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영국 성공회
장 칼뱅에 의해 발흥된 칼뱅주의 개신교가 영국으로 건너오면서, 영국 교회의 전통주의와 대립하는 입장에서 우리는 '깨끗하다'는 의미로 라틴어 Puritas 에서 유래하여 복음주의자들이 퓨리턴(puritan)이라고 자칭한 것에서 유래된다. 일본에서 근대화 시기 이 어휘를 청교도로 번역했다. 깨끗할 청을 써서 淸교도.
역사
성경중심 신앙과 금욕주의,강경한 반로마교회 기치로 전통주의에 반대 노선을 취한 탓에 영국교회의 수호자인 영국 국왕들에게 탄압을 받아, 종교의 자유를 찾으러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여 미국의 기원이 되었다고 알려졌다.
탄압의 시작은 영국의 개신교를 설립한걸로 알려진 헨리 8세 시절이었다.
영국 국교회와 다른 복음주의 개신교단 사이의 관계가 원만한 현재 기준으로 생각하면, "헨리 8세가 세운 성공회(영국 국교회) 세력도 같은 개신교인데 왜 청교도를 탄압하지?"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사실 성공회와 종교개혁으로 생긴 개혁교회(우리가 흔히 아는 개신교 이미지의 교단들)사이는 역사적 설명이 필요하다.
헨리 8세는 영국 내에서의 교황 수위권을 부정하고 영국 교회 자체를 독립시켜 교회국가화 하여 영국 내에서의 교회 수장직위를 차지하는데 목적이 있었을 뿐, 가톨릭에서 이어진 외적인 요소들이나 세세한 교리를 뜯어 고치는 데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루터주의에 영향을 받은 윌리엄 틴들의 영어성경을 반입하거나 소지하면 화형시켰고, 가톨릭 교리인 화체설(성체 성변화설)을 부인한 옥스포드 신학교수들을 토머스 모어를 대법관으로 기용하여 40명을 고문하고 6명을 화형시킬 정도였다. 이외에도 가톨릭 교회의 7성사, 가톨릭식 미사에서 거의 달라지지 않은 예배형식, 주교제 등 가톨릭 교회의 기본교리와 외적 요소에 대해선 전혀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수위권만을(그것도 영국내에서만) 부인한 가톨릭 교도나 다름 없었고 교황의 권위와 권한을 국왕에게 귀속시킨것에 불과했다.
결국 성경중심의 신앙을 기치로 걸고 기존 전통의 일소 즉 ,주교제 등 교계제도와 보편교회적인 신앙 요소들을 전부 거부하는 청교도들은 루터나 칼뱅 등이 주장한 '개혁'의 범주에 훨씬 못미치는, 다시말해 개혁신앙이 부족하여 아직도 가톨릭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있는 교파라는 이유로 영국교회의 개혁이 불완전하다 생각했다. 영국 교회의 대다수 사제들과 신자들은 로마수위권만 부인하면 기존의 신앙과 전례와 거의 유지했기 때문에 영국 교회의 개혁을 주장한 청교도들을 박해했다. 따라서 당시 복음주의자들은 탄압을 받는 동시에 심각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당시엔 루터주의와 칼뱅주의(츠빙글리)를 복음주의라 한것은 당시 영국국교회에서도 가톨릭 성향, 루터주의 성향, 칼뱅주의 성향, 그냥 이것도 저것도 모르겠고 상황에 따라 "국왕이 옳다"...는 현실성향들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기에 전례나 전통보단 성경중심을 주장하는 개혁 성향 신자들이 자신들을 개신교라 자청하기 보단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며 복음주의자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헨리 8세 사망후,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치하에서 존중과 박해를 한번씩 겪으면서 잉글랜드에선 종교적 갈등이 격화 되었는데, 엘리자베스 1세는 집권 초기부터 개혁주의 성향의 신도들 손을 들어주지 않고 당시 강대국인 스페인의 눈치와 아직까지 상당했던 가톨릭 성향 신자들을 배려하여 중도적인 노선을 취했다. 다시 가톨릭으로는 돌아가지 않는 한편 기존의 관례였던 가톨릭식 전통에도 그다지 손을 대지 않은것이다. 특히나 국가교회에서 주교제는 영국왕 입장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통치 수단이었고, 이는 개혁성향 복음주의자들에게 큰 불만으로 자리 잡았다. 일단 엘리자베스 1세 시기에는 왕권이 강력한데다가 메리 1세시기 탄압받던 처지보단 천지차이 였기 때문에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진 않았다.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엘리자베스 여왕 사후 제임스 1세때였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국왕 시절 이미 스코틀랜드의 국교화가 된 칼뱅주의 교육을 받았고, 교리상으론 역시 지지했지만 잉글랜드 국왕이 된 후로는 입장이 조금 미묘해졌다. 영국의 국가교회의 주교제가 왕이 임명하는 권한이기 때문.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회처럼 잉글랜드가 변할것이라고 생각한 잉글랜드 청교도들은 매우 실망을 하게 된다.
