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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壬午軍亂),1882년,고종,대원군 집권

Jobs9 2021. 4. 1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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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고종 19) 6월 9일 훈국병(訓局兵)들의 군료분쟁(軍料紛爭)에서 발단해 고종 친정 이후 실각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변(政變).

 

군란의 배경을 단지 민씨척족정권(閔氏戚族政權)에 대한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守舊派)의 정쟁(政爭)으로만 볼 수는 없다.

고종을 비롯한 민씨척족정권이 개화정책을 추진해 일본과 구미제국과의 교섭통상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개화파 관료가 제도 개혁에 따라 대거 등장하자 수구파의 반발이 격화되었다.

특히, 5영(營)을 폐지한 후 무위(武衛)·장어(壯禦)의 2영을 설치하고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는 등 군제 개혁이 단행되자 구 5영소속 군병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881년 전개된 수구파의 위정척사론과 이재선(李載先)·안기영(安驥永) 등의 토왜반정음모사건(討倭反正陰謀事件)을 계기로, 민씨척족정권은 대원군파와 특히 남인계열의 수구파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함으로써 지배층의 분열은 극도에 달해 있었다.

이 밖에도 민씨척족정권의 인사행정의 문란, 매관매직, 관료층의 부패 및 국고의 낭비, 일본의 경제 침략으로 인한 불만 등을 군란의 배경으로 들 수 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수 차에 걸친 군병들의 반항이 있었다. 1863년(철종 14)의 금위영 소속 군병의 소요, 1877년 8월의 훈국병 소요 등은 모두 군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도 군료 문제에 있었다.

군제 개혁 후 구 5영 소속 군병의 대부분은 실직하였다. 또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개편된 군병이라 할지라도 신설된 별기군에 비해 열악한 대우에 처해 있었다.

더욱이 이들 구 5영소속의 군병들은 13개월이나 군료를 받지 못하고 있어 불만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특히, 그들은 군료 관리인 선혜청당상 민겸호(閔謙鎬)와 전 당상이었던 경기관찰사 김보현(金輔鉉)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경과

1882년 6월초에 전라도조미(全羅道漕米)가 도착하자, 6월 5일 도봉소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의 구훈련도감 군병들에게 한달분의 군료를 지급했으나 겨와 모래가 섞였을 뿐만 아니라, 그 양도 반이나 모자랐다.

이 때 포수(砲手) 김춘영(金春永)·유복만(柳卜萬) 등이 선혜청 고직(庫直)과 무위영 영관에게 항의해 시비가 격렬해졌다. 이에 다른 군병들도 합세하여 도봉소는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당시 궁중에 있던 민겸호는 이 소식을 듣고 김춘영·유복만 등 주동자를 포도청에 가두었고,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그 중 2명을 처형하도록 하였다.

이 소식에 격분한 군병들은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金長孫)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柳春萬)의 주동으로 통문을 발송, 군병의 결집을 호소하였다. 6월 9일, 소요는 마침내 대규모의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우선 민겸호의 집을 습격했고, 이후 행동방침을 결정하기 위해 대원군의 지시를 받았다.

대원군이 군병의 대표자들에게 어떤 밀계를 지령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군병들의 이후의 행동으로 볼 때 전 해에 있었던 이재선의 토왜반정음모사건 당시의 거행계획을 실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원군의 심복인 허욱(許煜)이 군병으로 변장하고 군란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이들 군병은 동별영(東別營)과 경기감영의 무기고를 습격하고 포도청에 난입해 동료를 구출한 뒤 척신과 개화파 관료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날 저녁에는 일본공사관을 포위, 공격해서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는 가까스로 인천으로 탈출하였다. 군란 이틀째인 6월 10일에 사태는 더욱 확대되어 영돈녕부사 이최응(李最應)이 살해되었고, 뒤이어 궐내로 난입한 군병들에 의해 민겸호와 김보현도 살해되었다.

민씨척족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제거하려고 찾았으나, 명성황후는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민씨와 무예별감(武藝別監) 홍재희(洪在羲)의 도움으로 탈출해 윤태준(尹泰駿)의 집에 은신했다가 광주(廣州)·여주를 거쳐 장호원(長湖院)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군병이 궁궐에 침입하자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 수습을 맡겼고, 이 과정에서 대원군은 재차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대원군은 먼저 군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5영의 복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혁파, 삼군부(三軍府)의 복설을 명하였다.

제2단계의 개혁으로 척족을 제거하는 인사를 단행하였다. 맏아들인 이재면(李載冕)을 훈련대장 겸 호조판서·선혜청당상에 임명하여 병재(兵財) 양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을 유임시키고 인망 있는 신응조(申應朝)를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그 밖에 신정희(申正熙)를 어영대장으로, 조희순(趙羲順)을 금위대장으로, 임상준(任商準)을 총융사로, 조병호(趙秉鎬)를 도승지로 임명하였다.

