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로 - 색슨 연대기』의 789년조에는 한 가지 항목이 들어 있다. 즉 웨식스 가에 대한 모든 경쟁자들을,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그동안 브리튼의 문명이 이루어 놓은 최상급의 업적들을 모조리 일소해 버릴 폭풍의 첫 입김에 관한 항목이 그것이었다.
'그 해에 (웨식스 왕) 베어르크트리크(Beorhtric)는 오퍼 왕의 딸 에드부르크(Eadburh)를 아내로 삼았다. 그런데 그의 치세기간 중 회르살란드(Horthaland)의 노르웨이인들을 태운 세 척의 배가 처음으로 왔는데, 지방관리가 그 곳으로 달려가 그들을 왕이 장원으로 끌고가려고 했다. 그것은 그들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그를 죽였다. 이들이 잉글랜드에 온 최초의 데인인(Danes)의 배들이었던 것이다.'
남부해안을 공격하는 '해상의 이교도' 에 대한 언급은 그 후에 곧 나타나지만 이들은 사소한 사건이었다. 그보다 더 심각하고 충격적이었던 것은 북부지방에 대한 공격으로, 이는 793년 린디스판, 794년 재로우(Jarrow), 그리고 795년 아이오우너 등 브리튼 역사상 가장 성스러운 수도원들이 연이어 약탈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방비의 수도사들을 습격해 두개골을 까부수고 농민병들을 살육했다. 수도사들은 그들의 연도문(煉禱文) 끝에 "주여, 노르만의 광포로부터 저희들을 구하소서!(A furore Normannorum libera nos, Domine!)" 라는 구절을 덧붙였다.
데인족은 북게르만족에 속한다. 그들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에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5세기 중엽이 되면 덴마크 지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에게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죽은 남편의 화장 불에 아내를 불태웠으며 포로들의 신체를 훼손하여 불구로 만들었다. 키가 크고, 피부색이 하얗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그들은 붉은 옷을 즐겨 입고 정교하게 장식된 칼과 단검을 지나고 다녔다. 뱃머리가 높이 솟아오른 날씬한 긴 배를 타고 건너온 바이킹 약탈자들은 예상치 못한 장소에 상륙하거나 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들어가 약탈을 자행하고는 미처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재빨리 물러섰다. 그들은 미늘 갑옷과 투구, 가오리연 모양의 방패로 무장하고, 커다란 철제 도끼를 휘두르면서 치고 달아나는(hit - and - run) 전법으로 교회와 수도원들을 약탈했다.
데인인들과 노르웨이 침략자들의 극적인 세력 확장은 전유럽적 현상이었고,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침략은 단지 그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그들이 완전히 미개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840년대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몇 세대 동안 무역에 종사해왔다. 허나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하자 자국에서는 적절한 생계수단을 찾기가 어려워졌고, 많은 모험가들은 손쉬운 약탈물들로 가득찬 수도원이 있는 기름진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며, 그래서 초기의 침략들 이후 다른 침략이 더 빨리 이어지지 않았다는것이 오히려 놀라울 지경이다. *1)
8세기 말 이래 데인인들의 산발적인 침략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835년에 그들은 셰피(Sheppy)에 상륙하여 본격적으로 침략을 시작했다. 이후 30년 동안 그들의 침략은 거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초기에는 해안 일대를 약탈하다가 겨울에 다시 그들의 고향으로 되돌아갔으나 850년 무렵부터는 차츰 해안에 캠프를 치고 겨울을 났다. 그러고는 템즈 강을 거슬러 올라가, 이스트 앵글리아와 노섬브리아 연안에 거주지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836년 웨식스의 에그버트는 플리머스(Plymouth) 근처의 헹기스츠다운(Hengists Down)에서 데인인들과 웨일즈인들의 연합군을 물리쳤다. 851년에는 그의 아들 애설울프(Aethelwulf)가 서리(Surrey)의 오클리(Ockley)에서 데인인들에 대항하여 커다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진정한 전쟁은 그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865년 할프던(Halfdan)과 무골의 아이바르(Ivarr the Boneless)가 이끄는 데인인들의 '대군(Great Army)' 이 이스트 앵글리아에 상륙하였다. 그곳에서 몇 달을 머문 후 이들은 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때마침 왕가의 내분으로 분열되어 있던 노섬브리아에 들어가 867년 요크를 점령하였다. 서로 다투고 있던 두 왕이 모두 죽자 데인인들은 노섬브리아를 속국으로 삼아 통치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대리자를 세웠다. 그후 군대는 머시아로 향하였지만, 저항에 부딪히자 싸우지 않고 요크로 후퇴했다가 869년에는 다시 이스트 앵글리아로 내려왔다. 주민들은 전쟁에서 패배했고 그들의 왕 에드먼드(Edmund)는 희생제물로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이렇게 하여 불과 3년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한때 위대했던 노섬브리아와 이스트 앵글리아는 역사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잔혹스럽고 압도적인 힘으로 그러한 일을 이루어낸 데인족의 군대는 870년 레딩(Reading)에 주둔하여 웨식스 마저 앞서 사라진 왕국들의 전철을 밞게 하려는 채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에그버트의 뒤를 이은 애설울프는 원대한 야망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으나 유능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다른 왕조들을 파멸시켰던 집안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했다는 공적이 있었다. 데인족의 군대가 눈 앞에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조치는 어떤 위대한 개혁보다도 주효한 조치였다. 애설울프의 아들들은 나이 순으로 평화롭게 왕위를 계승했는데, 바이킹들이 공격해 왔을 때는 셋째 아들인 애설레드(Aethelred)가 왕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애설레드의 후계자이며 동생이자 협조자인 알프레드는 앵글로 - 색슨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제왕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었던 남자였다.
