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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리벳의 실험, free will

Jobs9 2024. 6. 9.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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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미국의 신경외과의사인 벤저민 리벳은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하려고 할 때 뇌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연구하기 위한 실험을 하였다. 리벳은 실험자 뇌의 운동피질에서 발생하는 활동을 모니터하기 위하여 전극을 부착한 후, 행동을 시작하려고 준비할 때 높아지는 전압을 측정했다. 피실험자들에게는 아무 때나 손가락을 움직여 버튼을 누르게 하고, 버튼을 누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 시간을 정확하게 봐 달라고 했다.  

실험이 시작되기 전에 리벳은 피실험자가 버튼을 누르기로 의식적으로 결정함과 동시에 뇌에서 준비전위(readiness potential)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행위에 대한 결정이 의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실험결과 손가락을 움직이기 0.55초 전에 준비전위가 형성되었으나, 피실험자들은 0.2초 전에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뇌는 피실험자의 의식적인 결정보다 0.35초 먼저 결정을 내렸음을 의미한다. 결국 손을 움직이기 전에 뇌 속 깊은 곳에서 이미 결정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리벳의 실험결과는 매우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건드린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행위의 주체가 아니고 사후에 해석하는 존재일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 실험이었다. 리벳의 실험은 그 후 수많은 논쟁을 낳았으며, 아직 그 논쟁이 끝나지 않았다.    

리벳의 실험에 대한 비판으로 첫째는 그의 실험이 복합적이고 오래 걸리는 결정 과정을 설명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손가락 움직이기와 배우자 선택을 동일한 신경심리적인 메커니즘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배우자 결정하기는 많은 시간과 숙고를 거칠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실험의 방법적인 문제로서 피실험자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피실험자에게 왼손과 오른손을 자유롭게 선택하게 한 실험에서는 어떤 의미 있는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논쟁과 비평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리벳의 실험은 뇌에 관한 다른 연구결과를 함께 생각해 볼 때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지난 2,000년 동안 철학자들은 자유의지의 존재 여부에 대한 문제로 고심해 왔다. 자유의지 문제는 우주가 결정론적인지 아니면 비결정론적인지의 문제와 연계된다. 결정론이란 매 순간 물리적으로 가능한 미래가 정확히 하나 존재한다는 개념이다. 만일 자유의지가 없다면 세상은 결정론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20세기 초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적인 현상을 받아들여 자유의지의 존재를 설명해보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자역학을 통한 시도는 미시적인 세계의 현상을 거시적인 세계로 끌어들여 자유의지를 설명하는 데 이렇다 할 결과를 내놓지는 못했다.  

 

 

유의지, 自由意志, free will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유의지란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통상 도덕적 책임, 노력 등과 관계가 깊은 개념으로 여겨진다.

 

법적 책임
[법률]자유의지: 성년자(成年者)로서 정신에 이상이나 장애가 없는 한, 선악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 상태. 
법학, 특히 형법학에서 자유의지는 책임성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외부의 강압이나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범죄행위를 저질렀을 경우 기대가능성이 없으므로 책임성이 조각되어 죄책을 물을 수 없게 된다.  
샘 해리스에 따르면, 우리는 살인마 사이코패스 같은 최악의 범죄자들조차도 어떤 의미에선 불운한 사람들일 뿐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 사람들이 자기 유전자를 택한 건 아니잖습니까. 자신의 부모를 선택한 것도, 자신의 두뇌를 선택한 것도 아니고요. 그 두뇌야말로 그들의 의도와 행위의 원천인데 말이죠." 즉 깊은 의미에서, 그들의 범죄는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
해리스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911 테러에 대한 반응을 비교해보세요." 많은 미국인들에게 있어 그 비행기 납치범들은 그야말로 스스로 자유로이 악을 행하겠다고 선택한 범죄의 화신들이다. 그러나 자유의지라는 개념을 포기한다면, 그들의 행동은 다른 자연 현상과 매한가지인 것으로 봐야한다. 해리스가 믿기를, 그런 시각이야말로 우리를 그에 대해 훨씬 더 합리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Stephen Cave, "자유의지 같은 것은 없다", The Atlantic

자유의지가 없다는 시각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대중저술가 샘 해리스에 따르면 '범죄자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하며, 곧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라는 시각은 과학적 근거가 없는 미신적 시각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자연재해를 보고 "너는 나빠!"라고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만약 가능하다면, 사이코패스 범죄자는 벌을 받는게 아니라 치료를 받는게 맞다는 것이 해리스의 시각이다. 