이어서 중앙의 각 부서 및 지방관에도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였다. 대원군이 등용한 인물들은 대부분 남인 계열에 속하는 노정치가들이었다. 그러나 인재의 부족을 통감한 대원군은 투옥 또는 유배 중인 죄수들을 석방시켜 등용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제3단계로서 서정개혁을 단행하였다. 각 지방의 미납세미의 상송을 명해 군병의 군료와 도민(都民)의 식량에 충당하였다. 이어서 민폐의 근원이 된 신감채(辛甘菜)와 해홍채(海紅菜)의 징수 금지, 주전(鑄錢) 금지, 도가(都賈)의 민폐 금지 및 무명잡세(無名雜稅)의 징수 금지 등을 명하였다.

그러나 대원군 정권은 불과 33일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원인으로는, 첫째 명성황후의 국장 절차를 강행하는 동안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했다는 것, 둘째 고종 친정 10년간 대원군파는 철저히 탄압되어 신정권에 참여할 수 있는 인재가 부족했다는 것, 셋째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군란 처리를 위해 청일 양국이 재빨리 출병한 데다가 특히 청나라가 대군을 출동시켜 7월 13일 대원군을 납치한 것을 들 수 있다.

하나부사 공사 일행은 6월 12일 영국 측량선 플라잉피시호(The Flying Fish號)에 구조되어 15일 나가사키(長崎)에 도착, 군란 사실을 외무성에 타전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무력을 배경으로 한 대조선 기본 방침으로 세웠으나, 방법에 있어서는 강경·온건의 두 파로 나뉘었다.

이 때 각의(閣議)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육군경(陸軍卿) 야마가타(山縣有朋)는 조정론을 제시하여 강경론에 찬성하면서 출병시기는 온건파가 주장하는 담판교섭 결과를 참작한다는 것으로 방침을 굳혔다.

이에 따라 교섭문제는 이노우에(井上馨) 외무경에게 위임되었다. 이노우에는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하나부사 공사에게 기밀훈령과 훈조(訓條)를 전달한 다음, 그에게 육군을 인솔, 조선정부와 교섭할 것을 명하였다.

이 때 전달한 기밀 훈령은 조선정부에 요구할 사항으로, 9개 조항으로 되어 있었다. 사죄(謝罪), 폭도의 징판(懲辦), 피해자에 대한 보상, 출병비의 배상, 일본 공사관의 병력 보호, 안변(安邊)의 개항, 거제(巨濟) 또는 송도(松島)의 양여, 조선 관원 중 폭도 옹호자의 제거, 강상(强償)주 01) 처분 문제 등이었다.

그 뒤 청측의 문제가 대두되자 일본 정부의 태도는 한층 강경해져, ① 함흥·원산·양화진의 개시, ② 공사·영사관원의 내륙여행권 획득, ③ 원산·안변에 있어서의 일본인에 대한 폭행사건 해결, ④ 통상조약에 관한 유리한 양보의 획득 등 추가 요구조건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요구사항은 군란을 구실삼아 그 동안 해결하지 못한 통상상의 특권이나 치외법권 및 개항장의 요구를 단번에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하나부사공사 일행은 6월 29일 제물포에 도착했고, 7월 3일까지 약 1,500명의 병력이 상륙하였다. 하나부사 공사 일행은 1개 중대의 호위병력을 인솔해 7월 3일 입경하였다. 7일에 있었던 고종 알현에서 7개 조항(후에 1개 항이 추가됨.)의 요구책자를 제출하고 회답기한을 3일 내로 한다고 통고하였다.

일본측의 일방적인 통고에 대해 조선 정부는 심하게 반발했고 일부에서는 무력에 의한 토왜(討倭)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대원군은 이러한 여론을 감안해 일본측의 요구책자를 반송하는 한편, 청군에 연락을 취해 조속 입경을 촉구해서 일본측과의 교섭은 교착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청측에서는 6월 18일 청출사일본대신(淸出使日本大臣) 리수창(黎庶昌)이 서리북양대신(署理北洋大臣) 장수성(張樹聲)에게 친 전보를 받고 군란 소식을 알게 되었다.

장수성은 즉각 이 사실을 총리아문(總理衙門)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조선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통령수사제독(統領水師提督) 딩루창(丁汝昌)에게 쾌선 2척과 군함 1척의 출동준비를 명했다.

또한 당시 남하 중이던 도원(道員) 마젠충(馬建忠)에게도 상해(上海) 대기를 지시하였다. 장수성은 리수창의 계속된 전문 보고로 일본군의 출병 상황과 조선 왕궁의 피습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는 진해관도(津海關道) 주후(周馥)에게 당시 톈진(天津)에 체류 중인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 문의관(問議官) 어윤중(魚允中)과 만나 군란이 일어난 배경을 탐문하도록 했다.