알프레드가 전쟁터에서 처음으로 데인족과 만난 것은 868년이었다. 그때는 데인족 대군을 맞아 전쟁을 하고 있던 머시아의 버그레드를 돕기 위해 그의 형인 애설레드 1세가 지원군을 이끌고 갔을 때였다. 이후 애설레드와 알프레드 휘하의 연합군은 버크셔 구릉지대에서 데인인들을 맞아, 그들에게 처음으로 심각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데인인들은 레딩으로 후퇴했으나 곧 다시 진격하여 베이징스토크(Basingstoke) 부근에서 두 형제를 패배시켰다. 874년 4월에는 새로운 데인인 군대가 상륙했고, 웨식스 침략이 임박한 듯 보였지만 잉글랜드 전역을 찾아보아도 도움을 청할 곳이라고는 전혀 보이질 않았다. 종말이 눈 앞에 보이는 듯한 시점에서 애설레드 왕이 죽고, 그 동생은 웨스트 색슨인들의 왕이 되었다.
대왕의 시대
이 위대한 군주의 통치 초기 상황은 암울하고 어려웠다. 1년간 작은 패배가 끊임없이 이어진 후, 알프레드는 데인인들에게 돈을 주어 그들을 내쫒아야만 했다. 이후 데인인들은 5년 동안 웨식스를 건드리지 않았지만, 이것은 최종적인 상황의 종료를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그저 '집행유예' 일 뿐이었다. 잠시 동안 웨식스의 파멸을 미뤄놓은 데인인들은 지난 수 세기 동안 위대한 왕국으로 존재했던 머시아로 진격하여, 버그레드 왕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대리인을 앉혔다. 이리하여 세 번째로 또 하나의 고대 왕국이 영원히 사라졌다.
이 시점에서 데인인들의 대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할프던의 지휘 아래 북쪽으로 갔으며 영구히 정착하기 위해 요크셔를 분할하기 시작했다. 다른 하나는 구스럼(Guthtum), 오스키텔(Oscytel), 아눈드(Anund)의 지휘 아래 남쪽으로 갔으며, 875년과 876년에 웨식스에 대한 또 한번의 공격을 시작했다. 처음에 그들의 성과는 별로 없었으며, 877년 이들은 머시아의 분할을 끝마치기 위해 다시 철수하였다. 그리고 또다른 그룹은 서로 갈라 링컨셔(lincolnshire), 노팅엄셔(Nottinghamshire), 더비셔(Derbyshire), 그리고 레스터셔(Leicestershire) 등지로 옮겨갔다.
