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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시, 러시아 시초, 우크라이나, 바이킹, 슬라브, 노예

Jobs9 2021. 3. 1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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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민족은 슬라브족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러시아라는 국가를 설립을 하고 대국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한 러시아 왕국의 건국시조는 슬라브족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해적으로 잘 알고 있는 바이킹 족들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러시아를 구성하고 있는 민족은 Rus족인데, 이 Rus족은 슬라브족과 바이킹족의 혼혈민족인 것이다.
바이킹족은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 유럽 곳곳을 누비면서 약탈 활동을 해, 흔히 해적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다분히 유럽중심주의적인 명칭이다. 유럽인들 자신도 로마인들이 보기엔, Babarian (미개인)들이었다.
바이킹족이 잉글랜드나 유럽 북부 해안을 수시로 약탈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그들의 활동의 일부이지 전체는 아니었다. 바이킹 족들은 주로 상업 교역에 종사를 했고, 그 주요무대는 유럽이 아니라 훨씬 남쪽의 비잔틴과 이슬람 지역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세계에서 생산물이 보다 풍부하고 따라서 교역의 대상이 되는 중심지역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1900년대 초에, 러시아와 인접한 스웨덴의 섬지역에 대한 유적발굴조사에 다량의 아라비아 은화가 출토되어 학자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이슬람 세력이 최대 팽창한 10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도 북유럽까지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웨덴지역은 바로 바이킹족의 활동 무대였었다.
따라서 이 은화들은 바이킹 족들이 이슬람인들과 활발히 교역했다는 실체적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문제 핵심은 유럽 최북단인 스칸디나비아 반도 바이킹들이 유럽 남부의 비잔틴이나 중동의 이슬람과 교역을 하기 위해 사용한 경로이다.
바이킹이 해양민족이기 때문에 대서양을 남하해 이베리아 반도를 돌아 지중해로 들어가는 경로를 상정할 수 있지만 지도를 펴놓고 보면 알 수 있듯 이는 엄청나게 돌아가는 길이다.
바이킹의 근거지인 발트해에서 이들 지역까지의 최단거리는 육지를 가로질러 흑해나 카스피해로 내려가는 경로이다. 현재의 러시아영토 한복판을 가로 지르는 것이다. 실제로 바이킹은 이 경로를 이용했다.
북유럽 발트해에서 핀란드만으로 들어가, 수로를 이용하면, 내륙의 라도가 호수로 연결이 된다. 이 라도가 호수에서 여러 강이 발원하는데, 곧 바로 남쪽으로 수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드네프르강과 만나게 된다.
이 드네프르 강은 흑해로 흘러 들어간다. 흑해의 서쪽 출구에 콘스탄티노플이 위치를 하고 있으니 바로 비잔틴까지의 최단경로가 되는 것이다.
또 라도가 호수에서 더 동쪽으로 가면, 볼가강과 만나고 이 볼가강은 카스피해로 흘러들어간다.
카스피해의 남쪽 해안이 현재 이란인데 당시에는 이슬람의 중심지였다. 이 두 경로가 바이킹 족이 주로 이용한 무역통로였다.
바이킹들은 이 두 경로를 따라서 왕래를 하다가, 곳곳에 무역도시를 건설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러시아의 기원이 된 것이다.
바이킹들은 라고가 호수로부터 남하한 데스나 강 연안에는 노브고로드를 건설을 했고 흑해로 흘러 들어가는 드네프르 강 연안에는 키예프를 건설을 했는데 이때 이곳에 정착한 바이킹을 '배를 젓는 사람'이란 뜻의 루스족이라고 불렀다.이들이 바로 현대 러시아인의 기원이 된 것이다.
고대로부터 슬라브족이 러시아에 정착을 해 살아 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0세기 무렵, 이 지역에서의 중심 세력은 바이킹이었고, 결국 정착한 바이킹이 슬라브족과 혼혈이 되어 루스족이 된 것이다.
그 중 가장 번성한 무역 도시는, 현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였다.
키예프는 8세기 경부터 건설이 되어 번영하다가 9세기 말 경 루스족에 의해 키예프-루시 國으로 성장했다.
이것이 러시아에 세워진 최초의 왕국이었다.
키예프-루시 공국은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 및 이슬람의 바그다드를 왕래를 하면서 주로 비단과 은화를 수입했다.
특히 중국비단을 모방해서 만든 비잔틴의 비단은 키예프의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반면 그들이 수출할 상품은 모피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모피는, 남쪽 더운 지방에선 수요가 많지 않아 보다 경쟁력있는 상품을 개발해야 했다. 
그들이 개발한 최대의 상품은 인간, 즉 노예였다.
키예프 루스인은 상시적으로 주변 슬라브인들을 사냥해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의 노예시장에 내다 팔았다. 노예를 뜻하는 'Slave'라는 단어의 유래가 여기서 기원이 된 것이다. 이들의 노예 사냥의 범위는, 한때 오늘날 체코와 오스트리아 부근까지 미쳤다고 한다.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가 되면서 연방을 지탱하던 힘이 공백상태가 되자 러시아주변의 각 공화국이 앞다투어 연방의 이탈을 선언하고 나선 배경에는 이런 뿌리깊은 피해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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