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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스토옙스키

Jobs9 2020. 9. 22.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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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작품이자, 이전 작품에서 다루었던 크고 작은 사상적 문제들의 총합이며 그 문제들에 대해 작가가 제시하는 가장 성숙한 답변이다. 물리적인 차원에서 두터운 분량뿐만이 아니라, 사상적, 심리적, 철학적 차원에서 너무도 방대한 이 소설을 1879년과 1880년, 2년 만에 썼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천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작품을 탈고한 지 두 달 만에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또 자신이 평생을 두고 옹호했던 신의 품에 안겼다. 그래서 <작가로부터>에서 밝히고 있는 초기 의도, 즉 거대한 2부작 소설로 구성했던 작가의 의도는 완성하지 못한 채 남겨지고 만다. 우리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라 알고 있는 장편은 작가의 초기 의도에 비추어 본다면 ≪위대한 죄인의 생애≫라는 2부작의 1부에 해당하고, 따라서 미완의 대작인 셈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논의하겠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테마나 플롯에서 하나의 완성된 장편 소설로서 아무런 손색이 없다. 또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은 도스토옙스키가 경제적인 압박이나 심리적인 불안 등에서 벗어나, 작가로서 사상가로서 굳건한 위치를 다진 상태에서 쓴 유일한 작품이다. 그는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던 당대의 귀족 작가들과는 달리 요즘 말로 “생계형 작가”였고, 언제나 돈과 시간에 쫓기며 글을 써냈다. 돈의 쓰임이나 벌이 등, 실제적인 삶의 방식에서는 거의 무능하다 할 정도였고, 또한 그런 실제적인 것에 얽매이는 그 자체를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돈에 대한 이런 태도는 작가의 이전 작품들에서 긍정적인 인물들뿐만 아니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 긍정적인 인물인 드미트리와 알료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도스토옙스키는 떠맡을 필요도 없는 형의 식솔들, 또 말도 안 되는 거짓 문서로 돈을 받아 내려는 빚쟁이들의 빚까지도 거절하지 못하고, 자신의 책임 능력 범위 밖의 것들까지도 주저 없이 떠안아, 재정과 심리 상태는 더욱더 엉망이 된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를 버리지 않는다. ≪도박사≫의 마감 기한을 맞추기 위해 속기사로 고용한 20세의 안나 스니트키나가 1867년 46세의 도스토옙스키와 결혼해 그의 아내 안나 도스토옙스카야가 된다. 그녀는 경제적인 의미에서는 아무런 개념이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작가를 대신해 모든 현실적인 일들을 효과적이고 실질적으로 처리해 만년의 그에게 경제적, 심리적으로 안정된 삶을 가져다준다. 이런 안정된 삶 위에서 쓴 유일한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에게 헌정함으로써 작가는 자신의 삶과 작품의 완성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아내에게 표현하고 있다.

1860년대

소설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작가로부터>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이 두 이야기로 되어 있으며, 우리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알고 있는 작품인 전편에서는 소설이 쓰인 당대, 즉 1880년보다 13년 앞선 시기를 다루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시대적 배경은 1860년대 중반이 된다. 이 시기는 러시아가 사회·경제적 변화와 함께 사상적인 변화를 급격하고도 강력하게 겪고 있던 때였다. 유럽식 자본주의와 함께 서구적인 사고방식이 크게 유행하며, 공리주의, 사회주의, 무신론 등이 젊은 세대에게 매우 인기를 끌었다. 이 젊은 세대가 우상으로 받들던 아이콘적인 인물이 체르니솁스키였고, 그의 사상과 이론을 형상화한 책 ≪무엇을 할 것인가?≫는 서구주의자들에게 사상의 교리서이자 행동의 지침서로서 열렬한 찬사를 받으며 마치 성서처럼 받아들여졌다. 이 책에서 체르니솁스키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하며,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 안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체제와 환경 탓이라고 여겼다. 죄는 있으나 죄인은 없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으로 당대의 많은 변호사들이 범죄자들의 무죄를 주장했고, 이런 유의 변론이 (이 발췌본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드미트리의 재판 과정에서도 등장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바로 20대의 자신이 지녔던 이데올로기의 신념을 보았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 성서를 읽으며 유형수들과 함께 보낸 10년의 세월로 그는 이러한 순진한 신념이 인간의 실제 본성과는 전혀 맞지 않으며, 또 인간을 개미 떼나 가축 떼로 몰아가려는 것, 즉 인간성 박탈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자각했다. 유형에서 돌아온 1860년대 이후로, 도스토옙스키는 논문을 통해, 또 작품을 통해,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마치 성서처럼 떠받들던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의 순진한 허구성과 인간성 상실에 대한 우려를 계속해서 알리며 서구주의자들과 싸움을 벌여 나간다. 이 싸움은 유형 이후 쓴 작가의 첫 작품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후의 모든 대작들에서도 반복적으로 시험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이 모든 문제가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 명백하게 그려지고 시험되며, 이전의 작품들보다 분명한 대답이 주어진다.

줄거리

플롯 라인으로만 본다면 막장 드라마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없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아버지인 표도르는 부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사람으로, 육욕과 정욕, 그리고 돈에 대한 욕심만이 남은 저열한 본능의 화신이다. 작품 진행 시 55세인 그는 두 번의 결혼으로 아들 셋을 둔다. 첫 아내에게서 난 장남 드미트리는 어머니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유일한 아들인데, 아버지라는 자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아들의 재산을 가로채고, 그것도 모자라 스물두 살의 글래머 미인인 그루셴카를 놓고 장남과 문자 그대로 피 튀기는 싸움을 한다. 장남 드미트리는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라는 아름답고 오만한 귀족 여인과 약혼을 한 사이이나, 늙은 상인 삼소노프의 첩으로 있던 그루셴카에게 완전히 넋이 나가, 그녀에게로 가기 위해 카테리나를 자신의 동생 이반에게 양보하지 못해 안달이다. 이반은 형의 약혼자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를 사랑하고, 그녀도 역시 이반을 사랑하나, 이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부정하며 오히려 그를 정신적으로 무척이나 괴롭힌다. 다리가 불편한 리자라는 귀족 아가씨는 막내 알료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을 약속하나, 후에 이반을 사랑하게 되어 고통스러워한다. 표도르에게는 이 세 아들 외에도 마을의 백치 여인을 범해서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 스메르댜코프라는 아들이 있는데, 그는 표도르의 요리사 겸 하인으로 일하며, 이반의 사상에 매혹된다. 신과 불멸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사상에 강한 영향을 받은 스메르댜코프가 표도르 카라마조프를 살해하지만,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드미트리가 용의자로 지목된다. 이반에게 실망한 스메르댜코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실제 범인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은 채, 드미트리가 죄를 뒤집어쓰고 “고통으로 정화되기 위해” 시베리아로 떠난다.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표면적인 줄거리로만 본다면, 친아들에 의한 아버지 살해를 둘러싼 주요 인물들이 엮어 내는 사랑과 미움의 드라마다. 작품의 주요 인물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사랑의 삼각관계에 빠져 있으며, 연관된 이들이 모두 부자 또는 형제간이다. 요약한 줄거리만 본다면 가장 큰 사건은 아버지 살해인데, 이런 막장 드라마 같은 플롯 라인을 갖는 소설이 어떻게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세계 명작이 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해답은 플롯 자체가 아니라 인물들 자신과 그 인물들의 성격과 사상이 서로 부딪치고 공명하는 긴밀한 구성에 있다. 작가는 가치관의 변화가 심하고 무신론 등 서구 사상이 횡행하던 19세기의 러시아 현실을 배경으로 가족의 분열을 그리면서, 하나하나의 인물과 그들의 심리 변화, 사상 변화 속에 모순적이고 복잡다단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사색을 담아내고 있다. 또한 시대적 문제들을 지성의 대변인인 이반을 통해 제시하며, 그의 분열과 파멸을 통해 인간에 대한 체르니솁스키적인 이해는 옳지 않으며, 그런 유의 답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강변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에 대항해, 알료샤를 통해 근본적이고 영원히 옳은 해답, 즉 작가의 사상이 집약된 종교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통속적인 이야기 속에 신과 무신론, 자유 의지, 옳고 그름, 선과 악 등의 영원한 철학적 담론의 대상들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또 너무도 도스토옙스키적인, 그래서 너무도 러시아적인 테마들 역시 어떻게 표명되고 있는지를 주요 등장인물들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의 저 유명한 책에서 제목을 빌려 온 것은 드미트리가 니체처럼 인지의 측면에서 철학적인 사람이란 의미는 전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적인, 너무나 러시아적인 인물이다. 표도르의 장남이자 첫 결혼에서 얻은 유일한 아들인 드미트리는 뼛속까지 러시아적인 전형적인 러시아인의 상징이며, 이런 드미트리를 통해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인이 아니고서는 이해하기 힘든 심리적, 종교적 테마인 “고통을 통한 정화”를 형상화한다.

