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1세 시대
즉위와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창건
AD 1494년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방계인 앙굴렘 백작 샤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앙굴렘 가문은 발루아-오를레앙 왕조의 시조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의 차남인 장을 시조로 하고 있었다. 프랑수아 1세는 장의 손자로서 프랑스 왕 루이 12세에게는 5촌 조카에 해당되었는데 프랑수아 1세가 아버지 샤를을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AD 1496년 2살의 어린 나이에 앙굴렘 백작이 되었다. 당시 루이 12세는 세 명의 아내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한 채 말년까지 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만 만약을 대비하여 가장 가까운 친족인 프랑수아 1세를 잠재적인 왕위계승 후보자로 여기며 AD 1499년 프랑수아 1세를 발루아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에 따라 프랑수아 1세는 어머니 루이즈 및 누이 마르그리트와 함께 루이 12세가 기거하고 있던 루아르 강가의 앙부아즈 성에서 성장했다. AD 1506년 프랑수아 1세는 루이 12세의 딸인 클로드와 약혼하고 블루아 성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리고 AD 1512년 루이 12세의 왕비인 안 드 브리타뉴가 사산하면서 더이상 아들을 얻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프랑수아 1세가 명실상부한 차기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결국 AD 1514년 1월 루이 12세도 프랑수아 1세를 자신의 딸인 클로드와 결혼시켰고 이듬해 1월 루이 12세가 사망하면서 프랑수아 1세가 20세의 나이에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다. 이렇게 하여 성립한 왕조를 역사적으로는 발루아-오를레앙 왕조에 이은 발루아 왕조의 또 다른 방계인 '발루아-앙굴렘(Valois-Angoulême) 왕조'라고 부른다.
밀라노 재점령
밀라노 재침공
프랑수아 1세가 즉위할 당시 프랑스는 외침이나 내부 봉기가 없는 평화로운 시절이 이어지면서 왕권이 매우 안정된 상태였다. 다만 샤를 8세와 루이 12세가 이탈리아 전쟁을 연이어 벌였는데 프랑수아 1세 역시 이를 이어받아 루이 12세 시절 스포르차 가문에게 되돌아갔던 밀라노를 탈환하기 위해 다시 이탈리아 전쟁을 시작했다. 프랑수아 1세는 즉위 직후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은 뒤 직접 35,000명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신성 동맹을 주창했던 로마교황 율리우스 2세도 AD 1513년 이미 선종하면서 루이 12세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겼던 신성 동맹은 거의 와해된 상태였다. 그러나 루이 12세로부터 밀라노를 빼앗아 갔던 스위스 군이 건재했기 때문에 프랑수아 1세의 상대는 스위스가 되었다.
이번에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로 향하는 알프스 산맥을 넘기 위해서 콜드라르장티에르(지금의 마달레나) 산길을 통하는 새로운 길을 이용하여 대포 72문을 이동시켰다. 이는 마치 로마 제국 시절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은 것과 동등한 위업으로 평가된다. 프랑스 군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을 통해서 피에몬테 지방에 나타나자 이에 놀란 스위스 군은 밀라노로 후퇴했다. 그리고 스위스 군 내부에서 오랜 전쟁에 지친 병사들이 더이상의 전쟁을 그만두고 그동안 얻은 전리품만 챙겨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프랑스와 협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강화 협상이 진행되어 밀라노를 프랑스에게 넘기기로 결론이 내려졌지만 스위스에서 신규 병력이 도착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새롭게 도착한 이들은 고향에 아무런 전리품 없이 가는 것을 거절한 것이다. 스위스 군은 이제 화평파와 주전파로 나뉜 채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고 AD 1515년 9월 13일 시옹의 추기경인 마테우스 시너가 도착하여 2년전 스위스 군이 프랑스 군에게 승리한 노바라 전투를 상기시키며 질책한 뒤에야 겨우 종식됐다. 마테우스 시너는 승리시 얻을 막대한 전리품과 조국에 대한 애국심으로 병사들을 선동하여 즉각 전투에 임하도록 했다. 이에 스위스 군이 밀라노에서 남동쪽으로 16㎞ 떨어진 마리냐노에서 프랑스 군과 싸우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마리냐노 전투
이 때까지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전투가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치도 않고 있었으나 스위스 군이 출병했다는 정찰 소식이 전해지자 서둘러 응전에 나섰다. 프랑스 군은 보병, 포병, 기병이 결합된 혼성군 38,700명이었고 보병 중에는 이번에도 독일 용병 란츠크네히트 17,000명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서 스위스 군은 전통적인 장창병(파이크 병) 22,000명이 팔랑크스 방진을 편성했을 뿐 포병은 없었고 보유한 기병도 200기에 불과했다.
