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는 당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할 수 있는 자대랑 천권(自代郎薦權)과 3사(3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대간(臺諫;조선시대 사헌부의 관원인 대간과 사간원의 관원인 諫官을 합쳐서 일컬을 때 대간이라 했다)을 선발할 수 있는 통 천권(通薦權)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이조전랑(吏曹銓郎;정 5품 전랑과 정 6품 좌랑을 합쳐 부르는 관직 용어)의 추천 문제로 시작된 東西分黨은 中, 後期로 들어서면서 다시 4개의 당파로 분당되어 조선 후기의 역사의 흐름을 결정지었다. 이른바 4색 당파 논쟁(4色黨派論爭)이라 불리는 당쟁의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자.
첫째;관리(官吏)에 대한 수요보다 공급이 더 많았다.
둘째;예법과 명분을 중시하는 유교 이념의 성격과 함께했다.
셋째;학통을 중시하는 士林의 탄생과 연관이 있다.
넷째;율곡의 당파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 등을 들 수 있다.
당파 논쟁은 조선의 정치 문화를 발전 시켰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일부 학자들도 있긴 해도, 조선의 쇠망을 가져오게 한 가장 랙 심적인 원인이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계속 제기되고 있고, 또한 여전히 공존하고 있다.
● 긍정적인 면
첫째;정치 이념의 선진화
둘째;당파에 대한 충성과 끝까지 지키는 지조
셋째;국가 경영에 관한 신념의 표현을 들 수 있다
● 부정적 측면
첫째;많은 인재가 당쟁으로 인해 희생된 점
둘째;권력을 가진 당파에서 주요 관직을 완전 독점하는 현상
셋째;건설적인 대안의 부족등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자초한 죄과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회피한 조선의 사대부(소위 양반계층) 지도층은 주자학 일변도의 이념 독재를 통해 자신들의 죄업을 덥고 백성들을 압박하고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하였다,
● 이념독재가 조선사회에 미친 영향
1. 이념적 순결성을 강조한 소중화(小中華) 의식으로 세계사적인 변화를 거부했다.
2. 장자상속제(長子相續制), 칠거지악(七去之惡), 찬영례(親迎禮;朱子家禮를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冠, 婚, 喪, 祭를 주자가례에 따르도록 했다), 호주제(戶主制)등을 통한 가부장제(家父長制;가부장이 가족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가족 형태)의 강화로 사회 계층의 다양성을 상실하였다.
3. 농업을 숭상하고 상공업을 천시하는 의식으로 상업자본의 양성과 발전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었다.
4. 당파를 형성하고 권력을 완전 장악하면서 內治와 外治를 소홀하게 하고 自黨 利己주의에 빠져 국정이 더욱 혼란해졌다.
이처럼 조선 사회는 주자학 이념 독재로 역동성과 창의성을 잃어버리고 세계사의 周邊으로 전락하기 시작하였다, "영조"와 "정조"라는 현명한 왕이 등장했지만 이미 150년에 걸친 주자학적인 이념 독재에 물들여진 당쟁의 소용돌이를 뛰어 넘기에는 시간과 왕의 권력이 역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