1603년 4월 제임스 1세는 청교도 성향 영국교회 목사 1000명이 서명한 천인청원(Millenary Petition)을 받게 되는데 일단 청교도들은 왕과 국가에 충성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영국교회의 관습에 대한 개혁을 촉구 했으나 제임스는 교리상 칼뱅주의에 기울긴 했지만, 급격한 개혁으로 긁어 부스럼을 만드려고 하지 않았다. 외국출신 왕이 즉위하자마자 상당한 세력이 있는 영국교회를 개혁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고, 무엇보다 청교도들의 정치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 신봉자였지만 청교도들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같은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았는데 왜 이러냐면 칼뱅 사후 8년이 지나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후 칼뱅주의자들은 국가권력이 탄압하고 국왕이 폭군이라면 퇴출시켜야 된다 는 입장으로 선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뱅주의의 본산 제네바는 공화국이라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제임스에겐 청교도들을 왕권에 대적하는 세력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시기에, 때마침 가톨릭 극단주의자였던 가이 포크스 등이 저지른 영국 국회의사당 화약 폭파 음모로 영국내 가톨릭의 입지가 위태해지자, 청교도들은 이 기회에 대대적인 가톨릭 탄압을 통해 영국내에서 가톨릭과 교황의 영향력을 뿌리 뽑길 바랐다. 하지만 제임스 1세는 선대 메리 여왕 시대의 막장극을 자기 대에 되풀이해서 좋을 게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 아래, 음모에 직접 가담한 자들의 처벌과 성공회의 입지 확대만을 꾀하는 정도로 마무리지으려 했다. 제임스 입장에선 가톨릭을 때려잡아봤자 이미 정치적으로 가톨릭 세력은 많이 남지 않았고 과격해진 청교도들의 입장만 대변하다간 왕이 바지저고리 신세로 전락할 여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왕의 행동이 그동안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대한 불만과 함께 가톨릭과 야합하려는 모습으로만 보였던 청교도들은 제임스 1세에 반항했고, 그때부터 청교도식 예배를 금하는 탄압이 시작되었다. 다만 제임스 1세는 청교도들만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가톨릭과 청교도들 사이에서 중용을 지킨다고 선언했고, "교황 추종자와 광신적 청교도들은 양극단의 멍청이들" 이라 훈계하며 배격하는 양비론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의 소망과는 달리 당시 영국의 나랏일은 청교도들의 협조없이는 진행하기 어려웠는데, 헨리 8세 시기 이후 청교도들은 근면성실하게 상공업을 기반으로 힘을 쌓아 납세자중 상당수를 차지하며 법조계와 학계에도 많이 진출한 결과 이 분야에서 청교도들의 세력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청교도 법학자들은 왕권은 주님의 법 아래에서만 효력이 있다. 는 생각이 왕권신수설을 침해한다여긴 제임스 1세에겐 심히 불쾌했으나 청교도 법률가나 학자들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이었다.
반면 제임스 1세의 바람대로 중용을 지키는 충실한 신하인 성공회에 충성을 바치는 신도들은 많지 않았다. 통계적으로 영국국교회(성공회) 신도수가 적은것이 아니라, 국교회와 왕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그닥 관심이 없었던 현실주의자들이 많았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개혁신학이란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청교도들의 불만은 숫적으로는 많지 않더라도, 제임스 1세와 그후 스튜어트 왕가 시절까지 왕당파에 대한 강력한 반대 세력이 된다.
