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대왕의 사후 약 반세기 동안에 그의 아들과 딸, 손자들은 데인인들이 차지한 잉글랜드의 땅을 재정복함으로서 위대한 군주의 과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10세기 초의 한 세대 동안에는 이를 가능케 한 몇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 10세기 초엽에 스칸디나비아로부터의 침입이 잠시 멈추었다는 점이었다. 둘째, 이 무렵에 이르면 잉글랜드에 정착한 데인인들의 모습이 바뀌고 있었다. 즉 그들은 전사에서 농부로, 해적에서 상인으로 바뀌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고 앵글로 - 색슨인들과 뒤섞여 살면서 서로 결혼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정복은 무엇보다도 알프레드의 군제개혁과 그 후계자들의 유능한 지도력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었다.
알프레드의 아들 에드워드(Edward the Elder)는 아버지 못지않게 뛰어난 전사였으며, 여동생이자 '머시아인들의 귀부인'(the Lady of the Mercians)으로 불린 애설플레드는 머시아의 군주 애설레드의 아내로서, 그리고 남편의 사후에는 여왕으로서 머시아 왕국을 통치했다. 그 반세기는 왕권의 전성기였다. 왕조내의 불화가 일어나지 않았던것은 알프레드 대왕의 신중한 왕위계승 때문이기도 했지만, 몇 번에 걸친 행운도 주효했다. 902년 에드워드의 사촌이 왕위를 쟁취하기 위하여 데인인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전투에서 죽었기 때문에 위험한 분열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에드워드의 후계자인 애설스턴(Æthelstan)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웨식스의 정당한 계승자였고, 머시아인 숙모의 집안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924년 순조롭게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시점에 이르러, 그 세기 중엽 다른 왕국은 말할 것도 없고 머시아에서도 이전의 왕조가 복귀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웨식스의 왕가는 곧 잉글랜드의 왕가였던 것이다.
에드워드 치세 동안의 군사행동은 주로 왕 자신과 여동생 애설플레드의 협력하에 이루어졌다. 데인인에 대한 잉글랜드인들의 반격은 910년 데인인들의 머시어 침략이 격퇴되었을 때 시작되었다. 이후 8년 동안 에드워드는 그의 여동생이 머시아 국경에 데인인들을 붙잡아 놓는 동안 데인로를 향해 밀고 들어갔다. 오라버니가 역공을 취하는 동안 애설플레드는 두 방면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그 무렵 노르웨이의 바이킹들이 아일랜드로부터 나타나 서부해안을 공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동쪽 구경에서는 데인인들을, 서쪽 국경에서는 웨일즈인들을, 그리고 북서쪽으로는 디(Dee) 강으로부터 탬워스(Tamworth)에 이르는 노르웨이인들의 침략을 맡기 위해 일련의 새로운 머시아 자치도시들을 세웠다.
917년 애설플레드는 더비를 점령하였는데, 이는 적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동시에 에드워드가 이스트 앵글리아로 진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918년 고립된 데인인 부대들이 스탬퍼드(Stamford), 레스터, 노팅엄, 그리고 링컨에서 계속 버티고 있었지만, 데인로는 전부 에드워드의 수중에 떨어졌다. 레스터는 애설플레드에게 항복했다. 이후 애설플레드는 사망했지만 에드워드는 노팅엄, 스팸퍼드, 링컨을 점령하여 920년 말에 이르면 국경선이 험버 강까지 확대되었다. 또한 에드워드는 이 무렵 그위네드외 더비드(Dyfed)의 웨일즈 왕들로부터 복종을 받아내었다.
10세기에 이르면 잉글랜드인들과 데인인들의 집단 외 제3의 세력이 출현하였다. 이들은 앞서 애설플레드의 머시아를 공격하기도 했던, 아일랜드에서 온 노르웨이인들이었다. 이들은 데인인들에게 어떤 호감도 지니고 있지 않았으며, 그들의 중요한 목적은 북부의 데인로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918년, 그들의 지도자 라그날드(Raegnald)는 노섬브리아 지역을 기점으로 하여 스코틀랜드를 공격했고, 다음해에는 요크를 점령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 노르만인들의 왕국은 단절이 있었지만 35년간 지속되었다.
