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학변』, 『존언』 등을 저술한 학자.
서울 출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추곡(楸谷).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이고, 아버지는 진사 정상징(鄭尙徵)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호조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딸이다. 박세채(朴世采)의 문인이다.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한 조선 후기의 양명학자이다.
몇 차례 과거시험에 실패한 뒤 1672년(현종 13)부터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1680년(숙종 6)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종부시주부·공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688년 평택현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서연관(書筵官)을 비롯하여 상령군수·종부시주부·사헌부장령·사헌부집의에 임명되었다.
1709년 강화도 하곡(霞谷) 으로 옮겨 살았으며, 호조참의·강원도관찰사·동지중추부사·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 1722년(경종 2) 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성균관좨주·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726년(영조 2) 이정박(李廷撲)이 정제두가 양명학을 한다고 배척했으나 영조의 보호를 받았다. 1728년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되었고, 1736년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임명되었다.
학문세계와 저서
정제두는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다가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 당시의 도학은 정통주의적 신념에서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했으나, 정제두는 확고한 신념으로 양명학의 이해를 체계화시키고 양명학파를 확립하였다.
정제두는 당시 주자학의 권위주의적 학풍에 대해 학문적 진실성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하면서, “오늘날에 주자의 학문을 말하는 자는 주자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곧 주자를 핑계대는 것이요, 주자를 핑계대는 데에서 나아가 곧 주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서 그 뜻을 성취시키며, 주자를 끼고 위엄을 지어서 사사로운 계책을 이루려는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정제두는 송시열(宋時烈)과 서신을 통해 경전의 뜻과 처신의 의리 문제에 관해 논의하였고, 스승 박세채를 비롯하여 윤증(尹拯)·최석정(崔錫鼎)·민이승(閔以升)·박심(朴鐔) 등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양명학의 문제를 토론하였다.
박세채는 「왕양명학변(王陽明學辨)」을 지어 양명학을 비판하고, 정제두에게 양명학을 버리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제두는 “왕수인(王守仁)의 학설에 애착을 갖는 것이 만약 남보다 특이한 것을 구하려는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연히 끊어 버리기도 어려운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학문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성인의 뜻을 찾아서 실지로 얻음이 있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하며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특히 민이승과는 여러 차례 만나서 토론을 벌이거나 서신을 통해 조목별로 심즉리(心卽理)·치양지·지행합일·친민(親民) 등 양명학의 문제들에 관해 논의함으로써 양명학과 주자학에 관한 본격적인 토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민이승에게 왕수인의 글을 초록하여 제시하기도 하고, 「양지체용도(良知體用圖)」와 「여명체용도(麗明體用圖)」를 그려서 양명학의 심성론과 양지론의 도상적 표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정제두는 왕수인의 심즉리를 받아들여 주자가 마음[心]과 이(理)를 구별하는 것을 비판하고 마음과 이의 일치를 주장하였으며, 이와 기(氣)의 이원화도 거부하고 이기합일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나아가 이가 마음과 일치되어 마음 밖에 이가 따로 존재할 수 없게 되기에 이가 공허하지 않고 실실하게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정제두는 양지의 개념에 대해서 지각이나 지식의 뜻과 구별하여 성체(性體)의 지(知)요, 본연의 선(善)이며, 오상(五常)의 지(知)를 가리키는 것이라 하여 성의 본체라 하였다. 「양지체용도」에서도 중심의 원 속에 마음의 성과 인의예지(仁義禮智), 마음의 본원과 양지의 본체를 동일시하고 있으며, 바깥의 가장 큰 원은 천지만물인 동시에 마음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정제두는 심(心)·성(性)·정(情)의 관계도 성은 양지의 본체이고, 정은 양지의 작용이며, 마음은 바로 양지의 전체라 이해하였다. 또한 지행합일설에 대해서도 지와 행을 둘로 나누어 놓는 것은 물욕에 가려진 것이라 하고, 양지의 본체에서 보면 지와 행이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정제두는 이황과 이이의 성리설도 비판하면서 양명학의 확립에 전념하였다. 아들 정후일(鄭厚一)을 비롯하여 윤순(尹淳), 김택수(金澤秀), 이광사(李匡師) 형제 등이 정제두의 문인으로서 학풍을 계승하였으며, 정제두가 속하는 소론의 가학으로서 학파를 형성하여 강화도를 중심으로 표면에 나타나지 못한 채 계승되어갔다.
저서로는 양명학의 치양지설(致良知說)과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받아들여 저술한 『학변(學辨)』·『존언(存言)』, 경전 주석서인 『중용설』·『대학설』·『논어설』·『맹자설』·『삼경차록(三京箚錄)』·『경학집록』·『하락역상(河洛易象)』, 송대 도학자의 저술에 대한 주석서인 『심경집의(心經集義)』·『정성서해(定性書解)』·『통서해(通書解)』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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