따라서 878년 그들이 세번째로 웨식스를 공격했을 때는, 잘게 쪼개진 탓에 세기가 약해진 편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 일지라도 데인족의 군대는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치퍼넘(Chippenham)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그들은 우위에 섰다. 윌트셔(Wiltshire)와 햄프셔(Hampshire)의 대부분이 항복했고, 알프레드는 패배하여 달아나 서머셋(somerset)의 파레트(Parret) 늪지대에 있는 애슬니(Athelney) 섬으로 숨어들어 7주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데인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알프레드 대왕이 케이크를 태웠다는 유명한 전설은 바로 이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2) 희망이라는 단어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어보였고, 잉글랜드 전역을 데인인들이 장악하는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조용히 떄를 기다리던 알프레드는 봄이 되자 민병대를 모아 에딩턴(Edington)에 자리 잡은 데인인들에게 일격을 가해 기적같은 반전을 이루었다. 승리는 갑작스러웠지만 결정적인 것이었다. 데인인들의 지도자 구스럼은 패배를 받아들였으며,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맹세했다. 두 왕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이들은 조약을 통해 데인로(Danelaw)라고 불리운 데인인들의 지배 영역과 웨식스의 지배 영역을 나뉘었는데, 새로운 경계는 템즈 강 하구에서 런던을 거쳐 체스터에 이르는 선으로 책정되어 그 동북부는 구스럼의, 서남부는 알프레드의 지배 영역이 되었다. 이는 데인인들이 점령한 잉글랜드의 많은 지역은 잉글랜드인 스스로도 인정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880년 가을 무렵, 데인인들은 웨식스에서 물러나 이스트 앵글리아에 조직적인 정착을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886년 알프레드는 런던을 손에 넣었는데, 이것은 데인인 수비대를 물리친 후의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893년에는 데인인들의 대부대가 템즈 강 어귀에 상륙하여 3년동안 잉글랜드 전역을 습격했다. 알프레드는 자신의 왕국을 안전하게 지키고 데인인들의 국경 서쪽 및 남쪽의 나머지 영토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데 힘썻다.
이러한 첫 사업은 육군과 해군에 대한 개혁이었다. *3) 알프레드의 군조직 개편으로 어느 때나 군대의 절반만이 복무하게 되었는데, *4) 그것은 이후의 '선발된 민병대(select fyrd)' 즉 시민군(militia)의 등장을 예견케 했으며 또한 필경 규모는 더 작지만 더욱 효율적인 군대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해상의 약탈자들에 대항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알프레드는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더욱 많은 배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프레드는 바이킹의 배보다 훨씬 더 큰, 60개 이상의 노를 지닌 선박들을 건조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알프레드의 방위 계획은 그를 영국 역사상 최초의 도시계획자가 되게 하였다. 880년 말엽의 웨식스는 공공 성채들의 그물망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중 몇몇은 규칙적인 격자식의 도로가 놓여 있었으며, 그래서 이런 도시를 계획된 요새도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5) 게중 가장 인상적인 경우는 윈체스터인데, 여기서에서는 로마 시대의 도로를 무시한 새로운 격자식의 도로를 로마 시대 성벽 안에 깔았다. 이와 같은 도로망은 옥스퍼드, 치체스터(Chichester), 웨럼(Wareham),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다. 계획은 대단히 체계적이었으며, 측량사들은 도로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66피트 자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6) 이러한 요새들은 버러(Borough)로 불리운다. 이러한 버러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단순한 방어 시설을 넘어서 행정상 중요한 기구로 작용했다. *7)
알프레드의 성공을 도운 것은 군사적 능력보다도 그의 탁월한 외교술과 사람들을 끄는 매력이었다. 그는 머시아 및 웨일스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는데, 웨일스의 통치자들은 그의 지지를 얻기 위해 병력을 지원하기도 했다. 오랜 기간 패권국으로 지낸 머시아의 자존심 역시 알프레드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머시아의 일을 자신이 아닌 기존의 국왕 자문회의로 넘기면서, 그 자문회의는 애설레드라는 머시아 귀족이 주도하게 하였다. 이후 알프레드가 런던을 점령했을때 그는 런던을 머시아가 통제하도록 즉시 넘겨주었다. 애설레드는 이렇게 대접받았으므로 국왕에게 매우 충성스러웠으며, 알프레드 사후 애설레드는 아내 애설플레드(Aethelflaed)와 함께 대왕의 유지를 이어 받아 데인인들에 대한 머시아의 공격을 주도했다.
만약 알프레드가 *8) 그 이전의 어떤 사람보다도 더 진정한 '잉글랜드인들의 왕' 이었다면, 그것은 단순히 강한 군사력 때문이거나 또는 어떤 경쟁자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그와 그의 가족이 공정하고 사려깊은 통치자들임을 알았기 때문에 '진정으로' 그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데인인들이 끼친 피해로 인해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비드와 오퍼의 세계는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데인족들의 잔혹스러움과 그 파괴의 여파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들에게 몰락한 세 왕국, 파괴된 교관구들, 약탈당한 무수한 수도원들, 잉글랜드 동부의 대부분에서 거의 완전히 분실된 특허장(charters) 및 다른 문서들 등의 증거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도원들의 파괴는 게중 가장 끔찍하진 않더라도 가장 여파가 막대했다. 거대한 수도원들은 학문과 문화의 주요한 보고로서 그 시대 지식의 여명을 보존하고 있던 성지였기 때문이다.