AD 1515년 9월 13일 일몰이 다가오자 스위스 군이 전진을 시작하면서 마리냐노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란츠크네히트 수비병을 물리치고 프랑스 군의 대포 일부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프랑스 기병이 반격을 가하자 후퇴하여야 했다. 이제 밤이 되면서 전투는 혼전이 되었고 프랑스의 기병들이 돌격을 반복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는 프랑수아 1세도 직접 가담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야간 전투 동안 수많은 프랑스 군 지휘관들이 부상을 입고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고 밤이 깊어지자 일단 전투가 중단되었다.
다음날인 9월 14일 여명이 밝아오자 전투가 재개되면서 스위스 보병대가 팔랑크스 방진을 편성하여 프랑스 군의 포병을 향해 재차 돌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 프랑스 군도 전투 준비를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대포의 포격을 집중하여 스위스 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군이 많은 피해를 무릅쓰고 프랑스의 포병을 향해 계속해서 전진하며 란츠크네히트를 다시한번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 기병이 스위스 보병의 전진을 저지하고자 계속해서 돌격을 감행하는 방식으로 전투가 이어졌다.
이렇게 스위스 군과 프랑스 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던 오전 중반에 프랑스 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베네치아 군이 뒤늦게 도착했다. 이것이 결정타가 되어서 전투의 균형이 삽시간에 프랑스 측으로 기울면서 결국 마리냐노 전투는 프랑스 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프랑수아 1세는 마리냐노 전투의 승리로 많은 명성을 얻었고 독일 용병 란츠크네히트는 스위스 용병과 대등한 대결을 보여주면서 용병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반면에 프랑스 군의 포병 포격과 기병 돌격에 패배하면서 마리냐노 전투는 스위스 보병의 팔랑크스 방진이 더이상 근대 전투에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시발점이 되었다.
밀라노 재점령
마리냐노 전투에서 패배한 스위스 군은 밀라노를 포기하고 철수해야만 했다. 이는 13개주로 이루어진 '원시 스위스 연방(Old Swiss Confederacy)'의 대외팽창의 종말을 의미했고 실제로 스위스는 더이상 밀라노에 대해 관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의지할 곳이 없어진 밀라노 공작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는 밀라노를 프랑수아 1세에게 넘기고 파리에서 연금받는 생활을 하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자 로마교황 레오 10세와 나폴리 왕을 겸하고 있던 카스티야-아라곤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도 모두 밀라노에 대한 권리를 공식적으로 포기하였다.
