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워싱턴
조지 워싱턴은 버지니아 식민지의 농장주였던 어거스틴 워싱턴과 그의 둘째 부인인 메리 볼 워싱턴 사이에서 첫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어거스틴 워싱턴이 첫째 부인인 제인 버틀러 사이에서 이미 네 명의 아이를 얻었으나 그 중 두 명이 요절했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은 실제로는 아버지의 셋째 아이에 해당하였다. 조지 워싱턴의 집안은 그의 증조부인 존 워싱턴이 AD 1657년 영국을 떠나 버지니아로 이주하면서 식민지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다른 버지니아의 정착민들과 마찬가지로 담배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많은 흑인 노예를 부리게 되었다.
비록 조지 워싱턴이 11살이 되던 AD 1743년에 아버지 어거스틴 워싱턴이 사망하면서 14살 위의 이복형인 로렌스 워싱턴이 그의 보호자가 되었지만 로렌스 워싱턴이 부유한 페어팩스 가문의 앤 페어팩스와 결혼한 덕분에 조지 워싱턴도 어린 시절을 부유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AD 1752년 로렌스 워싱턴이 사망하자 조지 워싱턴이 형으로부터 마운트 버넌의 농장을 물려받으면서 어린 나이에 농장주가 되었다. 이러한 재산과 버지니아 민병대의 지휘자였던 로렌스 워싱턴의 동생이라는 후광 덕분에 조지 워싱턴은 버지니아 식민지를 네 지역으로 나눈 민병대 중 한 부대장이 될 수 있었다.
AD 1754년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시작되자 조지 워싱턴은 새롭게 구성된 버지니아 연대의 중령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요새들을 정찰 및 공략하려다가 AD 1754년 5월에 벌어진 주먼빌 글렌 전투(Battle of Jumonville Glen)에서 전 병력을 잃고 혼자만 살아남아 프랑스 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때 조지 워싱턴은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프랑스어의 부정확한 번역 때문에 전사한 프랑스 군의 지휘관인 빌리에 드 주몽빌이 암살되었다는 내용에도 동의한 것이 되어 그가 암살을 기도했다는 비난을 사야 했다. 그러나 포로 석방 이후 AD 1755년 버지니아 민병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받았고 프렌치-인디언 전쟁에 종군하면서 많은 전투를 치르며 군사 경험을 쌓은 뒤 AD 1758년 전역하였다.
이후 자신의 농장인 마운트 버넌으로 돌아온 조지 워싱턴은 AD 1759년 대니얼 파크 커스티스의 미망인인 마사 댄드리지 커스티스와 결혼하였다. 이 덕분에 조지 워싱턴은 17,000에이커가 넘는 대농장과 3,000명이 넘는 노예를 얻게 되었고 기존의 마운트 버넌과 합쳐서 22,000에이커에 이르는 대농장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 뒤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면서 버지니아 식민지의 대표가 된 조지 워싱턴은 제1차 대륙회의에 참석하였고 제2차 대륙회의에서는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사실 조지 워싱턴의 총사령관 임명은 그가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다는 점 이외에도 보스턴과 같은 북부 지역과 달리 아직까지도 영국 정부에 충성하는 왕당파가 득세하던 남부 지역을 영국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정치적인 성격도 있었다.
벙커힐 전투
이제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조지 워싱턴이 지휘권을 인수하기 위해 보스턴으로 향했으나 그 이전인 AD 1775년 6월 17일에 벙커힐 전투(Battle of Bunker Hill)가 먼저 벌어졌다. 벙커힐은 보스턴의 주변에 있던 언덕 중 하나로 대륙군이 요새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영국군의 토머스 게이지가 윌리엄 하우에게 이를 점령하도록 명령하면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윌리엄 하우는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활약한 바 있었으나 전쟁이 종료되자 영국 본국으로 귀환했는데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AD 1775년 5월 15일 다시 4,000명을 이끌고 토머스 게이지를 지원하기 위해 온 상태였다.
