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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와(和)사상, 이치닌마에, 이지메, 메이와쿠, 기쿠바리, 혼네, 타테마에

Jobs9 2021. 3. 1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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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정체성 '와/화' 정신

집단주의 문화와 화(和)의 정신은 수전(水田)농경민족이라는 민족성을 바탕으로 일본사회 내부에서 형성되어 나타난 일본적 가치
개인보다는 집단을 우선시하는 일본인들이기 때문에 집단의 화합을 추구하고 중시하는 사회 환경이 조성

와(和) 사상

한반도는 대륙에 붙어 있어 도피할 데가 있다. 우리 선조들은 대한제국이 일제의 노예 국가로 전락하자 절대 악의 일본 식민통치보다 차악의 국가인 중국이나 러시아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인의 비극적인 디아스포라(Diaspora)가 형성되지만, 21세기엔 디아스포라(Diaspora)가 오히려 대한민국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초석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Diaspora)는 비참한 한반도 역사의 결과다.
 
'와(和)'는 '禾(벼=밥)와 口(입=입, 사람)'로 구성되어 있어, 사람들이 평화롭게 함께하는 밥상공동체를 뜻한다. 마치 미국인들이 총기를 소지하고 있어 미국의 민주주의가 유지되는 거와 같이,‘와’(和) 사상은 일본의 평화를 유지해준다.

 
이치닌 마에(いち-にんまえ, 一人前)

일본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허용된 한계 안에서 주어진 자기 몫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사회인으로 대접받으며 ‘와’(和)를 유지한다. ‘와’(和)를 존중하는 문화 때문에 공동체를 위해 끝까지 견디며 버티는 ‘감바로’(がん-ば·る, 頑張る) 기질과 스트레스를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내면 깊숙한 곳에서 발산하여 오로지 한 분야만을 파서 경지에 도달한 장인 정신인 ‘오타쿠’(お宅) 기질이 체질화된다.
 
그리고 이치닌 마에(いち-にんまえ, 一人前)를 일본의 건전한 자본주의로 승화시킨 인물이 있다. 그는 일본 에도(江戶) 시대 경제사상가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이다. 그는‘노동이 곧 정신수양이자 선’이라는 일본의 상도의 바이블, 곧 세키몬 신가쿠(石門心學)를 창시한다.

‘세키몬 신가쿠’(石門心學)의 핵심은 ‘제업즉수행’(諸業卽修行) 또는 ‘제업즉수업’(諸業卽修業)으로 요약된다. 모든 노동이 정신수양이며 자기완성에 이르는 길, 곧 도를 닦는다는 의미다. 메이지유신(めいじいしん 明治維新 Meiji Restoration 1868-1889) 3 걸로 꼽히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쓰(大久保利通)가 세키몬 신가쿠(石門心學) 사상을 선도한다.

이시다가 전파한 정직, 성실, 근검절약, 노동 정신. 그리고 선진 외국의 기술과 지식을 재빨리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뒤 이를 발전시켜 제품을 만들어 내는 '아이토 코토리' (모방 정신)로 일본은 제조업의 경쟁에서 세계 최강이 되어 경제대국이 된다.
 
이치닌 마에(いち-にんまえ, 一人前)는 또한 서양식의 뷔페 문화와 흡사한 일본음식문화를 낳는다. 한반도 찌개 문화는 상 중앙에 찌개를 놓고 다 같이 숟가락질을 하면서 내침은 네 침이 되고 네 침은 내침이 되며 서로 동질성을 확인하며 먹는 반면, 일본의 경우에는 개인접시(고자라)를 이용해 찌개류를 각자 먹을 만큼 퍼먹는다. 한반도 음식문화는 손님 위주의 뷔페식이 아니라 주인 위주의 음식문화라 손님이 싫어하거나 먹다 남은 반찬은 버려지고, 그 양이 엄청나다. 비합리적인 음식문화를 바꾸어야 하는데 한반도 기질상 힘들다.

 

  
집단 따돌림(いじめ)

집단에서 개인이 튀거나 분수에 어긋나는 행위를 할 경우, 집단은 그 개인에게 린치(リンチ, lynch)를 가하는데, 그것이 바로 집단 따돌림(いじめ)이다. 우리의 속담인 “모난 돌이 정 맞는다”가 이에 상응한다. 일본어로 ‘데루쿠이와 우타레루’(出る 杭は 打たれる)라고 한다.

일본인은 이지메(いじめ)를 당하지 않기 위해 집단주의를 종교처럼 신봉한다. 집단주의는 일본인의 기본 행동규범이다. 그런 경향은 일본 사람의 해외 단체여행에서 잘 드러난다. 혼자 스스로 여행지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안내자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유치원생의 모습을 보며 세계인들은 신기하게 여긴다. 그래서 일본인은 조직적이며 치밀할 수밖에 없는데 반해, 조직에 저항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노예의 기질을 체질화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3.11 천재지변 때의 일본인의 모습이다.

이처럼 일본은 집단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 융통성을 발휘하거나 저항하기보단 정해놓은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매뉴얼 사회’다. 일본인들은 새로운 제품을 사면 반드시 거기에 붙어있는 사용방법을 읽고 사용하는데 반해, 한국 사람들은 거의 읽지 않고 주위 사람들에게 묻고 사용한다. 이것만으로 좌뇌형과 우뇌형을 구분할 수 있다. 일본은 좌뇌형답게 질서와 법 준수를 하는 선진국으로 거듭난다. 기업엔 자연적으로 종신고용과 연공서열문화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이지메(いじめ)는 카타나(かたな, 刀 칼)문화로 이어지고, 메이지유신(めいじいしん 明治維新 Meiji Restoration 1868-1889)이전까지 부시(武士 무사)정권시대가 존속한다. 뿐만 아니라 이지메(いじめ)는 타국을 향한다. 일제는 서구 열강의 도움을 받아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를 희생시켜 근대화 국가로 태동한다.