설령 '자유의지'나 '책임'이 미신적이라는게 사실이더라도, 법률에서는 책임이라는게 있는 양 간주하는 것이 유용할 수도 있다는 시각 역시 제기될 수 있다. 
엄벌주의가 옳다면, 어쨌든 강력한 형벌을 집행하는 것은 위하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형벌 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충분히 정당하다. 
'자발적인' 살인범이 있다고 해보자. 자유의지가 없다면 이 살인범은 환각제를 먹고 '비자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 사람에 비해서 더 중대한 죄를 졌다고 볼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살인범에게 중형을 내림으로써 다른 예비 살인자들의 의욕을 꺾을 수만 있다면 그 형벌을 내리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설령 자유의지가 없다한들, 사람들은 범죄자들이 똑같이 고통을 겪지 않으면 억울해하고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는 사회적 불안을 야기할 것이다. 
해리스는 그런 억울해하는 감정이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으며, 그런 감정은 오히려 '자유의지란 없다'는 적극적인 교육을 통해 극복되어야한다고, 극복될 수 있다고 보는 낙관적 입장을 표명한바 있다. 

즉 이런 시각에서 법적 처벌은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다만 해당 시각은 다음과 같은 유비적 사례를 직면한다.


독전대 사례
독전대를 운영하고 있는 어느 군대가 있다고 가정하여, 독전관은 전투 상황에서 그 어떤 병사도 즉결처형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가정하라. 독전관의 권리는 전황이 좋지 않을 경우, 사기를 고양시시키기 위해 부대 내 임의의 병사를 즉결처형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다. 요컨대 똑같이 열심히 싸우는 철수와 갑돌이가 있는데, 전체 부대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철수를 즉결처형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전투에서 승리하고 부대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자유의지가 없어도 법적 처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시각에서는 과연 그런 경우 '법적 처벌'이 해당 독전대 사례에서의 즉결처형과 충분히 유사한지,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제도는 정당한지 여부 등에 대해 대답해야 한다. 

 

종교
종교, 특히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등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는 자유의지가 매우 골치아픈 주제이다. 특히 악의 문제와 같이 엮여서 돌아가는지라 자유의지에 대한 윤리학적인 논의와 차원을 달리한다. 무엇이 되었든 결론이 나오기만 해도 되는 윤리학자들과 다르게 이쪽은 교리를 수호해야 하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더 어렵다. 자유의지에 대한 전통적인 문제제기와 개괄적인 해결책 역시 주로 기독교 계통의 철학자들에게서 나왔으며, 이 주제를 다룬 주요한 신학자(및 철학자)로 아우구스티누스, 보에티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에라스뮈스, 장 칼뱅 등을 들 수 있다. 사실상 유명한 조직신학자는 다 한 번씩 건드렸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자유의지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는 이유는 행위의 주체가 인간이므로 죄의 책임도 인간에게 있고, 따라서 자유의지를 부정하면 그리스도교/이슬람교 교리의 근간이 흔들리게 된다. 

미래에 대한 전능성과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한 다양한 접근은 스탠퍼드 철학사전의 Foreknowledge and Free Will 항목을 참고할 것. 단, 이 항목에서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해결전략들을 제시한 것이며 이 주제에 대한 모든 해결전략을 다 수록한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학

기독교 신학적 예정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출발한 예정설을 편의상 결정론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정론과는 큰 차이가 있다. 예정론은 결정론과 다르다. 결정론에 따르면 인간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으며, 인간은 그 운명에 항거할 수 없는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예정설은 시간상 원인 관계 순서가 아니라 신학적 설명을 위해 논리적으로 도출된 것이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는 창조주라 하더라도 스스로 만든 법칙에서 이탈할 수 없다고 봤다. 그러나 이런 식의 스콜라적 보편주의 방법론은 아우구스티누스와 근대 아우구스티누스 학파(The modern Augustian School), 오컴의 윌리엄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길(via moderna)노선에 의해 비판받았다. 이러한 논쟁은 교회 내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왔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대체로 신은 인과 관계나 물리법칙 같은 스스로 정한 제약에 구속받지 않고 인간의 이성과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이나 "스스로 인간을 위해 자신의 능력과 신적의지를 제한했다" 정도로 정리된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기독교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본래 헬라어로 쓰인 성경의 autexousia라는 단어를 로마시대 스토아 학파들이 쓰는 Liberum Arbitrium으로 번역했는데 이는 법학자 출신 테르툴리아누스의 언어적 상상력이 떨어지는 상당한 졸역으로 원래의 원어 의미는 '행동에 대한 책임을 기꺼이 지는 것' 정도고 현대 영어로는 authority over oneself 정도로 표현된다. 흔히 자유라는 의미의 Liberty, Freedom 자유의지라는 Free will 과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는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리고 인간은 그 책임을 온전히 질 수 있는가' 라는 신학적 명제와 관련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심 끝에 기존 번역 단어를 수용하며 논리상 수사학적 설명을 열심히 깃들였지만 이 난해함 덕분에 훗날에까지 많은 오해를 사게 만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살던 5세기에, 당시 지식인들은 로마법의 영향으로 "인간은 행동으로 평가 받는다"라는 원칙에 익숙했다. 그러나 성서에 기반한 기독교 신학은 인간을 행위로 평가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실존적인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본다. 인간은 이미 고통받고 비참한 상태이다. 예외없이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이다. 어떤 인간도 도덕적 행위를 완벽하게 해낼 수 없으며 자신의 행위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 이 때문에 자유의지는 있으나 무력하다고 본 것이다. (쉬운예시: 밥을먹을 의지는 있으나 너무 배가고파서 밥차릴 기력이 없는경우)

