⑴새로운 체제
노르만인의 영국 정복이 일어난 지 10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영국 전역은 윌리엄의 확고한 통치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영국을 지배해 오던 앵글로색슨 귀족들 대부분은 헤이스팅스 전투와 그 후에 일어난 일련의 반란이 실패하면서 자연스럽게 제거되었다. 그리고 생존한 앵글로색슨 귀족들은 윌리엄에게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양도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런 결과로 윌리엄은 자연스럽게 영국의 왕권을 접수하게 되었다.
앵글로색슨 귀족들이나 영국민들이 침략자이며 정복자인 윌리엄의 지배를 이처럼 손쉽게 받아들인 이유는 간단하였다. 그것은 수세기 동안 영국이 경험한 어떤 경우보다도 더 단결과 평화와 안정을 영국에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이 영국을 통치하면서 근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오던 바이킹의 침략이 멈추었고, 지방끼리 일어났던 내분도 사라졌다. 그리고 웨일스 변경에 성을 쌓아 자신의 심복을 파견하여 이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윌리엄은 엄격하고 냉혹한 통치자였지만 쓸데없이 피를 부르는 도살자는 아니었다.
윌리엄은 영국을 점령한 다음 자신을 따라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신하들에게 자신을 지지해 준 대가로 성직과 고위직을 하사하였다. 윌리엄은 대관식이 있었던 1066년 12월 25일의 소동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통치기반이 약간의 실수에 의해서 흔들리거나 붕괴될 수 있음을 절실히 경험하였다. 이 경험은 윌리엄에게 영국인들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이 결과로 인해 영국의 성직자와 귀족들 그리고 수도원의 필사자들 까지도 노르만인으로 교체하였던 것이다.
윌리엄의 이런 조치는 기존의 앵글로색슨인들에게는 모욕이며 굴욕이었다. 사실 윌리엄이 영국을 침공하기 전까지는 이런 과격한 조치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헤이스팅스의 전투나 스템포드 다리 전투나 귀족들의 대반란Great Rebellion1068년부터 1072년까지 발생했던 일련의 반란사건. 1068년 전사한 해롤드 왕의 서자인 에드가 에셜링의 반란을 시작으로 윌리엄의 통치에 반반한 사건이다. 이 반란은 윌리엄의 통치를 정말로 위태롭게 했기 때문에 진압도 잔인하게 진행되었다. 이 결과 험버강과 티강 사이의 Harrying of the North는 근 100여 년 간 황폐한 상태로 남아있게 되었다. 을 경험한 윌리엄은 관용적인 생각을 버리고 철저한 노르만 화를 진행시켰다. 윌리엄은 이 반란을 제압한 뒤에 두 번 다시 잉글랜드를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통치에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요인들을 제거하였다. 역사가들은 윌리엄이 관용을 모르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복수만큼은 무자비했다는 데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
윌리엄은 집권한 뒤에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영국에 남아있던 앵글로색슨의 지도자들을 후원하는 데는 너그러웠다. 하지만 자신이 신뢰했던 인물이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경우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복수하였다. 왈데오프 Waltheof 백작은 1075년 노포크의 백작 랄프와 헤러포드의 백작 로저와 작당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윌리엄의 추종자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왈데오프는 노르망디로 건너가 윌리엄에게 선처를 호소하였다. 윌리엄은 처음에는 이를 용서할 생각이었지만 왈데오프가 데인족을 불러들인 것을 알고 윌리엄은 왈데오프가 잉글랜드로 돌아간 다음 체포하도록 명령하였다. 다행히도 데인족이 영국에 늦게 도착하여 큰 피해를 입히지 않았지만 윌리엄에게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윌리엄은 이를 잊지 않고 다음 해에 왈데오프를 교수형에 처하였다.
