자어로 '목제주령구(木製酒令具)'라고 한다.
④ 분황사지에는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탑이 남아 있다. 옳은 설명이다. 즉, 분황사지 모전 석탑이다(634, 선덕여왕 3).
⑤ 불국사 경내의 삼층 석탑(석가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옳은 설명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1966년 탑 2층 탑신부에서 사리함과 함께 발견되었다.
Q 10 – 후삼국의 통일(경순왕 김부의 귀부)
정답> ②
(가)에는 '태조는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公山)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서 크게 싸웠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태조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은 죽고 모든 군사가 패배했으며, 태조는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이 맞춰 싸운 공산 전투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927.11). 공산은 지금의 대구 팔공산 일대이다.
(나)에는 '[태조를] 신검의 군대가 막아서자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태조가 견훤과 함께 병사들을 사열한 후 ······ 신검이 양검, 용검 및 문무 관료들과 함께 항복하여 오니, 태조가 그를 위로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936년 9월에 있었던 일리천 전투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수 있다. 일리천은 지금의 경북 구미 선산에 있는 하천이며, 고려 왕건은 일리천 전투를 승리로 이끔으로써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경순왕 김부가 경주의 사심관이 된 것은 왕건에게 귀부한 직후의 일이다(935.11). 왕건은 항복해온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고 그 지방의 자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오답 해설>
① 최승로(927~989)가 시무 28조를 건의한 것은 고려 성종 원년인 982년의 일이다.
③ 대공(大恭)이 난이 일어난 것은 신라 혜공왕 4년인 768년의 일이다(『삼국사기』). 대공의 난이란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에 있던 대공(?~768)과 그의 아우 아찬(阿飡) 대렴이 무리를 모아 일으킨 난이다. 이를 시작으로 96각간(角干)이 왕궁파(친왕파)와 김대공파(반왕파)로 나뉘어 왕권을 놓고 싸운 이른바 '96각간의 난'이 이어졌다.
참고로 각간(角干)은 본래 신라의 최고 관등인 이벌찬(伊伐飡)을 지칭하는 용어이므로 96각간은 각간의 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이 난을 일으킨 귀족과 진압한 귀족 전체를 포함하여 일컫는 말이다.
④ 궁예(?~918)가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꾼 것은 911년의 일이다.
⑤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가 시행된 것은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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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1 – 삼별초
정답> ①
'이 지도는 개경 환도 결정에 반발하여 봉기한 (가)의 이동 경로를 나타낸 것입니다. 강화도와 진도에서는 배중손, 제주도에서는 김통정을 중심으로 항쟁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군사 조직'은 고려의 삼별초임을 알 수 있다. 삼별초는 고려 원종 11년인 1270년 개경으로의 환도령이 내려지자 이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 삼별초는 최씨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다. 최우(집권1219-1249)에 의해 만들어진 좌별초, 우별초와 최항 집권기(1249-1257)인 1254년(고종 41) 이후에 만들어진 신의군으로 조직되었다(1232~1273).
오답 해설>
②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창설된 군사 조직은 광군이다(947,고려 정종 2).
③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으로 구성된 군사 조직은 별무반이다(1104, 고려 숙종 9).
④ 유사시에 향토 방위를 맡는 예비군이었던 군사 조직은 조선의 잡색군이다(조선 세종 대에 정비). 서리, 잡학인, 신량역천인, 노비 등으로 구성되었다.
⑤ 옷깃 색을 기준으로 9개의 부대로 편성된 군사 조직은 신라의 9서당이다. 녹금서당·자금서당·비금서당은 신라인, 황금서당은 고구려인, 백금서당·청금서당은 백제인, 적금서당·벽금서당은 보덕국인[보덕성민(報德城民)], 흑금서당은 말갈인으로 구성되었다.
Q 12 – 고려의 관학 진흥책
정답> ②
'고려 시대의 교육'이라는 제목하에 '제1강 관학의 정비', '제2강 사학의 융성', '제3강 관학 진흥책'이 나와 있다. 이어 관학 진행책으로는 '국자감에 서적포를 설치하다'와 '(가)'가 제시되어 있다. 서적포(書籍鋪)는 일종의 출판 기관으로, 숙종 5년인 1101년에 설치되었다. 전문 강좌인 7재가 개설된 것은 예종 4년인 1109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당에 유학생을 파견한 것은 신라 때의 일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최초의 (견당) 유학생을 파견한 것은 선덕 여왕 9년인 640년의 일이다. 신라 후기에는 6두품 이하의 자제들이 당에 유학하였고, 그곳에서 과거를 보아 급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학기간은 10년 정도였으며, 기간이 차면 귀국하였다. 유학하는 학생 수가 많을 때에는 무려 100여 명에 달하였다.
③ 사액 서원에 서적과 노비를 지급한 것은 조선 명종 5년인 1550년부터의 일이다. 중종 38년인 1543년에 세워진 백운동 서원(풍기 군수 주세붕)이 최초의 사액 서원이 되었다.
④ 글과 활쏘기를 가르치는 경당이 설립된 것은 고구려 장수왕 15년인 427년의 일이다. 장수왕이 평양 천도를 단행한 직후 지방에 세운 교육 기관이다.
⑤ 관리 채용을 위해 독서삼품과가 시행된 것은 (통일) 신라 원성왕 4년인 788년의 일이다.
Q 13 – 금과의 사대[군신] 관계
정답> ③
'바야흐로 금이 번성하여 우리 왕조로 하여금 신하를 칭하게 하고자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중론이 뒤섞여 어지러웠는데, 공이 홀로 간쟁하기를, ······ 여진은 본래 우리 왕조 사람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하가 되어 천자를 조회하였고 국경 부근의 사람들은 모두 우리 왕조의 호적에 속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어찌 우리 왕조가 도리어 신하가 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당시에 권신(權臣)이 왕명을 멋대로 하였으므로 이에 신하를 칭하고 이로 인해 서표(誓表)를올렸다. 진실로 인종의 본심이 아니었으니 공이 심히 부끄럽고 슬프게 여겼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사료 속 상황은 금의 군신 관계 요구에 당시 권신인 이자겸(?~1126)의 굴욕 외교로 인하여 고려가 이를 받아들인 것을 가리킨다(1126, 고려 인종 4).
금은 고려의 이와 같은 '칭신상표(稱臣上表)'의 글을 받고는 앞으로 사신의 왕래에 관한 모든 의례(儀禮)는 요와의 구제(舊制)에 따르도록 한다는 기준을 제시하였다.
참고로 출처가 윤언이 묘지명으로 되어 있는 바 윤언이(?~1149)는 바로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한 후 동북 9성을 설치한 윤관(?~1111)의 아들이다.
연표에서 제시된 상황이 나타난 시기는 별무반 설치(1104)와 무신 정변(1170) 사이인 (다) 시기에 해당한다.
