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7월 이승만 정권이 진보당 당수 조봉암 등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사형시킨 정치탄압 사건.
1959년 7월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변란, 간첩죄 혐의로 체포하여 조봉암을 사형 집행하였으나 2011년 1월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사건.
1952년 8월 5일의 제2대 대통령선거에서 79만 7504표를, 1956년 5월 15일의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무려 216만 3808표를 얻은 조봉암이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을 결성하고 지방에서 지역당 조직을 확대해 가자 이승만 정권은 정치적 위협을 느꼈다.
서울시 경찰국은 1958년 1월 9일 “김달호, 박기출, 조규희, 이동화 등이 사회주의제도로 개혁하고 정부를 변란 할 목적 하에 진보당을 창당 조직하고, 북한 괴뢰집단과의 협상으로 무력재침의 선전구호인 평화통일공작에 호응하여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있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사건 인지보고’를 하였다. 1958년 5월 2일 민의원 총선거를 4개월 앞둔 1958년 1월 12일 서울시 경찰국은 조규희, 윤길중, 김달호, 이동화 등 진보당 간부들을 체포하고, 1월 14일에는 조봉암을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체포하였다.
서울시 경찰국은 1958년 1월 24일 서울 지방검찰청에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 10인의 간첩 및 국가보안법위반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고 검찰은 1958년 2월 16일 진보당 간부들을 기소하였다. 조봉암은 간첩죄·국가보안법 위반 및 무기불법 소지, 당간사장 윤길중(尹吉重)은 국가보안법 위반 및 간첩방조, 그 밖의 간부들 박기출(朴己出)·김달호(金達鎬)·신창균(申昌均)·조규희(曺圭熙)·이명하(李明河)·조규택(曺圭澤)·전세룡(全世龍)·이상두(李相斗)·권대복(權大福) 그리고 진보당 강령을 기초한 민혁당정책위원장 이동화(李東華) 등은 전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였다.
검찰은 기소장에서 ①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은 남한의 적화통일을 위한 방편으로 대한민국의 존립을 부인하는 것이다. ② 수탈 없는 경제정책 등 진보당의 선언문·강령 및 정강정책은 북한노동당의 정책과 상통하는 내용으로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한 불법단체라 하였다.
조봉암에 대하여는 ① 박정호(朴正鎬) 등 당시 남파되었다가 검거된 간첩과의 접선 내지 간첩의 공작목표가 진보당의 지원이라는 것, ② 재일 조총련(朝總聯)에서 파견한 정우갑(鄭禹甲)과의 밀회, ③ 북한당국 산하의 이른바 조국통일구국투쟁위원회 김약수(金若水)에게 밀사를 보내어 평화통일추진을 협의한 사실, ④ 북한노동당이 동양통신 외신부 기자이자 진보당의 비밀당원인 정태영(鄭太榮)을 통하여 진보당에 대한 강평서를 보낸 사실 등을 열거, 간첩 혐의를 추가하였다.
한편 육군 특무대에서도 조봉암과 진보당사건을 수사하였다. 조봉암은 혐의내용을 모두 부인하였다. 그러나 진보당사건 관계자들의 기소가 있은 직후인 1958년 2월 20일 육군특무부대는 조봉암의 간첩 혐의를 추가하는 양이섭사건(梁利涉事件, 일명 梁明山事件)을 발표하였다. 양이섭은 일제하 신의주 형무소에서 조봉암을 알게 되었는데 1955년 미군첩보기관에 고용되어 남북교역상역할을 맡아 두 차례 북한을 내왕하였으며, 1956년 1월부터는 육군 특무정보기관인 HID요원으로 채용되어 역시 남북한교역상 자격으로 1957년 10월까지 10차례 남북을 내왕한 인물이었다. 수사당국은 양이섭이 HID요원으로 남북을 내왕한 기간 동안 북한노동당 정보위원회에 의해 조종되어 북한 당국과 조봉암 사이의 비밀연락을 담당하고 북한의 공작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진보당사건의 1심 재판은 서울지방법원에서 재판장인 유병진(柳秉震) 부장판사의 주재로 1958년 3월 13일 1회 공판이 시작되어 7월 2일 21회 선고공판에 이르기까지 5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재판과정에서 조봉암의 혐의 중 경찰이 수사한 간첩과의 접선 등 모든 혐의는 사실이 아님이 판명되었다. 다만 양이섭에 의한 간첩혐의에 대해 양이섭은 기소사실을 모두 시인하였다. 그러나 조봉암은 양이섭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은 시인했으나, 그 돈이 북한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몰랐으며, 북한과 내통했다는 검찰의 공소는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혐의 사실을 모두 부정했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조봉암·양이섭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 징역 5년을 선고하고 그밖의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또한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헌법을 위반하였다는 공소사실을 인정할 근거가 없다고 하였다. 재판부의 1심판결은 이승만의 의도와는 달리 너무 가벼운 형이었다. 이에 수사당국은 거센 반발을 보였다. 반공청년단을 자처하는 청년들이 법원청사에 난입하여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 “조봉암을 간첩혐의로 처벌하라”고 외치며 난동을 부려 사법사상 초유의 재판파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2심 재판은 서울고등법원의 김용진(金容晋) 부장판사의 주재로 1958년 9월 4일부터 10월 25일까지 진행되었다.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재판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양이섭의 번복진술이다. 