드미트리는 아버지 표도르로부터 육체적인 정욕을 물려받았으나, ‘치마만 두르면 어디나 달라붙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표도르의 퇴폐적인 정욕과는 달리, 그루셴카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남성적이고 정열적이며 진지하고 희생적이기까지 하다. 아버지 표도르와는 서로 그루셴카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추잡한 짓을 다하지만, 정작 그녀가 5년간이나 잊지 못하고 꿈에도 그리던 첫사랑에게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고자 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보다 소중히 하며, 그것을 자신의 행복보다 앞에 두는 것이리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작가에게 매우 긍정적인 자질 중의 하나이자, 불멸과 신의 세계를 향한 길, 즉 구원을 위한 필수 요소다. 드미트리의 사랑의 대상 역시 이지적이고 차갑고 오만한 카테리나가 아니라, 감정적이고 정 많은 전형적 러시아 미인인 그루셴카라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루셴카는 드미트리를 보고 “짐승 같은 데가 있으나 고결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 지적은 매우 적절하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억세고 뛰어난 육체적 완력과, 충동과 감정에 충실한 면을 지니고 있으며, 아버지 표도르에게서 물려받은 호색하고 방종한 생활에 기우는 면을 지녔다. 카라마조프의 저열한 본성을 나타내는 “거미”를 영혼 속에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명예뿐만 아니라 타인의 명예도 존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는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와의 첫 만남에서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이 만남에 대해 그는 알료샤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처음에 든 생각은 역시 지극히 카라마조프적인 것이었어. 동생 알료샤야, 언젠가 한번 거미같이 생긴 벌레한테 물려서 한 2주를 열이 펄펄 끓으며 누워 있었던 적이 있어. 그러니까 그 순간도 갑자기 거미 같은 이 고약한 벌레가 내 심장을 꾹 무는 소리가 들리더란 말이야. 알겠니? 나는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았지. 너 그녀를 본 일이 있지? 정말이지 대단한 미인이야. 하지만 그때 그녀가 아름다웠던 건 그 때문이 아니었어. 그 순간에 그녀가 아름다웠던 이유는 그녀는 고결한 여인인 데 비해, 나는 천하에 비열한 놈이고, 그녀가 너무도 관대한 마음에서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위대한 뜻으로 나선 것이라면, 나는 빈대나 다름없다는 사실 때문이었어. 자, 그런데 이 빈대이자 비열한 놈인 나한테, 그녀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달려 있었단 말이야. 영혼이고 몸이고 모든 것이 말이야. 한마디로 독 안에 든 쥐였지. 너한테 솔직히 털어놓는다만, 이 생각, 바로 이 거미의 생각이 내 심장을 너무도 세게 거머쥐어 그 괴로움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녹아 버릴 것만 같았어. 이 정도였으니 갈등이고 자시고 할 수도 없을 것만 같았지. 타란툴라나 빈대처럼 피도 눈물도 없이 일을 해치워 버리는 거지… 숨이 멎을 것만 같았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서 거미나 독사, 파충류 등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악마적인 힘을 상징한다. 이는 ≪죄와 벌≫에서 스비드리가일로프의 지옥에 대한 묘사에 잘 나타나 있다. 경계를 뛰어넘는 악마적인 인물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지옥과 영원을 거미들이 잔뜩 살고 있는, 그래서 ‘거미줄이 가득 쳐진 목욕탕’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거미 같은 카라마조프의 충동에 지지 않고, 그녀의 몸에 손 하나 대지 않고, 돈을 주어 돌려보낸다. 그러고는 스스로의 행위에 감동해 자살을 하기 위해 군도를 꺼냈다가 그냥 칼등에 입을 맞춘 채 다시 칼집에 꽂는다. 카테리나와의 첫 만남은 그의 내부에 있는 독거미 같은 카라마조프의 부정적 본성과 동시에 명예심을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감정의 격발에서 나오는 충동적인 성향 등 드미트리의 모순적인 다양한 면모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는 무식하고 방탕한 터프가이 같지만, 시적이고 민감하며 정서적이고 부드럽다. 그는 약혼녀 카테리나의 돈으로 그루셴카와 떠들썩한 유흥을 벌일 정도로 철면피이나, 동시에 약혼녀의 돈을 갈취했다는 죄책감에 몸부림친다. 또 따로 떼어 두었던 카테리나의 나머지 돈으로 정열에 이끌려 방종으로 다시금 뛰어드는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나, 이 돈을 약혼녀에게 다시 갚지 않고서는 그루셴카와 새로운 출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 돈을 얻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결벽증적인 명예심과 엄청난 추진력을 가진 사나이다. 그는 정직하고, 명예를 중요시하며, 무엇보다도 본능적으로 정이 많은 사람이다. 우리 식으로 ‘정이 많다’는 것은 러시아식으로 표현하면, 연민할 수 있는 능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정이나 연민을 뜻하는 러시아어 ‘소스트라다니예(сострадание)’는 고통받는다는 뜻의 동사 ‘스트라다티(страдать)’에 ‘함께’를 의미하는 접두어 ‘소(со)’가 붙어 만들어진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함께 고통 받음’, ‘함께 아파함’을 나타내는데, 전작 ≪백치≫에서 긍정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사람 미시킨이 말하듯, 그것은 “전 인류의 가장 중요한, 아니 유일한 존재 법칙”이다. 또 연민이야말로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고귀하다 여겼던 그리스도적인 사랑이고, 작가의 작품 속에서 연민의 능력이 있는 모든 인물들은 그것으로 구원받는다.

드미트리의 내부에서 일기 시작한 연민의 불꽃은 예심이 끝나고 지쳐 잠든 후 꾸는 “언나(아기)”의 꿈에서 보다 명백해진다. 꿈속에서 그는 농군 마부가 이끄는 마차를 타고 불타 버린 마을을 지나가는데, 집이 타 버린 가난하고 시커먼 농군 여인들과 그들의 가슴팍에 붙어 파랗게 언 손을 바동거리며 울고 있는 배고픈 “언나”들을 보게 된다. 그는 마부에게 묻는다. 왜 저 여인들은 저리도 가난한지, 왜 어른도 “언나”들도 저리 가난한 건지, 왜 “언나”들이 우는지, 왜 그들은 함께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도 않고, 불행으로 시커멓게 된 건지를 묻는다. 이 많은 “왜”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자각을 의미하며, 새로운 드미트리의 탄생을 예고한다. 방향을 잡지 못해 이기적인 육욕과 방탕에 쏟아붓던 드미트리의 에너지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자각으로, 더 나아가 이제는 지상에 더 이상 눈물이 있어서는 안 되며, 이를 위해 자신이 있는 힘을 다 쏟아야 한다는 의무가 된다. 새로이 탄생한 드미트리가 꿈속에서 자신에게 다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금 자기가 어리석고도 바보 같은 질문들을 하고 있음을, 그러나 반드시 그런 식으로 묻고 싶었고, 꼭 그런 식으로 묻지 않을 수 없었음을 마음속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런 감동이 심장 속에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그는 울고만 싶다. 언나가 더 이상 울지 않도록, 시커멓게 마른 아이들의 어머니가 더 이상 울지 않도록, 이 순간부터 어느 누구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뭔가를 해 주고 싶다. 어떠한 장애가 있더라도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바로 지금 당장 카라마조프식의 억제할 수 없는 힘으로 그렇게 하고 싶다.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인간 속에 일어난 연민과 연민에 대한 자각은 행동하는 인물인 드미트리에게 의무가 되고, 지상에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는 한,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즉 모두가 모두에 대해 죄인이라는 조시마 장로의 마지막 연설을 상기시킨다. 조시마 장로는 모든 인간은 모든 사람들 앞에,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들에 대해 죄인이며, 전 인류적인 죄, 세계적인 죄, 개개인의 개인적인 죄 등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이 있고, 바로 이 사실을 자각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또 이렇게 될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은 전 그리스도적인 무한하고 우주적인 사랑 안에 감동하게 될 것이고, 개개인은 사랑으로써 온 세상을 얻게 될 것이고, 자신의 눈물로 세상의 죄를 씻게 될 것이고 타인을 위해 흘리는 이 눈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 했다. 죄와 벌, 연민과 고통, 그리고 이를 위한 정화와 구원이라는 기독교에 대한 지극히 러시아적인 해석이 잘 드러난 설교로서, 이는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기독교관의 직접적인 반향이다. 러시아인은 모두가 어머니 대지의 자식이고, 그러니 하나가 죄인이면 그의 형제, 자매, 부모로서 나도 죄인인 것이다. 너, 나, 모두가 이런 죄의 연대 관계 속에 놓이게 되며, 따라서 자신이 직접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고통 받고자 한다. 러시아의 종교적 전통에 있는 무조건 고통 받기, 고통을 위한 고통은 아주 독특하고 주요한 개념으로서, 기독교 이전에 러시아 땅에 있었던 뿌리 깊은 어머니 대지에 대한 신앙에 그 바탕을 둔다. 또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고통에 대한 경외의 표방이요 모방의 욕구이며, 고통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강력한 믿음의 표현이다.

