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7월 6일 북한과 소련 사이에 체결된 양국 간의 군사동맹조약.
정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이다. 이 조약의 특징은 유사시 군사적 자동개입을 규정한 양자동맹조약이라는 것이다. 김일성의 소련 방문 중 체결된 이 조약은 6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핵심 내용은 ‘체약 일방이 어떠한 국가 또는 몇 개 국가들의 연합으로부터 무력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체약 상대방은 지체 없이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소련 양국 간의 경제·문화·기술의 원조·제공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당시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 등 다자간 안보조약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과는 양자조약을 체결했다. 또한 대국-소국 간의 군사동맹이 소국의 수도에서 협정이 체결되는 것에 반하여, 이 조약은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체결되었다.
소련 측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중국과 소련에 통보하지 않고, 두 개의 조소, 조중 군사협정을 5일 간격으로 체결했다. 따라서 체결 당시부터 협정의 강제성이 의문시되었다.
역사적 배경
북한과 소련 간의 조약 체결은 1950년대 후반 치열해지는 사회주의 진영의 중소갈등과 중인전쟁, 그리고 한국의 5·16군사정변 및 한일관계 정상화 움직임, 미국의 동아시아 지역 통합 전략 구상 등으로 북한을 둘러싼 안전보장 환경이 악화되면서 체결되었다. 그러나 동맹 체결 직후 중소갈등이 심화됨에 따라 조소관계는 실질적으로 중단되었고, 허울뿐인 동맹으로 전락하였다. 조약 체결 이후 김일성은 국내외적으로 소련, 흐루시초프, 현대수정주의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61년 11월부터 1964년 10월까지 소련은 북한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했다. 더욱이 소련은 중국, 북한과의 경제 원조를 중단했으며, 북한에 제공했던 차관을 황금으로 상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경과
이 조약은 10년간 효력을 가지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체약 일방이 기한 만료 1년 전에 조약 폐기에 관한 희망을 표시하지 않는다면 자동으로 5년간 연장되도록 되어 있었다. 탈냉전 분위기와 더불어 1990년 한국과 소련의 국교정상화 이후 조약의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 러시아 방문 시 옐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동 조약의 폐기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1995년 8월 7일 러시아 동 조약을 연장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북한에 통보하여, 1996년 9월 10일 이후 효력 상실했다. 2000년 2월 이바노프 외무장관의 평양 방문에서 조러 친선선린 협조조약(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북한은 2000년 4월, 러시아는 7월에 이를 비준했다. 새 조약에는 쟁점 조항인 자동군사개입 규정이 삭제되었으며, 경제·문화·기술 협력에 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냉전시기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1961년 7월 조소우호조약이 체결되었지만, 북소조약 체결 직후 북소관계의 악화와 더불어 1962-64년 북소관계에 따라서 허울뿐이 조약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또한 냉전시기 북소동맹조약의 불완전하게 작동함으로써 북한의 안전보장은 불완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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