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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업적,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힉스 보손, 페르미 연구소, 와인버그-살람 이론, 교통사고 사망,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Jobs9 2023. 7. 30.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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힉스 보손

이휘소 (李輝昭, Lee Hee-so)
1935년 1월 1일
1977년 6월 16일 (향년 42세)
국적 미국
경기중학교
서울대학교 (화학공학 / 중퇴)
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 / 학사)
피츠버그 대학교 (물리학 / 석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물리학 / 박사)

 

 

 

이휘소

 

미국의 물리학자.
한인 역사상 최고의 천재 과학자 중 하나로, 그는 20세기 후반 입자물리학에서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문제의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맵시 쿼크의 질량을 예측하여 그 탐색에 공헌하였다. 물리학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래 약 20년간 모두 110편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이 중 77편의 논문이 학술지에 게재되었다. 10회 이상 인용된 논문은 이 중 69편에 달하며, 500회 이상 인용된 논문은 모두 8편이다. 2013년 10월 이후 그의 모든 논문들은 13,400회 이상 인용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 1월 1일에 경기도 경성부 원정에 부부 의사인 이봉춘과 박순희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인은 번듯한 직장을 갖기 힘들었던 일제강점기인 점을 감안했을때 이휘소의 출생배경은 비교적 유복했다. 

1941년 7살의 나이로 경성 사범 부속 제1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원칙적으로 제1국민학교는 일본인들만을 위한 학교였지만 조선인의 입학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것은 아니어서 이휘소는 부속제1국민학교에 시험을 쳐서 입학했다.

어렸을 당시 독서를 좋아해서 동네 친구의 집에서 수시로 책을 빌려 보았는데 주로 과학, 만화, 추리소설, 문학을 읽었다고 한다. 

광복을 맞이하고 2년이 지난 1947년 경기중학교에 차석 입학하였다. 시험 성적이 늘 1등은 아니었지만 최상위권에 늘 속했고 그와 학교를 같이 다닌 동문들은 '국가대표 공부 선수' 라는단어 그를 표현하기도 하였고 화학반에서 활동하면서 선배들한테도 인정 받을 정도로 과학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한 질문에 다른 학생이 틀린 답을 이야기하면 이휘소를 불러 "네가 한번 말해 봐라" 라고 말하면 언제나 선생님이 원하는 답을 말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는 수업시간에 나오는 모든 내용을 미리 공부했고 선생들 또한 그가 알고있으리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이휘소의 나이가 중학교 4학년이 되던 해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피난 생활을 이어가는 도중 마산 장군동을 거처로 살며 마산중학교에 입학하였고 경기중학교가 부산으로 내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 중학교로 학교를 옮긴다. 이때부터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3시간 넘게 기차로 통학을 했으며 고등학교 2학년 과정을 마치고 대학입학 자격을 얻기 위해서 검정고시를 치른다. 

 


1952년 3과목만 치르던 검정고시를 무난히 합격한 이휘소는 입학 시험을 치르고, 대학입학 자격을 얻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300여명 중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부산 대신동에 내려와 있었는데 통학에만 6시간씩 허비할 수 없었던 이휘소는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수업을 한학기 받은 이휘소는 당시 한국의 시대상에 의해 기초이론보다 응용화학에 치중되어있는 화학공학보다 물리학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얼마 후 이휘소는 전공을 물리학으로 변경하기 위해 학교에 요청했지만 서울 수복 이후 태릉에 임시로 대학이 있던 상황이라서 전쟁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 등에 의하여 공과대학에서 문리과대학으로 전과를 불허받는다. 

이후 수차례에 걸친 물리학과로의 전과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지만 수석으로 입학한 데다가 외국에서온 물리학자의 오류를 지적한 일 까지 겹치면서 이휘소의 이름은 공대 전체에 알려졌다. 독학으로 물리학을 공부 하고 있던 이휘소는 주한미군 부인회가 후원하는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54년에 미국 마이애미 대학교로 유학(편입)가게 되었다. 

 


1955년 1월 26일 아침에 이휘소는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하였다. 그는 도쿄,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시카고를 경유하여 1월 31일에야 겨우 목적지 마이애미 대학교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휘소는 1955년 1월에 오하이오주 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과에 편입하였다. 편입 전까지 서울대학교에서 받았던 성적을 고려하여 모두 70단위가 인정됐는데, 70단위는 당시 미국 대학교 학제 기준 약 2년 반 정도에 해당하므로 3학년 과정에 바로 진학할 수 있는 셈이었다.

이휘소는 매일 아침 7시 이전에 일어나 7시 10분에 아침 식사를 하고, 8시부터 학교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또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서 과제를 모두 끝내고 자정이 넘어 기숙사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하였다.

미국으로 건너온 지 1년 반 만인 1956년 6월에 물리학과를 최우등(summa cum laude 숨마 쿰 라우데)으로 졸업하였고, 학과장 등의 추천으로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대학원에 진학하기까지 여름방학 기간은 아주 자유로웠는데 인디애나주의 퍼듀 대학교 대학원의 여름학교(summer school) 과정에 등록하여 공부하였다. 이때 자동차 운전도 배웠다.

이휘소는 여름방학이 끝난 1956년 8월부터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교육조교(TA) 장학생이어서 공학과와 의예과 학생들의 물리학 실험 TA를 담당하였다. 