기독교의 세계관에서 신은 전지전능하므로 시간이나 공간같은 물리적 제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 법칙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인간은 신과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행동에 대한 결과를 알지 못할 때도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고, 의도 없이 한 행동으로 죄를 짓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져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에 대하여 무력하다. 즉, 선과 악의 경계점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주어지면 육신은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악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옳고 그름을 어느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양심은 타고 나지만 죄를 짓고 싶은 욕망이 더 강하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욕망에 따라 죄를 짓는 동시에 양심의 고통을 받는다. 마치 알콜중독자나 마약중독자들처럼 후회하고 후회하면서 계속하여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와 같다. 이처럼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력하기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고, 결국엔 죄로 손상된 자유의지를 회복하는 건 타력(신의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로마서 7장 22-23 (공동번역성서)

다시 말해, 죄로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간은 엄청난 죄의 무게에 깔려서 회개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인 차원의 자유의지로만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다. 죄로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죄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것만 가능하며, 육신의 힘으로 억지로 죄를 참는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두엽의 기능을 이용한 것 뿐이므로 마음 속의 죄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나 회개로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굳건하게 믿으며, 부지런히 하느님과 늘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죄가 아닌 행동에 대한 자유의지가 회복되며, 죄의 유혹에 대해서는 하느님을 의지하여 죄를 이기는 것을 선택하는 것과 죄를 선택하는 것의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에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러나 인간은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기엔 무력한 존재이다. 이를 회복하는건 인간 자력으론 불가능하다. 신의 구원이 필수적이다

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진 못한다. 성경에서 표현된 인간관으론 세상엔 선함을 쫓기보다 악을 행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고, 또한 이들은 완전해 질 수 있는 신의 도움을 자유의지로 거부하기에 필연적으로 신의 은혜를 받는 사람은 적다. 이처럼 예정설은 기독교 교리인 인간론과 구원론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이다. 예정설 논란은 기독교 내부의 오래된 신학적 논쟁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시절 이래 단독설-신인(神人)협력설로 갈라져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논제이다. 가톨릭·정교회에선 칼뱅식 예정설에 부정적이며, 개신교 내부에서도 500년간 중요한 신학적 논쟁이었다. 역사 상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 논쟁, 마르틴 루터-에라스뮈스 논쟁, 칼뱅주의-아르미니우스주의 논쟁 등이 있는데, 전자가 자유의지는 있으나 무력하다는 단독설, 후자는 구원론은 단독설과 마찬가지로 구원에 있어서 자유의지는 필수조건이 아니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좀 더 긍정하며 협력할 수 있다는 협력설에 속한다.

 

유심론
유심론에 따르면 우주의 일체는 정신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이 때 정신이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의지가 곧 자유의지다. 


리벳 실험
'자유의지가 있다'는 주장은 운명을 중시한 고대부터 오랫동안 논쟁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이런 논쟁은 생물학 및 심리학이 발전하면서부터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런 자유의지의 유무에 큰 논쟁거리를 야기했던 대표적인 신경과학 실험 중 하나가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이 1983년에 수행한 소위 '리벳 실험(Libet Experiment)'이다. 리벳 실험의 골자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피험자는 EEG 기구를 착용한다. 이때 EEG로는 대뇌피질 운동영역에서 발생하는 준비 전위(readiness potential)을 측정한다. 준비 전위란 근육 운동이 이뤄지기 전에 측정되는 두뇌 활동 신호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준비 전위가 측정되는 시점을 RP라고 하자. 

피험자의 앞에는 버튼 하나가 놓여있고, 피험자가 원하는 때 아무 때나 그 버튼을 눌러도 된다. 이때 버튼을 누르는 시점을 A라고 하자. 다만 버튼을 누르기 전 피험자는 '자기가 버튼을 눌러야겠다고 느낀 것을 깨달은 시점'을 타이머를 보고 확인해야만 한다. 해당 시점을 W라고 하자. 

