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한국사

조선시대 연표 정리

Jobs 9 2020. 7. 6.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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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연표

 

※ 조선사회의 특징: ①중앙정치: 왕도정치 중시, 중앙집권적 관료제 성격 강화, 관직의 분화, 언로와 견제장치 발달(3사, 경연·서연), ②지방제도: 중앙집권력 강화(전 군현에 지방관 파견(향소부곡 소멸), 道제의 확립, 향리의 지위격하 등), 향촌자치의 발달, ③사상: 성리학적 통치이념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문화사 대외관계
태조
(1392~1398)
· 권지고려국사
· 한양천도(1394)
· 1차 왕자의 난(1398)
· 의흥삼군부 설치
(군무기능 분리)
    o 조선경국전(정도전),
경제육전(조준)
o 고려국사(정도전)
o 불교: 도첩제 실시
·요동수복계획(정도전;진도작성)
정종 ·개성천도
(1399)
·2차 왕자 난(1400)
 
태종
(1400~1418)
· 한양재천도(1405)
· 사원토지의 몰수사병혁파
· 도평의사사 혁파
· 6조직계제 채택(왕권강화, 승정원 기능↑)
· 저화발행(1401)
· 과전 하삼도 이급
· 신문고제도(의금부관할, 하극상불가)
· 호패법실시(노비포함 모든 남자만)
· 서얼차대법
· 동국사략(권근): 일명 <삼국사략>
· 혼일강리역대국도(현존동양최고 세계지도)
· 원육전·속육전(하륜)
· 주자소 설치(계미자)
· 요동수복 보류→명과의 관계호전
세종
(1418~1450)
· 의정부 서사제(인사, 군사는 왕이 유지)
· 집현전(학문연구기관)
o 과전 경기 환원(1431)
o『농사직설』(정초)- 연작상경
· 삼남지방 농부들 이야기 직접채취
· 이앙법 소개는 하나 부정적
· 시비법: 인분, 오줌재, 녹비 등
· 금부 삼복법(사형 3심제)
· 여자 종의 출산휴가 연장
o 과학기구: 측우기, 해·물시계, 간의, 혼천의
o 역법 : 칠정산내·외편
o 인쇄술 : 갑인자(밀랍아닌 활자틀)
관습도감 설치아악정리(박연)
o 편찬: 농사직설(1429), (신찬)팔도지리지(1432), 향약집성방(1433), 삼강행실도(1434), 훈민정음 창제, 의방유취(1445), 정전·육전등록
불교정책: 선·교 양종 36개사로 통합. 내불당
· 4군6진 개척(현재의 국경선)
· 쓰시마 정벌(이종무, 태종)
· 삼포개항(1426;부산포,제포,염포),
계해약조(1443:50, 200)
문종
(1450~52)
고려사(세종~
문종;기전체)
고려사절요(문종;편년체)
 
단종 계유정란(1453)
 
 
세종실록지리지(독도)
이징옥의 난(1453)
세조
(1455~1468)
o 6조직계제 부활
o ┌ 집현전폐지경연 폐지
└ 유향소 폐지
o 군제정비(패도정치) :
5위(의·용·충·충·호), 진관체제, 보법 정비
o 전폐(팔방통보; 유엽전) · 호패법 강화 o 불교진흥: 간경도감, 원각사와 10층석탑
→ 월인석보
규형(인지의,1466): 토지 측량기구
→ 동국지도(양성지, 인지의 이용한 최초의 실측지도)
경국대전착수(호전형전)
 
o 이시애의 난(1467) ⇨ 유향소 폐지, 호패법 강화
o 경진북정(1460, 신숙주), 정해서정(1467)
예종    

※ 성리학적 명분론의 영향: ①정치: 사대관념, ②경제: 중소지주 옹호, 지주전호제 관철 노력 ③사회: 종적질서의 중시(신분·남녀·직역에 따른 차별 고착화) ④사상: 이외는 이단음사로 배척

※ 관학파(훈구파) vs 사림파 : <중앙집권 강화(패도도 수용), 기술학 중시타사상 포용> vs <왕도정치향촌자치 추구기술학 천시, 성리학 지상주의>

 

 

성종
(1469~1494)
 