당초에 웨식스 왕가는 라그날드의 지위를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926년 에드워드의 후계자 애설스턴은 요크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그 곳의 방어시설들을 파괴하였으며, 스코틀랜드와 스트라스클라이드의 왕들에게 항복을 받아내었다. 또한 그는 10년 후 더블린의 왕 올라프 구스프리슨(Olaf Guthfrithsson)이 대함선을 이끌고 해협을 건너와 스코트인들의 왕, 스트라스클라이드의 왕과 합세하여 침입하자, 애설스턴은 이들과 맞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애설스턴의 권위는 절정에 달하였으며 그는 외국의 왕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프랑스와 독일의 왕실들과 결혼동맹을 맺었다.
애설스턴 사후 노르웨이인들은 올라프의 지휘 아래 다시 힘을 떨쳤고, 애설스턴의 후계자 에드먼드는 그를 요크와 그 부속령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올라프는 941년 사망하였고, 에드먼드는 이후 4년간 북부 데인로 지역을 회복하고 스트라스클라이드를 유린하였다. 947년 에드먼드 사후 요크는 또다시 북방 군주들의 수중에 넘어갔으나 잉글랜드의 새로운 군주 에드리드(Edred)는 954년 노섬브리아를 침공하여 요크의 마지막 왕을 추방시키고(결국 피살되었다) 최종적인 승리를 이루었다.
이후 '평화왕 에드가'(Edgar the Peaceful)의 시대가 되었다. 50년동안 진행된 전쟁이 끝났기에 에드가는 정복자가 될 수는 없었다. 한 역사가는 '역사에서 그가 한 일은 잉글랜드에서 그 이전 왕들이 수립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고 기술했다. *1) 그러나 에드가의 시대에 이루어진 일들은 미미한 업적이 아니었다.
데인로의 재정복 이후 에드가는 데인로의 주민들에게 그들 자신의 법적 - 사회적 관습을 계속 허용함으로써 앵글로 - 색슨인과 데인인을 융합시키는데 주력했다. 그리하여 에드가는 색슨인들과 데인인들에게 다 같이 왕으로 받아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왕들에게도 브레트왈더로 인정받았으며 그 결과 비교적 평화로운 상황 아래서 대륙의 여러 왕국들과 교류를 펼쳐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에드가 왕의 치세 15년 동안 앵글로 - 색슨 문화와 에술은 뒤늦게 개화하였으며, 이와 함께 성 던스턴(St. Dunstan)의 지도 아래 여러 수도원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973년, 에드가는 마침내 바스에서 통일된 잉글랜드 왕으로 대관했다. 이때의 대관식은 오늘날까지 영국왕 대관식의 본이 되고있다.
애설스턴을 시작으로 이후의 잉글랜드 군주들은 더 자주 법률을 만들고 법의 내용을 보다 세세히 규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1세기 초에 이르면 가장 중대한 범법행위에 대한 재판은 왕에게 유보되었고, 국가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왕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따라서 10세기에 유사한 규모를 가진 다른 유럽국가들과 비교해도 영국의 왕권은 비교적 강력한 편이었다.
왕의 의도는 잘 개선된 지방 정부체제를 통해 시행되었다. 에드가 통치하에서 잉글랜드의 주들은 안정적인 형식을 갖게 되었고, 이는 정확히 1천년 후인 1974년까지 그 모습이 유지되었다. 물론 이것이 중국의 왕조에서 보이는 식의 중앙집권 확립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에드가는 올더맨(alderman)이라고 불리우는 유력자들과 정규적으로 접촉을 계속하였다. 앵글로 - 색슨 후기의 잉글랜드 대부분은 샤이어(shire)라는 행정 조직으로 나뉘어 있었다.