이러한 배경속에 청교도 신분으로 박해를 피해 미국에 건너간 메이플라워 호의 사람들 역시 근왕적인 태도를 취했다.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영어가 귀찮다면 여기로)에서 "제임스의 충성스런 신하들..."이란 식으로 자신들은 왕권을 분쇄하는 반란 세력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왕권은 주님의 법 아래 있는 존재라는 것이지 왕권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것. 그러나 이런 사상 역시도 당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스튜어트 왕가 군주들의 기준으로는 충분히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
청교도 주류는 영국 내에서는 소수파였음에도 상공계급(부르주아, 젠틀맨)에서는 상당수를 차지했기에 의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고, 이에 계속 영국에 잔류하며 반국왕운동을 주도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올리버 크롬웰의 철기군. 영국 스튜어트 왕가가 성공회를 유지하면서 가톨릭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할 때 청교도는 지속적으로 내전에서 의회파를 지지했고, 청교도는 점차로 의회에서 유력해지고, 1642년에 일어난 청교도 혁명의 주체가 되어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로 하여금 정권 접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크롬웰이 정권을 잡자 청교도 다수파인 장로회파를 숙청하고, 소수파인 독립파(회중파) 청교도들만이 크롬웰의 통치에 참여하며 매우 불안정한 통치기반에서 고압적 통치를 자행하기 이른다. 통치시기 청교도 세력은 지나친 종교적 엄숙주의 강요에 답답해하는 국민적인 불만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나오는 반대를 철권독재로 찍어눌렀고, 결국 독재자 크롬웰이 죽자마자 정치적으로 대대적인 비판을 받았다. 한편 청교도 혁명당시 채택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은 현대 개혁교단의 교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청교도의 시대는 1660년 찰스 2세의 복위로 막을 내리고, 대대적인 역공으로 많은 청교도 지도자들이 실각하고 청교도는 거의 소멸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다시 복권의 단계를 밟은건 1688년 명예 혁명 때였으나, 이 시기부터는 이미 국교회(성공회) 우위의 상황이 유지되었기에 그 정치적 중요성은 상실되었다. 하지만 경제 및 문화적으로는 금욕, 근검, 절약 등으로 도리어 우위를 점유했다는 견해가 많은데, 여기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장이 막스 베버가 주장한 청교도 자본주의다. 대표적으로 저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있다.
한편 유럽 대륙의 네덜란드와 북독일 일부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영국식 청교도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네덜란드의 경건주의 운동을 'Nadere Reformatie'(나데러 레포르마치, 2차 종교개혁)라고 부른다.
칼뱅의 교육관
청교도적 입장에서 타락 전 세상을 가꾸라는 신의 명령(기독교계에서는 문화 명령 혹은 통치 헌장이라 불린다)을 잘 이행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문화와 과학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러한 점은 중세 시대 카톨릭 수도 공동체 문화와 제세례파들과 대립되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이 17세기 과학 혁명과 18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는데에 중요한 이바지를 했다.
오직 성경을 강조하려면 모든이가 글을 배워야 했고, 중세의. 우둔한 전례와 풍습에 비판적이려면 이성을 바탕으로 인문적 지식이 뒷바침이 되어야 하기 때문
""주께서 우리가 물리학, 변증법, 수학과 같은 학문에서 불경건한 사람들의 활동과 수고로 도움 받기를 바라시니, 값없이 베푸시는 이 하나님의 선물을 무시해서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마땅한 형벌을 받지 않도록 이 도움을 잘 활용합시다."" ㅡ 장 칼뱅, 기독교강요 2권 2장 16절
청교도 교육관은 이성과 논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래서 당대에는 이런 공격도 받았다고 한다. "저는 성경으로 더 충만할지 모르는 어떤 박식한 학자의 설교보다, 아무런 연구없이 그냥 성령의 활동으로 말하는 사람의 설교를 듣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성과 믿음의 이분법적인 접근보다는 믿음이 이성을 우선하지만 이성 없이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음을 역설했다.