이듬해 가을학기부터는 연구조교(Research assistant)와 교육조교(TA)를 겸하게 됐고, 실험 지도만 하지 않고 이제는 정식으로 강의 하나를 배정받게 되었다. 가을학기에 수강하던 몇 개의 강의 중 원자핵 이론 강의를 담당했던 시드니 메슈코프(Sydney Meshkov)는 이후 이휘소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무렵 이휘소는 물리학에서 본격적으로 입자이론물리학, 정확히는 양자장론의 전공을 희망했다. 

피츠버그 대학교의 박사 학위 자격시험에서 차점 합격자와 총점이 20점 이상 벌어지는 높은 점수로 수석 합격하였다. 이후 몸이 쇠약해져 기관지염으로 고생하였다. 몸을 추스른 후 바로 석사 학위 논문에 매진하여 1달여만에 완성하였다.

학위 논문 제목은〈산란행렬의 해석적 특성과 그 응용에 관하여〉(On the Analytic Properties of the S-Matrix with Some Application)이었는데, 이것으로 1958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석사 학위 논문을 좀 더 다듬어서, 그해 12월에 《피지컬 리뷰》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

이휘소는 이미 피츠버그 대학교의 박사 진급을 앞두고 있었지만 메슈코프는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며 그를 명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에이브러햄 클라인(Abraham Klein)에게 추천하였다. 클라인은 이휘소의 재능을 인정하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사 학위 자격시험인 예비시험을 면제해주었으며, TA 및 RA 장학금보다도 더 혜택이 좋은 해리슨 연구장학금(Harrison Fellowship)을 주선해주기까지 했다.

클라인은 당시 서른세 살의 젊은 교수였는데, 이휘소는 클라인과 함께 공동 연구를 수행하면서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에 조금씩 다가갔다. 그러다 1960년 11월에 〈이중 분산 관계에서의 양성 카온과 핵자 산란 현상의 연구〉(Study of Positive Kaon-Nucleon Scattering in the Double Dispersion Representation)으로 물리학 박사(Doctor of Philosophy) 학위를 받았는데 이때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그가 박사 학위증을 공식적으로 받은 것은 1961년 2월 4일이었다. 박사 논문 디펜스가 끝난 11월부터 1961년 8월까지, 이휘소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사후연구원 및 전임 강사로 임용됐다. 이후 이휘소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회원으로 초빙됐는데 그 임기는 1년이었다. 임기가 끝난 후부터의 직장 생활을 생각해야 했지만, 그는 클라인의 배려 덕분에 1961년도부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조교수로 임용됐다. 

이휘소는 조교수로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회원에 방문 연구를 할 수 있어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임기가 끝난 이후의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휘소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떠나기 전에, 미국 각지 대학의 교원으로 임용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될 또래 동료들과 함께 기념 삼아 군론을 아원자 입자 이론에 응용하는 것에 관한 공동 논문을 집필하였고,이를 《리뷰 오브 모던 피직스》에 기고하였다.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및 펜실베니아 대학교
1961년 가을, 이휘소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자연과학부의 연구회원이 됐으며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아인슈타인 가 31번지에 위치한 미혼자용 기숙 아파트에 살았다.
이휘소는 저녁 식사나 술자리 같은 사적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붙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무렵, 이휘소는 양-밀스 질량 간극 가설의 양자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듬해 2월에 뉴욕 맨해튼의 컬럼비아 대학교의 주임교수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가 이휘소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컬럼비아 대학교의 조교수로 채용하고 싶다고 제안해 왔다. 그러나 이휘소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오기 전부터 이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돼 있었기에 혼자 결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휘소는 자신을 조교수로 만들어줬던 클라인에게 연락하여 이 문제에 관해 상의하였다.
클라인은 이휘소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임기를 경력으로 인정하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복귀하는 대로 부교수로 승진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고, 이에 이휘소는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휘소는 필라델피아를 떠나 프린스턴으로 올 무렵 말레이시아 화교인 마리안 문 칭 심 (Marianne Mun Ching Sim, 沈曼菁)과 교제를 시작하였고,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근무할 때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의 주말에 필라델피아로 돌아가서 마리안과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다 1962년 3월에 두 사람은 약혼하였고 미국 이민국에서 이휘소의 영주권이 나오는 대로 결혼하기로 했다. 

이 해 5월 7일에 이휘소는 워싱턴에서 마리안과 결혼식을 올렸는데 당시 나이는 27세였다. 그녀 사이에 아들제프리 파운틴 리와 딸 아이린 앤 리를 두었다.

1962년 6월 초, 이휘소는 국제원자력기구가 주최하는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이론물리학 세미나(Seminar on Theoretical Physics)에 참석할 10인의 미국 대표단 일원으로 선출됐다. 트리에스테 이론물리학 세미나는 1962년 7월 16일부터 8월 25일까지 개최됐다.

이 무렵 이휘소는 젊은 연구자로서 미국 내에서 무시 못할 명성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큰 성과를 내지는 않았다. 그의 중요한 학문적 성과는 모두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60년에 중반에 이미 노벨상을 주어야 했다'거나 '내 밑에 아인슈타인도 있었지만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는 등 몇몇 소설들에서 나타난 묘사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사실과 다르다. 

1963년에 이휘소는 앨프레드 P. 슬론 재단의 연구회원직을 수행하였다. 또한 이 해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복귀했고 클라인의 약속대로 바로 부교수로 승진하였다. 당시 그에게는 세계 각국에서 열리는 중요한 물리학회를 비롯해 여러 대학과 연구소에서 강연 초청이 줄을 이었기 때문에 출장이 잦았다. 

1965년에 그는 다시 정교수로 승진하였는데 이는 비교적 빠른 편이었다.