“언나”에 대한 꿈을 꾼 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의 얼굴은 환희에 빛난다. 새로운 사람의 탄생을 느낀 드미트리는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에 대해 벌을 받겠다고 하는데 바로 이런 맥락이다. 그는 고통을 두 팔 벌려 껴안음으로써 지금까지의 여러 가지 죄를 정화하고 새롭고 더 나은 인간으로 거듭나겠다고 한다.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길이다. 예심이 끝나고 호송되기 전에 드미트리는 언나의 꿈에서 얻은 깨달음을 일동에게 말한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잔인합니다. 우리는 모두 불한당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애 엄마들과, 젖먹이까지도 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들 중에서−이젠 그렇게 결론을 내려도 좋습니다−이 모든 이들 중에서 이 몸이 가장 비열한 독사입니다. 그러면 그러라지요! 지금껏 살면서 저는 매일매일 가슴을 치며 바른 사람이 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또 매일매일 똑같이 추잡한 짓을 저질러 왔습니다. 저 같은 인간들은 한 방, 운명으로부터 호된 한 방을 맞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저 같은 인간은, 올가미처럼 아주 단단하게 외적인 힘으로 꽁꽁 묶어 놔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결코,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제 벼락이 내리친 겁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애비 죽인 놈이라며 손가락질당하는 치욕과 모욕의 고통을 달게 받을 것입니다. 나는 고통 받고 싶고, 또 고통으로 정화될 것입니다! 어쩌면 정말로 정화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여러분, 안 그래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꼭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전 제 아버지의 피에 대해서는 무죄입니다! 제가 처벌을 달게 받겠다는 것은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며, 하마터면 정말로 죽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갱생의 길로 들어선 그는 자신이 죽이지도 않은 아버지의 살해에 대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려 한다. 그가 걸어갈 십자가의 길이 고독의 길은 아니다. 그에게는 뼛속까지 러시아 여자인 그루셴카가 있다. 그루셴카는 그와 함께 가게 될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는 드미트리에게 “나도 당신과 함께할 거야, 이젠 당신을 떠나지 않겠어. 평생 동안 당신과 함께할 거야”라고 말한다. 그러자 드미트리의 심장은 빛으로 가득하고, 삶을 향한, 존재를 향한 욕망으로 가득해진다. 그는 “살고 싶다, 살고 싶어. 가고 싶다. 길을 향해, 내게 손짓하는 저 새로운 광명을 향해 가고 싶다. 얼른, 빨리, 지금 당장!”이라고 자신에게 되뇐다.

이렇게 말하는 드미트리 내부의 새로운 인간이 이반이 제시한 아메리카로 가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도스토옙스키는 최초의 장편 소설 ≪죄와 벌≫에서부터 십자가의 길과 대립각을 이루는 길로 아메리카를 내세우는데, 이는 책임과 벌을 회피하고 자기 파괴로 향하는 길의 상징이다. 아메리카로의 도피는 달콤한 듯 보이나 결국은 자멸하게 되는 악마의 제안이며 지옥으로의 초대다. 작가의 작품 속에서 러시아와 대립각을 이루는 서구는 무신론자들이 사는 신이 없는 악마의 세계이며, 그중에서도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아메리카는 악의 축이다. 아메리카에 발이라도 담그고 왔거나, 동경하거나, 아메리카와 일말의 관계가 있는 모든 인물들은 작품 속에서 죽음을 면치 못한다. ≪죄와 벌≫의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소냐로 상징되는 십자가의 길(시베리아) 대신에 아메리카로 도망할 것을 제안하고, 또한 자신이 자살하러 가는 것을 “아메리카로 간다”고 표현한다. 그가 표현했던 ‘거미줄이 잔뜩 쳐진 목욕탕’ 같은 지옥이 아메리카와 하나가 되는 지점이다. ≪악령≫에서 동료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샤토프와 자살을 종용당하고 결국 그로테스크한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는 키릴로프 둘 다 미국에서 여러 달을 살다 왔다. 그리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드미트리에게 아메리카로 도망가기를 권한 이반도 역시 섬망증에 걸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러시아인인 드미트리는 아메리카에 대해 본능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역시나 뼛속까지 러시아 여자인 그루셴카도 그곳에서 매우 불행하리라 말한다. 그에게도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제시되었던 아메리카로 가는 길(스비드리가일로프의 길, 이반의 길)과 십자가의 길(소냐의 길, 알료샤의 길)이 제시된다. 정신적인 어머니 소냐와 함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시베리아의 길을 선택하는 것처럼, 드미트리에 대한 사랑을 자각하고 그와 함께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정신적으로 새로이 태어난 그루셴카가 있어 드미트리 역시 시베리아의 길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죄와 벌≫에서처럼,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들의 발아한 정신적 갱생의 완성은 시베리아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죄와 벌≫에서는 페테르부르크가 논리적 법칙, 이성, 인간에 대한 과학적 정의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도시, 길은 작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숨 막히는 관처럼 막혀 있는 도시,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적이고 추상적이며 인공적인 도시, 유령과 같은 죽음의 도시를 의미하기에 정신적 갱생은 이 도시를 벗어난 시베리아에서 이루어진다. 시베리아는 러시아 종교사에서 상징적인 순교의 공간이며 고통의 공간이자 고통을 통한 구원의 공간이고, 신에 대한 본성적인 믿음을 가진 이상화된 민중의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도 사건의 배경이 되는 스코토프리고니옙스크(Скотопригоньевск)는 돈과 권력, 성적인 방탕함이 만연한 곳이다. 그러니 그들의 정신적인 갱생의 완성은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성경의 이름들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매우 상징적인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공간적 배경인 마을 이름 역시 그렇다. 스코토프리고니옙스크는 ‘스코트(скот, 가축)’와 ‘프리곤(пригон, 가축 등을 몰아넣는 장소, 또는 가축 등의 머릿수)’이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다. 방탕과 정욕에 물든 표도르 카라마조프가 자식에게 살해당하는 곳, 실연의 슬픔에 빠진 어린 그루셴카를 데려와 첩으로 삼은 자린고비 삼소노프 같은 인물이 사는 곳. 그루셴카에게 침을 흘리는 수많은 남자들의 정욕이 넘쳐 나는 곳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짐승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새로이 태어날 그루셴카와 드미트리의 정신적 갱생의 완성은 스코토프리고니옙스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저 시베리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루셴카가 드미트리에게 돈 같은 것은 다 두고, 저 먼 곳으로 가서 노동으로 땅을 일구며 정직하게 살자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알료샤가 그녀에게 제안한 정직하고 명예로운 삶의 구현이다. 그리고 이는 종교적이고 신성한 공간인 시베리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비록 20년의 유형이란 엄청난 고난의 길을 앞두고 있지만, 드미트리와 그루셴카는 삶에 대한 의지가 넘쳐 난다. 넘치는 삶에 대한 의지, 삶에 대한 찬양은 도스토옙스키에게 신에 대한 갈구와 긍정과 다름없다. 작가에게 종교는 거룩하고 숭고한 것이 아니라 본성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기에 러시아인으로서 갖고 있는 본성적인 신에 대한 믿음과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 즉 연민으로 드미트리는 구원의 길을 걸으나, 세 형제 중 가장 이지적이고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이반은 세계 질서와 신에 대한 회의, 살아 숨 쉬는 인간에 대한 연민의 부족으로 자멸한다. 이들의 상반된 운명에서 작가의 메시지가 분명해진다.

