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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Jobs9 2022. 8. 29.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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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천들을 품고 서울 중심부를 관통하는 청계천은 서민들이 고단한 삶을 꾸려온 생존의 현장이자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생태의 공간이었다.  조선조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면서 조선조에서는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하여 몇 차례 하상을 파내고, 하폭을 넓히며, 양안에 석축을 쌓고, 수시로 준설공사를 실시했다. 그러나 청계천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골칫덩어리로 변해갔다.

   장마철이면 넘쳐 물에 잠기는 집이 많았고, 집에서 나오는 오물 탓에 전염병도 많이 발생했다. 그래서 한때 청계천은 ‘홍수’와 ‘전염병’으로 악명이 높았다. 당시 한양 주민 중 청계천에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일수록 사망률이 높았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나 광복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피폐한 농민들이 경성으로 올라오면서 이들이 지은 무허가 임시건물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또 청계천 다리 밑은 걸인들이 모이는 곳으로 저마다의 삶의 애환들로 얼룩진 터전이었다. 일용 근로자, 다방골 기생들 대부분도 천변에 자리를 잡았다. 집값이 싸 사람들이 몰리면서 전염병 감염률이 전국 최고였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川邊) 십전 균일상(十錢 均一床)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십전(十錢)짜리 두 개를 보였다. 
  
     - 김종삼의 <掌篇 2>


   이 작품은 당시의 생활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또 주택에 화장실이 없어 오물이 고스란히 흘러들었다. 주변을 지날 땐 코를 막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이런 위생의 문제와 교통의 문제로 청계천을 전면 복개해 도로를 만들고, 또 일부를 상업 지역으로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운 바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10여 년 안에는 청계천을 관리하지 못한 채 방임 상태로 둬 토사 매몰이 극심했다. 거기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돈 없고 갈 곳 없는 피난민들까지 몰려들어 우후죽순 격으로 판자촌을 형성했다.  

 

 



  이후 청계천 양쪽으로 상권이 형성되고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1958년 광교에서 오간수다리(평화상가 앞)까지 약 2㎞를 철근콘크리트로 복개되고, 1961년 오간수교~제2청계교, 오늘날 마장철교까지의 복개구간은 1978년에 완성됐다.

   이로써 흉물스런 천계천은 아스팔트로 복개함으로써 함몰되어 지하에 갇혔고, 그러다가 1971년 가파른 경제발전의 분위기를 타고 거대한 구조물인 청계고가도로가 세워졌다.

   날마다 달라지는 구호와 현수막 
   붙박이 간판들은 서슴없이 
   우리들의 공중마저 빼앗고 
   어느 날 새의 부리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린 폐수 
   여기서는 치료할 수 없다며 
   뿌리째 이사한 청계천 
   어디로 갔을까 우리들의 청계천은

 

      - 박라연의 <우리들의 청계천>의 일부 

   그러나 천계천의 복개와 그 위에 세워진 고속도로는 경쟁과 속도, 효율만을 추구하는 약탈적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한때 늘어나는 교통량을 해결하는 유일한 대안으로 평가되기도 했으나 어느덧 도시의 흉물처럼 변모되었다. 

 

  마구잡이 개발의 부작용으로 청계천 상실의 시대를 겪어야 했다. 가뜩이나 숨 막힐 듯 빽빽이 들어찬 빌딩 숲에 고가도로까지 시야를 가려 도시의 미관은 완전히 훼손되었고, 뿜어내는 매연으로 서울을 질식 직전으로 몰아갔다.  그나마 시설이 낡아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이제 보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엇을 정도로 노후되자, 특히 미군 당국은 청계천 지하에서 발생하는 일산화탄소, 메탄가스로 인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험을 경고하며 주한미군들에게 청계천 고가도로 통행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생활의 편의로 시작된 청계천은 그야말로 애물단지로 변해갔다.

 

 

 

청계천 복원의 의미

역사 · 문화 · 생태 환경의 복원

 

   가파른 경제발전과 군사문화의 후유증으로 졸지에 아스팔트 도로에 함몰되어 지하에 갇혀 있었다. 1961년 도심의 청계천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은 지 44년, 1971년 청계고가도로가 세워진 지 34년 만에 청계천이 새 단장을 하고 드디어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그 동안 청계천의 복개와 그 위에 건설된 고가도로는 경쟁과 속도, 효율만을 추구하는 약탈적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우리는 그 동안 마구잡이 개발의 부작용으로  청계천 상실의 시대를 깊게 겪었다.

   그런 청계천이 복원되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면서 사람보다 자동차, 시민 편의보다 효율을 중시하던 개발시대의 얼룩은 더 이상 자리 잡기 어렵게 됐다. 잊혀 진 삶의 역사가 되살아났다. 무리한 공사로 문화재 복원을 소홀히 하거나 다소 원형을 훼손시켰다는 지적도 있지만 묻혀 진 문화유산(유적)을 발굴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다시 열린 청계천은 서울 도심의 빌딩 숲을 가로지르며 도심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청계천 복원으로 쫓겨났던 자연의 친구들이 돌아왔다. 생태 환경의 큰 변화다. 도심 한가운데 유유히 흐르는 청계천엔 이미 물고기와 풀벌레, 새들이 바글댄다. 잉어, 피라미는 기본이고 송사리, 미꾸라지, 메기, 버들치 같은 어류가 관찰된다. 어류가 늘면서 먹이사슬이 형성돼 백로, 청둥오리, 황조롱이 등이 허물없이 어울린다.

 

  수변 녹지대에는 능수버들, 꼬리조팝나무, 키버들 등의 나무와 물억새, 벌개미취, 노랑꽃창포, 왕원추리, 달뿌리풀, 털부채꽃이 등이 자리를 잡았고, 석축을 타고 수세미 조롱박이 매달려 있고, 담쟁이, 능소화, 등나무가 기어오른다.  ‘환경 복원’ 효과도 크게 나타나고 있다. 우선 청계천에 물이 흐르면서 주변 기온이 낮아지는 ‘도심 에어컨’ 효과가 생겼다. 청계고가도로가 없어져 바람 속도가 빨라진 것도 도움을 줬다는 분석도 있다. 그야말로 환경 개선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이루어진 셈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연장 5.8km에 걸쳐 있는 22개의 다리가 제각각 특색 있는 이름과 모양을 뽐내는 가운데 김홍도의 지휘 아래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그려낸 폭 2.4m, 길이 192m의 정조반차와 같은 재생그림은 물론 도처에 도시 환경에 맞는 각종 문화 공간이 자리를 잡았다.

   이제 차들이 뒤엉켜 복잡하던 청계천이 맑은 물과 가로수, 산책로가 어우러진 친환경 공간으로 바뀌면서 새 상권이 형성되고 있다. 세종로 쪽 청계광장 주변에는 최근 패밀리레스토랑이 생기는 등 식당과 카페가 앞 다퉈 새로 문을 열고 있다. 이제 주변 정비가 되면서 청계천은 시민의 휴식처, 낭만의 거리로 조성되고, 머지않아 관광의 명소가 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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