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Humanities/동양사 Asian History

킵차크 칸국, 금장 칸국, the Golden Horde

Jobs9 2021. 3. 24.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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킵차크 칸국 (중앙아시아 북부와 동유럽 1240-1502)

킵차크 칸국이란 몽골 제국이 분열된 이후에 설립된 4대 칸국 가운데 하나이다. 표제어인 킵차크 칸국은 몽골이 튀르크와 함께 이 곳에 오기 전 이전 이 지역을 지배하던 중세 튀르크계 민족인 킵차크인에서 따온 것이다. 킵차크인들이 살게 된 이후 이 지역을 킵차크 초원이라고 불렀으므로 몽골인들이 세운 왕국 역시 킵차크 칸국이라고 부른 것이다. 금장 칸국(the Golden Horde, 金帳汗國, Золотая Орда)이라는 이름이 더 널리 쓰이는데, 이는 킵차크 칸국이 망하고 난 후인 16세기에 러시아인들이 몽골인들의 황금 천막에 붙인 별명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부르는 킵차크 칸국이나 금장 칸국(the Golden Horde)이란 명칭은 당시 몽골인들이 사용한 명칭이 아닌 외부 세계에서 호칭한 것에 불과하다. 킵차크 칸국과 다른 칸국들의 몽골인 지배층들은 왕조의 창립자인 바투 칸이 칭기스 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주치인 울루스(주치 씨족의 영지)라고 불렀다.

몽골인들이 왕족으로 최고 계급이었고 튀르크계들이 관료나 상인등으로 중간계급으로 나머지 슬라브인들을 지배하였다. 국교는 건국 초기부터 피지배계층인 슬라브인들의 정교회를 배제하고 튀르크인들의 수니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였고 몽골인들도 이슬람화하였다. 오늘날 러시아의 타타르스탄 공화국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등 튀르크어족 킵차크어파 국가들의 전신이 된 나라이다.

 

바투(1207년 ~ 1255년)는 몽골 제국 킵차크 칸국의 칸(재위:1242년~1255년)으로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주치 칸의 차남이다. 주치 칸의 아들들 중에 훌륭한 칸 이라는 별명의 그는 부친 속령에 대한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바투의 영토는 이르티쉬의 서쪽인 세미팔라틴스크, 악몰린스크, 투르가이 또는 약튜빈스크, 우랄스크, 아다지, 호레즘 본토(히바)를 포함하였고, 또한 킵차크 인들의 땅부터 볼가 강 서쪽의 정복지인 제베와 수베에테이의 원정으로 얻은 땅을 포함하였다.

 

1227년 8월 18일 칭기스 칸이 죽은 뒤, 혈통 문제가 불거져 바투와 칭기스 칸의 다른 손자들 간의 알력다툼이 나타났다. 우구데이 칸은 주치 (칭기스칸의 장남)의 혈통 문제를 거론하며 바투를 모욕한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했지만, 사촌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킵차크 칸국을 건설하고 몽골 본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끊어버렸다.

 

바투는 몽골 전승에는 '훌륭한 임금'이라 하나, 러시아인들에게는 무자비한 정복자로 알려져 있다.


바투는 1237년에 러시아의 도시 쿠르스크, 벨고로드, 랴잔 등을 파괴했고 1238년에는 러시아 노브고로드 주의 크레스테츠키 군을 침략했다.
1241년 4월 11일 셔요 강 다리의 전투에서 헝가리의 벨라 4세를 무찔렀다.

그는 칭기즈 칸 가문의 장로로서 제국의 대칸을 둘러싼 권력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여, '대칸 옹립자'도 알려져 있다.

 

1241년에 우구데이 칸이 죽자 대칸의 자리를 두고 우구데이의 아들인 귀위크와 바투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1246년, 귀위크는 바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대칸 에 올랐다.

 

귀위크의 즉위 이후 두 사람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닫았지만 그 해에 귀위크가 사망하여 무산됐다. 그 이후 바투는 툴루이 의 왕비 소르칵타니 와 손 잡고 우구데이계 와의 분쟁이 다시 발생했다. 바투는 1251년에 쿠릴타이를 통하여 툴루이의 장남 몽케가 대칸에 오르도록 도왔다.