이반: 이성과 논리의 화신인 무신론자

드미트리를 갱생의 길로 들어서게 한 어린아이의 눈물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학문적으로 한껏 발달한 그의 동생 이반에게는 반역의 사유가 된다. 이반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매우 재능이 뛰어나고, 동생 알료샤와는 달리 자신이 남의 밥을 얻어먹고 살고 있음을 날카롭게 자각하며, 과학과 수학의 신봉자이나 일반 범죄에 대한 교회의 재판권에 대한 논문을 써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다. 주로 이반의 이야기를 다룬 제5장 <프로와 콘트라(Pro and Contra)>는 작가가 작품 전체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썼다고 얘기하는 부분이며, 작품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4. <반역>과 5. <대심문관>의 서사시는 소설의 플롯 라인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매우 약해서, 따로 떼어 하나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관할 정도로 독립적이며, 실제로 <대심문관>만 따로 출판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런 미약한 외적 관계 대신에 주제에서, 또 작가의 주된 의도에서 그 내적인 관계는 <반역>과 <대심문관>의 서사시를 작품 전체의 중심이자, 다른 모든 테마의 주된 연결고리로 자리매김한다.

우선 <반역>을 살펴보면, 이반은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이 만든 세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죄 없는 어린아이들의 고통과 눈물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은 유클리트적인 3차원적 인간이기 때문에 4차원의 세계에 속하는 신이나 저 세계에 속한 것은 볼 수도 증명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으니 그냥 받아들인다, 하지만 신이 창조한 이 세계에는 너무나 많은 어린아이들이 죄 없이 고통 받고 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신의 세계는 거부한다, 또한 이 모든 것이 신이 계획한 저 마지막 날에 있게 될 영원한 조화의 세계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그러한 조화는 죄 없는 어린아이의 눈물 한 방울만 한 가치도 없기에 영원한 조화의 세계라는 신이 준비한 세계로 가는 “입장권을 서둘러 반환한다”라는 것이다. 만약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죄 없는 고통을 야기한 자들이 저 마지막 시간에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의 벌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이미 흘린 죄 없는 눈물에 대한 보상은 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만약 지옥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조화도 평화도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성적으로는 참으로 부정하기 힘든 논리다.

다음 장인 <대심문관>에서 대심문관의 입을 빌려 이반은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지성적 논리적 종교적 문제들을 논한다. 대심문관과 예수의 대결이다. 그는 예수가 사막에서 있었던 악마의 세 가지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인류를 곤경에 처하게 했다고 비난한다. 예수가 거부한 악마의 세 가지 제안은 기적으로서 지상의 빵, 기적으로서 신비, 카이사르의 검으로 대변되는 지상의 권위다. 그는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하여금 지상의 빵, 신비, 권위 등에 의해 강요된 선택 대신에, 자유로운 의지로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따르기를 바람으로써 인간을 큰 고통 속에 빠트렸다고 비난한다. 인간은 너무 약하고 모자라기 때문에, 지상의 빵, 신비, 권위를 내칠 수 있는 힘이 없으며, 따라서 예수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해서 ‘자유로운 선택’, 즉 자유 의지를 너무 과하게 줌으로써 인간을 혼란과 고통에 빠트렸고,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되었다고 비난한다.

“인간을 너무도 존중했기 때문에 오히려 너의 행위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는 꼴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너는 인간에게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자신보다도 더 많이 사랑했던 자가 한 짓이란 말이다! 만약 네가 그들을 그렇게까지 존중하지 않고, 그들에게서 그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이것이 오히려 사랑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짐이 더 가벼워졌을 테니까. (…) 이렇게 해서 불안과 혼란과 불행, 바로 이것이 사람들의 현재 운명이다.”

또한 지상의 빵, 신비, 권위 등을 물리치고 자유 의지로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자는 성서에도 쓰여 있듯이 겨우 1만 2000에 지나지 않으니, 그 수가 그 정도라면 그것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에 가까운 자들이다. 따라서 예수가 선물이라고 생각한 선악 선택의 자유는, 일반적인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선물이 아니라 커다란 고통이요 짐이 되었다. 그래서 강한 몇 사람이 악마가 제시한 이 세 가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유 의지의 짐을 대신 지고 감으로써, 인류는 비로소 자유 의지와 그에 따르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어린애 같은 보편적이고 전 인류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또한 무덤 뒤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는 인류에게 그 사실을 숨기며, 영생이란 희망을 품게 해서 행복하게 그곳을 향하도록 할 것이다. 이 모든 악마의 제안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실현된다는 주장이다.

또다시 인간의 자유 의지, 선악 선택의 자유에 관한 테마다. 유형 이후 쓴 첫 작품인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그토록 처절한 형태로 논의했던 인간과 자유 의지의 문제다. 자유 의지가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선물이 아닌 영원한 짐이요, 고통이요, 혼란이라는 주장이다. 대심문관은 말한다.

“너는 인간이 너에게 매혹되어 사로잡힌 채 자유로이 너의 뒤를 따르도록 인간의 자유로운 사랑을 바랐다. 그래서 앞으로 인간은 확고한 고대의 율법 대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자유로운 양심으로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도 네 형상만을 길잡이로 삼으며 말이다. 만일 선택의 자유라는 이토록 무서운 짐으로 인간을 짓누른다면, 결국에 가서 인간은 네 형상과 네 진리를 거부하고 논박하리라는 것을 너는 정녕 생각하지 못했단 말이냐? 그리고 종국에 가서 그들은 진리는 네 안에 있지 않다고 외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그들에게 그토록 많은 근심거리와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을 부여함으로써, 무엇보다 그들을 더할 나위 없는 혼란과 고통 속에 방치했으니까.”

이러한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니,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에 가까운 자들이며, 예수는 신에 가까운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신이지 자유 의지를 감당할 힘이 없는 대부분의 인간들을 위한 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너의 위대한 예언가가 환영과 비유로 말하길 부활의 첫날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보았는데, 그 수는 지파마다 각각 1만 2000명씩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수가 그것밖에 안 된다면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너의 십자가를 참아 냈고, 또 수십 년간이나 굶주리고 헐벗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풀뿌리로 연명해 왔다. 그러니 물론 너는 이 자유의 아이들, 자유로운 사랑의 아이들, 네 이름으로 자유롭고 훌륭한 희생을 한 이 아이들을 자랑스레 가리킬 수 있겠지. 하지만 그들은 고작해야 몇 천 명에 불과했고, 신이나 마찬가지인 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해라.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강한 자들이 참아 낸 것을 참아 낼 수 없었던 나머지 약한 자들은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그토록 무시무시한 선물을 받아들일 힘이 없는 나약한 영혼들은 대체 무슨 죄란 말이야? 그렇다면 너는 정말로 선택된 자들에게만, 선택된 자들을 위해서만 온 것이냐?”

예수가 자유 의지를 감당할 수 있는 선택된 자들의 신이라면, 대심문관 자신은 나약한 영혼을 지닌 대부분의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대신해 선악 선택의 자유 의지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그들을 대신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선택해 보여 주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도 대신 져 주겠다고 한다.

대심문관의 입을 통해 전개되는 이 모든 대립과 비난은 도스토옙스키를 일생 동안 괴롭혀 온 대립이자, 작가 스스로도 이성적으로는 부정하기 힘든 논리였다. 대심문관은 이반이요, 지성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도스토옙스키의 또 다른 자아다. 허무주의, 무신론, 윤리적 합리주의, 공리주의와 그리고 무신론적 사회주의라는 선의 얼굴을 쓴 악에 대한 묘사와 그것과의 싸움 그리고 추상적 인류에 대한 사랑과 고통이 이토록 적나라하고 명백하게 표현된 다른 문학을 나는 알지 못한다. <대심문관>을 보면,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한 지성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무신론과 유신론 사이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투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작품을 구상하며 작가가 말했던 것처럼 그가 “일생 동안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고민해 왔던 문제, 즉 신의 문제”가 대심문관에서 극화된다.

