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거리
양회기는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폐 전문 의사이다. 어느 날, 인옥이라는 여자가 진료를 받으러 온다. 연초 공장의 포장공으로 일한다는 그녀는 폐 수술을 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엑스레이 검사 결과 그녀의 상태는 수술을 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있었다. 회기는 수술을 거부했지만, 그녀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꼭 살아야 한다고 수술을 간청한다. 그러나 회기는 그녀가 너무 가난한데다가 중환자여서 수술의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그녀를 냉정하게 돌려보낸다.
잠시 후 그녀의 남편 상현이 회기를 찾아온다. 그는 회기에게 수술을 거부한 것에 대해 치하하며, 아내의 폐 수술을 해 주지 말 것을 거듭 당부한다. 이유인즉, 없는 돈에 어떻게 결과도 불분명한 폐 수술을 하겠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내의 바람기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설령, 아내가 수술을 받아서 정상인이 된다고 해도 부정하게 놀아날 것인데 돈을 들여서 수술을 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결국, 그런 여자는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회기는 그의 이기주의적이고 비정한 태도에 분노하고, 상현의 행위는 간접 살인이라고 주장하며 인옥을 살려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회기는 간호사에게 인옥이 희망하면 수술을 해 주겠다는 내용의 속달 우편을 보내도록 지시한다. 기계처럼 빈틈없고 비인간적인 회기가 상현의 부도덕한 태도에 충격을 받아 인간적인 모습을 회복한 것이다.
● 감상 및 이해
이 작품은 1959년에 발표된 단막 희곡이다. 이 글의 전반부는 인옥의 인간적인 호소와 회기의 기계적 대응이 갈등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상현의 기계적인 태도와 회기의 인간적 면모 사이의 갈등이라는 극적 반전을 통해 전반부와 대립적 양상을 보인다. 기계로 불리던 회기가 자신보다 더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상현의 행동을 보면서 '성난 기계'로 변하여 내면에 잠재해 있던 인간성이 회복되는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이처럼 이 작품은 가치관이 전도되어 비정하고 각박하게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 대해 비판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회기의 성격 변화를 통해 휴머니즘(인간의 본성에 눈뜨고, 인간을 존중하며, 인간의 자유와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정신적 기반으로 삼는 문학 사조를 말한다. 현대에는 기계 문명에 따른 인간들의 소외감을 극복하고, 인간성의 옹호가 가능할 것인가 하는 위기의식의 일단으로 나타나고 있다.)에 대한 옹호를 드러내고 있다.
● 정리하기
- 갈래 → 단막극
- 성격 → 사실주의적, 세태고발적
- 인물
* 양회기 → 종합 병원 과장으로 폐 전문 외과 의사. 기계처럼 냉정하고 빈틈이 없다. 자신보다 더 비정한 상현의 모습을 보고 잠재된 인간성을 회복한다.
* 최상현 → 김인옥의 남편.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며, 돈 때문에 아내의 수술을 반대하는 비정한 인물이다.
* 김인옥 → 최상현의 아내. 담배 공장의 포장공이며, 가족을 위해서 어떠한 모욕도 감수하는 헌신적인 인물이다.
* 정금숙 → 양회기가 근무하는 병원의 간호사. 양회기를 사모하며 상사에게 충성스러운 인물이다.
- 배경 → 현대, 어느 늦가을, 회기의 폐 외과 과장실
- 출전 → <사상계>(1959)
- 갈등
* 전반부 : 인옥의 인간적인 호소 ↔ 회기의 기계적인 대응 <기계>
* 후반부 : 상현의 비인간적인 처사 ↔ 회기의 인간적인 분노 <성난 기계>
- 주제 → 현대인의 인간성 상실 비판과 그 회복의 옹호
- 특성
1) 전반부와 후반부가 대립 구조를 취함.
2) 물질문명을 비판하고 휴머니즘을 옹호함.
3) 밀도 있는 심리 묘사로 갈등을 잘 보여 줌.