Q 14 – 도병마사
정답> ③
개요에 '고려의 회의 기구로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위 관료들이 모여 주로 국방과 군사 문제를 다루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대내적인 법제와 격식을 관장하는 식목도감과 함께 합의제로 운영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또 관련 사료로 '판사(判事)는 시중·평장사·참지정사·정당문학·지문하성사로 임명하였으며, 사(使)는 6추밀 및 직사 3품 이상으로 임명하였다. ······ 무릇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사(使) 이상의 관료가 모여서 의논하였으므로 합좌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가) 기구'는 도병마사임을 알 수 있다. 도병마사는 원 간섭기에 도평의사사로 개편되었다(1279, 충렬왕5).
오답 해설>
① 수도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한 기구는 조선의 한성부이다.
② 사헌부, 사간원과 함께 3사로 불린 기구는 조선의 홍문관이다(1478, 성종 9). 경연을 주관하였으며, 옥당(玉堂)이라고도 불렀다.
④ 화폐와 곡식의 출납 회계를 담당한 (고려의) 기구는 삼사(三司)이다.
⑤ 관리 임명에 대한 서경권(署經權)을 가지고 있었던 기구는 대간(臺諫)이다. 중서문하성의 낭사(낭관, 3품 이하)와 감찰 기관인어사대의 관원이 대간을 이루어 언론 역할을 하였다.
Q 15 – 대각국사 의천
정답> ⑤
말풍선에는 '이것은 경상북도 칠곡군 선봉사에 있는 비석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문종의 아들인 그가 국청사를 중심으로 천태종을 개창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그'는 대각국사 의천(1055~1101)임을 알 수 있다.
사진 속 비석은 말풍선에서 제시된 대로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이다(보물 제251호)
의천은 천태종의 통합 이론으로 이론 연마와 수행을 함께 강조하는 교관겸수를 제시하였다.
오답 해설> ① 보현십원가를 지어 불교 교리를 전파한 '그'는 균여(923~973)이다(광종 대인 963년과 967년 사이에 지음)
② 불교 개혁을 주장하며 수선사 결사를 조직한 '그'는 보조국사지눌(1158~1210)이다(1190, 고려 명종 20).
③ 선문염송집을 편찬하고 유불 일치설을 주장한 '그'는 진각국사혜심(1178~1234)이다(1226, 고려 고종 13). 혜심은 지눌의 제자이자 지눌을 이어 조계종의 2세(世)가 되었다.
④ 불교 관련 설화를 중심으로 삼국유사를 저술한 '그'는 보각국사 일연(1206~1289)이다(1281, 고려 충렬왕 7).
Q 16 – 고려의 경제 상황
정답> ④
위의 사료에는 '경종 원년에 처음으로 직관(職官)과 산관(散官) 각 품이 전시과를 제정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경종 원년인 976년에 시행된 시정 전시과임을 알 수 있다.
아래의 사료에는 '문종 30년, 양반 전시과를 다시 고쳤다. 제1과는 중서령, 상서령, 문하시중으로 전지 100결과 시지 50결을 주며, ······ 제18과는 한인(閑人), 잡류(雜類)로 전지 17결을 주었다' 는 내용이 나와 있다. 문종 30년인 1076년에 시행된 경정 전시과임을 알 수 있다.
건원중보가 발행되어 금속 화폐의 통용이 추진된 것은 고려 성종 15년인 996년의 일이다. 건원중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전으로, 통용에는 실패하였다.
오답 해설>
① 솔빈부의 말이 특산물로 거래된 국가는 발해이다.
② 청해진이 국제 무역 거점으로 번성한 국가는 (통일)신라[828(흥덕왕 3)~851(문성왕 13)].
③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이 (경주에) 설치된 것은 신라지증왕 10년인 509년의 일이다. 참고로 효소왕 4년인 695년에는 서시전과 남시전이 설치되었다.
⑤ 설점수세제의 시행으로 민간의 광산 개발이 허용된 것은 조선효종 2년인 1651년의 일이다.
Q 17 – 고려 시대의 사회 제도
정답> ④
왼쪽 말풍선에 '고려 시대 민생 안정을 위해 시행한 정책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중간 말풍선에는 '감염병 확산 등에 대처하기 위해 구제도감을 설치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고려사』를 살펴보면 고려 예종 4년인 1109년 개경에서 역질이 발생하자 구제도감(구급도감)을 설치한 바 있다.
국산 약재와 치료 방법을 정리한 향약집성방이 간행된 것은 조선세종 15년인 1433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물가 조절을 위해 상평창을 설치하였다(993, 고려 성종 12).
② 병자에게 의약품을 제공하는 혜민국이 있었다(1112, 고려 에종).
③ 환자 치료와 빈민 구제를 위해 동·서 대비원을 두었다(1049,고려 문종 3).
⑤ 기금을 모아 그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운영하였다(963, 고려 광종 14).
Q 18 – 경복궁
정답> ①
'조선의 법궁, (가)'라는 제목하에 '이곳은 군자가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린다는 뜻을 지닌 궁궐이다(삼봉 정도전이 이름 지음). 궁궐 안에는 국왕의 정무 공간과 왕실의 생활 공간 등이 조성되어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주요 관람 경로로 '광화문 →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과 교태전 → 향원정 → 건청궁 → 경회루'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경복궁임을 바로알 수 있다.
고종이 아관 파천 이후 환궁한 곳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이다(1897.2).
오답 해설>
② 경복궁은 태조 때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창건되었다. 옳은 설명이다. 조선 태조 즉위 2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인1395년(태조 3)에 완성하였다.
③ 조선 물산 공진회 개최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옳은 설명이다(1915.9-10).
④ 명성 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장소이다. 옳은 설명이다. 건청궁이다(양력 1895.10.8.).
⑤ 일제에 의해 궁궐 안에 조선 총독부 건물이 세워졌다. 옳은 설명이다. 1918년 7월에 경복궁 구내에 총독부 청사가 착공되어 1926년 10월에 낙성되었다.
참고로 조선 총독부 건물은 김영삼 정부가 추진한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의 일환으로 조선 총독부 건물의 해체를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경축식에서 청사 중앙돔 랜턴을 해체한 것을 시작으로 철거에 들어가 이듬해인 1996년 11월 13일 청사의 지상 부분의 철거를 완료되었다.
Q 19 – 삼봉 정도전
정답> ⑤
'선유(先儒)가 불씨(佛氏)의 지옥설을 논박하여 말하기를, ······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째서 한 사람도 지옥에 들어가 소위 시왕(十王)*이란 것을 본 자가 없단 말인가? 그 지옥이란 없기도 하거니와 믿을 수 없음이 명백하다라고 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글은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글(불씨잡변 →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불교의 교리를 비판, 1394)을 쓴 삼봉 정도전(1342~1398)의 것임을 알 수 있다(출처도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으로 나옴).
* 시왕(十王): 저승에서 죽은 사람을 재판하는 열 명의 대왕
정도전은 태조 3년인 1394년에 조선경국전을 지어 바쳤다.
오답 해설>
① 계유정난이 일어난 것은 조선 단종 원년인 1453년의 일이다. 계유정난은 후일 세조로 등극하는 세종의 차남 수양 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세종과 문종의 고명 대신이었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② 일본에 다녀와서 해국제국기를 편찬한 인물은 신숙주(1417~1475)이다(1471, 성종 2).