· 홍문관(옥당) 설치(집현전 후신)
· 독서당(호당) → 연산군대 폐지 → 중종대 동호독서당으로 부활
· 관수관급제 실시(직전법 下)
· 금양잡록(1475,강희맹) : 금양(과천·시흥)지방
· 재가금지법 채택 도첩제폐지
o 경국대전 반포
o 편찬 : 삼국사절요(1476,노사신·서거정;편년체), 동문선(1478,서거정;시문집), 동국여지승람(1481), 동국통감(1485, 고조선~고려말), 악학궤범(1493.성현), 국조오례의(세종~성종)
   
연산군 *사화발생
· 무오사화
· 갑자사화
은제련법(김감불,김검동)        
중종
(1506~1544)
o 사림세력의 재진출
<조광조 개혁정치>
(도학정치; 지치주의)
· 소격서혁파
· 향약보급 시도(여씨향약)
· 현량과 실시
· 위훈삭제→기묘사화의 직접적 배경
o 기묘사화
· 군적수포제 ·백운동서원(안향;최초서원, 주세붕건의)   · 삼포왜란(1510) : 비변사 처음설치
임신약조(1512): 제포만 개항,교역물반감
· 사량진왜변(1544)
 
인종  
명종
(1545~1567)
· 을사사화   · 소수서원(최초사액, 이황건의) · 불교부흥(승과, 보우) · 정미약조(1547)
· 을묘왜란(1555): 국교단절, 비변사 상설화, 제승방략체제
· 임꺽정의 난(1559.황해구월산)
선조(1567~1608)  
o 훈련도감 설치(1593), 속오군 편성
· 조식의 서리망국론, 대공수미법 주장(이이, 유성룡 등)→실시 X · 향약실시(이황이이) · 불국사, 경복궁 소실, 사고소실(전주사고보존)
· 담배고추, 호박, 토마토의 전래
임진왜란(1592)
일본과 국교재계(1607)
정여립 모반사건(1589;대동계)→기축옥사(동인처벌)
이몽학의 난(1596,임란중;청주)

 

사림정치사

 

※ 사림진출의 배경

고려말 상황 권문세족(친원세력,기득권) vs 신진사대부(고려말 신흥세력) 대립 신진사대부 분화 : 새왕조 개창(혁명파) vs 기존왕조 옹호(온건파)
⇨ 위화도 회군 후 신진사대부 세력 장악 ⇨ 혁명파 승리(이성계, 정도전, 권근, 조준, 남은 등)
※ 온건파는 왕조개창 참여 않고 대부분 경상도로 낙향(길재 등) → 나중에 이들이 “사림세력”이 됨

 

15C~16C중반 상황 훈구의 성장 성종·중종의 훈구견제책
⦁세조정변 후(계유정난) 잦은 공신 책봉으로 훈구세력의 성장
⦁→ 훈구세력이 성장하면서 농장 확대, 향촌사회 세력 확대 등으로 사림과 마찰
(→훈구는 경재소 통해 유향소를 장악함으로써 향촌패권까지 잡으려 했고, 농장 확대 등으로 지방중소 지주들인 사림들과 경제적 이해관계도 충돌)
⦁국왕의 사림등용정책으로 사림들 정식으로 중앙정계에 진출시작
⦁사림을 통해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
※ 훈구vs 사림의 갈등 : 사화(士禍) 발생

* 당시 중앙의 훈구(세조 이래의 공신세력) : 서해안 간척사업, 농장확대. 대외무역 관여, 상공업 독점. ⇨ 지방의 농장확대 등 사림과 경제적으로도 마찰이 발생.

 

※ 사림의 계보

정몽주 - 길재(선산 낙향) - 김숙자·김종직 父子 - ┏ 정여창 - 이언적 - 이황 -┏김성일
(동방이학의 祖)                              (성종대 등장)    ┣ 김일손                        ┗유성룡
                                                                     ┗ 김굉필 - ┏ 조광조             ┏ 김장생
                                                                                      ┗ 김안국 - 이이 - ┗ 정엽 

 