 

메이와쿠(めい-わ, 迷惑)

한국사람이 어릴 때부터 ‘공부하라’는 말을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듣듯이, 일본인은 어릴 때부터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는 ‘메이와쿠 가케루나’(迷惑を 掛けるな) 말을 듣는다. 폐 끼치지 않기의 메이와쿠(めい-わ, 迷惑)는 대지진, 쓰나미와 원자력발전소의 폭발 등 아비규환 (阿鼻叫喚 appalling confusion)의 생지옥 속에서도 약탈이나 무질서를 찾아볼 수 없고 대피소에서는 배를 곯으면서도 타인을 배려하며 서로 음식을 양보하고, 불평 한마디 없이 질서를 지키면서 사재기나 새치기 한 번 없이 침착하게 대처하는 시민의식으로 열매를 맺는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저항하지 못하는 완전히 노예화된 기질이다.

그런데 원전 폭발에 따른 대량의 방사능 유출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극도의 혼란이 가중되자 사재기와 탈출 행렬이 줄을 잇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후쿠시마 지역차 별론이 대두되고 있다. 선천적인 생존본능이 후천적인 일본인의 메이와쿠(めい-わ, 迷惑) 정신을 무력화시킨다. 인간은 한계상황에 봉착되면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일본인의 허구적인 정신은 사라지고 일본의 참모습이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한반도와 일본과의 역사적인 관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한반도는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혜택만 주고 은혜만을 베푼데 반해, 일본은 항상 한반도에게 엄청난 폐만 끼친 야비한 민족이다. 이처럼 국제관계에선 일본의 메이와쿠(めい-わ, 迷惑) 정신은 적용되지 않는다.

 

기쿠바리(き-くばり, 気配)
 
기쿠바리(き-くばり, 気配)는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의 철학용어의 배려(Fürsorge)에 해당된다. 그런데 기쿠바리(き-くばり, 気配)는 자신의 주장이 배제된 타인의 마음 씀씀이다. 언어의 소통이 배제된 육체의 언어다. 자기주장이 강한 서양인은 이해할 수 없다. 세상 말로 스스로 알아서 긴다. 지하철에서 옆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신문을 1/4로 접어서 본다든지 휴대전화를 아예 받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기쿠바리(き-くばり, 気配) 정신은 비즈니스까지 적용되어 고객의 애로사항을 항상 연구하여, 그 불편함을 해결하려는 오모이야리(おもいやり, 思い遣り) 정신, 서비스 정신으로 발전되어, 서비스산업이 붐을 이룬다. 이런 태도에 세계인은 열광한다.

 
 

혼네(ほんね, 本音)와 타 테마에(- たてまえ, 建前)

일본 글에 음독과 훈독이 있듯이, 일본인의 태도에도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 속마음인 ‘혼네’(ほんね, 本音 )와 의례적인 태도, 겉 표현인 ‘다테마에’(たてまえ, 建前)가 있다. 이것을 일본의 이중성이라고 하는데, 모든 인간에겐 이중성이 있다. 그런데 일본의 이중성은 도가 지나치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 사회가 항상 주변의 공기를 읽고 자신의 욕망과 행동을 억제하며 눈치를 보는 육체의 언어가 발달되었듯이, 일본도 사회의 시선이라고 하는 ‘세켄’(せけん, 世間)이란 말이 있다. 그런데 일본인은 한국사람보다 훨씬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 일본인은 상대방이 상처 받을 것을 염려해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천박하고 실례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여, 무표정하거나 마음의 동요를 나타내지 않는 포커페이스(poker face)를 잘 유지하는 사람을 인격자라고 생각한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한반도와는 완전히 다르다.

사르트르(Jean Paul Charles Aymard Sartre)는 ‘닫힌 문’이란 희곡에서 “지옥이란 타인의 시선”이라고 한다. 일본인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기 때문에 지옥에서 살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다. 3.11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슬픈 일이 닥쳐도 너무 과도하게 울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해 어깨가 결린다고 호소하는 일본인이 아주 많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사람에게 ‘화병’이 있듯이, 일본인에겐 국민병인 ‘견비통’이 있다. 3. 11 사태에서의 일본인의 절제된 모습은 진화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지옥의 삶, 긴장 속에 사는 민족임을 보여준다.

일본인은 공동체 유지뿐만 아니라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립서비스’를 남발한다. 한국사람처럼 과격한 표현이나 심한 말투를 사용하지 않음은 물론 쌍욕도 하지 않는다. 일본인의 친절함은 맘속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의식에서 나온 의도된 것이다. 일본인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확실하게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을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의사소통이 어렵다. 일본인은 어쩌면 선 문선 답(禪問禪答) 속에서 살아가는 짝퉁 불교도라고 할 수 있다.

 

온(めぐむ, 恩) 문화와 오카에시(お-かえし, 御返し) 문화

일본인은 신세 진 것이 있으면 꼭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의 온(恩)은 영어로 ‘채무가 있는 은혜’를 나타내는 'obligation'에 해당된다. 그래서 답례 문화인 ‘오카에시’(お-かえし, 御返し)가 체질화되어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자살 공격을 한 일본군 특공대인 가미카제(kamikaze, 神風)의 출현은 덴노(てんのう, 天皇)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부정적으로 나타난 것이 한반도 식민지배다. 중세기까지 한반도는 일본 열도에게 문화와 선진기술을 전수해주었지만, 일본은 선을 악으로 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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