영국을 점령한 집단은 윌리엄이 처음은 아니었다. 켈트족의 땅을 앵글족과 색슨족이 탈취하였고, 후에는 로마인들이 점령하였다. 그리고 로마인들이 물러간 다음에는 바이킹의 일파인 덴마크의 데인족이 영국의 남쪽을 점령하여 항구적인 정착지로 삼았다. 이들 데인족은 영국 역사에 앵글족과 색슨족에 이어 두 번째로 정착한 침입 종족이었다. 데인족은 영국을 점령한 다음 전면적인 개혁을 택하기보다는 세금 데인 겔트 Danegeld라고 한다. 을 거두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데인족은 영국의 기본구조를 바꾸는 데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윌리엄은 데인족과는 달리 전면적인 개편을 원하였다. 이 결과 윌리엄의 통치 말기에 이르면 영국 사회는 전통적인 앵글로색슨의 사회에서 노르만의 사회로 바뀌게 된다. 앵글로색슨인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어떤 위치에 오르지 못하게 되고 대륙의 철저한 봉건제도가 이식되게 된다. 이 결과 노르만인으로 구성된 성직자와 귀족이 지배층을 이루고 앵글로색슨인들이 농민으로 대표되는 피지배층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노르만의 지배자들은 앵글로색슨인들을 무자비하게 다스렸다.
다음은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한 다음 제정한 법률의 한 부분이다. 이 부분을 보면 영국인과 노르만인-프랑스인으로 표기된다-이 얼마나 다른 법률체계에서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만약 프랑스 인이 위증, 모살, 절도, 살인, “ran"-잉글랜드에서 종종 강탈로 불리는-으로 잉글랜드 인을 고발하면 거부할 수 없다. 잉글랜드 인은 결투 재판이나 뜨거운 쇠를 이용한 신성 재판 가운데서 하나를 요구하여 자신을 변호할 수 있다. 그러나 잉글랜드 인이 몸이 허약하다면 그를 대신할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어느 한쪽이 승리하면 그는 왕에게 40실링을 지불해야 한다. 반대로 잉글랜드 인이 프랑스 인을 고발하면 결투 재판이나 신성 재판으로 그의 고발이 고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프랑스 인은 그 자신이 유효한 선서에 의하여 그 스스로 죄가 없음을 선언해야 한다-법률 제6조.
위의 법령에서 보면 영국인이 노르만인에게 잘못한 경우에는 바로 재판에 회부되지만 노르만인이 영국인에게 가해를 가했을 때는 지금으로 말하면 구속적부심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 다음 재판에 회부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법률적 차별성은 도읍 town과 자치도시 borough에서의 생활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노르만 상인들은 유리한 위치에서 앵글로색슨의 기존 상인들과 경쟁할 수 있었다. 게다가 새로 임명된 노르만인 영주들은 대륙의 관습을 그대로 영국에 적용하려 하였기 때문에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마찰이 불가피하였다. 그리고 윌리엄은 법률에서 1066년 이전에 노르망디에서 건너와 영국에 거주한 프랑스인과 이후의 프랑스인을 엄격히 구분하였다.
짐의 일가친척인 에드워드 왕 치세에 잉글랜드 관습을 공유한 모든 프랑스인들은 영국의 법에 따라 ‘sort and lot'古프랑스어 escot, 古영어 sceot에서 유래된 단어로 지불 혹은 몫을 의미한다.으로 불리는 세금을 납부해야만 한다-법률 제4조.
즉 윌리엄의 정복 이전에 영국에 정착한 프랑스인들은 피정복자 취급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윌리엄은 노르만인에 의한 영국의 지배를 공고히 하고자 한 것을 알 수 있다.