③ 기축봉사를 올려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운 인물은 우암 송시열(1607~1689)이다(1649, 효종 즉위년). 효종에게 올린 기축봉사에서 송시열은 존주대의(尊周大義)와 복수설치(復讎雪恥)를 주장하였다.
④ 군주의 도를 도식으로 설명한 성학십도를 지은 인물은 퇴계이황(1501~1570)이다(1568, 선조 원년).
Q 20 – 천문학자 이순지
정답> ④
말풍선에는 '이 우표 속 인물은 15세기 조선의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생몰연대가 '?~1465년'으로 나와 있고, 주요 활동으로 '세종 때 문과 급제', '갑인자 제작에참여', '천문의상을 교정·제작'이 제시되어 있고, 저서로 '제가역상집', '교식추보법' 등이 나와 있다. 배경지식이 필요한 문제로, 제시된 인물은 문신이자 천문학자였던 이순지(?~1465)이다. 여기서 갑인자는 세종 16년인 1434년 갑인년에 만든 구리 활자이고, 천문의상(天文儀象)이란 천문 관측 기구를 가리킨다. 또 제가역상집(1445)과 교식추보법(1459)은 둘 다 천문서이다. 이순지는 정인지, 정초, 정흠지, 김담 등과 같이 칠정산 내·외편을 편찬하였다(1444, 세종 26).
오답 해설>
① 종두법을 소개한 인물은 지석영(1855~1935)이다[우두신설, 1885(고종 22)].
② 거중기를 설계한 인물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1789,정조 13).
③ 동의보감을 완성한 인물은 허준(1539~1615)이다(1610, 광해군2).
⑤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인물은 고산자 김정호(?~1866)이다(1861, 철종 12).
Q 21 – 사화
정답> ③
(가)에서 '갑자년 봄에, 임금은 어머니가 비명에 죽은 것을 분하게 여겨 그 당시 논의에 참여하고 명을 수행한 신하를 모두 대역죄로 추죄(追罪)하여 팔촌까지 연좌시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연산군 10년인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수 있다(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사사 사건).
(나)에는 '정문형, 한치례 등이 의논하기를, 지금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보니, 차마 읽을 수도 볼 수도 없습니다. ······ 마땅히 대역의 죄로 논단하고 부관참시해서 그 죄를 분명히 밝혀 신하들과 백성들의 분을 씻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일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에는 '정유년 이후부터 조정 대신들 사이에는 대윤이니 소윤이니 하는 말들이 있었다. ······ 자전(慈殿)은 밀지를 윤원형에게 내렸다. 이에 이기, 임백령 등이 고변하여 큰 화를 만들어 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명종 원년인 1545년에 발생한 을사사화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라)에는 '언문으로 쓴 밀지에 이르기를, 조광조가 현량과를 설치하자고 청한 것도 처음에는 인재를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더니······ 경들은 먼저 그를 없앤 뒤에 보고하라고 한' 내용이 나와있다. 중종 14년인 1519년에 발생한 기묘사화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이상을 일어난 순서대로 나열하면, '(나)-(가)-(라)-(다)'가 된다.
Q 22 – 병자호란
정답> ③
왼쪽 말풍선에는 '소현 세자께서 돌아가셨는데 시신이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가 흘러 나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이 전쟁에 패하여 청에 인질로 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오실 때도 건강하셨던 세자께서 어찌 두 달 만에 그리되셨는가'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인조의 맏아들이었던 소현 세자(1623~1649)가 청에 인질로 가게 된 것은 병자호란 때문이었다[1636.12(인조 14)~1637.1(인조 15)].
당시 전라도 병마절도사였던 김준룡(1586~1642)이 근왕병을 이끌고 적에게 포위당한 남한산성으로 진군하던 중 용인 광교산에서 항전한 것은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이때 김준룡은 청의 장수 공경(孔耿)의 부대와 싸워 청 태조의 사위 백양고라(白羊高羅)를 포함한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오답 해설>
① 이괄의 반란 세력이 도성을 장악한 것은 인조 2년인 1624년의 일이다.
② 곽재우, 고경명 등이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은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1592, 선조 25).
④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여 임시 기구로 비변사가 처음 설치된것은 중종 5년인 1510년의 일이다(3포 왜란).
⑤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된 훈련도감이 신설된 것은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의 일이다.
Q 23 – 진주 농민 봉기
정답> ③
2월 7일에 '수곡 도회(都會) 주모자 유계춘을 병영에 감금'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2월 14일에는 '덕천 장시 등에서 농민 시위 전개'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2월 19일에 '우병사 백낙신이 시위를 해산하려 하자 성난 농민들이 그를 포위하여 감금'한 내용이 나와 있다. '유계춘'과 '백낙신'이라는 이름(덧붙여 사족 이명윤 포함)과 '수곡'과 덕천'이라는 지명이 제시된 것으로 보아 자료 속 '사건'은 조선 철종 13년인 1862년에 발생한 진주농민 봉기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상황 수습을 위해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환재 박규수(1807~1876)가 안핵사로 파견되고, 삼정이정청이 임시로 설치되었다.
오답 해설>
① 남접과 북접이 연합하여 전개된 사건은 동학 농민 운동이다(제2차 봉기, 1894.9).
② 정부와 약조를 맺고 집강소를 설치한 것도 동학 농민 운동이다(1894.7.6). 전봉준과 전라도 관살사였던 김학진 사이에 합의되었다.
④ 지역 차별에 반발한 홍경래가 주도하여 봉기한 사건은 홍경래의 난이다(1811, 순조 11).
⑤ (1889년과 1890년에) 함경도와 황해도에 방곡령이 선포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일본으로의 지나친 곡물 수출 때문이었다. 1개월 전 예고를 전제로 지방관이 방곡령을 내릴 수 있음은 조선과 일본이 1883년 7월에 맺은 조일 통상 장정에 규정되어 있었다.
Q 24 – 조선 후기의 모습
정답> ④
'선혜청 당상 민응수가, 지금 돈이 귀해진 것은 공가(公家)에서거두어 숨겨 두고 부민(富民)들이 쌓아 두어 유통이 되지 않았서입니다. 만일 관가의 돈을 쌓아 두는 폐단을 없애고 민간의 돈을 유통시키는 효과가 있게 한다면, 전황(錢荒)의 폐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임금이 말하기를, 더 주조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니, 후일 다시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한' 내용이 나와 있다. 이처럼 전황의 폐단이 발생한 것은 17세기 후반 화폐 유통이 본격화되고 난 후의 일이다(1678, 숙종 4).
관리가 과전법에 의해 토지의 수조권을 지급받기 시작한 것은 고려 공양왕 3년인 1391년 직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송상, 만상이 대청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② 왜관에서 개시 무역과 후시 무역이 이루어진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③ 광산을 전문적으로 경영하는 덕대(德大)가 등장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⑤ 모내기법의 확대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확산된 것도 조선 후기의 일이다.