 

 

뉴욕 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1965년 가을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양전닝이 이휘소를 찾아왔다. 그가 뉴욕 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석좌교수(Albert Einstein Professorship of Physics)로 옮겨가게 됐는데 이휘소에게도 함께 가자고 권유하기 위해서였다.

이휘소는 1966년 5월 16일에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 방문 교수로 초청돼 8월 31일까지 재직하였으며, 가을학기가 시작되고 9월 25일부터 양전닝 이론물리학 연구소의 정교수로 부임하였다.

당시에는 논문 원고를 제출하여 심사가 끝나 학술지에 게재될 때까지는 최소 반 년 정도가 걸렸으며 《Physical Review Letter》만 해도 최소 한 달 이상은 각오해야 했다. 하지만 입자물리학은 연구 템포가 그 어떤 학문보다도 빠른 편이었다. 그래서 논문 한 편을 학술지에 발표할 때도 그 논문이 나오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누군가 반론을 제기하거나 이 반론을 인용한 논문을 이미 썼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이 때문에 학술지에 실리기까지 마냥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관심을 가진 학자들에게 연구 내용을 미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때 당시 모든 물리학자들이 스탠퍼드 선형가속기 센터에서 운영하는 스탠퍼드 물리학 정보 검색 시스템에 사본을 보내 등록하고 그 곳에서 발간하는 프리프린트 리스트를 정기적으로 구독하였다. 그러다가 리스트에서 관심이 가는 논문을 발견하면 저자에게 엽서를 띄워 사본을 요청하고, 그러면 그 저자의 호의로 사본을 겨우 받아볼 수 있는 형태로, 논문을 받아보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당시 이휘소는 엄청난 분량의 프리프린트 모음집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를 바탕으로 세계 각국의 석학들을 찾아다니며 교류하고 공동 연구를 수행하며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1967년 11월에 스티븐 와인버그는 《피지컬 리뷰 레터》에 짧은 논문을 발표했고 이휘소는 논문 게재 심사를 의뢰받아 이를 읽었다. 와인버그는 이 논문에서 약한 상호 작용에 관한 설명을 시도하였다. 약한 상호 작용은 자연계의 네 가지 기본 상호작용 중 하나인데, 이러한 네 가지 상호 작용들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전자, 글루온 등의 게이지 보손이다. 

이들은 모두 게이지 대칭성이 있는데, 이 대칭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일단 게이지 보손의 질량이 0이어야 한다. 그러나 약한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약한 보손만큼은 질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며 이는 그때까지의 생각으로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또 약한 상호작용에 관해서는 현상으로만 정리가 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 무렵 스티븐 와인버그는 이 게이지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졌다고 하여 거기서부터 게이지 입자의 질량을 자연스럽게 얻으려는 독창적인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비록 그 논문에서 모든 계산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 방법이 맞을 거라는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었다.

이휘소는 1968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 그는 미국 시민이 된 직후 이듬해인 1969년까지 구겐하임 펠로십(1968년에 수여된 구겐하임 펠로십의 목록, No.128)으로 일했는데 이 기간에 그는 프랑스에서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내면서 파리 제11대학교에서 세미나를 갖기도 하고, 프랑스 고등연구실습원에서 자유롭게 연구를 수행했다. 

이곳에서 그는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지는 현상과 그에 의한 난부-골드스톤 보손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머리 겔만과 모리스 레비(Maurice Lévy)가 정립한 선형 시그마 모형의 재규격화에 관한 몇 편의 논문을 집필하였다. 

1970년 6월, 이휘소는 코르시카의 카르제스 여름학교에 강연자로 초청됐다. 이곳에서 이휘소는 시그마 모형의 자발적으로 부서진 대칭성과 그 재규격화에 관해 강의하였다. 당시 네덜란드의 젊은 대학원생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는 지도교수였던 마르티뉘스 펠트만과 함께 양-밀스 이론의 재규격화에 관해 연구하고 있었고,
그도 여기서 이휘소의 강의를 들었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훗날 회고하였다. 카르제스 여름학교에서 돌아오고 얼마 안 있어서는 소비에트 연방 키예프에서 열린 제15회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에 참가하며 공산권 국가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이 회의는 8월 26일부터 9월 4일까지 개최되었다. 1971년 전반기에 이휘소는 머리 겔만의 초청으로 로스앤젤레스 근처 패서디나에 있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의 교환 교수로 5개월간 재직하였다.

이 해 여름에 이휘소는 당시 한국과학원의 정근모 부원장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물리학 여름 학교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그의 구상은 상당히 구체적이었지만 대한민국에서 독재체제가 강화되는 것에 큰 우려를 표하면서 모두 없었던 일로 하는 편지를 보내게 됐다.  
위수령 발동, 학생운동 탄압 등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로 우리가 추진중인 여름 학교 사업을 재고하게 됩니다. (중략)… 여름 학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까 걱정이 됩니다. 참으로 난처한 입장입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하여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들에 실망되어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에서 이에 관한 초청이 오더라도 수락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엉뚱한 짓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국 국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1972년 초, 정근모에게 보낸 서신-

한편,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는 카르제스 여름학교의 이휘소에게서 얻은 아이디어를 이용하여 마르티뉘스 펠트만과 함께 양-밀스 이론의 재규격화에 성공하였고, 이를 1972년 여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입자물리학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하였다. 하지만 당시 이들의 설계는 일반적인 경우에 모두 적용되지 않았고, 당시 물리학자들이 쉽게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이휘소가 팔을 걷고 나서 이를 알기 쉽게 풀어쓰고 경로적분 형식 등의 다른 설계까지 확장하여 서술하여 그제서야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 엇호프트와 펠트만은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9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72년 10월에 박정희가 자신의 독재를 위한 유신 헌법을 선포하자 이휘소는 외국인 동료를 대하기가 부끄럽다고 가까운 한국인 친구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강경식 전 브라운 대학교 교수는 당시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부회장이었고, 가끔 모국 방문 학술회의나 하계 심포지엄의 연사 초청의 수락을 이휘소에게 권유하곤 했는데 그 때마다 이휘소는 박정희가 독재를 계속하고 있는 한은 말도 꺼내지 말라고 단호히 거절하곤 했다. 