이후 AD 1516년 1월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고 그의 딸인 후아나가 여왕이 되었으나 정신병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페르난도 2세의 외손자이자 후아나의 아들인 카를로스 1세(훗날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가 공동왕으로 즉위하면서 카스티야 왕국 및 아라곤 왕국을 통합한 스페인 왕국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그리고 AD 1516년 8월 프랑수아 1세와 카를로스 1세 사이에 누아용 조약이 체결되어 밀라노에 대한 프랑스의 영유권이 승인되었다. 또한 베네치아 공화국도 브뤼셀 조약을 통하여 크레모나를 제외한 롬바르디아 지방 전체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렇게 하여 이탈리아 북부 전체가 프랑스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세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 카를 5세와의 대결
신성로마황제 선거 대결 패배와 카를 5세의 북이탈리아 점령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는 친가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였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광대한 영지의 상속자이기도 했다. 실제로 카를로스 1세는 아버지 펠리페 1세가 할머니 부르고뉴의 마리로부터 물려받은 프랑스 동부의 부르고뉴 지방과 프랑스 북쪽의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지금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상속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AD 1516년 외조부인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자 스페인 왕으로 즉위하면서 페르난도 2세가 보유했던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섬, 사르데냐 섬도 함께 상속받았다. 그리고 AD 1519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고 그 후임을 두고 독일에서 새로운 왕위계승을 두고 선거가 추진되자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로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가주가 된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가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되었다.
이제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다급해졌다. 이미 카를로스 1세의 영지가 프랑스의 북쪽의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와 남쪽의 스페인에 이르고 있었는데 만일 카를로스 1세가 서쪽의 독일왕 겸 신성로마황제가 된다면 이제 서쪽에서도 프랑스를 위협하게 되는 셈이었다. 이는 바다인 서쪽을 제외한 프랑스의 국경 전부가 카를로스 1세에게 위협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프랑수아 1세로서는 매우 심각하게 위기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를 저지하고자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 왕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독일왕 선거에 직접 후보자로 나섰다. 그리고 프랑수아 1세가 로마교황 레오 10세의 지지를 받아내었고 독일 선제후들에게 많은 뇌물을 뿌렸지만 카를로스 1세가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더 많은 뇌물을 선제후들에게 제공하면서 프랑수아 1세는 단 1표도 얻지 못한 채 독일의 왕위계승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카를로스 1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되어 AD 1520년 10월 즉위식을 거행하고 카를 5세로 즉위했으나 로마교황 레오 10세의 반대로 신성로마황제로서의 대관식은 치르지 못했다.
카를 5세의 지배 영토에 의해 프랑스가 포위되는 것이 현실화되자 프랑수아 1세는 AD 1520년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동맹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더욱이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인 로마교황 레오 10세가 독일왕 선출시에는 프랑수아 1세를 지지했지만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면죄부를 판매한 것을 문제삼아 AD 1517년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촉발된 종교개혁 운동으로 인해 위기에 처하자 카를 5세의 편으로 돌아섰다. 이로 인해 로마교황 레오 10세를 지지하던 잉글랜드의 헨리 8세까지 카를 5세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 형세가 유리해지자 카를 5세는 AD 1521년 밀라노를 점령하여 스포르차 가문의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를 밀라노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는 프랑수아 1세로부터 연금을 받는 조건으로 밀라노 공작을 넘겼던 마시밀리아노 스포르차의 동생이었다.
부르봉 공작령 몰수
본래 프랑수아 1세는 사치를 좋아하고 많은 연회를 통해 국고를 낭비하고 있었는데 풍족한 밀라노를 상실하면서 재정적인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부르봉 공작 피에르 2세의 딸인 수잔느와 결혼한 몽팡시에 백작 샤를 3세가 AD 1521년 수잔느가 사망하면서 부르봉 공작령을 상속받자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의 어머니인 사보이아의 루이즈가 초대 부르봉 공작인 샤를 1세의 손녀였기 때문에 자신도 외가 혈통으로 부르봉 공작 가문과 연결된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워 AD 1523년 부르봉 공작령에 대한 몰수를 단행했다. 이러한 프랑수아 1세의 일방적인 결정에 매우 분노한 부르봉 공작 샤를 3세는 카를 5세 및 헨리 8세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마르세유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이탈리아로 도망쳐야 했고 이후 카를 5세의 군대 중 일부를 지휘하며 프랑수아 1세와 맞서게 되었다.