해당 실험을 여러 차례에 걸쳐 실험한 결과, 세 시점 RP, A, W의 시점은 평균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RP: -500 밀리초
W: -200 밀리초
A: 0 밀리초

즉 위 측정대로라면 버튼을 누르기 위해 근육이 준비를 시작하는 시점은 버튼을 누르기 0.5초 전이며, '버튼을 눌러야겠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은 버튼을 누르기 0.2초 전이다. 그런데 이는 놀라운 결과다. 왜냐면 상식적인 생각은 '버튼을 눌러야지'라고 마음을 먹은 다음에야 근육을 움직일 준비를 하는 것일텐데, 위 실험 결과는 '버튼을 눌러야지'라고 의식적으로 마음을 먹기 전에 이미 근육은 버튼을 누를 준비를 하고 있었던 셈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버튼을 누르겠다고 의지를 발휘하기 전에 이미 몸은 움직이고 있는 셈이었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통상 다음과 같은 함축을 갖는다고 해석된다: "자유의지"를 '이렇게 행동해야지!'라는 스스로의 의식으로 정의하자. 그렇다면 어떤 행동을 실행하겠다는 자유의지는 그 행동보다 뒤늦게 나타난다. 따라서 그 행동이 자유의지 때문에 발생한다고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런 정의대로라면 자유의지는 그 행동의 원인이 되지 못하므로 마치 허상으로 보일 수 있다.

위의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리벳 교수는 인간의 결정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며 자유의지의 존재는 거짓이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후 존-데일란 하인즈 교수 연구팀은 2007년에 더 발전된 방식의 실험을 벌였다. 어느 쪽 버튼을 누르는 결정을 하면 말하도록 한 것인데, 놀랍게도 이번에는 의사 행동의 최대 10초 전부터 뇌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신호를 포착했다.

 

해석과 논쟁
이 실험이 발표되고 나서 관련 학계는 많은 논쟁이 있었다. 현재까지도 리벳실험을 다룬 논문들이 종종 출간되곤 한다. 현대에 자유의지를 두고 이루어지는 논쟁에서 이 얘기는 거의 약방의 감초 수준이고, 자유의지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논쟁에 참여하는 모두가 이 실험의 결과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자유의지를 긍정하는 측에서는 주로 이 실험의 허점을 지적하거나, 이 실험이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쪽으로 설명을 시도한다. 

먼저 어떤 심리학자들은 리벳의 실험이 허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리벳 실험을 비판적으로 보는 학자로 UC 버클리의 John Kihlstrom 인지 심리학 교수는 30년도 넘게 지난 리벳 실험을 이제는 놔줘야 할 때라고 주장하며 실험의 많은 허점들을 지적했다. # 대표적으로 지적 받는 요소중 하나는 타이머인데, 피험자가 타이머를 사용해서 보고하도록 했기 때문에 실험결과가 위와 같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이머 대신 디지털 시계를 이용하도록 하면 실제로 결과가 약간 달라졌다고 한다. 또한 저 타이머로 측정한 시점을 문제삼는 경우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버튼을 누르겠다고 자신이 결정했다고 느낀 시점이 실제로 자신이 결정한 시점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어떤 연구에선 피험자가 손가락을 움직이려 할때, 손가락에서 미세한 전류가 나타나면 아주 작은 시간 후에 소리가 나는 장치를 설치하였는데, 그러자 소리가 날 때까지 걸리는 시간에 비례해서 W가 더 빨라졌다. 이는 리벳의 실험에서 피험자들이 보고한 W가 실제 W와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후속 연구에 따르면 저 준비전위란게 별로 신빙성이 없다고 한다. 리벳 실험에서는 손가락을 움직이기 전에 무조건 준비 전위가 일어났다고 했지만 퍼디(Purdy)와 동료들에 따르면 손가락을 움직이기 전에 무조건 준비 전위가 발생하진 않는다고 한다. 움직이기 전에 준비 전위가 나타난 건 단지 12%에 불과하다는 것. 애초에 준비 전위로 알았던게 사실은 준비 전위가 아니라, 속으로 무엇을 할지 기대하는 전위일 수도 있다. 즉 속으로 "이 쯤이면 버튼을 눌러야지"라고 생각한게 준비 전위로 나타나고, 실제로 그렇게 할지는 피험자의 자유의지에 달렸다는 것. 