교육 시설
청교도들은 지식 교육에 있어 기독교 밖의 학문을 회피했던 제세례파와 달리 기독교 외의 학문들을 끌어안았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기본적인 교육 방침은 성서에 기반한 신앙인을 교육하는 것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성서 밖의 학문들을 또한 경시 하지 않았다. 사실 이에 영향을 받아 세워진 교육 대학들은 지금도 미국에 많이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하버드 대학교와 예일 대학교이다. 두 대학은 네덜란드에 망명한 분리주의파 청교도 회중교회 출신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서 설립했다. 애초에 하버드 대학교는 목사양성 학교였지만 시간을 거듭하며 형태가 계속적으로 변했다. 뉴잉글랜드의 첫열매를 보면 하버드 대학교를 세우던 때의 증언이 생생히 녹아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 탈 없이 뉴잉글랜드로 데려다 주신 뒤로, 우리는 집을 짓고, 생필품을 마련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편한 장소를 세우고, 시민정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구한 일 가운데 하나는 배움을 증진하고, 그것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일이었습니다."" ㅡ뉴잉글랜드의 첫 열매(New England's First Fruit(1643))
이들을 청교도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들은 성공회에서 떨어져나온 분리주의자들이고, 진짜 청교도들은 성공회 내부에 남아 저항을 계속한 이들이 자처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이플라워 같은 이들의 기록에는 청교도라는 표현이 전혀 없다.
대표적인 청교도 문학으로는 존 밀턴의 <실낙원(失樂園)>, 존 번연의 <천로역정> 등이 있다.
이들의 주 가치관 중 하나였던 금욕주의는 영국 요리를 맛없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청교도
淸敎徒
Puritans
개신교 교파 중 하나이다. 오늘날 성공회의 전신인 잉글랜드 국교회의 종교개혁이 다소 불충분하다고 여겨 보다 개신교적, 특히 칼뱅주의적인 방향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잉글랜드 개신교도들을 가리킨다.
청교도는 다소 포괄적인 개념인데, 본래 잉글랜드 국교회에 소속되어 국가교회를 받아들이면서도 잉글랜드 교회를 보다 칼뱅주의 및 개신교적 원칙에 충실한 교회로 개혁하고자 했던 이들과, 강경한 개혁주의 및 회중교회 성향의 비국교도(Non-Conformist) 개신교도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17세기 청교도인 중소 지주 젠트리, 시민 계층이 영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
Pilgrims
잉글랜드 국교회는 국왕을 중심으로 전 국민을 통합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개신교를 근본으로 하되 가톨릭과 개혁교회 교리가 섞여있는 중립 노선이다.
청교도는 비국교도 개신교인 뿐 아니라 잉글랜드 국교회 교인으로서 국가교회를 추구하되 잉글랜드 교회가 가톨릭 전통을 줄이고 개혁교회에 가까워지길 바라는 사람들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성경 중심, 금욕주의, 칼뱅주의, 반가톨릭 성향을 가지고 있다.
"성공회 수장인 영국 국왕의 탄압으로 일부 청교도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여 미국을 세웠다."라고 말하면 정확한 설명이라고 할 수 없다. 청교도들 중에는 잉글랜드 국교회 교인이자 국가교회주의자로서 잉글랜드 국교회가 개혁교회로 변하길 바랐던 사람들이 적지않았다. 이들 부류는 영국을 떠나고자 한 사람들이 아니다.
북아메리카로 떠난 사람들은 청교도 중에서 국가교회를 부정한 비국교도 및 자유교회를 주장한 소수파이다. 이들은 국가와 종교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영국에서 탄압 받았다. 분리파 중 일부가 잉글랜드에서 개혁이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아예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이 미국의 시초이다. 분리파는 국가교회, 자유교회 차이만 있을 뿐 청교도와 교리가 똑같았기 때문에 1세대 미국인들은 금욕주의자였다. 자신의 자녀들도 대대손손 금욕주의, 미국을 비국교도적 자유교회 및 청교도 정신 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청교도 분리파에서 회중교회와 침례교회가 나왔다. 그래서 미국 초창기에는 회중교회 교인이 가장 많았다가, 회중교회 상당수가 침례교회로 흡수된 후 현재 침례교회 교인수가 가장 많다.
성공회를 만든 헨리 8세는 영국에서 교황 수위권을 부정하고, 영국 교회를 독립시켜, 국왕이 영국 교회 수장 직위를 차지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신교 진영으로 이동하되 가톨릭의 교리, 전통을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과거 가톨릭 신자였던 국민들을 자극할 마음이 없었다. 성공회 안에는 가톨릭 성향이 강한 교인과 개혁교회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
가톨릭 성향이 강한 왕이 즉위하면 성공회 내에서 개혁주의 교인을 탄압했다. 루터주의에 영향을 받은 윌리엄 틴들 영어 성경을 소지하면 화형에 처하고, 가톨릭 교리 화체설을 부인한 옥스퍼드 대학교 신학교수들을 토머스 모어를 대법관으로 기용하여 40명을 고문하고 6명을 화형에 처할 정도였다.