이탈리아 전쟁의 패배과 캉브레 조약 체결
프랑수아 1세는 부르봉 공작 샤를 3세를 추격하고 상실한 북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했지만 AD 1525년 2월에 벌어진 파비아 전투에서 카를 5세의 스페인 군에게 대패를 당한 채 그 자신도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에게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프랑수아 1세는 석방되는 조건으로 AD 1526년 카를 5세와 마드리드 조약을 맺고 프랑스 영토의 3분의 1을 넘기고 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며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에게 프로방스를 추가한 영지를 되돌려주기로 약속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석방되어 돌아온 프랑수아 1세는 강압적으로 맺어진 마드리드 조약의 무효를 선언했고 AD 1523년 새롭게 로마교황으로 선출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의 클레멘스 7세로부터 승인을 받아내었다.
이제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가 카를 5세를 견제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자치 도시인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와 함께 코냐크 동맹을 결성하고 잉글랜드의 헨리 8세도 참여하자 프랑수아 1세도 동맹에 가담하면서 이탈리아 전쟁이 재개되었다. 비록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의 힘을 빌려 카를 5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프랑수아 1세는 밀라노를 다시 차지할 욕심만 냈을 뿐이었다. 이렇게 코나크 동맹이 사분오열될 조짐을 보이자 베네치아 공화국도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그 사이 카를 5세가 파견한 군대가 피렌체를 점령하고 로마로 진군하여 AD 1527년 5월 사코 디 로마(Sacco di Roma; 로마 대약탈)을 벌였다.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한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와 협상을 벌여 신변을 보장받는 대가로 더 이상 카를 5세를 적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AD 1530년 신성로마황제의 대관식까지 치뤄주어야 했다.
한편 제노바 공화국이 카를 5세의 편에 서서 프랑스 군의 퇴로를 봉쇄했기 때문에 프랑스도 오랜 협상 끝에 AD 1529년 캉브레 조약을 체결하였다. 참고로 캉브레 조약은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를 비우는 동안 섭정을 맡았던 그의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즈와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의 섭정이자 카를 5세의 고모이던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간에 교섭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여인들의 평화조약(Paix des Dames)'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를 통해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카를 5세가 차지한 프랑스 북부의 플랑드르, 아르투아, 투르네의 종주권도 포기했으며 부르봉 공작령도 정당한 상속자에게 넘겨야 했다. 대신에 프랑수아 1세는 마드리드 조약 이후 인질로 붙잡혀 있던 두 아들인 프랑수아와 앙리를 보석금 200만 크라운을 지불하여 데려올 수 있었고 부르고뉴 공작령 중 프랑스 왕실에서 영유한 지역에 대한 카를 5세의 상속권을 포기시키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내정
프랑스의 르네상스
비록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재정만 낭비한 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인격적으로 호탕하고 너그러운 성격으로 여전히 프랑스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 문화가 프랑스로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밀라노에 머물던 말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초빙하여 안락한 생활을 보장하면서 '모나리자(Mona Lisa)'와 같은 걸작을 남기게 했다. 그리고 AD 1533년 차남인 앙리를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로마교황 클레멘스 7세의 조카딸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결혼시키면서 그녀에 의해 프랑스의 르네상스 문화가 더욱 발달하게 된다. 이후 공문서에 라틴어 대신 프랑스어를 사용하면서 프랑스어가 유럽 공용어의 위치를 확립하게 된다.
