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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正義, Justice,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절차적 정의(procedural justice),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

Jobs 9 2025. 2. 12.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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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正義, Justice

 

정의의 한자 正義를 해석해 보면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뜻한다. 영어 justice를 해석해도 똑같이 "정의"이다. 왜냐하면 동양의 정의라는 개념이 서양의 정의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다듬어졌기 때문이다. 

 

서구의 문화의 기저에 깔려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잊으면 안 된다. 신에게는 신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이 있으나 인간들은 알기 어렵다. 그래서 불완전한 인간들이 최대한의 노력으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만들어 가고 있는 도구가 법이다. 그래서 법은 도구에 불과하고 목적은 정의이기 때문에 영어로 법무부를 'Ministry of Justice'나 'Department of Justice'라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영어사전을 찾아봐도 Justice에 법집행, 재판이라는 의미는 있어도 '법'이라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실 법이 지엄해 보이지만 입법부의 가결 한번에 손바닥 뒤집듯 쉽게 바뀔 수 있다.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입법부는 가장 민주적 정당성이 강한 기관이 맡는다. 그러나 법과 달리 한 사회의 정의에 대한 관념이 바뀌는 것은 어렵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커녕 심지어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것이 가능한가?"하는 논의가 이어져 왔고 지금도 많은 논의들이 이어져오고 있다.

 

하위 개념으로 사회 정의가 있다.

 

반대말로 불의가 있다.

 

 

 

어원

 

로마 신화에서 정의를 담당하는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에서 이름을 따왔다. 때문에 유스티티아의 여신상이 법정 앞에 세워져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정의의 여신(Justitia)이 들고 있는 천징저울은 지은 죄의 무게에 적합한 형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서양의 관용적 표현인 "Justice is served"는 지은 죄에 합당한 "죄값을 치렀다"는 의미이다. 형벌이 지은 죄에 비해 가벼울 때는 'Justice'가 실현되지 못한 상황이 된다.

 

동양에서는 'justice'의 번역어로, 동양 철학의 '의'(義)와는 살짝 다른 개념이다. 영어로 Justice는 사법적, 판결적 의미가 강하지만 동양에서 말하는 의리나 도의를 의미하는 '의'는 도덕적 당위성이 첨가된 개념으로, 영어로 번역하면 'righteousness'에 가깝다.

 

성경을 번역할 때 일반적인 의미의 '정의'를 justice로 쓰는 반면 하나님의 '의'/'공의'(公義)는 righteousness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성경에서 반드시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justice에 비해 righteousness가 야훼의 의지를 좀 더 담고있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윤리학과 정치철학

 

평화로운 세상이 오면 그것을 정의가 바로 서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상적인 국가가 아닌 한 어느 나라든지 이것을 완벽하게 실현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 위인들이나 많은 사회 운동가들이 이것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고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현재에 우리가 누리고 살아가는 자유와 평화가 찾아올 수 있었으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지켜야 하는 가치이자 권리인 인권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현대까지 오랜 새월에 걸쳐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러서도 인류 모두가 인권, 평등, 자유, 평화, 공존과 함께 추구해야 하는 가치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착각하기 쉽지만, 정의는 선(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악(惡)도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정의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 조금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정의는 선(善)도 될 수 있고, 악(惡)도 될 수 있으며 이를 구분하는 건 사람들마다 다르다. 물론 전인류가 동등한 대접을 받고, 동시에 평화로운 상태가 된다면 그건 거의 모든 인류에게 정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 행위는 선이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 행위가 악이 될 수 있다.

 

정의(正義)의 경우 법철학을 비롯해 서구 역사에서 가장 폭넓게 받아지는 가장 간결한 정의(defini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독일의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흐는 이러한 법이념으로서의 정의가 실제 법이 무엇을 해야할지 지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합목적성, 법적 안정성이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정치 철학자 마이클 왈저에 의하면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정의의 원칙은 궁극적으로 상대적인 배분의 원칙을 의미한다고 썼다

 

계몽주의 시대까지만 해도 절대적인 정의는 존재한다는 생각이 주도적이었다가 이후 정의란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실제로 정의라는 것을 연구하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라는 견해가 팽배했다.

