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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 양국 간의 경제적 및 군사적 협조에 관한 협정, 1949년, 김일성, 스탈린, 모스크바

Jobs 9 2021. 4. 14.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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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김일성과 스탈린의 모스크바 협상에서 체결된 경제문화협정.

개설

건국 직후 북한 정부대표단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 소련 정부대표단과 회담을 갖고 경제문화교류 협정을 비롯한 기타 부속 비밀협정을 체결했다. 주목할 사항 중의 하나는 북소 지도자 사이에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 문제가 논의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1949년 3월의 김일성과 스탈린의 협상은 경제적 문화적 교류와 군사적 협력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김일성이 스탈린에 요구한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원조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4천만 달러 상당의 차관이었다. 이 차관은 경제적이며, 동시에 군사적 성격의 차관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요구한 지원 요청에 대부분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고, 소련은 북한의 후견국이며, 미국과 대치하고 있는 강대국으로서의 면모를 북한정부에 과시하였다.

역사적 배경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북한 정부 지도자들은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양국사이에 상호원조 조약을 체결하여 북한 정부의 정치외교적, 군사안보적 지위를 확고히 하려고 했다. 그리고 10월 12일 북한의 요청에 의하여 첫 수교국으로써 소련과 북한은 국교를 수립했다. 이에 따라서 양국간의 상호관계를 규정하는 조약 체결이 현안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1949년 3월 조소 경제문화교류협정을 체결하였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소련과 우호 및 상호원조 조약을 체결을 주장하였지만, 소련지도부는 분단상황을 고려하여 경제문화교류협정을 주장하였다.

북한 정부는 경제, 문화, 군사 분야에서 포괄적인 소련의 지원을 희망하면서 대규모 복구사업과 조선인민군 무장을 위해서 약 3천만 달러의 차관을 요청하였고, 스탈린은 북한의 기대를 넘는 약 4천만 달러의 차관 제공에 합의하였다.

경과

1949년 3월의 스탈린, 김일성의 협상에 대하여 한국전쟁의 기원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논쟁이 진행되었다. 1949년 소련을 탈출한 칼리노프(북한주재 특별군사고문단)는 조소 경제문화교류협정과 더불어 비밀군사협정이 체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외교아카데미의 바자노프 교수와 러시아국제관계대학토르쿠노프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 방안을 제기하고, 스탈린이 이에 반대한 사실이 밝혀졌다.

결과

1949년 3월 협상으로 북소 양국간에 경제적, 문화적인 포괄적 협력이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공장설비 및 관련 차관, 금속공장, 청진항의 소련해군의 일시적 주둔, 조소항공운수회사 설립, 조소철도 건설, 소련의 기업과 기관에서 조선인 연수생 수임, 조소해상운수회사 및 원산석유정련회사 설립, 무역대표부 개설, 교육분야에서 소련 고문과 전문가 파견 등의 경제적 문화적 협력에 합의했다.

이상의 문제와 더불어 군사협력강화도 진행되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에게 집요하게 무력에 의한 통일을 제기했다. 김일성이 제기한 정치적 문제들(무력에 의한 남북통일 방안, 조선과 중국의 관계, 아시아 공산당, 로동당 정보국 창설문제)은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전쟁을 하려면 중국에 있는 조선인 사단을 귀국하는 문제 등에서 중국의 마오쩌둥과도 협의가 필요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김일성이 제기한 군사적 수단에 의한 남북통일을 단호히 반대했다.

의의와 평가

비록 스탈린이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 방안은 기각했지만, 반대급부로 북한 정부대표단은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교류 협력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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