종교 개혁 탄압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 의해 촉발된 종교 개혁 운동은 프랑스에도 밀려왔다. 그러나 독일에서 종교 개혁 운동의 여파로 AD 1531년 헤센 백작과 작센 선제후를 중심으로 결성된 슈말칼덴 동맹이 루터파를 지지한 채 카를 5세와 맞서기 시작하자 프랑수아 1세도 카를 5세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종교개혁 운동에 대해 관대하게 대하였다. 여기에 프랑수아 1세가 아끼는 누이인 나바르 왕비 마르그리트는 열렬한 프로테스탄트(신교)의 옹호자였기 때문에 프랑수아 1세로서도 프로테스탄트에게 우호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AD 1534년 10월 프로테스탄트 세력들이 카톨릭 미사를 부정하는 벽보를 파리 시내와 다른 주요 도시의 여러 장소에 붙이고 심지어는 프랑수아 1세가 잠자는 침실문에까지 붙이자 프랑수아 1세는 이것을 왕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보고 매우 분노했다. 이에 프랑수아 1세가 프로테스탄트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여 일제히 인쇄물은 검열했고 수백명의 사람들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이 때문에 많은 프로테스탄트 세력들이 망명을 떠나야 했는데 이들 중에는 프랑스 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인 칼뱅파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는 장 칼뱅도 있었다.
신항로 개척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 이후 시작된 대항해 시대는 카를 5세의 스페인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프랑수아 1세도 카를 5세에 대한 경쟁심의 일환으로 프랑스도 신대륙 탐험을 하게 되었다. AD 1523년 프랑수아 1세의 명령을 받은 이탈리아 출신의 조반니 다 베라차노에게 북아메리카 연안을 탐사하여 현재 미국의 뉴욕과 뉴펀들랜드 지역, 그리고 남쪽의 플로리다 지역 등지의 정보를 수집했다. AD 1534년에는 자크 카르티에에게 북아메리카 동북부 해안가를 탐사하도록 했는데 자크 카르타에는 AD 1542년까지 세 차례 탐사를 하여 현재의 캐나다 퀘벡 지역을 프랑스령으로 선포하고 '누벨 프랑스(Nouvelle-France)'라고 이름지었다. 이로 인해 캐나다는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오게 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포르투갈이 장악하고 있던 인도양 항로에도 관심을 보여 AD 1529년 장 파르망티에가 인도의 수마트라에 도착하면서 훗날 인도와 인도차이나 반도가 프랑스 식민지가 되는 기반을 마련한다.
프랑스-오스만 동맹과 이탈리아 전쟁의 재개
AD 1536년 이탈리아 전쟁
AD 1535년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가 자신의 아들인 펠리페 2세를 밀라노 공작으로 임명했다. 이렇게 밀라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로 병합되자 프랑수아 1세가 반발하여 이탈리아를 재침공하였다.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를 견제하기 위해 발칸 반도를 점령하고 신성로마제국의 동쪽을 위협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 쉴레이만 1세와 종교를 넘어선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AD 1536년 3월 보병 24,000명과 기병 3,000기를 사보이아 공국의 피에몬테 지방으로 진군시켜 토리노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밀라노 점령에는 실패했다. 이에 카를 5세가 반격을 시작하여 프로방스를 침공하고 액상 프로방스로 진격했으나 프랑스 군이 마르세유로 향하는 길을 막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보급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 상태에서는 요새화된 아비뇽의 공격이 어려웠기 때문에 카를 5세는 군대를 스페인으로 퇴각시켰다.
카를 5세의 프랑스 공격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프랑수아 1세가 피에몬테에 병력을 더욱 증강시킨 후 제노바 공격에 나섰다. 동맹을 맺은 오스만 제국에서도 하이르 앗딘 바르바로사가 지휘하는 함대를 파견하여 마르세유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사이 제노바 역시도 수비 병력이 강화되면서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에 프랑스 군은 제노바 함락에는 실패한 채 피에몬테의 나머지 지역의 점령에만 만족해야만 했다. 더욱이 이듬해가 되면 오스만 함대도 이탈리아 해변을 습격한 뒤 이오니아 해로 향하여 북이탈리아 공격과 무관하게 코르푸 섬 공격에만 치중하게 된다. 그렇지만 카를 5세 역시 서쪽의 프랑스와 동쪽의 오스만 제국과의 사이에서 양면전쟁을 벌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교황 바오로 3세의 중재를 받아 강화조약이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AD 1538년 6월 니스 조약이 체결되어 토리노가 프랑스의 소유로 인정받았다.