대심문관이 이 모든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인류에 대한 사랑,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심한 사랑 때문이다. 인류에 대한 사랑이 지극히 심하기 때문에 그는 영생으로 인류를 속여서라도 그들에게 잠시간의 행복감을 주고, 그들의 자유를 대신 지고 가면서도 또한 동시에 그들이 어느 때보다 자유롭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자유에 동반한 책임의 부담을 없애 주고자 한다. 대심문관의 미래 왕국은 무신론적, 유물론적 사회주의와 다름없다. 그것은 악마가 제시한 지상의 빵, 기적, 신비, 카이사르의 검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값싼 일시적인 가짜 행복의 대가로 정신적 자유의 상실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심문관은 인간에 대한 동정으로 충만해 있으며, 인류를 위해 진심으로 고통 받는다. 인류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그에 따른 고통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 깡마른 외모, 살아 번뜩이는 눈, 아흔 살이라는 길이와 깊이가 가져다주는 삶의 무거움. 그의 고통을 알고 인정하기에 예수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대심문관>의 서사시를 다 들은 후, 알료샤가 이반에게 입을 맞추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사뭇 대립되는 듯한 이반과 알료샤, 하지만 이 둘의 상반되는 사상의 출발점은 같다. 이에 대해 이반이 말한다.

“신은 있는가, 불멸은 있는가? 뭐 이런 것들 말이야.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주의니 무정부주의니, 새로운 체제에 따라 전 인류를 개조하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데, 죄다 거기서 거긴 거야. 결국 이 모든 문제는 다른 끝에서 시작한 같은 문제라는 거지.”

신과 불멸의 이야기와 무신론과 사회주의의 이야기가 다 비슷한 이야기이고 “다른 끝에서 시작된 같은 문제”라는 점은 결국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된 두 개의 다른 해결 방안이라는 얘기다. 이런 의미에서 작가가 전혀 반대되는 듯한 성향의 무신론자 지식인 이반과 신심 깊고 선한 알료샤를 같은 어머니의 두 아들로 설정한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또한 이반의 이 말은 무신론과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던 젊은 날의 경험과 시베리아 유형 이후의 깨달음 등, 도스토옙스키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대심문관, 즉 이반의 인류애는 무엇이 문제인가?

가장 큰 문제는, 알료샤의 지적대로 그는 “신을 믿지 않는다”라는 점이다. 또 하나는 그는 선의 탈을 쓰고 나타난 악의 구현이라는 점이다. 적그리스도적인 악의 원리와 그리스도의 선의 원리 사이에는 언제나 유사점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혼란과 대체의 위험을 낳는다. 가짜는 비슷하다. 아니, 가짜일수록 더욱 그럴싸하다. 진짜를 닮지 않으면 가짜라 할 수 없다. 진짜는 외려 질박하고 덤덤하고 단순하다. 악마는 절대로 추한 모습을 띠지 않는다. 놀랍게도 악마는 광명의 천사의 얼굴을 지니고 있고(고린도후서 11:14), 샛별처럼 아름답고 매력적이다(이사야 14:12). 사랑이란 이름으로 인류를 개미 떼로 만들려 하는 것, 바로 이것이 대심문관 속에서 명확히 그려 낸 혼돈과 혼란이며, 작가가 경고하는 무신론적인 악마의 가짜 사랑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에서 경험한 러시아 민중의 혼과 또 신약성서 속 희생적이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인 예수를 알게 된 후로는, 이전에 그를 매혹했던 사회주의, 무신론 등은 비록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 것이나, 결국은 도덕적, 사상적 질병과 다름없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작가는 교회와 정신과 신의 힘으로 이런 가짜 사랑의 유혹을 이겨 내야 하고, 혁명의 길로 치닫고 있는 러시아를 그 유혹에서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또 하나, 이반의 인간에 대한 정의를 보면, 그가 말하는 대부분의 인류는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하찮고 한심한 존재다. 그에게 인간은 ‘원래 반역자로 태어난 배은망덕한 존재이며, 지상의 빵, 기적, 신비, 권위를 거부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고, 자유 의지를 감당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이고, 조롱받기 위해 창조된 미완성의 시험적 존재’다. 이런 인간관 뒤에는 자신은 이런 개미 떼에 가까운 인간이 아니라 선택받은 초인과 같은 힘을 지닌 자라는 오만함과 다른 인간들에 대한 경멸이 전제되어 있다. 동등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다보는 오만한 적선과 같은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가짜 사랑이다. 그렇기에 동생 알료샤에게 토로했던 것처럼, 이반은 추상적 인류를 사랑할 수는 있으나 가까이에 있는 살아 있는 이웃은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작품 속에서도 이반은 그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오로지 알료샤만이 예외다.

알료샤: 한 알의 밀알

이반이 얼굴 없는 추상적인 인류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무신론자의 가짜 사랑, 공상적 사랑의 대변자라면, 알료샤는 살아 숨 쉬는 이웃에 대한 능동적이고 진정한 실천적 사랑의 체현이다. 이반의 사랑이 머리와 말로 된 것이라면, 알료샤의 사랑은 가슴과 행동으로 하는 사랑이다. 이반의 사랑이 “개미 떼”와 같은 인류에 대해 적선해 주는 듯한 오만한 가짜 연민이라면, 알료샤의 인간관은 한배를 탄 인류에 대한 진정한 연민이다. 이반은 모두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비난하고, 판단하지만, 알료샤는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모든 것, 모든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의 앞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꼭꼭 숨겨 놓았던 상처 받은 자아도 드러내 놓고 속마음을 털어놓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긍정적 인물들은 말하는 자가 아니고 듣는 자들이다. 알료샤도 예외는 아니다. 작품 속에서 그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경우가 많다. 간혹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듣는 자, 지켜보는 자에 가깝다. 이렇게 눈에 띄지 않고 목소리를 내거나 앞에 나서지 않지만, 그의 이런 자질은 이전의 긍정적 인물인 소냐나 미시킨처럼 소극적이지 않다. 그는 조용하면서도 밝고, 적극적이며, 무엇보다도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굳은 심지 같은 것을 지닌다. 그는 모든 인물들의 구심점이자, 타인들을 움직이고 그들을 지배하는 중심인물이다. 모든 인간을 경멸하는 오만한 지성인 이반조차도 알료샤가 있어 삶을 사랑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

“만약 내가 정말로 끈적거리는 새 이파리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널 상기함으로써만 그렇게 될 거야. 이 세상 어딘가에 네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내겐 충분하고, 삶에 싫증도 나지 않을 거야. 이 정도면 네게 충분하겠니? 뭣하면 사랑 고백이라고 해도 좋아.”

이반의 말처럼, 알료샤는 긍정과 삶의 전도사다. 그루셴카도 알료샤를 타락시키기 위해 그를 초대하지만, 오히려 그를 통해 정신적인 갱생의 길을 걷게 된다. “누이”라는 알료샤의 말 한마디는, 그녀에게서 표독스럽고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라는 마스크를 벗기고, 관대하고 부드럽고, 사랑할 줄 알고, 연민할 줄 알며, 희생적인 자아를 살아나게 한다. 음탕하고 이기적인 노인인 그의 아버지 표도르조차도 ‘머리보다 가슴이 좋은 사람이라는’ 알료샤의 한마디에 진심으로 감동하며, 자식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느낀다. 알료샤는 남녀노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성적인 오만한 사람, 감정적이고 직정적인 사람,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개개인 안에 있는 아름다운 자아를 이끌어 내도록 도와준다. 그는 만나는 모든 인물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인물 하나하나가 그에겐 똑같이 소중하고 가까운 존재들이다.

이반이 회의하고 묻고 질문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성적인 자아라면, 알료샤는 회의하는 자아에 종지부를 찍는 순종하고 사랑하고 답하는 신앙심 깊은 도스토옙스키의 종교적인 자아다. 예수는 초인에 가까운 몇 명만의 신이라는 이반의 비난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 가나에서의 혼인에 대한 알료샤의 꿈에서 주어진다. 알료샤는 꿈을 꾼다.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을 일으킨 가나의 결혼식이다. 많은 이들이 초대되어 있다. 그곳에서 방금 전에 세상을 뜬 조시마 장로가 알료샤에게 말한다.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은 파 한 뿌리를, 그것도 아주 작은 파 한 뿌리를 건넸을 뿐”이라고.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그의 나라에 들기 위해서는 이반의 대심문관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과 같은 초인일 필요는 없다. 그저 파 한 뿌리, 즉 작은 연민의 행동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히 포도주가 마르지 않는 하느님의 왕국으로 초대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파 한 뿌리, 파 두 뿌리가 모여 후에 위대한 과업이 되는 것이다. 조시마 장로는 말한다.