⑵둠즈데이 북 Domesday Book둠즈데이 Domesday라는 용어 때문에 사람들은 이 책을 최후의 종말과 연관을 짓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지구의 종말과는 전혀 관계없는 책이다. 2권으로 이루어진 토지대장이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웨스터민스터 수도원의 둠즈데이라는 이름의 방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웨스터민스터 북이란 이름으로도 불린다. 과 봉건제도封建制度
영국을 점령한 윌리엄의 가장 큰 업적은 영국과 웨일스 점령지에 대한 방대한 토지 및 인구 조사였다. 이는 영국의 모든 목초지와 가축의 수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기록한 토지대장이었다. 윌리엄은 이를 기초로 하여 조세징수租稅徵收에 관한 법적인 권한을 명확하고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다. 사실 윌리엄의 이런 의도는 적중하였지만 신하들과 농민들에게는 세금에 대한 과중한 부담을 지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윌리엄의 통치가 에드워드의 통치 때 보다 가혹하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윌리엄은 조세제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정해진 다음에야 영국에 대륙의 봉건제도를 확고하게 정착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봉건제도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자기보다 바로 상위에 있는 사람에게 책임을 지는 구조인 것이다. 왕으로부터 시작하여 위계의 최하에 위치한 농민에 이르기까지 공고한 질서는 토지를 기본으로 형성된 것이다. 봉건제도 하에서 왕은 실질적인 왕국의 가장 큰 토지 보유자인 셈이다. 이 왕이 자신의 신하들에게 토지를 나눠주어 최하층의 농민에게까지 왕의 토지가 분배되었다. 이 토지는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충성이 보장된다면 세습적인 것이었다. 윌리엄이 영국을 점령했을 때 농민은 비자 유민이 아니었다. 하지만 봉건제도를 통해 농민들의 토지가 귀족의 토지에 묶여있게 됨으로써 점차 비자 유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둠즈데이 북으로 인해 형성된 봉건제도는 또 다른 차이를 드러내게 되었다. 이전까지 토지는 농민의 것이었지만 봉건제도로 인해 토지는 그 지역 통치자의 소유로 변하면서 농민들 간의 자유로운 이동의 기회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 결과 영국에서 앵글로색슨인들이 사용하는 영어으 지역 간 편차가 커지게 되었다. 영어를 구사하는 농민들은 봉건제도 하에서 장원에 묶이게 되면서 타 지역 농민들과의 의견교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게 되었다. 농민이 토지에 묶이게 되면서 지역적인 차이를 조정할 수 있는 기회도 사라짐으로써 윌리엄의 정복 이후 영어 방언의 차이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노르만 왕가의 지배자들은 영국을 정복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인이었다. 실제로 이들 영국의 왕들은 프랑스인 아내를 맞이하였고, 궁중의 용어 역시 프랑스어였다. 윌리엄 이후 윌리엄 루프스에서부터 헨리 4세에 이르기까지 역대 영국의 왕들은 그들의 기반인 노르망디를 벗어나지 않았다. 윌리엄 루프스와 헨리 1세는 통치기간의 절반 이상을 헨리 2세는 2/3를 프랑스에서 보냈고 사자왕 리처드는 몇 달만을 영국에 머물렀을 뿐이다. 헨리 4세에 이르러서야 영국은 겨우 영어를 사용할 줄 아는 자신들의 왕을 갖게 되었다. 왕들은 헨리 4세에 이르기까지 영어를 거의 한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영국의 궁정은 프랑스어가 사용되는 궁정이었다. 그리고
왕들은 런던 London보다는 루앙 Rouen이 더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잉글랜드 왕국의 중심지는 런던이었지만, 노르망디 공국의 중심지는 루앙이었다. 그러나 영국 왕들에게 루앙은 영원한 정신적인 고향이었다.
노르만의 영국 정복으로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은 교회였다. 윌리엄은 정복한 직후 발표한 법령에서 교회의 권위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믿음을 기반으로 앵글로색슨인과 노르만인 사이의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였다.
1. 제일 먼저 짐은 왕국 전체에서 신을 공경하고 온전한 그리스도교 믿음이 침해되지 않도록 지킬 것이며, 잉글랜드인과 노르만인 사이에 평화와 안전이 유지되기를 원한다-법률 제1조.