 

보르지긴 주치 (1181년 ~ 1227년)는 몽골 제국 초기의 군주이자 군인이며, 칭기즈 칸의 장남으로 알려졌으나, 평생 출생에 대한 의혹에 시달렸다. 칭기즈 칸에 의해 투르가이와 우랄스크를 물려받았으나,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아버지 칭기즈 칸의 사후 투르가이와 우랄스크를 물려받았다. 출생이 의심스웠던지라 중세 몽골어로 “손님”이라는 뜻의 “주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나, 칭기즈 칸은 이를 문제 삼지 않았고, 큰 아들이 가장 멀리에 있는 땅을 물려받는 몽골의 풍습에 따라 아버지와 가장 먼 곳에 거주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나라는 유럽과 가장 근접하게 되었다.

 

그는 그의 어머니 보르테가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되었을 때 강간에 의하여 가지게 되었다고 의심된다. 칭기즈 칸이 살아있을 때에는 주치의 혈통에 대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칭기즈 칸이 죽은 뒤, 혈통 문제가 불거져 나와 바투와 다른 칭기즈 칸의 손자들 간의 알력다툼으로 나타난다.

 

번성기

 

제3대의 베르케 칸에서 제9대 우즈베크 칸까지가 번성기였다.

 

알루구의 공격을 받은 카이두는 알탄 오르드 울스의 베르케의 지원을 받아 차가타이 칸국의 영토로 침입하여 알루구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다음 번 전투에서 반격을 당해 본국으로 철수했다.

 

차가타이의 칸이 바락으로 교체되자 카이두는 다시 원정에 나섰다. 카이두는 알탄 오르드 울스의 만그 티무르의 지원을 받아 차가타이 칸국을 침입하여 시르다라강 근처와 코잔드에서 벌어진 두 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두 번의 전투에서 패한 바락은 트란속시아나로 도망친 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약탈하여 군대를 다시 모았다.

 

바락의 격렬한 저항으로 전쟁이 장기화될 기미를 보이자 카이두는 배후의 쿠빌라이가 침입해올 것을 염려해 바락과 강화를 체결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강화의 결과 카이두와 만그 티무르가 트란속시아나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됐으며 카이두는 차가타이 칸국이 소유하고 있던 투르키스탄 대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카이두는 강화대로 이 땅을 만그 티무르에게 주지 않고 자신의 영토로 병합시켰다.

 

강화는 체결되었지만 바락은 이 강화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부하라를 재정복하려 했으며 사마르칸트를 약탈하려고도 했다. 카이두는 바락의 이러한 불만을 이용하여 바락에게 아바카가 다스리고 있는 일 칸국을 공격할 것을 종용했다.

 

바락은 일 칸국을 공격하라는 제의에 쉽게 응하여 일 칸국을 공격할 준비에 나섰다. 이에 카이두는 자신의 아들인 차파르가 이끄는 군대를 지원했으며 킵차크 칸국 역시 군대를 지원했다. 킵차크 칸국과 카이두의 지원을 받은 바락은 아바카 휘하의 장수인 테구데르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한 뒤 군대를 일으켜 호라산에서 일 칸국의 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알탄 오르드 울스과 카이두는 바락의 성공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킵차크 한국 군대는 바락 휘하의 장군인 잘라이르타이(Jalayirtai)와의 언쟁을 구실삼아 군대를 퇴각시켰다. 바락은 잘라이르타이를 보내 킵차크 칸국 군대에 용서를 구하고 복귀할 것을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킵차크 칸국의 군대가 떠나자 카이두가 보낸 차파르 역시 자신의 군대를 버리고 본국으로 도망가버렸다.

 

일 칸국의 츄판 왕조는 1357년에 킵차크 칸국의 10대 자니 벡 칸의 침략에 의해 멸망당했고 마렉 아시라프는 킵차크 칸국군에 잡혀 처형당했다.

 

추판 조의 영토를 정복한 킵차크 칸국은 통치의 어려움을 직감하고 1년 뒤인 1358년에 최종적으로 철수했으며 이 땅은 2년 뒤인 1360년에 자라이르 왕조의 우웨이스 1세의 손에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마렉 아시라프의 아들인 티무르타스(Temurtas)도 사망하여 이후 추판 왕조의 존재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킵차크 칸국은 기존 러시아 지배자들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간접 통치하였지만, 반란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측의 반격도 간헐적으로 있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절인 1380년 쿨리코보의 전투에서 러시아는 처음으로 몽골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몽골의 반격으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은 1세기 뒤에 이루어졌다.

 

쇠퇴와 멸망

 

14세기 말부터 1440년대에 킵차크 칸국이 분열하고, 크림 칸국, 아스트라한 칸국, 카잔 칸국, 시비르 칸국으로 나뉘면서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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