“우리에 비하면 그분은 두려울 정도로 위대하시고 두려울 정도로 지고하시지만, 무한하게 자비로우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에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며, 손님들의 기쁨이 끊이지 않도록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며, 새로운 손님들을 기다리고, 또 정말로 세세토록 끊임없이 새로운 손님들을 청하고 계시는 거란다.”

대심문관이 이반의 사상의 체현이라면, 조시마 장로는 알료샤가 대변하는 사상의 체현이다.

가나의 결혼식 꿈은 또 하나의 의미에서 이반의 명제를 반박한다. 가난한 자의 결혼식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은 슬픔을 기쁨으로 바꾼 것이 아니고, 기쁨에 기쁨을 배가한 것이다.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린 것도 아니요, 병든 자를 고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결혼이란 기쁨에 좋은 포도주를 더함으로써 기쁨을 배가한 것이다. 이반이 주장하듯, 세상은 고통과 슬픔, 죄 없는 아이들의 눈물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을 위해 세워져 있는 것이고, 예수가 지상에 온 것은 인간의 눈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을 위해서라는 점을 강조한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으로써 더 많은 열매를 맺었던 것처럼, 알료샤도 수도원이란 안전한 곳에 머물기보다는 세상에 나가 온갖 시련과 고통을 극복해 내고, 작은 파 한 뿌리의 선행을 쌓으며 사람들의 가슴속에 사랑과 희망을 심음으로써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작가의 이른 죽음으로 알료샤의 이런 활약이 그려질 2부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지만, 1부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속에서 독자는 이미 많은 것을 읽어 낼 수가 있다.

“한 알의 밀알”, 그것은 죽음 속에 포함된 새로운 생명의 부활이다. 그것도 많은 생명의 부활이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다. 고통이 없으면 정화도 없다. 이것이 바로 에피그라프의 의미다. 죽음, 부패, 고통, 이것은 바로 더 많은 새 생명의 보증이다. 죽음은 종말이 아닌 더 나은, 더 많은 삶의 탄생이라는 것, 역사를 이렇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 도스토옙스키의 메시지다. 이것이 바로 유한한 인간이 시간의 힘을 극복하는 강력한 힘이다.

난폭할 정도로 강렬한 삶에의 의지와 영원에 대한 뜨거운 동경, 바로 이것이 카라마조프적인 습성이다. 때로 그것은 방향을 잡지 못해 미쳐 날뛰는 정욕과 방탕(드미트리)으로, 저열하기만 한 육욕(표도르)으로, 추상적 인류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증오(이반)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결국은 알료샤가 보여 주는 것처럼 이웃에 대한 능동적이고 희생적인 사랑, 즉 기꺼이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하는 사랑이 될 것임을 작가는 보여 준다. 그래서 작품의 초반과 중반에 그토록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그려지던 카라마조프적인 힘은 작품의 미래를 위한 밀알이 될 알료샤의 열두 제자들에 의해 “카라마조프, 만세!”라는 긍정적인 환호를 얻게 된다. 예수와 그의 열두 사도가 인류를 위한 밀알이 되어 더 많은 밀알을 낳았듯, 알료샤와 열두 소년들도 자신들의 희생으로 인간과 신 사이에 귀중한 가교가 되어 더 많은 밀알을 탄생시킬 것이다. 마지막 설교에서 조시마 장로가 말했듯,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고통”,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그것을 다르게 말한다면, 천국은 사랑할 수 있는 기쁨 속에 있는 것이다. 연민, 희생적인 사랑이 최고의 사랑이라면, 삶에 대한 사랑은 모든 사랑의 기본이요, 출발점이다. 조시마 장로는 말한다.

하느님은 다른 세계에서 씨앗을 가져와 이 세계에 심었고, 그분의 정원을 키워 나가셨고, 싹 틔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싹 틔우셨으나, 그 안에서 자라난 모든 것들은 오로지 다른 신비스런 저 세계와 접촉하는 감각을 통해서만 살아 있고 또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대 내부에서 이 감각이 약해지거나 사라져 버린다면, 그대 안에서 자라난 것도 죽을 것이다. 그때는 삶에 무관심해질 뿐만 아니라 삶을 증오하게 될 것이다.

(…)

대지에 엎드려 입 맞추는 것을 사랑하라. 끊임없이 대지에 입 맞추고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을 퍼붓고, 모든 사람들과 세상 만물을 사랑하라, 환희와 열광을 구하라.

삶에 대한 사랑은 삶을 주는 어머니 대지에 대한 사랑이요, 또 다른 세계에서 씨앗을 가져와 이 세계에 심어 준 신과의 연결 고리다. 그래서 신을 잃으면 삶의 의미를 잃게 되고, 무관심하게 되며, 결국은 자멸에 이른다는 것이 작가의 메시지다. 신비스런 저 세계는 말, 즉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이성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의 유형수들 속에서 인간의 비합리적인 힘의 우위를 보고, 이런 비합리적인 힘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식으로 인간의 내면에 작용하는 것을 본 작가의 체험은 명백한 ‘진리’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기초가 되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말은 비합리적인 양심이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 본래의 윤리성 앞에서 무력화되고, 그의 합리적 정당화는 실패한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경우에서도,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도, 이반에게서도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사상과 사상의 실현인 행동을 지지하고 수행 가능케 했던 천재적인 변증법, 완벽한 논리 등은 이러한 이성적 인물들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비합리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은 영혼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고, 이반의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이 변화들에 대해 알료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오만한 결정에서 나온 고통이며, 깊은 양심의 가책이다!’ 그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가 여전히 복종하고자 하지 않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진리가 그의 마음을 점령한 것이다”. 결국은 “하느님이 승리하실 것”이라고 알료샤는 확신한다. 이는 작가의 확신이자 모든 이성적인 인물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성적 자아를 향한 강한 종교적 신념을 갖게 된 작가의 최후 메시지다.

도스토옙스키처럼 풍부하고 복잡하고 심오한 천성을 지닌 작가를 알지 못한다. 그는 세속적인 삶의 모든 현상에 대해 비범한 감수성과 깊은 동정심으로 신의 세계와 신의 의도를 보았고, 하나의 현상 속에서 온갖 다양한 감정과 사고의 격정을 보았다. 그는 신과 인간의 문제, 자유 의지의 문제, 선과 악의 문제, 책임의 문제, 추상적 인류에 대한 사랑과 뼈와 살로 된 이웃에 대한 사랑의 문제, 사회주의와 무신론, 그리스도교와 신에 대한 사랑의 문제, 영원과 불멸에 관한 문제, 미의 문제, 인간적인 사랑으로서의 열정과 신적인 사랑인 연민의 문제를 논했다. 그의 작품들은 방대하다. 그 방대함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단연 으뜸이다. 솔로비요프가 도스토옙스키를 기념하는 강연에서 지적했듯이, 그는 철저히 그리스도교인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자유로운 사상가요 탁월한 예술가다. 참으로 공존하기 힘든, 어쩌면 거의 모순적이라 할 수도 있는 측면들의 공존자이며, 이 위대한 측면들은 그 안에서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 매우 이상한 조화를 이루어 낸다. 그는 작품 속에서 철학, 종교학,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 이 모든 것을 문학으로 버무려 놓았고, 그가 다룬 주제는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소설의 확장은 인물을 넘어, 주제를 넘어, 시공을 넘어 언제나 현재화한다. 인간적인 사랑(passion)과 신적인 사랑(compassion), 사랑과 증오의 변증법적 관계, 신학과 철학, 당대 정치와 역사,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천재성이라는 신비한 직조기를 통해 하나의 소설로 녹여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떠난 지 100여 년이 훌쩍 넘었지만, 더없이 모던한 그의 작품과 더불어 그는 항상 현재를 산다. 그것도 지극히 분명한 현재를 산다. 저 유명한 니체의 초인 사상은 말할 필요도 없고, 형편없는 존재, 불완전하고 허약하고 불량품인 존재라는 이반의 인류에 대한 관점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에게서, 신이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라키틴의 무신론적 사상은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저자이자 21세기 회의론적 지성의 대표자인 크리스토퍼 히친스에게서, 인류에게 주어진 자유는 선물이 아니라 짐이자 저주라는 사상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쓴 에리히 프롬에게서 볼 수 있다.

산술적이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공리주의적이고 실질적인 증거들을 내세우는 도스토옙스키의 무신론자들의 논거는 2×2=4처럼 이성과 논리로는 반박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영감을 받은 많은 무신론적 사상가나 철학자들처럼, 역자 역시 그들의 논리적인 명징성, 이론적인 완벽함에 동감하고 매료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대심문관의 논리에 예수는 논리로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런 말 없는 입맞춤을 할 뿐이다. 마치 이반의 <대심문관>을 들은 후, 알료샤가 논쟁 대신 형의 입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말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다.