올더맨들은 이러한 샤이어의 중대사를 주재하는 자들이었는데, *2) 이렇게 올더맨의 지위가 높아지고 그들의 관심이 중앙 정치에 이끌려감에 따라 그들은 점차 사소한 지방행정에서 멀어졌다. 따라서 일반 주민들과 더 가까이 있고 해당 샤이어의 관리에 전념할 수 있는 다른 '왕실' 관리가 파견되었는데, 이 같은 관리들이 셰리프(sheriff)였다. 그들은 왕의 대리자로서, 왕의 재정적 이익을 지킬 업무를 짊어진 왕의 하인이었다.
에드가는 대략 973년 새로운 페니 주화를 도입했고, 이는 노르만의 정복 이후까지도 오랫동안 영국 통화의 기초로 남아 있었다. 이렇게 여러가지가 있는 에드가의 업적 중에 인상적인 부분이라면 수도원 개혁을 추진한 부분이다. 10세기 초기의 잉글랜드에는 대부분의 유서깊고 엄숙한 수도원이 데인인들의 잔혹한 칼날에 파괴되어버린 반면, 남아 있던 수도원들은 절제 없고 세속적인 생활양식으로 점점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수도원 개혁은 940년대 초기부터 국왕의 후원으로 시작하였다. 그러나 에드먼드와 에드리드 등은 미온적인 모습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에드가의 전임이었던 에드위그(Eadwig)의 경우 주요한 성직자였던 던스턴과 사이가 나빠 그를 추방시키기에 이르렀다. *3) 959년 에드가가 즉위하면서 시대의 바람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던스턴은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또다른 위대한 성직자들인 애설월트, 오스왈드 등도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반세기가 넘는 동안 약 50여개의 수도원이 재건립되었다.
새로운 수도원들의 수도사들은 대륙의 관행과 일치되도록 의례와 일상생활 형식을 정교하게 가다듬은 베네딕트 규율에 근거한 생활양식을 따랐다. 970년에 이르러 이는 잉글랜드의 모든 수도원이 지켜야 하는 하나의 규칙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에드가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수도원 개혁운동에 국왕이 참여함으로서 그는 운동의 권위를 높였고, 모든 새로운 수도원들이 왕의 후원을 받았다. 에드가는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제공했다. 귀족들은 비록 자신들의 금고에서 끊임없이 돈이 나가는 사실에 대해 분통을 터뜨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건립에 돈을 지불해야 했다. 수도원 건립을 돕는것이 사회적 위세를 높이는 행위가 되었던 것이다.
이는 완벽한 win - win 전략이었을 것이다. 새로운 수도원들은 국왕의 도움으로 부유하고 존경받았으며 보물과 화려한 건축물들을 기증받았다. 최고급으로 장식된 많은 책들로 인해 영국의 예술은 풍성해졌다. 겉치레를 떠난 실제적인 권위를 보자면, 유력한 성직자들은 후기 앵글로 - 색슨 왕들에게 가장 존중받는 조언자들이었다. 성직자들에게 이러한 대우를 함으로서 국왕은 어떤 전임자들보다도 신성한 인격을 부여받을 수 있았다. 에드가의 대관식은 30세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교회의 법상 사제가 될 수 있는 최연소 나이였다. 예식의 절정은 대관식이 아니라 성유를 부어 성별시키는 의식이었으며, 이것은 왕에게 거의 사제와 같은 신분을 부여하고 왕을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지위에 오르게 하였다. 설교사인 이브셤의 앨프리크(Ælfric of Eynsham)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을 왕이 되게 할 수 없으나, 인민은 자신들이 가장 마음에 드는 이를 왕으로 선택할 자유로운 의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일단 그가 왕으로 성별되면 그는 인민 위에 권력을 갖게 되며, 인민은 자신들의 목에서 그의 멍에를 벗겨 버리려고 해서는 안된다." *4)
윈체스터의 뉴 민스터의 정초 헌장에 그려진 에드가 왕의 그림은 윈체스터식 수사본 장식화의 최우수 대표작이라고 할만 하다. 이 그림에서 에드가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의 모습, 즉 왕관을 쓰고 두 명의 성인 사이에 서서, 지상을 통치하는 왕으로서 하늘의 왕과 연결되고 있다.