한편, 리벳의 실험이 하자가 없다고 해도, 이것이 곧바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모기룡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은 우리 뇌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준비 전위를 만든 것도 뇌고, 의식을 만든 것도 뇌다. 리벳의 실험은 엄밀하게 말해서 의식이 준비 전위에 지배된다는 말인데, 사실은 둘 다 틀렸고 모두 뇌가 지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그 '뇌'인 우리 자신이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선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주장은 생략된 부분이 있는 것인지, 앞뒤 맥락이 없는 것인지 말이 이상한데 준비 전위(readiness potential)는 무의식적이게 이루어지는 뇌활동이다. 즉, 리벳 실험에서 정신이 뇌에서 나온다는 것을 부정한 적이 없는데 '즉, 정신은 뇌가 만들었다'며 반박 주장하는 것은 이상하다. 리벳 실험은 무의식적으로 뇌가 먼저 결정한다음 의식적으로 생각과 행동이 나왔다는 실험이다. 무의식적 뇌활동과 의식적 뇌활동이 둘 다 틀렸고 뇌가 지배한다는 말은 이상하다. 아마 생략되지 않은 전체적인 주장은 무의식적 뇌활동이 미리 결정해 의식적으로 행동 하더라도 자유의지와 상관없다고 말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결정론과의 관계
전통적으로 결정론은 자유의지와 양립하기 어렵다고 여겨졌다. 서양 철학사에서 결정론의 대표적인 동기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 신학의 예정설: 야훼는 전지전능하여 미래에 대한 모든 지식 또한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곧 미래가 이미 결정되었음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타락과 구원의 문제 때문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 오컴의 윌리엄 같은 스콜라 철학자, 라이프니츠를 비롯한 많은 변신론(辯神論)자들은 다양한 철학적 논변을 내놓았다.


근대과학적 결정론: 아이작 뉴턴 이후로 과학은 수학적 원리로 표현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모든 영역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법칙에 대해서 완벽히 알고, 지금의 세계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에 대해서 안다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미래를 모두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면, 이는 곧 미래는 결정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결정론과 자유의지는 밀접한 관계이다. 왜냐면 모든 것이 결정되어있다면, 우리는 '달리 행위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며, 이는 자유의지의 해석에 따라선 우리의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관계에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있으며, 아래 견해들은 이런 양자 간의 관계에 대한 잘 잘려진 사례들에 해당한다. 

 

양립가능론
Compatibilism
결정론이 참이면서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주장 또한 참인 게 가능하다는 입장. 즉 우리가 '달리 행위할 여지가 없었다고 한들', 여전히 우리의 행위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입장에 해당한다. 양립가능론에 따르면 '우리의 행위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는 '우리의 행위가 미리 결정되어 있는가?'와 독립적인 문제이며, 결정론이 자유의지의 부재를 함축한다고 보는 것은 '자유의지' 개념을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오해라는 것이다. 다만 오해라고는 하지만 자유의지 개념은 윤리학적 차원에서 실제로 그렇게 설계되고 그렇게 이해되어 왔으며, 고로 실상 해당 개념 자체를 현대화시켜서 소모적 논쟁에서 비껴가게 하는 것에 가깝다. 대니얼 데닛이 주로 이런 방식으로 주장하고 있다. 

양립가능론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현대적 논변으로는 프랭크퍼트 사례 참고. 약 1080명의 전문 철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Philpapers 2020년 설문조사에서는 약 60%에 달하는 응답자들이 '양립가능론을 받아들이거나 동의하는 것에 가깝다'고 응답했다. 

 

 

양립불가능론
결정론이 참인 동시에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주장 또한 참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즉 양립불가능론에 따르면 결정론이 옳은지 그른지 여부는 자유의지가 존재하는지 아닌지 여부와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하술할 강한 결정론과 자유지상주의는 둘다 양립불가능론에 속하며, 이들에게 있어 '결정론이 참이냐 거짓이냐' 문제는 곧 (양립가능론자와는 달리) 자유의지의 유무를 따지는데 있어 결정적인 선행 문제가 된다. 이들 두 입장은 과학 및 자유의지 등에 대한 입장에서 정반대에 서있다시피 하지만, 둘다 양립불가능론에 속하기 때문에 양립가능론에 맞서서는 공동전선을 펼친다고 할 수 있다.

 

 

강한 결정론
Hard Determinism

우리가 ‘자유의지’를 욕망에 따라 행동하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정의한다면, 맞는 말이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침팬지와 개, 앵무새도 마찬가지이다. 앵무새는 크래커를 먹고 싶으면 먹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은 앵무새와 사람이 내면의 욕망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중요한 질문은 그들이 애초에 자신의 욕망을 선택할 수 있느냐이다. 왜 앵무새는 오이가 아니라 크래커를 먹고 싶어 할까? 왜 나는 짜증 나는 이웃에게 다른 쪽 뺨을 내어주는 대신 그를 죽이기로 결정할까? 왜 나는 검은색 자동차가 아니라 빨간색 자동차를 사고 싶어 할까? 왜 나는 노동당이 아니라 보수당에 투표하고 싶을까? 이 소망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내 선택이 아니다. 내가 특정한 소망을 느끼는 것은 내 뇌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과정들이 그런 느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들은 결정론적이거나 무작위적일 뿐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결정론이 참이므로, 자유의지는 없다는 입장. 강한 결정론을 옹호했다고 여겨지는 대표적인 철학자로는 바뤼흐 스피노자가 있으며, 그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은 당대에 큰 스캔들이 되었다. 