● 참고자료
- 제목의 상징적 의미
전반부에서 금숙이 회기를 '기계'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미를 상실한 채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양회기의 비인간적인 면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죽어 가는 여인을 살려야겠다는 판단을 내리는 회기에게 금숙이 "기계가 노하셨네요……." 라는 표현을 한 것은, '기계(양회기)'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제야 사람 같아 보이네요."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이 작품의 제목 '성난 기계'는 '상실된 인간성의 회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성난 기계'의 구성
이 작품은 구성이 매우 단순한 단막극이다. 어느 폐 외과 과장실(회기와 금숙이 근무하는 공간)이라는 단일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등장인물도 야오히기, 정금숙, 최상현, 김인옥 넷뿐이다. 그리고 다양한 사건이 별도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대사를 통해 극이 전개되는 대사 중심의 희곡이며, 인물들의 행동도 많지 않다. 이 작품은 이와 같은 단일한 무대 장치, 소수의 등장인물, 단순한 사건 등을 통해서 주제 의식을 선명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 '성난 기계'의 갈등 관계
이 작품에는 등장인물 간의 다양한 갈등이 존재한다. 전반부에서는 양회기의 비인간적인 태도 때문에 그러한 갈등이 유발되는데, 양회기가 자신을 사모하는 정금숙에게 냉정하게 대하여 그녀로 하여금 울음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나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한다며 수술을 해 줄 것을 애원하는 김인옥에게 '기계'와 같은 태도로 거절하는 것이 그것이다. 후반부의 갈등은 최상현의 반인륜적인 태도 때문에 유발된다. 양회기는 김인옥의 남편 최상현이 금전적인 문제와 의심 때문에 자신의 아내를 수술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자, 그의 반인륜적 처사에 분노를 느끼며 '성난 기계'로 변한다. 또한 최상현과의 대화 중에 그가 그의 아내와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음이 드러난다.
- 사실주의 극과 차범석의 작품 경향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유럽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유행한 연극 양식이 사실주의 극이다. 사실주의 희곡 작가는 실재하는 세계의 진실한 묘사를 위해 노력할 것, 가능한 한 직접적인 관찰과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쓸 것, 최대한 객관적으로 묘사할 것이 요구되었다. 한국에 사실주의 극이 수용된 것은 1922년에 창단된 극단 토월회를 통해서였다. 이 새로운 사조는 '신극(新劇)'이라 불리었고 1931년에 조직된 극예술연구회에 의해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게 되었다. 사실주의 극은 1970년대까지 한국 희곡의 주류를 이루었다.
차범석은 사회성이 짙은 작품을 주로 썼다. 그는 지속적으로 리얼리즘을 고집하며 변천하는 현실을 작품에 그대로 담았다. 그의 작품은 제재의 폭이 매우 넓지만 대체로 가난한 서민들과 전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 문명의 발달로 인간 인간성의 상실과 인간의 소외, 애욕의 갈등과 정치의 허위성,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과 그에 따른 전통의 몰락 등이 주로 다루어 온 주제들이다. 그리고 '성난 기계'는 문명 비판적인 그의 초기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등장 인물
양회기 : 35세, ××종합 병원 폐외과(肺外科) 과장
김인옥 : 30세, 연초 공장 포장공(包裝工)
최상현 : 39세, 인옥의 남편
정금숙 : 28세, 간호원
시대 : 현대, 늦가을
장소 : 폐외과 과장실
무대 : ××종합 병원 폐외과 과장실. 정면 벽 우반부에 밖으로 통하는 도어가 있다. 도어의 5분의 1은 두꺼운 반투명 유리가 끼어 있고 검은 페인트로 '과장실'이라는 세 글자가 씌어 있다. 좌반부엔 진찰용 베드와 흰 광목으로 된 칸막이 커튼. 좌편 벽엔 두 개의 유리창이 남쪽으로 향하여 있어, 하마터면 음침하게 될 뻔한 이 방에 환한 햇볕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 옆쪽으로 큼직한 책상고 회전 의자와 환자용의자, 벽 구석에 책장과 캐비닛. 우편 벽에 진찰실과 수술로 통하는 육중한 도어, 이 도어와 정면 도어 중간에 전임 간호원의 사무용 책상과 의자. 그 앞에 응접세트, 출입문 한 구석에 흰 타일로 된 세면대와 옷걸이가 붙어 있다. 따라서, 이 방은 가벼운 진찰과 외래객의 응접과 연구를 겸한 과장의 사실이다.
회기는 걷잡을 수 없는 허무감과 자책심에 사로잡혀 인옥이 사라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다 말고 돌아서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담배를 갈아 피운다. 매우 난처한 표정인 금숙은 책상 위의 서류를 뒤적이면서 시선은 회기에 쏟고 있다.