장수성은 18일부터 26일까지의 회담에서 대원군난수설(大院君亂首說), 대원군의 제거 방략, 청군의 입경 방략 등을 제시해 청측의 사태 개입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군대를 출동시키기에 앞서 마젠충과 딩루창이 27일에 인천에 도착해 군란 상황에 대한 제반 정보를 수집하였다. 딩루창은 일단 톈진에 돌아갔다. 그 곳에서 출병 준비를 완료하고 있던 광동수사제독(廣東水師提督) 우창칭(吳長慶)과 회동해서 7월 4일 옌타이[煙臺]를 출발, 7일 남양부(南陽府)에 도착하였다.

이 때에는 이미 대원군의 입경 촉구의 서신이 도착해 있어서 마젠충은 간창대(簡鎗隊) 200명을 인솔해 수원을 거쳐 10일 입경했고, 12일에는 모든 청군이 입경하였다.

마젠충은 입경 다음 날 인천으로 가서 하나부사 공사를 만나 교섭 재개를 종용하였다. 하나부사 공사는 다음 날 마젠충을 방문해 조선 정부에서 전권대관(全權大官)을 인천에 파견하면 교섭 재개의 용의가 있다고 통고하였다.

교섭을 끝낸 마젠충은 당일로 상경해 딩루창·우창칭 양제독과 대원군의 납치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 때 우창칭은 조일간의 교섭 타결을 선결 문제로 주장했으나 마젠충은 끝내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13일 정오 우선 딩루창·우창칭 양제독과 마젠충은 대원군을 예방해 안심시켰다. 그리고 오후 4시경 답례온 대원군을 강제로 납치해 밤을 타 남양만의 마산포(馬山浦)로 호송, 청나라 병선편으로 톈진으로 이송시켰다. 이렇게 하여 대원군 정권은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결과

정권을 회복한 고종은 7월 14일 마젠충의 건의에 따라 선후책(善後策)을 강구하였다. 우선 봉조하(奉朝賀) 이유원(李裕元)을 전권대신으로, 공조참판 김홍집(金弘集)을 부관으로 임명해 하나부사 공사와 협상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7월 15일 이후 17일까지 3차 회담이 있었고, 양측 대표는 제물포조약 6조와 수호조규속약(修好條規續約) 2조에 각기 조인하였다. 이러한 선후교섭(善後交涉)이 체결되는 동안 민씨척족정권은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청군은 16일 난당 소탕을 구실로 왕십리와 이태원 방면에 출동해 군병 170여 명을 체포, 그 중 11명을 참수하였다. 하나부사 공사는 선후조약 1조에 의거, 흉도 체포를 요구하였다.

그리고는 포도청에서 송치한 손순길(孫順吉)·공치원(孔致元)·최봉규(崔奉圭) 등 3명을 효수했고, 이진학(李辰學) 등 3명은 유배시켰다.

이러한 타율적인 탄압 외에도 조선 정부에서는 난군 주동자들을 계속 처단했다. 이와 아울러 대원군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 조병창(趙秉昌)·조우희(趙宇熙)·이회정(李會正)·임응준(任應準)·정현덕(鄭顯德)·조채하(趙采夏)·이재만(李載晩) 등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군란이 수습되자, 고종은 7월 18일의 교서에 이어 20일에는 실정(失政) 8항목을 들어 자책하고 유신(維新)을 다짐하는 윤언(綸言)을 내렸다. 고종은 제도 개혁을 서둘러 7월 25일 기무처(機務處)를 설치하였다.

리훙장(李鴻章)이 추천한 중서사인(中書舍人) 마젠창(馬建常)과 독일인 묄렌도르프(Mӧllendorff,P.G.von)가 도착하자, 11월 17일과 18일 양일 사이에 통리아문과 통리내무아문(統理內務衙門)을 신설하였다.

이 두 아문은 12월 4일에 이르러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개칭되었다. 이 밖에 새로운 기구로서 주전소(鑄錢所)·기기국(機器局)·혜상공국(惠商公局)·기연해방사무(畿沿海防事務)·각항해관(各港海關) 등이 신설되었다.

특히, 정부기구의 재정비를 목적으로 감생청(減省廳)이 설치되었으며, 청군의 지도 하에 군제 개혁을 단행해 4영의 친군영(親軍營)을 창설하였다.

군란이 수습된 이후 고종의 유신 선언에도 불구하고 민씨척족정권은 구태의연한 정치풍토 속에서 정권 유지에만 급급하였다. 진정한 개혁은 실현되지 않았고, 다만 무정견한 개화정책만 되풀이되었다. 보다 주목되는 것은 군란 이후 청일의 압력이 가중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청나라는 군란 수습과정에서 보인 조처는 물론이려니와 이후 조선의 내정·외교 문제에 적극적으로 간섭해 이른바 종주권을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정부에는 척족과 개화파 관료계층 사이에 친청·친일정책의 두 부류가 생겨나 대립하여 결국 갑신정변이 야기되었다.

요컨대, 임오군란은 민씨척족정권이 추진한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개화정책에 대한 반발과 정치·경제·사회적인 모순을 배경으로 일어난 군민의 저항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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