AD 1542년 이탈리아 전쟁
AD 1540년 카를 5세가 자신의 딸인 마리아를 프랑수아 1세의 차남인 오를레앙 공작 샤를 3세와 결혼시키고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와 부르고뉴, 샤롤레 지역을 상속시키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밀라노를 포기하는 대가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한편 AD 1538년 오스만 제국의 해군이 로마교황 바오로 3세의 주창으로 스페인,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몰타 기사단 등이 참여하며 결성된 신성 동맹을 프레베자 해전에서 격파하였다. 이에 프랑수아 1세는 오스만 제국과 다시 동맹을 추진하였고 비록 AD 1541년 오스만 제국으로 향하던 프랑스의 사신이 신성로마제국의 방해로 파비아에서 살해당했지만 AD 1542년 3월 재차 오스만 제국에게 사신을 보내서 동맹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프랑수아 1세는 AD 1542년 7월 카를 5세에게 선전포고를 하였고 병력을 둘로 나눠 차남 오를레앙 공작 샤를 3세는 룩셈부르크 방면을, 장남 도팽 앙리(훗날 앙리 2세)는 스페인 방면을 각각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도 다시 하이르 앗딘의 함대를 출항시켜 7월 마르세유에서 프랑스 함대와 합류하였고 함께 니스를 공격하여 그 해 9월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처음에 프랑수아 1세는 오스만 함대에게 툴롱을 거점으로 내주었지만 오스만 함대의 존재를 점점 부담스럽게 느꼈기 때문에 AD 1544년 3월 프랑스 함대의 호위 속에 오스만 제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자 카를 5세는 프랑스와 전통적인 앙숙 관계인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헨리 8세는 프랑스가 계속해서 스코틀랜드를 지원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카를 5세의 동맹 제의를 수락했고 프랑스 내 마지막 잉글랜드 거점에 칼레 항에 잉글랜드 군 40,000명을 파견하여 북프랑스를 침공하였다. 동시에 카를 5세도 군대를 보내 룩셈부르크를 탈환하였기 때문에 프랑수아 1세는 AD 1544년 4월 북이탈리아의 체레솔레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밀라노로 진격하지 못한 채 프랑스 군 중 상당수를 귀국시켜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군은 그 해 7월 헨리 8세까지 합류하여 9월 칼레 남쪽의 볼로뉴를 함락시켰고 카를 5세도 직접 본군을 이끌고 프랑스를 침공하여 8월에는 생디지에를 무너뜨린 후 수아송까지 진격하였다.
전쟁의 종식과 프랑수아 1세의 죽음
이제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으나 당시 카를 5세는 독일 내부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의 소요가 계속되고 있었고 그동안의 전쟁으로 재정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카를 5세는 더 이상 진군하지 않았고 헨리 8세의 의사도 확인하지 않고 임의로 프랑수아 1세와의 휴전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니스 조약이 체결되어 양국이 서로의 점령지를 반환하고 AD 1538년 당시의 국경으로 돌아가기로 합의했고 화해의 증거로 프랑스 오를레앙 공작 샤를 3세를 카를 5세의 딸 마리아 혹은 조카 안나 중 한 명이랑 결혼시키기로 했으나 AD 1545년 오를레앙 공작 샤를 3세가 사망하면서 결혼은 무산되었다.
비록 프랑수아 1세가 카를 5세와 강화 조약을 체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이와 무관하게 볼로뉴를 영유하고자 했기 때문에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이에 프랑수아 1세는 아예 스코틀랜드와 연합하여 잉글랜드 본토를 공격하고자 프랑스 함대를 파견했지만 AD 1545년 7월에 벌어진 솔렌트 해전이 무승부로 끝나면서 무산되었다. 이제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전쟁도 교착상태가 되었고 결국 AD 1546년 6월 아르드르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헨리 8세에게 볼로뉴를 포기시키는 대가로 보상금을 주고 볼로뉴를 요새화하지 않는다는 약속도 해야만 했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도 평화가 찾아왔으나 이듬해인 AD 1547년 헨리 8세와 프랑수아 1세가 차례로 사망하게 된다.