크누트 대왕
그러나 에드가의 사후 그의 두 아들 '에드워드 순교왕'(Edward the Martyr)과 '준비 되지 않은 애설레드'(Æthelred the Unready)의 치세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왕의 무능과 귀족들 간의 대립, 분쟁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에드워드의 짦은 치세를 뒤이어 왕위에 오른 애설레드는 불과 10여세였다. 특히 애설레드는 항상 평판이 나빴다. 준비 되지 않은, 혹은 조언받지 못한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는 귀족들을 불신하여 신망을 잃었으며, 우유부단하고 판단을 그르치기 일쑤였다. 그는 올바른 편을 믿고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획득하는 요령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률과 사법은 학식 있는 대주교 울프스턴(Wulfstan)의 지도로 계속 발전해나가고 있었기에, 만일 바이킹의 재침이라는 새로운 문제만 없었다면 잉글랜드란 국가는 더욱 공고해졌을 것이다. 새로운 침입자들은 그들의 선조들보다 훨씬 더 위험스러웠다. 970년 무렵 덴마크와 노르웨이 두 곳을 장악하고 있던 덴마크 군주 '푸른 이의 헤럴드'(Harald Bluetooth)는 고도로 훈련된 직업군인들로 이루어진 강력한 군대를 창설했다. 988년 헤럴드는 그의 아들 스웨인(Swein)에 의해서 퇴위되었는데, 스웨인은 아버지의 군대를 계속 유지시켰고 군사공동체를 정주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요새들을 건축했다.
이 막강하고 규율이 갖추어진 군대는 애설레드가 즉위한 지 1~2년 만에 군사적 공격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군대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고, 그들의 공격 전술은 치고 빠지는 소규모 전투 형태였다. 그러나 911년에 대규모의 덴마크 군대가 몰던(Maldon)에서 올더먼 버르스노스(Byrthnoth)와 에식스 군대를 패배시켰고, 켄트와 햄스펴, 웨식스 서부까지 약탈하였다. 이는 2만 2,000파운드라는 막대한 돈을 지불함으로써 간신히 회유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형태는 994년, 997년, 그리고 1002년에 있었던 대대적인 침공에서도 되풀이 되었다. 994년 스웨인은 90여척의 대선단에 2,000여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켄트에 상륙해 잉글랜드 남부 일대를 약탈한 후 1만 6,000파운드의 대금을 받고서 되돌아갔다. 1002년에는 은화 2만 4,000파운드를 받았으며 액수는 점점 올라가 1007년에는 3만 파운드, 그리고 1012년에는 4만 8,000파운드가 지불되었다. 이때의 침공에서 바이킹들은 켄터베리를 약탈하고 대주교를 살해하였다.
기실 애설레드의 통치가 그토록 악명 높았던것은 바로 이때문이었다. 이러한 바이킹들의 침략을 회유하여 달래 돌려보내기 위해 지불하는 돈은 소위 데인겔드(Danegeld)로 불리웠는데, 그 후 데인겔드는 토지에 대한 세금의 형태로 부과되어 오랫동안 잉글랜드 농민들에게 무거운 부담이 되었다.
애설레드는 그 당시 유럽 전역을 통틀어서도 꽤 인상적이라고 할만한 강력하고 체제가 잡힌 귀족제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1002년부터 바이킹의 위협이 강력해짐에 따라 왕권은 기본적인 취약성을 드러냈다. 왕의 토지는 웨식스에 집중되어 있었고, 왕의 활동 반경도 그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북부와 동부에서 지지를 확보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가 있다면 바이킹을 막기 위해서는 그 지역들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애설레드는 나름대로 비웨식스계의 주민들을 한데 묶어 잉글랜드를 통합하고 방어체제를 수립하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어리석음은 이러한 과업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 이는 누구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중압감에 시달린 애설레드는 1002년 잉글랜드내의 모든 데인인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어느 지역에서는 주민들 대부분이 데인인들이었므로 이 히스테리컬한 명령은 완전히 시행될 수는 없었겠지만, 데인인들중에 단체로 학살당한 존재들은 분명히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러한 조치는 아무런 소득도 없었고, 그저 1003년 스웨인 왕 자신이 이끄는 덴마크 군대의 출병 명분만 주었을 뿐이었다. 스웨인 왕의 군대는 노리치를 함락시켰으나 이스트 앵글리아 원정에서 큰 손실을 입었고, 그는 1005년 덴마크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음해에 다시 돌아온 스웨인은 버크셔, 월트셔, 햄프셔를 군대로 휩쓸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내었다.
