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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프랑스 외교 정책 혼선

Jobs9 2021. 5. 1.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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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

AD 1796년 대통령 선거와 존 애덤스의 대통령 당선

AD 1796년말 이제 138명으로 늘어난 선거인단이 2표씩 행사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이 은퇴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미국은 처음으로 유력한 후보자가 없는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되었고 연방당과 민주공화당이 저마다 후보자를 내세운 채 각축을 벌이기 시작했다. 선거가 치열해지면서 연방당은 민주공화당을 프랑스 혁명의 폭력성과 연관지어 비난하였고 민주공화당은 연방당이 왕당파의 다른 모습이며 귀족주의자라고 공격하였다. 다만 이미 AD 1796년 8월 12일부터 AD 1797년 10월 15일까지 진행된 하원 선거에서 연방당이 총 105석 중 과반수가 넘는 57석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연방당이 여전히 유리한 듯이 보였다.

 

먼저 연방당에서는 조지 워싱턴의 정부에서 2번 모두 부통령을 역임한 존 애덤스와 핑크니 조약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토머스 핑크스가 주요 후보로 부상했다. 그 밖에 코네티컷 주 출신의 연방 대법원장인 올리버 엘스워스, 초대 연방 대법원장이자 뉴욕 주지사인 존 제이, 노스 캐롤라이나 주 출신의 연방 대법관인 제임스 아이어델,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전(前) 상원 의원인 새무엘 존스턴,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출신의 프랑스 주재 공사인 찰스 코츠워스 핑크니가 연방당의 군소후보로 나섰다. 이를 상대하는 민주공화당에서는 토머스 제퍼슨이 은거 생활을 청산하고 대통령 후보로 직접 나섰고 뉴욕 주의 상원 의원인 애런 버가 부통령로 나섰다. 또한 매사추세츠 주지사인 새무엘 애덤스와 전(前) 뉴욕 주지사인 조지 클린턴이 민주공화당의 군소 후보가 되었다.

 

그런데 연방당의 창당에 기여하며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알렉산더 해밀턴이 존 애덤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존 애덤스보다 토머스 핑크스를 대통령에 당선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연방당의 투표가 분산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존 애덤스가 미국의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는 성공했지만 득표 수가 71표에 불과했고 차순위로 부통령에 당선된 토머스 제퍼슨이 불과 3표 모자란 68표를 득표했을 정도로 선거가 박빙으로 진행되었다. 그 밖에 연방당의 토머스 핑크스는 3위(득표수 59표)가 되었고 민주공화당의 애런 버는 4위(득표수 30표)를 기록하였다.

 

 

대(對) 프랑스 외교 정책의 혼선

이제 대통령에 당선된 존 애덤스는 AD 1800년까지 조지 워싱턴의 내각을 거의 그대로 유지했는데 이로 인하여 이제 야당인 민주공화당 소속의 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물론 여당인 연방당 내에서도 알렉산더 해밀턴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장관들의 정쟁에 휘말려야 했다. 더욱이 존 애덤스는 영국이 프랑스 혁명 정부와 프랑스 혁명 전쟁을 벌이면서 미국의 선박을 나포하고 영국 태생인 미국인 선원들을 강제 징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면서 영국과 프랑스 혁명 정부 중 어느 쪽과 손을 잡아야 하는 지를 결정해야는 중대한 외교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본래부터 존 제이 조약의 체결시부터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었고 알렉산더 해밀턴은 친(親) 영국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에 존 애덤스가 AD 1797년 프랑스 혁명 정부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하여 밀사 3명(X, Y, Z로 표기)을 파견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혁명 정부의 외무장관인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가 25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뇌물을 요구하고 1천만 달러의 차관을 프랑스에 제공할 것을 요청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反) 프랑스 여론이 비등해졌다. 이것이 이른바 'XYZ 사건(XYZ Affair)'이다.

 

결국 알렉산더 해밀턴을 위시한 친(親) 영국 성향의 사람들이 프랑스 혁명 정부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미국은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는 안했지만 사실상 프랑스와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그리고 미국에 이미 와 있거나 앞으로 오게 될 프랑스 혁명가들을 규제하기 위해서 AD 1798년 '외국인 규제법과 보안법(Alien and Sedition Acts)'이 의회를 통과하고 대통령인 존 애덤스가 서명하며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 법은 인권 침해의 소지가 다분했기 때문에 토머스 제퍼슨의 민주공화당이 버지니아 주와 켄터키 주의 주의회에서 반대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다른 주의회에서도 동조하였다. 이에 따라 외국인 규제법과 보안법으로 추방당한 사람은 1명에 불과했고 25회의 기소 중 10회의 유죄 선고만 있었을 뿐이었을 정도로 사실상 사문화되었다.

 

 

알렉산더 해밀턴과의 불화와 존 애덤스의 대통령 재선 실패

 

미국이 프랑스와 전쟁 직전 상태에 놓이자 존 애덤스는 AD 1798년 5월 '해군장관(Secretary of the Navy)' 직책을 신설하고 벤자민 스토더트를 임명했다. 또한 조지 워싱턴이 명목상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그는 알렉산더 해밀턴을 자신을 보좌할 감찰관으로 임명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존 애덤스가 반대했지만 조지 워싱턴의 막강한 영향력 앞에 굴복해야 했고 이로 인해 알렉산더 해밀턴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된다. 다만 알렉산더 해밀턴도 스페인령 루이지애나와 스페인령 플로리다에 대해 세운 공격 계획이 실현되지 않으면서 실제로 군대를 지휘하지는 못한 채 AD 1800년 6월 사임해야 했다.

 

이후 존 애덤스의 임기 만료가 다가오면서 AD 1800년말에 새로운 미국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었고 이번에도 138명의 선거인단이 각각 2표씩 행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존 애덤스와 불화가 생긴 알렉산더 해밀턴이 존 애덤스가 아니라 찰스 코츠워스 핑크니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면서 연방당의 지지표가 분산되었기 때문에 존 애덤스와 찰스 코츠워스 핑크니가 모두 낙선하였다. 이와 달리 민주공화당을 지지하던 선거인단은 자신의 행사할 수 있는 2표를 각각 토머스 제퍼슨과 애런 버에게 모두 행사하면서 73표로 동률을 이룬 채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토머스 제퍼슨과 애런 버가 동률을 이루면서 헌법에 따라 누가 대통령이 될 지의 여부를 하원에서 결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알렉산더 해밀턴이 애런 버가 아니라 차라리 자신의 정적이기는 하지만 정치적 능력 만은 인정하는 토머스 제퍼슨을 지지했기 때문에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이, 애런 버가 부통령으로 각각 당선되었다. 이에 따라 민주공화당이 처음으로 미국 행정부를 완벽하게 장악하게 되었고 존 애덤스는 재선에 실패한 미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연방당의 분열을 획책하고 토머스 제퍼슨의 당선에 일조한 셈이 된 알렉산더 해밀턴은 당 내에서 입지가 좁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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