※ 사림정치의 전개 

성종 ➀ 김종직 등 진출. 훈구대신 견제위해 주로 삼사와 문한기구로 진출(→그러나 여전히 대신직은 훈구파가 장악, 사림은 주로 언관직. 수적으로도 열세)
· 언론권의 강화 - 양사의 언론기능이 강화되고 홍문관이 언론기관화 됨(홍문관 성종代 설치)
➁ 세조대 폐지된 유향소 복립운동
연산군 무오사화
(1498.4년)
o 배경 : 김종직의 조의제문사초를 김일손이 실록작성에 삽입(∴일명 史禍라 함)
o 경과 : 가해자 훈구세력(유자광. 이극돈) vs 피해자 사림(김종직(부관참시). 김일손, 김굉필, 정여창 등)
갑자사화
(1504.10년)
o 배경 : 궁중파와 부중파의 대립 → 연산군이 자기 어머니 죽게 된 과정(폐비윤씨사건)을 알게 됨
o 경과 : 가해자 궁중파(임사홍, 신수근) vs 피해자 훈구&사림 모두 피해(한명회, 정창손 등 부관창시. 김굉필, 정여창 등 잔존사림 피해)
※ 결과: ⇒ 중앙 진출했던 영남사림들 대부분 몰락. 이후 연산군은 언론 극도 탄압하는 등 폭압정치 펴다 중종반정으로 쫓겨남(1506)
중종 중종대의 진출 중종의 사림등용, <낭관권 형성> → 자천제(전랑 후임 천거), 통청권(삼사같은 청요직 임명제청) * cf.중종은 훈구세력에 의해 등극
⦁ 중종은 훈구들에 의해 반정 성공했으나, 집권 후는 사림통한 개혁을 시도함 → 조광조 등용
⦁ 낭관권의 형성 - 이조·병조 전랑에게 각사 당하관 인사권부여, 通淸권(3사 언론기관 당하관 인사권에 관여)부여, 자천제(자신의 후임 선출)의 권한 부여함. → 재상은 여전히 훈구중심이었지만, 사림은 이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음
조광조의 혁신정치 ※ 도학정치, 지치주의, 철인군주론(현철군주론)
➀ <주자가례>, <소학>, 향약(여씨향약: 신분보다 나이를 존중) 보급 노력 * 유향소 폐지운동과 사마소 설치
➁ 현량과 설치(일종의 천거제), 낭관권 형성 : 사림세력의 확대
➂ 소격서 폐지
➃ 위훈삭제사건(공신입록자 3/4을 무효화) → 기묘사화 직접적 배경
기묘사화
(1519,14년)
o 배경 : 조광조의 급진개혁 → 훈구의 반발(주초위왕의 모략), 중종도 돌아섬
o 경과 : 주초위왕(남곤, 심정 등 훈구세력의 모함) → 가해자 훈구세력(남곤, 심정 등) vs 피해자 사림세력(조광조, 김안국, 정구 등)
※ 결과: ⇒ 조광조가 실시했던 개혁 무위로 돌아감(향약혁파, 소학실천운동폐지), 사림세력 대부분 제거됨 * 기묘명현으로 추앙받음
최초 서원 백운동서원(중종38.1543) : 주세붕 건의. 안향봉사
명종 을사사화
(1545,즉위)
o 배경 : 왕위계승문제로 왕실 외척간 싸움 → 대윤(윤임) vs 소윤(윤원형, 윤원로)
o 경과 : 가해자 소윤(윤원형 등) vs 피해자 대윤(윤임 등), 사림
※ 중종의 제1계비 아들인 인종이 즉위. 그러나 인종이 곧 죽자 제2계비인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즉위. 문정왕후 세력은 인종세력(외숙인 윤임 등)을 제거하고자 일을 벌였으나, 당시 언관들이던 사림이 반대. 이에 사림까지 다수 제거됨.(사화이긴 하나 이전과 달리 외척간의 정치적 갈등의 성격이 짙음. 또한 양편에 모두 사림이 가담하여 사림끼리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모습도 보여줌)
최초 사액 소수서원(명종5.1550) : 풍기군수 이황의 건의. 서원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됨. 대원군철폐시에도 존속. * 명종 후반에만 서원이 17개소
선조 사림이 정국의 주도권 장악. 경재소 소멸, 향약 보급. 서원 크게 확대. * 붕당정치의 시작(동·서 분당 ⇨ 남·북 분당)
광해군 산림의 정계진출
인조 산림직의 설치(국왕·세자의 스승 역할, 최고 정책결정에 참여) → 송시열(효종, 현종), 허목(숙종)



  

 