무신론적인 사상가들은 도스토옙스키의 무신론자들과 사랑에 빠지고 그들의 사상과 논리에 영감을 받고, 종교적인 사상가들은 도스토옙스키의 긍정적인 인물들에게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보고 영감을 받는다. 비단 위대한 사상가들에게서만 도스토옙스키를 보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디즈니가 만든 최근 영화 <겨울 왕국>을 보았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안나에게 여름을 꿈꾸는 눈사람 올라프가 말한다. “그것은 자신보다 사랑의 대상을 앞에 두는 것이고, 그 대상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 앞에 두는 것”이라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 정도까지 나아가는 사랑, 그것은 바로 조시마 장로의 가르침이자, 작가가 자신의 긍정적 인물들, 소냐, 미시킨, 알료샤를 통해 반복해서 강조하는 중심 메시지다. 밀알 한 알의 희생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생명을 낳는 것처럼, 엘사에게 내려치는 칼을 자신의 몸으로 막은 안나의 희생적인 사랑은, 엘사의 생명을 살려 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활도 가져온다. <겨울 왕국>에서 심장에 박힌 얼음을 녹이는 길은 하나다. 현명한 트롤 할아버지가 알려 주듯, 그것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진정한 사랑’뿐이다. 그것은 조시마의 말이고, 알료샤의 말이며, 도스토옙스키의 말이다.

예술은 종종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치유의 힘이 된다. 박완서 작가도 그러했고, 프리다 칼로도 그러했고, 도스토옙스키도 그러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말년의 몇 년만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가난, 그것도 찢어지는 가난에 허덕이며 살았던 생계형 작가였고, 유형살이를 한 정치범, 간질병 환자에 도박 중독자였다. 사랑하는 자식도 둘이나 앞세워 보낸다. 결코 순탄하지 않은 삶과 그 삶이 주었던 적지 않은 인간적 고뇌들, 그의 이 모든 삶의 재료들이 문학의 재료가 되었다. 개인적인 아픔들, 세속적이고 시대적인 문제들, 거대한 철학적 질문들, 저마다 다른 색, 다른 재질을 갖는 작은 조각이 모여 하나의 작품이 되는 콜라주나 모자이크처럼, 다른 목소리들이 모여 이루는 거대한 합창처럼, 그렇게 그의 작품은 다양한 면모에 다양한 차원에서 읽을 수 있지만, 자체로 하나의 위대한 걸작이 된다. 삶이 주는 고통의 마디들이 테마가 되고 인물이 되고, 그의 개인적 고통의 마디들은 당대 러시아 사회가 겪고 있던 질곡들과 맞물려 더 큰 철학적 사상적 테마를 형성해 낸다. 문학은 도스토옙스키에게 문자 그대로의 삶(생계)이기도 했지만,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삶이었고, 영혼의 안식처였으며, 세상 족쇄로부터의 탈출구였다. 작가는 현실을 허구로 만들어 내어 삶을 바꾸어 보며 상실과 아픔을 잊기도 한다. 1878년 5월, 그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시작한 지 불과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을 때, 세 살배기 아들 알료샤가 자신에게서 물려받은 간질병 발작으로 죽는다. 그는 작품 창작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슬픔에 빠지나, 부인 안나의 권유로 여행을 다녀온 후 다시 집필에 전념하게 된다.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인공에게 죽은 아들과 같은 이름을 부여하고, 작가의 눈에 가장 긍정적이고 경탄할 만한 자질을 다 부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더 나아가 주인공 알료샤의 종교적이고 유순한 어머니에게 생후 3개월 만에 죽은 자신의 첫째 딸 소피야의 이름을 부여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알료샤를 그 이상 긍정적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사람으로 그려 넣는다. 알료샤는 정신적으로 부드럽고 관대하면서도 강하고, 육체적으로도 잘생기고 건강하다. 주인공 알료샤를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너무 빨리 신의 품으로 간 둘째 아들 알료샤를 잃은 상처를 극복하려 한 것이리라. 아들을 잃은 아버지로서 도스토옙스키의 절절한 슬픔 역시 아들 일류샤의 죽음 위에 통곡하는 스네기료프의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스네기료프의 눈물과 통곡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슬픔을 토해 낸 것이리라. 또한 작가의 둘째 아들 알료샤와 스네기료프의 아들 일류샤의 죽음이 그저 상실이나 무(無)로 사라짐이 아니라, “더 많은 열매를 위한” 희망의 약속임을 보여 주고자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류샤와 알료샤는 닮은 점이 많다. 그들의 원래 이름은 일리야와 알렉세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일류샤와 알료샤로 불리며 발음상 매우 가깝게 들린다. 이렇게 호칭이 유사할 뿐만 아니라, 둘 다 형제 중 막내이고, 작품의 주요 테마이자 요한복음에서 발췌해 작품의 에피그라프로 쓰인 “한 알의 밀알”의 상징이다. 현실에서 다 살지 못하고 간 어린 아들 알료샤에게 작품을 통해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자질들을 부여함으로써 죽은 알료샤를 위해, 또 자신을 위해 다소간 위안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이반의 행동하는 분신인 스메르댜코프, 상처 받고 학대받는 어린 소녀들의 테마의 변주인 그루셴카, 오만하고 지적인 여인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등 인물에 대한 해설, 이름들이 갖는 러시아적 의미와 상징성들, 더 나아가 도스토옙스키의 이전 작품들과 테마적인 연관성 등을 논의해야 하겠지만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고자 한다.

또다시 자유 의지와 신, 운명의 문제

유형 후에 쓴 도스토옙스키의 최초의 작품 ≪지하생활자의 수기≫의 번역본 해설에서 역자는 작품의 주된 테마였던 자유 의지와 신, 운명의 문제에 대해 논한 적이 있다. 삶의 여정을 걸어가면 갈수록, 삶 속에서 자유 의지가 차지하는 역할이 점점 줄어들어 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어디로 여행을 갈까,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누구와 영화를 볼까 하는 사소한 일상의 선택들을 하며,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며, 우리의 삶은 우리가 선택한 것들로 채워 넣을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들 속에는 어디에도 우리의 자유 의지, 즉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들어설 공간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내 삶을 형성하는 데 너무도 중요한 부모와 형제, 자식, 그리고 나의 외모, 머리, 성격, 그 어디에 내 자유 의지가 들어설 공간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나의 의지로 배우자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지나칠 정도로 자세히 설명하듯, 벼락을 맞을 확률보다 더 적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 그런 만남이 가능해지고, 그 만남들 속에서 더 많은 우연과 우연이 겹쳐 사랑이 가능해진다. 한 번은 우연이나, 몇 개의 우연이 겹치면, 그것은 필연이요 운명이 된다. 정작 중요한 것들 속에는 내 자유 의지가 들어설 공간이 어디에도 없다. 작고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련의 선택들이 우리에게 자유 의지라는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자유 의지는 신기루이자 착각일 뿐이라는 자유 의지와 신(운명)에 대한 나의 사고를 더욱 굳건히 하는 일이 생겼다. 친구가 점심을 먹으러 왔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몸에 좋은 음식만 먹으며,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여인네다. 그런데 한 달 전, 소세포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녀석들은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돌며 22시간 만에 두 배씩 늘어난다고 했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 10개월을 더 살 수 있고, 치료를 받지 않으면 3개월을 산다고 했다. 많이 슬펐고 많이 아팠다. 친구는 자신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으니, 후회가 없다고 했다. 방사선 치료로 병원에서 지내며 머리카락도 손톱도 다 잃은 모습으로 10개월을 사느니, 집에서 가족과 3개월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녀의 자유 의지는 가족과 보내는 3개월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자유 의지의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작 중요한 삶의 길이와 그것의 시작과 끝은 우리의 선택 범위 밖의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의 범위는 고작 3개월을 살까 10개월을 살까 하는 정도의 범위뿐이다. 신기루다.