앙리 2세 시대
즉위와 내정 정비
AD 1547년 프랑수아 1세가 사망하고 도팽 앙리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하여 앙리 2세가 되었다. 앙리 2세는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행정 개혁에 착수하여 왕실 회의의 각 분과별 기능을 더욱 전문화시켰고 지방에는 권한위임장(lettres de comission)을 부여받은 '코미세르(commissaire)'라는 이름의 왕의 대리인을 파견하여 칙령이 효과적으로 시행될 수 있도록 감독시켰다. 특히 코미세르들은 문제가 많은 각 지방을 장기간 순회하였는데 AD 1555년 앙리 2세는 '제네랄리테(généralités)'라는 이름으로 조세 징수를 위한 기본 행정구역을 지방 감독관에게 할당하여 효과적으로 세금이 걷히도록 했다. 제네랄리티에 파견된 코미세르(대리인)은 '앵탕당(intendant; 지방장관)'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나중에 프랑스의 모든 지방에 앵탕당이 파견되면서 지방 권력을 견제하는 앵탕당 제도가 탄생하게 된다.
이탈리아 전쟁 재개
전쟁의 재개
앙리 2세 시절에도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영지가 프랑스를 둘러싸고 있던 것은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앙리 2세는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와의 전쟁을 재개하였다. 이를 위해 AD 1552년 앙리 2세는 스스로는 독실한 로마카톨릭 신자로서 프랑스 내부의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를 5세와 맞서고 있던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샹보르 동맹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듬해 이탈리아의 토스카나에서 벌인 마르치아노 전투에서 패배했고 AD 1555년에는 독일에서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슈말칼덴 동맹과 카를 5세 사이에 강화가 이루어져 아우구스부르크 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앙리 2세도 카를 5세와 휴전을 맺어야 했다. 다만 이듬해 카를 5세가 전격적으로 은퇴를 선언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전쟁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카를 5세가 통치하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가 둘로 나뉘어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가 신성로마황제가 되고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왕이 되었다. 그리고 펠리페 2세가 아라곤 왕국이 지배하던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섬도 차지하고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였던 북해 연안 저지대의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까지 상속받으며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재편하였다. 더욱이 AD 1554년 펠리페 2세가 잉글랜드 여왕인 메리 1세와 결혼했기 때문에 이제는 바다 건너 잉글랜드까지 프랑스를 포위하는 형세가 되고 말았다.
이에 앙리 2세는 AD 1556년 기즈 공작 프랑수아에게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하도록 했으나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프랑스에게 자신의 영지를 빼앗긴 상태였던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동맹을 맺고 그를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임명하며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주둔 중인 스페인 군을 이용해 프랑스 북부의 생캉탱을 포위하도록 했다. 앙리 2세는 컨스터블(Constable; 총사령관)인 안 드 몽모랑시를 생캉탱으로 지원보냈으나 안 드 몽모랑시는 생강탱 전투에서 에흐몬트 백작 라모랄의 스페인 군에게 대패하고 그 자신도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이 때문에 앙리 2세는 기즈 공작 프랑수아를 다시 프랑스로 불러들여야 했다.
이후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반격을 개시하여 AD 1558년 1월 7일 잉글랜드가 보유한 프랑스 내 마지막 거점인 칼레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서 잉글랜드는 AD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무려 493년 만에 모든 프랑스내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공격하여 같은 해 여름에 프랑스 북부의 티옹빌과 아를롱을 점령하고 룩셈부르크까지 진격해들어갔다. 이렇게 기즈 공작 프랑수아의 활약으로 전황이 다소 호전되었지만 같은 해 8월 폴 드 테르메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또 다시 에흐몬트 백작 라모랄의 스페인군에게 그라블린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기 때문에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룩셈부르크의 공격을 포기하고 회군해야만 했다.
