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적 전통, 조선, 향반 계층이 강화, 조선 중국 유교, 주자학, 호주제
부계 조상을 모시는 제사·차례, 부계 혈연에 따른 동족집단의 형성, 아들 우선 상속, 그중에서도 장남 우선주의….
오늘도 한국 사회에 남아 있는 이른바 ‘유교적 전통’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또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으로 함께 묶이는 중국, 베트남, 일본에 견줘서도 그 ‘전통’이 한국에서 유독 강고한 것은 왜일까?
일본·베트남은 학문 혹은 통치자 교양으로 유학을 받아들였으되 관혼상제나 가족·친족제도, 일상생활을 규율하는 예(禮)로서 유교를 수용하진 않았다고 본다. 반면 한국에서 유교의 지침은 “일상생활 구석구석 깊숙이 침투했”다. 또한 중국에 견줘 한국은 장남 중시가 두드러진다.
이 유교적 전통, 달리 말해 주자학적 관습의 핵심 생산자이자 유포자가 바로 재지양반 계층이었다. 유교적 관습은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 개국과 함께 생겨난 것이 아니다. 조선 초중기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그런 관념이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제도·규범으로 사회에 깊숙이 퍼진 것은 조선 개국 300~400년 뒤인 18~19세기의 일이며, 그 물질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해준 것은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 토지조사 사업이었다.
서울과 그 주변에 살던 재경양반(경반)은 조선시대 중추 권력을 장악했지만 사회 전체로 본다면 한 줌 특권집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까지 살아 있는 유교적 전통과 그에 따른 친족·가족제도는 재지양반층이 전국적으로 널리 농촌지역에서 “일종의 사회적 운동으로서 형성”되고 존속하는 과정에서 강화됐다고 본다.
부계 혈연 따른 동족집단 형성
남녀 균분 상속에서 장남 우대로
일제 토지조사땐 ‘종중’재산 등록
재지양반층의 형성 과정은 그들의 세거지(世居地·터전)인 동족집락(집성촌)의 형성 과정이기도 했다. 동족집락은 안동 권씨, 예천 권씨, 의성 김씨처럼 성도 본관도 같음을 앞세운 동성동본 집단으로 발전해 나간다. 예를 들어 경북 안동 지역 재지양반인 안동 권씨의 하나인 유곡 권씨 동족집단의 세거지는 안동의 유곡이었다. 지은이는 권벌(1478~1548)을 시조로 삼는 유곡 권씨의 재산 상속문서인 ‘분재기’를 비롯하여 ‘세계도’, ‘족보’ 등을 실마리 삼아 얘기를 푼다.
재지양반층은 15~17세기에 광범하게 형성되었는데, 그 원동력은 농업 생산력의 발전이었다. 이들은 주로 노비를 활용하여 농사를 지었고 그 시기 재지양반은 농사법 발달과 농지 개간, 경지면적 확대의 주역이었다.
그런데 재지양반 계층의 경제력은 17세기 말부터 성장이 정지한다. 경지 확대가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18세기 들어 농업은 단위면적당 생산량 증대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고, 양반들은 노비나 양인, 상민에게 전답을 빌려주고 소작 경작을 맡긴 뒤 생산물에서 지대를 받는 방식으로 옮겨간다. 이들 소작농이 소농으로 발전하면서 양반의 경제력 저하가 이뤄지게 된 것이라고 지은이는 본다. 안동 권씨 일족인 유곡 권씨, 저곡 권씨의 분재기를 보면 둘 다 17세기 전반까지는 재산을 자녀에게 고루 나눠주면서도 규모를 확대해왔으나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이르면 재산 규모가 정체되거나 줄어든다.
상속제도의 변화는 그 귀결이었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조선에서 재산 상속은 남녀 균분 상속 원칙이었다. 18세기 들어서면 재지양반 집안들의 분재기에는 남자 우대, 장남 우대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장남 우대에는 아들 사이엔 균등히 나누면서 장남 몫으로 봉사조(조상 제사)를 비대화하는 방법이 쓰였다. 이에 기존 족보·분재기에 등장하던 여성의 이름은 점점 사라지고 친족제도에도 변화가 일어나 동족집단은 더욱 남계 혈연집단으로 그 존재방식을 규정해 나갔다.
