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과학 Social Sciences/경제, 경영 Economy

중상주의(重商主義), 중농주의(重農主義)

Jobs 9 2021. 5. 25.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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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주의(重商主義)

중상주의 정책의 절정기였던 1638년 프랑스의 항구

중상주의(重商主義)는 세계 경제와 무역의 총량이 불변이라는 가정 아래 자본의 공급에 의해 국가가 번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경제 이론이다. 역사적으로는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유럽의 국가들에서 채택되었던 국내 산업의 보호와 해외 식민지 건설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경제 정책들 역시 중상주의 또는 중상주의적 경제체제라 불린다. 중상주의를 경제 체제와는 별개의 것으로 파악하는 일부 학자도 있으나 대부분 중상주의를 초기 자본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 
중상주의는 당시 국가의 상업적 이익이나 사회 안전과 같은 사안에 대해 매 시기에 제시된 다양한 의견의 집합체였다. 때문에 중상주의에는 통합적인 이론으로 단일화될 수 없는 다양한 주장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후대에 나타난 고전경제학의 애덤 스미스와 같이 중상주의 경제학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경제학자를 지칭할 수는 없다. 중상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보다는 자신이 관심있는 경제 현상의 일면에 대해 집중하였다. 

중상주의라는 명칭 자체가 후대에 이들을 통괄하여 부르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다. 그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들을 중상주의라는 하나의 경향으로 통괄하는 관점 자체가 문제라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애덤 스미스는 중상주의 경제 체제를 제조업자와 상인이 소비자에 대항하여 결성한 거대한 음모로 보았다. 그러나 중상주의 경제학 자체는 자신만의 일관된 일반적인 경제이론을 구축하지 못했다. 

중상주의자들은 경제 체제를 제로-섬 게임으로 파악했다. 즉, 중상주의자에게 한 편의 이득은 반드시 상대방의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든 정치경제 체제를 결국 한 편의 이익을 위해 다른 한 편에 해를 끼치는 행위로 인식했고 공익이나 공공재라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것이라 여겼다. 중상주의는 결국 보다 나은 정치 형태에 대한 고찰보다는 현 체제의 유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론으로 작용하였다.

중상주의의 국내 경제에 대한 정책은 매우 단편적인 것들이었다. 애덤 스미스가 중상주의를 정부의 규제를 지지하는 이론으로 묘사했을 때 많은 중상주의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유럽의 초기 근대 사회에서 전매특허권과 정부가 승인한 독점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일부 중상주의자들은 이를 지지하였으나 이에 반대하는 중상주의자들은 이를 비효율적인 것이며 부패의 근원이라 여겼다. 많은 중상주의자들은 가격 할당이 필연적으로 지하 경제를 조장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들은 노동자나 농부같은 노동 인구가 "생존의 여지"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받아야 일할 것이라는 주장에 광범위한 동감을 표시하였다. 중상주의자들은 하위 계급에게 여분의 돈이나 여가 시간, 교육과 같은 것들을 제공하는 것은 사회를 나태와 악으로 이끄는 것이라 여겼으며 결국은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상주의가 250년간 지배적인 경제 이론일 수 있었던 까닭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다. 제콥 바이너는 당시 학자들이 시대적 한계에 의해 당시 통용되던 상식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경제 현상을 관찰하는 적절한 분석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로버트 에켈런드는 중상주의자들은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니라 상인과 정부의 지대 추구를 위해 가장 효율적인 경제 이론을 개발한 것이라는 의견을 펼친다. 즉, 당시 상인의 막대한 이윤은 외국 경쟁자를 배제하고 국내 시장을 독점하고 노동 계급을 가난에 방치함으로써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정부의 수익은 높은 관세과 상인이 지불하는 막대한 자금에 의존하고 있었다. 후세의 경제 이론가들이 대부분 학자나 철학자인 데 반해 중상주의자들은 스스로가 상인이거나 정부 관료였다