▨ 조선후기 연표

선조
(1567-1608)
※ 붕당의 발생
(1) 동·서분당(을해당론, 1575) : 이조전랑직 다툼(심의겸 vs 김효원)
(2) 정여립모반사건(1589): 기축옥사(정철이 주도, 동인 막대한 피해)
(3) 정철의 건저의사건(1591)
(4) ⇨ 남·북분당┏북인: 서경덕·조식계열
┗남인:이황계열(유성룡)
· 불국사,경복궁,사고소실(전주사고보존)
· 고추, 담배, 호박 전래
· 일본과 국교재개·통신사파견(1607)
→ 일본의 요청으로 이뤄짐.
➀조선이 한단계 높은위치: 왜사 서울입경 불가, 일왕친서 예조참의에 전달
➁ 총12회 파견(일본이 월등 많이파견)
➂ 통신사 정사 수상대우, 국빈대우
광해군
(1608-1623)
· 대북파가 정권장악: 왜란중 주전파, 의병활동 적극적 수행
· 사림 지지기반의 상실
➀ 회퇴변척(이언적, 이황 문묘삭제)
➁ 임해군살해, 영창대군살해·인목대비유폐(계축옥사)
· 대동법시행(1608): 경기도지역
· <동의보감>
· 5대사고 정비
· 기유약조(1609): 20척, 100석
- 동평관폐쇄, 왜사의 서울입경불허
· 실리적 중립외교 : 명의 파병요청
→강홍립의 투항(왕의 투항밀지)
인조
(1623-1649)
 
· 산림직의 설치
* 서인들의 정책: 숭용산림·물실국혼, 병권장악
· 이괄의 난
· 영정법실시
· 어영청 설치(북벌의 중심군영)
· 정묘호란(인조5.1627)
- 형제의 맹. 중강·회령개시. 정봉수
· 병자호란(인조14.1636)
- 군신관계. 남한산성. 3학사볼모
* 강화도 사건(윤선거 사건)
효종
(1649-1659)
 
· 산림등용(송시열, 송준길 등)
· 양척동일법
· <농가집성>(신속)
· 나선정벌(변급.1654, 신유.1658)
- 청나라의 파병요청 : 러시아와 전투
- 조선총수병의 실력 입증
· 하멜표류(1653-1666)
현종
(1659-1674)
※ 예송논쟁(17c 예학의 발달)
* 1차: 경국대전으로 해결(남인: 고례)
· 종모법 실시(1669)→존폐반복
· 훈련별대 신설(1669.남인군사력), 萬科실행
 

 

숙종
(1674-1720)
(1) 경신환국(1680) : 남인 역모모함
→노·소분열(강경파vs온건파), 허적·윤휴 사사
(2) 기사환국(1689) : 장희빈 자 세자 책봉문제
→ 송시열 사사
(3) 갑술환국(1694) : 폐비민씨 복위문제
→ 상인자금도 이용(서얼.역관.노비 등도 연결)
→ 대거낙향(최대) : 지방에 서원·사우 남설
⇨ 노·소분당
(4) 병신처분(1716) - 노론집권
 
o 5군영의 완성(금위영), 탕평책실시(명목상만)
· 상평통보(1678) : 전국적 유통
· 대동법 전국적 실시(1708)
· 장길산 난(1697)
· 대보단 설치(창덕궁.1705)
· 안용복사건(1696)
· 백두산정계비(38년.1712)
· 남구만 노력으로 폐4군 일부 복설
경종 ·신임사화: 노론탄압,노론4대신 처형    
영조
(1724-1776)
 