지은이는 동족집락은 일제 강점기에도 강고히 존속했으며 유교적인 가치는 19세기 후반 이후 근대에 들어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외려 더욱 강화되었다고 말한다. 그 물적 기반은 종중(문중) 재산 법제화였다.
식민지화 초기인 1910~1918년에 작성된 ‘토지대장’과 식민지화 이전인 1898~1903년에 농지조사 결과로 작성된 ‘양안’을 비교할 때,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종중 재산이다. 일례로 충남 논산군 송산리의 양안과 토지대장을 견줘보면 식민지화 전후의 토지 소유관계의 변화가 보인다. 송산리에 많이 살던 동족집단 여흥 민씨의 경우, 양안엔 개인 명의로 돼 있던 토지가 토지대장에선 종중 재산으로 바뀐다. 이른바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이 확정될 때, 동족 결합의 요체인 문중 조직 유지·운영에 필요한 기반으로 문중 재산을 한층 더 명확하게 해두려는 노력이 이뤄진 것이다. 이런 사례는 근대라는 시대가 전통적인 것을 해소해 나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명확하게 의식화하고 강화한 측면이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조선을 지배한 국제정치 전략이자 이념은 사대주의다. 조선의 지배층은 『대명률』을 수용해 조선을 제2의 중국으로 건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과 중국의 현실은 달랐다. 장병인 교수는 중국의 혼인 절차인 ‘6례·4례’가 이 땅에서 어떻게 ‘조선식 4례’라는 일종의 타협안을 창출했는지 논증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칠거지악(七去之惡, “예전에,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이유가 되었던 일곱 가지 허물. 시부모에게 불손함, 자식이 없음, 행실이 음탕함, 투기함, 몹쓸 병을 지님, 말이 지나치게 많음, 도둑질을 함 따위이다”)은 조선 시대 실상과 거리가 있다고 밝힌다.
‘동성동본 금혼’이나 ‘호주제’가 결코 우리의 전통이나 미풍양속이 아니었다.
권반(權班), 향반(鄕班), 잔반(殘班)
조선 후기 양반의 증가는 양반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양반의 계층 분화를 초래하였다. 즉, 양반이라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다양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붕당정치의 변질과 함께 양반 관료들의 정치적 대립과 분열은 더욱 가열되었고, 그로 말마암아 극소수의 집권 세력이 형성되는가 하면, 정계에서 탈락, 소외되는 절대 다수의 몰락 양반도 생겨났다.
이 때, 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양반 가문이 권반(權班)인데, 흔히 벌열(閥閱)이라고도 하였다.
한 편, 정치 권력에서 탈락, 소외된 절대 다수의 양반들은 그 처지에 따라 다시 향반(鄕班)과 잔반(殘班)으로 나뉘어졌다.
양반들은 관직에서 물러나면 대개 낙향하기 마련이었다. 향반은 토반(土班)이라고도 하였는데 향촌 사회에서 토호적인 경제 기반을 가지고 어느 정도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몰락 양반의 대부분은 잔반으로서 양반의 체통을 유지할 수도 없었으며, 빈궁한 생활이나마 일을 하지 않고서는 생계조차 영위하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몰락 양반은 자연히 현실 사회에 비판적이었다. 그리하여 새로이 보급된 서학, 동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실학이나 양명학을 연구하기도 하였고, 민중의 항거에 호응하기도 하였다.
※ 잔반 : 조선시대에 몰락된 양반의 후예로 이룩한 계층. 이들은 중앙 정계에서 소외된 계층으로 각 지방에 흩어져 농민이나 거의 다를 바 없는 위치에 있었다. 곧 양반의 가계를 이었다고 하나 실제로는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일반 상인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충청도와 전라도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으며 '정감록'이나 도참같은 예언 사상을 퍼뜨리며 도당을 모아 반란을 일으킨 주도자들은 대게 이들 계층이었다. 후일 동학의 주동자들도 이들 계층의 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