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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원인, 범게르만주의, 범슬라브주의

Jobs9 2024. 10. 17.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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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게르만주의, 범슬라브주의

 

 

제1차 세계대전 원인, 범게르만주의, 범슬라브주의

 

대독일주의(범게르만주의)는 1·2차 세계대전 전범국 독일의 기저 이데올로기다. 게르만 민족이 단일 국가로 뭉쳐야 한다는 이 기형적 민족주의는 1차 대전 패전 이후의 국민적 열패감과 복수심에 나치 인종주의까지 결합해 2차 대전 독일 정서의 핵이 됐다. 카를 하우스호퍼의 팽창주의 지정학, 독일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의 ‘레벤스라움(Lebensraum·생활권)’, 즉 국가라는 유기체가 생존, 번영하는 데 필요한 생태계적 공간권 개념이 대독일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됐다. 

나치 히틀러의 첫 타깃은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서부 수데텐란트(Sudeten-Land)였다. 독일 동쪽 국경선을 움푹하게 파고 든 그 지역은 30년전쟁 직후부터 게르만인이 대거 이주한 곳이었다. 주민 절대다수가 독일계여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체코어 의무교육 등 문화적 동화정책에 적대적이었고, 옛 헝가리 영토였던 동부 농업 지역(현 슬로바키아)에 비해 중공업과 모직산업이 발달했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삼킨 히틀러는 그해 9월 수데텐란트 친독일계 정당의 분리독립 요구를 빌미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한 달 내 그 지역 할양 및 군대 철수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군동원령을 내리고, 우방국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전쟁을 원치 않았고 준비도 미흡했다. 그는 마뜩잖아 하던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를 설득하다시피 해서 그해 9월 30일 히틀러와 ‘뮌헨협약’을 맺었다. 독일에 수데텐란트를 넘겨주는 대신 더 이상의 군사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나치는 수데텐란트를 교두보 삼아 이듬해 3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고 9월 폴란드로 진격, 2차 대전을 일으켰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인 지난 2월 중순, 영국 국방장관 벤 월러스가 법무장관 브랜던 루이스와 대화 도중 “뮌헨(조약과 외교 실패)의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고 말한 사실이 보도된 적이 있다. 독일의 범게르만주의처럼, 러시아에는 범슬라브주의가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
유럽, 지중해, 중동, 아프리카, 카리브해, 중국 대륙, 태평양
원인
사라예보 사건과 그 사건으로 폭발한, 오랜 시간 축적되던 열강들 간의 갈등과 민족주의의 충돌 등의 복합적 원인

 

 

1차대전 개전을 둘러싼 유럽 각국의 정치관계.

 삼국 동맹 /  삼국 협상 /  오스만 제국 /  발칸 당사국
 지원 관계 /  동맹 관계 /  조약 관계




결과
협상국의 승리
영향
동맹국 국가 해체
중동과 유럽 국가 독립,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독립선언
전제군주제 몰락 및 유럽 내 황제국 전멸 및 이로 인한 공화제의 대두
국제연맹 창설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
피해규모
사망(군 병력) 5,525,000명
부상(군 병력) 12,831,500명
실종 4,121,000명
총 사상자 22,477,500명
사망(군 병력) 4,386,000명
부상(군 병력) 8,388,000명
실종 3,629,000명
총 사상자 16,403,000명



제1차 세계 대전은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여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 세계적으로 전개된 전쟁이다. 2014년 1차 세계 대전 개전 100주년을 맞았으며, 2018년 11월 11일에 종전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 전개