1. 왕권, 중앙집권력 강화
➀ 이조전랑권 폐지 → 탕평파 재상의 권한증대(탕평파대신 중심 비변사강화) ⇨ 군주권과 재상권의 강화 * 전랑권 완전폐지는 정조 代
➁ 용호영(금군. 병조판서 관할)
➂ 수령권 강화, 서원억제·산림 정치권에서 배제
➃ 여론의 중시 : 신문고 부활(병조에서 관할), 상언·격쟁 활성화
➄ 팔도구관당상제 : 비변사의 지방지배장치 ⇨ 중앙정부의 지방지배력 강화
2. 주요 사건들
· 이인좌 난(무신난.1728), 나주괘서사건(1755) →두 사건으로 소론 몰락
· 임오화변(1762.사도세자) ⇨ 시파·벽파 분립(남인·소론·일부노론 vs 노론)
· <속대전>(1746) : 대동법, 노비종모법
· 균역법 시행(1750)
· 도성방어체제 개편(1751.수성윤음), 도성정비사업(청계천 준설)
· 형사제도 개선노력 : <무원록>편찬(법의학서적)
<편찬사업> ➀ 동국문헌비고(한국학백과사전), ➁ 여지도서, ➂ 동국여지도,
➃ 속오례의, ➄ 속병장도설
정조
(1776-1800)
1. 왕권, 중앙집권력 강화 * 만천명월주인옹(초월적존재로 비유)
➀ 규장각 설치(즉위년.1776) : 초계문신제도(재교육,승진시험)
➁ 장용영 설치(1785장용위-1788장용영-1797내영·외영체제)
- 무과 실시해 서얼, 평민 등 등용
➂ 새로운 세력 등용 / 새로운 물결
- 준론탕평 : 시비분명한 준론계열 등용(남·소·노 중)
- 서얼 등용 : 서얼허통절목 반포(1777: 서얼 허통)
규장각 검서관(박제가,유득공,이덕무,서이수)
- 자유상공업 : 금난전권철폐(신해통공), 공장안 철폐
- 서학세력 온건한 대처(남인 보호)
➃ 여론의 중시 : 상언·격쟁
➄ 수령권 강화 : 수령이 군현단위 향약 직접주관(사족지배력↓)
· <대전통편>(정조9.1785)
· 신해통공(1791) : 6의전 제외 금난전권 철폐(사상의 성장)
· 영남만인소 사건(1792) : 영남남인들의 사도세자의 무죄 주장
· 문체반정운동(1792)
· 화성건설(1796)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1997)
· 오회연교(1800)
· 형사제도 개선노력 : <추관지>(조선역대판례), <심리록>(정조대판례), <흠휼전즉>(형구)
<편찬사업> ➀ 증보문헌비고(대한제국기), ➁ 동문휘고(외교문서정리), ➂ 존주휘편, ➃ 일성록(세손때~1910), ➄ 홍재전서,
➅ 탁지지·추관지, ➆ 무예도보통지(1790)

 

* 탕평책의 한계 : ➀ 기본적으로 보수적(왕중심의 봉건통치체제 유지·강화 위한 것), ➁ 하나의 정치체제로 정립시키는 데에는 실패,
➂ 왕의 개인적인 역량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왕사후 구심점 X), ➃ 탕평정책의 결과: 삼사의 정치적 비중은 감소, 외척과 벌열이 대두

 

 

 

붕당정치사                                                               

 

※ 붕당의 계보

o 동인(이황, 서경덕, 조식) ┏ 북인 : 서경덕(이지함), 조식계열(이산해, 정인홍)
┗ 남인 ┏경기남인: 허목, 윤휴, 윤선도, 유형원, 정약용 ⇨ 탈주자학 흐름
┗경상남인
o 서인(이이, 성혼) ┏ 소론(성흔 → 윤증, 박세당, 정제두, 유수원) ⇨ 탈주자학 흐름
┗ 노론(이이, 김장생 → 송시열, 송준길, 김집) : 주자성리학 ┏ 호론(권상하, 한원진)
┗ 낙론(이간) ⇨ 북학파(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사도세자 죽고난후(임오화변) ┏ (남인)시파 : 주로 남인+일부 노론
┗ (노론)벽파 : 주로 노론

 

 