Q 25 – 충북 충주
정답> ③
'답사 계획서'라는 제목하에 주제로 '(가)의 유적과 역사 인물을 찾아서'가 제시되어 있다. 이어 답사 경로로 '고구려비 →탑평리 칠층 석탑(중앙탑) → 창동리 마애 여래상 → 탄금대'가 제시되어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지역'은 충북 충주임을 알 수있다.
임진왜란 발생 직후인 1592년 4월 26일~28일 삼도도순변사 신립(1546~1592)이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에 항전하다 전사하였다.
오답 해설>
① 직지심체요절이 금속활자로 간행된 곳은 충북 청주이다(1377,고려 우왕 3).
②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한 곳은 충남 예산이다(1868, 조선 고종 5). 남연군의 묘가 있었던 정확한 지명은 충남예산 덕산면 상가리이다.
④ 명 신종의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가 건립된 곳은 충북 괴산이다(1704, 숙종 30). 정확한 지명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이다.
⑤ 만적을 비롯한 노비들이 신분 해방을 도모한 곳은 개경(개성)이다(1198, 고려 신종 원년).
Q 26 – 조선 정조 대의 사실
정답> ①
'이 책은 초계문신제로 선발된 학자들의 명단을 정리한 인명록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가) 때부터 시행된 초계문신제는 인재 양성과 문풍 진작을 위한 문신 재교육 과정으로 37세 이하의 문신 중 학문에 재능이 뛰어난 이들을 선발하여 운영하였다' 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조선의 제22대 왕인 정조(재위 1776-1800)임을 알 수 있다. 초계문신제가 시행된것은 정조 5년인 1781년의 일이다. 경기도에 한하여 대동법이 실시된 것은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②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이 설치된 것은 정조 17년인 1793년의 일이다
③ 서얼 출신의 학자들이 규장각 검서관에 기용된 것은 정조 3년인 1779년의 일이다. 이때 정조는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檢書官)이라는 [정직(正職)이 아닌] 잡직(雜職)을 두고 초대 검서관으로 서얼 출신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를 임명하였다[이른바 '사검서관(四檢書官)']. 이들의 기본 임무는 규장각 각신(閣臣)을 보좌하고 문서를 필사하는 것이었는데, 정조는 문신들이 매월강(講)을 할 때 왕과 신하들 사이에 논의되는 내용을 검서관으로 하여금 기록하고 서명하여 보관하게 하는 등 이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④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대전통편이 편찬된 것은 정조 9년인 1785년의 일이다. ⑤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이 폐지된 것은 정조15년인 1791년의 일이다(신해통공).
Q 27 – 동학
정답> ④
'경주 사람 최복술은 아이들에게 공부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았다. 그런데 양학(洋學)이 갑자기 퍼지는 것을 차마 보고 앉아있을 수 없어서, 하늘을 공경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글귀를 지어, (가)(이)라 불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양학은 음(陰)이고, (가)은/는 양(陽)이기 때문에 양을 가지고 음을 억제할 목적으로 글귀를 외우고 읽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배경지식이 좀 필요한 문제로, 자료에서 말하는 '경주 사람 최복술'은 바로 철종 11년인 1860년 4월에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1824~1864)을 가리킨다. 복술(福述)은 최제우의 처음 이름이다[초명으로 제선(濟宣)도 있음].
최제우는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는 시천주(侍天主)를 강조하였다. 참고로 시천주 사상은 제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1827~1898)에 의해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제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1861~1922)에 의해 인내천(人乃天)으로 발전하였다.
오답 해설>
① 배재 학당을 세워 신학문 보급에 기여한 종교는 개신교이다(1885. 8) 배재 학당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1858~1902)에 의해 세워졌다.
② 박중빈(1891~1943)을 중심으로 새생활 운동(과 간척 사업)을 추진한 종교는 원불교이다(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 전반).
③ 일제의 통제에 맞서 사찰령 폐지 운동을 벌인 종교는 불교이다(1911.6).
⑤ 황사영(1775~1801)이 외국 군대의 출병을 요청하는 백서를 작성한 것과 관련된 종교는 천주교이다(황사영 백서 사건, 1801.9).
Q 28 – 흥선 대원군
정답> ⑤
위의 사료에는 '왕이 말하기를, 요즘 각 고을 백성의 생활 형편이 매우 좋지 않다고 한다. 작년부터 (가)이/가 분부를 내려 양반호(戶)는 노비의 이름으로 포(布)를 내게 하였고, 일반 백성들은 신포(身布)로 내게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사료는 고종 8년인 1871년에 단행된 호포제에 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아래의 사료에는 '왕이 말하기를, 요즘에 서원마다 사무를 자손들이 주관하고 붕당을 각기 주장하니, 이로 인한 폐해가 백성들에게 미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서원을 훼철하고 신주를 땅에 묻어 버리는 등의 절차를 (가)의 분부대로 거행하도록 해당 관청에서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알리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는 곧 고종 원년인 1864년에있었던 서원 정리에 대한 사료로, 이를 통해 제시된 '(가) 인물은 흥선 대원군(1820~1898)임을 알 수 있다. 흥선 대원군은 집권 시 환곡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사창제를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1867, 고종 4).
오답 해설>
① (개화 정책 추진을 위해) 통리기무아문과 12사가 설치된 것은 고종 17년인 1880년 12월의 일이다.
②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지계를 발급한 것은 고종 36년인 1899년의 일이다(~1903).
③ 나선 정벌을 위해 조총 부대가 파견된 것은 효종 5년인 1654년과 효종 9년인 1658년의 일이다(2차례).
④ 교육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 교육입국 조서가 반포된 것은 고종 32년인 1895년 2월의 일이다.
Q 29 –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
정답> ⑤
의정부가 발신이고 각 도 관찰사, 수원·광주·개성·강화의 유수(留守), 동래 부사가 수신으로 되어 있다. 제목은 '조약 체결 알림'으로 되어 있는데, 강화부의 '영종진 불법 침입 보고(을해년)'와 신헌의 '교섭 결과 보고(병자년)'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2에서 '일본국과의 조약 체결에 대해 알린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조약'은 1876년 병자년에 체결된 조일 수호 조규(일명 '강화도 조약', '병자 수호 조약')임을 알 수 있다. 신헌(1810~1884)은 당시 전권대신이었다. 을해년의 영종진 불법 침입은 1875년 9월에 있었던 운요호 사건을 말한다. 조일 수호 조규의 체결로 말미암아 조선은 부산 외 2곳에 개항장을 순차적으로 설치하게 되었다(제5관, 원산과 인천).
오답 해설>
① 천주교 포교의 허용 근거가 된 조약은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이다(1886.5).
② 거중 조정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 조약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이다(1882.5).
③ (외교와) 재정 고문을 두도록 하는 조항을 담고 있었던 조약은 제1차 한일 협약이다(1904.8).
④ 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민영환(1861~1905)이 자결한 조약은 제2차 한일 협약(이른바 '을사늑약')이다(1905.11).