독일 제국의 신민들에게 고한다! 제국의 형성 이후 43년 동안 짐과 짐의 조상들은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고 우리의 평화롭고 강력한 발전을 증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그러나 적들은 우리의 성공을 시기하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9일 후인 1914년 8월 6일, 빌헬름 2세 카이저의 연설 중.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은 100년 간의 평화 시대 속에서 지속적인 팽창을 이룬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과 그 과정에서 소외된 독일 제국으로 대표되는 신흥 제국들의 불만, 유럽 내 민족주의적 갈등 등 다수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섞여있다. 그런 과정에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을 중심으로 한 삼국 협상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을 중심으로한 삼국 동맹이 형성되었고 이들 두 동맹체 간의 대립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19세의 세르비아 민족주의 혁명가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했다. 삼국 동맹 소속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에 분노해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이때 세르비아를 같은 슬라브족 국가로써 보호하던 삼국 협상 소속의 러시아 제국이 반발하며 총동원령을 내리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인 독일 제국이 러시아 제국과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영국은 느닷없는 발칸 반도의 분쟁이 전 유럽을 휩쓰는 대규모의 전쟁으로 커지려고 하자 중립을 지켰으나, 독일 제국이 슐리펜 계획에 따라 영국이 독립을 보장하던 벨기에를 침공하자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참전을 선언한다. 일본 제국 또한 영일동맹에 근거하여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1914년 11월에는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면서 전역이 캅카스와 중동으로 확대되게 된다. 이탈리아 왕국은 1915년 참전했고, 미국은 이어서 1917년에 참전했다. 단순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간의 분쟁으로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은 당대의 주요 열강들이 협상국과 동맹국이라는 2개의 동맹체 아래 모두 말려드는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고 만다. 

시간이 지나 전쟁이 길어지며 모든 주요국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수많은 사상자와 장기화되는 전시 경제에 대한 피로감으로 인해 전쟁은 끝을 보이게 된다.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1917년 3월 붕괴된 이후 동부 전선이 해소되었으며 볼셰비키와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러시아가 전쟁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리자 동맹국이 러시아 영토를 확보했다. 1918년 11월 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또한 러시아 제국과의 휴전에 합의했다. 1918년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은 마지막 발악으로 루덴도르프 공세를 실시했으나, 협상군은 독일의 공세를 방어하고 이후 진격하여 독일군 참호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독일 11월 혁명 이후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합의하면서 협상국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전쟁 이후 세계는 180도 바뀌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 아래 난도질을 당했다. 러시아는 내전에 휩싸이고 말았으며 오스만 제국은 국가가 완전히 해체될 위기였으나 튀르키예 독립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오늘날 튀르키예의 형태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국으로써 패전국의 영토와 식민지를 흡수해 전세계에 새로운 국경선을 그렸다. 이와 같은 대전쟁을 막기 위해 국제연맹이 탄생했으나, 패전국에 대한 징벌의식은 유럽의 민족주의 부활과 독일에서의 파시즘 부흥을 낳았고, 전후 전쟁에 대한 공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게 했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의 결말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 

 

배경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아직까지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지만 일반적으로 크게 봤을 때 근본적인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과 그들의 식민지 문제를 둘러싸고 열강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된 것이 지목된다. 

제국주의와 열강들간의 긴장 고조

제1차 세계 대전의 기원은 팽창된 유럽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1815년부터 1914년까지 유럽에서 전쟁이 거의 벌어지지 않는 안정된 정세가 조성된 덕분에 산업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유럽의 생산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급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열강들이 자국의 산업을 팽창시키며 세워진 수많은 공장들을 운영하기 위해 원자재가, 그를 가공한 상품을 팔 시장이 필요했다. 강대국들의 산업이 점차 성장하며 시장은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진 레드오션이 되었고 유럽 각국은 식민지 쟁탈전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일찌감치 산업혁명을 성공시키고 국내 정치가 안정되어 있던 영국은 우위에 서있는 해군력 등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보유했고 프랑스도 여기에 가세했다.

그에 비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독일 통일을 통해 새로 떠오른 신흥 강국 독일 제국은 통일전쟁을 거치면서 영국, 프랑스에 비해 산업과 공업 발달 과정이 늦어졌고 이 때문에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고 보니 이미 알짜배기 땅들은 영국, 프랑스 등이 다 차지한 상태였다. 결국 독일이 식민지를 획득할 방법은 영국, 프랑스의 식민지를 뺏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기존 식민제국인 영국, 프랑스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으로 가장 크게 지적되고 있다. 범게르만주의로 탄생한 국가가 연이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상황은 독일인들에게 강대국의 국력에 걸맞은 식민지를 바라게 만들었다. 