그러나 윌리엄은 영국을 정복하기 전에 로마로 사절을 보내 교황의 지지를 받았다. 이때 로마는 윌리엄을 지지하는 대가로 영국 교회의 개혁을 원하였다. 로마에서는 윌리엄 이전에 서임敍任된 캔터베리의 대주교 스티겐드Stigand, archbishop of Canterbury1047년 엘람의 주교로 서임되었다. 이후 윈체스터의 주교를 거쳐 1052년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1070년 윌리엄에 의해 면직되었다. 를 교체하는 것이었다. 당시 대륙에서는 교회 개혁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기에 영국교회 역시 이 개혁을 외면할 이유가 없었다. 영국교회의 부패와 독직瀆職으로 스티겐드는 윌리엄에 의해 면직되었다. 윌리엄은 스티겐드의 후임으로 파비아 출신의 란 프랑크 Lanfranc1045년 노르망디의 벡 Vec 수도원에 있을 당시 윌리엄과 친분관계를 유지한 관계로 윌리엄이 영국의 왕이 되면서 영국교회의 개혁을 위해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윌리엄의 총애를 받으며 교회 개혁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를 임명하였다. 란 프랑크의 교회 개혁은 세속권世俗權과 교권敎權의 갈등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 갈등은 윌리엄 이후 윌리엄 루프스와 헨리 2세 때에 왕과 대주교 간의 정면충돌로 나타났다. 안셀름과 토마스 베킷을 참조할 것. 윌리엄 치하에서 앵글로색슨인이 주교나 대주교로 임명되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노르만인의 영국 정복으로 옛 체제는 대대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앵글로색슨적인 것은 노르 만적인 것으로 대치되었고, 법률도 노르 만법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대륙의 봉건제도가 영국에 본격적으로 이식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와중에도 일반 농민들과 피정복민인 앵글로색슨인들이 사용하는 영어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물론 윌리엄이 죽을 무렵 앵글로색슨인들이 사용하는 영어는 알프레드 대왕 시대의 영어와는 전혀 다른 영어였다. 데인로 Danelaw지역 험버 강 이남부터 웰런드 강 이북의 동 머시아와 이스트 앵글리아 지역으로 영국에 침입하여 정착한 데인족의 관습법이 유지된 지역을 말한다. 에서는 스칸디나비아 어가 영어에 섞였고 노르만 정복 이후에는 프랑스어가 들어오게 되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영어는 피정복민의 언어로 프랑스어는 정복자의 언어로 인식되었다. 이런 상태는 초서 Geoffrey Chaucer에 의해 영어가 자부심을 갖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각 주 shires에서는 영어가 일반 민중에 의해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
⑶노르만 정복 이후의 언어 문제
1066년 이후 프랑스에 위치한 노르망디 공국公國의 노르망디 공이 영국을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프랑스화 된 북방인이 앵글로색슨의 영국을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이 결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은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배계급은 토지와 교회 그리고 왕국의 고위직을 독점하게 되면서 프랑스어는 자연스럽게 지배계급의 언어로 인식되었다. 반면에 앵글로색슨이 사용하던 영어는 피지배계급의 언어로 남게 되었다.
지배계급인 노르만인들이 사용한 프랑스어 역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노르만인은 원래 노르웨이에서 온 노르만 계통의 인종이었다. 이들이 노르망디 지방에 거주하면서 프랑스어를 사용하였지만 이 프랑스어 역시 정통 프랑스어인 일 드 프랑스어와는 다른 언어였다. 그럼에도 영어는 이들 노르만인들이 사용하는 프랑스어의 영향을 깊게 받게 된다. 프랑스어의 어휘와 어법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고, 간접적으로는 통사 구조를 받아들여 앵글로색슨 시대의 영어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들 띠게 된다. 만약 노르만인들이 영국을 점령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영어는 알프레드 왕 시대의 영어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고, 영어는 오늘날 사용되는 현대 독일어와 더 가깝게 변형되었을 것이다. 즉 베어울프를 쓰기 위해 사용한 영어와 더 가깝게 되었을 것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영국을 정복한 노르만인은 수천 명 밖에 되지 않은 소수집단이었다. 그럼에도 지배계급의 언어라는 이유로 프랑스어는 영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정복왕 윌리엄이 앵글로색슨의 영국인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정치와 종교의 지도 계급이 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수 천 명의 정복자들이 대다수의 앵글로색슨인들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역사상 이렇게 소수의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이 절대다수의 언어를 쓰는 종족을 완벽하게 통제한 예는 거의 없다. 이 소수의 정복자 집단은 영국의 정치, 종교, 경제, 문화의 각 방면을 완벽하게 지배하였다.
