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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과정 - 철령위 설치, 쌍성총관부, 원간섭기 영토상실 두문자

Jobs 9 2022. 9. 22.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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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간섭기 영토상실 - 쌍화차 동서자

쌍성총관부 : 화주, 철령 이북 (100년 후 공민왕 수복 1356)

동녕부 : 서경, 자비령 이북 (바로 고려에 반환)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명의 철령 이북 요구
  • 고려가 명의 요구 거절, 최영의 요동 정벌 추진, 이성계의 반대(4불가론)
위화도 회군(1388)
  •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 → 우왕과 최영 제거 → 정치적·군사적 실권 장악
과전법 실시(1391)
  • 이성계 일파와 신진 사대부의 주도로 실시 → 신진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 마련
조선 건국(1392)
  • 정몽주 등의 온건파 신진 사대부 제거 → 급진파 사대부들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

 

▶ 4불가론

  •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하다.
  • 둘째, 여름에 군사를 출병하는 것은 불가하다.
  • 셋째, 명과 싸우는 사이에 왜구가 침범할 것이다.
  • 넷째, 지금은 장마철로 활이 약해지고 병사는 병든다.

 

▶ 위화도 회군

 

▶ 과전법

  • 관료의 등급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 주는 제도
  •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잡은 이성계와 급진파 신진 사대부 세력은 과전법 실시를 통하여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고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음

 


 

조선 건국 과정 

● 명의 철령위 설치

-최영 요동 정벌 주장

-이성계의 반대(4불가론)

 

● 위화도 회군(1388)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 돌림

-최영 등 제거

->정치적, 군사적 실권 장악

 

● 과전법 실시(1391)

-정도전.조준 등의 토지 제도 개혁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 상실

->개혁파의 경제적 실권 장악

 

● 반대파 숙청

-정몽주 제거

 

● 조선 건국(1392)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가 조선 건국

 

 


 

고려 말에는 당시 귀족세력인 권문세족과 과거를 통해 진출한 신진 사대부들이 대립

중국은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는 과정이었고 고려 또한 친원세력과 친명세력이 대립

 

1370년대 공민왕은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원나라가 지배했던 만주 지역을 두고 명나라와 다툼

영토문제를 지속하다 공민왕이 죽고 아들 우왕 시절에 철령위 사건

철령위 사건은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이 원나라에 속했던 것이기에 요동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구실로

철령에 직할지를 설치

 

명나라와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되고 우왕의 장인이었던 최영은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로 삼아 군을 구성한 후 요동정벌

하지만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하여 4불가론을 제시하며 회군을 주장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이 받아들이지 않자 결국 정변을 모의하고 회군한 후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옹위(위화도 회군)

 

이성계는 조민수와 대립하였으나 승리하게 되고, 조민수의 추대로 오른 창왕 마저 폐위시킨 후 공양왕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폐가입진)

 

고려시대에는 전시과라는 토지제도가 문제 발생

땅을 많이 소유한 귀족들은 그 땅을 경작할 하인도 많이 부리다보니 그 하인들이 개인의 병사가 되어 중앙 권력의 약화
이성계는 사전 개혁을 위해 급전도감을 설치하여 양전(토지조사 사업)을 하고 권문세족들의 농장을 몰수

전시과를 폐지하고 1391년에 새로운 토지제도인 과전법을 공포

권문세족은 경제적 기반을 잃게 되어 몰락

 

위화도 회군 후 정치 및 군사를 모두 장악한 신진 사대부 또한 고려 왕조의 존립 여부를 두고 분열

고려 왕조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려하는 온건파와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급진파의 대립은 결국 급진파가 온건파를 제거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 왕조는 끝남.

 

이성계는 즉위 후 1년 뒤인 1393년에 국호를 조선으로 고치고 1394년에 풍수지리에 능한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

 

 

조선 건국 과정 기출 문제

 

 Q  대외 관계와 관련된 연표의 (가)~(라)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① (가) - 철령 이북의 땅이 수복되었다. 

② (나) - 전민변정도감을 통해 신돈이 개혁을 시도하였다. 

③ (다) - 전제 개혁이 단행되어 과전법이 마련되었다. 

④ (라) - 정도전이 고려국사를 편찬하였다.

 

【해설】 정답 ③

(다) "전제 개혁이 단행되어 과전법이 마련되었다."  1391

① (가) 이전 철령 이북 땅 수복(1356, 공민왕), ② (가) ④ (다)

 

●  공민왕 - 곧 몽정기 관쌍 홍복흥 전(효)성 요동

곧(공) 공민왕

몽 몽골풍 일소

정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元 干涉期 征東行省

기 기철숙청정동행성 대표기관 理問所

관 관제복구

쌍 쌍성총관부 수복 1356

홍 홍건적 침입 1359  원말기 홍건적(주원장) 명건국 1368

복 복주 피난

흥 흥왕사의 변  반원 공민왕 살해기도 

전 전민변정도감 1352  田民辨整都監 신돈, 토지노비 개혁

성 성균관정비

요 요동정벌

동 동녕부 공격

 

연대암기

홍건적 일쌈오구 1359

목화씨 쌈요쌈 1363

회군하니 인상벌벌 1388

고려멸망 청산구리 1392

한양천 참새구려 1396

 

 


 Q  (가)∼(라) 시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가) - 김용이 왕을 시해할 목적으로 흥왕사에 침범했다가 최영에 의해 격퇴되었다. 

② (나) - 이성계 일파는 폐가입진을 명목으로 우왕과 창왕을 연이어 폐위시켰다. 

③ (다) - 명은 표문의 글귀가 불손하다는 구실로 정도전을 명으로 압송할 것을 요구했다.

④ (라) - 박포가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해설】 정답

보기는 여말선초에 있었던 주요 사건들이다. 명의 철령위 설치 통보는 1388년, 위화도 회군은 1388년, 조선 건국은 1392년, 1차 왕자의 난은 1398년, 태종 즉위는 1400년의 일이다.

① 흥왕사의 변은 공민왕 때인 1363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정세운, 이방실 등이 홍건적을 격퇴하자 정세운의 공을 시기한 김용은 왕명을 위조해 안우, 이방실 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그 죄를 뒤집어씌워 모두 죽였다. 그리고 흥왕사의 행궁에서 거처하던 공민왕을 죽이고자 했으나 최영 등이 군사를 이끌고 행궁에 이르러 이들을 토벌하였다.

② 위화도 회군 이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잇따라 폐위시키고(폐가입진)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③ 1395년(태조 4) 11월 조선은 고명과 인신을 청하러 명에 예문춘추관태학사 정총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명은 정총이 가지고 간 표문의 언사가 불손하다고 트집을 잡아 정총을 현지에 억류했다. 이에 이듬해 유구와 정신의를 파견했는데 이때도 표전문이 불손하다며 두 사신을 억류시킨 뒤 글의 찬자(정도전 등)를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이러한 요구는 1397년에도 있었다.

④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에 큰 공을 세웠으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조선 태조의 4남인 방간과 공모하여 이방원의 세력을 꺾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패하였다. 이 난의 평정 이후 정종은 방원을 세제로 삼았고, 같은 해 11월에 방원(태종)에게 양위하였다. 

 

 


 Q  쌍성총관부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것은?

 

① 원이 화주(和州) 지역에 총관부를 설치하고 다루가치를 파견하였다.

② 공민왕대 반원개혁 과정에서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다.

③ 명은 고려에 쌍성총관부 지역을 다시 내 놓으라고 통보했다.

④ 명의 철령위 설치에 대항하여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해설】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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