특히 빌헬름 2세는 식민지를 위해 영국 해군에 맞서 해군 증강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것은 해양 패권에 민감하던 영국의 신경을 크게 건드렸다. 윈스턴 처칠은 영독 관계에서 함대란, 독프 관계에서의 알자스-로렌이 의미하는 것과 같다고 경고했고, 런던 주재 독일대사였던 파울 볼프 메테르니히 백작(Paul Graf Wolff Metternich zur Gracht)도 해군을 증강하면 1915년 이전에 영국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영국의 경고를 무시했고, 계속해서 해군 증강을 반대한 메테르니히를 1912년에 해임해 버렸다. 건함 경쟁은 영국과 독일을 적대관계로 만들었으며 세계 대전의 흐름을 결정지었다. 

이미 제1차 대전 이전에도 독일 제국과 영국, 프랑스의 대립은 위험수위에 달해 있었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과 싸운 보어 전쟁 당시에도 보어인들의 배후에 독일 제국이 있었고, 프랑스와는 두 차례에 걸친 모로코 위기로 대립하는 상황이었다.

 

 


민족주의의 발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같은 식민지와는 인연이 없는 다민족 국가 또한 역시 내부적으로는 점점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민족주의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주요민족인 오스트리아, 헝가리인들은 인구 구성의 반도 안 되었으나 다른 민족들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너무 많은 이권을 가졌다는 것에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외적으로도 안 좋았는데 독일 제국과 함께 범게르만주의의 영향을 받는 국가로서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에 맞서 발칸 반도를 둘러싼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발칸 반도는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하였는데, 그 뒤로 발칸 반도의 각국은 발칸 전쟁 등 영토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을 선동하여 지중해로의 진출을 노리던 러시아 제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불만을 품은 나라는 세르비아 왕국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합병하고 러시아 제국이 독일 제국의 압력으로 이에 굴복하자 (1878년, 1908년) 세르비아 왕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극렬한 적대감을 품게 된다. 세르비아 왕국의 적대감은 1914년 6월 28일 제1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인 사라예보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과 관련 세르비아 왕국 측에 검은 손의 해체 및 처벌과 반오스트리아 활동 해체, 사라예보 사건 가담자들에 대한 세르비아 내 재판 개입 등을 요구했고, 세르비아 왕국은 이를 거부하면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이에 대해 독일 제국의 지원이 확실시된 이후에는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선전포고 역시 예견되어 있었고, 그에 대한 핑계가 필요했던 것뿐이라는 해석이 존재한다. 이 긴박한 1달의 일련의 사태를 아래에서도 설명하듯 7월 위기라고 한다.

 

 

범게르만주의
독일어: Großdeutschland / Pangermanismus[


독일이 방어와 공격의 정신으로 형제처럼 서로 함께 단결하면 / 마스[2]에서 메멜[3]까지, 에치[4]에서 벨트[5]까지!
Wenn es stets zu Schutz und Trutze brüderlich zusammenhält / von der Maas bis an die Memel, von der Etsch bis an den Belt! 
독일의 노래 中


19세기 무렵에 태동해 20세기 초 전간기에 독일어권 지역에서 성행했던 범국민주의 사상으로, 대독일주의(大獨逸主義)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범게르만주의가 주장하는 바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독일어를 사용하는 모든 지역이 독일이라는 한 나라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독일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개전을 범게르만주의로 정당화했고, 유사 개념으로 러시아 제국이 주도한 범슬라브주의도 있다. 흔히 제1차 세계 대전을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충돌"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이후 범게르만주의는 인종주의와 겹쳐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표출되고 말았는데, 그 이후로는 사실상 매장된 사상이다. 독일의 노래 1절이 공식적인 국가에서 배제된 것에서 보이듯이 오늘날에 이런 생각을 입에 올렸다간 거의 네오나치 취급을 받는다. 

