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릉, Royal Tombs of the Joseon Dynasty
국가 : 대한민국(Korea, Republic of)
좌표 : N37 11 50, E128 27 10
등재연도 : 2009년
조선왕릉(朝鮮王陵)은 18개 지역에 흩어져 있고 총 40기에 달한다. 1408년부터 1966년까지 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왕릉은 선조와 그 업적을 기리고 존경을 표하며, 왕실의 권위를 다지는 한편 선조의 넋을 사기(邪氣)로부터 보호하고 능묘의 훼손을 막는 역할을 했다. 왕릉은 뛰어난 자연경관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보통 남쪽에 물이 있고 뒤로는 언덕에 의해 보호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이며, 멀리 산들로 둘러싸인 이상적인 자리를 선택해 마련되었다. 왕릉에는 매장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례를 위한 장소와 출입문도 있다. 봉분뿐만 아니라 T자형의 목조 제실, 비각, 왕실 주방, 수호군(守護軍)의 집, 홍살문, 무덤지기인 보인(保人)의 집을 포함한 필수적인 부속 건물이 있다. 왕릉 주변은 다양한 인물과 동물을 조각한 석물로 장식되어 있다. 조선왕릉은 5,000년에 걸친 한반도 왕실 무덤 건축의 완성이다.
등재기준
기준 (ⅲ) : 유교 문화의 맥락에서, 조선왕릉은 자연 및 우주와의 통일이라는 독특하고 의미 있는 장례 전통에 입각해 있다. 풍수지리의 원리를 적용하고 자연경관을 유지함으로서 제례를 위한 기억에 남을 만한 경건한 장소가 창조되었다.
기준 (ⅳ) : 조선왕릉은 건축의 조화로운 총체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로, 한국과 동아시아 무덤 발전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 준다. 왕릉은 특별한 (또한 규범화된) 건축물, 구조물 요소들의 배치를 보여 준다. 그리고 몇 세기에 걸친 전통을 표현하는 동시에 보강한다. 또한 미리 정해진 일련의 예식을 통한 제례의 생생한 실천을 보여 준다.
기준 (ⅵ) : 조선왕릉은 규범화된 의식을 통한 제례의 살아 있는 전통과 직접 관련된다. 조선 시대에 국가의 제사는 정기적으로 행해졌으며, 지난 세기의 정치적 혼란기를 제외하고 오늘날까지 왕실 및 제례 단체에 의해 매년 행해져 왔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
조선왕릉을 둘러싼 자연환경은 풍수지리의 원리에 의해 정해졌고, 의례가 결합된 살아 있는 조상 숭배의 전통을 위해 세심하게 조성된 것이다. 세속적인 구역에서부터 경건한 구역으로 이어지는 위계적 배치, 독특한 전각 및 오브제로 이루어진 조선왕릉은 조선왕조의 과거 역사를 상기시키는 조화로운 총체다.
완전성
연속유산으로서 조선왕릉 유적은 왕릉의 환경, 배치, 구성에 대해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완충지역에 포함되어 있는 유적 중 일부에서는 몇몇 예외적 개별 유적을 볼 수 있다. 도시 개발이 몇몇 유적의 경관에 영향을 미쳤지만(선릉, 헌릉, 의릉) 대체로 특정한 능묘의 정상부에서만 도시 건물을 볼 수 있다. 현재, 엄격한 법률로 완충지역 안의 개발을 제한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적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수리, 복원, 중건되었다. 봉분이 있는 매장지는 법적 규제를 덜 받았으나, 입구와 의례 공간은 목재로 지어진 탓에 엄격한 규제를 받았다.