 

그러다가 존 롤스라는 걸출한 학자가 20년의 연구 끝에 1971년 '정의론'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이를 현대 정의론의 출발로 본다. 이후 정치철학계이나 철학계에서 다시금 정의를 연구하게 되었고 논쟁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 로 최근에야 한국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이 1982년 롤스를 비판하는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 라는 책을 발표하면서 정의론을 비판했다.

 

현대에는 편향된 주관이나 윤리에서 벗어나 최대한 공정한 입장에서 개인의 기본권을 보호하는 것 정도가 가장 흔한 정의의 개념이자 대중적으로 인정되는 정의(正義)의 정의(定義)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 생각이 달라진다는 건 이 개념을 사회에 적용시킬 때 어떤 방향으로 해석하는가 정도지, 위의 개념 자체를 흔들지는 않는다. 문제는 위의 정의에 쓰인 개념들도 하나하나가 상당히 모호한 것들이라 애매하기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사실 정의(正義)는 어떤 범주에 가까워서, 이렇다 할 명확한 것은 없고 사람마다 다르다. 즉 "만인이 인정하는" 정의(定義)를 찾기 불가능하다. 하지만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定義)인 '자기 자신에게 합당한 몫이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로 가장 유명하고 또 널리 인정받는다. 그 외 로마 제국의 법학자 울피아누스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려주고자 하는 항구적인 의지'라고 정의하고, 현대에 들어서 존 롤스는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찌되었건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할 때 분배, 평등, 불평등, 능력, 노력, 필요, 합당한 보상, 공정성 등이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심리학

 

논리적으로 깔끔한 정의에 대한 정의는 못내리지만,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동조할만한 기준은 정할 수 있다.

 

법심리학 등의 학계에서 말하는 정의의 구성 요소는 다음의 3가지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톰 타일러(T.R.Tyler)의 문헌들에 나온다.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 제한된 자원을 배분(allocation)함에 있어서 그 결과가 각 개인들이 기대한 기준과 같은지에 해당하는 정의. 물론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그것이 부당하다고 인식되나, 흥미롭게도 자신의 기준보다 더 많은 자원을 받게 되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부당하다고 인식한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차후 자신이 덜 받게 되더라도, 그러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집단이나 상황을 떠나는 쪽을 선택한다! 사람들이 이처럼 분배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진화적으로 상당히 적응적인 것이다.

 

절차적 정의(procedural justice) : 자원의 배분을 비롯한 각종 의사결정 상황과 그 과정, 참여자 모집, 의견의 표출 등의 측면들에서 각 개인들의 존엄한 대우를 보장하는 것에 해당하는 정의. 절차적 정의 없이 분배적 정의는 성립할 수 없으며, 절차적 정의가 공정하다고 지각되면 분배적 정의 역시 공정하다고 지각된다.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배분받는지와는 무관하게, 절차적으로 자신이 배제되고 멸시당하며 고립당하는 느낌을 받을 경우 아무리 많은 자원을 배분받더라도 만족하지 않는다! 현대의 학계에서는 지각된 정의(perceived justice)의 핵심 요소라고 간주되고 있다. 비록 경의나 예우 같은 측면은 사람들이 정의나 공정함 같은 개념에 의식적으로 연결하지는 못하지만, 흔히 정의에 관련되어 "상처받았다", "서운하다", "실망했다" 등의 반응을 보이는 경우 절차적 정의에서 어긋났을 가능성이 있다.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 : 절차적 정의를 통해 성립된 체제나 의사결정 결과를 훼손한 범칙자에 대해 적합한 처벌과 사회적 질서의 회복을 요구하는 것에 해당하는 정의. 고의적이지 않는다면 처벌보다는 사회적 회복이 주가 되지만, 악질적 범죄라고 여겨질 경우[ 그만큼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목소리가 강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범죄 억지력 혹은 위하력(deterrence)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기대한다.

 

 

법학

 

사회의 규칙을 정하는 학문이 법학이기에, 법학자들은 어떻게 정의구현을 이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왔다. 이 고민의 결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응보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는 가해자에게 처벌을 줘서 정의를 구현하는 응보적 정의다. 즉, 가해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를 들어, 학폭위가 열리면 가해자가 누구인지 결정하고 징계를 내린다.