※ 붕당정치의 전개

※ 성립기
선조 을해당론
(1575.8년)
ο 배경 :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대립이 발생(을해당론.1575). 심의겸 동생 심충겸(명종비 동생으로 외척임)의 이조전랑 추천에 대해,
훈구척신출신은 절대 안된다라는 입장(김효원 파; 동인) vs 척신에게도 사림의 요소가 있다며 긍정하는 입장(심의겸 파; 서인) 대립
o 경과 : ┏ 서인쪽 세력은 이미 중앙정계에 진출해 있던 선배사림들(심의겸 등)
┗ 동인쪽 세력은 새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후배사류들임(이황·조식 문인들, 서경덕 문인도 가담)
※이이는 붕당 발생 막고자 함. → 그러나 결국은 서인쪽 붕당에 가입(당시는 서인이 약세. 이로써 서인도 학연성을 확보하게 됨)
o 결과 : 동·서 붕당 발생
정여립 모반사건(기축옥사;1589.왜란이전) : 원래 이이제자(서인)→동인 이적하여 난→동인 큰 피해(특히 조식계, 서경덕계)
정철의 건저의 사건(1591) o 배경 : 세자책봉을 왕에게 건의한 사건 → 이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동인 내부에서 남·북으로 분열.
o 경과 : ┏ (1) 북인(서경덕, 조식 계열) : 강경파(이발. 이산해 등). 남인보다 우세
* 북인은 동인 가운데 이황 계열을 제외한 모든 계열을 포함(다양한 흐름이 존재함) →∴일단 집권하자 여러 갈래로 분열함
┗ (2) 남인(이황계열) : 온건파(유성룡, 이원익 등)
o 결과 : 남·북 붕당 발생
임란 발생(1592~1597~1598)
광해군 북인정권 수립 임란시 북인들 의병활동 등 전쟁에 적극참여
실책 ① 회퇴변척(1611) : 정인홍이 이언적·이황을 문묘에서 삭제함 → 사림의 지지기반 상실
② 계축옥사(1613) : 대북파가 영창대군과 소북파 제거 살해함. * 그리고 곧 이어 임해군제거, 인목대비 유폐 → 유교적 명분상실
➂ 중립정책 : ‘대명의리 위반’
1. 붕당정치의 이념적 구현 - 견제와 균형의 원리. 공존
인조 o 인조반정 발생(1623) : 서인(+남인일부참여)
o 서인정권 수립 · 서인과 남인의 공존 ⇨ 이후 서인과 남인간에 북벌논쟁. 예송논쟁이 발생함.
· 공신견제위해 인조는 남인도 등용함.
o 산림직 설치
효종 o 북벌론의 최고조기(어영청이 북벌의 핵심군영이 됨)
⇨ 나선정벌로 귀결됨(청의 요청으로 러시아 군대와의 전투에 참여해 조선포수병의 실력을 입증함)
현종 기해예송
(1659,현종즉위)
o 배경 : 효종이 죽으면서 자의대비 복상 몇 년 입어야 되는지가 문제됨(남인이 시작)
o 경과 : 왕사동례(서인.1년주장) vs 왕사부동례(남인.3년주장)
o 결과 : 1년설(기년설) 승리(서인승리). 남인 실각(윤선도유배) → 서인의 위세가 지속
갑인예송
(1674,현종15)
o 배경 : 효종비가 죽으면서 자의대비 북상 몇 년 입어야 되는지가 문제됨
o 경과 : 양반과 예가 같다(서인. 9개월주장) vs 다르다(남인. 1년주장)
o 결과 : 1년설(기년설) 승리(남인승리) →송시열 유배
※ 훈련별대 신설(1669;남인 군사력) ⇒ 이시기는 남인들이 북벌론을 제기(마침 청에서도 오삼계의 난[삼번의 난.1673-81] 일어나 정세혼란)
2. 붕당정치의 변질 - 환국정치, 상대세력의 존재를 인정 않는 일당 전제의 추세 나타나기 시작
숙종 ※ 환국정치 : 국왕이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을 서로 교체함으로써 정국을 급격하게 전환해 나가는 정치행태.
※ 숙종代도 탕평정치를 실시하나 명목상만 탕평임. 실제는 왕이 정국을 바꿔나가는 환국정치 함.
경신대출척
(1680,숙종6)
o 배경 : 서인이 훈련별대 강화 등을 근거로 남인들이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함.
o 경과 : 서인의 집권 ⇨ 남인 철저한 탄압(허적, 윤휴(‘사문난적’) 등 사형)
o 결과 : <노론, 소론 분열> ┌ ① 노론(강경파) - 송시열→대의명분 중시
- 남인 처벌과정에서(1683) └ ② 소론(온건파) - 윤증. 박세당, 정제두, 유수원 → 실체·실지증시 ⇒탈주자학 흐름
기사환국 o 배경 : 장희빈 소생 세자 책봉문제
o 경과 : 남인이 집권 ⇨ 송시열등 제거하면서 보복(송시열 사사)
갑술환국 o 배경 : 폐비민씨 복위문제 * 서인들은 이때 상인자금을 이용하기도 함(서얼. 역관. 노비 등과도 연결)
o 경과 : 서인(소론)이 집권 ⇨ 이후 노론·소론의 대결구도
o 결과 : 남인 실각후 대거 낙향 → 지방에 서원 난립(서원발달의 배경), 학문적 기반과 무관한 가족을 제향하는 사우도 남설됨
병신처분 o 노론집권(소론제거)
경종 ※ 경종즉위(1720~1724) : 소론주도+남인일부참여. 장희빈 소생
신임사화
(1721~1722)
o 배경 : 즉위다음해, 노론4대신(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이 중심이 되어 연잉군(영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고 주장&대리청정까지 주장.
o 경과 : 소론의 노론 견제 ⇨ 노론 4대신 사사
o 결과 : 壬寅의 옥이라고도 함. “신임의리” 문제의 발생
3. 탕평정치기 - ‘붕당타파’의 시도
영조 ※ 영조즉위(1724~1776) : 노론의 힘으로 집권(“신임의리” 문제 발생→영조 집권내내 발목을 잡음)
※ ‘타파붕당’의 기치를 내걸음 ┌ 탕평책시행(완론탕평(조제보합) → ‘탕평당’을 또 하나 만든 것에 불과하다 비판받음)
└ 서원의 제한·혁파 * 탕평과 시행·탕평비 건립(성균관)·동색불혼
※ 남인 등용, 서얼 등용
이인좌의 난
(1728,영조4)
o 배경 : ‘경종독살설’, 노론 독주에 대한 반격 → 소론세력(+남인)의 봉기
o 경과 : 청주성 점령 → 서울로 진격중 안성에서 진압 당함 ⇨ 소론몰락
나주 괘서사건
(1755)
o 결과 : ⇨ 소론몰락
임오화변
(1762)
ο 사도세자 죽음 ⇨ <노론 시파·벽파로 분열> ┏ ① 시파 : 주로 남인·소론 계통. 일부노론 → 동정
┗ ② 벽파 : 주로 노론 강경파 → 사도세자 죽음 수긍
정조 ※ 정조즉위(1776~1800) : 사도세자 복권
※ 준론탕평 : 시시비비가 분명한 이들을 등용해 정국 운영
※ 남인 등용, 서얼 등용(규장각 검서관: 서이수,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 무과 실시해 서얼 채용)
신해통공
(1871)
· 노론과 결탁한 시전상인에 대한 제재 → ‘노론의 경제력 약화’로 이해
문체반정운동
 