범'게르만'주의라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독일어권"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른 게르만 지역(네덜란드, 잉글랜드, 북유럽)은 포함하지 않는다.[7]

19세기(1815–1866)  독일 연방  소속 독일어권 국가들

 


18세기까지 프랑스 왕국에서 독일을 가리키는 단수(Singular) 명칭이 없이 독일들, 혹은 독일어권이라고 지칭한데서 알 수 있듯이 지금의 독일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하나의 대제국으로 묶여 있기는 했지만, 프랑스와는 달리 중앙집권화에 실패해서 제후들이 자치권을 가지고 있던 형태였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각 제후들이 주권을 가지면서 완벽하게 허울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차지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 몰다비아 공국의 서북부를 할양받고 폴란드 분할로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을 세우는 등 영토를 꾸준히 확장해나갔고 프랑스와 여러 전쟁을 벌일정도의 국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합스부르크 가문 보유 영토를 확장한 것일 뿐 신성 로마 제국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은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를 마지막으로 제국 문제는 거의 손에 놓다시피 했다. 허울뿐인 껍데기만 남은 신성 로마 제국은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출현으로 1806년 8월 6일 반강제로 해체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나폴레옹 전쟁을 끝내기 위해 소집된 빈 회의는 신성 로마 제국을 복원하지 않고 300개가 넘던 영방국가를 38개로 정리해 독일 연방을 출범시켜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가 독일 연방의 의장을 겸하도록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독일에서도 민족주의 열풍이 거세졌고 1848년 혁명을 거치면서 독일어권 사용 지역을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독일의 노래 1절이다. 

 

 

소독일주의의 승리

하지만 통일된 독일을 형성하고자 했던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보수세력의 반동으로 붕괴되었다. 독일 연방을 양분한 세력은 전통적으로 독일어권의 터줏대감을 자처해온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제국과 18세기를 기점으로 새로이 강국으로 급부상한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로이센 왕국이었다. 

두 강대국의 갈등은 결국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서 승리한 측은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가 포함되지 않은 독일은 의미가 없다고 여겨 비교적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며 전쟁을 마무리지었지만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과 같은 독일 연방 미포함 합스부르크 가문 통치 국가 문제가 남아있었다. 결국 독일 연방 역외 영토를 포기하지 못한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에서 축출되었고 독일 민족만으로 이루어진[10] 소독일주의 통일 국가가 형성되니 이것이 바로 독일 제국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독일계가 주축이 된 국가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두 곳이 생겨났으니 독일어권은 통일된 게 아니라 양분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여담으로 명목상 소독일주의 강역에 룩셈부르크를 포함하는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일부였으며, 독일 연방의 회원국이었기 때문이다. 

 

나치즘과의 결합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독일연방에서 추방된 이후에도 독일 내 범게르만주의의 광풍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프로이센보다는 오스트리아와 훨씬 가까웠던 독일의 (주로 남부) 가톨릭 신자들과 사민주의자들 중에서도 '오스트리아를 합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왔고, 아우스글라이히 이후 급부상한 이민족 헝가리인에 의해 입지가 크게 줄어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오스트리아인은 기득권 수복을 위해 가까운 독일 제국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다. 이렇게 다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독일제국으로 도망치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는데 아돌프 히틀러가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이러한 범게르만주의는 옆동네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와 필연적으로 충돌을 빚었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만약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으면 범게르만주의가 정말로 실현될 수도 있었겠지만 전쟁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끝났고, 폴란드의 독립,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안슐루스 금지[11] 등 범게르만주의자들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결과가 왔다. 