중상주의는 유럽의 봉건 제도가 무너지는 사회 변동기에 형성된 이론이었다. 재화와 권력은 봉건 영주의 손을 떠나 국민국가로 집중되고 있었다. 해운의 발전과 도시의 성장에 의해 기술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었으며 국제 무역이 급증하였다. 중상주의는 이러한 무역에서 국가의 이득을 최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복식회계의 도입과 근대적 회계의 발현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근대적 회계는 무역에 의한 수입과 지출을 투명하게 하였으며 이로 인해 무역 수지에 대한 정확한 조사가 가능하게 되었다.[9] 아메리카의 발견 역시 이 시기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이다.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광산으로 인해 무역량은 전에 없이 증가하였다. 이로 인해 대대적인 가격상승과 상업 활동의 증가가 일어났다

중상주의 이전의 경제 이론은 스콜라 철학에 의한 이념이었다. 이에 따른 경제의 목표는 그들의 기독교적인 신앙과 정의에 걸맞은 경제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고, 미시경제적인 일정 지역의 개인별 거래가 중요한 사항이었다. 중상주의는 중세적 세계관에 의존하던 기존의 이론에서 벗어나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현실 정치와 국제 관계에서 국익의 획득과 같은 사항을 중요 문제로 채택하였다. 중상주의는 경제 현상을 제로-섬 게임으로 판단하였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가차없는 경쟁자라는 이러한 인식은 후일 토머스 홉스의 철학에 영향을 주었다. 중상주의적 관점은 상호간의 협력조차 타인의 약점을 활용하기 위한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논 제로-섬 게임의 일종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가차없는 경쟁자들도 상호 협력이 가능하다는 구전 정리의 예로 협동조합과 같은 보다 근대적인 경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관점은 청교도의 교리와 잘 들어 맞았으며, 실제 정책에서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법과 같은 법이 포고되기도 하였다. 



중농주의(重農主義)


중농주의(重農主義, 프랑스어: physiocratie)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에서 발생한 경제이론이다. 중농주의에 따르면 국가의 부는 오로지 농업의 가치에 의해 발생하며, 농산물의 가격은 높게 책정되어야 한다. 중농주의는 18세기 하반기에 크게 유행했으며, 체계적으로 수립된 최초의 경제이론으로 평가받는다. 

중농주의의 영수는 케네(1694 ~ 1774)와 튀르고 남작(1727 ~ 1781)이었다.[2] 스미스가 《국부론》을 출판하여 최초의 근대적 경제학파인 고전경제학을 창시한 것이 1776년이므로, 중농주의는 최후의 전근대적 경제학일 할 수 있다

중농주의의 가장 큰 유산은, 노동의 결과 만들어지는 생산물을 국부의 원천이라고 방점을 찍은 데 있다. 이 점에서 중농주의는 그 이전까지의 경제학파, 특히 중상주의와 차별화된다. 중상주의는 지배자의 부, 금보유고, 무역수지 등을 중요하게 여겼다. 반면 중농주의 경제학에서는 사회의 생산물은 판매의 그 순간, 판매자가 자신의 생산물을 자신의 생산물의 이전 가치보다 높은 값의 돈을 받고 교환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라 보았다. 중농주의 경제학은 노동을 가치의 발생 원인으로 지목한 첫 번째 시도였다는 데서 유의미하다. 하지만 중농주의자들은 상술한 사회적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농업 노동뿐이라고 생각한 데서 그 한계를 갖는다. 중농주의에서는 "산업적", 비농업적 노동을 농업노동에 딸린 "비생산적 부록"이라고 판단하였다.

중농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만들어가던 시기의 경제는 거의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중농주의자들은 농업노동만을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중농주의자들은 상품과 용역의 생산은 진정한 생산이 아니라 농업의 생산물을 소비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이 시대의 자본가적 생산 이윤은 농업 생산이 이루어지는 농지의 지주가 걷는 지대 뿐이었다. 중농주의자들은 도시의 인공성을 저주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을 상찬했으며 농민을 축복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경제학파(프랑스어: économistes)라고 불렀으나, 중농주의 이후에 발생한 경제학 학파들과의 구분을 위해 오늘날 그렇게 일컫는 경우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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