이휘소의 대표적인 제자로 강주상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있다. 그는 이 무렵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 이휘소에게 박사 학위 논문 지도를 받고 있었고, 이휘소가 객원교수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 있을 때에도 한 학기 동안 그를 따라가서 연구하기도 했다. 이휘소는 미국 시민이 됐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관심은 한시도 버리지 않았고 강주상과 함께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자주 이야기하였다. 어느 날에는 핵무기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됐는데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피력하였다고 강주상은 기억하고 있다.
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휘소-

1972년 가을학기에 이휘소는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 게이지 이론에 관한 대학원 강의를 했는데 이 강의록을 어네스트 S. 에이버스라는 젋은 대학원생이 정리하여 이휘소와 함께 《피직스 리포트》에 단행본 형식으로 발표하였다.

 

페르미 연구소


이휘소는 1973년 9월에 페르미 국립 가속기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부임하였고, 이 해 9월부터 1975년 8월까지 브룩헤이븐 국립연구소 고에너지 자문 위원을 맡았다.
이 무렵에는 곳곳에서 그를 스카우트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는 1973년 5월 23일자로 그에게 물리학과 교수직을 제안한다는 편지를 보냈고, 페르미 연구소에서도 이론 물리학 부장(Head of the theoretical physics department)직을 제안하였다.

이휘소는 양전닝과 상의한 끝에 페르미 연구소로 이직하기로 했다. 그는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에 취임하면서 1974년 4월부터 시카고 대학교의 교수도 겸임하기로 했다. 봉급은 페르미 연구소에서 받고, 시카고 대학교에서는 일종의 아르바이트로 일하기로 했는데 이휘소만 원한다면 언제든 전임교수가 될 수도 있었다.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는 1966년 8월 31일부터 이휘소를 휴직 처리해주며 1974년 9월 25일부터 물리학과 선도 교수(leading professor)에 임용하는 특별 대우를 해주어그를 떠나보내는 아쉬운 마음을 대신하였다.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재직하며 이휘소는 이곳에서 거의 모든 이론 연구에 관여하고 실험 계획 수립에도 참여하였다. 

1974년 6월부터는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의 과학정책위원회 자문위원을 맡았다. 이 임기는 1978년 8월까지였다. 

1974년에 이휘소는 영국 런던에서 7월 1일부터 7월 10일까지 개최된 제 17회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에 참가하였다. 그는 전체 회의의 연사로 초청되어 전약 이론의 그 때까지의 발전 상황을 정리하여 발표했다. 이 무렵 와인버그의 1967년 논문은 상당히 유명해져서 전약 이론은 일반적으로 '와인버그 이론'이라고 불렸지만, 이 회의에서 이휘소는 전약 이론에 대한 압두스 살람의 공헌을 인정하고 자신의 발표에서 이 이론을 '와인버그-살람 이론'이라 불렀다. 이후 학계에서는 이휘소의 명명을 존중하여 와인버그-살람 이론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게 됐고, 이 덕에 압두스 살람은 스티븐 와인버그, 셸던 글래쇼와 함께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게 됐다. 

1974년에 이휘소는 20여 년 만에 잠깐 귀국을 한다. 미국 국제개발청 차관에 의한 서울대학교 원조 계획의 미국 측 평가위원 자격이었다. 평가위원들의 원조 타당성 조사 사업은 그 해 9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한 달 동안 진행됐다. 박정희의 독재 정권이 계속되는 한은 결단코 대한민국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던이휘소가 어떻게 USAID의 평가위원 위촉을 수락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한민국 측에서 추천하였다는 이유로 미 국무부가 설득했을 수도 있고, 그래도 최소한 한국의 과학 교육 만큼은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위 동료들의 권유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에서 귀국한 과학자가 억류된 사건이있었는데[카피차] 이휘소는 이 사건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박정희 독재정권 하의 대한민국 방문에 대해 더더욱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개인 자격이 아니라 미국 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박정희는 스탈린이 카피차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음대로 이휘소에게 손을 뻗지는 못할 상황이었다.그럼에도 이휘소는 만전을 기하여 신변 보장이 확실한 주한미군 용산기지옆의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에 묵기로 하였으며,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자신이 대한민국을 방문하는 동안 만에 하나 박정희가 자신에게 손을 댈 경우 반드시 즉시 도움을 요청해야 할 곳들의 연락처를 페르미 연구소의 비서에게 단단히 일러두고서야 겨우 대한민국으로 떠났다.

그는 1976년에 다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회원으로 초청됐으며, 또한 이 해에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됐다.

 

 

교통사고 사망

이휘소는 1977년 6월 16일 오후 1시 22분경, 일리노이 주의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당시 그는 페르미 연구소의 여름 연구 심의회에 참가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콜로라도주 아스펜(Aspen, Colorado)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과학과 기술》 1994년 1월호에 실린 〈내가 아는 고 이휘소 박사〉라는 강경식 전 브라운 대학교 교수의 특별기고문에는 당시 이휘소의 비서가 사고 직후 강경식에게 전화를 걸어 설명한 사고 당시 상황이 실려 있다.  