결정론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만사는 그 원인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으며 이를 벗어날 방법은 없다'는 운명의 세 여신 같은 신화적인 배경으로부터 비롯될 수도, 라플라스의 악마 같은 근대 과학적인 배경으로부터 비롯될 수도 있다. 그 어떤 배경에서 결정론을 받아들이건, 강한 결정론에 따르면 자유의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곧 '만사는 그 원인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그르다. 

나아가 강한 결정론자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을 내린다고 '느끼는 것' 역시 이미 결정된 것이기에 자유의지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한다고 논한다. 이를테면 "나는 짜장면을 먹을지, 아니면 짬뽕을 먹을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는지는 여러 과학적 원인들, 이를테면 타고난 입맛, 중국집에 대한 평가, 방금 전에 먹은 음식 등 여러 욕구 및 기억들에 의해 결정된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스스로의 자유의지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무작위로 만난 사람을 살해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게 자유의지를 입증해주지는 못한다. 그 행동 역시 "자유의지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다"는 욕망을 원인으로 갖는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느끼는 "생각"이라는 것은 과학적인 인과가 그저 의식이라는 스크린에 투영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 

현대 강한 결정론자들의 주된 과제는 양자역학에 대한 코펜하겐 해석으로 대표되는 미시세계의 비결정성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있다. 미시세계의 비결정성은 곧 '만사는 그 원인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주장에 대한 과학적 반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결정성조차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면 이 또한 인간은 비결정성이라는 어떠한 과학적 원리에 수동적인 존재임은 변함이 없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자유지상주의
Libertarianism
자유의지가 있다는 게 참이며, 곧 결정론은 거짓이라는 입장. 이 입장에 속하는 인물 중 잘 알려진 이들로는 이마누엘 칸트, 실존주의 철학자들, 예컨대 장폴 사르트르 등이 있다.

일부 현대 자유의지론자는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이 비결정론적임을 들어 자유의지론을 옹호하고자 하나, 이러한 입장의 주된 과제는 소위 '우연 논변', 즉 "만약 인간의 행동이 비결정론적이라 한들, 그 행동이 전적으로 우연적인 것이라면 그게 어떻게 자유의지냐?"라는 반론을 해결하는 것이다. 관련된 현대적 논의는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의 해당 항목 참조.

 

철학사의 사례
철학사에서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관한 입장은 굉장히 큰 영역을 차지하는 부분이다. 각 입장에 속한 철학적 담론은 다음과 같다.
강한 결정론: 밀레투스학파, 명가, 법가, 고대 원자론, 에피쿠로스 학파, 근대 경험주의, 프랑스 유물론, 구조주의(대부분)
양립가능론: 피타고라스학파(대부분), 키니코스 학파(대부분), 스토아 학파, 신플라톤주의, 성리학, 변증법적 유물론, 근대 합리주의(대부분)
자유의지론: 스콜라 철학(대부분), 양명학, 칸트주의, 주의주의, 실존주의, 초월주의, 신칸트주의, 자유지상주의

 

데모크리토스
데모크리토스 시절에 현대의 자유의지에 관한 것과 비슷한 담론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데모크리토스와 루키피우스는 모든 것이 원자와 공허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일은 그에 선행하는 원인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결정론자라고 해석된다.

 

에피쿠로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계승하였지만, 비인과성을 부여하는 원자이탈설(영역: Swerve)을 주장하였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우주의 사물들은 기본적으로는 인과를 따르지만, 원자이탈로서 정해진 인과에서부터 이탈하는것도 가능하다.

 

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입장은 양립가능론에 가깝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육체는 완전한 물질이며, 그러한 물질은 어떠한 목적론적 테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본유주의자인 데카르트는 인간에 대해 육체적인 의미에서의 본능/본성과, 그것과는 독립된 본유관념의 영역이 동시에 존재하는 존재라고 해석했다. 전자는 완벽히 결정론적인 수순을 밟는다고 봤으며, 후자는 완벽한 자유의지를 갖는다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방법적 회의를 통해 본유관념의 영역에 저장된 만지식(萬知識)을 얻는 과정 중에 있지 않는 이상 육체의 수동적인 정념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하였다. 

 

존 로크
로크는 인간의 인식 행위에서 의지의 역할을 극도로 제한하였으며, 결과적으로 보자면 결정론자라고 할 수 있다.

로크는 의식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고 보는 실재론자인 동시에, 인간은 제한적인 감각 능력만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이 제한적인 감각 능력이 지시하는 대상을 느끼고, 그에 따른 수동적인 반응만을 내보일 수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여러 행동은, 해당 인간이 현재적으로 겪는 지각 작용과, 과거 지각된 요소들의 총합(기억)이라는 두 가지 변수를 갖고 있다고 봤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빈 서판 이론'이다.