알프레드를 진정으로 위대한 대왕으로 칭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정복한 땅이 넒어서가 아니라(사실 그것들은 그리 넒지 못했다.) 완전히 무너져버린 잉글랜드의 교육과 학문을 부활시키기 위해 자신의 남은 마지막 여생의 10여년간을 전력으로 바쳤기 때문이다. 그는 잉글랜드의 모든 젊은이들이 학문에 정진하게 될 날을 바랐다. 그는 잉글랜드의 모든 자유민들이 영어를 읽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잉글랜드의 모든 성직자들이 라틴어를 읽을 수 있기를 바래었다.
사를마뉴처럼 그는 궁정 지식인 집단을 통해서 자신의 교육계획을 실행했다. 바이킹의 침략이 소강상태를 보였던 878년에서 885년 사이, 그는 머시아와 웨일스는 물론이고 전 유럽의 많은 학자를 잉글랜드로 초청했다. 알프레드는 직접 라틴어를 배웠고 887년에는 자신의 지휘 아래 라틴어 서적들을 대대적으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또한 영어로 번역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재산이 있는 모든 자유민 젊은이들에게 글을 배우도록 했다. *9) 알프레드는 필사본들의 파손과 학문의 쇠퇴를 애석해 했는데, 그는 헨리 8세(Henry VIII, 1491.6.28 ~ 1547.1.28) 이전 책을 저술했던 유일한 영국왕이었다. 그의 궁정 지식인 집단이 했던 번역물들(비드의 저작까지 포함해서) 가운데 세 가지는 알프레드가 직접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10) 성직자들에게 라틴어 학습은 이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리하여 비드의 저작이자 영국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필수인 『잉글랜드인들의 교회사』,5세기의 신학자 오로시우스가 쓴 『 이교도에 대항한 7권의 역사서』(Historiarum daversus paganos libri Ⅶ),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의 『목회지침』(Liber regulae pastoralis), 워퍼드 주교가 번역한 그레고리우스의 『대화』(Dialogi divita et miraculis patrum Italicorum), 5세기 신학자인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Confesio),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De Consolatio Philosophiae) 등의 책들이 번역되었다. 특히 890년경에 읽혀지기 시작한 색슨족 시대의 잉글랜드에 관한 정보를 담은 『앵글로 - 색슨 연대기』는 알프레드가 추진하던 학문 부흥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프레드가 추진하던 문예부흥이 얼마나 성공했는지 알기 어렵지만, 두 세대 후의 수도원 개혁을 위한 좋은 토대인 보다 많은 학식을 지닌 성직자들과 보다 교양 있는 평신도층은 그것에 의해 출발했을 것이다. 그 이후의 사건들에 의해 그의 다양한 계획들 가운데 아주 많은 것들이 열매를 맺게 된 것은 알프레드의 행운이었다. 그러나 이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초기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으며, 영국의 전 시대를 통틀어서도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알프레드는 잉글랜드가 웨식스 왕가에 의해 완전히 통일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지만, 그가 9세기 유럽에서 카롤루스 대제에 버금가는 위대한 군주였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오랜 인내 끝에 웨식스를 데인인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해 낸 것은 그의 군사적 수완만이 아니라 먼 앞날을 내다본 여러 개혁 덕택이었다. 알프레드는 유능한 전사이자 법률 제정자이며, 학자이자 신실한 그리스도교도 군주였다. 그는 초기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서 통일된 잉글랜드 왕국의 초석을 닦았다.
그는 진실하고, 인정 많고, 국민을 위해 헌신했으며, 용감하고 정력적이며 무엇보다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학문에 대한 열의와 사물에 대해 탐구심이 강해 늘 시간을 아껴 공부하고 정사에 몰두했다. 이 같은 알프레드의 개성과 성품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따르고 좋아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잉글랜드의 총아(England's darling)로 불리우며,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대왕(The Great)이라 일컫어지는 이유는 그의 왕국이 영국 역사상 가장 넒거나 정복한 땅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성품이 위대했기 때문이었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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