이휘소는 1977년 6월 16일 12시가 되기 전에 가족들을 태우고 콜로라도주 아스펜 시로 출발했고, 그로부터 약 1시간 30분 간 일리노이주 내의 고속도로 I-80의 아이오와주 경계로부터 약 30마일 떨어진 지점까지 정규속도 55마일로 운전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오후 1시 22분 경, 건너편 내부고속도로선을 동쪽으로 달리던 대형 트레일러의 타이어가 터지면서 중심을 잃어 조정을 못하고 중앙분리지역을 넘어와 서쪽으로 달리고 있던 이휘소의 차량의 운전석을 덮쳤고 이 사고로 이휘소 가족들은 경미한 부상을 입은 반면 본인은 즉사하고 말았다. 한편, 사고 경위를 이휘소의 동료의 전언 형식으로 보도한 1977년 6월 18일자 뉴욕 타임스 부고 기사는 이휘소 일가가 탄 차량의 대향 차선에서 달려오던 트럭의 타이어에 펑크가 났고, 트럭이 고속도로 중앙의 중앙분리대를 미끄러져 가다가 오후 1시 22분경에 마주 오던 이휘소 일가의 승용차와 충돌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KBS의 취재로 발견된 일리노이주 경찰서에 보관돼 있는 당시 사고 기록에 의하면 이휘소의 차량은 1975년형 닷지 다트로 폭이 약 20미터인 잔디밭 중앙분리지대를 가로질러온 36톤급 탱크 트럭과 충돌하였다. 당시 가해 트럭 운전자 존 L. 루이스는 트럭에서 큰 소리가 나더니(heard a noise), 트럭이 오른쪽으로 꺾였다가(swerved to right), 다시 왼쪽으로 꺾였다(swerved to left)고 진술했는데 대덕대학 자동차학부 이호근 교수는 그 큰 소리의 원인을 타이어의 펑크라고 추측하였다.
타이어의 펑크에 있어서, 큰 트레일러와 같은 경우에는 위험성이 더욱 커지고,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인들은 당황하면서 핸들을 과격하게 조작하거나 특히 급브레이크를 밟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차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진다.
-이호근(대덕대학 자동차학부 교수)-

또한 사고 기록에는 트럭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직각으로 꺾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 상황에서 트럭이 20미터를 미끄러져 대향 차선을 침범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호근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스팔트나 시멘트 도로에서의 마찰 계수는 제어가 가능하지만, 잔디 위에 올라타게 되면 거의 스케이트 타듯이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한번 미끄러지면 그 상황에서는 방향 전환 등이 절대 불가능하고 진행 방향으로 곧게 나간다고 봐야 한다.
-이호근(대덕대학 자동차학부 교수)-

또한 의도적으로 펑크를 내어 이휘소의 차를 덮칠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KBS 취재진과 대덕대학 자동차학부 측이 수차례에 걸쳐 의도적인 펑크 실험을 했는데 펑크 직후의 차의 궤적은 일정하지 않았다. 이 실험 결과와 함께, 이호근 교수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고속도로 중앙에 완충 지대가 노면 재질이 다른 잔디로 되어 있고, 또 대향차선에서 오는 차량의 속도도 불명확하고, 또 어느 차선으로 올지도 불명확하며(80번 주간 고속도로는 당시 왕복 4차선), 또 트럭 자신이 차선을 이탈해서 중앙분리대를 넘어가는 상황에서 반대편에서 오는 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을 지 차선을 변경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제 불능 상태로 대향 차선의 자동차를 의도적으로 가격해서 충돌시킨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호근(대덕대학 자동차학부 교수)-

 

 

사후
이휘소는 1977년 8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 받았으며, 2006년에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 의해 한국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소설가 김진명에 의하여 이휘소의 생애를 주제로 한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출판됐는데, 이에 대해 이휘소의 미망인(Marianne Mun Ching Sim, 沈曼菁) 등 유족에 의하여 소설에서 이휘소 박사의 일기, 편지 등을 무단 전재하거나 인용하여 저작권과 프라이버시가 침해되었다. 또 이휘소 박사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음에도 소설에서 대한민국의 핵개발과 관련하여 미국의 정보기관에 의한 공작에 의하여 살해된 것으로 묘사하여 고인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점을 이유로 소설의 출판 및 판매 금지 등 가처분신청을 제기했으나, 법원에서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업적

 

자발 대칭 깨짐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1964년에 이휘소는 그의 지도교수 에이브러햄 클라인과 자발적인 대칭성의 부서짐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소립자들은 게이지 입자라 불리는 입자들을 공유하고 상호작용하는데 이때까지 이론만으론 자연스럽게 질량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었다. 국소 게이지 대칭성을 갖는 라그랑지 안에는 게이지 보존의 질량항이 없고 설령 사람의 손으로 끼워 넣는다고 해도 국소 게이지 변환이 불변하지 않아서 대칭성을 위반하게 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런 상태가 되려면 질량이 없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편 20세기 중반, 일본 물리학자 난부 요이치로와 영국 물리학자 제프리 골드스톤 등에 의해 "반드시 대칭적인 상태만이 가장 안정적이지는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대칭적인 상태보다도 더 안정적인 상태가 있을 수 있고, 만약 그렇다면 자연계는 스스로 대칭을 깨서라도 더 안정적인 상태를 선택한다"는 자발적인 대칭성의 부서짐의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골드스톤의 정리에 의하면 자발적 대칭성 붕괴 이론에는 반드시 무질량 입자가 존재하며 그러한 입자를 골드스톤 보손이라 정의한다. 이휘소와 클라인은 그 예시로 당시 유명했던 초전도체와 하나하나 비교해가며 무엇이 골드스톤 보손이 되는지 논하고 결국 무질량 입자로서 추가적인 스푸리온(Spurion)의 존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 논문이 쓰여질 당시에는 힉스 보손의 존재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논문은 힉스 메커니즘과 같은 이론의 등장을 촉진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실제로 힉스 보손이라는 명칭을 처음 쓴 게 이휘소 박사이다.

