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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 준장, 1공수여단장, 제1공수특전여단장, 상급부대 육군특수전사령부, 육사 50기, 박희도, 12·12 부대

Jobs 9 2024. 12. 6.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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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 준장 (육사 50기)

 

제1공수특전여단
第一空輸特戰旅團
The 1st Special Forces Brigade (Airborne)

창설일
1958년 4월 1일 (제1전투단)
1959년 10월 1일 (제1공수특전단)
1972년 9월 11일 (제1공수특전여단)
상징명칭
독수리부대
소속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육군특수전사령부

여단장
준장 이상현(육사 50기)
위치
서울특별시 강서구 외발산동


육군특수전사령부(특전사) 예하 여단으로, 특전사 예하 부대들 중 최초로 창설되었으며 특전사의 모체부대이다. 서울특별시 강서구에 위치해 있고, 김포국제공항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제1전투단
6.25 전쟁 정전 이후, 육군본부 특전감실의 주도로 전쟁에서 활약한 KLO부대와 제8240유격첩보부대 출신 베테랑 대원들을 창설요원으로 차출하여 1958년 4월 1일, 백문오 대령을 지휘관으로 하는 2개 대대 규모의 '제1전투단'이 창설되었다. 부대원들은 같은 해 4월,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 중이던 미 육군 그린베레의 제1특전단에서 한국군 최초로 특수전교육과 공수교육을 수료하였다. 이후 한국군 최초로 공수 기본교육을 실시하는 등 특수전 훈련체계와 제도를 정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

 

이듬해인 1959년 4월 육군특수전부대령법이 제정되었고, 같은 해 10월, '제1공수특전단' (ROK Army the 1st Special Forces Group (Airborne))으로 부대명을 개칭하였다. 이후 국군 최초로 강하조장교육, 설한지 스키훈련, 산악훈련, 스쿠버 교육을 실시하며 특전부대로서의 역량을 강화해갔다. 또한 북한의 간첩 침투 사건에서도 활약했는데, 1968년 10월 30일 울진삼척지구 대간첩작전에 투입되어 21명의 공비를 사살하였고,이듬해인 1969년 흑산도 대간첩작전에도 투입되어 공비 15명을 사살하였다. 

흑산도 대간첩작전 당시 무장공비를 사살

1969년 8월 18일 특수전사령부가 창설되면서 특수전사령부 예하로 배속되었다.

 

제1공수특전여단
1972년 9월 11일 대령이 지휘관인 '단급' 부대에서 준장이 지휘관인 '여단급' 부대로 증편되었고, 부대명도 제1공수특전단(Group)에서 제1공수특전여단(Brigade)으로 개칭되었다.

여단으로 개칭된 이후 월남전에 참전하였는데, 맹호부대와 백마부대에 배속되는 형태로 파병되어 각종 특수작전을 수행하였다. 처음에는 수색대 등에 배속되어 활동했고, 나중엔 특전사 대원들로만 이루어진 맹호공수지구대, 백마공수지구대라는 별도 조직으로 파병되었다.  

1974년에는 전군 최초로 천리행군을 실시하였다. 이후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발생하자 박정희 대통령의 명령으로 1여단 소속 64명의 특전대원으로 이루어진 결사대가 보복작전에 투입되어 북한군 4개 초소를 파괴하였다. 당시 결사대는 북한군의 선제 공격이 있기 전까진 북한군을 사살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하고 투입되었다. 당시 투입된 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유서를 작성했고, 머리카락과 손톱을 잘라 남겼다고 한다. 다만, 북한군이 저항없이 도망가서 교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에 반란군으로 참여한 부대 중 하나로,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무력 점령하였다. 당시 여단장이 바로 하나회의 핵심 멤버 중 하나였던 박희도 준장. 

2024년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에 계엄군으로 참여한 부대 중 하나로, 국회 무력진압을 시도했다. 

 


"지휘관 차에 실탄 500개 싣고 갔다"...국회작전 1공수여단장 실명 인터뷰

 

이상현 1공수여단장은 어떤 상황인지 모른 채 국회로 향했습니다.

[이상현 / 제1공수특전여단장 : 이게 군사적인 상황인지 테러리스트 상황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부로 들어가서 인원을 밖으로 내보내라 임무를 받았죠.]

이 여단장은 상부로부터 실탄을 챙기란 지시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군사적인 상황은 아닐 것이라고 직감하고 대원들에게 실탄과 공포탄 모두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현 / 제1공수특전여단장 : 이거는 테러리스트나 이러한 상황이 아닐 것이다. 실탄·공포탄도 들고 가지 말고 탄약고에 그냥 보관하고 있다가 현장에서 운용 지시하면 그때 불출해라라고 지시했고, 저만 제가 한 실탄 500여발 제 차량에다가 우발 상황 대비해서 가지고 왔죠." 

작전의 이상함을 간파한 이 여단장은 민간인들과 충돌하지 말고, 총도 뒤로 메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상현 / 제1공수특전여단장 : 우리 부대가 12·12 부대의 오명을 씻기 위해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 다시는 이런 불명예에 주홍글씨를 가슴에 박아도 되겠습니까?] 

 

 

 

 

 

‘제1공수특전여단’도 계엄령 선포 뒤 국회 진입…1979년 12·12 반란 동원 부대

비상계엄 후 본관 창문 깨고 들이닥쳐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국회 본청 진입을 시도한 계엄군에 육군 특수전사령부(특전사) 예하 제1공수특전여단이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투입됐던 부대다.

4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국회에 투입된 군 차량 중 제1공수특전여단 제5602부대 차량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제1공수특전여단은 특전사의 모체로,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으로 참여했다. 이 차량은 서강대교에서 국회로 향하던 중 시민들이 가로막으면서 멈춰서 있었다.

국회 본청 진입을 시도한 계엄군 중에는 수도방위사령부 제35특수임무대대도 투입된 것으로 전해졌다.

계엄군은 4일 자정 무렵 국회 상공에 헬기를 타고 등장해 국회 본관 창문을 깨고 강제 진입했다. 이들은 진입 당시 야간 투시경을 소지하는 등 완전 무장한 상태였다. 실탄 지급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국회에서는 직원과 당직자, 보좌진 등이 사무실 집기류 등으로 계엄군 진입을 막으면서 대치가 이어졌다. 이후 국회에서 재석 의원 190명이 전원 찬성하며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된 뒤 계엄군이 철수했다.

윤 대통령은 전날 밤 10시27분쯤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밤 11시 무렵 제1호 포고령이 발표됐다. 하지만 국회 비상계엄 해제 요구에 따라 윤 대통령은 계엄 선포 6시간 만에 이를 해제하고 계엄사를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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