· 북학파의 신체문(박지원 일파의 패관문체) 비판 → 정통고문으로의 복귀 명령
· ‘노론 일파에 대한 견제’ 시도로 이해
4. 붕당정치의 파탄 - 세도정치기(한 가문이 정국을 운영)

 

 

● 영정조기 정리표 = 18c 정리표

<영정조기 공통점>

정치 ※ 왕대사 : 왕권강화 = 사족권 약화
` 탕평책
` 남인, 서얼 등용
※ 애민정책
중앙 ` 전랑직 철폐 ┐→ 재상의 권능 부활(이조판서 권능부활)
` 언로기능 약화 ┘
※ 대민 여론수렴 발달(궁궐 밖 자주 출입) : 상언`격쟁 발달
지방 수령권 강화 = 사족권 약화
- 향회/향청 : 사족이 아닌 사람도 참여 → 신향의 진출
- 향약 : 수령이 주도
- 서원 : (정리 vs )
군사 ` 군제개혁 : 국왕친위부대 강화(용호영 vs 장용영)
` 병조판서의 지위 강화(5군영 주관, 신문고 관할)
교육 ` 경연 약화 → 왕이 신하를 재교육( vs 초계문신제)
경제 ∙ 상품화폐경제의 발달(18c로 표현)
┌ 상업
├ 수공업 : 선대제 수공업의 발달
└ 광업 : 물주-덕대제의 출현
∙ 부역노동의 쇠퇴 → 고용노동의 발달(ex. 청계천준설 사업, 화성건설)
사회 ∙ 신분제의 변화
┌ 서얼 등용(등용 vs <서얼허통절목>, 규장각 검서관)
└ 노비제 완화(종모법 vs 노비제 해체 준비)
∙ 완형주의
문화 1. 대규모 국책사업
 