1969년에는 자발 대칭 깨짐을 논할 때 장난감 모형으로 애용되는 시그마 모형의 재규격화에 성공하였다. 이런 가운데 당시 네덜란드의 대학원생이던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는 힉스 메커니즘을 양-밀스 이론에 적용하여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국소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지는 모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1970년 프랑스령 코르시카의 카르제스(Cargèse) 여름학교에서 이휘소의 강의를 들었는데 이때 그는 그의 학위 논문 주제였던 자발적 대칭성 붕괴인 비가환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에 대해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마침내 이에 성공하게 된다.

엇호프트는 이 업적으로 1999년에 당시 자신의 지도교수였던 펠트만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만약 이휘소가 생존해 있었더라면 이때 공동수상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데이비드 폴리처는 그의 2004년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이휘소가 전약 이론에 대한 엇호프트의 연구결과를 재해석하여 알기 쉽게 풀어 쓴 덕분에 당시 학자들이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폴리처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이휘소가 스토니브룩 대학교에서 1972년 가을학기에 강의했던 내용을 대학원생 어네스트 에이버스와 함께 정리해서 《피직스 리포트》에 단행본 형식으로 발표한 〈게이지 이론〉이라는 논문이다.

이것은 헤라르뒤스 엇호프트가 서울대학교 이수종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도 자세히 언급이 되어 있다.

 

 

참(Charm/맵시) 쿼크의 질량 예측
소립자는 베타 붕괴와 함께 그 전하를 바꾸게 되는데, 아주 드문 경우 전하가 변하지 않는 현상을 중성 보존류라 한다.

하지만 연구 결과 기묘도를 가진 입자가 베타 붕괴를 하면 언제나 중성 보존류가 없다는 흥미로운 결론이 내려졌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셸던 글래쇼, 이오아니스 일리오풀로스, 루차노 마이아니(Luciano Maiani)는 1970년에, 맵시 쿼크라는 또다른 쿼크를 가정하여 이를 설명하였다. 이에 이휘소는 1974년 여름에, 메리 게일러드(Mary K. Gaillard), 조너선 로즈너와 함께 〈참쿼크를 찾아서〉라는 논문에서 케이온의 섞임과 붕괴에 해당하는 양을 계산하여 맵시 쿼크가 존재한다면 그가 가질 수 있는 질량 범위를 예측하였다. 

이 논문을 지침서로 삼아 탐색 작업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 논문이 저널에 실리기도 전인 같은 해 11월 11일에,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의 버튼 릭터 연구진과 브룩헤븐 국립연구소의 새뮤얼 차오 충 팅 연구진에 의해 맵시 쿼크와 그 반쿼크가 결합해서 이루어진 제이/프시 중간자가 발견됨으로써, 맵시 쿼크의 존재가 간접적으로 확인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휘소 등이 논문을 저널에 기고하면서 프리프린트로써도 공개하였고, 맵시 쿼크 탐색 실험의 지침서로 사용된 것은 정식 출판된 논문이 아니라 프리 프린트였기 때문이다. 

이휘소가 USAID 평가위원으로 모국에 일시 귀국 직전 작성해서 프리프린트로 공개한 것이, 서울대학교 평가가 끝난 후 미국에 돌아와 채 두 달도 걸리지 않아 발견된 셈이다. 

제이/프시 중간자를 발견한 버튼 릭터와 새뮤얼 팅은 이 업적으로 1976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예측한 이휘소도 이 때 공동수상했어야 하지 않았냐 생각할 수 있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해당 논문은 이휘소 단독이 아닌 다른 공동저자까지 세 명의 논문인데, 노벨상의 공동수상은 세 명까지 가능하므로 릭터와 팅 외에 논문 저자 중 어느 한 명만 추가할 수는 없기에 수상할 순 없다.  

 

물리우주론적 리-와인버그 경계의 계산
1977년, 이휘소는 스티븐 와인버그와 함께 〈”무거운 중성미자 질량의 우주론적 최소 경계치”〉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참고로 현재까지 깨지지 않은 가벼운 암흑물질의 질량 경계 계산식이다. 

이것은 초기 우주에서 풍부하게 생산된 윔프들 중, 가벼운 윔프는 무거운 윔프보다 일찍 상호작용을 그만둔, 즉 우주의 온도가 보다 더 높았을 때에 상호작용을 그만둔 윔프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휘소와 스티븐 와인버그의 계산에 의하면, 윔프의 질량이 2 GeV보다도 가볍다면 그 흔적의 밀도는 우주의 스케일을 뛰어넘는, 즉 있을 수 없는 값을 갖게 된다. 윔프의 질량이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이 경계를 리-와인버그 경계라고 한다.