Q 30 – 죽천 박정양
정답> ⑤
생몰연도가 1841년에서 1905년이고, 시호가 '문익(文翼)'이라고 나와 있다. 이어 주요 활동으로 '조사 시찰단으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초대 주미 공사로 부임'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 외 '호조 판서'와 '한성부 판윤(일종의 서울시장)'을 역임하였으며 ' 군국기무처 부총재를 겸임'한 사실도 나와 있다. 저서로 '일본내무성시찰기'와 '미속습유'[미국 견문기]가 나와 있는 바 이를 통해 제시된 인물은 죽천 박정양(1841~1905)임을 알 수 있다. 박정양은 1887년에 초대 주미 공사로 임명된 바 있다(박정양이 초대 주미 공사로 부임하고 퇴임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미행일기』 참고). 또 관민 공동회가 개최되던 1898년 10월 당시 참정대신(參政大臣)의 자격으로 독립 협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추원관제 개편을 추진하였다[헌의 6조, (의회식) 중추원 신관제].
오답 해설>
①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립한 인물은 도산 안창호(1878~1938)이다(1913.5).
② 고종의 밀지를 받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한 인물은 임병찬(1851~1916)이다(1912.9).
③ 조선 광문회를 조직하여 민족 고전을 간행한 인물은 육당 최남선(1880~1957)이다(1910.10).
④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한 인물로는 군사장 왕산 허위(1854~1908)를 들 수 있다(1908.1). 총대장 이인영(1867~1909)은 작전 직전에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장례를 위해 고향(경북 문경)으로 돌아갔다.
Q 31 – 개화 상소 이후의 사실
정답> ①
'우리 조정은 정학(正學)을 숭상하고 이단을 물리쳐서 만백성을 바르게 이끌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황준헌의 책자(조선책략)로 말하더라도 그 글이 바른가 바르지 못한가 그 말이 좋은가 나쁜가에 대해 신은 진실로 모르지만 ······ 기계에 관한 기술과 농업 및 식목에 대한 책이 이익이 된다면 선택하여 시행할 일이지, 굳이 그들의 것이라고 해서 좋은 법까지 배척할 필요는 없습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제시된 자료가 '곽기락의 상소'로 되어 있는 바 제시된 상소는 곧 고종 18년인 1881년 7월에 전 장령(掌令) 곽기락(1825~?)이 올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듬해인 1882년 12월에는 유생 윤선학(?~?)도 유사한 채서(採西)의 주장을 담은 '개화 상소'를 올렸다[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이처럼 전직 관료와 일부 유생들이 올린 상소는 정부의 개화 정책을 뒷받침하면서 동도서기의 논리를 체계화하는데 이바지하였다.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이 설립된 것은 1883년 3월의 일이다(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청에 파견된 영선사와 관련, 1881.9~1882.11).
오답 해설>
② 김기수(1832~?)가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것은 1876년 4월의 일이다(제1차 수신사)
③ 역관 오경석(1831~1879이 해국도지를 국내로 들여온 것은1850년대이다(1853~1859년경으로 추정).
④ 어재연 부대가 광성보에서 항전한 것은 신미양요 때의 일이다(1871.5).
⑤ 평양 관민이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운 것은 고종 3년인 1866년 8월의 일이다.
Q 32 – 국채 보상 운동
정답> ④
'이것은 일제로부터 도입한 차관을 갚기 위해 일어난 이 운동을 기념하여 대구에 세운 조형물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개화 지식인, 상인, 여성이 엽전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운동'은 1907년 2월 김광제(1866~1920)와 서상돈(1850~1913)의 주도로 대구에서 처음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간 국채 보상 운동임을 알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 당시 언론은 국채 보상 운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오답 해설>
① 황국 중앙 총상회의 주도로 전개된 운동은 상권 수호 운동이다(1898.10). 독립 협회가 함께 하였다.
②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친 것은 독립 협회이다(자주 국권 운동). 그 결과 러시아의 절영도(부산 영도) 조차 요구를 끝내 무산시켰다(1898.2).
③ 국채 보상 운동이 실패한 것은 조선 총독부가 아니라 통감부의 방해와 탄압 때문이다. 조선 총독부가 설치된 것은 한일 병탄직후인 1910년 10월 1일의 일이다.
⑤ 일본, 프랑스 등의 노동 단체로부터 격려 전문을 받은 운동은원산 총파업이다(1929.1~4).
Q 33 – 갑오개혁, 을미개혁, 광무개혁
정답> ①
(가)에는 '지금부터는 국내외의 공사(公私) 문서에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과부가 재혼하는 것은 귀천을 막론하고 자신의 의사대로 하게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가)는 제1차 갑오개혁 때 단행된 개혁임을 알 수있다(1894.7~12).
(나)에는 '이번 단발은 위생에 이익이 되고 일을 할 때 편하기 위하여 우리 성상 폐하께서 정치 개혁과 국가의 부강함을 도모하고자 솔선하여 표준을 보이심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무릇 우리 대조선국 인민은 이와 같은 성의를 본받되 의관 제도는 다음과 같이 고시함'이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나)는 을미개혁 때 단행된 단발령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1895.8~1896.2,
단발령은 1895년 음력 11월 15일 공포, 11월17일 시행(양력으로 1896년 1월 1일에 해당).
(다)의 제1조에는 '원수부는 국방과 용병과 군사에 관한 각 항의 명령을 관장하며 특별히 세운 권한을 가지고 군부와 경외(京外)의 각 부대를 지휘 감독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제2조로 ' 모든 명령은 대원수 폐하가 원수 전하를 경유하여 하달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원수부가 설치된 것은 고종 36년인 1899년6월의 일이다(광무개혁의 일환).
이상을 발표된 순서대로 나열하면, '(가)-(나)-(다)'가 된다.
34 – 1910년대의 모습(조선 태형령)
정답> ⑤
제1조로 '조선 주차(駐箚)* 헌병은 치안 유지에 관한 경찰 및 군사 경찰을 담당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제5조로 '헌병은 직무에 관해 정당한 직권을 가진 사람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즉시 응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제18조로 '헌병의 복무 및 헌병 보조원에 관한 규정은 조선 총독이 정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배경지식이 좀 필요한 자료로 제시된 법령은 1910년 9월 10일 칙령 제343호로 공포된 '조선주차헌병조례'이다. 해당 법령은 헌병경찰제의 법적 근거이기도 하다.
* 주차: 외국에 관리가 직무상 주재하는 일
조선태형령이 시행된 것은 1912년 4월의 일이다(~1920.3).
오답 해설>
① 경성 제국 대학 예과가 설치된 것은 1924년의 일이다. 2년 뒤인 1926년에 본과가 설치되었다.
② 원산 총파업이 일어난 것은 1929년 1월의 일이다(~4월까지 진행).
③ 조선어 연구회가 조선어 학회로 이름을 바꾼 것은 1931년 12월의 일이다.
④ 암태도 소작 쟁의가 일어난 것은 1923년 8월의 일이다(~1924.8).
