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정예산
개념
회계연도 개시 전일까지 예산이 의회에서 의결되지 않는 경우에 행정부가 잠정적으로 쓸 수 있는 예산을 잠정예산(暫定豫算)이라고 한다. 예산사전 의결원칙에 따라 의회가 예산을 의결하여 주지 않으면 예산이 성립되지 않아 정부는 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어서, 어떤 나라나 잠정 예산제도를 갖고 있으며, 그 집행의 구체적인 절차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건국 초기에는 가예산(假豫算)이라 하였고 1960년대 초부터는 준예산이라고 한다. 영국에서는 “Vote on Account”, 미국에서는 “Continuing Resolution”이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잠정예산이라고 한다. 잠정예산의 집행에는 제약이 따른다. 전년도에 지출된 예산수준을 넘어서는 안되며, 새로운 사업 또는 항목에 지출해서도 안된다 .
제도화
잠정예산의 구체적인 집행절차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데 그것들을 유형화하면 다음과 같다.
1) 잠정예산과 잠정예산법: 예산이 법인 국가는 잠정예산도 잠정예산법이 되고 예산이 법이 아닌 국가에서는 잠정예산이 된다. 한국과 일본 등 극소수 국가만 잠정예산이고 대부분의 국가는 잠정예산법으로 성립된다. 잠정예산을 갖는 국가는 의회의 의결이 없이 자동적으로 행정부가 잠정예산을 사용할 수 있으나, 잠정예산법을 갖는 국가들은 의회의 의결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다.
2) 잠정예산의 사용기간: 잠정예산의 사용기간이 법으로 정해져 있는 국가도 있고 그렇지 않은 국가도 있다. 한국과 일본 등은 사용기간에 관한 규정이 없고 미국 등은 잠정예산법에 사용기간을 규정하며, 1차잠정예산법 기한이 경과하도록 본예산법이 성립되지 않으면 2차잠정예산법을 제정하여 사용한다.
3) 잠정예산의 정례화: 잠정예산을 매년 정례적으로 사용하는 국가도 있고 정례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국가도 있다. 영국과 북한 등은 매년 수 개월간 정례적으로 사용하나, 한국은 건국 초기에만 사용하였다. 미국은 세출예산법이 13개이고 이것들이 회계연도 개시 전일까지 의회를 모두 통과하는 경우가 드물어 잠정예산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잠정예산을 정례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국가들은 추가경정예산을 자주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
4) 잠정예산마저 성립하지 않을 경우: 회계연도 개시일이 되면 잠정예산을 자동적으로 쓸 수 있는 국가도 있지만 잠정예산법을 갖는 국가들은 그렇지 못하다. 잠정예산법이 발효되려먼 먼저 의회가 잠정예산법안을 의결한 다음 행정부가 법안에 서명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만약 의회가 잠정예산법안을 의결하지 않거나 의결하였다하더라도 행정부가 이에 서명하지 않으면 잠정예산법은 성립되지 못한다.
세계 재정사상 처음으로 잠정예산마저 성립되지 않아서 정부가 휴무하는 엄중한 사태가 미국에서 20세기 말에 여러 번 발생하였다. 1980년대 초 레이건 행정부로부터 20세기 말 클린턴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 연방정부예산은 심각한 적자를 기록하고 있어 대통령과 의회 간, 여당과 야당 간에 예산정책 상의 갈등이 격렬한 시기였다. 연방정부 전체가 예산이 없어서 첫 번째로 휴무하는 사태는 1981년 11월 하순에 일어났다. 1981년 9월 말까지 새해 본 세출예산법안들이 의회를 통과할 수 없게 되자 10월 1일부터 제1차 잠정예산법들로 예산을 집행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잠정예산법들의 시한은 11월 22일까지였는데 22일은 일요일이어서 의회는 주말 휴무 직전에 제2차 잠정예산법안들을 급히 의결하고 레이건 대통령에게 송부하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자신이 요구한 예산액보다 많다는 이유로 다음날에 제2차 잠정예산법안들에 대해 모두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정부기능 마비라는 배수진을 치고, 레이건 대통령은 사회보장예산은 줄일 수 없다는 민주당 지배의 의회와 맞섰던 것이다. 그 결과 월요일인 23일은 예산이 없어서 전 연방정부가 휴무하는 기막힌 사태가 일어났는데, 대통령은 긴급명령권을 발동하여 필수적인 요직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근무하도록 명령하여 정부가 완전히 마비되는 사태를 막았다. 11월 23일에 의회와 대통령은 극적으로 타협을 보아 제2차 잠정예산법안들에 합의함으로써 이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이렇듯 잠정예산마저 성립되지 않아 정부가 휴무하는 사태는 클린턴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5~6차례나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