회기 : (무심코 담배를 든 손을 내려다보며 혼잣소리로) 내 손이 기계라고? 음…….
금숙 : (채 알아듣지 못한 듯) 예?
회기 : (제정신으로 돌아가며) 참, 미스 정은 나더러 기계라고 하던 말…….
금숙 : (과장된 표현으로) 정말 그 환자는 보통이 아니던데요!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깜짝 놀랐어요.
회기 : 왜?
금숙 :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라는 듯이 웃으며) 저…… 선생님…… 음흐…….
회기 : 응? 뭐야?
금숙 : 선생님 별명이 뭣인지 아세요?
회기 : 아니, 내게도 별명이 있나?
금숙 : 그럼요!
회기 : 그래 뭔데?
금숙 : 머리는 사람이고 손은 기계인 이십세기 스핑크스!
회기 : 이십세기 스핑크스!
금숙 : 옛날 스핑크스는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짐승이었잖아요?
회기 : (쓴웃음을 뱉으며) 스핑크스라…….
금숙 : 그러니 아까 그 환자가 하는 말은 선생님의 별명을 알고나 있는 눈치 아니에요?
회기 : 내가 스핑크스처럼 괴상하게 생겼나?
금숙 : 원, 선생님두……. 스핑크스의 장점만을 들어서 지은 이름인 걸요…….(하며 매혹적인 미소를 던진다.)
회기 : 미스 정은 직업을 잘못 택했어…….
금숙 : 왜요?
회기 : 그 재치와 애교와 그리고…….
금숙 : 훗후…… 선생님은 미국에 다녀오시더니 여자를 다루는 데도 명의가 되셨어요…….
회기 : (동조로) 다행이군 그래…….
금숙 : 정말이에요.
회기 : 오늘 저녁은 불가불 내가 사야겠는걸! 핫하…….
금숙 : (잠시 생각에 잠기며) 선생님은 참 이상해요.
회기 : 뭐가?
금숙 : 아까 그 환자에게 대해서 너무 냉담하신 것 같았어요. …… 가엾잖아요?
회기 : 가엾은 건 나 자신일지도 모르지…….
금숙 : 하지만 지금까지 어느 환자에게도 수술을 거절해 보신 일도 없었거니와 실수도 없었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게 완고하게 거절하셨어요?
회기 : (어둡고 침울한 표정으로 변하며) 내가 냉정했을까?
금숙 : 그 환자는 선생님을 원망하고 있을 거예요…….
회기 : (깊은 생각에 잠기며) 세상은 참 묘한 거야……. 사람들은 '의는 인술'이니 뭐니 하여 의사를 무슨 절대적 존재처럼 신성시하지만, 나 자신은 조금치도 그런 실감이 안 나거든……. 여자건, 남자건, 미인이건, 늙은이건 닥치는 대로 배를 가르고 갈비뼈를 떼어 내어 썩은 폐 조각을 잘라 내는 하나의 노동을 하고 있는 데 불과하니 말야…….
금숙 : 그렇게 해서 귀중한 생명을 건져 내지 않아요?
회기 :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그와 같은 목적을 의식하면서 수술을 한 적은 없었어! 5년 전에 미국에 건너가서 폐외과를 전공할 때도,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못 해 본 수술을 해 본다는 호기심과 이걸 배워 가지고 가면 내 존재가 뚜렷해진다는 공명심은 있었지만, 인간을 구하느니 하는 도의심 따위는 느껴 보지도 못했거든! (하며 담배 연기를 푹푹 뱉는다.)
금숙 : (약간 당황하며) 전 자세한 얘기 모르겠지만 아무튼 선생님의 그 메스처럼 날카로운 두뇌와 손을 무한히 존경해요! 그리고…….
회기 : 그리고?
금숙 : 선생님이 그 나이가 되시도록 결혼을 안 하시는 이유도 의학에 전 생애를 바치겠다는 의욕에서이시라고.
회기 :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미스 정은 정말 지레 짐작도 잘하는군! 그야말로 오버센스야!
금숙 : (무안해지며) 예?
회기 : 결혼과 의학과 무슨 상관 있어. 내가 서른 다섯이 되도록 독신으로 지낸다는 것은 내 취미지. 누구에게 생색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야!