 

그러나 응보적 정의는 (최종) 목적이 '잘못한 사람 벌 주기'이기 때문에, 막상 그 벌이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흔히 '죗값을 치르게 하기 위해서', '죄의 무거움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붙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고통=죗값이 되는 건지, 고통을 받으면 정말 죄의 무거움을 깨닫는지에 대해서는 심도 있게 고찰하지 않고 넘어가기 쉽다.

 

또한, 응보적 정의에서 피해자는 외면당한다. 앞선 학폭위를 예시로 들면, 가해자의 징계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만 정작 피해자의 상처는 어떻게 회복시킬 것이며, 어떻게 위로를 받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게다가 명백하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뉘지 않는 갈등 상황도 많다. 서로 말싸움을 하다가 일어났거나,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심한 욕설을 해서 가해자가 주먹을 휘두른 경우에는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분명히 할 수가 없다. 만약 응보적 정의의 다른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보면,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응당한 처벌을 내린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응보적 정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처벌만 받지 않기 위해 법을 공부하면서 위법하지 않게 공격하는 법을 배우고, 서로 꺾고 꺾이는 힘에 순응할 뿐 자발적인 책임감을 배우지 못해 힘의 지배 논리를 익히게 된다. 또한 피해자는 고통을 위로받을 방법이 복수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엄벌주의를 외치게 되지만, 정작 가해자가 엄벌을 받아도 충분한 위로를 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방황하게 될 위험이 있다.

 

게다가 응보적 정의는 처벌적 사고와 연결되면서 "내 기준과 맞지 않으면 응당한 처벌을 내린다"는 위험한 사상으로 이어지기 쉽다. 사실, 집단 따돌림이나 괴롭힘의 대부분은 이러한 응보적 정의-처벌적 사고로 인해 일어난다. 심리적 성숙도가 높은 사람들은 처벌적 사고가 되려 낮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정의감이 낮은 것인가? 사실, 이러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정의관이 바로 '회복적 정의'다.

 

회복적 정의란, 갈등 당사자들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정의다. 피해자는 상처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를 받으면서 위로를 받아 '회복'하고, 가해자는 자기 잘못을 돌아볼 기회를 받게 되면서 비틀린 행동과 사고에서 벗어나 자신의 행동에 책임감을 가져 '회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의 고통을 가해자가 듣게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직접 듣게 하는 겁니다. 사실 가해자는 이를 가장 두려워합니다. 내 행동에 책임이 있다는 걸 가해자가 느끼게 하는 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책임감 있는 존재라는 걸 알려주는 겁니다."

박숙영 회복적생활교육센터장

 

특히 피해자가 트라우마에서 회복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가해자에게 공감받는 것'이기에, 회복적 정의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만나게 해서 대화시킨다. 서로가 서로를 인격체로 인식시키고, 감정이 있는 존재임을 체감시키고, 피해자의 고통을 가해자가 느꼈을 때 비로소 가해자는 피해자에 대한 공감을 회복하여 진실한 반성과 사죄가 가능하게 된다.

 

가해자가 안하무인한 태도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폭력 현장에서도 피해자를 무시했는데, 자리를 마련해준다고 해서 그게 가능할 것이냐는 물음이다. 우선, 폭력 현장에서는 피해자가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한다. 목소리를 내면 가해자가 불편해져서 입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가해자는 피해자의 고통을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피해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면, 그리고 가해자가 오롯이 피해자의 말을 듣는 시간을 갖게 한다면, 가해자는 그토록 외면하려고 입을 막아왔던 피해자의 고통을 직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때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이 회복적 정의이다.

 

만약 가해자가 그래도 고통을 무시한다면, 이때는 가해자가 감정 접촉이 안 되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한다. 감정 접촉이란 쉽게 말해서 "내 감정을 내가 아는 것"을 말한다. 피해자의 고통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을 보고 덩달아 고통스러운 나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감정을 자각시키기 위해 가해자 상담이 들어간다.