양이섭은 자신과 조봉암의 간첩혐의는 조봉암을 제거하기로 한 국가방침에 협조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특무대의 회유와 협박에 의한 허위자백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는 공소장에 나오는 북한 정보위원회의 도표는 8·15광복 직후 북한에 있을 때 알았던 공산당 관계자와 북한의 선전책자에서 읽은 사실들을 토대로 특무대가 작성한 것이며, 간첩행위는 모두 조작된 각본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양이섭은 조봉암에게 제공한 자금출처도 모두 제시하였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양이섭의 번복진술을 완전히 무시하였으며, 또 변호인단이 요구하는 양이섭의 번복진술에 따른 증거조사를 채택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조봉암의 국가변란 목적 진보당 결성 및 간첩 혐의와 양이섭의 간첩죄 혐의에 대하여 원심을 파기하고 사형을 선고하였다. 판결문은 조봉암의 혐의 중 ① 북한의 김약수에게 밀사를 보내 평화통일을 협의한 사실, ② 남파간첩과의 접선, ③ 조총련 정우갑과의 밀회, ④ 정태영이 북한노동당의 강평서를 작성, 제출하였다는 점 등의 경찰측이 제시한 혐의는 증거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국시(國是)를 위반한 평화통일론을 제창한 사실과 양이섭을 통하여 북한당국과 연락하면서 자금을 얻어쓰고 간첩활동을 하였다는 점은, 그 증거에 비추어볼 때 유죄라고 하였다. 진보당 간부들에 대하여서는 1심의 무죄를 뒤엎고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하여 전원 유죄를 선고하였다.
재판부는 평화통일론은 국시에 위반되며, 진보당의 선언문·강령 및 정책 등이 북한노동당의 주장과 상통한다는 검찰측의 공소사실을 인정하여 진보당은 결사의 목적이 불법이었다고 규정하였다. 진보당사건은 마침내 대법원으로 이송되었다.
변호인단은 상고이유서에서 조봉암에게 간첩죄를 적용한 2심 판결은 양이섭의 특무대 및 1심 진술만을 근거로 한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으며, 이것은 공범자의 자백만이 유일한 증거일 때 증거능력이 없다는 형사소송법의 증거법칙을 위배한 판결이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양이섭의 번복진술을 확인하는 보강증거를 조사하지 않았으며, 또 검찰은 양이섭의 2심 진술을 허위라고 단정할 수 있는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상고이유서는 또 양이섭의 1심 진술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조봉암이 양이섭에게 넘겨준 것은 이미 공표된 진보당의 간부명단일 뿐 대한민국의 기밀을 알리거나 북한당국을 위하여 활동을 한 단 한 건의 사실도 제시되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3심 재판은 재판장 김세완(金世玩) 등 5인의 대법관에 의해 1959년 2월 27일 이루어졌다. 조봉암에게는 대법원이 다시 판결을 하여 사형을 선고하였으며, 양이섭에게는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을 확정하였다.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2심을 파기하고 1심과 동일한 법률 판단을 내려 무죄를 선고하였다.
조봉암은 위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1959년 7월 30일 대법원(재판장 대법관 백한성)은 이유 없다고 기각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의 재심 결정 전날인 7월 29일 양이섭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고, 재심기각 결정 다음날인 7월 31일 조봉암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였다.
결과
조봉암의 죽음과 진보당의 궤멸을 계기로 평화통일론 등 통일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사라졌고 진보 정치운동은 거세되었다. 그러나 조봉암과 진보당의 진실에 대한 논의는 줄곧 제기되었다. 마침내 2007년 9월 18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조봉암이 1956년 5·15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 이상을 얻어 이승만 정권에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부상하자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의 1958년 5월 민의원 총선 진출을 막고 조봉암을 제거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의도가 작용하여 서울시경이 조봉암 등 간부들을 국가변란 혐의로 체포하여 조사하였고,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특무대가 조봉암을 간첩 혐의로 수사에 나서 재판을 통해 처형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되는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 사건”이라고 결정하였다.
이어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죽산 조봉암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나는 계급독재사상을 배격한다. 공산당 독재도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강고히 반대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려한다”는 정강을 내걸고 1952년,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이승만에 대항했던 조봉암과 진보당에 대한 ‘간첩죄’는 조작이요, 이승만 정부의 정권 연장을 위한 정치적 의도였음이 밝혀졌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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