금숙 : 그렇지만 선생님과 같이 모든 조건이 구비된 분이 어째서…….
회기 : (단호하게 단정을 내리듯) 마음이 쏠리지 않는 일은 도대체가 하기 싫단 말이지. 누가 뭐라 하건 나는 내 생각대로 사는 거니까!
금숙 : 그렇지만 외롭지 않으세요?
회기 : 결혼한다고 외로움이 해소되나?
금숙 : (수줍음을 감추며) 독신보다는 덜 외롭겠죠…….
회기 : (멀거니 금숙을 쳐다보며) 그럼, 미스 정은 왜 결혼을 안 하지?
금숙 : (당황하며) 예? 저야…… 뭐…….
회기 : 스물여덟이면 더 급하지 않아 어때?
금숙 : (동요되는 마음을 저지하려고 무척 애쓰며) 그건…… 제게도 생각이 있어서요…….
회기 : 생각?
금숙 : (나지막하나 또렷하게) 저는 이런 생활이 결혼보다는 행복할 것 같아서요…….
회기 : 벌레 먹은 살덩이와 썩은 피와 약 냄새가 행복의 조건이란 말야?
금숙 : 그리고 매일같이 선생님 곁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있으니까…….
(그녀의 눈은 어떤 열과 윤기에 젖어 이상스럽게 빛난다.)
회기 : (부러 농조로) 그럼 이제 배울 것 다 배웠으면 그만두겠군 그래? 헛허…….
금숙 : (갑자기 소녀처럼) 선생님이 그만두라고 하신다면 언제든지…….(사이) 선생님이 미국에 계시던 동안 저는 선생님이 돌아오시면 그만두려니 했어요.
회기 : 그건 또 왜?
금숙 :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모르겠어요! (하며 일어서서 옆방으로 급히 가려 한다.)
회기 : (냉철하게) 미스 정!
금숙은 말없이 급히 가려 한다.
회기 : 일루 와요. 할 얘기가 있어……어서…….
금숙은 고개를 숙인 채 회기 곁으로 간다. 그녀는 마치 소녀처럼 소리를 죽여 울고 있다.
회기 : (잠시 망설이다가) 미스 정은 좀더 자기 본위로 살아가도록 해. 내게 고맙게 대해 주는 건 나도 기쁘지만 그건 도리어 내게는 짐이야. 나는 좀더 홀가분하게 살고 싶어서 그래.
금숙 : (서서히 고개를 들며) 선생님은…… 너무도 냉정하세요…… 환자건 아니건 여자에겐……(하며 흐느껴 운다.) 정말 기계같이 차고 억세고 빈틈이 없으세요!
회기 : 그렇다고 또 난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금숙 : (원망의 시선으로) 선생님!
이때 정면 도어 쪽에 노크 소리가 난다.
회기 : (밖을 향해) 예, 들어오세요……. (울고 있는 금숙에게) 눈물을 씻어.
금숙 : (눈물을 씻으면 제자리로 간다.)
이 때 상현이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손가방을 들었다. 차림새로 봐선 회사원 같기도 하다.
상현 : (금숙에게) 의사 선생님 안 계십니까?
회기 : 누구시죠?
상현 : (비로소 회기를 발견하며) 아! 의사 선생님이십니까?……(하며 비굴할이만큼 정중히 인사를 한다.)
회기 : (일어서서 무대 중앙으로 나오며) 왜 오셨죠?
상현 : 예……저……. 실은 어려운 청이 있어요…… 예…….
회기 : 아무튼 앉으시지…….
상현 : 예……. (두 사람, 의자에 앉는다.)
회기 : (호주머니에서 꺼낸 담배갑을 들여다 보고는 구겨 버리며) 미스 정……. 담배 가져와요.
상현 : 저 다 담배는 여기 있습니다. (하며 재빠르게 손가방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낸다.) 태우세요. 좋지 않습니다만!
회기 : 미안합니다. (하며 담배를 뽑아 피운다.) 그래 어디가 편찮으시죠?
상현 : (멋쩍게 웃으며) 실은 제가 아픈 게 아니라, 제 처가…….
회기 : (사무적으로) 아, 그러세요? 들어오시라지…….
