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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 왕조(1715-1916), 독일 출신 왕위 계승, 조지 1세, 빅토리아 여왕

Jobs9 2022. 9. 10.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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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 왕조(1715-1916) : 독일 출신 왕위 계승

 ♣ 하노버 왕조(1714 ∼ 1917)
(1) 조지 1세(1714 ∼ 1727)
(2) 조지 2세(1727 ∼ 1760)
(3) 조지 3세(1760 ∼ 1820)
(4) 조지 4세(1820 ∼ 1830)
(5) 윌리엄 4세(1830 ∼ 1837)
(6) 빅토리아 여왕(1837 ∼ 1901)
(7) 에드워드 7세(1901 ∼ 1910)

1701년의 왕위계승법에 의하여 앤 여왕이 죽은 뒤, 독일의 하노버가(家)에서 영입한 조지 1세에서 시작된다. 동왕(同王)과 조지 2세는 독일 출생으로, 영국의 정치에는 관심이 적어 의회정치 및 책임내각제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다음의 조지 3세는 왕권의 회복을 도모하여 의회를 조종하였으나, 결국 미국독립의 실태(失態)를 초래하였다.
그 뒤 조지 4세, 윌리엄 4세를 거쳐 빅토리아여왕이 즉위하여, 64년의 치세 중에 영국의 최번영기를 맞이하였다.
다음 에드워드 7세의 즉위와 함께 색스 코버그 고타왕조라 개칭하였으나, 그것은 독일계의 명칭이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적국이 됨에 따라 조지 5세 시대인 1917년 윈저왕조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년 가까운 치세기간 중에 왕권은 국정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관행(慣行)이 점차 강하여져서 "국왕은 군림하나 통치는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1)조지 1세(1714-27)
독일태생이라 영어를 몰라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그는 결국 정치를 국회에 일임하게 되고 이때부터 현재 세계 여러 나라가 본받고 있는 ‘내각책임제’가 출발한 것으로 본다.
이는 국왕은 나라의 주인이되 사실상 정치의 뒷전에 물러나 있고 권력은 국회와 선출된 수상이 쥐게 되어 ‘국왕은 군림하나 지배하지 않는 입헌군주국’의 기초가 되는 셈이다.
결국 국민이 뽑아낸 대표 가운데 가장 똑똑하고 덕망 있는 사람이 정권을 쥐고 이 사람이 잘못하면 언제든 새로운 수상으로 교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힘찬 발전을 해나가게 된다.

2)조지 2세(1729-1760)
조지 1세의 아들이다. 독일의 하노버가(家)에서 태어나 부모가 이혼한 이래 아버지에게 반감을 품고 조부 밑에서 지내다가 1714년에 아버지가 영국의 왕위를 계승할 때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서 부왕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1727년에 즉위하였다.
즉위 후 부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휘그당(黨)을 지지하고 부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R.월폴을 중용하였다. 1743년의 오스트리아계승전쟁 때에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당시 영국은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지배하고 해외의 식민지를 확장하였으며, 7년전쟁에 참가하는 등 중요한 사건도 많았으나 그가 기여한 바는 별다른 것이 없다.
정치는, 치세 전반에는 월폴에게 맡기고, 후반에는 대(大)피트에게 맡겨 책임내각제를 발달시킨 결과가 되었다.

3)조지 3세(1760-1820)
조지 2세의 손자로, 1760년에 즉위하여 앞의 2대의 왕과는 달리 왕권의 회복을 꾀하였다. 그래서 왕실비용을 줄인 돈으로 의원을 매수하여 어용당을 만들어, 이를 조종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국정의 지도력을 강화하였다.그러나 그 결과 미국의 독립이라는 뼈아픈 실패를 초래하였다.
더욱이 그의 치세는 초기의 토리당(黨) 어용화 시대 등, 전후 수년간을 제하고는 소(小)피트가 주도하는 토리당의 지배 시대가 되었다.
그의 치세 동안에 유럽대륙은 나폴레옹(1800-15)의 시대로 1805년 넬슨이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이따금 정신에 이상을 보였고, 특히 1811년 이후에는 폐인 같은 만년을 보냈다. 결국은 정신이상으로 아들 조지 4세가 국사를 대행하였다.

4)조지 4세(1820-1830)
정신이상자가 된 아버지 조지 3세를 대신하여 사실상 군주노릇을 하였다.
'포도주와 여자를 다소 지나치게 좋아하였다'라고 자신이 말할 정도로 방탕한 생활태도와 휘그당 정치가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때문에 조지 3세는 그를 경멸하였다.
부왕의 정신이상 탓으로 섭정을 맡을 때(1788~1789, 1811~1820)부터 1820년의 즉위 후의 치세 동안에는 토리당(黨)에 호의를 보이고, 여러 가지 개혁에 반대하였으나, 왕의 의사와는 달리 가톨릭교도 해방령(1829)의 성립 등으로 권위를 잃었다.