이 무렵 토르켈(Thorkell the Tall)이 이끄는 또다른 데인인 군대가 상륙하여 1010년에 옥스퍼드를 불태우고 켄트로 침입해 들어간 후 이스트 앵글리아로 이동하는 일이 있었다. 이 공격은 토르켈이 갑작스레 마음을 바꾸어 마무리 되었지만, 잉글랜드의 방어력이 취약하다는 사실은 모든 이들에게 분명해졌다.
이제 1013년에 이르러, 또다시 군대를 이끌고 돌아온 스웨인 왕은 자신의 위풍당당하고 무시무시한 군대를 동원하여 잉글랜드를 정복해 버릴 생각이었다. 애설레드의 통치에 환멸을 느낀 데인로 지역의 사람들은 데인인 왕을 환영하며 즉시 그를 받아들였다. 그의 군대는 상륙하자마자 잉글랜드 전역을 유린하였으며, 그 해가 끝나갈 무렵에는 옥스퍼드, 윈체스터, 런던을 함락시켰다. 애설레드는 노르망디로 달아나야 했다.
그러나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한세대 앞서 잉글랜드 - 스칸디나비아 대제국, 즉 북해제국(北海帝國 North Sea Empire)의 절정을 눈앞에 둔 듯 하였던 스웨인은 1014년 2월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따라서 스웨인의 아들 해럴드가 스칸디나비아 제국을 계승하였으나 잉글랜드에 머물고 있던 부대는 동생인 크누트(Cnut)를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하였다. 한편 소름끼치는 대적인 스웨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애설레드는 고국으로 귀환하여 데인인들에 대한 전투를 개시했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여긴 크누트는 우선 덴마크로 되돌아갔다.
크누트의 준비 기간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는 이듬 해인 1015년 더욱 많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는데, 당시 잉글랜드는 국왕인 애설레드에 대해 그의 아들인 철기병의 에드문드(Edmund Ironside)가 자기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북부의 데인로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정복자인 크누트에게 있어서는 조금도 나쁠 것이 없는 상황이었고, 그는 몇달 동안 노섬브리아를 장악한 후 런던을 향해 진군하였다.
이 데인인 부대가 도달하기 전 애설레드는 혼란스러운 정국을 두고 사망했고, 이제 런던 시민들과 귀족들은 에드문드를 적법한 후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유력한 올더먼들, 주교와 수도원장, 웨식스의 많은 사람들조차 크누트의 지배권을 받아들였다. 물론 에드문드는 이에 승복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의 군대를 모았고, 얼마동안은 데인들이 다시 쫓겨갈수도 있는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016년 가을, 크누트는 에식스의 애싱턴(Ashington)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 후의 조약에 따라 에드문드는 웨식스, 에식스, 이스트 앵글리아를 유지하고 크누트가 머시아와 노섬브리아 등 험버 강 이북의 전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으나, 에드문드가 재위 7개월 만에 살해되자 크누트는 전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크누트는 50년 뒤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 당면했던 것들과 같은 문제들을 처리해야만 했다. 윌리엄처럼 크누트도 정복자가 아니라 합법적인 잉글랜드의 왕으로서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애설레드의 미망인과 결혼했으며, 왕위를 지키기 위해 무자비하게 행동했다. 애설레드의 장자를 포함하여 몇몇 지도적인 잉글랜드인들이 살해당했으며, 데인계 측근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잉글랜드인의 영지를 몰수해서 나누어주기도 했다. 허나 일단 왕위가 안정되자 크누트는 문명화된 왕권의 전통적인 특징들을 열성적으로 체택하였다. 법률를 반포하고, 수도원들을 세우는 등의 일 말이다. 연대기의 작가는 크누트에 대해 '야만인에서 가장 기독교인다운 왕' 으로 변모했다고 표현했다.