이 논문은 피지컬 리뷰 레터가 1977년 5월 13일에 접수하였고, 1977년 7월 25일에 제39권의 네 번째 이슈에 실었다. 그러나 이휘소는 그해 6월 16일에 교통사고로 숨졌기에 이 논문의 출판을 볼 수 없었고, 이 논문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이와 같은 인연은 스티븐 와인버그가 크리스 퀵과 함께 직접 피직스 투데이에 이휘소의 부고 논문을 쓰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크리스 퀵은 이휘소의 뒤를 이어 페르미 연구소의 차기 이론 물리학 부장이 되었다.

 

 

평가
"이휘소는 현대 물리학을 10여 년 앞당긴 천재이다. 이휘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부끄럽다"
197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압두스 살람의 수상 소감 中 


"불의의 사고로 타계하신 고 이휘소(B.W. Lee) 박사는 이 (게이지) 이론의 완성에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학자이며, 생존하셨더라면 당연히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셨을 분입니다. 전에 근무하던 프린스턴 대학교 물리학과 3층 복도에는 유명한 이론물리학자들 10여 명의 사진이 걸려있는데 그 한가운데에 이휘소 박사가 위치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사진 속 이휘소 박사가 후학에게 따뜻한 격려의 눈빛을 보내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게이지 이론과 끈 이론", 한국물리학회지

물론 실제로 이휘소 외에도 노벨상을 받은 사람의 업적보다도 훨씬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도 이른 죽음이나 불운 때문에 수상을 놓친 사람들은 있지만, 노환이나 병에 의한 죽음이 아닌 타인에 의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이 안타까운 점이다. 미국으로 귀화했기 때문에 노벨상을 탔다고 해도 한국인 수상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노벨상 수장자의 국적은 출생지로 기록하기 때문에 수상시 대한민국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압두스 살람/스티븐 와인버그/셸던 글래쇼(1979년 공동수상). 이휘소는 이들의 논문을 심사(와인버그), 재평가(살람)했다. 후에 이휘소는 와인버그와 가벼운 암흑물질을 공동연구하여 "리-와인버그 경계"(1977년)를 밝혀냈는데, 이것이 그의 유작이 되었다. 압두스 살람의 경우 "벤자민 리의 자리에 내가 있다."라고 수상 연설에서 말했을 정도로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는데 이휘소가 전자기력과 약력(약한 핵력)을 포괄하는 "경입자"연구의 문제점인 "재규격화"를 증명했으며, 이 연구 과정에서 살람의 공로를 재평가 한 것도 그였기 때문이다. 원칙상 죽은 사람에게는 노벨상을 수여하지 않기 때문에 이휘소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지 못했지만, 만약 그가 와인버그, 그래쇼, 살람이 상을 수상했던 1979년 이후까지 생존했다면 상을 수상했을 가능성은 높다. 

네덜란드의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는 대학원생 시절인 1970년, 후에 "Chiral Dynamics(비대칭 역학)"으로 출판되는 이휘소의 강의를 듣고 비가환 게이지 이론 깨짐의 재규격화에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리고 이 업적으로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그런데 엇호프트의 이런 논문을 물리학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풀어 쓴게 바로 이휘소다. 1973년 《피직스 리포트》에 당시 그가 지도하던 대학원생 에이버스와 함께 저술한 〈게이지 이론〉이 바로 그 논문.

 

정치 성향과 한국에 대한 애정
이휘소는 미국 국적을 취득한 뒤로도, 한국에 대한 관심을 놓치 않았다. 1971년 당시 한국과학원 부원장인 정근모 박사는 한국 물리학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물리학 여름학교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며 이휘소 박사를 초빙하려 하였다. 이미 유럽이나 미국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던 이러한 시도에 대한 이휘소의 답신 또한 긍정적이었지만, 그해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둘러싼 야당의 부정선거 의혹 제기와 박정희의 위수령 선포를 보며 그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파괴되고 독재체제가 강화되는 것에 큰 우려를 표하였다. 정근모 박사는 정권과 국민을 따로 생각해 한국과학발전을 도와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결국 1972년 초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모두 없었던 일로 하게 된다.
"위수령 발동, 학생운동 탄압 등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로 우리가 추진 중인 여름 학교 사업을 재고하게 됩니다 ...(중략)... 여름 학교의 책임을 맡게 된다면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그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일까 걱정이 됩니다. 참으로 난처한 입장입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하여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들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정부에서 이에 관한 초청이 오더라도 수락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엉뚱한 짓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한국 국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1972년 10월에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이휘소는 외국인 동료를 대하기가 부끄럽다고 가까운 한국인 친구들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그와 친한 과학자였던 강경식 전 브라운 대학교 교수는 당시 재미한인과학기술자협회 부회장이었고, 가끔 모국 방문 학술회의나 하계 심포지엄의 연사 초청의 수락을 이휘소에게 권유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휘소는 박정희가 독재를 계속하고 있는 한은 말도 꺼내지 말라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참고로 박정희는 이휘소가 사망한 1977년 이후인 1979년까지 정권을 유지하다 10.26 사태 때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휘소가 주도하는 여름학교는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영영 이루어지지 못했다. 

1974년에 이휘소는 20여 년 만에 일시 귀국을 하게 됐다. 미국 국제개발청 차관에 의한 서울대학교 원조 계획의 미국 측 평가위원 자격이었다. 이것이 이휘소가 유신 정권 치하의 한국을 방문한 유일한 사례다. 평가위원들의 원조 타당성 조사 사업은 그해 9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한 달 동안 진행됐다. 그러나 이휘소는 소련 학회에 참여한 러시아 출신 과학자들에게 벌어진 것 같은 납치를 두려워하여 한달 내내 미 대사관 직원 숙소에만 머물렀다. 