 

여기까지 온 후에야 처벌을 논할 수 있다. 이 이전 단계에서, "저 사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처벌을 받아봤자 하나마나다. 처벌은 필수, 목적이 아니라 '선택'이며, 가해자가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피해자가 충분히 위로를 받았고 다른 방식으로 가해자가 죄의 무거움을 깨달았다면, 때로는 기꺼이 처벌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이것이 온정주의나 용서, 화해를 추구하는 정의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용서와 화해는 피해자의 몫이며, 정의가 제안, 추구, 목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만인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 정의관을 택하는 것이지, 가해자에게 온정을 베푼다고 해석하는 것도 그다지 맞지 않는다.

 

2012년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학교 현장에서 회복적 정의는 이상주의자들의 뜬구름 잡기로만 취급되었다. 그러나 2018년도에 와서는 교육감이 너도나도 회복적 정의를 외칠 만큼 매우 잘 기능하는 교육론이 되었다.

 

다만 일각에서는 각 교육지원청의 행정심판 인력만 증원되고 누가 더 센 변호사를 데려오냐의 문제만 부각된다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어록

 

 

정의란 권력의 이익을 위하는 행위이다.

 

트라시마코스

 

정의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소크라테스

 

정의란 각자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받는 것이다.

 

정의는 사회의 질서이다.

 

정의는 단순히 진실을 말하고, 받은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의는 그 안에 분노를 지닌다. 정의에서 나오는 분노는 진보의 한 요소가 된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피레네 산맥 이쪽에서의 정의는 저쪽에서의 불의다.

 

블레즈 파스칼

 

세상의 통치자들이여, 정의를 사랑하여라.

정의는 죽지 않는다.

 

지혜서 1장 1절, 15절

 

정의에 복종하는 것은 옳고 더 강한 것에 복종하는 것은 필연이다.

힘 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힘 없는 정의는 반대에 부딪힌다. 왜냐하면 사악한 자들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정의 없는 힘은 규탄 받는다. 그러므로 정의와 힘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정의가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의로워야 한다.

정의는 논란의 대상이 되지만 힘은 매우 용이하게 식별되고 논란의 여지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의에 힘을 부여할 수가 없었다. 힘이 정의에 반대하고 그것을 불의라고 말하며 또 정의는 바로 자기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은 정의를 강하게 할 수 없었으므로 강한 것을 정의로 만들었다.

 

블레즈 파스칼, <팡세>, 192(298)

 

정의란 각자에게 그의 권리를 분배하는 부단하고도 항구적인 의지이다.

 

울피아누스(Ulpianus)

 

정의란 급류나 군대로도 무너트릴 수 없는 산꼭대기에 세운 무적의 요새이다.

 

조지프 애디슨

 

정의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을 소유하고 자신에게 어울리도록 행위하는 일이다.

힘이 정의이며 재판은 더 강한 자들의 사리라고 나는 선언한다.

 

플라톤

 

어느 곳의 불의는 모든 곳의 정의에 대한 위협이다.

 

마틴 루터 킹

 

정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정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구약성서> 이사야서 32.117

 

정의는 말이 없고, 보이지도 않지만 그대가 잠자코 걸어가며 누워 있는 모습을 지켜본다. 정의는 그대의 진로를 가르지르기도, 때론 늦추기도 하며, 끊임없이 그대를 따라다닌다.

 

아이스퀼로스

 

사상 체계의 제 1덕목을 진리라고 한다면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 1덕목이다.

 

존 롤스

 

나는 항상 가혹한 정의보다는 자비가 더 큰 결실을 맺는다고 믿는다.

 

에이브러햄 링컨

 

세상이 망할지라도 정의를 행하라.

 

페르디난트 1세

 

 

 

대중문화에서의 정의

 

거의 모든 예술 작품에서 주인공을 정의롭다고 느끼게 만드는 장치를 사용하는데, 이는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만드는 장치일 뿐 실제로는 주인공의 행동이 공공선을 실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령 아르센 뤼팽, 임꺽정, 배트맨 등이 정의롭게 그려지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에는 사적제재를 일삼는 범죄자로 볼 수 있다. 혼돈 선에 속하는 예시다.