의지라는 것은, 의식의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물에 의한 수동성이 작용할 때 그것이 지시하는 행동이나 사고의 편중성이 너무나도 작아서 결괏값이 뚜렷하지 않을 때, 그것의 향방을 결정하는 미세한 역할만을 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바뤼흐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입장은 결정론에 기운 양립가능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심리철학 사고에서 데카르트의 이론을 어느 정도 계승하였다.

스피노자는 이성지(현상 개물에서 소우주로 나아가려는 모든 노력)의 영역에서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만, 그 외의 모든 계에 대한 자유의지는 부정한다. 스피노자는 오로지 경험적 지각과는 차별화 된 이성의 영역만이 사물에 의한 수동성이 작용하지 않는 영역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이성의 영역에서 벗어난, 현상의 영역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사물에 의한 외력을 이기지 못 하여 본연의 생물학적 수동성에 갇혀버린다고 주장했다. 현대철학으로 따지면 이 입장은 양립가능론적 입장에 가깝다. 

현상계 안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 역시 다른 원인들에 의해 결정된다. 현상의 영역에서 자유의지가 있다는 의식은 일종의 환상으로서, 내 의지를 결정하는 원인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스피노자는 자유를, 원인에 구속받지 않는 임의적인 선택을 할 자유라고 보지 않고, 외부의 원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본성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두려운 대상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공포를 느끼며 도망치는 것이 수동적인 행동이라면, 두려운 대상을 보고 자신의 공포도 인지하되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성을 통해 적합하게 판단하고 행동한다면 보다 능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자유는 보다 능동적이 되는 것이며,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신(=자연, 실체) 뿐이지만, 인간도 이성적 노력에 의하여 부분적인 자유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근데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등장하는 자유의 개념은, 자유의지론에서 주장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자유의지'라고 하기 어려우며, 그 자체로 스피노자의 학설에서 '자유'는 대우주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일종의 제한적 자유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이성적 존재로 나아갈 때, 직관지를 얻으면, 스스로의 본성(conatus)이 다른 본성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완전한 이성적 존재로 거듭나서 스스로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역설적이게도 우주만유의 조화의 틀에 완전히 합치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스피노자의 '자유'는 우주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특수한 자유론에 대해, 윤선구 서울대학교 교수는 스피노자의 '자유'에 대해 "필연성과 대립되지 않는 자유"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스피노자의 자유의지에 대한 입장은 헤겔, 셸링, 헤스,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등에 의해 계승된다.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라이프니츠는 자유의지론자이다.

라이프니츠는 단자(monad)라는 개념을 통해서 신의 능력에 의한 예정조화가 이루어지는 양상을 유신론적 입장에서 주장했다.

그는 신이 단자를 창조했을 때, 스스로의 모습을 모방하였으며, 스스로의 능력의 일부를 주입했다고 보았다. 만약 단자가 신과 완전히 독립된, 무미건조한 결정체일 뿐이라면, 신은 그러한 결정체를 배열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동시에 신에 의한 단자의 창조 자체가 성립될 수 없음을 논증했다. 완고한 유신론자였던 라이프니츠는 능동적 창조의 주체인 신이 있기 이전에 단자와 같은 결정체가 주장할 수 있다는 류의 유물론적 논리를 배척하였고, 단자는 그것 자체가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결정체의 나열이라고 보여질 수 있지만, 실은 신의 예정 행위에 의해 추동될 수 있을 만큼, 신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능력이 있는 이유는, 신이 스스로의 능력의 일부를 부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자로 이루어진 인간도 역시 신의 형상과 능력을 일정 소유하고 있는 주체라고 봤으며, 그에 따라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신이 행하는 예정조화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도 또한 신의 예정 조화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신의 능력은 자유의지를 포괄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임마누엘 칸트
자유의지에 관한 칸트의 입장은 모호하지만 대체적으로 자유의지론 혹은 양립가능론으로 분류된다. 자유의지에 대한 칸트의 입장은 저서에 따라 다른데 한편으로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칸트는 현상계에 속한 인간은 대부분이 질료를 지각함으로써 수동적인 움직임에 빠질 수 있다고 하였지만, 동시에 인간 본연의 독자적인 구상력(einbildungscraft)이 있다고 봤고, 이것이 개별 판단에서 자의(willkür)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칸트는 인간이 초보적인 경험적 정보만 갖추고 있다면 누구나 자발성, 즉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구상력은, 지성(verstand)이 질료에 의해 드러난 표상을 다시 추상화 할 때의 모든 과정을 종합하는 용어로, 구상력은 존재가 곧 인간의 자유의지를 증명한다고 봤다. 칸트는 인간이 물자체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동시에 칸트는 지성이 존재하며, 이것과, 이것과 다른 층위의 인식 행위가 존재하며, 그러한 인식 행위의 층위가 나눠져 있는 모든 틀을 규준(kanon)이라고 하였는데, 인간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이 규준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규준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 본연의 인식 능력 덕분에 자유의지가 선재(先在)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 칸트의 실천적 저술에서의 논의를 보자면, 먼저 그는 처음으로 쓴 "윤리 형이상학 정초"의 3절에서는 먼저 자유와 도덕 법칙이 쌍조건문의 형태임을, 즉 어느 하나가 확실히 주어진다면 다른 하나가 주어질 수 있다고 서술한다. 다음으로 그는 여기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에 따라서 한편으로는 현상계의 구성원이지만 동시에 예지계의 구성원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고, 이로부터 다시 자신이 자유롭다는 점을 알게 되는 것처럼 서술한다. 이러한 입장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자유와 도덕 법칙 간에는 쌍조건문 관계가 성립하는데, 우리는 스스로가 예지계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자유롭다는 점을 알게 되며 그로 인해서 언제나 도덕 법칙을 따라야 할 이유를 얻게 된다는 논의로 볼 수 있고, 이러한 추론은 자유가 먼저 우리에게 (반성을 통해) 알려진다는 입장을 근거로 성립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것 같다.  