라틴어도 사용되었지만 이 언어는 교회와 대학의 언어였다. 라틴어는 말하는 언어口語가 아니라 인쇄되는 언어였다. 알프레드 대왕 이래 영국에 정착한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노르웨이인들도 자신들의 언어를 데인로 지역에서 사용하였는데 이 언어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노르웨이어는 영어에 흡수되어 영어에 약간의 흔적만을 남겨 놓았다. 그리고 잉글랜드를 벗어난 웨일스나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에서는 영어가 아니라 켈트어가 여전히 다수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런 언어 상황이 윌리엄이 영국을 점령했을 때의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윌리엄 시대에는 영국에서는 이중언어二重言語가 사용되었다. 왕들은 영국인들을 거느리고 있지 않았다. 왕의 주변에는 프랑스화 된 노르만인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왕으로부터 봉토를 수여받은 귀족들은 토착 영국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 결과 봉건귀족들은 자신이 거느린 앵글로색슨 하인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약간의 영어 지식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왕실의 토지관리인과 포고문을 작성하는 관리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이들은 피지배자인 앵글로색슨인들과 접촉하기 위해 일정한 수준의 영어를 알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프랑스어를 영어로 번역하여 포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왕들은 15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헨리 1세를 제외하고는 영국인을 아내로 맞이하지 않았다. 하지만 윌리엄을 따라 영국에 온 귀족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귀족들의 자식들은 프랑스어와 영어를 같이 사용하게 되었다. 게다가 영주의 장원 주변은 온통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귀족의 자녀들은 프랑스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을지 모르지만 유모와 하인은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결과 귀족의 자녀들은 유모와 하인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영어를 습득할 수 있었다. 반대로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지위 상승의 표시로 프랑스어를 사용하였다. 언어학적으로 정복자의 언어는 세련됨을 피정복자의 언어는 야만성을 의미한다.
영국에서 이런 언어의 고착현상은 흑사병과 백년전쟁이 아니었으면 해소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흑사병으로 인해 영국의 인구는 3분의 1이 감소하였고, 이 결과 영국은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장인匠人과 공인工人처럼 기술을 가지고 있는 계층은 이득을 보게 되었다. 이들은 하층계급의 위상을 높이는데 일조하였다. 이들이 사용한 언어는 영어였기에 공인과 장인의 위세가 높을수록 영어의 위상 또한 높아졌던 것이다. 그리고 흑사병으로 인해 수많은 교사와 학자들이 사망하였다. 이는 고급언어인 라틴어와 지배층의 언어인 프랑스어에 정통한 사람들이 감소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결과 학교에서는 라틴어와 프랑스어 대신 영어로 수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백년전쟁으로 인해 프랑스에 있던 영지 holding를 상실한 귀족들은 영국으로 철수한 뒤 더 이상 프랑스어를 배워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이 결과 지배층에서도 프랑스어가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에드워드 2세 때는 왕의 칙령을 선포할 때 프랑스어로 낭독한 다음 영어로 설명하도록 하였다. 그리나 에드워드 3세 때는 의회를 개원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의장이 영어로만 개회사를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영국에서 모든 소송은 영어로 진행할 것을 규정한 변호 법 Statutes of Pleading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헨리 4세에 이르러서는 헨리 볼링 블로크가 왕위를 찬탈하고 이를 수락하는 연설을 할 때 영어를 사용한 이후 영국에서는 영어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사실 백년전쟁 때만 해도 프랑스어는 영국 귀족들이 꼭 배워야 하는 제2의 언어였다. 하지만 백년전쟁 기간과 그 후에 프랑스어에 대한 인식이 급락하면서 프랑스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마저도 영어를 배워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영어는 데인로 지역에서 사용되던 노르웨이어도 대체하였고, 점차적으로는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와 콘월에서 사용되는 캘트어 마저도 대체하게 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런던 방언에 기초한 표준 영어가 출현하게 된다. 런던의 방언이 표준 영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의 가장 큰 항구도시이며 상업의 중심지였다. 이 결과 런던의 영어는 큰 위세를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왕실이 런던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런던의 방언이 표준 영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5세기경에는 인쇄업자들이 런던 방언으로 책을 출판함으로써 런던 영어가 전국으로 퍼져나가는데 일조하였다. 