Q 35 – 고종 강제 퇴위
정답> ①
'대한 제국이 여러 국가와 외교 관계를 단절한 것은 우리의 의사가 아니라 일본의 폭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어 '우리가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여 이를 폭로할 수 있도록 귀국 총통 및 대표의 호의적인 중재를 부탁한다'는 말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상황은 제2차 만국 평화 회의에 고종이 파견한 헤이그 특사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1907.6).
참고로 제2차 만국 평화 회의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907년 6월15일에서 동년 10월 18일까지 열렸다(세 특사가 헤이그에 도착한 날은 6월 25일).
일제는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삼아 동년 7월 20일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오답 해설>
②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한 것은 1885년 4월의 일이다(~1887.2).
③ 구식 군인들이 일본 공사관을 습격한 것은 임오군란 때의 일이다(1882.6).
④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정변이 일어난 것은 갑신정변 때의 일이다(1884.12).
⑤ 일본과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것은 1905년 7월의 일이다.
Q 36 – 신민회
정답> ①
왼쪽 말풍선에는 '이 신문 광고를 낸 태극 서관에 대해 말씀해'달라는 말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태극 서관은 신지식 보급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운영되었다. 또한 대성 학교와오산 학교를 세운 이 단체의 산하 기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이 단체'는 1907년 4월에 비밀리에 결성된 신민회임을 알 수 있다. 신민회는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와해되었다(1911.9). 옳은 설명이다.
오답 해설>
② 파리 강화 회의에 (우사 김규식을 통해) 독립 청원서를 제출한 단체는 신한 청년당이다(1919.5).
③ 만민 공동회를 열어 민권 신장을 추구한 단체는 독립 협회이다(1898.3-11).
④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독립 공채를 발행한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다(1919.11).
⑤ 어린이 등의 잡지를 발간하여 소년 운동을 주도한 단체는 천도교 소년회이다(1921.5).
Q 37 – 호머 헐버트와 조지 루이스 쇼
정답> ②
(가)는 '미국인'으로, '세계지리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한글로 저술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을사늑약 직후 고종의 친서를 미국 정부에 전달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가)'는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육영 공원에 교사로 초빙된 호머 헐버트(1863~1949)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김구 등이 상하이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며, '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일제에 의해 내란죄로 체포되'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배경지식이 좀 필요한 인물로, 해당 인물은 조지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1880~1943)이다.
ㄱ. 호머 헐버트는 육영 공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1886). 옳은 설명이다.
ㄴ.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 설립을 주관한 인물은 호레이스 알렌(1858~1932)이다(1885.4).
ㄷ. 조지 루이스 쇼는 중국 안동에서 무역 회사인 이륭양행을 운영하였다(1919.5). 옳은 설명이다. 쇼는 이륭양행 안에 대한민국임시 정부의 교통사무국을 설치토록 지원함은 물론 자신의 기선으로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무기, 출판물, 자금 등을 안정하게 운송, 보관해주었다. 이로 인해 1920년 7월 일제에 체포되어 내란죄로 기소되었고 4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보석으로 석방된 후에도 쇼는 변함없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ㄹ. 이화 학당을 설립하여 근대적 여성 교육에 기여한 인물은 미국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여사(1832~1909)이다(1886.5).
이상에서 옳은 설명은, 'ㄱ과 ㄷ'이다.
Q 38 – 3•1 운동
정답> ④
'그날 오후 2시 10분 파고다 공원에 모였던 수백 명의 학생들이 10여 년간 억눌러 온 감정을 터뜨려 '만세, 독립 만세'를 외치자 뇌성벽력 같은 소리에 공원 근처에 살던 시민들도 크게 놀랐다' 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공원 문을 쏟아져 나온 학생들은 종로 거리를 달리며 몸에 숨겼던 선언서들을 길가에 뿌리며 거리를 누볐다.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약소민족의 자결권이 실현되는 신세계가 시작된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시위 학생들은 덕수궁 문 앞에 당도하자 붕어하신 고종에게 조의를 표하고 잠시 멎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자료 속 민족 운동은 1919년의 '3·1 운동'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3·1 운동 전개 과정에서 일제는 제암리 학살 등을 자행하였다. 여기서 제암리 학살이란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소재 제암리 감리교회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이다. 이때 일제 군경은 무고한 양민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은 후 문을 잠그고 집중 사격을 가하여 28명을 학살하였다(이후 교회당 방화). 그리고는 다시 부근의 채암리로 가서 다시 민가를 방화, 31호를 불태우고 39명을 또다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오답 해설>
① 조선 형평사의 주도로 전개된 것은 형평 운동이다(1923.4).
② 신간회에서 진상 조사단을 파견한 것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다(1929.11~1930.3).
③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은 것은 의열단이다(1923.1).
⑤ 성진회(醒進會)와 각 학교 독서회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다. 성진회는 1926년 11월 전남 광주에서 조직된 항일 학생 운동 단체이다.
Q 39 – 남자현 지사
정답> ④
'이곳은 경상북도 영양군에 있는 독립운동가 (가)의 옛 거처'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가)은/는 조선 총독 암살을 기도하였고, 국제 연맹 조사단에 강력한 독립 의지를 표명하는 혈서를 전달하고자 시도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마지막으로 '이후 만주국주재 일본 대사 암살 계획이 발각되어 체포된 뒤 순국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배경지식이 좀 필요한 문제로, 제시된 자료 속'(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인 남자현(1872~1933)이다. 남자현 지사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간도로 건너가 서로군정서에 가입하고 여자 권학회를 조직하는 등 계몽 활동에 힘썼다.
오답 해설>
①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한 인물은 의열단원 나석주 의사(1892~1926)이다(1926.12).
②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인물은 안중근 의사(1879~1910)이다(1909.10).
③ 명동 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습격하여 중상을 입힌 인물은 이재명 의사(1887~1910)이다(1909.12).
⑤ 평양 을밀대 지붕에서 임금 삭감에 저항하여 농성을 벌인 인물은 강주룡(1901~1931)이다(1931.5).
Q 40 – 북간도의 민족 운동
정답> ②
'우리 학교 역사 동아리에서는 (가) 지역의 민족 운동을 조명하는 답사 사진전을 개최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명동 학교'와 '삼종사 묘', '봉오동 전투 전적비'가 제시되어 있다. 명동 학교는 1908년 9월 북간도(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 세워졌고, (대종교) 삼종사 묘 역시 북간도(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용성향 청호촌)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삼종사(三宗師)는 백포 서일(1881~1921), 홍암 나철(1863~1916), 무원 김교헌(1868~1923)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봉오동 전투 전적비도 북간도(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에 위치한다.
중광단은 1911년 북간도(길림성 왕칭현)에서 대종교인인 서일(1881~1921)을 단장으로 하여 조직된 항일 독립운동 단체이다. 1918년 말 만주 일대에서 활동 중이던 독립운동가들을 망라해39명의 이름으로 무오 독립 선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오답 해설>
① 권업회를 조직하여 기관지를 발행한 지역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이다(1911.12).