개혁교회 성향이 강한 성공회 신자들은 성공회 내에서 가톨릭 미사, 복장, 7성사 등을 수정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몇 시간씩 걸리는 예배 시간을 줄이고, 복장도 가톨릭 복장을 입지 않을 것을 주장했다.
헨리 8세 사망 후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치하에서 존중과 박해를 한 번씩 겪으면서 잉글랜드에 국교회 안에서 종교적 갈등이 격화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개혁주의 성향 신도들 손을 들어주지 않고 당시 강대국인 스페인의 눈치와 가톨릭 성향 신자들을 배려하여 중도적인 노선을 취했다. 잉글랜드 국교회 내 가톨릭 전통에도 그다지 손을 대지 않았다. 개혁주의 교인들은 엘리자베스 1세 시기 왕권이 강력한데다가 메리 1세 시기 탄압받던 처지보다는 나았기 때문에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진 않았다.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제임스 1세 때였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국왕 시절 스코틀랜드 국교가 된 칼뱅주의 교육을 받았고, 지지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국왕이 된 후 입장이 조금 미묘해졌다. 영국 국가교회에서 왕이 주교를 임명하는 권한이 좋았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처럼 국교회가 변할 것이라고 생각한 청교도인들은 매우 실망했다.
1603년 4월 제임스 1세는 청교도 성향 영국 교회 목사 1000명이 서명한 천인청원(Millenary Petition)을 받게 되는데 일단 청교도들은 왕과 국가에 충성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영국 국교회의 관습에 대한 개혁을 촉구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교리상 칼뱅주의에 기울긴 했지만 급격한 개혁으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외국 출신 왕이 즉위하자마자 상당한 세력이 있는 영국교회를 개혁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고, 무엇보다 청교도들의 정치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 신봉자였지만 청교도들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다. 같은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칼뱅 사후 8년이 지나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이후 칼뱅주의자들은 국가권력이 탄압하고 국왕이 폭군이라면 퇴출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뱅주의의 본산인 제네바는 공화국이었다. 그래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제임스에겐 청교도들이 왕권에 대적하는 세력이었다.
그러던 시기에 때마침 가톨릭 극단주의자였던 가이 포크스 등이 저지른 영국 국회의사당 화약 폭파 음모로 영국 내 가톨릭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청교도들은 이 기회에 대대적인 가톨릭 탄압을 통해 영국 내에서 가톨릭과 교황의 영향력을 뿌리뽑길 바랐다. 하지만 제임스 1세는 선대 메리 1세 시대의 막장극을 자기 대에 되풀이해서 좋을 게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 음모에 직접 가담한 자들의 처벌과 성공회의 입지 확대만을 꾀하는 정도로 마무리지으려 했다. 제임스 입장에선 가톨릭을 때려잡아봤자 이미 정치적으로 가톨릭 세력은 많이 남지 않았고 과격해진 청교도들의 입장만 대변하다간 왕이 바지저고리 신세로 전락할 여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왕의 행동이 그동안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대한 불만과 함께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가 대륙의 30년 전쟁을 강건너 불구경했고, 특히 사위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가 패망하는데도 소극적인데다가 왕세자의 결혼을 프랑스와 스페인 등 가톨릭 국가와 하려 했고 실제로 왕세자였던 찰스 1세를 프랑스 공주와 결혼시키자 청교도들은 제임스 1세에 반발했다.
그때부터 청교도식 예배를 금하는 탄압이 시작되었다. 물론 제임스 1세는 청교도들만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가톨릭과 청교도들 사이에서 중용을 지킨다고 선언했고, "교황 추종자와 광신적 청교도들은 양극단의 멍청이들"이라 훈계하며 배격하는 양비론을 취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의 소망과는 달리 당시 영국의 나랏일은 청교도의 협조 없이는 진행하기 어려웠는데, 헨리 8세 시기 상공업을 기반으로 힘을 쌓아 납세자 중 상당수가 대륙에서 전래된 개혁신학을 받아들였고 이들이 법조계와 학계 정계에 많이 진출한 결과 이 분야에서 청교도들의 세력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청교도 법학자들이 주장하는 왕권은 주님의 법 아래에서만 효력이 있다는 생각이 왕권신수설을 침해한다고 여긴 제임스 1세에겐 심히 불쾌했으나 청교도 법률가나 신학자들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이었다.