2. 각종 편찬사업
` 법전 편찬 : 속대전 vs 대전통편
` 백과전서류 편찬 : 동국문헌비고, 여지도서 vs 증동국문헌비고, 사고전서 수입시도, 고금도서집성 수입
` 병서의 편찬 : 병장도설/속병장도설 vs 무예도보통지
3. 문화의 발달
` 진경문화의 개척 : 진경산수화(정선) vs 풍속화의 발달 : 서민문화 발달
4. 과학기술
` 활자 개발 : vs 생생자, 정리자
` 기타 과학기술 : vs 주교, 거중기

 

※ 영정조기의 대규모 국책사업

내용 영조 청계천 준설사업(1860) : 영조 최대의 역점 사업 중 하나
도시 재정비 사업
- 하천바닥의 토사를 건져 올리고, 천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도시미관도 고려하였다.
- 1752년 주민에게 준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며 추진의 의사를 표현한 지 8년만인 1760년에 본격적 공사 개시(2/18~4/16 57일간)
- 57일간 21만 여명의 백성이 동원됨(일반민, 시전상인, 군인, 승려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
재난 방지 : 조선후기 도시로의 인구유입을 반영하기도 함
홍수방지 : 도성민들의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한 토사 유입량의 증가
전염병 예방 사업 : 도시유입민 중 집을 얻지 못한 대개의 사람들은 하천변인 청계천에 몰려들었다. 이들이 버린 생활폐수가 심각한 질병을 유발할 수 있고, 병이 유발하면 주거환경의 문제 때문에 급속도로 전염병이 될 수 있었다.
실업자 구제 : 임노동제 방식에 의한 공사 ⇨ ‘조선판 뉴딜정책’
정조 화성건설(1796) : 정조 최대의 역점사업
특징   자본주의적 임노동제 방식
부역노동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임노동 방식 도입 : 철저하게 임금을 지급하여 공사기간 약 3만 5천 냥과 쌀 2300여석의 물자가 소요
애민정신 발휘 : 강제철거나 이주보다는 철저한 보상에 의해 이주정책 시행
철저한 기록 수행
<준천사실>(濬川事實) : 청계천 공사업무를 진행한 준천사의 사업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책머리에는 영조의 서문과 교서, 본문에는 <준천사실>과 <준천사절목>이 실려 있다. → 당시의 공사 현황과 경비인부말 등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공사기간이 적혀있다.
<준천시사열무도> : 영조가 공사현장을 순시하며 참여자들을 친히 격려하는 모습을 남긴 그림(당시 현장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줌)
<화성성역의궤> : 정조대 화성건설에 관한 사항을 철저히 기록해 남김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 : 노동을 하거나 돈을 모으는 사례가 있었다. 특히 정조대 사도세자 능의 원찰인 용주사를 재창건할 때는 전국적인 모금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 화성건설(1796)

배경 ⦁ 명목상 : 퇴임 후 거처 마련
⦁ 실질상 : 노론 주도의 정국을 개편하고자 시도함
과정 ⦁ 사도세자 능 조성사업과 거의 동시에 시행
⦁ 정약용 설계 : ➀ 전통양식(고구려 성곽기법)+서양식 근대건축기술 도입
➁ 거중기 사용(화성성역의궤에 그림 보존)
⦁ 철저한 보상과 임금노동 시행 : 공사기간 예상보다 빨리 끝남, 노동자 품값주고 고용(부역노동X)
⦁ 철저한 기록( <화성성역의궤>) : 노동자들의 이름, 노역품값까지 기록
⇨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주요한 배경이 됨
특징 종합적 도시계획
자급도시 건설
┌ 농업 : 국영농장인 대유둔전 설치 → 이를 위해 만석거 같은 대형저수지 축조
├ 상업 : 종로 형성, 시전상인들 유치
└ 인재육성 : 수원유수부 혹은 경기(광주 등) 인재를 대상으로 한 과거 실시
군사도시 : 방어+공격 可 성곽(근대 군사성격 성의 모범), 장용영 외영 설치(훈련도감과 맞먹는 급, 3000여명) *cf. 장용영은 장조 사후 해체됨
 
철저한 기록 수행 : <화성성역의궤>
→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도시건설기록(:경비, 인력, 기계, 물자 등)
※ 수원 유수부 성격(정2품 특수행정구역) : 남인 영수 채제공을 유수부로 내려 앉힐 만큼 중요한 위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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