이제 영어의 시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⑷두려움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영국을 침공하여 정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바이외의 테피스트리의 첫 부분에 의미 심상한 현상이 묘사되어 있다. 하늘에서 커다란 불덩어리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핼리혜성 1P/Halley이다. 이 혜성이 유명하게 된 것은 종말론적 사상으로 무장된 천년왕국의 재림이란 의미 때문이기도 하였다. 혜성이 출현하기 이미 30여 년 전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기근은 인간의 이런 두려움을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3년 동안 비가 내려 수확과 파종을 할 수 없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다. 이때 사람들은 더 이상 잡아먹을 것이 없자 죽은 사람의 시체를 파내어 먹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하늘의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아마도 이런 자연현상은 신의 천벌로 생각하였다는 점이다. 이 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회개와 참회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윌리엄이 영국을 점령하고 전국적으로 토지조사를 실시하자 사람들은 구약 성경의 한 장면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런 조사를 왕의 주인인 신에 대한 불충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조사를 통해 앞으로 다가올 고통과 고난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사실 이 당시 사람들에게 토지는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 토지는 당시 농민들을 먹여 살리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농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잉여剩餘는 너무 적었고, 이를 운반할 운송수단 또한 너무 빈약했다. 그러므로 농민들의 삶은 어느 지역을 가보더라도 최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이 당시 유럽 전역은 마자르, 바이킹, 사라센 등과 같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치안이 부재였고 농토는 황폐화된 상태였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지켜줄 강력한 권력을 원하였다. 하지만 그 권력이 나타나기까지는 좀 더 기다려야만 했다. 이러한 고통에 교회와 세속의 군주들은 어려운 농민들의 삶에 고통을 가중시켰다. 영국의 농민들 역시 윌리엄이 영국을 점령했을 때 이것이 자신들에게 닥쳐온 마지막 시련이었으면 했다. 그러나 대대적인 토지조사가 실시되자 피정복민인 앵글로색슨인들은 새로운 위협이 다가오는 것으로 느꼈다.
사실 노르만이 침입하기 전에 영국의 앵글로색슨인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왔다. 이들의 원칙은 간단하였다. 하늘에는 주님이 있고, 땅에는 주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주님이 인간의 삶을 주재하는 착한 주인이었고, 인간은 그 주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념은 땅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실제로 노르만의 침입 이전에 앵글로색슨인의 주인들은 후일 악명을 떨치게 되는 영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거나 요구한 적이 없었다. 여기에 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영주들의 초야권初夜權인데 이것은 사실 과장된 점이 많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러나 간혹 이를 요구하는 지방의 영주들이 있었지만 이 권리는 금전으로 상쇄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르만인들은 달랐다. 이들은 엄격한 봉건제도 아래서 통치의 위계질서를 공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영국을 무자비하게 쥐어짜기 시작하였다. 즉 노르만인들은 앵글로색슨인들의 모든 문화유산을 조직적으로 말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한 예로 앵글로색슨인들의 성당은 모두 재건축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후일 튜더 왕가에 의해 저질러진 가톨릭에서 국교회로의 개종과 수도원 몰수로 인해 그나마 조심스럽게 보존되어 오던 앵글로색슨의 문화적 전통은 완벽하게 해체되었다.
이제 더 이상 목가적인 풍경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노르만인들은 자신들의 무장된 저택에서 노예로 전락한 앵글로색슨인들을 바라보며 통치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주의 저택 아래 앵글로색슨인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이 당시 앵글로색슨인들의 삶을 살펴보려면 엑스터 북 Exeter book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앵글로색슨인들의 수수께끼를 모아놓은 책인데 앵글로색슨인들의 여유와 웃음을 알게 하는 책이다. 다음은 그 책에 나오는 수수께끼이다.
‘나는 이상한 창조물이다. 여자들을 즐겁게 해 주기 때문이다.... 나는 침대에 누우면 무척이나 커지고 우뚝해진다. 아래로는 떨이 덥수룩하다. 때때로 아름다운 소녀, 친구들의 대담한 딸이 나를 감히 움켜쥐려 한다. 불그스름한 내 껍질을 붙들고 내 머리를 잘라 내어 찬방으로 옮겨 놓는다. 그리고 소녀는 나를 꼭 감싸고 있던 삼단 같은 털을 바라보며 우리의 만남을 회상하며, 두 눈이 촉촉이 젖어든다.
공무원 두문자 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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