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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의 멍에, Tartar Yoke, 러시아, 킵차크 칸국

Jobs9 2021. 3. 1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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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타타르의 멍에는 1240년부터 1480년까지 루스 지역이 킵차크 칸국에게 지배를 받던 기간을 말한다. 간단하게 줄여서 몽골의 멍에, 혹은 타타르의 멍에라고도 한다. 루스 지역을 정복하고 착취했던 것은 몽골인데 왜 타타르까지 포함해서 몽골-타타르의 멍에라고 하냐면 원래 타타르란 광의론 튀르크족에 대한 멸칭이었다. 당시 킵차크 칸국의 지배층의 경우 왕족은 소수의 몽골인이고 그 밑의 귀족계급이 이들 타타르인어서 러시아인들의 입장에선 몽골인들보다는 실제 통치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타타르인이 훨씬 무서운 존재였다. 더구나 이후 서쪽으로 퍼져나간 몽골인들도 문화적으로 이슬람화, 투르크화 되고, 인종적으로도 완전히 뒤섞이면서 킵차크 칸국은 나중에는 사실상 투르크-타타르 국가가 되고만다.

여기서 멍에(иго)라는 말은 칸국의 지배 당시 러시아에서는 사용하지 않던 말이다. 이 말의 최초 용례는 1479년 폴란드의 연대기 작가 얀 드우고시(Jan Długosz)[1]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타타르의 멍에'라는 말은 이보다 약 1세기 이후인 1575년 다니엘 프린츠(Даниел Принц)에 의해 사용되었고, '몽골-타타르의 멍에'라는 말은 1817년 크루제(Х. Крузе)가 사용한 이후 러시아로 번역되어 널리 퍼졌다.[2]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동장군이 지켜주는 겨울의 러시아를 정복한 전무후무한 외세라고 일컫기도 한다. 실제로 몽골의 러시아 정복은 겨울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러시아의 악명높은 라스푸티차 때문에 기마병들이 활약하기엔 오히려 겨울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몽골의 추위도 러시아 못지 않게 장난 아니기 때문에 몽골인 뿐만 아니라 말도 추위에 매우 익숙했던 점이 정복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꼽힌다.[3]

칭기즈칸의 첫째 아들 주치는 친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칭기즈칸의 아내인 부르데 카툰이 납치당한 후 데려왔을 때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이는 몽골 제국 후계자의 불씨가 되었고 결국 제국이 분열되는 주원인이 된다.


스텝 지역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나라는 4등분으로 분할되었으며 첫째 아들 주치의 아들 주치가 킵차크 칸국을 세우게 된다.  이 시기의 현재 러시아 귀족들은 몽골의 수하 노릇을 하였는데 이를 '타타르'의 멍에라 한다. 킵차크 칸국은 흑사병으로 망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수혜자는 모스크바 대공국이다.

결국,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3세는 값비싼 흑단비 모피를 찾아서 동쪽으로 향하게 되고 1600년대 후반에는 태평양까지 도달한다.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차지한 동기가 '모피'라는 것을 보면 "인간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라는 명제가 어디에도 적용되는 진리다.

또한, 역사적으로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할 때 핵심계층이 몇 %로 가능했다. 과연 몽골은 몇 % 의 핵심계층으로 가능할까? 킵차크 칸국은 최상위 계층이 몽골인이었고 나머지는 언어와 풍습이 다른 이 민족이었다. 

핀들 레이의 <권력과 부>에서 타타르의 어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쿠빌라이와 그의 후계자들은 중국에 원왕조를 세운 뒤, 중국 문명과 행정부를 대부분 그대로 둔 채 다스렸다. 하지만 군사·행정·재정 분야의 최고위직에는 '외부 전문가'를 광범위하게 기용했다.

원왕조는 중국의 한족을 불신한 나머지 주로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도, 티베트의 불교도,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를 등용했다. 일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방식을 활용해 페르시아와 아랍의 전통을 유지했지만, 기독교도와 유대인을 비롯한 다른 외부인들을 관료로 기용했다. 볼가강 유역의 사라이에 화려한 수도를 건설한 골든 호르드(칩차크 한국, Golden Horde)는 러시아 및 기타 슬라브 종속민과 물리적으로 떨어져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계속 유지했다.

다양한 명목으로 몽골인이 부과한 무거운 세금은 동방정교회의 협력과 몽골 조사관의 감독 아래 러시아 왕자들이 대신 거두어들였다. 이 '계약'은 러시아 교회와 왕자들이 몽골에 비굴하게 항복하고, 군주를 위해 세금 징수자의 의무를 잘 수행하는 대가로 직위를 유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인들이 수백 년간(1240년~1480년까지 몽골 지배) 겪어야 했던 '타타르의 멍에(Tartar Yoke)'라는 오명이다. 차가타이 왕조가 지배한 중앙아시아 스텝과 오아시스 지역은 중앙의 통제가 느슨했고, 오아시스 주변의 정착 농경과 스텝 목축을 혼합한 전통적인 방식을 유지했다.  이런 과정에서 몇몇 주요 도시의 인구가 극도로 줄어들었지만, 1~2세대 이후에는 어느 정도 회복했다.

몽골인은 항상 무역을 장려했으며, 중앙아시아를 횡단하는 무역로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고 번화했다. 따라서 러시아 도시들은 '타타르의 멍에'라는 부담을 안고 원거리 무역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번영을 누렸다. 노브고로드는 동쪽과의 교역에도 적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모피를 비롯한 기타 삼림 물품을 서쪽으로 보내고 은과 모직물을 얻었다. 중동 및 중국과의 교역도 계속 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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