 

대중문화에서는 원피스를 예로 들 수 있다. 주인공 집단인 밀짚모자 해적단을 예시로 들자면 해적들의 특징인 약탈이나 민간인 습격도 안하고 심지어 작은 마을부터 거대한 국가까지 동료나 친구와 관련된 문제라면 어떤 위기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와주는 등. 다른 해적단에 비해 천사나 영웅처럼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을 기준으로 보면 여타의 해적들처럼 해군들을 조지고 다니는 악당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작품이 진행되면서 주인공 측이 절대선이 아님을 보여주면서 소년만화치고는 독특한 경우가 되었다. 특히 임펠 다운에서 의형제를 구하려다가 흉악 범죄자들이 줄줄이 탈옥하게 된 것은 큰 병크다.

 

그 밖에도 주인공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지만 선하게 그려지는 모든 작품들도 이에 해당된다. 때문에 창작물에서의 정의는 실제보다 더욱 상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에는 대놓고 정의가 아닌 인물을 주인공으로 두어 부조리극의 느낌을 내는 경우도 많고, 피카레스크라는 장르도 생겼다. 브레이킹 배드와 데스노트가 대표적.

 

피카레스크물이 아닐 경우, 주인공 이외에 자신을 정의라 칭하는 자는 대체로 독선, 민폐쟁이, 위선자라는 클리셰가 있다.

 

대부분의 주인공들이 가지는 신념의 기반. 신념이라고 해서 거창한 거 같지만 서브컬처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주인공들은 사회제도나 분배 같은 것들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라 약자를 폭력으로 유린하지 말아라,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말 것을 주장하는 데서 그친다.

 

사실 정의로운 주인공이라고 해서 정의의 편으로 나와서 악당을 물리치며 "정의는 승리한다"라고 외치는 막연한 이미지를 떠올리기 쉬우나, 대부분의 주인공은 자신을 정의라고 칭하지 않는다. 이는 그러한 행동이 자기 자신의 얼굴을 금칠하는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선한 인물이 선행을 하면서 "나야말로 천사지.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선한 거 같다."라고 자화자찬하는 경우가 없는 것처럼 생각 있는 창작자라면 정의로운 일을 해도 자기가 정의라고 자화자찬하는 주인공은 만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정의라고 주장하는 대신에 주인공은 작중에서 더 간결하며 실천적인 행동을 하는데,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에 맞서 약자를 보호하는 행동이 대표적이다. 사실 열혈형 주인공 중 상당수도 정의의 편에 해당하는 주인공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요즘은 이에 반해 다크 히어로 같은 소시민형 주인공이 많이 나오는 추센데 이는 히어로에 대한 반감이라기보다는 정의의 편인 주인공이 범람하면서 그러한 유형의 스토리가 식상해지면서 주인공의 유형이 다양화된 것이 이유일 것이다.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정의의 편인 주인공 역시 큰 인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는 히어로 개인의 법 정신 때문에 악역에게 직접 심판을 가하지 않고 법에 의한 심판에 의존하는 것에 답답함에 직접 악당에게 폭력으로 응징하는 다크 히어로에게 매력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정의란 이름으로 비열하거나 잔혹한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최종적인 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원피스의 해군본부, CP9 등) 또는 그들에게 대립하여 '이긴 자가 정의다. 정의를 주장하는 건 멍청하다' 라는 주장을 하는 인물들도 나오는데 이를 기존의 서브컬처에서 말하는 정의를 비판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기존의 주인공들이 말하는 정의, 약자의 보호는 개인의 기본권 보호에 가깝다. 이는 사회계약과 관련된 부분이기에 이를 비판하려면 사회를 부정하고, 사회란 순수하게 약육강식을 추구하는 곳이라고 규정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상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만도 아니다.