운명론자이지만 아직도 나름 지식인입네 하는 맘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 신기루 같은 자유 의지를 무슨 대단한 무기나 되는 듯 그것으로 운명에 대항해 주먹을 들어 보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것은 나의 완패로 끝난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운명에 반기를 들어 보았다. 운명에 의해 잠시 머물게 된 이 세상.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하고 힘에 겨운 이 사회인이라는 옷을 벗어 내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사회인, 그것은 알료샤의 크고 긴 승복처럼 아직 내 것이 아니고 절대로 내 것이 될 수 있을 성싶지도 않다. 내 자유 의지로 저 안전하고 편안한 나만의 상아탑에 돌아가려 안간힘을 썼지만, 되지 않았다. 속세가 아직도 내가 있을 곳이라 운명은 말하는 듯하다. 아직 이곳에서 아무것도 이루어 낸 것이 없어서 그런가 보다.

사회인이란 옷은 몹시도 불편하다. 암묵적인 사회의 규칙이나 사교적인 가장은 아직도 낯설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어린아이가 된 듯하다. 사회에서는 내가 철석같이 상식이라 믿어 오던 많은 것들이 의심스러워진다. 마치 사람이 아닌 제복으로 대변되는 직함들이 사는 곳처럼 여겨진다. 때로 사람은 없고 직함만 있다. 자신의 생각이 없다. 자신의 욕망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 자신의 생각이라고 믿고 산다. ‘자신의 생각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대부분 살면서 타인에게 빌려 온 것’이라는 욕망과 자아에 대한 라캉의 정의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렇게 부장님, 상무님, 전무님이란 직함으로만 살다 보면, 그 직함이란 껍질을 잃게 되었을 때, 어느 날 문득 “벌레”로 변신해 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하는 카프카의 ≪변신≫ 속 잠자 그리고리처럼, 그들은 거울 속에서 텅 비어 버린 “투명 인간 (hollow man)”을 발견하고 절망하지 않을까.

그런데 가끔은 이런 “직함”이란 껍질 아래에서 자신의 철학과 줏대와 욕망을 가진 “사람”을 본다. 그러면 나는 행복하다. 아주 드물지만, 그 “사람”의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시인을 본다. 그러면 나의 행복은 하늘에 닿는다. 괴물과 같은 사회 속에서 매일매일 전쟁을 치르며 살면서도, 영혼을 잃지도 않고, 사회의 욕망에 자신의 욕망을 종속시키지도 않으며, 노래하는 시인의 심장을 가진 그들은 눈이 부시도록 멋지다. 진정 강하면서도 아름다운 영혼이다. 먼 훗날, 직함이나 직급과 같은 사회적인 껍질을 벗고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들은 텅 비어 버린 자아가 아닌, 눈부시도록 멋진 자아,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 살아 숨 쉬는 진정한 자아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의 가슴속에 있는 시인이 계속해서 노래할 수 있게 해 주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욕망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사회에서 만나는 벗들의 가슴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시인을 깨워 내고 노래하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사회 속에서 해야 할 일 중 하나일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인으로서 역할을 했다는 흔적을 남기고,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게 양식이 될 밀알과 같은 희망을 남기고 떠나라고 운명은 말하는 듯하다. 속세에 남긴 작은 흔적, 밀알과 같은 희망을 되돌아보면서 미소 지으며 상아탑으로 돌아갈 수 있길 소망한다. 많이 아파하고, 많이 기뻐하고, 많은 이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하고…. 하지만 여전히 나는 상아탑의 꿈을 꾼다…. 언제나 내 운명이 내게 속세 대신 상아탑으로의 귀환을 선물로 주려는지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평생을 모범생으로 살아온 나는 숙제를 하듯 세상에서의 하루하루, 세상에서의 한 만남 한 만남에 오늘도 최선을 다한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또 자신의 심장이 뛸 대상을 갖는 것, 즉 자신만의 욕망을 갖는 것, 그것이 거대하고 강력한 운명 속에서 인간이 자유 의지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이 아닌가 싶다.

봄이 오시는 소리가 들린다. 이젠 몸이 아닌 가슴으로 봄이 오시는 소리를 듣는다. 고된 노동으로 쩍쩍 갈라진 농사짓는 이의 손마냥 메마른 대지가 깨어나는 소리를 듣는다. 개나리의 보송보송한 솜털 같은 꽃망울이 맺히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이 봄이 오면 몸도 마음도 그만 아프고 싶다. 많이도 앓았다. 마악 출발하려는 한 해처럼, 봄처럼, 자연처럼, 이젠 웅크리지 말고 기지개 활짝 펴고 살아났으면 좋겠다. 매일 아침 산으로 둘러싸인 자연 속에서 갓 태어난 태양을 맞는다. 자연의 테마는 무궁무진하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처럼 ‘끈적이는 이파리, 파란 하늘’이 좋다. 미시킨 공작처럼, 한 그루의 나무, 새벽노을, 한 포기의 풀이 좋다. 드미트리처럼 태양이 좋다. 알록달록한 야생화가 가득한 자연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 그저 예쁘게 가꾸어진 삶보다는 태양과 같은 강하고 호기 넘치는 삶을 살다 가고 싶다. 마흔은 불혹의 나이라고 공자님이 말씀하셨다. 쉽사리 미혹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역자의 마흔은 유혹투성이다. 여기를 둘러봐도 저기를 가 보아도, 배우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온통 혹할 것투성이다. 미혹되지 않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무모한 치기의 제거로 마음의 평정을 이루는 성숙과 현실에 굳건히 발을 내리는 어른스러움을 이야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열정과 욕망의 상실, 모험에 대한 두려움, 현실과의 타협을 가리키기도 할 것이다. 삶은 늘 그렇다. 한 가지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른스런 마음의 평정보다는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는 열정과 욕망으로 가득한 심장을 택할 것이다. 나잇값을 하는 성숙한 어른보다는 슬프면 엉엉 소리 내 울고, 행복하면 깔깔 큰 소리로 웃고, 아프면 어루만져 달라고 떼쓰고, 눈이 오면 강아지처럼 데굴데굴 구르며 그렇게 살고프다. 중용, 불혹보다는 아프고 힘들고 벅차지만, 많이 기뻐하고, 많이 슬퍼하고, 많이 아파하고, 많이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조용한 삶보다는 열병과 같은 치열한 삶을 살아 내고 싶다. 치열하게 투쟁하듯, 또 내일 죽을 것처럼 그렇게 꽉 차고 애탈 정도로 열렬하게 오늘을 살아가련다. 설렘과 살아 있는 느낌, 세상과 사물에 대한 생생한 시선, 이런 것들을 잃는다는 것, 바로 그것은 유년과 청춘의 끝이고,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의 끝이다. 가진 것 없어도 살아 있는 심장을 느끼고 매일 새로운 아침에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삶이자 가장 살아 있는 삶일 것이다. 천성적인 명랑함, 청신한 감각, 정직하고 순진한 마음의 정열을 잃지 않으면 나이와 세월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아름다움과 영원한 젊음을 갖출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하나의 경험을 모두 새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살아 있는 자아, 매일 새벽의 다른 맛 다른 색을 느낄 수 있는 자아로 남고 싶다. 그래서 언제나 배움에 굶주려 있다. 새로운 것을 느끼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언제나 경이롭고 신비하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뾰족한 연필 촉처럼 그렇게 늘 감각과 사고의 날을 세우고 살아가고 싶다. 뾰족한 연필심이 삶의 무게를 실어 삶의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채우며 닳아 없어지듯이, 그렇게 생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움직이고 써 나가고 싶다. 무뎌지는 시선과 감각, 모든 것에 덤덤해지는 것, 그것이 가장 두렵다. 상아탑을 떠난 지 벌써 6년이다. 하지만 공부하기, 배우기를 멈춘 적은 없다. 어쩌면 학교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배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모든 배움 속에서 정말이지 절절한 재미를 느낀다. 아이 같은 시선, 소녀 같은 감수성, 상상력… 이 모든 것이 내겐 더없이 소중하다. 사회인으로서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도 녹록하지도 않지만, 삶과 문학에 대한 시선이 깊어지고 넓어짐을 느낀다. 두렵지만 피하지 않으련다. 운명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건 지상에서 마지막 숨을 쉬는 그날까지 삶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놓지 않으련다. 온실 속에서 보호받는 귀하디귀한 화초보다 거친 자연 속에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남는 야생화의 삶을 꿈꾼다. 자아의 시선을 일깨우는 것. 자아의 욕망을 알게 해 주는 것, 굳건한 자아의 시선으로 타자를 이해하는 것, 바로 그것이 문학이다. 작가가 지금 나의 말을 듣는다면, 삶에 대한 태도에서 진정으로 도스토옙스키적인 인물이라 칭찬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그는 언제나 내 심장을 뛰게 한다.

도스토옙스키, 그가 있어 내 삶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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