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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과학의 최첨단 제품은 거의가 전자제품이거나 광학제품이다.이것은 양자역학적으로 인간이 전자와 빛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런데 빛과 전자의 실체가 무엇이냐고 묻게 되면 양자물리학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에너지의 최소 단위인 빛의 소립자(광자)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아인슈타인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 꼭 50년이란 의식적인 사색은 나로 하여금 빛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에 조금도 접근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은 어중이 떠중이 모두 다 자기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이 말은 물질의 최소 단위인 전자에도 적용된다고 볼 수 있으며,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로는 이해될 수 없는 전자의 쌍 슬릿 실험이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양자이론에 충격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직 양자이론을 제데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닐스 보어 -
그런데 관찰자인 인간의 의식과 소립자의 관계에는 대체의학이나 정신과학적으로 매우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그것은 전자의 쌍 슬릿 실험에서도 나타나듯이, 전자는 관찰자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인식하고 관찰자가 있으면 항상 입자로만 나타난다. 또한 전자는 슬릿이 한 개인지 두 개인지를 식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일부 양자물리학자들은 이러한 쌍 슬릿 실험을 근거로 하여 전자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양자론의 코펜하겐 철학도 관찰자인 인간의 의식과 소립자(인간의 신체는 소립자로 구성된 물질이다)를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사유방식처럼 정신과 물질로 완전히 분리시키지 않고 서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정신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동물과, 식물과, 물질은 정신이나 영혼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물체와 같은 차원으로 다루어 진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전자의 쌍 슬릿 실험은 수백 년간 인간의 사고를 지배해 왔던 데카르트 철학이 오류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물리학에 정신이 개입되어야 한다는 양자론의 혁명적인 발상은 물리학의 교과서에는 기록조차 할 수 없는 것임도 유념해 두어야 한다. 그 이유는 물리학에서 정신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것은 근대철학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학방법론의 신념이었기 때문에 고전물리학 특히 뉴턴물리학적인 사고로는 이 신념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물리학 교과서는 그러한 뉴턴물리학의 전통을 물려받았다.그러나 양자론의 철학적인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양쪽의 상호관계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엄격한 분리는 우리의 착각일 수 있는 것이다.
소립자에도 의식이 있다!
여기까지 이르면 이제 양자론이 사용하는 언어와, 불교철학의 유식학이 사용하는 언어는 용어만 다를 뿐 내용적으로는 별로 다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유식학의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사상에 의하면 식물이든, 동물이든, 물질이든, 공간이든 그것을 구별할 것 없이 우주만물은 일체가 식(識)을 가지고 서로 간섭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론을 기초로 하여 근래엔 뉴턴물리학의 유물론적 사고방식인 서양의학을 버리고, 서양의학으로 고쳐지지 않는 불치병들을 이제 동양의 정신이나 마음으로 치료해 보려는 파동의학, 양자의학, 氣과학과 같은 대체의학들이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또한 정신물리학이나 신과학과 같은 정신과학들도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양자론을 근거로 한 대체의학과 정신과학에는 하나의 공통적인 약점이 있다. 그것은 양자론에서는 소립자를 객관적 실재로 보고 있지 않는데 반하여, 대체의학이나 정신과학은 정신, 즉 마음을 객관적 실재로 보고 있다는 차이점이다. 양자론에 의하면 객관적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양자론의 가장 본질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하면서 양자의학이나 정신과학을 양자론에 접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마음에도 적용된다. 양자론에서는 소립자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모든 것,즉 인간의 마음도 객관화된 대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대체의학이나 정신과학처럼 마음이 객관적 실재라면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어떤 학파는 뇌에 있다고 하고, 어떤 학파는 초양자장인 양자진공에 있다고 하고, 또 어떤 학파는 우리의 몸 바깥에 氣로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송과선에 마음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방금 언급한 것처럼 불교의 유식학에서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고 하여 외계의 대상은 없고 식물이든, 동물이든, 물질이든, 공간이든 오직 마음만이 존재한다고 한다. 하지만 마음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불교철학의 空의 관점으로 보면 이들의 주장 역시 모두 의심스럽다. 空을 표방하는 불교철학 특히 중관학은 양자역학이 소립자를 물체로 보는 고정관념을 버릴 것을 요구하듯이, 중관학은 마음과 같은 절대 불변의 자아(自我)가 있다는 그러한 고정관념마저도 버릴 것을 요구한다. 이는 자신의 왼쪽 팔을 잘라 달마대사의 제자가 되었다는 혜가와 달마의 선문답에서 이 뜻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읽어낼 수 있다.
혜가: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달마: 그 편치 않는 마음을 가져 오너라.
혜가: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달마:됐다! 그대 마음은 편안해 졌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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