 

또한 이긴 자가 정의가 된다는 주장은, 세상이 승자와 패자만으로 양분되는 것도 아니므로 현실과도 어긋난다.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반역"이라지만 쿠데타로 권력자가 되어도 타국의 눈엔 그냥 군벌이거나 독재자일 뿐이다. 인도인 700만 아사를 일으킨 윈스턴 처칠은 왜 아직도 영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가? 아돌프 히틀러가 패배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범죄자로 낙인이 찍혔을까? 물론 정말로 세계를 정복했다면 한동안은 이북의 독재자처럼 영웅시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정권이 과연 얼마나 유지될까? 대표적인 예로 어릴 때 자주 접했던 why 역사책에서 나치는 악, 미국은 선이라는 뉘앙스로 나온다. 물론 어디까지나 표면상으로만. 실상 일부 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하면 미국이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안다. 이기는 게 정의라는 말은 표면상에서나 성립되는 셈이다.

 

다만 이와 비슷하게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학살은 여지껏 사람들의 인식 속 멀리 벗어나 있던 주제였고, 2010년에 들어서야 미국 정부의 사과와 잘못을 인정받았다. 한때는 할리우드 같은 대형 미디어들도 역사적 왜곡에 동참하였다.

 

사실 미국이 지금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눈에 안 띄는 거지 미국도 더러운 일 엄청나게 한다. 피델 카스트로는 암살 시도만 수 백 번이었고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마음에 안 든다고 쿠데타를 지원하고 피노체트가 사람들을 학살하는 걸 방조한다든지 아이티의 대통령이 반미 노선이라고 경쟁자에게 대선 자금을 미국 대선 자금을 한참 뛰어넘는 양으로 퍼주고 그래도 선거에서 지자 그냥 쿠데타를 일으켜서 쫓아냈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미국이 패권을 잡고 있어서 보도도 안 되고 아예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시대가 지나면 진실이 밝혀진다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괜히 놈 촘스키가 미국 대통령들이 재판 받으면 사형 안 받을 사람 없다고 까는 게 아니다.

 

정의는 주로 배틀물이나 슈퍼히어로 코믹스에서 시각과 실천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대표적으로 슈퍼맨에겐 정의는 헌신과 어둠 속을 비춰주는 등불이며, 배트맨에겐 정의는 폭력이며 죄의 대가를 공정히 판단하는 천칭이다.

 

이러한 대립은 장갑악귀 무라마사에서도 주요 테마로 등장한다. 미나토 카게아키와 아야네 이치죠우는 정의에 대한 관점 때문에 대립하게 된다. 전자에게 정의는 분쟁의 근원이며, 오만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쌍쇄로 독선에 빠지지 않게 하는데 집착하는데 비해 후자에게 정의는 사악을 끊는 것,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에게 응징을 가하는 것이다.

 

또한 정의가 독선이라는 관점은 다나카 요시키의 작품인 아르슬란 전기에서 잘 드러난다. 이상가라 할 수 있는 나르사스는 정의는 유일하지 않고, 하늘의 별 만큼이나 다양하다고 말하며, 음모가인 자하크의 추종자의 스승은 정의는 자신 이외의 존재를 악으로 정할 때 성립된다고 말한다.

 

정의가 독선이라는 관점은 미즈카미 사토시의 작품인 플래닛 위드에서도 주요 테마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정의구현을 명목으로 하여 자신이 악으로 규정한 세력은 하나도 남김없이 철저하게 섬멸하면서 악에 대한 징벌이라는 미명 아래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는 악역을 묘사하면서, 정의가 과연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작품에서 정의는 작품 내에서 벌어지는 여러 비극의 씨앗으로서 그려진다. 또한 이렇게 정의가 독선이며 비극의 씨앗이라는 관점 이외에도, 이 작품에서는 각각의 등장인물들의 정의관을 통해 정의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이 나타난다.

 

김성한의 단편소설 <바비도>에서 "정의는 권력의 버섯이다"라는 말이 잠깐 언급된다.

 

피를 마시는 새에서는 정의의 가장 간단한 정의는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하는 것이라 한다.

 

슈타인즈 게이트의 후속작 첫 에피소드인 '주지선상의 지킬'에서는 오카베 린타로가 '정의의 편' 알카파맨(...)이라는 괴악한 히어로 복장을 하고 정의의 편인 척 한다. 능력 따위는 없지만 타임리프를 써서 결과를 바꾸면서 '정의의 집행자'를 연기하는데, 여기서 징벌적인 정의의 모순점들이 드러난다.