반면 이후에 쓰여진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유사한 쌍조건문 관계가 서술된 다음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위 방침, 곧 준칙을 무엇으로 삼을지 고민할 때 우리는 도덕적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가능하기만 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결코 불가능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도덕 법칙의 구속력이 언제나 우리게에 주어짐을 깨닫고, 바로 이 "이성의 사실"에 의해서 우리는 직접적으로는 알 수 없는 자유가 우리에게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게 된다고 논한다. 그런데 이 논의는 다시 크게 보면 도덕 법칙과 자유 간의 쌍조건문이 주어진 다음 "정초"에서와는 반대로 자유가 아니라 도덕 법칙이 우리에게 자명하게 다가오며 그로부터 우리는 각자가 자유로움을 알게 된다는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칸트를 읽을 때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러한 입장 변화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엄청난 떡밥이고 지금 이순간에도 논의중인 이야기지만, 대체로 그의 실천철학에서의 입장이 내용상 예지계와 현상계의 구분 내지는 우리가 우리의 행위 방칙을 정하는 능동성에 기인하여 자유 의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이라는 데에는 많은 연구자들이 합의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 적어도 세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주어진 칸트의 입장이 양립가능론 혹은 양립불가능론 중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해서는 합의가 없다는 것. 그가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점에서 그의 입장은 양립가능론이거나 자유의지론 중 하나가 되긴 하겠지만.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스피노자와 유사한 결정론자이다. 철학사에서는 흔히 '변증법적 결정론자'라고 한다.

헤겔 역시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무제약적인 자유의지'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헤겔은 즉자대자적 존재가 아닌 한 개체로서 주관이 자신의 소외된 및 즉자적인 활동을 곧 '자유'라고 망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헛소리라고 보았다. 헤겔은 인간 인식의 시작점을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생성되는 감각적 확신이라고 보았고, 이러한 감각적 확신이 이른바, 변증법적인 필연을 통해 절대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헤겔은 자유의지의 측면을 크게 자의(Willkür)와 자유(Freiheit)로 구분하였는데, 전자를 의식의 변증법적 발전 법칙이라는 필연의 대립항인 우연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자의에는 하강의 측면과 상승의 측면이 있는데, 하강은 의식이 감각적, 즉자적인 수준에서 정체되는 것을 가리켰으며, 상승은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자립적 반성규정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의식이 절대지에 이르게 되면 객관의 필연과 주관의 필연이 합치되면서 자유(절대정신의 능동성)를 체득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자유가 항구적인 것은 아니며, 구체와 추상을 잇는, 끊임없는 이성적 사유 속에서만 그것이 유지될 수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헤겔에서 자유란 주관의 부단한 변증법적 사유의 노력 및 그러한 사유의 결과로서 실천 속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이론과 실천의 통일 노력이 없이 향유할 수 있는 자유는 없다고 단언하였다. 

자유에 대한 위와 같은 입장은 당대 독일에서 활동하던 적지 않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대표적으로 칼 마르크스나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자유의지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공산국가 관변철학의 공식적 입장으로 된 상태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는 자유의지를,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발명된 것이라고 보았다.

 

해리 프랭크퍼트
프랭크퍼트는 본인의 '2단계 자유의지 이론'을 통해서 양립가능론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논자다. 이와 독립적으로 프랭크퍼트 사례는 양립가능론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직관적인 사례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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