상현 : 아니, 저 여긴 벌써 다녀갔을 겝니다만…….
회기 : 예?
상현 : (금숙을 돌아보며) 서른 살 가량 들어 보이는 여인네가 다녀갔을 텐데요……. 김인옥이라고…….
회기 : 미스 정, 접수부 좀 찾아봐요.
금숙 : (접수부를 보며) 있어요. 김인옥. (회기에게) 아까 그 환자예요. 폐 수술을 부탁한…….
상현 : 맞습니다. 폐를 수술해 달라고 왔었을 겁니다.
회기 : (납득이 된 듯) 아…… 그래요.
상현 : (바싹 다가앉으며) 선생님! 어떻게 되었습니까?
회기 : (사무적으로) 어렵겠던 데요……. 그렇게 악화되도록 방치하시다니 가족들의 무책임도 어지간하시군요.
상현 : (불안한 표정으로) 그럼, 수술을 응낙하셨나요?
회기 : 미안하지만 거절했습니다.
상현 : (안도감에 풀리며) 거절하셨다구요? 감사합니다. 그런 걸 가지고 난 괜시리 속을 썩여서……. 감사합니다.
회기 : (뜻밖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단 듯) 아니, 뭐라구요?
상현 : 실은 제 처가 나와는 한 마디 의논도 없이 수술을 받겠다고 서두르고 있어서요…….
회기 : 그래요…….
상현 : 글쎄, 그게 될 말입니까? 다른 병이면 또 모르지만 폐를 함부로 떼어 내고 갉아 내어서야 되겠어요? 게다가 요즈음 세상은 돈 있고 병 치료도 하는 법이지……. 그런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회기 : 그렇지만 치료빈 걱정할 필요가 없다던데요?
상현 : (완강히 부인하며) 그럴 리가 있습니까! 우리 내외가 죽어라 벌어도 어린것들하고 겨우 풀칠하는 판국인데……. 그런 돈 있으면…….
회기 : (잠시 생각 끝에) 그럼, 선생께서는 부인의 병을 고치지 않아도 좋단 말씀인가요?
상현 : (약간 당황하며) 부끄러운 얘기지만……. 내 벌이라는 게 처가 공장에서 나올 때 속옷이나 치마폭에 감춰 가지고 나오는 담배를 팔아야만……. (회기와 시선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으며) 허지만, 그게 어디 쉽습니까? 감시가 이만저만이라야죠.
회기 : 그것만으로 생활비가 나올까요?
상현 : 그러니 자연히 감독관에게 곱게 보여야만…….
회기 : 듣자니 부인께서는 오 년 이상 근무하고 계시던 모양이던데…….
상현 : (한숨을 뱉으며) 사실인즉 그렇기 때문에 남자 종업원 사이에서도…….
회기 :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예?
상현 : (자기의 말을 스스로 지워 버리기라도 하듯이) 그렇지만 먹고 살려니까 할 수 있습니까! (사이) 아내는 가끔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있지요. 그럴 때는 으레 야근이라는 거예요. 나도 처음엔 그런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회기 : (말없이 상현의 떨리는 손을 내려다본다.)
상현 : (분개하여) 그렇지 않고는 물건을 가지고 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회기 : (불쑥 일어서며) 아까 부인께서 하던 말이 이제야 납득이 되는군……. (하며 창 밖을 내다본다.)
상현 : 뭐라고 하던가요?
회기 : 아니……. 별말 없었소. (상현을 보며) 그렇지만 부인께선 현재의 생활이 퍽 피곤한 눈치던데요…….
상현 : (증오가 차츰 커지며) 그야 그럴 테죠. 자기가 없으면 모두가 금방 굶어 죽을 것같이, 생색은 혼자 내니까…….
회기 : (추궁하듯) 부인을 미워하시오?
상현 :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억제하며) 미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와 어린것들이 벌써 오래 전부터 그 덕으로 살아왔는데……. (하며 고통스런 빛으로 입술을 깨문다.)
회기 : 그러나 선생께서 수술을 반대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없는데요…….
상현 : 수술을 해서 몸이 회복된다면 내 아내는 더 불행해질 거예요! 그리고 나도…….
회기 : 아니, 불행해지다니……. 건강해야 더 벌어서 아이들도 편하게…….
상현 : 흥! 내 처가 가족을 위해서 수술을 원하는 줄 아십니까?