5)윌리엄 4세(1830-1837)
런던 출생으로 조지 3세의 셋째 아들이다.
1779년 이래 해군에서 근무하였으며 나폴레옹전쟁에서 활약하였다.
1828년 해군총사령관이 되었고, 형 조지 4세의 죽음으로 즉위하였다.
이미 나이가 많아 정치도 우유부단하다는 빈축을 샀으며, 선거법 개정문제에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동요하였다.그러나 세론의 움직임에 놀라, 1832년 새 귀족의 서임(敍任)에 동의하고 상원에 압력을 가하여,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뒤에도 자주 휘그당과 마찰을 일으켰지만,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여배우 D.조던과 동거하여 이미 10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1818년 작센의 마이닝겐 공작의 딸 애딜레이드와 결혼하였다.
그 사이에서 난 두 공주는 모두 요절하여, 조카딸 빅토리아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6)빅토리아 여왕(1837-1901)
아버지는 조지 3세의 4남인 켄트공이다.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죽자 독일 출신의 어머니와 독일계 보모(保姆)의 손에서 엄하게 자랐다.
백부(伯父)인 윌리엄 4세가 죽자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하노버왕가에서는 여자의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노버왕가가 성립한 이후로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일군주 관계는 끝나고, 그녀는 영국 왕위만을 계승하였다.
즉위 당시의 총리 W.L.멜번이 어진 아버지와 같은 태도로 그녀를 지도해주고, 또 아버지가 생전에 휘그당과 가까웠던 관계도 있어서, 초기에는 자유당에 호의적이고 보수당 내각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1840년 사촌인 색스코버그 고터가(家)의 앨버트공(公)과 결혼하였다.
독일 출신인 앨버트공은 영국에서 백안시(白眼視)되고 그녀도 애정을 가지지 않았으나, 고결한 인격과 풍부한 교양으로써 여왕에게 좋은 조언자와 이해자가 되어, 공사(公事)와 가정생활에서 그녀를 두루 뒷받침하였다. 
이기적인 데가 있던 그녀가 국민이 자랑하고 존경하는 여왕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공에게 힘입은 바가 컸으며, 그녀도 차차 공의 인품에 감화되어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1861년 공이 42세의 나이로 죽자 그녀는 비탄에 잠기어, 버킹엄 궁전에 틀어박힌 채 모든 국무(國務)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나 B.디즈레일리의 설득으로 차차 마음을 바로잡고 동시에 그가 거느리는 보수당에 동조하였으며, 1877년 그가 바치는 인도 여제(女帝)의 제관(帝冠)을 받았다.
9명의 자녀를 두었고 독일 ․러시아 등과 친척 관계를 맺었으며, 행복한 말년을 보낸 뒤 보어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도중, 64년간의 치세(治世)를 마쳤다.
여왕의 치세는 빅토리아시대로서 영국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자본주의의 선두 선진국이 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디즈레일리와 W.글래드스턴으로 대표되는 2대정당제(二大政黨制) 의회정치가 전형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외교면에서도 영광스런 고립을 지키면서 그 동향(動向)이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빛나는 시대에 살면서도 그녀는 “군림(君臨)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랐다.
보수주의로 기운 후반기에는 자유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본분을 지킬 뿐 자신의 의사를 강요하지 않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영국 군주의 패턴을 확립하였다.
1901년 세상을 떠났고 영국에서 가장 긴 통치를 하였고 영국을 가장 강력한 나라로 만든 빅토리아는 국왕이 잃어버렸던 위엄과 인기를 되찾았으며 높은 의무감, 정직함, 소박함이 국민들의 애정을 얻었다. 
그녀는 해가 지지않는 대영제국을 다스렸는데 본토보다 80배가 넘는 식민지를 다스렸다고 한다.
특히 이 시기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 산업혁명이 절정에 달했다.
1830년에 Liverpool과 Manchester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었고, 1837년에 전화, 전신, 무선 등이 개설되었으며, 1838년에는 대서양에 큰 증기선이 운항하게 되었다.
이러한 산업의 발달로 국가는 더욱 부강해졌고 국민의 의식은 물질주의화되었다.
또한 여러 곳에 학교가 설립되었고 값싼 책들이 출판되어 일반 교양교육이 확대되었다.

7)에드워드 7세(1901-10)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이다. 청년시절부터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를 여행하여 견문을 넓혔으며, 스포츠 ․문화 ․사회문제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60세에 즉위하였는데, 당시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앞두고 긴장사태가 고조되어가고 있었다.
영국 헌법상 국왕은 국정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며 그도 그 관례에 따랐으나, 외교면에서는 여러 나라 제왕들과 인척관계에 있었고, 황태자 시절부터 어머니인 여왕을 대신하여 여러 차례 공식 석상에 나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국제 외교계에도 능통하여, 그 는 각국을 순방하면서 영국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특히, 영국-프랑스 협상(1904), 영국-러시아 협상(1907)의 체결로 말미암은 3국협상의 성립에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조지 3세 시대의 영국의 발전은 조지 4세, 윌리엄 4세 시대를 거쳐 1837~1901년에 이르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절정에 달하였다.
국내적으로는 글래드스턴의 자유당과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등 2대 정당간의 정권교체에 의한 전형적 의회정치가 행해지고, 선거법 개정과 1871년의 노동조합법 제정 외에 교육·군사·사법 제도의 개정 등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등 백인식민지의 자치령화를 실현시키면서도 한쪽에서는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아편전쟁과 애로호(號) 사건을 계기로 중국시장에도 진출하였으며, 기타 수에즈운하를 매입하고 이집트를 보호령화하는 등, 영국 제국주의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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