1차 대전 패전 이후에도 민족주의와 통일관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나치당을 위시한 범게르만주의자들이 기존의 사상을 비뚤어진 인종주의와 결합하면서 나치즘이 대두하였다. 이른바 레벤스라움이라고 불리는 동유럽으로의 영토 확장은 처음부터 범게르만주의와 뗄래야 뗄 수가 없는 사이였지만 우생학을 신봉했던 나치들은 '저 동네 슬라브인들을 싸그리 멸족시키고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자'는 정신 나간 주장을 펼쳤다. 여기에 '고대 게르만족의 후예이면 모두 하나다!'라는 개념까지 더해져서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하나의 독일 안에 아우르자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러한 움직임의 정점이 1938년 실시된 안슐루스와 그 이후의 뮌헨 협정. 여기서 멈췄으면 괜찮았겠지만[12] 나치는 정신 못 차리고 2차 대전으로 판을 전세계구급으로 벌려버렸다. 이후 독일에 수립된 서독과 동독에서 범게르만주의는 사회적인 금기가 되었고 몇몇 네오나치들을 제외하면 사장된 사상이 되었다. 

 

 


1990년 동서독 통일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독일이 통일되면 다시 범게르만주의를 제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잠깐 커졌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유럽 연합이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독일이 탄탄한 경제력과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유럽 연합의 실질적인 수장국으로 자리잡은 이후에는 경제적으로 낙후된 동유럽과 남유럽으로부터 제4제국이나 다름이 없다는 비아냥을 받지만, 일단 현재의 독일의 패권은 민족성이 아닌 경제력에 기반하기 때문에 독일 제국~나치 독일 시대의 범게르만주의와는 차이가 명확하다. 제4제국이라는 오해와 달리 만장일치제를 채택한 EU 체제에서 독일은 프랑스와 함께 맹주국임에도 정책을 헝가리, 폴란드, 이탈리아, 그리스에 늘 쩔쩔매며 설득하기 바쁘다. 

 

 

 

 

[1] 본래 독일어권에서 시도하려 했던 좁은 의미의 범게르만주의는 전자, 2차대전 당시 나치당이 좀 더 넓게 정의한 범게르만주의는 후자에 해당한다.
[2] 벨기에에 자리잡은 뫼즈 강의 독일어식 표현이다.
[3] 현재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
[4] 스위스와 이탈리아 북부를 지나는 아디제 강의 독일어 명칭.
[5] 발트해가 아니라 'Belt'라고 불리는 덴마크 유틀란트에서 셸란 사이의 릴레벨트 해협과 스토레벨트 해협을 말한다. 애초에 발트해는 독일어로 'Ostsee', 즉 동해다.
[6] 노래 길이가 매우 긴데 알자스-로렌은 기본이고 오스트리아, 티롤, 스위스, 그리고 도나우 강변까지 전부 독일로 취급하는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보여준다. 사실 문화권, 언어권을 기준으로 보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당시 '독일'은 관념상의 권역이지 정치적 실체가 아니었다.
[7] 다만, 북유럽 지역에는 범스칸디나비아주의가 따로 있었다.
[10] 물론 독일 제국도 다민족국가였으며, 독일 제국 수립을 주도한 프로이센만 하더라도 동부의 포젠, 서프로이센 일대에 수백만 명의 폴란드인과 알자스로렌의 프랑스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덴마크계가 있었다. 그러나, 독일계가 고작 25%밖에 안 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비해서는 확실히 독일인의 비중이 훨씬 컸다.
[11] 다만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합은 민족자결주의에 부합하는 것이었음으로 20년간만 금지했으며 결국 시효가 만료되자마자 히틀러는 자신의 고향 오스트리아를 기어코 독일의 강역에 편입했다.
[12] 오스트리아 합병이나 수데텐란트 할양의 경우 베르사유조약의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하여 진행되었기에 나름의 명분이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가 우방국인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리면서까지 평화를 원했기에, 정말 이 시점에 히틀러의 야욕이 멈추었다면 2차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범슬라브주의


1830년대에 처음 주장된 모든 슬라브족들이 같다거나 모든 슬라브족들이 합쳐서 외세를 막자는 사상. 독일 제국이 범게르만주의를 이용했다면 러시아 제국은 범슬라브주의를 이용했다. 