③ 숭무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지역은 미주의 멕시코(유카탄의 메리다 지역)이다(1910.11).
④ 조선 독립 동맹을 창립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한 지역은 중국화북 지역이다(1942.7).
⑤ 조선 청년 독립단을 결성하여 2·8 독립 선언서를 배포한 지역은 일본 도쿄(동경)이다(1919.2).
Q 41 – 백암 박은식
정답> ⑤
왼쪽 말풍선에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신 동기를 말씀해’달라는 말이 나와 있다. 오른쪽 말풍선에는 ‘일제의 침략과 탄압에 맞선 우리 독립 투쟁의 역사를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보여 주고, 한국인의 긍지와 민족의식을 고양시키고자 책을 쓰게 되었다’ 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가상 인터뷰의 주인공은 대표적인 민족사학자 중 한 명인 백암 박은식(1859~1925)임을 알수 있다.
참고로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920년 12월에 간행되었다.
박은식은 1915년 6월에 한국통사를 저술하고 민족주의 사학의 기초를 닦았다.
오답 해설>
① 민족의 얼을 강조하고 조선학 운동을 추진한 인물은 위당 정인보(1893~1950)이다(조선학 운동, 1934~1938).
② 진단 학회를 설립하여 실증주의 사학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인물로는 두계 이병도(1896~1989)를 들 수 있다. 이 외 한뫼 이윤재(1888~1943), 일석 이희승(1896~1989), 남창 손진태(1900~?), 도남 조윤제(1904~1976) 등이 진단 학회의 실무를 맡아 보았다(1934.5).
③ 조선사 편수회에 들어가 조선사 편찬에 참여한 인물은 육당 최남선(1890~1957)이다.
④ 유물 사관을 바탕으로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한 인물은 백남운(1894~1979)이다(1933).
Q 42 – 한인 애국단
정답> ③
(가)에는 ‘동북 3성의 군벌 장작림(張作霖)과 일본과의 협정이 성립되어 독립운동하는 한국인은 잡히는 대로 왜에게 넘겨졌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1925년 6월 11일에 체결된 미쓰야 협정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미쓰야 헙정 →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미쓰야와 만주의 군벌 장작림(장쭤린)이 맺은 조약].
(나)에는 ’나와 공근은 상해의 프랑스 조계를 떠나 기차역으로 가서 그날로 가흥(嘉興)으로 피신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그곳은 박찬익 형이 은주부와 저보성 제씨(諸氏)에게 주선하여 며칠 전에 엄항섭 군의 가족과 김의한 일가, 석오 이동녕 선생이 벌써 이사하였던 곳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배경지식이 좀 필요한 내용으로, 백범 김구가 (안중근 의사의 막내 동생인) 안공근(1889~1940)과 프랑스 조계를 떠나 피신한 것은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의 일이다(1932.4.29.).
한인 애국단이 조직된 것은 1931년 10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일본군의 보복으로 간도 참변이 발생한 것은 1920년 10월의일이다(~1921.4).
② 한국 광복군이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한 것은 1945년의 일이다(1945년 3월 국내 정진군 총지휘부 설립).
④ 일본의 토지 침탈을 막고자 농광 회사가 설립된 것은 1905년7월의 일이다(~1905.8).
⑤ 삼균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이 발표된 것은 1941년 11월 28일의 일이다.
Q 43 – 물산 장려 운동
정답> ④
‘표어 모집으로 말하면 조선에 있어서는 처음 일이라 그래서 그 내용도 시원치 못하여 일등이라고 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음은 매우 유감된 일이라 하며 이번에 당선된 것으로 말하면 이등이 셋, 삼등 넷이라는데 그중 한두 가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2등 내 살림은 내 것으로, 2등 조선 사람 조선 것, 3등 우리 것으로만 살기’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1920년대에 펼쳐진 ‘물산 장려 운동’임을 알 수 있다.
자작회, 토산 애용 부인회 등의 단체가 활동하였다. 옳은 설명이다.
오답 해설>
① 조선 노동 총동맹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은 노동 운동이다(1924.4).
② 근우회의 주도로 여성의 권익을 옹호한 것은 여성 운동이다(1927.5).
③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목표로 한 것은 형평 운동이다(조선 형평사, 1923.4)
⑤ 국문 연구소를 세워 한글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것은 주시경(1876~1914)과 지석영(1855~1935)과 같은 국어학자들이다(1907.7).
Q 44 – 일제 강점기 말의 정책
정답> ⑤
‘일본 정부가 우리 역사를 왜곡한 산업유산정보센터를 도쿄에 개관하였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중•일 전쟁 이후 일제가 침략 전쟁을 확대하던 이 시기의 한국인 강제 동원 사실을 부정하는 전시를 하고 있어 큰 파장이 예상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중•일 전쟁이 발생한 것은 1937년 7월로, 이를 통해 제시된 ‘이시기’는 일제 강점기 말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기한 내에 소유지를 신고하게 하는 토지 조사령이 제정된 것은 1912년 8월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여자 정신 근로령이 공포된 것은 1944년 8월의 일이다.
② 육군 특별 지원병제가 실시된 것은 1938년 2월의 일이다.
③ 식량 배급 및 미곡 공출 제도가 시행된 것은 1939년부터이다. 조선미곡통제령, 조선미곡배급조정령을 공포하여 조선 쌀의 통제를 제도화하고, 공출 및 배급 제도를 실시하였다. 1944년 6월에 이르러서는 아예 강제 공출제로 바꾸었다.
④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이 만들어진 것은 1941년 2월의 일이다(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 제정은 1936년 12월).
Q 45 – 조선 의용대
정답> ⑤
‘30여 년이나 비밀리에 행동한 조선 혁명 청년은 지금도 중국 항일전에서 혁명 행동의 기회를 얻어, …… (가)은/는 10월 10일 한구(漢口)에서 성립, 중앙군의 이동에 따라 계림(桂林)으로 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대장 진빈 선생[김원봉]은 금년 41세로서, 1919년 조선의 3월 운동 및 조선 총독부 파괴의 의열단 사건 등도 그들에 의한 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 속 ‘(가) 부대’는 1938년 10월에 조직된 조선 의용대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의용대는 당시 중국 관내(關內)*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무장 부대였다.
* 관내를 관중(關中)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중국 본토 지역을 가리킨다(만주, 즉 동북 3성은 관외). 예전 진(秦)나라 때 수도인 장안 일대 주변에 4개의 관문을 설치한 것에서 연유한다.
오답 해설>
①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부대는 북로 군정서군(김좌진), 대한 독립군(홍범도) 등의 독립군 연합 부대이다(1920.10).
② 대전자령 전투에서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격퇴한 부대는 한국 독립군(지청천)이다(1933.7).
③ 일본군의 공세를 피해 자유시로 이동한 부대는 대한 독립군단(서일)이다(자유시 참변, 1921.6).
④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흥경성 전투를 이끈 부대는 조선 혁명군(양세봉)이다(1933.6).