1977년 이휘소가 교통사고로 타계한 후 정부에서 훈장을 추서했다는 것을 "이휘소가 핵개발에 참여했다는 증거"로 제시하는 이도 있지만, 사실무근이다. 본래 정부에는 '한국에 직접 공헌한 바 없다'며 소극적이었던 것을 국내 과학계의 거듭된 탄원으로 성사된 것이고, 이마저도 유족들이 '유신 정권에 대한 고인의 비판적 입장'을 이유로 거부한 것을 이 박사의 모친을 통해 겨우 수여했다. 게다가 훈장 자체도 3등급인 동백장. 정부가 핵개발의 핵심 멤버로 여기는 중요 인사였다면 최고등급인 무궁화, 혹은 그 다음인 모란장 정도는 주었을 것이다. 

이휘소의 대표적인 제자로 강주상(1941.8.24 ~ 2017.1.6) 고려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가 있는데, 그는 이 무렵 스토니브룩 대학교에서 이휘소에게 박사 학위 논문 지도를 받고 있었고, 이휘소가 객원교수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 있을 때에도 한 학기 동안 그를 따라가서 연구하기도 했다. 이휘소는 당시에도 한국에 대한 관심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고, 강주상과 함께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자주 이야기하였다. 어느 날에는 핵무기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고, 그때 이휘소는 "핵무기는 언젠가 반드시 없어져야 하며, 특히 독재가 행해지고 있는 개발도상국에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소설 속의 왜곡된 이휘소
사실 이휘소 박사의 죽음에 대한 의혹과 루머는 당대에도 있긴 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사고가 일어난 지 딱 2주 지난 6월 30일, 국회 경제과학위원회의 대정부 질문 자리에서 신민당의 고흥문 의원이 이휘소의 사망에 “어떤 흑막이 개재되어 있지 않느냐”며,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수두뇌, 그중에서도 세계적인 두뇌를 늘 정부는 어떻게 보호하고 있는지" 최형섭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헌데 세월이 지나 90년대가 되어 소설가 김진명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에서 그를 이용후 박사라는 이름으로 등장시켰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이용후는 제3공화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의 중심 인물로 핵무기 설계도를 수술한 다리뼈에 숨겨서 들어오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또한 그의 죽음도 핵 개발을 저지하려는 미국의 음모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사실 이휘소를 핵물리학자 내지 핵개발과 연관지은 것은 김진명보다 공석하(1941~2011) 교수가 먼저로 그는 1989년에 '핵물리학자 이휘소'라는 소설을 출판했다. 이에 이휘소 유족의 반발이 있자 다시는 출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나, 김진명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내자 1993년 약속을 깨고는 《소설 이휘소》를 출판하였다.(...) 이후 2010년 '로스트 이휘소'를 출판하였다. 이러한 책들을 읽고 그 내용이 진실이라 믿는 몇몇 사람들이 있는데, 픽션은 픽션일 뿐으로 흥행을 위해 만들어진 소설을 보고서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소설들은 이휘소의 유족들이 소설의 내용에 강하게 반발해 출판금지와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였다. 당시 군사정권의 '자주국방'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낸 얘기로 고인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소설이 허위임은 인정하였으나 소설의 내용이 이휘소의 명예를 높였다고 볼 수 있다는 이유로 기각 명예훼손과 출판금지는 기각했다. 정작 군사독재정권과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이휘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지만... 결국 이런 법원의 판결에 매우 실망한 이휘소의 아내 심만청은 이후 한국 언론과의 접촉을 거부하였다. 이는 KBS 이휘소의 진실에서 KBS의 인터뷰 요청을 강하게 거부함으로써 그대로 드러난다.

이 이야기는 2022년 3월 16일자 당신이 혹하는 사이에서도 다뤄졌다.# 대부분의 반박 증거들은 상기된 내용들이 언급되었다가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는데, 그건 바로 당시 박정희의 측근이었던 제2비서실 비서관 김광모의 증언이었다. 김광모는 박정희가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박정희 대통령이 이휘소 박사에게 보낸 서신'을 제작진에게 건네받자 "다 새카만 거짓말입니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박정희가 '나라가 달려있다'라고 호소하는 식의 친서를 개인에게 보낼 사람이 아니었으며, 이휘소는 순수 물리학자이자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일한 학자였지, 핵무기 개발자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이휘소에 대한 모욕이라고 밝혔다. 그렇게 방송에서 이 음모론은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는 한마디로 정리, 종결시켰다.

 


스토니브룩 대학교 재직 시절 한국 유학생이 많았는데, 그 중에는 이휘소 평전의 저자이자 위에서도 여러 번 언급된 고려대 명예교수 강주상, '인연' 이라는 수필집으로 유명한 피천득 선생의 딸이며 보스턴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인 피서영, 한국 정보통신산업 발전의 계기를 마련한 카이스트 이사장 오명 등이 있다.


평생을 집과 연구실만 오갔던 엄청난 일 중독자였고 시간 아낀다고 옷 갈아입는 것도 귀찮아하여 속옷이 낡고 삭아버릴 정도로 오래 입는 버릇이 있었으며, 굉장한 골초라 파이프 담배를 즐겨 피웠다. 대학원생 시절 한인교회 목사에게 만찬에 초대받아 갔을 때 목사가 기도를 시작하자 바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도 유가족들은 이휘소를 가정적이고 따뜻한 남편이자 아버지로 기억한다고 인터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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