회기 : 그럼…….
상현 : (내뱉듯이) 내 아내는 건강을 회복하면 지금보다 더 자주 놀아날 생각에서예요!
회기 : (어이없다는 듯) 원……. 그럴 리가…….
상현 : (완강히) 아닙니다. 선생님, 그 여자는 그런 성격입니다. 옛날부터…….
회기 :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부인 때문에 온 식구가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오?
상현 : (혼잣소리로) 그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회기 : 누가 말이오?
상현 : (눈물을 글썽거리며) 아내는 항상 나를 무능하다고 빈정대지만…… 그렇지만 나는 그런 아내에게 대해서 한 마디 대꾸도 못하는 바보였죠……. 왜 그랬는지 아십니까? 선생님…….
회기 : 선생은 너무 의심이 많으시군.
상현 : 내가요? 천만에! 난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심하진 않았죠. 도리어 알고도 모르는 척했을 뿐입니다.
회기 : (미심쩍게) 내가 알기엔 부인께서는 가족을 위해서 수술을 받아야겠다고 한사코 고집하는 것을…….
상현 : 아닙니다. 그건…….
회기 : (조용하나 위엄 있게) 그렇지만, 내버려두면 부인께서 어떻게 된다는 건 아시고 계시죠.
상현 : (냉혹하게) 별 수 없죠! 죽고 사는 건 인력으로 막을 수 없으니까.
회기 : (뭉클 불쾌감이 솟으며) 아니, 그럼 부인이 죽어도 괜찮단 말이오?
상현 :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그대로 두는 게죠. 그 돈이 있으면 나와 어린것들이 살아날 수 있으니까요!
회기 : (노골적으로 분노를 터뜨리며) 그건 너무 심하지 않소?
상현 : (반항적으로) 심한 건 내 아내죠. 그 병이 어떤 병이라고 수술을 합니까? 그것도 공으로 한다면 또 모르지만, 돈 쓰고 저 죽고 하면, 남은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라고. 선생님! 그러니 나는…….
회기 : (외치며) 그건 살인이나 다름없소……. (이 말이 떨어지자 금숙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회기를 쳐다본다.)
상현 : 뭐라구요?
회기 : (강하게) 아내가 죽어 가도 내버려두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오?
상현 : (처음에 지녔던 겸손과 비굴은 찾아볼 수 없는 태도로) 참견 마세요! 내 처를 내가 죽이건 살리건 무슨 걱정이오! 나 살고 남도 있지! (불쑥 일어서서 손가방을 쥐며) 아무튼 실례했습니다! (하며 문을 탁 닫고 나가 버린다. 회기는 감전(感電)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고 금숙이는 회기를 주시하고만 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회기 :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며) 미스 정!
금숙 : 예?
회기 : 아까 그 환자의 주소 알지!
금숙 : 예, 접수부를 보면…….
회기 : 좋아! 그럼 속달 우편으로 보내요.
금숙 : 예? (하며 가까이 온다.)
회기 : 수술을 받고 싶으면 편지 받는 즉시 찾아오라고!
금숙 : (놀라운 표정으로) 아니, 그렇지만…….
회기 : (속삭이듯) 자신은 있어! 그 대신 수혈(輸血)용 혈액을 충분히 준비할 것을 잊지 말어! 알겠어?
금숙 : (빙그레 웃으며) 선생님, 웬일이세요?
회기 : 응? (가볍게 웃으며) 이번 환자는 꼭 살려 보고 싶은 의욕이 생기는군!
금숙 : 왜요?
회기 : (분노를 띄우며) 그 친구에게 살해당할 바엔 내가 맡아서 살리지!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것 같아!
금숙 : (흘끗 쳐다보며) 기계가 노하셨네요…….
회기 : 잔소리말고, 편지나 어서 써!
금숙 : 예! (하며 제자리에 앉아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회기는 상현이가 두고 간 담뱃갑을 발견하자, 담배 한 가치를 빼더니 물끄러미 바라본다.)
회기 : (혼잣소리로) 담배는 포장도 중요하지만 알맹이가 좋아야지!
금숙 : (편지를 쓰다 말고) 그 담배만은 진짜겠지요……. 공장에서 직접 나왔을 테니까…….
회기 : 그렇지! (하며 라이터 불을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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