Q 46 – 박정희 정부 시기의 사실
정답> ⑤
‘오늘 국민 교육 헌장 선포 1주년에 즈음하여, 나는 온 국민과 더불어 뜻깊은 이날을 경축하면서 현장 이념의 구현을 위한 우리들의 결의를 새로이 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국민 교육 헌장은 우리 민족이 지녀야 할 시대적 사명감과 윤리관을 정립한 역사적 장전이며, 조국 근대화의 물량적 성장을 보완, 촉진시켜 나갈 정신적 지표이며, 국가의 백년지계를 기약하는 국민 교육의 실천 지침인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국민 교육 헌장이 선포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68년 12월 5일이므로 제시된 기념사는 1년 뒤인 1969년 12월 5일에 발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학교 입시 제도를 폐지하고 무시험 추첨제가 실시된 것은 1969년 2월이다(1968년 7월 발표). 우선 서울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되었고, 1970년에 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전주에서, 1971년에 가서야 전국으로 확대 실시되었다.
오답 해설>
① 초등학교라는 명칭이 초등학교로 변경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6년 3월의 일이다.
② 과외 전면 금지와 대학 졸업 정원제가 시행된 것은 최규하 정부 시기(1979.12.21. ~ 1980.8.10)인 1980년 7월의 일이다.
③ ‘문맹국민 완전퇴치 5개년 계획’이 수립되어 추진된 것은 이승만 정부 시기인 1954년 2월의 일이다(~1958). 이승만 정부는 이외에도 ‘의무교육완성 6개년 계획(1954∼1959)’을 별도로 수립하여 시행하였다.
④ 미국에서 시행되고 있던 6-3-3 학제가 처음 도입된 것은 미군정기 때이다(1946). 사실 미군정기 때는 ‘6-3-3-4 학제’와‘6-6-4 학제’가 병용되었으며,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12월에 교육법이 제정되면서 ‘6-4-3-4 학제’와 ‘6-4-2-4 학제’가 되었다가 1950년에 다시 ‘6-4-3-4 학제’로 변경되었으나 6•25 전쟁으로 시행해 보지도 못한 채 이듬해(1951) 교육법 개정으로 다시 수정되어 최종 ‘6-3-3-4 학제’로 확정되었다.
Q 47 – 유엔 총회 남북 총선거 의결
정답> ③
(가)의 1에는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한 3상 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이 나와 있다. 이어 3에는 ‘토지 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무상으로 나누어 주며 시가지의 기지와큰 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며’라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를 통해 제시된 자료는 좌우합작위원회에 의해 1946년 10월 7일에 발표된 ‘좌우 합작 7원칙’임을 알 수 있다.
(나)의 3에는 ‘외국 군대가 철퇴한 이후 하기(下記) 제 정당•단체들의 공동 명의로써 전 조선 정치 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층각계를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 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권은 정치, 경제, 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갖게 될것이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배경지식이 좀 필요한 사료로,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 협상’* 직후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의 명의로 1948년 4월 30일에 발표된 (공동)성명서이다.
*1948년 4월 19일에서 23일까지 평양에서 '남북 연석 회의'[정식 명칭은 '남북조선(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가 열리고 뒤이어 남북한 주요 단체 대표들 간에 두 차례의 회의(4월 27일과 30일)가 또열렸다. 이를 '남북 지도자 협의회'[정식 명칭은 '남북조선(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라고 한다. 그런데 또 '4김 회담'이라고 하여김구와 김규식, 김일성과 김두봉 간의 회담이 4월 26일과 30일에 각 진행되었다. 보통 엄밀한 의미에서의 남북 연석 회의는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본회의를 지칭한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4월 19일부터30일까지 진행된 연석 회의 본회의와 남북 지도자 협의회, 4김 회담을 모두 통틀어 '남북 연석 회의'(이른바 '남북 협상')라고 부른다.
유엔 총회에서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 총선거가 의결된 것은 1947년 11월 14일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유상 매수, 유상 분배 원칙의 농지 개혁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6월 21일의 일이다.
②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한 정읍 발언이 제기된 것은 1946년 6월 3일의 일이다.
④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조직된 것은1945년 8월 15일의 일이다.
⑤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이른바 보안법 파동이 발생한 것은 1958년 12월 24일의 일이다.
Q 48 – 김영삼 정부 시기의 사실
정답> ②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이라는 제목하에 제1조(목적), 제3조(금융실명거래), 제5조(기존 비실명자산의 실명전환의무)가 차례로 제시되어 있다. 금융실명제가 시행된 것은 김영삼 정부 시기인 1993년 8월 12일의 일이다. 우리나라가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한 것은 1996년 12월 12일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경부 고속 도로가 준공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70년 7월의 일이다.
③ 칠레와 자유 무역 협정(FTA)을 체결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4년 4월의 일이다.
④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된 것은 1962년 1월의 일이다.
⑤ 원조 물자를 가공하는 삼백 산업이 발달한 것은 이승만 정부시기인 1950년대이다.
Q 49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정답> ③
‘경찰청은 (가) 40주기를 맞아 신군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시민들을 보호했다는 이유 등으로 부당하게 징계를 받은 퇴직 경찰관 21명의 징계 처분을 직권 취소했다고 밝혔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이어 ‘당시 경찰관에 대한 징계는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의 문책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여기서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위원회가 설치된 것은 1980년 5월 31일로, 이를 통해 제시된 ‘(가)’는 1980년 5월에 일어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관련 기록물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오답 해설>
① 박종철과 이한열의 희생으로 확산된 민주화 운동은 1987년의 6월 민주 항쟁이다.
②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 등의 구호를 내세웠던 민주화 운동 역시 6월 민주 항쟁이다(전두환 정부의 4•13 호헌 조치 반대).
④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바뀌는 계기가 된 민주화운동은 4•19 혁명이다(1960).
⑤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대학 교수단이 시위행진을 벌인 민주화 운동 역시 4•19 혁명이다.
50 – 노태우 정부 시기의 통일 노력
정답> ⑤
‘사진으로 보는 ○○○ 정부’라는 제목하에 세 장의 사진이 제시되어 있다. 한국-헝가리 수교가 있었던 날은 1989년 2월 1일의 일이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1991년 9월 18일의 일이다. 한국•중국 수교는 1992년 8월 24일의 일이다. 모두 노태우 정부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1988.2.25.~1993.2.24.)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에 (남북이) 서명한 것은 1991년 12월31일의 일이다.
오답 해설>
① 남북 조절 위원회가 설치된 것은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72년 11월의 일이다.
② 개성 공업 지구 조성에 합의한 것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2000년 8월의 일이다[한국의 현대아산(주)과 북한 사이에 공업지구 건설이 합의], 개성 공단 착공 추진이 최종 합의된 것은 2002년 8월이고,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3년 6월에 개성 공단 착공식이 거행되었다.
③ 10•4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7년 10월의 일이다.
④ 금강산 해로 관광 사업이 시작된 것은 김대중 정부 시기인 1998년 11월의 일이다(금강산 육로 관광 사업은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3년 9월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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