윌리엄 하우는 2,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벙커힐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이에 맞서서 대륙군이 브리즈 힐에 가벼운 요새를 구축하였기 때문에 벙커힐 전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실제 전투는 브리즈 힐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영국군이 승리를 거두고 벙커힐 요새를 빼앗는 데는 성공했지만 오히려 영국군의 피해가 더 커서 영국군의 사상자는 1,000명이었던 반면에 대륙군의 사상자는 그 절반인 450명에 불과하였다. 벙커힐 전투는 그동안 병력 숫자는 우세하였지만 장비와 훈련 면에 크게 뒤떨어진 식민지 민병대 병사들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준 전투로서 대륙군의 사기를 크게 올려주게 된다.
보스턴 포위전
벙커힐 전투 이후 조지 워싱턴이 마침내 보스턴에 도착하였고 그 곳을 포위하고 있던 뉴잉글랜드 식민지 출신의 민병대의 지휘권을 인수받았다. 그러나 대륙군의 무장은 민병대에 자원한 식민지인들이 각자 휴대하고 있던 소총과 탄약 뿐이었고 요새 함락에 필수적인 대포와 같은 중화기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도 당장은 보스턴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더구나 보스턴 항구에 주둔한 영국군에게는 바다에 정박한 선박의 함포가 지원 포격에 나서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제압하지 못할 경우 대륙군에게 승산이 없었다. 다만 보스턴의 지형적인 특성상 입구가 좁아 병력 숫자 면에서 크게 열세에 놓인 영국군도 좀처럼 대륙군의 포위를 돌파하지 못했다. 결국 양측 모두 상대편을 제압하지 못한 채 지리한 소규모 공방전 만이 계속 이어졌다.
한편 뉴햄프셔 식민지 출신의 민병대인 그린 마운틴 보이스(Green Mountain Boys)를 이끌던 에던 앨런과 코네티컷 식민지의 뉴헤이븐 민병대를 이끌던 베네딕트 아놀드가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의 민병대와 함께 AD 1775년 5월 10일 허드슨 강 상류에 있던 영국군의 타이컨더로가 요새를 기습공격하여 함락하는 전과를 거뒀다. 특히 타이컨더로가 요새에는 수십 문에 달하는 대포와 수십톤의 화약이 있었기 때문에 조지 워싱턴은 그를 보좌하던 헨리 녹스의 제안에 따라 그에게 이 대포들을 보스턴까지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다. 수송 작업은 12월 5일부터 시작되었으나 겨울의 혹한을 뚫고 무거운 대포를 운반하는 것이 많이 어려웠기 때문에 총 56일이나 소요된 끝에 AD 1776년 1월 24일이 되어서야 완료되었다.
이제 조지 워싱턴은 보스턴 학살 사건이 일어난 날과 날짜가 동일한 날인 AD 1776년 3월 5일 보스턴에 인접한 도체스터 고지에 서둘러 포대를 구축하도록 했다. 비록 추운 날씨로 인해 땅이 얼어붙으면서 참호를 파는 것이 무리였지만 대륙군은 통나무와 큰 나뭇가지를 이용하여 단 하루 만에 포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영국군의 포격은 도체스터 고지에 도달하지 못하지만 대륙군의 포격은 영국군의 군함까지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다급해진 것은 영국군 쪽이 되었다. 이에 영국군의 토머스 게이지가 도체스터 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공격을 계획했지만 때마침 불어닥친 눈보라로 인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만일 군함이 파괴된다면 퇴각의 길이 완전히 막혀버릴 것이었기 때문에 토머스 게이지는 서둘러 조지 워싱턴에게 협상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토머스 게이지는 대륙군이 공격하지 않는다면 함선을 통해 영국군을 조용히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하였다. 조지 워싱턴도 대포를 손에 넣기는 했지만 여전히 정식 군사 훈련을 받은 영국군과 정면 대결을 벌이면 큰 피해를 면치 못할 것이었고 그 사이 타이컨더로가 요새에서 확보한 포탄과 화약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협상에 응하였다. 그리고 AD 1776년 3월 17일 영국군이 배를 타고 바다를 통해 캐나다로 철수하면서 마침내 보스턴이 식민지인들의 차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