카토-캉브레 조약 체결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프랑스와 스페인 모두 재정 부담을 느꼈고 프랑스 내부에서도 프로테스탄트의 불온한 움직임이 보였기 때문에 앙리 2세는 강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AD 1559년 4월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되어 앙리 2세는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에게 점령했던 사보이아 공국을 되돌려주고 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대신에 앙리 2세는 토리노, 살루초, 피네를 포함한 이탈리아 내의 5개 요새의 영유권은 그대로 인정받고 부왕 프랑수아 1세가 AD 1522년 카를 5세로부터 빼앗았던 툴, 메스, 베르됭 주교구에 대한 소유권과 이번에 잉글랜드로부터 빼앗은 칼레에 대한 소유권도 그대로 인정받았다. 또한 생캉탱 전투에서 포로로 붙잡혔던 안 드 몽모랑시가 석방되어 프랑스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프랑스는 AD 1494년 샤를 8세가 나폴리 왕위를 노리고 시작된 이탈리아 전쟁이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대결로 변경된 이후 결국 총 65년 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정만 낭비한 채 아무런 영토적 이득을 얻지 못하고 물려나야 했다. 오히려 이탈리아 자치 도시들이 몰락하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아래에 들어갔다. 하지만 프랑스도 이탈리아 전쟁 과정에서 부르고뉴 공작령의 일부 지역을 획득하고 백년 전쟁 이후에도 잉글랜드가 오랫동안 영유하던 칼레를 되찾으면서 프랑스 내 영토적 단일성과 통일성을 제고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앙리 2세의 갑작스런 사고사
본래 앙리 2세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결혼하고 10명의 아이를 낳을 정도로 화목했지만 미모의 귀부인인 디안 드 푸아티에를 애첩으로 삼아 평생동안 곁에 두었다. 그러던 중 AD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되면서 스페인과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이미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AD 1558년 잉글랜드의 메리 1세와 사별한 상태였기 때문에 프랑스와 스페인의 우호 증진을 위해서 앙리 2세의 장녀 엘리자베트와 펠리페 2세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또한 사보이아 공작과도 화해하면서 앙리 2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결혼도 동시에 진행하였다. 이를 위하여 성대한 결혼 축하연이 벌어졌고 평소 기사도에 심취하여 마상 창시합을 즐기던 앙리 2세도 직접 마상 창시합에 참가하였다.
그렇지만 시합 도중에 상대방인 스코틀랜드 출신 근위대장 몽고메리 백작 가브리엘 드 로르주의 창에 얼굴을 강타당하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눈 부위를 크게 다친 앙리 2세는 그로부터 10일 뒤에 사망했다. 참고로 앙리 2세는 임종 전에 자신과 마상 창시합을 치른 몽고메리 백작 가브리엘 드 로르주에게 단순 사고이므로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앙리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의 장남인 프랑수아 2세가 15세의 나이로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았고 앙리 2세의 왕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섭정이 되어 국정을 장악했다. 이에 따라 앙리 2세의 애첩이었던 디안 드 푸아티에는 앙리 2세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도 못한 채 조용히 은거 생활에 들어가야만 했다.
비록 앙리 2세가 불의의 사고로 일찍 사망했지만 그에게는 총 3명의 아들인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가 있었기 때문에 후계 구도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프랑수아 2세(재위 AD 1559년 ~ AD 1560년)와 샤를 9세(재위 AD 1560년 ~ AD 1574년)까지 잇달아 요절하면서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계속해서 섭정이 되어야 했고 그녀가 이탈리아 출신으로 프랑스 내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 기즈 가문과 결탁을 해야했지만 로마카톨릭을 신봉하는 기즈 가문이 칼뱅파인 위그노(Huguenot)에 대해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종교 내전인 위그노 전쟁(AD 1562년 ~ AD 1598년)의 혼란을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