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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클린 뒤 프레, 자클린의 눈물

Jobs9 2023. 4. 18.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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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클린 뒤 프레

영국의 첼리스트, 대영제국 4등훈장 수훈자(OBE)

뒤 프레(Du Pré)는 대대로 내려오는 아버지의 성을 따른 것인데, 아버지는 물론 모두 순수 영국인이다. 그래서 간혹가다 자클린이 프랑스인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살 수 있다. 5살 때 런던 첼로 학교에 입학해 첼로를 수학하고, 1960년에 들어서는 첼로의 성인이라 일컫는 파블로 카잘스나, 냉전시기인 1966년에는 직접 소련으로 들어가 로스트로포비치를 사사하기도 했다. 당시 내로라하는 첼리스트에게 모두 가르침을 받은 자클린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가 되었다. 

1962년 영국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자클린은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했고, 이것이 평론가와 대중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면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뒤프레 자신을 대표하는 불멸의 레퍼토리가 되었다. 이후 1965년 이 곡을 EMI와 작업하면서, 그는 음반시장계 대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미국 데뷔 무대에서 그는 또 한번 청중을 휘어잡는다. 이 때 66년 새해전에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나 1년 만에 결혼하게 된다. 지휘자와 첼리스트의 결합으로 둘은 협연 공연을 위해 전 세계를 다녔으며, 둘이 연주한 곡은 어떤 곡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1971년, 갑자기 전신의 통증과 이상을 호소하던 자클린은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결국 영국에서 1973년 2월 주빈 메타가 이끄는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끝으로 모든 활동을 정리했고, 며칠 뒤에 뉴욕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과 브람스의 2중 협주곡을 연주하며 세계 투어의 모든 활동을 끝마쳤다. 1975년에는 전신이 마비되었고, 결국 1987년 숨을 거두었다. 

둘의 결혼 생활은 엉망이어서 뒤 프레는 1971년경부터 형부인 크리스토퍼 키퍼 핀지와 내연관계가 되었고, 남편인 바렌보임은 투병중이던 그녀를 버리고 엘레나 바쉬키로바(Elena Bashkirova)라는 피아니스트와 외도했다. 바렌보임은 그녀가 죽자마자 재혼했다는 좋지 못한 추문에 얽히기도 했다. 바렌보임은 엄청난 기억력으로 대부분의 공연을 암보로 소화할 정도의 수재였지만, 가혹한 완벽주의와 인성 문제로 마냥 좋게 보진 못하는 연주가였기 때문. 건강이 악화되던 자클린이 실수가 잦자 바렌보임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녀를 닦달했다고 한다. 그녀는 몸이 아파도 바렌보임에게 사실대로 고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묘비에는 '다니엘 바렌보임이 사랑했던 아내'(Beloved Wife of Daniel Barenboim)라는 묘비명이 적혀 있다. 



자클린의 눈물

 

세상에서 제일 슬픈 음악, 역사상 둘도 없을 만큼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음악 역시 첼로 연주곡이다. 도입부에서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가 중간쯤에 이르러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리는가 싶더니 종반부가 다가오면서 심장이 터져버릴 듯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곡. 프랑스 작곡가 오펜바흐가 만들고, 불운한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를 기리기 위해 독일 첼리스트 베르너 토마스가 연주한 ‘재클린의 눈물’이다. 

장중하다. 시작부터 음 하나하나가 애간장을 녹인다. 오지 않을 사랑을 기다리다 못해 지쳐 쓰러진 것일까? 그대로 돌이 되어버린 듯 일어날 줄 모른다. 슬픔에 무게가 있다면 이보다 더 무겁지는 않으리. 슬픔은 마냥 쓰기만 한 것일까? 달콤한 슬픔이란 것도 있을까? 그렇다면 슬픔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직전 한 모금의 달콤함이라도 맛보고 싶다. 

인생에서 슬픔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눈물, 눈물, 눈물…… 현의 울림은 공중으로 올라가지 않고 눈물이 되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눈물처럼 사랑도 지고 인생도 진다. 시간이 멈추고 침묵이 흐른다. 고요한 통곡. 더는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모두……. 

 

오펜바흐는 독일 쾰른에서 태어났으나 프랑스 파리에서 생애를 보냈다. 파리 음악원에서 첼로 주자로 인정받던 그는 오페라 코미크 극장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프랑스 극장 지휘자가 되었다. 물리학자처럼 벗어진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쓴 그의 외모는 고독이나 슬픔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실제로 그는 유머 넘치는 아름다운 곡을 만들어 명성을 높였고, 마침내 프랑스 오페레타(희극적인 소형 오페라. 희가극 또는 경가극으로 번역)의 창시자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가 작곡한 희가극은 ‘천국과 지옥’, ‘호프만 이야기’ 등 90여 편에 달한다