비록 앵글로 - 색슨인들에게는 어쩌면 굴욕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크누트의 지배는 차라리 잘된 선택이었다. 그는 잉글랜드의 왕으로 통치하기로 작정했기에, 크누트의 재위 19년 동안 잉글랜드는 평화와 안정과 번영을 누렸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크누트가 왕좌에 앉아있는 동안 데인족의 대규모 침입은 더 있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는 데인인들과 앵글로 - 색슨인들을 융합하고 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으며, 앵글로 - 색슨 잉글랜드의 제도를 존중하여 자신의 정부가 앞선 앵글로 - 색슨 정부의 계승자임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앵글로 - 색슨 잉글랜드의 행정제도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애설레드가 발부한 특허장이나 다른 문서들의 형식도 그 치하에서 그대로 답습되었다.
1018년 그는 유력한 한 데인인과 앵글로 - 색슨인들을 요크에 소집하여 그들이 모두 에드가의 법체계 아래서 평화롭게 살아갈 것을 약속하게 했고, 앵글로 - 색슨인들을 주요 올더맨으로 임명했으며, 이전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주교들의 자문을 받아 통치할 것을 약속했다.
이러한 잉글랜드는 사실 크누트의 지배영역에선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1019년 크누트의 형이 죽자 그는 거대한 북유럽 제도를 상속받았고, 이는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그리고 북해의 사실상 전 바다를 자신의 패권으로 삼는 가공할 북해 제국이었다. 따라서 1020년대 부터 크누트는 덴마크의 내정에 몰두하였는데, 이는 잉글랜드에게는 그리 좋은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외국인이자 잉글랜드를 자주 비워야 하는, 말하자면 다소 불안정한 왕이였던 크누트는 상당한 숫자의 친위대 병력을 거느렸다. 이들이 자신의 군주에 대해,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보답을 요구하는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부담은 고스란히 잉글랜드의 토지 소유자들에게 돌아갔다. 데인인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30년동안 돈을 지불했던 잉글랜드읜들은 이제 데인인들로 이루어진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재정을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크누트가 잉글랜드를 완전히 방치해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해외에 오래 머무르는 기간동안 나름대로 잉글랜드의 정부를 위해 애를 썻다. 1017년 그는 왕국을 노섬브리아, 이스트 앵글리아, 머시아와 웨식스의 네 개 백장령으로 나누었다. 이때 전자인 노섬브리아와 이스트 앵글리아는 데인계 백작들이 자리를 차지했고 후자는 앵글로 - 색슨인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스도교도인 크누트는 교회와의 밀접한 연대에 힘썻다. *5) 지난 수세기동안 잉글랜드의 수도원들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 것이 데인인들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 데인인들 중 가장 위대한 이 군주는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는 일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교회 성직자들은 그의 서기나 관리로서 크누트에게 봉사했다.
앵글로 - 색슨인들은 크누트를 정복자로 여겼지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준 정복자, 법을 시행하고 교회를 존숭하고, 상인들에게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고 그들에게 출세의 길을 마련해 준 정복자로 인정했다. 잉글랜드는 확고히 장악한 그는 원정에 나서 덴마크에서 남쪽으로 영토를 확대했으며, 노르웨이를 정복하고 스웨덴의 일부를 병합함으로서 역사상 위대한 정복자들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1027년 그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크누트는 황제로 하여금 그의 영내를 여행하는 영국인 순례자와 상인에 대한 통행세를 줄이도록 했으며, 교황으로 하여금 잉글랜드의 대주교에게 부과되는 무거운 부담을 줄이도록 했다.
그러나 북해 전체를 지배했던 이 왕국은, 크누트의 사후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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