진정성
모든 유적이 본래의 기능과 경건함을 잘 유지해 왔으며, 특히 도시화가 덜 진전된 곳의 유적은 더욱 그렇다. 몇 개의 입구들만 바뀌었을 뿐 그 형태와 디자인을 유지하고 있고, 따라서 조선왕릉은 전체적으로 진정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보존 및 관리체계
문화재보호법 등 실정법에 의해 광범위하게 보호된다. 통합 관리 시스템에 의해 효율적인 보존 계획을 세우고 유산을 관리한다. 개별 유산을 일관성 있게 관리할 수 있는 역량 또한 지니고 있다.
유산면적
1,891㏊
무덤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 특히 왕릉의 위치는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유산 지정 기록에 언급된 바와 같이, 왕릉은 왕족들의 마지막 안식처이기 때문에 왕족의 지위뿐 아니라 예법에 맞게 세심하게 건축된 복합 시설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무덤의 형태는 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만들어진 고인돌이다. 삼국시대에는 무덤 건축의 원칙이 수립되었고, 특히 신라 시대에는 한국 특유의 무덤 체계가 발전했다. 목재로 안쪽을 댄 넓은 구덩이를 마련해 돌로 채운 다음 흙으로 덮는 고분 방식이 그것이다. 신라가 (중국과 손잡고) 다른 왕국들을 정복하면서 통일신라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왕릉은 사방을 향해 선 석호(石虎), 상석 등 독특한 석물을 배치하는 특유의 개성을 나타냈다. 왕릉은 평지뿐만 아니라 산지에도 만들어졌다.
고려시대(918~1392)의 왕릉들은 여전히 신라 방식으로 지어졌지만 산등성이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시냇물 사이에 지어지는 양상을 보인다. 이 시기의 왕릉은 경계 석주, 석등, T자형 사당, 비석과 비각 같은 새로운 특징들도 갖추고 있다. 호랑이, 사자, 양을 조각한 석물들이 봉분을 둘러싸기도 했다.
특정한 왕이나 그 자손들의 염원을 반영한 몇몇 변형도 있지만 대체로 조선왕조의 왕릉 건축은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고려와 비교했을 때 조선왕조 때 건축된 왕릉은 언덕 위에 조성되었으며 맨 위쪽의 매장지, 중간 지대, 아래쪽 단의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 조선 왕릉
조선 왕릉은 다음과 같이 5단계에 걸쳐 변화 발전했다.
1. 고려의 원칙이 유지된 시기. 석등과 팔각 석주를 사용하는 변화가 엿보인다.
2. 조선의 원칙이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 조선왕조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초한 자체 장례 체계를 세웠다.
3. 풍수지리의 원리에 주안점을 두고, 능묘의 간소화가 이루어진 시기. 칸막이가 난간으로, 회벽이 석실로 대체되었다.
4. 사실주의적 경향이 나타난 시기. 문인상이 무인상보다 더 높은 곳에 세워지는 방식이 중단되었고 석물이 실제 크기로 줄어들었다.
5. 왕실의 칭호가 왕에서 황제로 바뀐 것을 반영하려는 변화가 보이는 시기. 석물의 수가 늘어나 제례에 쓰이는 단 앞에 배치되었다.
이상의 5단계 발전과 더불어 석물의 형태와 크기는 가벼운 변화를 보였지만, 그 유형과 배치는 바뀌지 않았다.
• 석물
석물은 다음과 같이 4단계에 걸쳐 변화했다.
1. 15세기 초에서 중반까지. 사례로는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1408)과 예종의 창릉(昌陵). 능묘가 언덕 위에 조성됨. 석마(石馬).
2. 15세기 후부터 16세기 후까지. 사례로는 성종의 선릉(宣陵, 1495)과 명종의 강릉(康陵,1567). 석물 크기가 커짐.
3. 17세기 초에서 18세기 초까지. 사례로는 선조의 목릉(穆陵,1630)과 경종의 의릉(懿陵, 1724). 후기로 갈수록 석물의 크기가 작아짐.
4.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사례로는 영조의 원릉(元陵, 1776)과 순종황제의 유릉(裕陵, 1926). 일반적인 세 개의 단 대신 두 개의 단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