오펜바흐 생전에 그가 작곡한 ‘재클린의 눈물’은 연주되지 않았다. 훗날 독일의 첼리스트 베르너 토마스가 오펜바흐의 미완성 곡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이 곡의 악보를 발견했다. 그는 이 슬픈 음악을 접한 후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비운의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였다. 그는 그녀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곡 이름을 ‘재클린의 눈물(Jacqueline’s Tears)’이라고 지었다. 그녀가 사망한 지 1년이 지난 1988년, 그러니까 오펜바흐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108년 뒤에야 비로소 이 곡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영국 태생인 재클린은 다섯 살 때부터 런던첼로학교에 입학한 천재였다. 그녀는 1962년 BBC심포니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66년 미국에 진출한 그녀는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현대 음악계의 거장으로 불리는 바렌보임은 몇 차례 내한 연주회를 가진 바 있어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인물이다. 유대인인 바렌보임을 위해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대교로 개종까지 한 재클린은 1967년 그와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다. 슈만과 클라라의 결혼에 비견될 정도로 음악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이들의 사랑은 물불을 가리지 않을 만큼 뜨거웠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도 그녀의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 그녀가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은 것이다. 다발성 경화증은 자가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겨 뇌, 척수, 시신경을 포함한 중추신경계의 신경섬유가 손상을 받는 질환으로 아직 원인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희귀성 질환이다. 20~40세의 유럽계 백인에게 주로 나타나며, 여성의 발병률이 남성의 두 배 이상이다. 진행 과정도 예측이 어렵고, 증상 또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정신적으로도 기억력 장애, 우울증이 발생할 수 있고, 집중력, 이해력, 판단력이 약해지며, 인지장애가 생길 수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첼리스트라는 찬사와 기대를 한 몸에 받던 그녀는 안타깝게도 한창 꽃을 피울 나이에 불치병에 걸려 음악을 포기해야 했다. 아픈 몸으로 무대에 설 경우, 피로감에 쓰러지거나 활을 놓치는 일이 많았지만, 완벽주의자인 남편은 그녀를 혹독하게 몰아붙였다고 한다. 그녀는 결국 1973년 2월에 열린 뉴욕 공연을 끝으로 오랜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근육이 점점 굳어가던 그녀는 척수신경에 손상을 입으면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안면신경 손상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이런 절망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녹음했던 음악을 들으며 살아있음을 느꼈다고 한다. 

병석에 누워있는 동안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갔고, 급기야 남편마저 그녀를 외면했다. 1980년대 초반 바렌보임은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쉬키로바와 내연 관계를 맺기 시작해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그래도 그녀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천부적 재능을 썩힌 채 서서히 죽어가는 육신 앞에서 남편의 외도까지 지켜봐야 했던 그녀의 심정은 외로움과 비통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쓸쓸히 병마와 씨름하던 그녀는 1987년 날 궂은 어느 가을날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요절한 불멸의 첼리스트를 애도하기 위해 각종 영화와 발레 등이 만들어졌다. 

 

"Beloved Wife of Daniel Barenboim(다니엘 바렌보임의 사랑하는 아내)."

그녀의 묘비에 새겨진 글귀다. 재클린은 자신이 투병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싸늘히 외면했던 남편, 심지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며 아이들까지 낳았던 남편, 바렌보임을 지극히 사랑했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은 그녀의 삶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끝까지 그의 아내로 기억되길 원했다. 위대한 음악가이기 전에 남편의 사랑을 갈구했던 한 사람의 여인이었다. 아름다웠던 영국의 장미는 그렇게 짧게 피었다가 사라져 갔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던 그녀를 위해 베르너 토마스는 100여 년 전 오펜바흐가 써두었던 명곡을 찾아내 그녀에게 눈물을 되찾아주었다. 평생 유쾌하고 즐거운 오페레타를 작곡했던 오펜바흐가 100여 년 뒤에 나타날 천재 첼리스트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곡을 만들어 숨겨두었을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재클린의 눈물’은 이렇게 기막힌 사연을 간직한 채 재클린 뒤 프레의 눈물이 되었다. 눈물과 눈물 사이에는 그녀의 미소와 숨결까지 녹아 있다.

 

눈물은 우리 인체에 어떤 작용을 할까?

눈알 표면에는 평소에도 소량의 눈물이 흐른다. 눈물에는 눈을 보호하는 많은 면역물질이 들어있으며, 이를 통해 눈동자의 세포를 살리고 눈알을 보호해준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흰자위에 있는 눈물샘에서 눈물을 내보냄으로써 눈동자는 필요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따라서 눈물이 없으면 눈동자의 세포가 말라죽게 된다. 인체에 필수요소인 셈이다.

이뿐 아니라 눈물은 정서적 치유와 함께 정신적 위안을 주기도 한다. 우리 몸은 슬프거나 화가 나는 등 감정에 변화가 생기면 스트레스를 받아 호르몬을 과다 분비한다. 이 호르몬은 몸에 독이 된다. 눈물은 이를 배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눈물이 나오는데도 억지로 참고 있으면 독을 품고 있는 거나 매한가지다. 한없이 기쁠 때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너무 슬플 때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인간적이다. 남자는 평생 세 번만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눈물을 흘린다고 나약한 것이 아니다. 눈물을 흘려야 할 때 눈물을 흘리고, 우는 사람과 더불어 울어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 정서와 정신건강에 유익을 끼치는 일이다. 고로 잘 우는 인생이 건강한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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