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황준헌이 개항기 한국이 당면한 국제적 지위를 논하고 그 대외책을 시사한 역사서.
1880년(고종 17)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 초명은 宏集)에 의해서 당시 청국 주일공사관 참찬관(參贊官)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을 기증받아 귀국해 고종(高宗)에게 복명과 동시에 바쳤다.
내용
이 책략의 내용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러시아에 대한 방아책(防俄策)의 방법으로서 친중국(親中國)과 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함으로써 자강책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의 남침을 방어하기 위해서 연미국수교론(聯美國修交論)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미국은 강대(强大)·공명(公明)·정의(正義)의 나라로 조선에 대해서 이를 얻을 욕심은 없고, 오히려 조선을 이롭게 할 것이라 하여 미국과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할 것을 권하였다.
나아가서 영국·프랑스·독일·이태리 등 여러 나라와 공평한 조약을 체결해 문호를 개방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산업과 무역의 진흥을 꾀하고 기술을 습득해 부국강병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등을 주장하고 그 구체적인 방략을 여러 항목에 걸쳐서 상세하게 제시하였다.
이 책략의 내용은 당시 완고한 조선인의 생각보다는 확실히 한걸음 앞선 이론이었다. 그러나 책략이 부분적으로는 청국의 대한간섭정책(對韓干涉政策)을 지원하며, 일본의 대한침투전략(對韓浸透政略)을 시인하는 경향이 다분해 그 한계성을 드러내었다. 또한 러시아의 침략을 경계해 미국과의 수호통상을 적극 추진하려는데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당시 청국의 이홍장(李鴻章)이 배후에서 조선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유럽 제국과의 조약 체결을 권도(勸導)한 것과 관련해 볼 때, 조선책략의 내용은 오직 저자인 황준헌의 의견이 아니라 어느 정도 청국 정부 당국자들의 의견이기도 하였다.
또한 이른바 제국주의 정책이라는 것이 역사상 특정한 국가의 특정한 정책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 이상 미국이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등과 같은 국가와는 다른 이질적인 국가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 정책의 내용은 극히 이상주의적 양상을 띠고 있다고는 하나 본질에 있어서는 다른 바가 없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어디까지나 중국인이 본 국제적 안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편, 이 책략의 내용이 일반에게 알려지자 개화혁신에 대해 반발하며, 쇄국 보수의 척사론(斥邪論)에 젖은 유림(儒林) 측으로부터 맹렬한 반대론이 일어나 각처에서 반대 상소가 답지하였다.
이 척사론은 더욱 치열하게 변해 국내의 유림들의 궐기로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의 상소가 전국적인 규모로 지속하였다. 명성황후 중심의 척족정권으로는 어느 모로나 우환이요, 불안이 아닐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여러 반대소(反對疏) 중에 1881년 영남 유생 이만손(李晩孫) 등을 소두(疏頭)로 한 만인소(萬人疏)와 강원도 유생 홍재학(洪在鶴) 등 복합상소(伏閤上疏)가 실로 만인의 원성을 대변한 듯 정부의 국정을 통박했으며 과감한 주장을 내세웠다.
그들의 반대의 초점은 쇄국을 주장하고, 기독교를 맹렬히 공격했으며, 조선책략의 내용은 망어(妄語)가 아닐 수 없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김홍집은 인책을 당했으며, 강화도조약 이후 표면화된 국내의 개화와 척사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기에 이르렀다.
의의와 평가
김홍집이 가져와 고종에게 바친 조선책략은 고종과 조정 중신들에게 대체로 그 내용이 이해되고 김홍집의 복명을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당시의 실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선정부는 많은 어려움에 부딪쳐 그것을 극복해 가면서 좀 더 개화된 의식 속에서 1881년에는 여기에 적응할 만한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되고, 동시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과 영선사(領選使)를 각각 파견(派遣)하고, 별기군(別技軍)을 편성해 신식 교련(敎鍊)을 하는 등 개화혁신책(開化革新策)을 수립해 나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구미(歐美) 여러 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가다듬고 근대화에 매진하고, 점차 구미 열강과 조선은 드디어 쇄국(鎖國)의 문호를 개방하기에 이르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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