반면 제임스 1세의 바람대로 중용을 지키는 충실한 신하인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전신)에 충성을 바치는 신도들은 많지 않았다. 통계적으로 영국 국교회(성공회) 신도 수가 적은 것이 아니라, 국교회와 왕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주로 종교에 관심이 없던 현실주의자였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개혁신학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청교도가 숫자는 적었지만 제임스 1세와 그후 스튜어트 왕가 시절까지 왕당파에 대한 강력한 반대 세력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청교도 신분으로 박해를 피해 미국에 건너간 메이플라워 호의 사람들 역시 근왕적인 태도를 취했다.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영어가 귀찮다면 여기로)에서 "제임스 폐하의 충성스런 신하들..." 이런 식으로 자신들은 왕권에 반대하는 반란 세력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왕권은 주님의 법 아래 있는 존재라는 것이지 왕권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사상 역시도 당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던 스튜어트 왕가 군주들의 기준으로는 충분히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보았다.
청교도들은 찰스 1세 시절에도 탄압을 받았다. 국교회 켄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종교 정책을 비판하면 종교재판소에 끌려가 코와 귀를 자르는 형벌을 받아서 원성이 높았다. 또한 1660년 왕정복고 시기 크롬웰 편을 든 청교도 독립파(회중파)들은 정치적 보복을 피해 네덜란드 등 대륙으로 망명했다. 이들은 영국 국교회 내에서의 개혁을 포기하고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여 독립하려는 취지였다. 하지만 찰스 2세의 가톨릭 용인정책은 단순한 불만으로 머무르지 않고 심각한 위협으로 느꼈다. 왜냐하면 찰스 2세는 모후가 프랑스 공주이며 루이 14세가 사촌이고, 처가마저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이었기 때문이었다.
청교도 주류는 영국 내에서 소수파였음에도, 상공계급(젠트리, 젠틀맨, 요먼)에서는 상당수를 차지했기에 의회에서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고, 이에 계속 영국에 잔류하며 반국왕운동을 주도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올리버 크롬웰의 철기군. 영국 스튜어트 왕가가 성공회를 유지하면서 가톨릭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할 때 청교도는 지속적으로 내전에서 의회파를 지지했고, 청교도는 점차로 의회에서 유력해졌다. 이들은 1642년에 일어난 청교도 혁명의 주체가 되고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은 정권 접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크롬웰은 정권을 잡고 나서 청교도 다수파인 장로회파를 숙청하고, 소수파인 독립파(회중파) 청교도들만이 크롬웰의 통치에 참여하며 매우 불안정한 통치기반에서 고압적 통치를 자행하기 이른다. 통치시기 청교도 세력은 지나친 종교적 엄숙주의 강요에 답답해하는 국민적인 불만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나오는 반대를 철권독재로 찍어눌렀고, 결국 독재자 크롬웰이 죽자마자 정치적으로 대대적인 비판을 받았다. 한편 청교도 혁명 당시 채택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현대 개혁교단(특히 영미권, 한국의 장로교)의 교리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청교도의 시대는 1660년 찰스 2세의 복위로 막을 내리고, 대대적인 역공으로 많은 청교도 지도자들이 실각하고 청교도는 거의 소멸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다시 복권의 단계를 밟은 건 1688년 명예 혁명 때였으나, 이 시기부터는 이미 국교회(성공회) 우위의 상황이 유지되었기에 그 정치적 중요성은 상실되었다. 하지만 경제 및 문화적으로는 금욕, 근검, 절약 등으로 도리어 우위를 점유했다는 견해가 많은데, 여기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장이 막스 베버가 주장한 청교도 자본주의다. 대표적으로 저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있다.
청교도 분리주의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기 전 네덜란드 레이던(Leiden)에서 11년 정도 머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로테르담 근교 Delfshaven이란 마을에는 이들이 떠나기 직전 머물렀던 교회가 지금도 남아있다. 당연히 네덜란드 개혁교회도 이들과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특히 청교도 신학에 자극받아 일어난 네덜란드의 경건주의 운동을 'Nadere Reformatie'(나데러 레포르마치, 2차 종교개혁)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