민족주의라는 개념이 뿌리를 뻗음에 따라 유럽에서는 독일 제국, 이탈리아 왕국 등 파편화되어 있던 국가들이 통일 민족 국가를 이루었고 이는 발칸반도에도 영향을 미쳐 슬라브족도 슬라브 민족으로 이루어진 독립 국가에 대한 열망을 품었다. 이에 따라 발칸반도에 강한 영향을 끼치던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점차 강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같은 슬라브족이자 발칸반도와 중앙아시아로의 세력 확장을 노리던 러시아 제국에게는 하나의 기회로 작용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발칸의 슬라브족이 독립 국가를 이루면 그만큼 경쟁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이 약화되는 것이니 나쁠 게 없었다.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키면 발칸반도의 자원이나 지중해와 아드리아해로의 진출로를 확보할 수 있어서 좋고 그렇지 않더라도 하다 못해 완충국으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하게 해도 나쁠 게 없었다. 

세르비아는 범슬라브주의를 근거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와 마케도니아 등을 아우르는 대세르비아를 주장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탄생으로 실현되었다. 불가리아는 냉전 시대에 슬라브족 국가인 유고슬라비아와 합치는 '대유고슬라비아'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다만 오스만 제국은 몰라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슬라브족- 보헤미아 왕국(현 체코, 슬로바키아)과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등은 이를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20세기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경제나 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대국이었으며 겉으로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전제군주제 국가였지만 느슨한 관행(Schlamperei, 슐람페라이)에 따라 실제로는 언론과 종교, 집회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당시 유럽은 물론 전세계를 통틀어 봐도 굉장히 자유롭고 개방적인 국가였다. 그에 반해 세르비아는 영토는 물론이거니와 경제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1/20 수준에 불과한 조그만 소국에 불과했고 문화나 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후진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니 같은 슬라브 민족이고 자시고 세르비아로의 편입에서 매력을 느낄 턱이 없었다. 대신 슬라브족 정치인들은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를 주장했는데 이는 혼란스러운 발칸반도의 현실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대신 정치와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의 광범위한 자치를 얻어내고 최종적으로는 보헤미아인이나 크로아티아인 등 슬라브 민족이 독일-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일종의 연방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한편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나타난 범게르만주의, 튀르키예에서 나타난 범투란주의와의 대립, 분쟁도 나타났다.

범슬라브주의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탄생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으나 유고슬라비아가 내전으로 붕괴되면서 실패했다. 심지어, 비교적 늦은 13세기 분화되기 시작하여 구성원들의 유사성이 높고 통일국가를 유지하던 동슬라브족조차도 소련의 해체로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로 뿔뿔이 흩어지며 완전히 실패한 이념이 되었다. 
더불어 범슬라브주의는 냉전 시대의 소련처럼 러시아가 동유럽을 지배하기 위해 써먹는 이념이 되어서 동유럽에서 반러 감정과 대립하고 있다.  

 

범슬라브주의에 심취하다 못해 옛 동유럽 전역이 거의 슬라브의 땅이라고 확신하는 팽창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걸핏하면 이웃나라 사람들의 어그로를 끌기도 한다. 헝가리, 루마니아와 몰도바, 알바니아, 그리스가 주된 피해자고 심하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까지 슬라브족의 땅이라고 주장하거나 슬라브 문화권에도 속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남아있는 슬라브 계통 국가 중 가장 강한 러시아에서도 물론 이런 말이 나오지만 그 외 여러 슬라브 계통 국가에서도 한국에 환빠가 있듯 범슬라브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조금씩 출몰한다. 물론 이들 중에는 슬라브족과의 혼혈 등으로 동화된 사람도 있다. 

슬라브도 자리잡은 위치와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그 하위 분파인 동슬라브, 서슬라브, 남슬라브로 중세에 진작 분화되어서 그 안에서는 세부 민족 내지는 국가가 달라도 언어 호환이 잘 되는데[7] 그렇지 않으면 언어가 많이 달라져서 호환율이 많이 떨어지거나 심하면 아예 호환이 안 된다. 물론 주요 단어를 위주로 끼워맞추다 보면 서로 이해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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