 

순서를 보자면... '텐노지 나에'가 원하는 게임 소프트를 아침 일찍 판매하는데, 어떤 중2병 환자들이 새치기하고 다 털어간다. 타임리프해서 다시 원래대로 되돌린 뒤 그들을 쫓아내는데, 쫓아내고 보니 그들은 일일알바로 사재기 알바에 가담했던 것. 알파카맨 덕분에 그들은 돈이 없고, 그래서 그들은 무전취식을 해야만 했다. 무전취식하면서 스턴건으로 오카베 린타로의 지인을 피해 입혔는데, 그것을 용납 못하고 또 타임리프해서 그들을 막았다.

 

막은 뒤에 그들 역시 불쌍한 입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재기 그 자체를 엿먹이면서 그 중2병 환자들의 알바비는 얻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사재기 한 사람들 역시 '라운더'라는 어두운 조직의 상납금을 바쳐야하고, 안 그러면 목숨이 위험했던 것. 덕분에 오카베 린타로의 지인이 사재기의 원흉이어서 오카베 린타로는 자신의 지인의 자살을 알게 된다. 누군가를 벌하면서 그 누군가 역시 피해자가 되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준다. '정의'의 또 다른 반대편이 '악'이 아닌 '정의'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정의에 대한 관점은 아무래도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부분이 있고, 이러한 정의관의 차이는 역시 나라마다 차이가 있는 선악관과도 연계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정서적으로 권선징악이 그다지 중시되지 않아서(때로는 권악징선이 보다 부각되기도 한다) 선과 악도 그저 시각의 차이일 뿐이라는 생각이 통용되고 있고 정의에 대해서도 정의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불의나 악이 아닌 또 다른 정의라는 인식이 있지만, 반면 한국에서는 권선징악을 중시하는 정서가 있으며 정의에 대해서도 정의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또 다른 정의가 아닌 그저 불의 내지는 악일 뿐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당연히 이러한 나라마다의 시각차는 예술 작품에도 반영되는데, 예를 들어 악역이 미화되는 것에 대한 한일 양국 간의 시각차도 상당 부분이 여기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선악을 보는 관점이 다르고, 그 영향으로 정의에 대한 관점도 다르기 때문.

 

이러한 정의관의 차이는 도덕적인 논쟁에 관련한 나라 간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성리학의 영향으로 인해서 오직 하나의 완전무결한 절대선만이 대접받는 극단적인 선악 이분법에 근거하여 사회가 형성되어 있기에 각각의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이 얼마나 도덕적인지를 끊임없이 강조하여야 하고 동시에 자신의 경쟁상대의 도덕적 결함을 들춰내어 경쟁에서 승리해야 하기에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 체념하지 않고 극복해낼 수 있지만 동시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다를 바 없는 양상을 보이는 끝없는 투쟁 속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던져 넣는 사회가 되고 있기도 한 한국 사회와,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단지 체념하고 넘어가려 하는 경향이 짙어 부정부패나 각종 사회적 병폐에 대해서도 눈감는 경우가 적지 않은 일본 사회 사이에는 자연히 정의관이 서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기질을 대조하면서 일본인들은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자신에게만 몰입하는 '오타쿠'가 되기 쉬운 기질이 있어 사회 상층부의 부도덕성에 대해서도 비판을 별로 하지 않지만 한국인들은 거침없이 사회 상층부의 부도덕성을 비판한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는데, 한일 양국 간의 정의관의 차이는 이러한 양국의 사회적 차이에서 어느 정도 기원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일본에서도 초인 고교생들은 이세계에서도 여유롭게 살아가나 봅니다!와 같이 정의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또 다른 정의가 아닌 악일 뿐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작품도 있긴 하지만, 해당 작품의 경우에는 '왜냐면 우리가 정의고 너희가 악이기 때문이다'라는 내로남불스러운 논지로 그런 주장을 하는 바람에 오히려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주장의 근거로 내세운 논지가 지나치게 독선적이었기 때문에, 이 작품의 극단적인 정의관과 선악관은 권선징악을 중요시하는 한국에서조차도 강한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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